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SC 새벽큐티설교 사사기 3:1-7 >


[3:1-7]

(3:1) 여호와께서 가나안의 모든 전쟁들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3:2)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 두신 이방 민족들은

(3:3) 블레셋의 다섯 군주들과 모든 가나안 족속과 시돈 족속과 바알 헤르몬 산에서부터 하맛 입구까지 레바논 산에 거주하는 히위 족속이라

(3:4) 남겨 두신 이 이방 민족들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의 조상들에게 이르신 명령들을 순종하는지 알고자 하셨더라

(3:5)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3:6) 그들의 딸들을 맞아 아내로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고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

(3:7)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 3:1-11> 잊어버렸더라



오늘 사사기 3장은 사시기서를 이해하는 키워드를 제공하는 본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을 이방나라의 고통과 압제속에 내버려 두셨는지? 도대체 이러한 상황속에서 그들에게 무엇을 원하셨는지? 어떻게 해서 그러한 일들이 반복되고 있는지?을 알수 있는 그 이유와 원인을 알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병주고 약주는 분이 아닌 하나님이 사사시대 사람들에 진정으로 원하셨던 것이 무엇인지?을 발견할수 있는 본문입니다.


사사기의 이야기는 가나안땅으로 들어간 출애굽 2세대들이 죽고난 이후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가나안 정복과 정착에 지대한 공헌을 하며 영적 리더쉽을 발휘했던 소위 여호수아와 갈렙의 세대가 죽고 난 이후에 일어나는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2:10)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 알지 못했다 >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그당시 사사시대의 사람들의 영적인 상황을 아주 잘 말해주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쓰인 히브리어단어가 우리가 잘아는 < 야다 >라는 표현입니다. 바로 <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경험적으로 그리고 전인격적으로 알지 못했습니다. >


여기에 쓰인 < 알지 못했다 >는 표현이 오늘 본문에 7절에 이렇게 표현되었습니다.

(3:7)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여기서 쓰인 < 잊어버리다 >는 표현은 < 알지 못했다 >는 표현의 업그레드된 표현인다. 조금더 심한 표현입니다. 히브리어 < 샤카흐 >라는 표현은 < 잊어버리고 모른척하고 무시하고 그마음이 시들어 버렸다, to forget / to wither >는 뜻입니다.


(31:12) 내가 잊어버린 바 됨이 죽은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함 같고

깨진 그릇과 같으니이다

(102:4) 내가 음식 먹기도 잊었으므로 내 마음이 풀 같이 시들고 말라 버렸사오며

여호수아가 110세에 죽고 난 후에 일어나는 세대들... 일명 <하나님이 행하신 일과 하나님을 잊어버린 망각의 시대 >입니다. 그리고 < 그마음이 시들어 버린 세대 >입니다.

 

바로 사사기는 이러하는 하나님을 잊어버린 망각의 시대에서 그 마음이 시들어 버린 여호수아 이후 세대에 대한 하나님의 강한 심판의 메시지인 동시에 그들의 변덕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열심을 볼수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사기속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구원하는 12사사의 이야기나 재미있는 영웅담같은 에피소드들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묵상해야할 주제는 바로 < 하나님을 잊어버린 시대와 세대속에서 자기 백성을 기억하시는 하나님 > 그리고 < 변덕스러운 사람들을 여전히 변함없이 사랑하는 하나님 >을 묵상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러한 것을 보여주시 위해서 < 약점이 있는 자들, 비겁한 자들, 비루한 자들과 같은 이들을 부르셔서 그 놀라운 하나님의 자기 사랑을 보여주시는 도구로 사용하고 계십니다.

 

이 사사시대의 특징을 사사기의 저자는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음으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17:6; 18:1; 19:1; 21:25)라는 말씀으로 요약하였습니다. 


여기에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라는 말씀의 히브리어 원문은 < 사람마다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 >는 뜻으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나 다른 사람들의 안전과 행복문제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기 눈이 보기에(자기 관점에서) 옳다고 생각하면 그대로 행하는 시대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그 언약에 명시된 대로 언약을 배반하고 지키지 않으면 그대로 두시지 않지요? 그 때 징계의 수단으로 주변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나라들을 들어서 치셨습니다.

 

그 고통이 커서 고통스러우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찾고, 그러면 하나님이 사사를 세워서 구원해 주시는 일이 반복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가 사사기 안에 다섯 번(옷니엘, 에훗, 드보라와 바락, 기드온, 입다)이나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구조를 마이클 윌콕은 4R로 표현하였습니다.

그것은 반역(Rebellion), 보응(Retribution), 회개(Repent), 구원(Rescue)의 사이클입니다. 이것이 바로 < 망각의 시대 / 시들어 버린 세대 > 경험하는 전형적인 패턴인것이죠

 

그렇게 된것에는 분명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 가나안의 족속들을 그대 남겨둔 것 때문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 가나안에 들어간 후 그곳에 있는 족속들과 어떤 한 형태로든 사귀지 말라고 그들을 제하여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23:12-13]

(23:12) 너희가 만일 돌아서서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이 민족들을 가까이 하여 더불어 혼인하며 서로 왕래하면

(23:13) 확실히 알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의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의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마침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결국 오늘 본문에 그 남겨두었던 가나안 족속들이 그들의 시험꺼리가 됩니다.

(3:1) 여호와께서 가나안의 모든 전쟁들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3:4) 남겨 두신 이 이방 민족들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의 조상들에게 이르신 명령들을 순종하는지 알고자 하셨더라

 

여호수아 다음 세대들은 그들의 마음에서 하나님을 잊어버렸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잊어벼렸습니다. 그들이 가나안땅에 들어오는 동안 어떤 전쟁을 치루고 왔는지 <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해서 어떻게 싸우셨는지 > 알지 못했습니다. 사사시대의 사람들의 문제는 하나님을 몰랐전 자들이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주도하신 가나안 전쟁도 몰랐습니다.

 

오늘 본문에만 나오는 표현이 있습니다. < 가나안 전쟁 >이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여기에만 유일하게 등장합니다. 만일 여호수아 이후 세대들이 가나안 정복 전쟁에 대해 알았더라면 하나님을 이렇게 쉽게 배반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 세대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게 된 것에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해서 어떻게 싸우셨는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전세대의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전쟁을 겪어 보지 못한 사람들을 시험하기 위해 가나안 사람들 중 일부를 남겨두셨습니다.

 

우리가 여호수아서를 일으면서 우리가 놓지 말아야 할 관점은 < 여호와가 우리를 위해서 싸우신다 >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사사기서를 통해서 다시금 보여주고 싶은 메시지는 <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해서 싸우셨다 그것을 다시 보여줄테니 기억하라 >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이 이방나라와 전쟁을 치르는 것은 한사람 히어로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도구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막대기들입니다. 모든 전쟁의 시작과 마무리는 친히 하나님이 하십니다. 모든 전쟁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음을 망각의 세대, 시들해진 사람들에게 다시금 보여기 원하셨습니다.

 

이제 가나안 정복전쟁에서 남겨진 가나안의 4 무리가 있었습니다.

블레셋의 다섯 통치자들. 가나안 사람모두, 시돈 사람들, 히위사람들 >

 

사사기 1장에서 남겨둔 가나안 족속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소 사사기 1장에 나오는 가나안 족속들과 차이가 있습니다.


4종류의 가나안족속들은 일종의 상징성을 갖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4라는 숫자는 <동서남북 /세계와 세상>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총체성.포괄성>을 상징합니다.


게다가 블레셋 사람들은 남서쪽, 시돈사람들은 북서쪽, 히위사람들은 북동쪽, 그리고 가나안 사람들은 남동쪽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 인가? 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사람들 사이에서 포위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하나님은 가나안에 정착해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그 마음이 시들해져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 시험하기 원하십니다. >

 

오늘 3장 초반에 우리가 또하나 주목해야 할 표현은 < 시험하려 하시매, 시험 하사 >라는 표현입니다. 바로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사사기서를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을 알려줍니다. <반역-보응-회개-구원>이라는 이 패턴 반복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보기 원하셨든지? 왜 이방나라를 들어 이스랑레의 심판의 도구로 쓰시는지를 알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 시험하매 >라는 말은 앞에서 < 안다 >는 말과 관련이 됩니다.

보통 학교에서 시험을 칠 때 선생님의 시험의 목적은 학생이 그 답을 아는지 모른지를 판가름하고 학생들이 얼마정도 아는지를 살펴보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3:2)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 두신 이방 민족들은

 

하나님은 이 사사기에 등장하는 많은 고통과 고난을 통해서 그들이 <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싸우시는 전쟁이 있음을 아는지 모르지를 보기 원하셨습니다. >

그리고 그들이 잊어버렸던 마음을 돌이키고 하나님을 다시금 기억해 내기를 바라셨습니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에게 충격요법으로 기억이 돌아오게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 시험 하시매 >라는 표현하고 < 가르쳐 알게 하려하사 >라고 말씀하고 있는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묵상하게 할까요?


1/ 우리안에 하나님을 잊어버린 영적인 기억상실증에 걸리지 않았는지 돌아 보아야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세대 뿐 아니라 우리 다음 세대 계속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세대가 일어나도록 해야합니다.

 

2/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가 어느 정도 하나님을 알고 있는지 시험하십니다. 우리의 삶의 고난과 고통속에서 우리는 더 하나님을 기억해내고 그분이 행하신 일들을 고백할수 있어야합니다. 우리가 당하는 많은 고난의 원인과 이유를 찾기 전에 우리는 그속에서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러면 분명 우리의 고난과 어려움을 이유를 분명히 할게 될것입니다.

 

3/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알게 하시고자 하는 것이 있음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자신을 가르쳐 알게하십니다.


[86:11-12]

(86:11)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86:12)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오리니

GSC 새벽큐티설교 <여호수아 22:1-9>



[22:1-9]

(22:1) 그 때에 여호수아가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를 불러서

(22:2)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너희가 다 지키며 또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일에 너희가 내 말을 순종하여

(22:3) 오늘까지 날이 오래도록 너희가 너희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그 책임을 지키도다

(22:4) 이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대로 너희 형제에게 안식을 주셨으니 그런즉 이제 너희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요단 저쪽에서 너희에게 준 소유지로 가서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되

(22:5) 오직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명령과 율법을 반드시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의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니라 하고

(22:6)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축복하여 보내매 그들이 자기 장막으로 갔더라

(22:7) 므낫세 반 지파에게는 모세가 바산에서 기업을 주었고 그 남은 반 지파에게는 여호수아가 요단 이쪽 서쪽에서 그들의 형제들과 함께 기업을 준지라 여호수아가 그들을 그들의 장막으로 돌려보낼 때에 그들에게 축복하고

(22:8)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많은 재산과 심히 많은 가축과 은과 금과 구리와 쇠와 심히 많은 의복을 가지고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서 너희의 원수들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의 형제와 나눌지니라 하매

(22:9)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 실로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떠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받은 땅 곧 그들의 소유지 길르앗으로 가니라


< 22:1-9> 명령하신대로




이제 여호수아 22~24장까지는 가나안땅을 정복하고 나누는 일을 마무리하는 일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과 같은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진행된 모든 전쟁은 자신들이 주도한 전쟁이 아니었으면 오직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전쟁있었다는 것을 다시금 인정하는 고백들이 담겨있습니다. 특히 이 싸움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싸운신 싸움이며 우리는 오직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주신 명령을 지키고 행했을 뿐이라는 것을 고백할 뿐이라는 것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이 여호수아서를 기록하고 우리에게 묵상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이면 기록 목적일것입니다. < 여호와와 함께 싸우는 것, 여호와의 전쟁을 어떻게 치루는지를 배우는 것 >입니다.


이제 여호수아서 마지막에 접어 들면서 여호수아서는 놀랍게도 처음 여호수아 1-5장과 대칭을 이루는 여호수아 22-24장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처음 여호수아 1-5장은 지도자로서의 여호수아가 등장하고 그를 세우고 가나안에서의 언약적 삶을 출발하는 것을 준비시키십니다.

이제 마지막 여호수아 22-24장은 이제 그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일이 마무리되면서 정복한 가나안에서의 삶을 어떻게 살것인가?을 말씀해주시고 있습니다.

 

항상 우리의 신앙생활의 고민은 < 주님과 함께 어떻게 우리의 삶을 시작할것인가>< 주님과 함께 어떻게 우리의 삶을 마무리할것인가 >에 대한 고민인 있어야합니다. 시작과 마무리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항상 우리는 첫 모습과 뒷 모습이 어떻게 될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항상 우리는 첫 등장과 마지막 퇴장이 어떻게 될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여호수아 1장에서 여호수아의 등장이라면 여호수아 22장부터는 여호수아의 퇴장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22장은 12지파의 가나안땅의 분배와 도피성을 만드는일, 레위지파의 성읍을 분배하는 것을 끝낸 여호수아는 요단강 동편에 거하는 르우벤, , 므낫세 반 지파를 그들의 땅으로 돌려 보내면서 가나안 족속들을 진멸하기 위해 앞장서서 싸운 그들의 수고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221장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 그때 >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22:1) 그 때에 여호수아가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를 불러서

 

<그때>는 바로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거업을 얻게 된 때를 말합니다.

(32:29)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이 만일 각각 무장하고 너희와 함께 요단을 건너가서 여호와 앞에서 싸워서 그 땅이 너희 앞에 항복하기에 이르면 길르앗 땅을 그들의 소유로 줄 것이니라

 

이 때에야 비로소 두지파 반은 그들의 땅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두지파 반이 그동안 그러한 전쟁을 치루었던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계속 반복되는 2개 단어속에서 그 이유를 찾습니다. < 명령과 순종 >이라는 두 단어를 주목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너희가 다 지켰다 그리고 끝까지 순종했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이들 두 지파 반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편안히 거주하도록 가나안 족속을 물리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이 명령은 모세가 죽은 후에도 모세의 명령에 순종하여 끝까지 그들의 형제를 도왔습니다.

