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 예레미야 애가 2:1822 >


제목 : <예레미야애가 2:18-22>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2:18-22]

(2:18) 그들의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딸 시온의 성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를 쉬게 하지 말지어다

(2:19) 초저녁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각 길 어귀에서 주려 기진한 네 어린 자녀들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 하였도다

(2:20)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주께서 누구에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 여인들이 어찌 자기 열매 곧 그들이 낳은 아이들을 먹으오며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어찌 주의 성소에서 죽임을 당하오리이까

(2:21) 늙은이와 젊은이가 다 길바닥에 엎드러졌사오며 내 처녀들과 내 청년들이 칼에 쓰러졌나이다 주께서 주의 진노의 날에 죽이시되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도륙하셨나이다

(2:22) 주께서 내 두려운 일들을 사방에서 부르시기를 절기 때 무리를 부름 같이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시는 날에는 피하거나 남은 자가 없나이다 내가 낳아 기르는 아이들을 내 원수가 다 멸하였나이다

 


오늘 본문 예례미야 애가 2장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날 >에 대한 예레미야의 심정과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 어찌하여 >라는 애가의 원제목을 가지고 있는 예레미야 애가는 처참하고 비참하고 절박하게 여호와의 진노의 손아래 놓여있는 유다백성과 예루살렘의 형편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21절 처음에 < 슬프다 여호와의 진노가 > 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2:1) 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딸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가 이스라엘의 아름다움을 하늘에서 땅에 던지셨음이여 그의 진노의 날에 그의 발판을 기억하지 아니하셨도다

이제 2장 마지막절에 <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날 >에 대한 노래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2:22) 주께서 내 두려운 일들을 사방에서 부르시기를 절기 때 무리를 부름 같이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시는 날에는 피하거나 남은 자가 없나이다 내가 낳아 기르는 아이들을 내 원수가 다 멸하였나이다

 

한 마디로 예레미야 애가 2장의 전체의 분위기는 < 여호와가 화가 나셨다. 그래서 슬프다 >입니다. 이러한 현실에 놓여 있는 유다백성들의 상황들을 예레미야는 보았고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당하지 말았어야 할 ... 당하지 않을수 있는 고통을 당하는 유다백성들을 보면서 처음에는 슬픔마음으로 애곡합니다.

 

보통 어떤 심각한 고통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몇가지 심리적 단계를 거칩니다. 처음에는 이 고통의 원인을 찾습니다. 그래서 왜? 라는 의문을 던지고 질문을 합니다. 그 다음에는 이 고통의 원인에 대해서 원망하고 불평하고 후회하고 탄식합니다. 때로는 화를 내고 분노합니다. 그 다음에는 이 고통속에서 슬퍼하고 애곡하고 절망하고 절규합니다. 그 다음에야 비로서 고통의 해결을 찾습니다.

 

이러한 심리적인 단계가 이 예레미야애가의 5장의 전체의 흐름속에 담겨 있습니다.

오늘 2장에 보여지고 있는 예레미야 애가의 노래속에는 이러한 심리적인 흐름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2장에는 예레미야가 갖고 있는 애끊는 마음, 애간장이 타는 마음이 고스란이 담겨 있습니다. 어제 읽은 본문 11절에

(2:11)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보통 한국 말에서 < 애끓는다 애간장이 탄다 > 할 때 이 < >는 사람의 창자를 말합니다. < 속이 상하고 속이 끊어질 듯 고통스럽다 >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예레미야의 마음은 1장에서는 3인칭으로 표현하던 것을 2장에 들어서면서 1인칭으로 분위기를 바꿔 버립니다. 이러한 인칭의 변화는 자신이 2장에서 묘사하고 있는 유다백성과 예루살렘의 상황과 마음 그리고 고통을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다백성들이 여호와의 진노의 날에 여호와의 진노의 채찍을 받는 것인 마치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통으로 여기고 감정이입을 하고 고백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있는 유다의 현실들을 예레미야는 어제와 오늘의 본문에서 처참하게 현장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성속에서 죽임을 당하고 예루살렘은 바벨론의 나라에 포위되어서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주고 가고 있습니다. 더 이상 저장되어 있는 포도주와 곡식은 없습니다. 심지어 먹을 것이 없어 아이들의 인육을 먹는 이 처참한 현실...

아이들은 엄마의 품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사람은 길거리에서 기절한 상태로 놓여 있습니다. 이방나라는 처녀와 청년들을 처참하게 죽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에도 여전히 거짓선지자들은 헛된 위로 거짓된 희망만 말하고 있습니다.

이방나라의 비웃음소리와 박수소리가 들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예레미야는 애끓는 마음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울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절박한 심정으로 울부짖는 마음으로 절규하듯이 탄원하고 있습니다.

(2:20)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주께서 누구에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 여인들이 어찌 자기 열매 곧 그들이 낳은 아이들을 먹으오며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어찌 주의 성소에서 죽임을 당하오리이까

"주님, 살펴 주십시오. 주님께서 예전에 사람을 이렇게 다루신 적이 있으십니까?

어떤 여자가 사랑스럽게 기른 자식을 잡아먹는단 말입니까?

어찌 주님의 성전에서, 제사장과 예언자가 맞아 죽을 수 있습니까?

예레미야 애가는 <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백성들에게 >

너희가 어찌 주의 음성을 듣지 않았단 말인가? 어찌하여 이러한 일들을 자초했는가 ? 하는 책망의 노래입니다.

