한 사람을 찾습니다.(눅 18:1-8)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참된 예배자를 찾으시고, 잃어버린 양 그리고 기도자를 찾으신다고 합니다. 성숙한 기도는 퍼주는 기도 즉 나만을 위한 기도를 벗어나는 중보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날 찾으시는 사람은 첫째, 기도의 사람입니다. 둘째,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들으심을 믿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기억하고 계심을 아는 사람입니다. 넷째, 낙심하지 않고 기도의 줄을 놓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보다 더 큰 일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단순한 기도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기도가 되길 원합니다. 성숙한 성도의 모습.(엡 3:7-9) 예수님을 믿으시나요? 예수님을 믿으신다면 예수님 믿고 변하셨는가?를 묻고 싶습니다. 성숙한 성도의 모습은 첫째, 자기 자신을 은혜로 설명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만 고백하는 사람은 무례하지 않고, 소리를 크게 내지 않습니다. 바울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답하였습니다. 둘째, 날마다 예수님 닮아가는 것에 힘쓰는 모습입니다. 존스토트 목사님은 하나님이 부르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집중해야 되는 것은 날마다 예수님 닮아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전히 뾰족하다면 영적 훈련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셋째 현재의 자리에서 충실한 모습입니다. 바울은 감옥에 있었지만 불평하지 않고 그곳에서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다윗이 양을 지키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을 지키는 자로 세우셨습니다. 이처럼 현재의 자리에서 충성하고 하나님 중심인 성숙한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광야에서 만난 하나님(출13:17-14:4) 광야에서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첫째, 언제나 앞서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들 앞에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먼저 아시고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둘째, 돌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의미없이 돌아가게 하지 않으십니다. 셋째 막다른 곳에 서게 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어떤 길로 인도하시든 그것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어떤 길이든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인도에 믿음으로 반응하시길 바랍니다. 이은성 목사

Thanks 성령님 충만하게 임하소서(엡5:15-21,행1:8) 성령으로 충만하십니까? 만약 성령 충만하시다면 어떻게 성령 충만함을 느끼십니까? 20세기 최고의 복음전도자인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위대한 사역을 했지만, 자신의 삶에서 더 많이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지 못했음을 아쉬워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사모하는 성도들에게 성령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에 더 이상 성령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이미 우리에게 오신 성령님을 인정하고 경험하며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서 이미 오신 성령님은 매일 매일 환영 받고 계신가요? 에베소서 5장에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믿었다면 변화된 삶이 있어야 하는데, 무엇을 하고 어떻게 변화되야 하는지를 9개의 명령형 동사로 말한 후에 성령충만을 받으라고 합니다. 성령 충만이란 성령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성령님의 지배를 받고 있느냐 입니다. 즉, 성령님의 지배를 받는 상태, 성령의 통제 속에 있는 상태입니다. 성경에서 성령충만을 2가지 단어로 쓰고 있는데, 첫째는 핌플레미(Pimplemi)입니다. 행2:4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한 임재에서 핌플레미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방언, 병고침, 예언 등 성령의 외적인 역사로서 어떤 사건 속에 일어난 성령님의 임재를 말합니다. 성령의 강력한 능력이나 감동을 체험한 “성령의 비상 충만”이라고 말합니다. 둘째는 플레루 “Pleroo”라는 단어로 사용됩니다. 엡5장 18절에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할 때 쓰인 단어로, 성령의 내적인 역사를 말합니다. 마치 스폰지가 물속에 담겨서 속까지 푹 젖을 때처럼 깊이 충만해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인격과 삶이 내적으로 나타나는 지속적인 성령님을 통해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령님 안으로 들어가서 일상적으로 성령의 지배를 받는 “ 성령의 통상 충만”이라고 말합니다. 초대교회 일곱 집사를 세울 때 자격 조건은 성령 충만 한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과 빌립처럼 성령의 다스림과 통제를 받는 사람을 세운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성령님으로 가득 채워지면 두려움, 걱정, 불안, 분노 미움등 사단이 주는 죄악된 생각들이 담을 넘어 들어올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성령충만을 원하십니까? 우리 교회가 뜨거운 성령님의 능력을 경험하길 원하고, 동시에 따스한 성령님의 다스림 안에서 변화되는 은혜를 날마다 경험하길 원합니다.