[32:20-22]

(32:20)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만일 이 일을 행하여 무장하고 여호와 앞에서 가서 싸우되

(32:21) 너희가 다 무장하고 여호와 앞에서 요단을 건너가서 여호와께서 그의 원수를 자기 앞에서 쫓아내시고

(32:22) 그 땅이 여호와 앞에 복종하게 하시기까지 싸우면 여호와 앞에서나 이스라엘 앞에서나 무죄하여 돌아오겠고 이 땅은 여호와 앞에서 너희의 소유가 되리라마는

 

바로 여호수아는 이 두지파 반을 자신의 땅으로 돌려보내면서 평가하기를 그들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주신 명령을 지키시고 순종한 사람들이라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들의 수고과 이들의 행동을 기념하기 위해서 오늘 읽은 본문은 아니지만 10-11절에 요단 강가에서 <볼만한 큰 단>을 쌓습니다.

 

이러한 <보기에 큰 단>을 쌓았다는 소식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우상을 섬기는 것은 아닌가? 자기를 위해 단을 쌓은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위를 했다는 오해를 불러 일으킵니다. 이 두지파반이 큰 단을 쌓았다는 말을 듣고 이들을 오해해서 싸우기위해서 다른 지파사람들이 실로에 모이게 됩니다.

 

이것에 대해서 나중에 두지파 반은 변호하게 됩니다. 결국 그 오해가 풀리게 됩니다.

(22:29) 우리가 번제나 소제나 다른 제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성막 앞에 있는 제단 외에 제단을 쌓음으로 여호와를 거역하고 오늘 여호와를 따르는 데에서 돌아서려는 것은 결단코 아니라 하리라

(22:34)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 그 제단을 엣이라 불렀으니 우리 사이에 이 제단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라 함이었더라

 

재미있는 해프닝으로 끝나는 에피소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해프닝속에서 주목할수 있는 것은 초기 이스라엘백성들의 중심에 있었던 < 하나님에 대한 열심 >입니다. 이 열심은 <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열심이었고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에 대한 열심 >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두지판 반을 자신들의 수고을 마치고 돌려 보내면서 이렇게 축복하고 있습니다. < 여호수아 222-5>을 요약해보면


< 너희가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은 다 지켰고. 순종했고 그래서 형제를 떠나지 않았고 그 책임을 지켰다. >라고 인정해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탁합니다.

 

(22:5) 오직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명령과 율법을 반드시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의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니라 하고

 

오늘 이 여호수아의 인정과 당부속에는 < 신명기 > 전체의 요약이 담겨있습니다. 일종의 신명기적 당부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신앙에서 놓치 말야야 할 것 몇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에 신실하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의 약속을 통해서 자신의 신실함을 보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령만하고 순종만 요구하시는 일방적인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깊은 관계속에서 자신의 약속을 보여주시고 그것을 이루시기 위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싸우시고 그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모여주십니다.

 

2/ 하나님께 우리의 신실함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절대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명령하고 요구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꺼이 그 명령에 순종하고 지키는 반응을 요구하십니다. 서로에 대한 신실함을 요구하는 행위가 믿음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신실함과 우리가 그 구원의 신실함을 의심하지 않고 신뢰하는 신실함의 서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과 우리는 계속 그 신실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관계해야합니다.

오늘 본문에 여호수아가 두지파 반에게 부탁하는 당부속에는 <관계적 용어> 쓰여있습니다. < 사랑하고.. 행하고.. 지키며,, 친근히 고.. 마음과 성품을 다하고 섬기라 >

 

여기서 < 친근히 하고 >라는 표현이 재미 있습니다. 이 단어는 < 다바크 >인데 < 달라붙다. 굳게 결합되어 있다, 함께 머물러 있다 > 의미가 있습니다.

 

어제 서점에서 우연히 읽은 책 <이해할수 없는 하나님 사랑하기> 속에서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 믿음을 갖는 것은 사랑에 빠지는 것과 같다. 처음엔 미심쩍은 수용은 이해로 바뀌고 이해는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진정한 수용으로 바뀐다. 우리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지만 그 다음 순간 그 관계를 부여잡고 힘겹게 씨름한다. 우리는 꼼짝없이 빠져들지만 그 다음 순간 두려워 도망치고 싶어 한다. 우리의 믿음은 의심으로 신뢰는 혼란으로 친밀감은 버림받았다는 느낌으로 바뀐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게 쉬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셨을 뿐 아니라 무모하게도 우리와 사랑에 빠지셨다. 우리의 창조자는 태초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피조물을 쫓아 다니셨고, 우리 대신 죽기까지 하셨다. 그분은 우리를 신부라 부르시 자신을 신랑아라고 부르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깊은 친밀함을 원하신다.


이것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해야할 이유이다. >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우리는 이 세상속에서 여호와 함께 그 가나안의 정복전쟁을 치루는 것과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전쟁을 치루고 있는 것이죠. 이러한 삶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신실함을 부여잡고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신실함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이며 그것인 신앙입니다. 또한 그분과 더 가까이 대하는 것입니다.

내일 본문이기는 하지만.. 여호수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가까이 하기를 오늘까지 행한 것 같이 하라 >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를 사랑하기고 친근히 대하는 그것이 우리가 오늘 경험해야할 우리의 삶의 내용이며 신앙의 내용입니다

GSC 새벽큐티설교 <여호수아 7:1-12>



[7:1-12]

(7:1)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7:2) 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사람을 벧엘 동쪽 벧아웬 곁에 있는 아이로 보내며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올라가서 그 땅을 정탐하라 하매 그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를 정탐하고

(7:3)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하지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이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 하므로

(7:4) 백성 중 삼천 명쯤 그리로 올라갔다가 아이 사람 앞에서 도망하니

(7:5) 아이 사람이 그들을 삼십육 명쯤 쳐죽이고 성문 앞에서부터 스바림까지 쫓아가 내려가는 비탈에서 쳤으므로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된지라

(7:6)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7:7)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쪽을 만족하게 여겨 거주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이다

(7:8) 주여 이스라엘이 그의 원수들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7:9) 가나안 사람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7:10)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7:11)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

(7:12)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의 원수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그들도 온전히 바친 것이 됨이라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 7:1-12> 아간의 함정

 

우리는 여호수아서를 통해서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의 주리라 약속한 가나안땅을 어떻게 정복하며 어떻게 나누는지를 보게 됩니다


여호수아서는 <전쟁과 정복의 기록>이 담겨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전쟁의 기록속에서 놓치지 말아야할 중요한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전쟁을 누구 주도하고 있으면 이 전쟁의 주인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출애굽한 1세대 이스라엘백성들이 40년광야시대를 지나오면서 철저하게 그들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인도과 도움을 받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출애굽 2세대들을 중심으로하는 요단강넘어 약속의 땅 시대를 들어서면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훈련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것은 < 자신의 힘과 노력이 치우는 자신의 전쟁이 아닌 전적으로 여호와의 힘과 능력으로 치루는 여호와의 전쟁 >을 경험케하는 것이 었습니다.

 

바로 그 대표적인 전쟁이 < 여리고 전쟁 >이있고 < 아이성 전쟁 > 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소위 전쟁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너무나도 전쟁같지 않은 전쟁을 치룬 여호수아 6장에 < 여리고 전쟁 >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이 전쟁은 그동안 경험했고 알아왔던 상상이상의 전쟁이었으면 어떤 칼과 창이나 전쟁무기나 전략이 사용되지 않는 한번도 해본적도 경험해보지 않은 전쟁을 치르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냥 전쟁이라고 보다는 < 여리고 기적 >이라고 할 큼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7장 이후에 < 아이성 전쟁 >을 치루어야 했습니다. 이 아이성은 여리고에 비하면 너무나도 쉬운 전쟁같았습니다. 능히 자신들의 힘만으로 거든히 이길수 있는 전쟁같았습니다. 오늘 본문 3절에 < 아이성을 정탐한 이들의 보고 >를 보면 그러한 중심을 옅볼수 있습니다.

 

(7:3)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하지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이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 하므로

 

여기서 <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 >라는 히브리어 원뜻은 < 귀찮게 / 피곤하게 하지 말자 . 너무 누워서 떡먹기같고 가소롭다 >는 의미입니다. 얼마큼 아이성을 쉽게 생각했는지 알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이 여리고성 전쟁의 대승과 아이성 전쟁의 패배에서 < 아간의 범죄 >가 있습니다. 그 결과 < 아골골짜기의 대 참극 >이 일어나죠.

 

오늘 본문의 내용은 우리가 너무도 잘아는 내용입니다. 여리고성 전쟁과 아이성의 패배 사이에 있는 < 아간의 범죄 >, 이것은 인간의 탐욕과 거짓된 마음이 어떠한 결과를 만들어내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을 순종치 않은 이들의 결과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샘플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고 연구하다가 재미있는 것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아이성 아간 아골골짜기>3이름들에는 묘한 연결고리가 있다는 것을 알수 있었습니다. 3이름의 뜻입니다.

 

<아이>라는 히브리어 뜻은 < 폐허, 페허 무더기 >라는 뜻입니다.

<아간>라는 히브리어 뜻은 <괴롭히는자, 근심과 투통거리>라는 뜻입니다.

<아골>이라는 히브리어 뜻은 < 근심, 괴로움, 소란 >이라는 뜻입니다.

마치 워드플레이를 하듯이 이 3단어는 묘한 연결고리를 갖습니다.

 



모잘 것 없는 폐허같은 <아이성>을 정복하려 했지만 괴롭히는자의 <아간>으로 인해 결국 근심과 괴로움의 <아골>을 경험하게 되는 것... 바로 이것인 하나님이 없는 인생들의 한 모습을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이아침에 < 아이-아간-아골 >사이에 머물수 있는 우리의 삶에서 빠지기 쉬운 <아간의 함정>에 대해서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1 아간의 함정 > 이 전쟁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이 잊어버리는 함정입니다.

 

철저하게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복전쟁은 여호와하나님이 주도하십니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백성이 해야할 반응은 전적인 의존이며 전적인 순종뿐이었습니다. 출애굽의 시대를 끝내고 이제 요단을 건너 가나안의 시대를 여신분은 여호와 하나님이 이십니다. <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신분도. 내가 지시할 땅에 들어가도록 길을 여신분도, 내가 지시할 땅을 나누어주신분도 > 여호와 하나님이 이십니다.

 

가나안땅의 첫성인 여리고성을 승리하고 그 승리에 도취된 이스라엘 백성중에서 < 아간 >은 출애굽 2세대의 젊은 지도자였습니다. 아간은 이스라엘 민족의 12지파 중에서 가장 중심에 있는 유대지파에 속한 명문 세라 족속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아간은 여호수아 대장군 당시 유대 지파를 진두에서 지휘하고 있었던 정치적 지도자로서 장로라는 직분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유다 지파 백성들을 하나님 말씀대로 이끌어 가야 할 책임 있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여리성 전쟁이후에 여호와의 전쟁에 대한 감사보다는 자신이 이 전쟁을 치룬것에 대한 일종의 보상심리가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리고성 전쟁 도중 자신의 마음에 든 물건 몇 개를 훔쳐 사유화했습니다.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 200세겔과 50세겔 나가는 금덩이 하나를 몰래 훔쳐 자신만이 알고 있는 비밀 장소에 감춘 것입니다.

 

그는 이 전쟁의 주인이 자신인것처럼 착각하는 함정에 빠졌습니다.


2 아간의 함정 > 이 전쟁의 목적은 땅의 정복보다 땅의 거룩에 있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문장을 찾는다면 < 온전히 바치 물건 >이라는 말입니다. 이 것은 1절에 211, 12절에 2, 13절에 215절에 계속해서 쓰여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8번이나 마치 의도적으로 강조하면서 쓰여지고 있습니다.

 

바로 < 온전히 바친 물건 > 이라는 단어 < 헤렘 >의 뜻은 < 하나님께 완전히 바쳐진 것, 인간이 건드리면 저주받는 것, 멸망받는 것 >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 제사의 용어 >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을 <헤렘 /온전히 바친 물건 >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관점 하나. 이 가나안 정복전쟁은 세상적인 전쟁과는 다른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그것은 < 이 전쟁은 하나님께 드리는 일종의 제사 >입니다. 그래서 모든 주도권이 전쟁을 치루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머무시고 거주할땅을 새롭게 하시고 성결케하십니다.

 

(7:12)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의 원수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그들도 온전히 바친 것이 됨이라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7:13) 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거룩하게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일을 위하여 스스로 거룩하게 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아 너희 가운데에 온전히 바친 물건이 있나니 너희가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가운데에서 제하기까지는 네 원수들 앞에 능히 맞서지

 

이러한 <헤렘/여호와께 온전히 바쳐진것>이기 때문에 그 물건을 마음대로 다루지 말하고 말씀하십니다.

(6:18) 너희는 온전히 바치고 그 바친 것 중에서 어떤 것이든지 취하여 너희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바치는 것이 되게 하여 고통을 당하게 되지 아니하도록 오직 너희는 그 바친 물건에 손대지 말라

 

그리고 < 헤렘의 규정 > 때문에 안타깝게도 범죄하고 타락한 가나안 족속을 철저하게 쫓아 내시고 멸하십니다.

가나안 민족을 하나님께 헤렘으로 드린다는 것은 그들을 진멸한다는 의미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해했다고 보입니다. 즉 가나안 사람들을 온전히 진멸해야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져야할 '헤렘'이었기 때문이라는 '헤렘 율법'을 따른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가나안 백성에 대한 진멸 부분은 너무 잔인해보여서 믿지 않는 이들이 늘 비판적으로 질문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23:33) 그들이 네 땅에 머무르지 못할 것은 그들이 너를 내게 범죄하게 할까 두려움이라 네가 그 신들을 섬기면 그것이 너의 올무가 되리라

(18:25)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으로 말미암아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주민을 토하여 내느니라

(9:5)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바로 아간은 이 < 헤렘 >을 어긴것이었습니다. 아간의 마음의 숨은 동기속에는 < 하나님께 온전치 바쳐것>에 대한 관심보다는 < 내가 마땅이 받아야 할 것 >에 대한 함정에 빠진것입니다.