그리고 <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는 > 주여 ! 어찌 이러한 일을 허락하셨습니까? 어찌 이런 일을 당할수 있단 말입니까? 라고 탄식하는 노래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모든 처참한 일들의 원인이 <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임을 압니다. > 그리고 이것이 < 여호와께서 이미 정하신일을 행하시고 옛날에 명령하신 예언이 성취 >되는 일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될줄 알지만 그렇게 되고 있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래도 주님 미워도 다시한번 ... 이라는 심정으로 예레미야는 1인칭으로 자신의 감정과 심정을 담아 자기백성들을 향해 노래하고 탄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예레미야의 탄식이면 탄원이며 절규입니다. 상황의 처절함과 심각함 그리고 절박함을 담은 예레미야의 기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레미야의 기도는 혼자 하는 기도원하고 있지 않습니다. 1인칭인 자신과 3인칭인 유다백성들과 같이 기도하길 요청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예레미야는 18-22절에 걸쳐서 7번의 명령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5번의 명령과 2번의 금지의 명령을 외치고 있습니다.

먼저 5번의 명령을 찾아봅시다. < 흘릴지어다. 얼어나, 부르짖을 지어다. 쏟듯 할지어다. 손을 들지어다> 2번의 금지 명령 < 쉬지 말고, 쉬게하지 말지어다>입니다.

7번의 명령형이 반복되었다는 것은 완전한 회개, 혼신을 당한 회개를 요청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7이라는 수가 완전함과 확실함을 의미하듯이 <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리고 쉬지 말고 흘리며 눈동자로 쉬게 하지 말고 마음을 물같이 쏟고 손을 들고 부르짖으라 >고 요청하고 있는 것이죠.

[2:18-19]

(2:18) 그들의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딸 시온의 성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를 쉬게 하지 말지어다

(2:19) 초저녁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각 길 어귀에서 주려 기진한 네 어린 자녀들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 하였도다

여기서 < 딸 시온의 성벽 >은 무너지 성벽의 돌들 조차도 이러한 부르짖고 기도하는 일에 동참하라는 의미입니다.


< 초저녁에 일어나 >라는 의미는 보통 유대인은 밤을 3경으로 나누는데 그 처음 시간을 말합니다. 모두가 쉬고 잠잘 준비를 하는 시간에도 일어나 부르짖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이 시간대만 기도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거듭 거듭 반복해서 여호와께 나아가라는 의미입니다.

이 구절을 새번역에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 온 밤 내내 시간을 알릴 때마다 일어나 부르짖어라. 물을 쏟아 놓듯, 주님 앞에 네 마음을 쏟아 놓아라. >

참 멋지 표현이 나옵니다. < 마음을 주의 얼굴앞에서 물쏟듯하라 > 이것은 마음속에 있는 감정을 숨기지 말고 내어 놓으라는 뜻입니다.

(62:8)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 손을 들지어다 >는 의미는 하나님께 항복을 선언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절박한 기도와 탄원의 기도를 예레미야가 요청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예레미야의 슬픔의 애원을 들으면서 이렇게 예레미야 애가를 정리해보았습니다.


예레미야는 고통의 이유를 말했다. 그리고 슬픔을 노래했다.

그러나 고통과 슬픔을 소망의 기도로 바꾸고 있다.

예레미야는 고통받는 이들을 향해 마음에 애가 쓰이고 있다.

그리고 슬픔을 당한 이들을 때문에 애가 탄다.

그래서 어떻게 할수 없어서 애끓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다.

예레미야는 우리의 죄악으로 인한 끓어 오르는

여호와의 분노를 자신의 눈물과 기도로 식히고 있다.








  • <예레미야 애가 2: 11-17>
  • 누가 너를 고쳐줄소냐 


# 설교문중 그림 인터넷 갈무리함 

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 예레미야 애가 2:1117 >

제목 : <예레미야애가 2:11-17> 누가 너를 고쳐줄소냐




 

[2:11-17]

(2:11)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딸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 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기절함이로다

(2:12) 그들이 성읍 길거리에서 상한 자처럼 기절하여 그의 어머니들의 품에서 혼이 떠날 때에 어머니들에게 이르기를 곡식과 포도주가 어디 있느냐 하도다

(2:13) 딸 예루살렘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증거하며 무엇으로 네게 비유할까 처녀 딸 시온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비교하여 너를 위로할까 너의 파괴됨이 바다 같이 크니 누가 너를 고쳐 줄소냐

(2:14) 네 선지자들이 네게 대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보았으므로 네 죄악을 드러내어서 네가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지 못하였도다 그들이 거짓 경고와 미혹하게 할 것만 보았도다

(2:15) 모든 지나가는 자들이 다 너를 향하여 박수치며 딸 예루살렘을 향하여 비웃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온전한 영광이라, 모든 세상 사람들의 기쁨이라 일컫던 성이 이 성이냐 하며

(2:16) 네 모든 원수들은 너를 향하여 그들의 입을 벌리며 비웃고 이를 갈며 말하기를 우리가 그를 삼켰도다 우리가 바라던 날이 과연 이 날이라 우리가 얻기도 하고 보기도 하였다 하도다

(2:17) 여호와께서 이미 정하신 일을 행하시고 옛날에 명령하신 말씀을 다 이루셨음이여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무너뜨리사 원수가 너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게 하며 네 대적자들의 뿔로 높이 들리게 하셨도다

 

 


 우리가 묵상하고 있는 있는 예레미야 애가는 

  이스라엘백성들이 상가집에서 불려지는 노래입니.

  이 예레미야 애가는 알파벳 22글자에 맞춘 5편의 노래입니다.


그래서 모든 1-5장까지 22절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3장은 각 문자바다 3개의 절을 만들어서 22X366절로 되어 있습니다. 일종의 운율에 맞는 노래입니다. 흔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외우기 쉽게 기억하기 쉽게 하기 이해서 일부러 히브리어 알파벳에 맞춘것입니다.