Yes! 성령님 인정합니다. 그리고 순종합니다. 엡 5:15-엡 5:21 인격적이신 성령님을 한주간 동안 얼마나 경험하셨나요? 성령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엡4:30에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하였고, 롬8:26에는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고 하였습니다. 20C 미국에서 성령의 사람이라고 불렸던 캐더린 쿨만 목사는 성령님을 슬프게 하지 말고 인격적으로 존중해드려야 함을 집회중에 자주 깨달았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성령님을 기쁘시게하고 있나요? 아니면 슬프시게 하고 있나요? 우리는 성령의 능력에 더 관심이 있지만 성령님은 성령님으로 충분하다고 고백하는 우리의 태도를 원하십니다. 성령님을 대하는 태도의 기본은 YES ! 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충만은 성령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말을 잘 듣는 내 마음과 영혼의 상태입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 익숙한 술취하는 태도와 성령충만한 태도를 대비시켜 설명하였습니다. 술에 취하면 술에 지배를 받듯이 성령에 취하면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자신을 맡기며 성령님을 의지하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엡5:19-20은 “화답하다, 노래하다 , 찬송하다 감사하다”의 4가지 동사가 “성령충만을 받으라”를 설명하는 분사로 사용되어 성령충만한 사람의 특징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의 첫번째 특징은 예배안에 감격을 누리는 것입니다. 1906년 LA 아주사 대부흥은 가난한 흑인 목사 윌리엄 시모어가 작은 예배처에서 드렸던 예배에서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성령 충만과 부흥은 반드시 주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예배의 부흥에서 시작됩니다. 둘째 성령충만한 사람은 입에 감사가 넘칩니다. 범사에 항상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를 회복하는 것은 곧 성령충만입니다. 셋째 “Yes! 성령님 순종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고 주위의 사람들에게 순종합니다.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할때 "성령론과 성령의 사역"이라는 과목을 가르치신 교수님께서 성령충만은 매일 실패하는 이들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셨습니다. 사역자가 되어 성령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 구하는 것아니라, 늘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성령충만입니다. 우리교회 성도님들이 성령 충만하여 예배에 감격하고 항상 감사하며 순종의 삶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명령1 거듭나라(요3:1-15) 미국 36대 대통령 지미 카터는 대통령 후보 연설 전에 신문기자들에게 “ 나는 거듭난 그리스도입니다. (I am a born-agian Christain)”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거듭남의 확신은 가장 중요합니다. 십자가를 생각하면" 죄사함 – 거듭남 – 구원"이 함께 떠오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우리의 거듭남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믿음을 여는 열쇠가 "십자가"라면 그 문을 여는 손잡이는 "거듭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으로서의 율법의 지식을 갖고 있는 지성인이었습니다.그런데 니고데모가 왜 예수님을 찾아 왔을까요?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가는데 ,사람들이 많이 모인곳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뽕나무로 올라갔던 삭개오의 모습과 비교가 됩니다. 니고데모는 자신이 배웠던 율법과 구약의 말씀을 떠올리며 예수님에 대해서 많은 생각과 고민의 밤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가 전한 하나님 나라는 무엇인가? 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요3장 3절에 예수님께서는 그의 고민과 질문을 미리 아시고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나다”는 헬라어< 아노센 >이라는 단어인데, "위로부터 나오다"는 뜻입니다. 거듭남은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정말 거듭나셨나요? 거듭나셨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계십니까?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분명하게 믿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그 방식대로 살아갑니다. 니고데모의 고민은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볼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가? 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야하고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거듭나는 것은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혹시 아직도 자신의 거듭남에 대해서 의심하고 확신하지 못하는 분이 계시다면 ,스스로 진지하게 고민해보시기 바랍니다. 뉴욕에 있는 리버사이드 교회에는 “그리스도와 부자 관원” 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림에서 부자 청년의 얼굴은 예수님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는데, 혹시 부자 청년과 니고데모처럼 거듭남에 대한 고백이나 인정이 없으시다면, 다시 신앙을 돌아보시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예수명령 2 회개하라 (막 1:14-15,눅15:7) 우리가 믿는 복음이라는 단어는 헬라인이나 유대인들의 입장에서<기쁜 소식>정도가 아니라, 왕의 명령 즉,<어명>을 의미합니다. 