 

3 아간의 함정 > 하나님의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생각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범죄한 인간이 빠지기 쉬운 아담과 하와의 함정이면서 오늘 우리의 함정이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우리의 모든 중심과 생각과 행동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너무도 자주 잊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과 방법으로 살려하지 않고 자기 목적과 방법으로 살아갈려고 합니다. 결국 그 노력은 아이성의 패배와 같은 어이없고 어처구니 없는 패배를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이상황에 대한 여호수아의 재미있는 표현이 나옵니다.

(7:5) 아이 사람이 그들을 삼십육 명쯤 쳐죽이고 성문 앞에서부터 스바림까지 쫓아가 내려가는 비탈에서 쳤으므로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된지라

 

이 표현은 어디서 많이 본 표현입니다.

(2: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이는 가나안 백성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려워할 때 쓰였던 똑같은 표현입니다. 분위기가 완전히 역전된 상황을 잘 그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상황과 감정은 한순간에 이렇게 역전될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뒤집기 한편의 명수>입니다. 우리는 명심해야합니다.

 

어제의 승리가 오늘의 승리를 보장해주시지 않습니다. 어제의 잘됨이 오늘의 잘됨을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의 삶의 주인되신 우리의 삶의 이유된 하나님만이 우리의 삶을 보장해주십니다.

 

우리의 사소한 마음도 우리의 사소한 행동도 하나님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아간의 실패한 것은 바로 그 마음을 잊어 버린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가족과 자신의 가문이 아간 한사람의 탐심과 불순한 동기로 인해서 <아골골짜기>의 처참한 죽음의 결과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7:26) 그 위에 돌 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의 맹렬한 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

 

그러나 성경은 다시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러한 < 아간의 이름을 딴 아골골짜기 같은 인생 >라고 다시금 회복의 기회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2:15)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190718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700명이 모임 사람들 가운데서 길선주 장로가 고백했던 그 고백을 기억합니다. < 나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실수 없었습니다. 1년 전에 내 친구 중 한 사람이 임종시에 나를 자기 집으로 불러 말하기를 길장로,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지만 내 집 살림을 돌보아 주시오. 내 아내는 무능하니까 말입니다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내가 잘 돌보아 드릴테니 염려 말라고 나는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그 미망인의 재산을 관리하던 중 미화 100불 상당의 금액을 나는 사취했던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 해 온 것입니다. 내일 아침에 그 돈 전액을 그 미망인에게로 돌려드리겠습니다. > 이 회개의 고백이 부흥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매일 같이 아간의 함정에 빠지기 쉬운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고백해야 합니다. < 주는 저는 아간같은 자입니다. >

 

 

 

 

 

 GSC 새벽큐티설교 <레위기 25:1-12>



[25:1-12]

(25:1)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5: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25:3) 너는 육 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 년 동안 그 포도원을 가꾸어 그 소출을 거둘 것이나

(25:4) 일곱째 해에는 그 땅이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가꾸지 말며

(25:5) 네가 거둔 후에 자라난 것을 거두지 말고 가꾸지 아니한 포도나무가 맺은 열매를 거두지 말라 이는 땅의 안식년임이니라

(25:6) 안식년의 소출은 너희가 먹을 것이니 너와 네 남종과 네 여종과 네 품꾼과 너와 함께 거류하는 자들과

(25:7) 네 가축과 네 땅에 있는 들짐승들이 다 그 소출로 먹을 것을 삼을지니라

(25:8)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

(25:9)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는 뿔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뿔나팔을 크게 불지며

(25:10)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25:11) 그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가꾸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25:12) 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너희는 밭의 소출을 먹으리라

 

< 레 25:1-12> 안식과 희년 




위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 종되었고 자유도 없었고 자신이 소유한 땅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던... 애굽의 삶에서 자기백성으로 그리고 제사장나라로 부르시고 그들을 구출하시면서... 하나님이 지시한 가나한 땅으로 나아가는 과정중에서 그들을 구별시키고 성결케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의도.. 하나님의 특별한 디테일이 담겨있는 말씀입니다. >


레위기가 기록하고 있는 내용중에 가장 중심된 내용이 있다면 


< 첫째는 제사입니다. 5제사(번제,소제,화목제,속건제.속죄제)..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갈수 있을까? 우리가 하나님을 어떤 마음으로 어떤 삶의 태도로 그리고 무엇으로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수 있을까? 라고하는 도전앞에 서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수 있는 유일한 자격조건은 바로 < 거룩 >입니다. >


< 둘째는 절기입니다. 7절기(유월절,무교절,초실절,오순절,나팔절,속죄일,초막절)/ * 유무초밥이 속초까지 ? 오나


절기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수 있을까? 우리가 어떻게하면 하나님을 잊지않고 기억하며 살고 있을까? 라고 하는 < 기억, 기념, 기대 >를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의도가 담겨 있는 또 하나의 거룩한 삶을 위한 디테일입니다.


우리가 레위기를 읽으면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하시고 이제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시려는 중요한 상황에서 이 레위기를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 그들이 400년동안 길들어있던 애굽의 삶, 애굽적인 습성에 물빼기 작업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가나안에 들어가면 가나안의 종교와 풍습에 영향받지 않을 만한 강력한 장치기 필요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면서 철저하게 하나님만 예배하고 ..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삶... 오직 하나님만 생각하기를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특별한 애정입니다.>

 

그래서 레위기는 어떠면 .. 우리가 애굽과 가나땅 사이에서 나도 모르게 익숙해져 있고 나도 모르게 영향받게된 많은 애매한 외부적인 환경속에서 < 애매한 것을 정해는 하나님의 디테일 >이 담겨있습니다.

 

구약의 제사와 절기는 모두다 그 정신은 하나입니다. 제사는 <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입니다. 절기는 < 너는 나를 기억하라 >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는 절기의 가장 클라이막스와 같은 < 안식년 > < 희년 >의 규례가 나옵니다. 이 안식년과 희년은 지금 떠돌이 광야생활에 적용되어지는 것이 아니 가나안땅에 들어갔을때의 지켜야하는 규례들입니다.


[25:1-2]

(25:1)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5: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레위기 25장의 대부분은 희년에 관한 것이지만 우선 안식년의 주요 특징부터 시작합니다. 백성들은 육년동안 자기 밭에 씨를 뿌리고 포도나무를 경작하며 곡식을 거둘수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칠년이 되는 해에 밭에 씨를 뿌리거나 포도나무를 경작하거나 그땅에서 저절로 자란 것들을 수확할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해는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안식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백성들과 동물들은 칠년이 되는 해에는 땅에서 스스로 난 것을 먹을수 있었습니다.


안식년 규정에서 가장 큰 핵심은 < 땅의 휴식, 빚을 탕감 받는 것, 그리고 땅이 없어 힘들에 대한 배려 >였습니다. 바로 이 안식년은 <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의 해 >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 십일조, 안식일, 안식년, 희년 > 4가지는 하나의 공통 분모가 있습니다. 그것은 < 하나님의 주권 사상 >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고 지금 우리가 누리고 갖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것이며 우리에게 잠시 맡겨진 것 이다 >라는 사실입니다.


엘렌 로스 < 하나님의 백성은 공유하고 있는 땅의 풍성함이 땅을 창조하신 주권자로부터 온것이라는 믿음과 자신의 삶이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한다 >


마틴루터 < 안식은 영적인 쉼을 말할 뿐아니라 우리가 하나님만이 우리안에서 일하게 하시며 우리의 모든 능력을 다해 우리 자신의 일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


영성신학자 마르던 <안식> < 안식의 의미를 그침, , 받아들임, 향연 등 4가지로 요약한다. >


1) 그침(욕망으로부터 생긴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가는 마음.성공지향)이다.

2) (육체적·정서적으로 지치고 상한 몸과 마음을 회복)

3) 받아들임 (자기의 뜻과 야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요구와 뜻을 받아들이는 것)

4) 향연( 즐거움이며 축제다. ‘축제가 있는 안식’ )

 

찬송가 70<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으니 이 예물을 주께 마치이 나이다 >





하나님은 안식년과 희년의 규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그들의 넉넉함이 주권자이신 창조주로부터 왔음을 인정하기를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백성들 스스로 그 < 안식년과 희년 >을 시행함으로 그 하나님의 풍성함을 서로 나누도록 하셨습니다. 마치 일주일의 하루가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일주일의 전부가 주님의 것인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 시간을 정기적으로 할애하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땅을 보살피며,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풍성함에 동참할수 있게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안식년은 그들에게 그 땅은 자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며 그들은 모든 백성들이 그분의 풍성함을 함께 나눌수 있게 해야 한다는 책임을 갖고 있음을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흔히 안식하면 < >을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이해입니다. 안식은 < 하나님의 주인됨을 선포하고 그것이 실행되는 시간, 자리, 공간 > 그것이 안식입니다. 참된 안식은 < 거룩, 주권, 은혜 >라는 3박자가 들어맞는 일입니다.


우리가 참다운 안식에 들어가면 < 하나님의 주권이 선포되고 나의 권리가 포기 되어 지는 것입니다. >


바로 그 안식년이 7번이 반복되었을 때 < 희년 >이 선포됩니다.


안식일에 대한 발전적 개념이 안식년이며 안식년에 대한 발전적 개념이 희년입이다. 이 희년은 < 면제의 해. 자유의 해 >입니다. 땅은 7년째 되는 안식년에는 경작을 쉬게하여 땅의 지력을 회복케 하였을 뿐아니라 안식년에 자연적으로 얻어지는 과일의 열매나 수확물은 고아나 과부 가나한 나그네에게 돌렸고 공중의 새나 들짐승에게 주었습니다. 또한 가난하거나 빚을 갚을 능력이 없어서 종으로 팔렸을지라도 7년째 되는 해인 안식년이 되면 종으로 팔렸던 자들이 해방되어 자유인으로 돌아갑니다.


이러한 안식년의 주기가 7번째가 되는 다음해를 < 희년 >이라고 합니다.

희년이 되면 제사장은 전국에 < 요벨 >나팔을 불어서 전국거민에게 자유을 선포합니다. 희년에는 팔렸던 종들도 자유인으로 돌아오거나 매각되었던 토지나 가옥이 본래 소유주에게 무조건 돌아갑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사회정의며 사회보장 제도입니다. 안식년과 희년을 이해면서 하나님은 땅을 그냥 소유의 개념이 아닌 쉼 필요한 인격적인 개념으로 말씀하십니다.


참다운 자유는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하나님안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이 애굽에서 구출된 사건은 그들에게는 자유가 선포되는 희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종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기억재생 방식, 리마인더 reminder입니다. 그것이 바로 절기 인것입니다.

 

<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정이 있었나 ?>

하나님의 풍성하심과 공급하심 속에서 나는 무엇을 나누고 있는가

나는 나의 나눔을 통해서 누군가의 안식이 되고 있는가?

나는 아직도 나의 쉼에 집중하는가? 나의 안식을 구하고 있는가?

나는 나의 주변의 있는 사람들의 안식,자유,은혜에 관심이 있는가




GSC 새벽큐티설교 <민수기 35:10-15>




[35:10-15]

(35:10)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35:11) 너희를 위하여 성읍을 도피성으로 정하여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리로 피하게 하라

(35:12) 이는 너희가 복수할 자에게서 도피하는 성을 삼아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

(35:13) 너희가 줄 성읍 중에 여섯을 도피성이 되게 하되

(35:14) 세 성읍은 요단 이쪽에 두고 세 성읍은 가나안 땅에 두어 도피성이 되게 하라

(35:15) 이 여섯 성읍은 이스라엘 자손과 타국인과 이스라엘 중에 거류하는 자의 도피성이 되리니 부지중에 살인한 모든 자가 그리로 도피할 수 있으리라

 

[35:29-34]

(35:29) 이는 너희의 대대로 거주하는 곳에서 판결하는 규례라

(35:30) 사람을 죽인 모든 자 곧 살인한 자는 증인들의 말을 따라서 죽일 것이나 한 증인의 증거만 따라서 죽이지 말 것이요

(35:31) 고의로 살인죄를 범한 살인자는 생명의 속전을 받지 말고 반드시 죽일 것이며

(35:32) 또 도피성에 피한 자는 대제사장이 죽기 전에는 속전을 받고 그의 땅으로 돌아가 거주하게 하지 말 것이니라

(35:33)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피는 땅을 더럽히나니 피 흘림을 받은 땅은 그 피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함을 받을 수 없느니라

(35:34)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 곧 내가 거주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 여호와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있음이니라

 


 

< 35:10-15> 거룩을 유지하도록

 

 민수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하나님은 가나안땅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서 어떻게 가나안땅의 경계을 설정하고 그리고 그땅을 분배하며 살것인지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을 점령을 시작하기 전에 사전 준비작업으로 가나안땅의 경계를 정해 주셨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말씀을 주셨을때는 아직 모든 것이 완료되지 않은 미완료된 상태였습니다. 아직 가나안땅을 정복하지 않았고 이제 가나안땅을 바라보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 일을 행하실 것을 그리고 너희들이 그렇게 할것임을 <완료형>으로 말씀하습니다. 그 사실은 가나안이 점령된 것을 전제로 그 땅의 경계를 설정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에서 발견할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을수 있는 것은 우리의 현실은 아직 < 미완료의 상태 >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은 < 완료된 상태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의 눈으로 바로는 우리의 현실이며 우리의 약속입니다.


이러한 아직 미완료된 가나안정복의 상황에서 완료된것처럼 말씀하시고 약속하시는 하나님과 이미 이룬것처럼 자신에게 기업으로 줄 땅을 바라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이 만날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 35장은 레위지파와 레위인들이 어떻게 다른 지파들 속에서 머물러 살아야하는지


그리고 그들이 거주하는 성중에서 도피성을 두어서 고의적으로 살인하지 않은 이들을 다시금 회복의 기회를 얻을수 있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와 긍휼을 볼수 있습니다.


민수기 35장의 본문의 핵심은 < 레위인들이 기업을 분배 받은 지파들 중에 머물러 살도록하신 것><피의 복수와 죽음을 피할수 있는 도피성을 허락하시는>것을 살펴볼수 있습니다.