이 애가의 노래의 원래 제목은 < 어찌하여 >라는 뜻을 갖고 있지요. 원래 예레미야 애가의 히브리식 제목은 < 어찌하여 >라는 뜻을 같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패망해가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 진노를 경험하고 있는 예루살렘을 의인화 하여 마치 시온의 딸의 죽음을 노래하듯 < 슬픈 애가 >를 부르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계속 하나님께로 돌아오길 그리고 하나님 반대편으로 가던 길을 멈추어서기를 요청하였지만 유다왕과 유다백성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선택하고 결정하는 대로 행했고 그 결과 < 올것이 오고 말하고 말하것이 이루어지고 말았습니다. >

 

패망하는 유대백성들이 이방나라의 손에 넘어가는 가는 것보다 더 예레미야의 마음을 안타깝게 만들었던 것은 < 충분히 이 일들이 일어나지 않게 할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 기회를 놓쳐버렸다>는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 이면에 하나님의 진노의 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2:17) 여호와께서 이미 정하신 일을 행하시고 옛날에 명령하신 말씀을 다 이루셨음이여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무너뜨리사 원수가 너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게 하며 네 대적자들의 뿔로 높이 들리게 하셨도다

 

우리가 삶의 살면서 가장 안타까운 때는 < 경고를 받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 것과 버러질 같은 일이 일어날 때 >입니다. 그 일의 결과와 결론이 뻔히 보일 때 아직 그 일을 멈추지 못하고 돌아서지 못하는 때가 가장 안타깝습니다.

 

오늘 이 < 애가 >를 쓰고 있는 예레미야는 바로 그런 안타까운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수없이 경고하고 권면하고 전했던 그 경고가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그 안타까운 현실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께 기름부은 왕은 도망하려고 시도했으나 체포되었습니다. 제사장과 선지자들은 모두 성소에서 살해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맹렬한 진노로 이스라엘의 모든 군대와 병력을 무력화 시켰습니다. 그토록 유다백성들이 사랑했던 예루살렘 성은 철저하고 무너지고 파괴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 어찌하여 > 이런 일이.. 라고 할 만하는 그 일들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 예레미야 애가 2장에는 < 예루살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징벌 >이 어떠한 수준인지? 분명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관심의 초점은 의인화된 예루살렘으로부터 하나님께서 행하고 계신 하나님께서 주도하고 계신 이 진노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 눈으로 보고 있는 안타까운 유다의 현실을 슬퍼하며 울부짖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5가지의 현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패망의 풍경과 같은 모습입니다.

 

1) 예루살렘이 이방나라의 군대에 의해서 포위되어서 당해서 굶주림과 배고품

[2:11-12]

(2:11)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딸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 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기절함이로다

(2:12) 그들이 성읍 길거리에서 상한 자처럼 기절하여 그의 어머니들의 품에서 혼이 떠날 때에 어머니들에게 이르기를 곡식과 포도주가 어디 있느냐 하도다

 

먹을 것을 구하며 어미의 품에서 목숨을 잃어가는 아이들을 묘사하며 예레미야는 울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어찌하여 이런 참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단 말인가 !

 

2) 그러한 현실속에서 헛된 위로를 슬퍼하는 친구들을 필사적으로 위로하는 사람들의 모습

    이미 절망이 가득한 현실들 

(2:13) 딸 예루살렘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증거하며 무엇으로 네게 비유할까 처녀 딸 시온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비교하여 너를 위로할까 너의 파괴됨이 바다 같이 크니 누가 너를 고쳐 줄소냐

 

어찌하여 이 현실을 비유하며 비교할까? 그리고 어찌하여 누가 이 현실속에서 위로하며 고쳐줄수 있으랴 !

 

3) 자신들의 거짓말을 믿도록 백성들을 격려하며 예루살렘의 멸명을 서둘러 불러오고 있는 거짓선지자들의 모습

(2:14) 네 선지자들이 네게 대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보았으므로 네 죄악을 드러내어서 네가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지 못하였도다 그들이 거짓 경고와 미혹하게 할 것만 보았도다

 

어찌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에 사로잡혀 있고 어찌하여 거짓 경고와 미혹을 보고 있는가?

 

4) 세상의 조롱거리고 비웃음 거리가 되어 버린 현실

(2:15) 모든 지나가는 자들이 다 너를 향하여 박수치며 딸 예루살렘을 향하여 비웃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온전한 영광이라, 모든 세상 사람들의 기쁨이라 일컫던 성이 이 성이냐 하며

(2:16) 네 모든 원수들은 너를 향하여 그들의 입을 벌리며 비웃고 이를 갈며 말하기를 우리가 그를 삼켰도다 우리가 바라던 날이 과연 이 날이라 우리가 얻기도 하고 보기도 하였다 하도다

 

어찌하여 우리가 저들의 비웃음 거리고 되고 저들의 삼킨바 되었는가 ?

 

5) 재앙을 당한 남은자들이 낙망하여 하나님께 끊임없이 울부짖고 있는 모습

[2:18-19]

(2:18) 그들의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딸 시온의 성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를 쉬게 하지 말지어다

(2:19) 초저녁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각 길 어귀에서 주려 기진한 네 어린 자녀들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 하였도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유다의 멸망의 현실을 지켜보고 그것을 < 어찌하여 > 라는 노래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예레미야의 심정으로 바꿔서 리메이크 해서 불러 보면 이런 노래가 될것입니다.

어찌하여 이런 참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단 말인가 !

어찌하여 이 현실을 비유하며 비교할까?

그리고 어찌하여 누가 이 현실속에서 위로하며 고쳐줄수 있으랴

어찌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에 사로잡혀 있고

어찌하여 거짓 경고와 미혹을 보고 있는가

어찌하여 우리가 저들의 비웃음 거리가 되고 저들의 삼킨바 되었는가 ?

어찌하여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려야 되지 않겠는가?

어찌하여 너는 네 마음을 주의 얼굴앞에 물쏟듯 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오호라.. 나는 보았네, 나는 보고 있네 이러한 우리네 현실을

 

사랑하는 여러분

이러한 예레미야의 울부짖음과 슬픈노래가 그 당시 유다만의 현실입니까?