로마황제의 명령을 당시 사람들은<복음>이라는 단어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마가복음에 8번정도 쓰여 있는 복음이라는 단어는 명령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즉, 명령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세례 요한에게 회개의 세례를 받으셨는데, 이는 죄 없으신분이 죄를 대신 지시겠다는 의미입니다. 그 이후 성령에 이끌리셔서 광야에서 40일동안 금식하시고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1년뒤, 막1:14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셨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음을 알리셨습니다. 막1:15에 때가 찾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고 성취되는 때로서 구원역사를 결정적으로 전개할 중요한 시점을 말합니다. 지금 예배와 말씀을 통해서 살아서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있다면, 지금이 바로 카이로스의 때입니다. 복음의 시간은 카이로스의 때이고, 공간은 이미 여기 와있다는 현재 완료이면서, 동시에 계속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임한 하나님나라,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로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와 다스림을 경험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계속 나아가는 나라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먼저 회개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회개란 생각, 감정, 행동, 의지등을 완전히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고 예수의 복음이 우리의 삶을 사로잡으면, 진정한 회개가 일어납니다. 복음을 경험한 이들의 분명한 2가지 반응은<회개와 믿음>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된 적이 없고, 만약 삶에 회개의 특징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표를 떼어 버리는 것이 낫다고 충격적인 도전을 주었습니다. 최근에 미국에서 시작되어 한국과 전세계적으로 “ME TOO”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데, 저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회개에 대한 ME TOO 운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때가 차매 우리에게 복음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회개하라 복음을 믿으라는 명령에 순종하여, 늘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명령 2 회개하라 (막 1:14-15,눅15:7) 우리가 믿는 복음이라는 단어는 헬라인이나 유대인들의 입장에서<기쁜 소식>정도가 아니라, 왕의 명령 즉,<어명>을 의미합니다. 로마황제의 명령을 당시 사람들은<복음>이라는 단어로 사용했습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마가복음에 8번정도 쓰여 있는 복음이라는 단어는 명령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즉, 명령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입니다. 사역을 시작하기전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게 회개의 세례를 받으셨는데, 이는 죄 없으신분이 죄를 대신 지시겠다는 의미입니다. 그 이후 성령에 이끌리셔서 광야에서 40일동안 금식하시고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1년뒤, 막1:14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되었습니다. 갈릴리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셨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고 하셨습니다. 막1:15에 때가 찾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고, 성취되는 때로서 구원역사를 결정적으로 전개할 중요한 시점을 말합니다. 지금 예배와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있다면, 지금이 바로 카이로스의 때입니다. 복음의 시간은 카이로스의 때이고, 공간은 이미 여기 와있다는 현재 완료이면서, 동시에 계속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했지만 다음 정거장으로 계속 가는 것처럼 이미 임한 하나님나라,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경험하는 것이고, 계속 나아가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먼저 회개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회개란 생각, 감정, 행동, 의지등을 완전히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고 예수의 복음이 우리의 삶을 사로잡으면, 진정한 회개가 일어납니다. 복음을 경험한 이들의 분명한 2가지 반응은<회개와 믿음>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된 적이 없고, 만약 삶에 회개의 특징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표를 떼어 버리는 것이 낫다고 충격적인 도전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회개하기를 사랑해야합니다. 때가 차매 우리에게 복음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회개하라 복음을 믿으라는 명령에 순종하여, 늘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명령 3 내게로 오라 (마 11:25-30) 여러분은 정말 거듭나셨습니까? 참으로 회개하셨습니까? 진정으로 복음을 믿으시나요? 