 

레위인은 가나안 땅이나 요단 동편, 어디에서도 기업을 받지 못했습니다





요단 동편은 르우벤지파, 갓지파, 므낫세 지파가 기업을 받았습니다. 가나안땅 곧 요단 서편은 나머지 아홉지파와 반지파가 기업을 받았습니다. 이때 기업을 나눌 지파들이 대표자를 선택했는데 레위인은 기업을 나눌 대표자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레인들은 다른 지파들처럼 기업을 분배받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 하나님이 기업 >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거처할 최소한의 거처가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각 지파들이 레위인들이 거주할수 있는 지역을 할당해 주도록 했습니다


레위인들이 할당 받은 48개의 성에 흩어져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자손이 기업으로 받은 땅에서 거주할 성읍을 얻었습니다. 성읍을 둘러싼 들도 함게 받았습니다. 성을 중심으로 사방 2년 규빗을 측량하여 레위인들에게 주었습니다.

 

? 하나님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제사하는 일에 수종드는 이들이 레위인들에게 기업을 주지 않으셨을까요?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들로써 세상의 방식과 성별되고 구별된 방식으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기업이 < 하나님 >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방법이 었습니다.

레위인의 기업은 < 여호와 하나님 이시다 >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레위인들은 백성과 여호와 하나님을 잇는 브릿지/대리자 역할을 하기에 의도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지파들 가운데 살도록 하신것입니다. 그래서 그 역할과 책임을 잘 할수 있도록 하신것입니다.

 

백성들 사이에서 백성들 가운데서 머물러 살면서 < 오직 하나님을 자기의 기업으로 삼으며,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구별되게 살고, 백성들 사이에서 백성들을 중보하고 예배를 돕는 일을 하는 것 > 바로 레위인들에 주어진 사명이요 책임이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레위인들이 할당받은 48개의 성읍중에서 또 구별하여서 < 요단 동편에 3>< 요단 서편인 가나안땅에 3>성읍을 <도피성>으로 지정하였습니다. 이것을 일종의 < 특별법 >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부지중에 살인한 사람들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하나님의 배레에서 나온정책이었습니다. 이것은 장차 우리의 영원한 도피성되신 < 예수 그리스도 >의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 도피성 제도는 생명을 중요시 여기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해줍니다


또 죄인을 긍휼히 여기는 하나님의 본심을 보게하는 부분입니다.


? 하나님이 도피성을 세우시는지? 그 목적을 본문에서 찾을수 있습니다.

 

(35:34)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 곧 내가 거주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 여호와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있음이니라


가나안 땅은 거룩한 땅입니다. 그 이유는 이 땅에 이스라엘백성이 살기 때문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이 그땅 가운데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땅, 가나안 땅이 난폭한 피의 복수과 증오가 넘치고 있다는 그 땅의 거룩함이 훼손되는 것이 됩니다. 사람이 무고한 사람의 피를 흘려 죽게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땅을 더럽히는 불신앙적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가나안이 약속의 땅으로 거룩하게 보존되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48개의 이스라엘 지파들의 흩어진 성읍중에서 가장 중심된 곳에 가장 도망치기 좋은 곳에 < 6개의 도피성 >을 허락하신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2가지를 허락하십니다.

첫째는 우리중에 레위인들이 함께 하도록 허락하십니다.

둘째는 우리중에 피할수 있는 도피성을 하락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의 원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정의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정의는 죄인들을 벌주시고 멸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정의는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죄인들을 다시금 회복의 기회를 주시는데 있습니다.

피의 보복의 시대에 < 여호와의 보호 >을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GSC 새벽큐티설교 <출애굽기 40:34-38>




[40:34-38]

(40:34)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40:35)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40:36)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40:37)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40:38)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제목 : <출40:34-38>하나님을 경험하는 삶

 

우리 신앙생활은 한마디로 <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 >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 Experiencing God/ Knowing and Doing the will of God :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길>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을 < 하나님을 알아가는 모험>이요

< 하나님을 경험하는 믿음의 행진 >이라고 말합니다.

 

헨리 블랙가비가 쓴 <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 > 이라는 책에

하루하루 예수님이 하라고 하시는 일을 다 하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p.19) 


우리가 하나님이 어디서 일하시는지 보고 찾아서 그분의 뜻에 동참해야 한다(p.26), 

당신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곳에서 하나님과 합류하기 위해 당신의 삶을 조정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런 친밀한 관계에 들어가면, 당신은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방법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고...p.26],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하실 것인지 보여주실 때까지 기다리든지, 우리 주위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신지 찾아서 그분이 하고 계신 일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p.49) 


하나님은 자신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계시하신다. 그 계시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라는 초청이다 (p.41) ”

 


오늘 본문으로 마지막으로 출애굽기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됩니다


우리는 출애굽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들에게 자신을 보여주시고 그들을 이끄시고 인도하시고 그분의 뜻과 계획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시는 일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사건이나 그들이 광야로 나아가는 것은 한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바로 <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 >을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400년 애굽의 종 되었던 곳에서 한사람 모세의 부르심으로 바로의 손에서 구원하셨습니다.... 홍해를 건너고 마라와 엘림을 지나 하나님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하심을 따라 시내산에서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율법 십계명의 두돌판을 받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곳에서 자기 만을 위한 금송아지를 만들게 됩니다.

 

금송아지 사건으로 크게 홍역을 치르고 난 후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식과 방법을 가르쳐주시기 위해 성막을 짓도록 하셨고 그 성막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그들 가운게 거하시고. 그들 가운데 임하시는지 그리고 그들을 인도하시는지?를 보여주기 원하셨습니다.




이 성막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하나님을 경험하며 살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성막은 주는 의미는 3가지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법을 알려줍니다.

 

1/ 동거 : 성막은 하나님이 우리 중에 거하심을 의미합니다. ( 동거하심 )

우리중에 사시는 하나님. 우리중에 거주하시는 하나님.


성막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쉬칸(mishikan)>은 출25-40장에서 49회 나오는데, 그 문자적 의미는 거주지, ‘거주하다는 의미의 동사 <샤칸(shakan)>에서 유래되었다.



거하다”, “거주하다”(dwell)는 의미의 히브리어 동사는 샤켄”(shaken), 또는 샤칸”(shakan)으로 바로 여기서 쉐키나(Shekinah, 하나님의 현현)’는 단어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임재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성막은 모든 지파들의 텐트 한 가운데.. 

모든 위치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이 머물고 거주하는 동안 잘 보이는 위치에 하나님의 거주의 텐트는 그들 중에 거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같이 동거하시고 살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물어 보아야합니다.

하나님이 내안에 살고 계신가? 하나님이 우리안에 거하고 계신가?

신약시대에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의 마음의 성소에 거하십니다.

주님이 내안에 내가 주안에 있는 그 놀라운 비밀이 오늘 우리의 예배의 자리에

우리의 삶의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요일 4: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우리의 예배의 태도의 가장 첫 출발은 < 하나님이 우리안에 거하게 하시는 것 >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와 함께 살면... 우리는 그 함께사는 사람을 의식하고 그 사람을 배려하고 그 사람은 생각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안에 거하시면 우리는 그분을 의식하고 그분을 생각하고 그분의 기분과 마음을 살피게 되죠..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우리안에 거하신다고 말하면서도 우리는 그분을 무심히.. 그분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 세상의 흐름에는 무던하게 하나님의 마음에는 예민하게 반응하는 삶 > 그것이 예배의 삶의 태도입니다.

 

2/ 동행 : 성막은 하나님이 우리 중에 임하심을 의미합니다.(임재하심)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두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임재의 구름이 그 회막을 덮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했다.


[40:34-35]

(40:34)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40:35)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임재의 장면은 < 덮으심과 충만케 하심 >입니다.

구름이 주는 이미는 뭔가? 신령한 느낌을 주는 효과와 같습니다. 마치 산신령이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이나.. 뽕하고 나타날 때 생기는 그런 정도의 구름이 아니었습니다. 그 구름은 그중에 있는 수많은 장막들.. 수많은 텐트중에서 하나님의 성막에서 피어 올랐고 그 위에 머물러 있었으면 그곳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 구름은 하나님의 존재를 느낄 만큼 경이로운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가나안땅으로 안내해주었던 더위를 막아주고 그들을 인도해주던 그 구름이 이제는 그들이 인도하는 구름으로 경이롭게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13:21)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13:22)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성경이 말하고 있는 구름은 < 회막문 >앞에서 피어오르는 것이었습니다.

(33:10) 모든 백성이 회막 문에 구름 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하며

(12:5)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로부터 강림하사 장막 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시는지라 그 두 사람이 나아가매

 

그들이 인도하여 그들을 앞서서 있던 그 구름이 이제는 그들의 예배의 처소, 하나님의 만남의 장막인 성막 문앞에 머물러 서 있고 그곳을 덮으며 그곳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의도을 느끼게 하는 대목입니다.

하나님은 구름이라는 효과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더위를 피하게 하는 그런 정도의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을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로 초청하시고 그들이 자신의 삶이 어딘가로 인도되어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것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구름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과 함께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바로 같이 동행하심을 의미하며 인도하심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인도하시는 것에

마음이 가시나요? 아니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에 마음이 가시나요?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먼저인가요? 아니면 예배받으시는 하나님이 먼저인가요?


그들을 인도했던 구름기둥도 역시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드러나기에 충분했지만 그 것보다 하나님은 성막에 가득한 구름을 보여주고 <회막문앞에 서있는 구름>을 보여주심으로... 인도하심보다 그들 가운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지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임하셔서 그들을 덮으시고 그들을 충만케하시는 것..

종종 출애굽기를 보면 < 장막. 성막. 회막 >이라는 단어가 다르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성막”(26:30), “회막”(27:32, 29:4), “성소”(25:8), “증거막”(1:50), “법막”(대하24:6), “여호와의 전”(삼상1:9), “시은소라고도 합니다.


<장막>이란 이름은 보통 천막을 가리키는 것으로, 아마도 모세 자신이 공적으로 사용하던 그 천막에 적용되었을 것이고, <회막>은 여호와와 그 백성이 공적으로 교제하던 정규장소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 막 위에 있던 하나님의 임재의 표적(구름기둥)에 의해 처음으로 구별되었던 것으로 나타납니다.(33:7 이하). 


회막은 하나님이 만나시는 장소를 뜻합니다. 그래서 이제 성막이 바로 회막이 된것이죠.. 바로 이 임재의 구름이 그곳에 머물고 있으므로... 그래서 성막이 지어진 이후로는 바로 회막이 곧 성막이 된것입니다.


회막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오헬 모에드(ohel moed)>는 출25-40장에서 32번 나오는데, 그 의미는 만남의 장막이란 뜻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과 대화의 장소를 의미합니다


성막과 회막이 전승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매회 분명하게 구별되어 사용된 것은 아니며, 종종 동의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임재의 구름이 내게 머물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다스림이 시작됩니다.

인도의 구름이 임재와 영광의 구름으로 바뀌는 것을 보는 삶

주의 임재로 나를 덮으소서.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주의 길로 나를 인도하소서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히 가득채워 졌습니다.

<영광>이라는 단어 < 가보드 > 뜻은 무거움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머물며 하나님의 영광으로 채워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고 있다는 단어가 < 쉐키나 >라면..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는 것이 < 이가봇 >입니다. 우리의 삶이 쉐키나의 삶인지? 아니면 이가봇의 삶인지?우리에게 물어보아야합니다.

 

주의 임재가 나를 덮으시고 주의 영광으로 내안에 가득 채우소서.

그리고 주여 나를 인도하소서.

 

3. 동역: 성막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시작점입니다. (인도하심)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의 길을 걸아갈 때 이제 영적 시그널을 보여주시는 곳이 바로 이 성막 곧 회막이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40:36-38]

(40:36)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40:37)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40:38)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마치 자동차들이 스그널 사인에 반응하여 움직이는 것처럼

그들의 삶이 인도 되어질때는 그들이 시선이 성막을 향해 있어야 함을 알수 있습니다. 성막위에 피어오르는 구름을 보고 그들이 행로를 결정하고 그것에 그들의 걸음이 좌우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들에게 주신 의도는 그들이 예배중심의 삶, 하나님의 임재중심의 삶을 살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그들이 시선히 항상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를 주목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중심으로 모이도록 하는 것이죠...

 

우리의 삶의 영적 시그널은 바로 우리의 예배의 처소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예배의 어떠한가? 우리의 예배가 내 삶을 인도하기에 충분한가?

우리에게 물어야 합니다.


인도하심을 받는 것보다 우선되는 것은 예배하는 것입니다.


구름기둥아래 더위를 피하는 것보다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부른 것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신뢰하는 예배입니다.

개는 주인이 먹이를 줄 때 주인이 들고 있는 먹이를 든 손에 주목합니다.

그러나 아기는 자기에게 젖을 주는 엄마의 시선에 주목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선입니까? 하나님의 손입니까?


성막은 하나님의 마음과 시선이 머무는 곳이기에..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의도적으로 그곳에 마음을 두고 그곳에 시선을 두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도입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안에 거하게 하시는 것?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를 덮고.. 하나님의 영광이 채워지는 것?

우리의 시선이 항상 하나님을 예배하는 처소를 주목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는 출발점입니다.

 

< 묵상하는 질문 >------------------

1/ 나는 내안에 하나님이 살고 있는가?

2/ 나는 매일 하나님의 임재가 나를 덮고 채우고 있는가?

3/ 나는 나의 예배가 나의 인도하심을 받는 출발점인가?

나는 나의 시선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에 주목하고 있는가?

 

GSC 새벽큐티설교 <출애굽기 22:20-31>

제목: <출22:20-31> 거룩은 일상입니다. 찬양 : 찬송가 9


(22:20)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희생을 드리는 자는 멸할지니라

(22:21)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

(22:22)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22:23)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을지라

(22:24)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

(22:25) 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나의 백성 중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이거든

너는 그에게 채주 같이 하지 말며 변리를 받지 말 것이며

(22:26)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 보내라

(22:27) 그 몸을 가릴 것이 이뿐이라 이는 그 살의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한 자임이니라

(22:28) 너는 재판장을 욕하지 말며 백성의 유사를 저주하지 말지니라

(22:29) 너는 너의 추수한 것과 너의 짜낸 즙을 드리기에 더디게 말지며

너의 처음 난 아들들을 내게 줄지며

(22:30) 너의 소와 양도 그 일례로 하되 칠일 동안 어미와 함께 있게 하다가

팔일만에 내게 줄지니라

(22:31) 너희는 내게 거룩한 사람이 될지니

들에서 짐승에게 찢긴 것의 고기를 먹지 말고 개에게 던질지니라

====================================================

 

제목: 거룩이 일상이다.