 

구속사적 성경해석의 고전인 반더발 성경연구라는 책을 쓴 < 반더발 >은 이 유다의 현실을 유다 나라의 타락과 패망을 보기보다는 < 교회의 타락과 패망 >을 묵상해야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은 구약의 교회입니다. 유다의 백성과 지도자들은 구약의 교회의 성도이며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예레미야의 애가는 < 타락한 교회의 이야기이며 애곡하는 교회 >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점에서 이 예례미야가 슬퍼하고 안타까워하고 있는 구약의 유다의 상황과 오늘의 교회들의 상황과 그리고 우리의 영적인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묘사하고 있는 유다의 패망의 풍경이 그래로 오늘 한국교회와 이민교회안에서 부여지는 풍경들입니다.

그리 낯설지 않은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들에 대해 예레미야의 심정으로 울고 기도하는 이들이 많이 않다는 것이 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한국교회안에 일어나는 뉴스들을 들을 때면 < 어찌 이런일이 ... >라고 생각할 만한 기상천회한 뉴스들이 많습니다. 교회안에서 그리고 교회밖에서..

 

이미 교회가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비웃음 거리가 된지 오래입니다.

이미 사람들은 교회지도자들과 목회자들을 신뢰할수 없는 사람으로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배부른 비만의 상태인 한국교회는 물이 있으나 먹을 물이 없는 먹을 것이 있으나 배고픈 영적인 현실속에 놓여있습니다.

 

세상의 문화와 세계관에 포로가 되어서 영적인 아사 직전에 놓여있습니다.

교회안에서 서로를 위로하고 서로를 치유하지만 세상을 위로하고 세상을 치유하는 일에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주의 복음과 진리의 말씀을 전해야하는 교회와 목회자들은 거짓된것들이 미혹되어 거짓된 것들만 전달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더 이상 교회를 신뢰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냥 비웃음거리가 되어 버린 것이 오래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현실속에서 우리가 정작해야할 < 하나님앞에 울어야할 참 다운 회개와 돌이킴 >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 어찌하여 ... > 라고 바라보고 만 있습니다.

저 역시도 이러한 판단과 진단을 말하고 있지만 < 당신은 이 일을 위해 뭐하고 있냐 ? > 물으면 자신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제안에 이러한 예례미야의 심정을 회복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먼저 저 자신부터... 오늘의 현실을 바로 보고 예례미야의 시선과 중심을 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예레미야의 혼자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수 없었지만 그는 최소한 그의 마음안에는 하나님의 시선과 중심으로 서 있었습니다.

그래고 계속 선포했고 계속 기도했고 계속 울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제마음에 이런 기도가 있었습니다. 너는 한해동안 우리 교회와 성도들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예례미야의 심정과 마음으로 선포했으면 기도했으면 울부짖어 보았는가? 물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회개했습니다. 예레미야는 < 계속 선포했고 계속 기도했고 계속 울었는데.. 너는 뭐했냐.. 올해도 그렇게 시간만 보내고... 매일의 현실에 집착하면 매일 헛된 감정과 마음에 주목하며 살지 않았느냐 ? > 이렇게 하나님이 저에게 물어 오시는 것 같았습니다.

 

회개했습니다. 죄송했습니다. 더 할말이 없었습니다.

제가 잘할께요 ! 하고 싶었지만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해야죠.. 다시 회복해야죠.

그것이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시닌깐요.

예레미야의 심정으로 계속 선포하고 계속 기도하고 계속 울부짖고 싶습니다.

할수만 있다면 ...

 



 


  • < 전도서 9:1-10>
  • 사는 동안 그대 살아 있음에 


@ 설교문중 그림 인터넷 갈무리함 

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전도서 9:1-10>


제목 : <전도사 9:1-10> 사는 동안, 그대 살아 있음에 




[ 전도서 91-10]

1. 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 본즉 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들의 미래의 일들임이니라

2.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 선한 자와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아니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3.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 이것은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4.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

5. 산 자들은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며 그들이 다시는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니라

6. 그들의 사랑과 미움과 시기도 없어진 지 오래이니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 중에서 그들에게 돌아갈 몫은 영원히 없느니라

7.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8.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아니하도록 할지니라

9.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

10.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제목 : 사는 동안 < 그대 살아있음에>


우리가 전도서를 묵상을 할때면 반드시 고민하게 되는 주제는 < 인생, , 죽음 >이라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의 갖는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많은 이들은 < 인생과 삶 그리고 죽음의 문제 >에 대한 진정한 해답을 찾고자 노력하고 자신의 지식과 지혜를 동원해서 < 인생과 삶 그리고 죽음의 본질적인 의미 >을 이해하려는 시도들을 해왔습니다.


어떤 이들은 철학으로 어떤이들은 문학으로 어떤 이들 예술로 인간이 같고있는 필연적인 현실세계인 < 인생과 삶 그리고 죽음 >의 고민들을 표현했습니다.

 

인생에 대한 시중에 이러한 시가 있습니다.


< 그대! 살아있음에! > - 노산 이은상 -

차창을 내다보니 산도 나도 다 가더니,

내려서 들러보니 산은 없고 나만 왔네

다 두고 저만 가는 게 인생인가 하노라.

 

제가 좋아하는 노래인 < 김광석씨의 서른살 즈음에 >라는 대중 가요에 보면 이런 대목의 가사가 있습니다.


또 하루 멀어져간다 ... 점점 더 멀어져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속에 

더 아무것도 찾을수 없네. ..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

 



참 오늘의 우리의 인생과 삶 그리고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하는 노래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과 삶 그리고 죽음의 의미를 전도서의 전도자의 고백속에서 찾아 볼수 있습니다.