쉬운 질문이지만, 또한 부담스러운 질문입니다. 초등학교 때 친구교회를 방문했는데, 선생님이 언제, 어디서 구원받았는지를 모르면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알고보니 구원파 이단교회였습니다. 구원은 시간과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구원 받았다는 것을 확신하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고 하나님 나라를 경험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회개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마4:17 예수님의 첫 선포와 행2:38 오순절 베드로의 첫 설교를 합치면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서 세례와 죄사함을 받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모든 출발의 시작은 회개입니다. 마11:25-30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예수님의 명령이면서 구원의 초청입니다. 그런데 이말씀의 의도는 11장 앞부분에 가버나움과 벳새다와 고라신에서 복음을 전하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음을 보여주시기 위해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이적을 행하셨지만, 회개가 없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오직 <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 종려가지를 들고 호산나를 외쳤던 사람들의 숨은 동기는 정치적 해방자였습니다. 몇일이 안지나서 그들은 예수님께 실망하며 돌아섰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없는 가바나움을 책망하시면서 지혜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셨다고 합니다 . 여기서 어린아이는 부모의 말씀에 의존하고, 순수하게 따라 행동하며 자기를 낮추는 특징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시는 사람은 어린 아이처럼 말씀에 의존하고 주님께 순수하게 반응하고 자기를 낮추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어린아이처럼 주님께 달려가면 우리를 쉬게 하시고 우리의 멍에와 짐을 가볍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한국 전쟁 때 미군부대에서 심부름하던 소년 김장훈 목사님은 미군의 도움으로 미국에서 공부할 때, 요3:16 말씀으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너무 외로운 시절 예수님의 초청에 응답하고 주께로 나아가 귀하게 쓰임 받으셨습니다. 이와같이 내게로 오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초청에 어린아이와 같은 순전함으로 응답하여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새 힘을 얻고 참된 안식을 누리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예수명령4 나를 믿으라(요20:24-29)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거듭나라, 회개하라 , 내게로 오라, 나를 믿으라”명령을 하셨습니다. 일본의 신앙인 우찌무라 간조에게 대학생이 찾아와서 성경에 나오는 기적만 뺀다면 성경공부를 하겠다고 했을때, 그는 성경에서 기적을 다빼고 나면 성경의 앞표지와 뒷표지만 남을 것이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가장 믿기 힘든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고백하는 주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 중에 자주 등장하는 도마의 앞에는 의심 많은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첫날 만났지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고 제자들의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바로크 미술의 거장 카라바조가 그린 도마의 의심 이라는 그림에는 도마가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고 있는 장면이 묘사되어있습니다. 요 20:20에 손과 옆구리를 다른 제자들에게도 보이셨습니다. 제자들의 믿음이 약함을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고 주님의 부활을 믿고 있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연약한 믿음과 어리석은 의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과 여인들이 기뻐한 것 처럼 , 우리는 의심이 아니라 기쁨으로, 절망이 아니라 소망, 그리고 슬픔이 아니라 찬송의 반응이 있어야 합니다. 도마는 이전에 믿음 없는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요11장에 죽은 나사로를 살리러 가실때, 도마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로 가자”는 계시적 고백을 하였습니다. 요14:1-5 성만찬식 때, 예수님께서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고 말씀하실 때, 도마가 그 길을 어찌 알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도마의 질문을 통해 예수님께서 요 14:6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본문은 도마의 의심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믿음에 있습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자가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을 만져본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이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 부활의 주님을 전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부활의 주님을 나의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날마다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며 전하는 삶을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비전과 지혜로 살아가는 공동체(약3:13-18, 잠29:18) 우리가 살아가면서 방향을 잃고 무너질때가 있는데, 여행자가 북극성을 보고 방향을 찾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비전과 지혜를 주셔서 방향을 찾게 하셨습니다. 