오늘 생명의 삶의 제목이 인상적입니다. < 거룩함이 일상이어야 합니다 >

우리는 출애굽기 22장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이 엄격하게 규정하고 있는 율법적인 규례들이 나옵니다. < 너희는 반드시 이렇게 하라 >라고 분명한 레귤레이션(regulation)과 팔러시(policy)를 주고 있습니다.


특히 < 절도에 대한 것, 손해와 배상에 관한 것, 그리고 간음에 대한 것 >에 대한 분명한 규정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 31절에 이렇게 하나님께서 엄격하게 우리에게 규정을 정해주시는 이유에 대해서 짧은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는데 그것은 (22:31) 너희는 내게 거룩한 사람이 될지니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을 예배하기 합당한 거룩한 삶과 거룩한 삶으로 이어지길 원하십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체질인 동시에 우리의 체질이어야 합니다.

몸이 좋지 않은 분들이 좋을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 체질 개선 >을 시도합니다. 그래서 음식 조절하고 음식을 가려서 먹으므로 소위 < 팔 체질 >에 해당되는 음식들을 먹고 그렇게 자신의 < 체질을 개선 > 하죠. ~


저도 저의 체질을 알고 싶어서 한의사 선생님께 물었던 저를 보고 < 목양 체질 >이라고 하더라구요. <목양체질은 채소보다는 육류가 좋고.. 찬 음식보다는 따뜻한 음식이 좋고 냉찜질보다는 따뜻한 목욕이 좋은 체질입니다. >.

실제로 제가 나도 모르게 그렇게 체질에 맞고 살고 있더라구요. 삼겹살을 먹을 때 왠만해서 쌈이나 야채를 먹지 않고 있고 가능하면 따뜻한 목욕하는 것을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참 < 체질 >대로 살고 있구나 싶었습니다.

육신의 체질도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주지만 우리의 영적인 체질을 어떠해야 할까요?


우리가 우리의 일상에서 계속 개선을 시도해야하는 영적 체질이 있다면 그것은 < 거룩 체질 >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가장 중요한 체질이면 성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닮아가고 그분을 경외하면 할수록 우리는 거룩한 것과 친해주고 거룩함에 익숙해져 있어야합니다


특히 성경에 나오는 레위기의 제사법이나 율법의 규례들의 이면의 정신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닮아가도록 우리의 삶에 엄격히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같은 율법의 규례들이 나오는 본문을 보면서 반드시 놓치지 말고 묵상해야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규례를 주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그리고 어떤 의도에서 이렇게 디테일하게 우리에게 금지명령을 내리시고 엄격히 말씀하고 계신가 ? ”를 생각해보야합니다.

 

흔히 큐티가 어려워지고 힘들어질 때는 오늘같은 재미없고 어려운 본문을 만났을 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큐티에서 놓치기 쉬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중심적 큐티 묵상>이 아니라 <자기 중심적 큐티묵상>을 하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같은 이런 본문을 대할 때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하나님에 대해서 깊고 풍성하게 묵상을 해야 합니다.

 

오늘 출애굽기 22장은 십계명의 실천편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도둑질에 대한 규례, 손해와 배상의 규례는 십계명 8계명의 실천편이고

간음 및 수간에 관한 금지 규례는 십계명 7계명의 실천편이고

무당금지. 우상숭배 금지의 규례는 

십계명 1.2계명의 실천편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일종의 아펜텍스와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규례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이 공의와 정직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들의 육적, 영적 순결을 요구하고 계시면 약한자를 돌보시고 배려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너희가 만약 거룩하게 살길 원하고 너희가 만약 거룩한 사람이라면 .....

너희는 하나님의 거룩함에 어울리는 삶의 내용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너의 삶이 자신 뿐아니라 다른사람에게 너희의 거룩이 보여져야한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몇가지 규례를 보면

 

처녀를 범한자의 형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처녀는 그녀의 아버지의 소유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래서 처녀를 강간하는 것은 그녀의 아버지의 소유권을 침해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처녀를 강간한자는 그녀의 아버지에게 일정한 결혼 지참금 오늘 본문에 보면 <빙폐>라고 되어 있는데 .. 약 은 50세겔을 지불하고서 그 처녀와 결혼해야마 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약 처녀의 아버지가 결혼을 반대할 경우에는 할수 없이 돈만 주어야합니다. 일종의 배상이죠.

 

무당을 급합니다. 하나님을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을 금하고 있는 것이죠.

짐승과 행음하는 것을 금합니다. 이것을 < 수간 >이라고 말하죠..

이러한 무당이나 수간의 배경에는 애굽적인 종교적인 습관과 관련이 있습니다. 당시 애굽에서는 사람과 짐승과의 교합이 종교 의식중의 하나로 행해졌습니다.

하나님에 어울리지 않는..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에 전혀 어울리지 않은 삶의 옛 습관들... 애굽적인 체질 개선을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 이방 나그네, 과부와 고아 >들에 대해서 잘 대우해줄 것을 말씀하십니다. 사회적 경제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규정은 < 엄격함과 사랑 >이라는 두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 사회 정의 SOCIAL JUSTICE >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 >들에 대해서 공동체적인 관심을 기울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 최근에 등장하는 신학용어중에 교회의 공공성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안에서 교회의 공동체성은 갖고 있는데 교회의 공공성이 없다는 말을 합니다.

 

신국원 교수(총신대) < 그리스도인이 기독교적 시민교양과 샬롬의 비전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도 다른 세계관이나 종교적 확신을 가진 이들에 대해 공평하고도 예의 바른 자세를 지녀야 한다. >


성석환 교수(장신대) < 교회가 사회문화적 책임에 있어 공공적 역할을 해야 함에 동의하며 교회 안에만 머물고 있는 능력과 자산들을 사회가 원하는 용어로 바꾸어 원래의 복음적 가치를 알려주는 것이 교회가 감당해야 하는 공적 역할 >있다고 강조했다.



작년에 2010년 베스트 셀러 책중에 하버드 대학 마이클 샌델 교수 < 정의 >라는 책이 열풍을 일으켰습니다.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를 통해 우리 사회에 정의 열풍을 일으킨 마이클 샌델 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소크라테스식 대화라는 독특한 강의법으로 강의를 합니다. 




그의 정의론강의는 하버드대 역사에서 가장 많은 학생이 수강한 과목 가운데 하나인데 지난 20년간 하버드 학생들 가운데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를 수강한 학생 수는 14천명에 이를 정도입니다.

이미 오늘 출애굽기에 정의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공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정의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움과 공정함이 내 삶에 거룩함으로 드러나고 따뜻한 배려로 실행되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거룩함에 충실하게 내 삶이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거룩함과 사회정의가 서로가 다른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나의 거룩함으로 나아가면 자연스럽게 내 삶과 사회가 거룩하게 되는데 관심을 갖게 됩니다.


바로 사회정의로 이어지는 것이죠... 세상밖의 교회로 나아가고 일상의 교회로 나아가는 일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고 우리가 거룩한 사람임을 나타내는 길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와 교회 비난받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이원론적인 사고방식과 예배적 거룩함이 내 삶의 거룩함으로 이어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교회안에서 거룩함이 세상에서 거룩함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물어야합니다. <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당신은 누구입니까? > . < 당신은 예배의 거룩함만큼 다른 세상사람이 당신의 거룩함을 느끼고 있습니까? >


우리의 관심은 어떻게 거룩한 백성이 되느냐?(BECOME) 이 아니라

우리의 관심은 이 거룩한 백성이 된 지위를 어떻게 일상생활속에서 계속 유지할수 있느냐?(TO BE)의 문제입니다


어쪄면 이것은 < 행함과 믿음 >과 관련이죠..

 

(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오늘 본문에 보면... 세상 사람이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행동을 벗어난 삶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돈을 꾸워준 채주가 변리를 받고 전당을 잡는 것은 상식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에 < 자비함 >있어야한다고 강조합니다.


약자와 가난한자를 향한 배려와 관심이 바로 거룩의 실천입니다. 


그것이 곧 사회 정의로 이어집니다. 너무 교회중심에 머물다보니 교회는 거룩해지는데 세상은 악해지고 ... 교회나 그리스도인을 생각하면 종졸하고 옹색하고 궁색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교회는 헌금을 모으는 일에 익숙하지만 그 헌금을 세상에 흘려보내는 일에는 주저하고... 익숙해 있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 중에 참 인상적인 구절이 나옵니다.


(22:22)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22:23)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을지라

 

어제 송목사님이 새벽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 미움없이 견책하고 견책하며 사랑하라 >

 

지난번 이지선 자매님 간증을 들으면서 많은 생각과 묵상을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도 시편 40편의 말씀을 좋아합니다.


[40:1-3]

(40:1)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40:2)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40:3)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하나님은 연약한자들... 힘들 이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연약한자들.. 힘든 이들에게 하나님처럼 다가가야 합니.

제가 병원에 있을 때 많은 성도들의 병문안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위로가 되는 말을 해주고 가는 사람이 있고... 정말 위로가 안 되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위로의 한마디 말은 문자가 왔습니다.


동생아 미안하다 형이 힘이 못되어 줘서...내 동생 힘내라 ~~ ” 전라도 ...

자네는 걱정하지 말게 ... 요즘 좋은 약 많이 나온께 ... 꼭 좋아질 거이네

 

다른 사람에게 위로하고 격려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항상 우리는 자신의 삶이 부정적이 사람에게 긍정적인 위로의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세상을 위로하고 세상을 격려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몇년 동안 < 정의 >라는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또하나의 주제가 히트를 쳤습니다. 바로 < 위로 >입니다.


우리는 < 정의와 위로 >를 함께 행해야하는 거룩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3가지를 명심해야 합니다.

1/ 거룩한 하나님은 지금 나의 삶의 내용을 들여다보고 계신다.

2/ 거룩한 하나님은 나의 삶의 내용이 거룩함과 어울리기 원하신다.

3/ 거룩한 하나님은 나의 삶의 거룩함이

다른 사람의 정의와 위로에 사용되길 원하신다.

 

< 묵상하는 질문 >------------------

1) 너는 얼마나 하나님이 나의 삶을 들여다고 계심을 느끼고 살고 있니?

 

2) 너는 약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무엇을 나누어주면 살고 있니 ?

 

3) 너는 너의 영적인 거룩함으로 나아는 노력만큼이나 너의 주변의 사람들에게 너의 거룩함을 보며 살고 있니?

 

GSC 새벽큐티설교 <출애굽기 7:14-25> 

제목: 여호와의 각본있는 드라마. 10가지 재앙 / 찬양 : 찬송가 55


[7:14-25]

(7: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 백성 보내기를 거절하는도다

(7:15) 아침에 너는 바로에게로 가라 보라 그가 물 있는 곳으로 나오리니 너는 나일 강 가에 서서 그를 맞으며 그 뱀 되었던 지팡이를 손에 잡고

(7:16) 그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왕에게 보내어 이르시되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섬길 것이니라 하였으나 이제까지 네가 듣지 아니하도다

(7:17)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니 네가 이로 말미암아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볼지어다 내가 내 손의 지팡이로 나일 강을 치면 그것이 피로 변하고

(7:18) 나일 강의 고기가 죽고 그 물에서는 악취가 나리니 애굽 사람들이 그 강 물 마시기를 싫어하리라 하라

(7:1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에게 명령하기를 네 지팡이를 잡고 네 팔을 애굽의 물들과 강들과 운하와 못과 모든 호수 위에 내밀라 하라 그것들이 피가 되리니 애굽 온 땅과 나무 그릇과 돌 그릇 안에 모두 피가 있으리라

(7:20)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행하여 바로와 그의 신하의 목전에서 지팡이를 들어 나일 강을 치니 그 물이 다 피로 변하고

(7:21) 나일 강의 고기가 죽고 그 물에서는 악취가 나니 애굽 사람들이 나일 강 물을 마시지 못하며 애굽 온 땅에는 피가 있으나

(7:22) 애굽 요술사들도 자기들의 요술로 그와 같이 행하므로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7:23) 바로가 돌이켜 궁으로 들어가고 그 일에 관심을 가지지도 아니하였고

(7:24) 애굽 사람들은 나일 강 물을 마실 수 없으므로 나일 강 가를 두루 파서 마실 물을 구하였더라

(7:25) 여호와께서 나일 강을 치신 후 이레가 지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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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출7:14-15> 여호와의 각본있는 드라마. 10가지 재앙

 

이제 본격적으로 < 신라고 불리우는 이집트의 파라오와 하나님이 불러주신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대결 >이 시작됩니다. 그 결정적인 대결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10가지 재앙입니다.

 

작년에 개봉된 영화중에 성경을 내용을 소재로한 < 엑소더스 >를 보면 이집트의 람세스와 모세의 관계와 심리를 묘사하면서 특히 아주 사실적이고 스팩타클하게 묘사하고 있는 장면이 < 열가지 재앙의 장면 >입니다



이 영화가 다소 헐리우드 영화적인 요소를 가미하다 보니 성경적인 왜곡의 위험성은 있었지만 대체로 모세의 고뇌, 람세스의 고통 그리고 이스라엘의 10가지 재앙, 출애굽장면, 홍해사건등을 잘 묘사했습니다. 완벽하게 성경의 내용을 그대로 재현했다고는 볼수 없지만 일정부분 우리가 감이 오지 않는 10가지 재앙이나 홍해사건과 같은 장면은 아주 컴퓨터 그래픽으로 묘사될수 있는 그런 놀라운 장면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애굽의 노예로 도저히 상상할수 없고 상상해본적도 없는 하겠다고 모세가 람세스에게 나아갑니다. 그래서 이일을 위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아론을 준비시키십니다. 모세를 부르시고 아론을 동역자로 붙여주십니다. 여러 번에 걸친 모세의 주저함에도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자신을 누구인지 보여주시면서.. 용기와 동기부여를 해주시면서 까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모세가 여러 가지 핑계를 되면서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자신이 아무일도 할수 없음을 말할 때마다 마치 이렇게 말씀하는 것 같았습니다.