 

오늘 전도서 9장의 시작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1. 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 본즉 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들의 미래의 일들임이니라

 

이 구절은 앞 8장 전체의 결론부분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 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본즉 ,,, > 

바로 8장에서 말하고 있는 < 지혜자와 우매자 > < 악인들과 의인들 >의 삶의 내용을 들여다보니 해아래서 행하는 모든 것이 허무하며 해아래서 능히 삶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다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미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92절부터 전도자는 이러한 절망가운데 있는 인간들에게 놀라운 가능성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무의미한 절망의 연속입니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인생이 직면한 이 <실존적 허무>를 해결해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전도사는 절망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절망의 연속의 인생속에서 그래도 나은 삶이 있음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 우리가 사는 동안에 살아 있음의 유익 >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주제가 되는 명언이 있습니다.

 < 산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 >

 

오래전에 한국영화 신세계라는 영화에서 하정우라는 배우가 걸죽한 부산사투리로 썼던 대사가 생각납니다


< 살아 있네 > 영화상에는 조금 선정적인 용어로 쓰였지만.. 

한동안 이 < 살아 있네 >는 말이 유행이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 살아 있네 >라는 의미를 해석해보면 < 존재감과 생동감이 느껴질정도로 멋지다 >라는 의미가 될것입니다.

 

세상의 모든것은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영원불변의 법칙이 있습니다

이 법칙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뭡니까? <바로 모든 인간과 인생은 죽는다>는 것입니다.

<죽음>이라고 하는것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불변의 법칙입니다. 부자였던 사람,가난했던 사람, 많이 배운 사람, 배우지 못한 사람, 건강하던 사람, 병들었던 사람, 그 누구도 이 법칙을 피해갈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 히9:27절에 < 한 번 죽는것은 사람에게 정하신것이요,그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전도자 솔로몬은 또다시 이 죽음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것입니다.

2-3절에

2.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 선한 자와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아니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3.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 이것은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무슨 말입니까

세상의 모든 사람의 결국은 죽음을 향해 간다는 말입니다



착한자나 악한자나 결국에는 만나게되는 죽음, 평생을 무엇인가?에 미쳐살아보지만 결국 만나는것이 바로 <죽음>이라는 것을 피부깊숙히 느낀 솔로몬은 오늘 우리에게 아주 귀한 교훈을 남겨주고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같습니까?.


살아있어서 어쨌다고요? 좋다고요?나쁘다고요? 한번 봅시다.


@ 4-6절에

4절에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개보다는 분명 사자가 좋겠지만 사자가 죽었다면 오히려 개가 낫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5절에 산 자는 자신의 앞길에 대해 생각할수 있지만 죽은자는 그럴수없으며 사람들에게서 잊어진다고 하고 있습니다.

6절에 죽은자는 다시는 복받을 기회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때 인기를 끌었던 연예인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이 바로 < 잊혀져 가는 것 >이라고 합니다. 


돈을 많이 못버는것도 일이 없는것도 아니라 사람들에게 잊혀져 가는 것 그것이 가장 두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연예인들이 이러한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서 젊망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3가지 주어집니다.

< 기회 chance / 선택 choice / 도전 Challenge >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을 인생으로 ABCDEFG로 이해합니다.

A : Almight (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길 )

B : Birth ( 인생의 출생 ) C : Choice ( 인생의 선택 )

D : Death ( 인생의 죽음 ) E : Eternity ( 영원한 인생 )

F : Failure / Future ( 인생의 미래 )

G : GOOD / GOD ( 하나님의 품 )

참 재미있는 표현이 아닐수 없습니다.



여기서 한번 생각해봅시다. 도대체 솔로몬은 이 말을 왜 하고 있을까요? 죽음이 두려워서, 삶에 집착하고 있기때문에 그럴까요?


솔로몬은 더 살고싶다는 호소를 하는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아주 귀한 인생의 교훈을 주고 있는것입니다.

 

<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죽음의 문제를 철저하게 준비하라는 말입니다. 지금 주어진 현실을 비관하지만 말고, 그 어려움가운데서도 길을 찾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 


아무리 어려워도 그래도 살아있으니까 소망이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것입니다.

기억하십시요!.살아있다는 것은 기회를 의미 합니다.

오늘 솔로몬도 이제 나이들어보니까 그래도 살아있는것이 죽은것보다는 낫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이 솔로몬을 통해 주시는 말씀, 정말 보람된 인생을 사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사는동안.. 살아있는 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두가지입니다.

 

1/ 사는 동안 즐거운 마음으로 살라는것입니다.

7- 9

7.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8.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아니하도록 할지니라

9.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

사실 산다는 것도 쉬운일은 아닙니다. 여러분 사는 것이 즐거우세요.


오래된 드라마 엄마가 뿔랐다라는 드라마를 보면 김혜자가 나오는데 김혜자가 혼자 하는 독백의 대사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 누군들 자기 인생이 즐겁겠어.. 누군들 자기 인생이 마음에 들까.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알면서도 나는 내 인생이 정말 마음에 안든다


혼잣말로 하는 대사가 아직도 인상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인생에서 사는동안 즐거움을 찾지 못하면 그것만큼 절망스러운 인생은 없습니다. 오늘 하나님은 전도자의 입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7절에 먹고 마실때마다 즐거운 마음으로 하라고 하십니다.

8절에 자신을 아름답게 가꾸라고 하십니다.

9절에 가족들에게 잘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자기자신의 복이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얼마나 인생을 즐겁게 살고계십니까? 자기 자신에 대해 얼마나 자신을 가지고 사십니까? 가정의 화목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계십니까? 혹시 힘든일 많다고, 속썩이는 사람 많다고 인상파로 살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기억하십시요. 웃는 얼굴에는 복이 깃들지만, 찡그리고 화내는 얼굴에는 근심이 깃들게 되어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우리안에 세상이 줄수 없는 기쁨을 경험하고 그것을 누리고 사는 에너지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 기쁨과 즐거움으로 사는 것입니다.