대형 선박이 밸러스트를 맞춰서 목적지에 도착하듯이 우리에게 밸러스트가 없다면 삶의 문제 앞에 좌초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삶의 구심점인 비전과 지혜를 통해 어떻게 아름다운 삶을 살 것인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참된 지혜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으로 살아가는 성도입니다. “아바타” 영화처럼 집안과 집 밖의 모습 그리고 주일의 모습과 주중의 모습간에 간격이 넓어질수록 겉모습이 자신인 것처럼 착각하며 살게 됩니다. 비전은 야망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각자에게 주신 사명 즉 비전을 이루기위해 이땅에 파송된 선교사처럼 살아야 합니다. 둘째, 참된 지혜자는 온유한 지혜로 살아가는 성도입니다. 약3:14-15에 온유한 지혜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하나님의 비전에 따라 순종하려는 겸손함에서 흘러나오는 지혜입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었고, 다윗에 손에 들린 작은 돌멩이가 철기문명의 블레셋 군대를 이겼으며, 모세는 광야의 떨기나무 같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능력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과 삶을 맞추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추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셋째 참된 지혜자는 공동체를 살리고 세워나갑니다. 약3:17-18에 성결, 화평, 관용, 양순, 긍휼의 열매는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공동체적입니다. 신앙은 홀로서기가 아닙니다. 세코야에 있는 거대한 나무가 거친 바람에 쓰러지지 않는 이유는 짧은 뿌리가 옆에 있는 나무 뿌리와 연결되어 서로 붙잡아주기 때문입니다. 작은 시험에 많이 흔들리는 우리는 서로 붙잡아 주고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줄 때 흔들리지 않고 강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결, 화평, 관용, 양순, 긍휼 선한 열매는 공동체를 돌보는 지혜자의 열매입니다. 공동체가 없으면 나도 자랄 수 없습니다. 세코야 나무처럼 서로 붙들고 위로 자라 올라가며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 하나님의 비전과 지혜로 살아가는 교회되시길 축복합니다

평범 그 이상의 삶 시리즈- 평범 그 이상의 가치(골1:3-8) 세상은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행11:26에 처음 등장한 < 크리스티아노스 > 이 호칭은 세상이 붙여준 우리의 <평범하지 않는 이름>입니다 . 여기에 우리 삶의 가치가 있고 <평범 그 이상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해마다 기업 브랜드의 가치를 평가하는데, 올해의 1등은 아마존, 2등은 애플, 3등은 구글, 4등은 삼성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의 가치는 (Name value) 어떻게 될까요?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라는 손봉호 교수님의 책 내용처럼 교회는 더이상 세상에 영향력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초등학교 동창들이 말한 그리스도인과 교회에 대한 평가도 아주 부정적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옥에서 골로새에 있는 가정교회에 편지를 보낼때도 골로새교회 또한 세상의 심각한 도전과 질문 앞에 있었습니다 .에바브라는 골로새교회를 세웠고 ,그는 신실한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평범 그 이상의 가치를 보여주었습니다. 평범 그이상의 가치는 믿음과 사랑 그리고 소망에 대하여 평가됩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인됨의 가치를 3가지 항목으로, 첫째는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여러분의 믿음은 어떠하셨습니까? 둘째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으로 여러분이 보여준 사랑을 어떻게 평가하나요? 셋째는 여러분이 이 세상을 살면서 하늘에 쌓아둔 소망은 무엇입니까?라고 평가합니다. CCC 대표이셨던 고김준곤 목사님은 모든 질문에 예수그리스도라고 답하는 백문일답을 통해 젊은이들의 믿음을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소유하시고, 예수님이 보기 원하시는 믿음을 보여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평범 그이상의 삶을 살려면 사랑하기를 미루지말고 사랑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야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하늘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이 땅에서 아무것도 없어도 하늘소망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방식대로 살아야합니다. 평범 그 이상의 삶은 우리안에 믿음, 사랑, 소망의 열매가 맺어 자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보여줄 사랑으로 증명되고 사랑은 소망을 담아냅니다 .아무리 좋은 악기라도 <기준음 >으로 조율이 하지 않으면 좋은 연주를 할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음으로 삼고 믿음과 사랑, 그리고 소망에 대하여 그리스도인 다운 삶을 통해, 세상 가운데 평범 그 이상의 가치를 나타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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