모세야 ~ 내가 따로 생각해놓은 것이 있으니.. 염려말고 내가 하자는대로 하자 ! 내가 다 책임질테니까. 나만 믿고 따라와. 알았지 라고 하는 확신을 주고 계십니다.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이 구원의 일을 맡기시는데에는 하나님의 주도면밀한 계획과 각본이 있었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짜여진 각본대로 10가지 재앙이 진행되고 있음을 볼수 있습니다.

 



흔히 어떤 놀라운 일들이나 사건이 예기치않게 펼쳐지는 것을 각본없는 드라마 라고 합니다. 성경에 일어나는 많은 일들은 처음 대할때는 마치 각본없는 드라마 처럼 놀랍고 신기한 일들과 가득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유심히 보면 성경은 철하게 각본있는 드라마 입니다

하나님의 주도면밀하신 계획과 의도속에 진행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여호와, 곧 야훼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시간과 공간의 제한된 관점에서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려 합니다. 우리는 시간의 시작도 끝도 모르면서 제한적인 이성과 사고를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이해하려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이해되지 않은 성경의 많은 이야기들이 불합리하고 불공평하고 모순된 이야기처럼 들려집니다. 마치 각본없이 갑자기 그렇게 만들어진 이야기처럼 꾸며낸 소설처럼 보여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경속에 많은 이야기들은 하나님의 각본 있는 드라마입니다. 


성경이라는 제한된 인간의 글자로 다 담기에는 너무 방대하고 놀라운 드라마이기에 우리가 볼 때 모순투성이로 보일뿐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이 10가지 재앙을 마치 각본없는 드라마처럼 이해했습니다. 하나님이 바로와의 한판대결이 마치 흥미진진한 1라운드부터 10라운드까지의 권투경기처럼 아주 극적인 대결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릴 때 성경을 읽으면서 마치 모순처럼 느끼는 성경구절을 발견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말씀이었습니다. 여기서 마음이 강퍅케 되었다는 말은 마음이 굳어지고 완강하게 거부했다, 고집을 피웠다. ”는 의미입니다.

처음에는 바로가 자신의 마음을 강퍅하게 했다고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했다고 강조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 7장 전 반분에도 이러한 말씀이 등장합니다.

(7:3)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내 표징과 내 이적을 애굽 땅에서 많이 행할 것이나

(7:13)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7: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 백성 보내기를 거절하는도다

 

이러한 표현은 출애굽기 초반에 14번이나 등장합니다.

<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내보내지 아니하였으니..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 ...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들 보내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

 

이것은 <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도록 만드셨다기 보다는.. 바로의 완악한 마음 그대로 내버려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


마음은 < 감정의 자리 / 지식과 지혜의 자리 / 도덕과 양심의 자리/ 자신의 존재을 대표합니다. > 바로 그러 마음이 완악해 있었습니다.

 

(14:8) 여호와께서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의 뒤를 따르니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나갔음이라

 

바로의 완악한 마음과 모세의 완전한 믿음 대결을 펼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의 완악한 마음안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없습니다. 자신이 신라는 불리우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철적하게 자신안에 있는 완악한 마음을 다루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신을 벗고 서서 그분의 임재를 경험하고 지팡기 하나로 나아갑니다.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심을 입고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면면서 나아갑니다. 바로는 마음의 완악한대로 나아가지만 모세는 여호와의 명령대로 행합니다.

 

하나님앞에 서있는 모세과 하나님이 되려는 바로 그리고 하나님을 부리려는 마술사의 대결입이 펼쳐집니다. 이제 개봉박두..

 


10가지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이루어가시는데... 구지 10가지 재앙이 필요했을까?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만 강퍅하게 하지 않았더라면 구지 그렇게 어렵고 복잡하게 일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리고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해놓고 왜 그 강퍅해지 마음을 깨뜨리기 위해서 10가지 재앙을 사용하셔야만했나? 이거 북치고 장고 치시네... 짜고 치는 고스돕같네... 라고 생각하고 마치 성경의 이야기가 모순된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모든 상황와 이야기속에는 하나님의 의도된 계획이 담겨있습니다.

이미 모세를 부르실때부터 여호와는 모세를 부르신것도 자기 백성의 신음하는 소리를 듣으시고 이집트왕 파라오에서 구원하실 계획을 설명하십니다. 그때 오로지 한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것은 내백성과 애굽왕 바로로 하여금 내가 여호와 인지 알게 하리라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7:17)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니 네가 이로 말미암아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볼지어다 내가 내 손의 지팡이로 나일 강을 치면 그것이 피로 변하고

 

모세가 당신을 누구라고 할까요 할때에 자신을 < 여호와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분명히 말하고 이 열가지 재정을 진행하면서 하나님의 짜여진 의도와 각본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은 < 하나님의 하나님됨을 보여주고 자신이 여호와되심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

 

이스라엘이 지배를 받고 있던 애굽시대에는 바로왕이 신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바로는 신이라고 불리우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이집트에 피라미드와 미라를 보면 사람들이 파라오를 어떻게 신으로 추앙했는지를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애굽에는 수많은 신들이 존재했고 그 신들이 자신들에게 풍요와 안식과 번영 그리고 행복을 준다고 믿었습니다. 나일강에 나일강의 신이 있었는데 크눔(Khnum, 나일의 수호신), 하피(Hapi, 나일의 악령이며 다산의 신), 오시리스(Osiris, 지하세계의 신) 라는 신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땅과 식물과 동물을 지배하는 신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러한 문화적인 배경과 종교적인 배경속에서 10가지 재앙이 하나님의 각본있는 드라마처럼 그리고 잘 짜여진 의도와 목적을 따라 실행되었습니다.

10가지재앙 ( ---------)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들을 애굽에 보낸 이유는 5가지로 보는데 다음과 같다.

1. 구원의 도구 :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3:8,19-20, 6:1,5)

 

2. 여호와의 계시의 도구 :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여호와의 능력을 알게 하기 위해서 (6:7, 10:2) 이 땅(earth)은 애굽 신들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에게 속하였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9:16,29, 11:7, 24:1)

 

3. 가나안을 향하는 광야생활의 확신과 믿음의 도구 :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겠느냐고 물은 바로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5:2, 7:5, 8:22, 9:14)

 

4. 애굽의 신들을 벌하기 위한 도구 :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시기 위해서 (12:12, 33:4)


(12:12)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실제로 열가지 재앙을 실행할 때.. 바로의 편에서 함께 등장한 사람들은 바로 애굽의 신들을 섬기는 술객들과 박수들이었습니다. 소위 마법사 주술사들이었습니다.

 

또한 모세와 아론이 행했던 몇가지 재앙들을 그들도 흉내내고 있었다는 것을 보아도 그 당시 애굽종교의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애굽의 술객들도 그들의 술법으로 피와 개구리의 재앙을 흉내 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술객들이 이 두 가지 재앙을 흉내 내는 것은 허용하셨지만 되돌리는 것은 허락치 않으셨습니다.

 

처음에는 애굽의 술객들도 대단한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러나 점점 그들의 능력은 무력해집니다. 10가지 재앙을 진행하는 과정을 보면 그 바로와 함께한 관원, 술객들 박수들이 반응이 점점 바뀌고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도 이제 여호와라는 존재를 알기 시작했다는 뜻이죠... 결국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는 것을 동의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과 애굽의 신들과의 맞짱. 대결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애굽의 열재항인 애굽에서 섬기는 신들과 관련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 재앙은 피재앙은 애굽인들이 생명의 근원으로 경배하고 있던 나일(Nile) 강 자체를 향하여 내려졌다. 이 재앙은 크눔(Khnum, 나일의 수호신), 하피(Hapi, 나일의 악령이며 다산의 신), 오시리스(Osiris, 지하세계의 신, 피로 변한 나일 강물은 그의 피로 여겨졌다) 등을 포함한 많은 강의 신들에게 내려진 것이다.

 

나일강이 변질되는 것은 생명의 근원. 풍요의 근원이 손상을 입는 것입니다. 이집트 문명을 나일문명이라도 말하는 것처럼 그당시 강은 풍요와 행복, 문명의 상징적인 곳입니다. 바로 그 첫재앙은 나일강을 못쓰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나일강이 피로 물들었다는 것은 그들에게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자신의 생명줄이 끊어 졌다는 것이고.. 이제 우리는 끝장났다고 .. 살길이 없어졌다고 하는 결정적인 타격이었습니다.

 

어떤 학자는 그냥 초자연적인 기적이 아니라 자연적인 현상으로 나일강이 범람해서 그 땅속에있는 흙이 붉게 보여서 피처럼 보였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 나일강 범람의 결과로 개구리가 생기고 이와 파리가 생기고 피부명과 같은 탄저병이 생겨서 많은 죽었다 라고 하는 자연적인 현상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론은 이 열가지 재앙을 다 설명해내지 못합니다.

 

애굽에는 땅과 만물에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신들이 존재합니다. 그런 신들은 모두다 그들에게 행복과 안녕을 주는 신으로 여겨왔습니다.

바로 이 10가지 재앙이 그러한 신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은 각본있는 드라마를 실행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삶은 온통 모순 투성이처럼 보입니다. 내가 바라보는 삶은 살면 살수록 순리라기보다는 모순같이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속에 번민하고 고민하고 두려워합니다.

 

우리의 삶에도 이러한 모순된 삶속에 숨겨두신 하나님의 각본있는 드라마가 있을 기억해야합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여호와인 것을 알게하심입니다. 그분을 경외하고 그분을 생각하게 하는 도구입니다.

 

여호와. 야훼는 < 스스로 계신자 >입니다.

< 나는 나다 >입니다. I am WHO I AM입니다.

나는 미래의 나다 < I will be who will be >

과거의 내가 미래의 내가 될 것이다. < I will be what I WAS >

그는 언제나 그분 자신이시다.< He is what he is >

여호와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여전히 우리에게 계시하십니다.

< 나는 나다 >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 너 나모르니? 너가 나인줄 알게 보여줄게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 삶에는 각본있는 드라마가 있음을 생각해야합니다.

그것은 나도 모르게 만들어 놓은 신들을과 하나님과의 대결을 만들것입니다.

내 마음의 열가지 재앙을 행하시기 전에 우리는 고백해야합니다.

< 당신은 나의 여호와 이십니다. 당신의 나의 야훼이십니다. >

 

그 외 다른 재앙과 관련된 애굽의 신들


두 번째 재앙인 무수한 수의 개구리(frog) 재앙은 풍요로운 곡식(나일의 물로부터 유래된)과 다산의 상징인 애굽의 여신 헤퀫(Heqet)을 공격했다.

 

세 번째 재앙인 땅의 티끌이 이(lice, or gnats or mosquitoes)로 변한 재앙은 땅의 모든 신(예로 Akhor)들에 임하였다.

 

네 번째 재앙인 파리(flies) 재앙은 케프리(Khepri) 라고 하는 그들이 좋아했던 쇠똥구리(scarab, dung beetle) 신에게도 임했다.

 

다섯 번째 재앙인 생축(livestock, 이것들은 식량, 우유, 의복 및 운송을 제공한다)들의 악질 재앙은, 신성한 황소신 아피스(Apis), 암소 모양의 어머니 여신으로 다산의 상징인 하토르(Hathor), 다산의 상징인 황소신 므네비스(Mnevis), 암소 임에도 머리에 뿔을 가지고 있는 신들의 여왕 이시스(Isis) 등을 직접적으로 공격하였다.

 

여섯 번째 독종의 재앙은 하이크(Hike)나 토쓰(Thoth, Imhotep) 등과 같은 마술과 치료의 신들의 무기력함을 보여준다. 술객들을 독종으로부터, 즉 여호와의 능력으로부터 막아줄 수 없었다.

 

일곱 번째 재앙인 우박 재앙과, 여덟 번째 재앙인 메뚜기(바람에 불려온) 재앙은 곡물들을 파괴하였고, 날씨를 주관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여러 하늘 신들, 예를 들면 공기의 신인 슈(Shu), 습기의 신인 테프눗(Tefnut), 하늘의 신인 누트(Nut) 등과 같은 신들을 공격하였다. 곡물들의 손실은 초목, 농사, 수확의 신들, 예를 들어 겝(Geb), (Seth) 등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아홉 번째 재앙인 흑암의 재앙은 애굽 최고의 신인 태양신 라(Ra), 또는 아몬-(Amon-Ra, 철자를 Re로 쓰기도 함)를 공격하였는데, 그 신들은 땅에 빛과 따뜻함을 가져다 주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또한 호러스(Horus), 세커(Seker), 케프리(Khepri), 무트(Mut), 누트(Nut) 등과 같은 다른 하늘 신들도 무기력함이 드러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장자가 죽는 열 번째 재앙은 바로(Pharaoh)의 신성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애굽인들은 바로를 생명을 주는 오시리스(Osiris) 신과 태양신의 화신(incarnation)으로 믿고 있었다. 바로의 임무는 신들의 은총을 유지하고, 질서의 여신 마아트(Ma'at)의 법을 집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아들의 죽음도 막지 못하는 무능한 자였음이 드러났다. 그의 아들은 신성한 통치자의 자리를 계승할 자였고, 애굽 땅의 어떤 아들과도 다른 아들이었다. 따라서 여호와만이 홀로 죽음과 삶을 주관하시는 절대적인 분이시라는 것이다.

 

< 묵상하는 질문 >------------------

1) 나는 내 삶이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생각하는가?

각본 있는 드라마라고 생각하는가?

2) 나는 내 삶에 하나님을 깨닫고 그분을 여호와로 인정하면 살고 있는가?

 

3) 나는 내 삶속에 만들어 놓은 나의 우상들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가?