 

2/ 사는 동안에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 10절에

10.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나아가 하나님믿는 일에도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 일이 재미있고 쉬운일이든, 아니면 힘들고 어려운 일이든 오늘 하나님은 네 손이 일을 당하는대로 최선을 다하라고 하십니다.

 

? 최선을 다하는곳에 아름다운 열매가 있기때문입니다.

최근에 제가 젊은 나이에 < 대상포진 >으로 조금 힘든 어려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지금 아직 얼굴에 상처가 남아있습니다

오장로님께서는 이것을 < 스티그마 >라고 표현해주셨습니다.


조금 아프면서 깨달았던 것은 < 내가 아무리 내 삶을 열심히 달려 가도 하나님이 건강을 허락하지 않으면 멈추어 설수 있구나! 운동하고 살도빼고 몸을 아끼지 않고 바쁘게 스케줄이며 잠도 덜자고 부지런히 살아도 나에게 주어진 삶은 하나님의 손에서 허락된 삶이구나 !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삶을 최선을 다해서 살지만 때로는 멈추어서 서서 쉼과 휴식이 필요하구나 !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

 

우리에게 놓여있는 삶은 최선으로 살아내야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최선도 하나님의 허락하신 은혜를 경험하면서 최선을 살아내야합니다.


오늘 말씀 8절에 깨끗한 생활을 하고 9절에 하나님이 주시것에 만족하고 10절에 할수 있는 일 열심히 하는것에서부터 우리의 삶의 최선의 준비가 시작됩니다.

 

사실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불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부족을 발견하여 더욱 노력하게됩니다


사람을 보지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적인 명예,부귀영화를 보지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행복을 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사는것이 정말 보람되고 기쁜인생인가!를 고민해보시기 바랍니다. 땀 흘리는 수고가 있는곳에 열매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먼저 살아있음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최악의 아픔이 있을지라도 그 아픔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Ezra2:43-70> There are consequences for disobeying God


2014.9.17

Morning Prayer (네이든 곽전도사)

Ezra 2:43-70




<Ezra 2:43-70> There are consequences for disobeying God

하나님을 순종함에 대한 결과가 있습니다. 



Todays passage was is a little difficult on its own, 

and yet there are still some principles we can get out of it.

오늘 말씀은 그 말씀 자체로는 조금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얻을수 있는 원리가 있습니다.  


There are consequences for disobeying God

하나님을 순종함에 대한 결과 있습니다. 



       Even after forgiveness and faithfulness (믿음), 

        the consequences (결과) remain as scars (아픔.상처).

        용서와 신실함이후에 상처가 남는 결과가 있습니다. 


       I want to highlight one passage here. They lost their identity (정체성). Some literally lost their identity in the all important genealogy 족보 (v.62).

저는 이 말씀에 하일라이트를 하기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정체성을 잃었습니다. 


       v.58 The following were those who came up from Tel-melah, Tel-harsha, Cherub, Addan, and Immer, though they could not prove their fathershouses or their descent, whether they belonged to Israel.

       v.62 These sought their registration among those enrolled in the genealogies, but they were not found there, and so they were excluded from the priesthood as unclean.

       사람들이 보계 중에서 자기 이름을 찾아도 얻지 못한고로 저희를 부정하게 여겨 제사장의 직분을 행치 못하게 하고

       Hebrews 12:6, For the Lord disciplines (훈련) the one he loves, and chastises (매질) every son whom he receives.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These days youre not supposed to hit, but in the past when you did, sometimes scars (상처) would remain. And the pain and the scars (상처) would remind you, and be a part of reminding you of the seriousness (심각함) of your mistake.


       For these people, there was a lasting scar that reminded them of the seriousness (심각함) of their sin.


       If you sin, though Gods grace is there, and forgiveness is real, consequences (결과) are also real. It is possible, if you continue in your sin, that you will build up Gods discipline (훈련). And when it unleashes, it will hurt. And it will be unpleasant.


       EX/ Jacob

       Did not have good character. 

        ( 야곱은 좋은 인물이 아닙니다. )

       He cheated  his brother. ( 그의 형제를 속였습니다.)

       He lied to his dad. ( 그의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




       And this became a normal thing for him. And God dealt with him. He brought him into the presence of his uncle Laban. Laban began to cheat and lie to him for 20 years. This, I believe, was all a part of Gods disciplining of him. That is extreme consequence. He had to work 7 years for his Rachel, and ended up getting Leah. Then another 7 years for a total of 14 years. On his return home, Rachel got sick and died. Later, his sons lied to him about his favorite son Joseph. At one point, he cried out to God, All these things are against (저항한다) me.


       But by the end, he had learned through circumstance and the discipline (훈련/매질) of the Lord. He was humble (겸손), gentle (부드러운), and mature (성숙). Even Pharaoh saw him as a man of God, and received a blessing (축복) from him.


       But the consequences (결과) remained with him.

       This is a warning (경고). Let it be a warning (경고) to us.

       There are consequences for disobeying God

       And at the end of the day, for our sin, for our disobedience, the biggest consequence is what? That Jesus had to die on the cross for it. He suffered and bled and died, and took the weight and punishment of Gods wrath for our sin. That is an enormous consequence.


       What, just so we can be justified in our anger? Just so we can revel in our laziness? Just so we can gossip and be jealous? Just so we can be greedy? Just so we can sin?

Even when we are disobedient, God is faithful (신실함) to His own people. He will not forsake them.

비록 우리가 불순종할때에도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에게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We must remember this in the hard times. We must remember this in our guilt (죄책감), and suffering 고통, and despair 절망.