 

GSC 새벽 큐티 설교 <창세기 37:25-36>


제목 : < 창 37: 25-36 >구덩이에서 끌어올리심

                            


[37:25-36]

(37:25) 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다가 눈을 들어 본즉 한 무리의 이스마엘 사람들이 길르앗에서 오는데 그 낙타들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가는지라

(37:26)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37:27)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니라 하매 그의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

(37:28) 그 때에 미디안 사람 상인들이 지나가고 있는지라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이십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인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37:29) 르우벤이 돌아와 구덩이에 이르러 본즉 거기 요셉이 없는지라 옷을 찢고

(37:30) 아우들에게로 되돌아와서 이르되 아이가 없도다 나는 어디로 갈까

(37:31) 그들이 요셉의 옷을 가져다가 숫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37:32) 그의 채색옷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였으니 아버지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 하매

(37:33) 아버지가 그것을 알아보고 이르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도다 요셉이 분명히 찢겼도다 하고

(37:34)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37:35)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37:36) 그 미디안 사람들은 그를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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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구덩이에 던져진 삶 그리고 찢겨진 채색옷

부제 ; 세월호에 남겨진 삶 그리고 남겨진 유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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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오늘 본문에 자식의 유품인 <찢겨진 채색옷>을 손에 든 사랑하는 자식 잃은 야곱의 오열과 애통함을 봅니다. 


(창 37:34)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창 37:35)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이 야곱의 애통함은 < 세월호 1주기 / 2014년 4월 16일 >를 맞고 있는 세월호 유족들, 실종자 가족들, 그리고 생존자 가족들의 애통과 고통을 묵상하게 합니다. 


진도 팽목항에서 바다에 떠있는 세월호 침몰 사고현장의 부표를 바라보면 다시 오열하는 부모들의 모습. 유족들, 가족들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떠난 빈방과 아이들의 유품들속에서 얼마나 사랑하고 사랑받는 아이들이 였는지를 알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잊고 지냈고 기억하겠다고 말했지만 이제야 다시 기억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미안해 해야 할 떄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오늘 본문에 사랑하는 자식 요셉을 읽고 형들의 손에 전달 받은 찢겨진 채색옷을 손에 든 야곱의 오열, 야곱의 애통함, 야곱의 고통을 통해서 4월 16일 그날의 애통함을 기억해보고 기도하길 원합니다. 


어제 세월호 1주기를 맞아 세월호가 침물한 그자리에 희생자 가족들이 그 자리에 다시 갔습니다. TV 통해 그들이 그 바다를 보며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면 가슴을 찢듯이 우는 모습을 봅니다. 얼마나 마음이 안타 깝던지요 


아직 차가운 바다에 단원고 학생 4명(조은화/허다윤/남현철/박영민) 인솔 교자 2명(양승진/고창석) 여행객3명 (권재근, 아들 혁규/이영숙) 이렇게 9명이 여전히 남겨저 있습니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여전한 문제와 상황이 현재 진행형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 하나님의 뜻 > 이라는 말로 말하기에는 우리가 자초하고 만들어낸 죄악과 부조리가 너무나도 큽니다. 그래서 쉽게 이러한 인간 스스로가 자초한 인재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이 자식을 읽은 야곱의 모습이 자식을 잃은 세월호 가족들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또한 요셉이 구덩이 던져지고 채색옷이 찢기고 억울한 고통을 당하고 팔리는 것은 < 하나님의 뜻 >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도 그릇된 동기와 욕망으로 동생 요셉을 대우한 형들의 죄악이 너무나도 큽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셉의 고백처럼 < 이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시는 >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지만 우리는 완악한 인간의 욕심과 욕망이 빚어낸 죄악조차도 < 하나님의 뜻 >이라는 이름으로 덮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오늘 요셉의 삶의 스토리를 봅니다. 그리고 그속에서 겪어 왔던 요셉의 고통과 그리고 야곱의 고통을 봅니다. 오늘 본문은 이 두 모습이 잘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4인물. 아브라함-이삭-야곱-요셉의 마지막 믿음의 사람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습니다. 


특히 요셉의 생애 대한 이야기는 창세기에 이어지는 족장들이 이야기들과 많은 부분에서 다른 차이들을 보이고 있습니다


창세기 저자가 족장들의 이야기를 하는 내용도 흔히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는 아브라함은 창12-2513장을 할애하고 있지만 요셉은 그것보다 1장이 더 많은 14, 37-50장에 걸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창세기 기자는 많은 부분을 할애하면서 한 사람의 전 생애를 다루듯이.. 마치 전기나 소설을 읽듯이 다루고 있을까?


그것은 창세기가 주어진 처음 1차 독자가 누구인가?를 생각해보면 알수 있습니다. 창세기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쓰여졌습니다.

다시말해서 430년동안 노예라는 삶의 습관과 정체성에 젖어 있는 이들을 위해..

< 너희는 누구인가 > < 너희는 어디서 왔는가?> 그리고 < 너희는 누구의 것인가 > < 너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를 설명해주고자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400여년동안 노예생활이라는 속박과 굴레 속에서 어떠한 희망도 미래도 비젼도 없이 있는 이들. 패배감과 상실감 그리고 낮은 자존감에 있는 이들에게 이들을 가슴을 뜨겁게할 중요한 메시지가 .. 중요한 동기부여가... 중요한 도전이 필요했던것입니다.


모세를 따라서 어떻게 떠밀리다 싶이 자의만 타의만으로 자신이 숙명과 같은 익숙하고 길들여진 노예의 삶에서 ... 이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는 하나님 백성의 삶으로 전환이 이루어지는 시점에 이 창세기는 그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 점에서 요셉의 이야기는 어떤 영웅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 성공신화에 대한 이야기, 형통한 신앙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원치않게 구덩이에 던져질수 있다고 자신의 채색옷이 찟어질수 있다고 말하는 고난과 하나님의 주도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내고 있는 사람이 바로 요셉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흔히 <타이폴로지>라고 말하는 모형론의 관점에서 요셉은 신약의 예수님의 그림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부인과 배신으로 억울하게 은 30에 가룟유다에 의해서 팔리게 되는 예수님의 그림자.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옷이 찢기고 고난받음으로 주님의 나라가 오게하는 도구가 되는 그 예수님의 그림자. 모든 이들의 대속적인 삶을 살고 그의 수고와 고난 겪음을 통해서 다른 이들의 유익을 가져오는 그런 예수님의 그림자의 모습이 바로 요셉에게 담겨 있는 것입니다.




바로 요셉의 삶과 예수님의 삶은 아주 자연스럽게 오버랩 되어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요셉의 성공적인 삶의 결론에만 주목합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고 가족들앞에 성공적인 모습으로 서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래서 흔히 많은 이들은 꿈을 꾸고 비젼을 가진 요셉처럼 살면 여러분도 형통하고 성공할수 있습니다 라고 설교하고 묵상합니다. 어떤 분이 설교한 설교의 제목을 보니 꿈으로 사는 비젼 인생 라는 설교제목을 보았습니다. 아주 매력적인 설교 제목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해보아야합니다.

요셉이 꿈을 꾸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고난을 받고 최후에는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자신의 꿈을 요셉에게 보여주고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요셉을 도구로 사용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

요셉의 생애의 주도권이 요셉에게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에게 있습니까?


요셉의 생애에 주도권이 요셉에 있다면 < 요셉은 꿈을 꾸었고 그 꿈 때문에 구덩이에 던져지고 색동옷이 찢어지고 노예로 팔리는 고난도 견디어서 마침내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 >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요셉의 생애의 주도권이 하나님에게 있다면 < 하나님은 요셉에게 자신의 꿈을 보여주고 우리로 하여금 구덩이에 던져지고 색동옷이 찢어지고 노예로 팔리는 고난의 경험을 통하여서 마침내 하나님의 꿈을 이루는 도구가 되었다 >는 말이 됩니다.

 

아마 ! 430년에 노예생활을 마치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조금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 이런 질문을 던졌을 것입니다. < 하나님이 너무 하신다 왜? 우리는 이러한 노예생활을 통해서 고난 가운데 지나오게 하셨는가? 꼭 그렇게 하셔야만 했는가? >라는 의문을 가졌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요셉을 미워하고 요셉을 시기 질투하고 요셉을 죽이기로 모이한 이들이 누구 입니까? 바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상들입니다. 요셉의 고난의 원인은 하나님에게 있지 않습니다. 형제들의 잘못된 동기와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요셉의 형들의 악한 동기를 하나님은 구덩이에 던져진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 올려서 하나님의 선한 동기로 바꾸어 놓으시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요셉의 신실한 믿음을 시험하시고 그 믿음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꿈과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요셉의 입장에선 색동옷이 찢겨지는 고통을 경험했고 구덩이 전져지고 팔리는 고난을 경험했죠.


< 색동옷이 찢겨야 하나님께서 입혀주시는 옷을 입을 수 있다 . 색동옷-노예의 옷-죄수의 옷, 색동옷을 입었 을때는 꿈꾸는 자가 였지만 죄수복을 입고 부터는 꿈을 해석하는 자가 되었다. >


옷의 변천사를 들으셨을 것입니다. 특히 색동옷이라고 말하는 채색옷은 자신의 신분이 어떤 존재인가?를 말해줍니다. 유대인들에게서 의복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줍니다


약에서 선지자들이나 지혜자들은 특별한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요셉이 다른 형제들보다 탁월한 지혜자였을 것이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꿈을 꾸는 자>는 의미는 유대적인 배경에서 원어적인 의미는 <계시를 수납하는자, 계시를 나타내는자 곧 지혜자 >라는 의미를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 요셉의 등장하는 이 창세기의 문학장르를 욥기와 같은 지혜문학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리고 요셉의 채색옷은 아버지의 편애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다른 형제들과 다른 독특한 신분을 가졌음을 암시해줍니다.


그러한 지혜자. 계시의 전달자. 탁월한 신분과 아버지의 사랑의 징표인 요셉의 채색옷은 찢겨졌고 그는 구덩이에 던져졌습니다. 이것은 요셉에게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것입니다.


고난의 상황에 일어날 때 우리는 도전히 이해할수 없을 만큼 강한 충격과 고통을 줍니다. 17세의 어린 요셉이 이러한 고통에 던져지는 것은 예상밖의 일이요 상상밖의 일입니다. 고난의 그때의 상황보다 시간이 흘러야 이해되어지고 해석되어질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 요셉은 알았습니다. 자신이 던져진 그 구덩이에서 그리고 그 구덩이에서 끌어올리신 분이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지난 세월 자신의 삶을 자신이 주도적으로 만들어간 것처럼 생각했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창세기 마지막장 50장에 보면 요셉의 아버지 야곱이죽자 형들이 자신들의 잘못으로 인해 요셉이 자신을 죽일까봐 걱정할때에....자신에게 일어난 고난을 하나님이 어떻게 바꾸셨는지? 고백하고 있습니다.


(50: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요셉처럼 구덩이에 던져졌다고 느낀 적은 없으십니다.

그때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그 곳에서 머물며.. 무엇을 바라 보십니까?

구덩이에 던져졌을 때 그기고 그곳에서 머물고.

그리고 그곳에서 끌어올려져서 또다른 상황을 내삶이 내밀리때..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기대해야 할까요?

 

요셉의 이야기는 그가 비전의 사람으로 그 비전을 이루었다고 해석하는 것은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손에 맡겨진 삶.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는 사람의 모습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이 창세기에 마지막 대목에서 구덩이에 던져진 요셉의 모습을 통해서 아마도 430년 애굽 노예의 구덩이에 던져지고 팔려간 이스라엘 모습을 투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속에서 이루실 하나님의 일들을 기대하는 마음을 알게 하고 그것을 하나님이 어떻게 바꾸어가고 계신지를 보여주길 원하셨을 것입니다. 또한 그 원인이 하나님 자신에게 있지않고 이스라엘 백성의 열조들로부터 자초한 일이라는 것을 알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것은 어떻게 인도하시고 바꾸셨는지?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자신에게 주어진 꿈을 부지런히 자신이 주도적으로 이루어가는 자기주도적인 성공신화을 만들어가는 지극히 세속적인 사람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자신은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수 없지만 고난의 구덩이에서 끌어 올려주시는 하나님을 믿기에 그분의 방식으로 그분의 때에 자신의 꿈이 아니 하나님의 주도적인 방식과 꿈으로 자신을 사용하실 것을 기대하고 고백하는 믿음의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고난은 이해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난은 해석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담대하게 기도해야합니다

< 고난의 구덩이속에서 나의 꿈이 아닌 하나님의 꿈을 이루소서. 내게 하나님의 꿈만 이루어진다면 나는 어디에 던져져도 괜찮습니다. 나를 하나님이 이끄시고 건지시고 인도하소서. >


(69:14) 나를 수렁에서 건지사 빠지지 말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와 깊은 물에서 건지소서

[40:1-2]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오래된 가스펠 찬양 중에 이런 찬양입니다.

< 내 인생 여정 끝나고 ... 예수 인도하셨네 >

1) 내 인생 여정끝내어 강건너 언덕이를때 하늘문 향해 말하리

예수인도하셨네 매일 발걸음마다 예수인도하시네

나의 무거운 죄짐을 모두 벗고하는말 예수인도하셧네

2) 이 가시밭길 인생을 허덕이면서 갈때에 시험과 환난많으나

예수 인도하셨네 매일 발걸음마다 예수인도하시네

나의 무거운죄 짐을 모두 벗고하는말 예수인도하셨네

3) 내 밟은 발걸음마다 주예수 보살피시사 승리의 개가부르며

주를 찬송하라라 매일 발걸음마다 예수인도하시네

나의 무거운죄 짐을 모두 벗고 하는말 예수인도하셨네


[ 기도와 도전 ]

사랑하는 여러분. 매일 매일 살아가는 동안..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난을 어떤 관점을 바라볼것인가? 생각하며 살아야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을 반드시 선으로 바꾸실 그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보며.. 그분의 이끄심속에서 그분의 주도적인 삶에 우리의 삶을 드리고 우리는 단지 그분의 도구임을 고백하면서 그렇게 매일 매일을 살아야가야 합니다.