       He can move huge groups of people

       50,000 people

       10,000 animals

       moved in the heart of King Darius of Persia to do this

       EX/ No matter what, Gods faithfulness will never fail. Even when we are faithless, He is faithful. There is no sin too big to stop Him from loving us and restoring us. In this world, we will see a glimpse, but in the world to come, we will see it in its entirety as God makes all things new.

What is our response to Gods faithfulness? 

하나님의 신실함에 대한 반응은 무엇입니까?


       They gave freewill offerings ( 예물) (v.68)

       Notice that it was some, not all

       They valued the temple of God


       Do we value the freedom we find in being His people forever? 

         For being the temple of God?


       When we are thankful to Gods for His faithfulness, we give freewill offerings. It is freely given, and it is given lavishly. We give our lives to God. We give all that we have to God.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함에 대해 감사할때 우리는 즐거운 예물을 드립니다. 그것은 자원하는 드림입니다. 그리고 아낌없이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 삶을 드립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할수는 모든 것을 드립니다. 

       Hebrews 12:7, 11






  • < 에스라 4:1-10>
  • 위기의 시대 : 멈출수 없는 예배 




  @ 설교문중에 그림은 인터넷 갈무리 


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에스라 4:1-10>


제목 : <에스라 4:1-10> 위기의 시대 : 더이상 멈출수 없는 예배




 

[에스라 41-10]

1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한다 함을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듣고

2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도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같이 너희 하나님을 찾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 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하니

3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

4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5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 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계획을 막았으며

6 또 아하수에로가 즉위할 때에 그들이 글을 올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을 고발하니라

7 아닥사스다 때에 비슬람과 미드르닷과 다브엘과 그의 동료들이 바사 왕 아닥사스다에게 글을 올렸으니 그 글은 아람 문자와 아람 방언으로 써서 진술하였더라

8 방백 르훔과 서기관 심새가 아닥사스다 왕에게 올려 예루살렘 백성을 고발한 그 글에

9 방백 르훔과 서기관 심새와 그의 동료 디나 사람과 아바삿 사람과 다블래 사람과 아바새 사람과 아렉 사람과 바벨론 사람과 수산 사람과 데해 사람과 엘람 사람과

10 그 밖에 백성 곧 존귀한 오스납발이 사마리아 성과 유브라데 강 건너편 다른 땅에 옮겨 둔 자들과 함께 고발한다 하였더라

 



제목 : 위기의 시대 < 더 이상 멈출수 없는 예배 >

 

70년동안 포로로 잡혀서 돌아온 유다백성들의 감격의 제사와 환희의 시간이 지나고 이제 본격적인 성전건축의 대역사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페르시아왕 고레스왕의 도움을 힘입어 그리고 돌아온 백성들이 힘을 다해 그들의 믿음과 구원 그리고 신앙의 증표와 같은 < 성전 재건 >의 박차를 다하고 있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백성들에는 < 감격의 시대 >였습니다. < 어찌 우리가.. 이러한 놀라운일에 사용되어진단 말인가? >라고 말할수 있는 감격과 기쁨이 넘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 감격의 시대 > 지나고 < 위기의 시대 >가 도래합니다




바로 그것은 그들이 유다땅에 돌아오기 전에 이미 유다땅에 살고 있는 소위 < 사마리아 사람들 >의 방해였습니다.

 

오늘 본문 에스라 4장에서는 순조롭게 순탄하게 진행될 것 같았던 < 성전 재건 >의 대역사가 심각한 위기와 갈등에 봉착하게 되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의 자손의 성전 재건을 방해하는 세력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 위기의 시대 >가 왔음을 알고 있고 다양한 성전 재건을 중단케하고 방해하는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전재건 뿐만아니라 예루살렘 성의 재건을 방해하는 세력들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에스라 4:1>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한다 함을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듣고

 

성전 건축을 방해하는 세력이 등장한 때는 바로 

<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한다는 소문을 듣고 난후였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이미 < 유다백성들이 포로로 돌아온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이 돌아오는 것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무리들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어제 본문 에스라 3장에도 그러한 <포로로 돌아온 유다백성들>을 못마땅하게 지켜보던 무리가 있었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에스라3:3>

3.무리가 모든 나라백성을 두려워하여 제단을 그 터에 세우고 그 위에서 아 침 저녁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며

여기서 < 무리가 열국 백성을 두려워하여 >라는 말은 < 비록 무리가 열국 백성을 두 려워하였지만 >으로 번역하는 것이 맞습니다.


< 모든 나라 백성 >이라는 말은 < 이미 유다땅에 살고 있는 그땅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 그들은 그 당시 팔레 스틴 땅과 그 주변 지역에 살던 여러 민족들을 가리킵니다. 그들 중 대표적 인 민족은 사마리아인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오늘 본문에도 기록하고 있는 것과 같이 <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 >이 됩니다.

 


오늘 본문 42절이후에 보면 그들의 구체적인 모습과 행동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2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도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같이 너희 하나님을 찾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 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하니

3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

 

여기서 < 소위 사마리아인들 >의 요구와 제안이 무엇입니까?

< 자기들도 하나님을 섬기니 같이 성전을 건축하자 >는 제안입니다.


이러한 소위 < 타협안 >에 대해서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이스라엘 족장들은 <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말하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 하고 대답을 합니다.

 

바로 이것인 가장 큰 위기와 갈등의 시작이 됩니다.


그렇다면 왜? 돌아온 유다사람들은 그곳에 이미 살고 있는 사마리아 사람들과 함께 성전건축을 할수 없었을 까요? 이것은 < 사마리아 사람들 >의 잘못된 신앙과 그릇된 예배의 태도 때문에 함께 할수 없었던 것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 사마리아 사람들과 그들의 신앙 >이 무엇이었는지?부터 알아야합니다.