삶의 주도권과 주재권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하면 그렇게 매일 매일을 < 예수 인도하셨네 >라고 고백하면서 살아야 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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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내 영혼의 사랑 - 예수전도단 화요모임 / Darlene Zschech by 쥬빌리

예수 내 영혼의 사랑 예수 나는 포기할 수 없네

수렁에서 나를 건지시고 반석에 세우심을 이제 아네

사랑해 의지해 나의 모든 것 다 없어진 다해도

내 구주 절친한 친구 주를 경배해 세상 끝날까지

사랑해 의지해 나의 모든 것 다 없어진다해도

내 구주 절친한 친구 주를 경배해 세상 끝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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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GSC새벽 큐티 설교 


제목 : <18:17-23>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18:17-33]

(18:1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18:18)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18: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18:20)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18:21)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18:22)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18:23)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18:24)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18:25)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18:2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

(18:27)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18:28) 오십 의인 중에 오 명이 부족하다면 그 오 명이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온 성읍을 멸하시리이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사십오 명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18:29) 아브라함이 또 아뢰어 이르되 거기서 사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사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18:30)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주여 노하지 마시옵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면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18:31)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내가 감히 내 주께 아뢰나이다 거기서 이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이십 명으로 말미암아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18:32)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18:3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제목 : <18:20-33>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오늘 함께 묵상하는 본문의 내용은 흔히 < 아브라함의 신앙과 믿음을 옅볼수 있는 있는 < 소돔과 고모라 땅을 위한 중보기도 >의 내용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마치 거래()를 하는 것과 같은 아브라함과 여호와 하나님과의 대화의 내용을 볼수 있습니다.


흔히들 오늘의 이본문의 내용을 아브라함의 신앙과 중보 기도를 배우고 묵상하는 본문으로 이해하고 묵상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뜨려야할 몇가지 중요한 핵심 메시지와 오해하고 있는 메시지가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를 강조하지만 놓치고 있는 핵심메시지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18장에는 하나님의 사자와 여호와 하나님의 현현, 여호와 하나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2명의 하나님의 사자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이 두 곳을 방문합니다.



첫째는 아브라함의 방문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을 믿고 믿음의 걸음을 걸어온 의로운 아브라함을 방문합니다. 


둘째는 소돔과 고모라땅의 방문입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불의한 삶을 살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러 방문합니다.


(18:1)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아브라함이 거주하고 있었던 곳은 < 마르레 >라는 사람이 거주하는 곳이었습니다

훗날 그곳이 지명이 < 마르레 > 되었습니다

이곳은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정착한 정착지였습니다.


이곳은 조카 롯에게 <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리라 >해서 

그 방향을 결정하고 얻은 땅입니다.

 

(13:18)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아브라함은 마므레로부터 신임을 얻었을 뿐만아니라 아브라함이 마므레에게 듣든한 후원자로 보였기기 때문에 계속 그 땅에 같이 살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이 땅은 훗날 < 헤브론 >이 됩니다. 아브라함의 당시에는 마므레는 정말 볼품없는 상수리 수풀과 나무나 우거지 산지였습니다.


이러한 척박한 땅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삶을 정착하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곳 마므레는 아브라함의 삶이 구체화되기 시작한 곳입니다.


< 강하다 >는 뜻을 가지고 있는 < 마므레 >는 아브라함에게서 아주 의미는 있는 곳이 바로 이곳에 다시금 < 아내 사라가 노년에 아들을 낳을 것이다 >라고 하는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을 받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방문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소돔과 고모라를 위한 특별한 중보기도를 드리는 곳이 됩니다.


훗날 아브라함은 바로 이곳에서 자신의 아내 사라를 장례를 위해 막벨라굴을 산곳도 바로 이 마므레라는 지역입니다.

 

바로 < 헤브론의 마므레 >는 아브라함에게 이민이후에 처음으로 정착하고 처음으로 자신의 삶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그런 곳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언약의 말씀을 따라 이제는 그 누구도 아브라함에게 땅을 내놓으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땅이 한평도 없었고, 그래서 그 땅을 가나안 족속들에게 빌혀서 정착하고 있었을 지라도 땅 소유자 이상으로 견고한 거주자가 되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 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소위 자기 고향을 떠나 이민 떠나 제대로 집한칸 마련한 추억들이 있으실것입니다. 처음 미국와서 살기 시작했던 조그마한 콘도를 기억할것입니다.

처음 아이들을 미국학교에 입학시키던 동네를 기억할것입니다.

처음 나의 비즈니스를 열던 그런 가게를 기억할것입니다.


바로 아브라함에게 < 마므레 >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을데 무엇가 시작해야 했던 그곳,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이제 서서히 무언가가 보이지 시작하는 그런 약속이 보이고 약속이 이루어지는 곳이 었습니다.

 

바로 그런곳에서 다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그에게 찾아오셨고 그를 만나 주십니다.

오늘 우리는 창세기 18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여호와와 여호와 앞에 서있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미쳐 몰랐던 우리가 미쳐 깨닫지 못했던 3가지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찾아오시는 여호와 하나님과 여호와를 환영하는 아브라함

 

마르레에 거주하던 어느날 아브라함은 한낮인 낮이 뜨거운 오정즈음에 장막 어귀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낯선 사람이 셋이 맞은편에서 오는 것을 봅니다. 바로 이들은 아브라함을 찾아오고 계시는 여호와의 사자. 바로 여호와의 현현 이었습니다. 그들을 향해 아브라함은 그들을 알아보고 장막문으로 달려가 영접하고 몸을 땅에 굽혀 경배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18:3)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직접 찾아왔을까요?

그 이유는 2가지 목적이 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첫째는 아브라함이 약속의 자녀인 아들 이삭을 낳을 것이라는 것과 둘째 불의한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할 것이다 것이었습니다.

(18:1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마치 사람과 사람이 대화하고 의논하듯이 어떤 중대한 일을 위해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상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우리 옅볼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친근히 대하고 친밀하게 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동안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과 어떻게 사귀어 왔는지?을 옅볼수 있는 대목이니다.


(41:8)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자신을 숨기지 않으시고 드러내시고 자신의 계획을 말씀하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과 그 하나님을 대하는 아브라함의 태도는 영적인 친밀함의 대표적인 모습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바로 이 모습은 아브라함이 얼마나 < 의로운 사람 >인가?을 보여줍니다.

 

성경에서 <>의 개념은 율법이거나 도덕적인 용어가 아닙니다. <>의 개념은 관계적인 용어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 의롭다 >는 말은 < 정의롭다. 법없이도 살수 있는 삶 >을 말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는 하나님과 친밀하고 깊은 관계를 맺는 일을 의미합니다.

 




소돔과 고모라땅에서 찾았던 <의인> 역시 바로 그런 율법적으로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는 의가 아니라 하나님과 진정한 관계를 맺고 있는 <>를 가진 사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흔희 아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하는 그 의인 역시 <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 >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이 바로 믿음으로 살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친근히 친밀히 사귀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묵상할수 있습니다.

 

오늘 18장에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의인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8: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바른 관계를 맺기에 실패하고 있는 불의한 소돔과 고모라는 멸하시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 의로운 아브라함에 대한 약속 >< 불의한 소돔과 고모라땅에 멸망 >은 서로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의로운 약속의 백성이라도 하나님과 관계 맺는 의로움에 실패하면 버림받을수 있음을 간접적으로 경고하는 이중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오늘 본문 창세기 18장을 묵상하면서 놓치지 말아야 중요한 메시지 있습니다.

 

2/ 기다리시는 여호와와 기도하는 아브라함

오늘 본문에서 소돔과 고모라 땅을 위한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를 살펴보기전에 우리가 정말 놓치지 말아야할 묵상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그것은 22절입니다. 바로 이 22절이 아브라함의 중보기도의 방향을 결정하게 합니다.

(18:22)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여기서 기록된 <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 라는 번역은 오리지날 텍스트인 히브리 맛소라 사본의 성경과는 다른 번역입니다. 원래 성경은 이렇게 쓰여있습니다. <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앞에 여전히 서 있었더니 > 라고 쓰여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라는 말과 < 여호와 께서 아브라함에 여전히 서 있었더니 >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되십니다. < 그대로 서있는 > 주어가 다름에 따라서 그 의미는 전혀 달라집니다.

 

원래 성경은 <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앞에 여전히 서있었더니 >라고 쓰여져있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왜 ? 이렇게 바뀌었을까요? 바로 구약의 서기관들이 성경을 필사하면서 이 부분이 올 때 어떻게 <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앞에 서있을수 있는가? >해서 좀더 경건한 언어로 바꿔 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 기도의 주체가 사람이 되어 버린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께 소돔과 고모라를 중보 기도하기 위해서 서있는 모습을 보여집니다. 사실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하나가지를 놓치게 되었습니다.

 

<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앞에 여전히 서있었더니 >라는 말이 주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기도를 기다리셨다 >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기도하기까지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십니다.

반드시 우리의 기도이전에 하나님의 미리아심과 기다림이 있습니.

 

그래서 중보기도의 4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는 기다림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우리가 중보기도하기까지 기다리셨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둘째는 기도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환영하고 인정하듯이 그분과 친밀하 사귀고 그분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나의 요청과 원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기대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손이 일하시도록 기대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기회입니다 기도는 기다림과 기대를 가지고 기회를 붙잡는것입니다. 하나님과 사귀는 기회, 하나님과 마는 기회입니다.


바로 중보기도의 3중주 < 기다림 / 기도 / 기대 /기회>입니다.

 

아브라함의 소돔과 고모라를 의인을 요청하는 중보기도이전에는 <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앞에서 서서 아브라함의 기도를 기다리시는 기다림 > 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중보기도를 하도록 그 앞에 머물러 서 계셨던 것을 알수 있습니다. 창조주이신 그분은 자존심을 다 버리고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소돔 성에 남아 있을 의인을 위한 중보기도를 하기를 바라면서 피조물 앞에 서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중보기도를 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중심은 <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는 하나님을 먼저 묵상하는 일 >입니다. 흔히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중보한것처럼 우리고 의인을 구하는 기도를 합시다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마치 중보기도를 처음으로 시작한 이가 < 아브라함 >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중보기도를 제안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탁월한 영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마치 의인 50/45/40/30/20/10명 까지 마치 거래하듯이 기도해도 여호와 하나님이 하나도 기분나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의 기도의 응답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6번이 이랬더 저랬다 하는 것처럼 보이는 기도를 해도 하나님의 신실하게 응답하시고 아브라함에 기회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오늘 본문에서 놓치지 말아야할 것은 < 아브라함의 중보기도앞에 하나님의 기다림 > 있다는 사실입니다.


< 여호와가 아브라함앞에서 서서 > 기다리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중보기도의 출발입니다. 먼저 여호왁 나의 앞에 서있는 것을 보는 것 그리고 그분이 무엇을 원하시는 지를 아는 것. 그리고 나 자신이 여호와 앞에 서서 그분의 중심과 심정을 바라보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중보기도자의 마음입니다. 바로 그것이 친밀한 사귐의 기도입니다.

 

3/ 들으시는 여호와와 요청하는 아브라함

 

우리는 오늘 불의한 소돔과 고모라를 아브라함을 방문하지 않고 바로 가서 그 땅을 멸할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그땅을 멸하시기를 주저하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먼저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인규를 구원할 그 인물을 낳을 이삭을 낳을 것을 먼저 예고하십니다. 그 다음에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실행하러 떠나십니다. 그 사이에 아브라함의 중보기도가 있고 그사이에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십니다.

비록 아브라함의 간절한 요청과 기도에 불구하고 그의 기도는 실패로 돌아갑니다. 소돔과 고모라 땅은 그곳에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되는 것은 아브라함과 아무 관계도 없는 일어었습니다. 그의 조타 롯의 가족이 그곳에 살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구해주리고 작정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그렇게 매달리면서 기도할 이유하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마치 그 일이 자기 일이거나 한 것처럼 매달리며 기도를 했습니다.

노아는 온 세상을 홍수로 멸절시키겠다고 하는 통보를 받고도 하나님앞에서 아브라함처럼 중보의 기도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방주 만드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그리고 그 방주에 자기의 가족만 올라 탔습니다. 이런면에서 아브라함을 노아와 대조가 됩니다.


노아는 자기가 해야할 일만 하고 그 이상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가 해야할 일상을 했습니다.

 

중보기도는 자기가 해야할 기도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더 많은 부담감으로 더많은 책임감으로 그 이상의 일들과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노아는 자기백성의 심판앞에서 구원을 위해서 방주를 지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소돔과 고모라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모세는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에 결렬된 틈 사이에서 기도했습니다.


(106:23)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멸하리라 하셨으나 그가 택하신 모세가 그 어려움 가운데에서 그의 앞에 서서 그의 노를 돌이켜 멸하시지 아니하게 하였도다

 

예수님은 요한복은 17장에 하나님의 자녀들과 아버지가 하나되 하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

 

아브라함의 기도는 타락한 세상과 시대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그 세상에서 신앙이 변질된 롯과 롯의 가족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아브라함의 기도가 의인 10명을 구하는 기도에서 그친 이유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중보기도하면서 10명선에 그친 문화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랍비들의 전승에 의하면 노아가 홍수에서 구원받은 사람이 8명이었습니다. 그래서 8명보다 조금 많은 10명으로 멈추었고 그리고 10명이라는 숫자는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공동체나 잔치나 축체의 최소 숫자였습니다. 모든 모임이든지 10명이 모여야 그 유대인의 공동체로 인정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열처녀 비유고 바로 10명의 숫자가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이미 소돔과 고모라에는 적어도 의인 10명은 살고 있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바로 롯과 그의 아내 그리고 4명의 딸들과 4명의 사위들이었습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그들을 감안해서 10명의 의인을 구하는 기도에서 멈췄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주 전략적으로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이러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듣습니다. 하나님이 들으시고 아브라함이 요청하는 그러한 기도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2가지의 반응과 만남을 봅니다.

아브라함을 찾아오시는 하나님. 하나님을 알아보고 환영하는 아브라함

아브라함앞에서 서서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하나님앞에서 서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아브라함

아브라함을 이야기와 요청을 들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진심을 알고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이들의 문제를 품고 기도하는 아브라함

 

이러한 두 개의 만남이 얼마나 놀라운 사귐과 관계를 이루는지 봅니다.

오늘 우리 자신에게 묻습니다

나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이 내 앞에서 서서 나의 기도를 기다리시는 것을 보는가

나는 얼마나 자주는 나의 문제가 아닌 다른 이들의 문제를 품고 기도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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