한마디로 사마리아 신앙은 재미있게 표현하자면 < 짬짜면 신앙 >이었습니다



무언가 < 혼합된 신앙, 정체가 불분명한 신앙 >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중국집에 가면 우리의 고민은 항상 < 짜장면과 짬뽕 >을 선택하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두가지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서 만들어낸것인 바로 < 짬짜면>입니다. 두가지를 다 맛보게하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새롭게 만든 라면중에 < 짜파구리 >라는 라면된 있습니다. < 짜파게티와 너구리 >나면을 합쳐서 새롭게 탄생한 라면입니다.

 

제가 사마리안들의 신앙을 < 짬짜면 신앙 >이라고 말한 것은 < 그들이 신앙이 혼합종교로서 유일한 참신이신 여호와 하나님 만을 섬기는 신앙을 버리고 바벨론과 페르시아 온갖 신들을 함께 섬기는 신앙을 받아 들였습니다. >


사마리아 사람들은 앗수르의 혼합정책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앗수르 나라가 이스라엘을 지배할 때 이방나라는 유다나라의 민족과 신앙을 말살정책을 썼습니다


그래서 앗수르는 이스라엘에 이방사람들을 이주시킵니다. 그리고 이방사람과 유다사람들이 결혼을 하게 만들고 자연스럽게 이방신들을 가져와 섬기게 만듭니다. 바로 이것은 < 민족 혼합정책 >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형성된 민족이 소위 < 사마리아 사람들 >입니다.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앗수르 사람들을 사마리아 땅에 이주시킨 일은 열왕기하 1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왕기하 17:24> 앗수르 왕 이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 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매 저희가 사마리아 를 차지하여 그 여러 성읍에 거하니라

 

그런데 그들은 사마리아 땅에서 여호와 하나님를 섬긴 것이 아니고 그들의 신들과 여호와를 함께 섬기려 했습니다. 그들은 우상숭배자들 이었고 혼합주의자들,종교 다원주의자들이었습니다.


<열왕기하 17:28-34, 41>은 그들에 대해 자세히 기록합니다.

이에 사마리아에서 사로잡혀간 제사장 중 하나가 와서 벧엘에 거하며 백성에게 어떻게 여호와 경외 할 것을 가르쳤더라.그러나 각 민족이 각기 자기의 신상들을 만들어 사마리아 사람의 지은 여러 산당에 두되 각 민족이 자기의 거한 성읍 에서 그렇게 하여 바벨론 사람들은 숙곳브놋을 만들었고 굿 사람들은 네르갈을 만들었고 하맛 사람들은 아시마를 만들었고 아와 사람들은 닙하스와 다르닥을 만들었고 스발와임 사람들은 그 자녀를 불살라 그 신 아드람멜렉과 아남멜렉에게 드렸으며 저희가 또 여호와를 경외하 여 자기 중에서 사람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택하여 그 산당에서 자기 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게 하니라.이와 같이 저희가 여호와도 경외하 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저희가 오늘까지 이전 풍속대로 행하여 여호와를 경외치 아니하며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이라 이름을 주신 야곱의 자손에게 명하신 율례와 법도와 율법과 계명을 준행치 아니하는도다.

 

사마리아를 중심해 거주했던 그들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자들 이 아니었기 때문에 스룹바벨과 유다 지도자들은 그들과 함께 여호와 의 전을 건축할 수 없었습니다.

유다민족안에는 2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 포로로 잡혀갔지만 순수한 혈통과 순수한 신앙을 지키고 순수한 예배를 드렸던 사람들

그러나 

< 포로로 잡혀가지 않았지만 혼합된 혈통과 순수한 신앙을 지키지 못하고 혼합된 예배를 드렸던 사람들 >로 나눕니다


이들이 따로 떨어져 살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 포로로 잡혀갔단 이들이 돌아오면서부터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순수한 예배를 드렸던 사람들이 혼합된 예배를 드렸던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것에서부터 < 위기의 시대 >가 도래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장면의 모습을 어떻게 보십니까? 사마리아 사람들과 돌아온 유다사람들이 함께 성전을 재건해야한다고 생각하십니다. 아니면 오늘 유다사람들이 보여준 모습처럼 분명한 선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에스라서에서 < 사람들이 사마리아 사람들과 함께 성전을 지을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 


이미 우리는 3장에서 유다인들이 자신의 고국땅으로 돌아와 드리는 첫 예배와 제사의 장면을 보았습니다. 감격과 환희의 시대가 열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면에서 빠진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은 < 회개와 자복 >입니다.

 

아마 사마리아사람들이 예배와 제사를 드리는 돌아온 유다사람들과 함께 < 자신이 행한 잘못들과 잘못된 신앙을 돌이키고 회개와 자복 >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면 어쪄면 함께 성전을 건축하는 일을 이룰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마리아 사람들은 중심에는 < 그들이 혼합된 신앙 소위 짬짜면 신앙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


사마리아 사람들이 함께 성전을 짓자는 동기속에는 < 거짓된 동기와 순수하지 못한 목적 >이 있었습니다. < 유일한 참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들의 수많은 신중에 하나로 여기는 거짓된 동기 > 그리고 < 다른 여러신들의 도움을 받아 복받으면 살았는데 이제 여호와 하나님한테도 복받으면 살아보자 하는 순수하지 못한 목적 >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사마리아인들이 지나온 자신의 잘못된 신앙을 반성하거나 회개하는 대목이 안나오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 이유를 찾을수 있습니다.

 

오래전 한국 기독교 역사에 신앙 순수성을 입증하는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 신사참배>사건입니다






우리나라가 일제식민지에 있을 때 교회도 일제천황 폐하를 섬기고 절하는 것을 요청받습니다. 이 신사참배의 사건은 공교롭게도 <한국 교회 장로교 교파의 태동>과도 아주 밀접한 관계있습니다.


일제 천황을 신으로 섬기는일에 찬동하고 신사참배를한 교회와 목회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제 천황을 신으로 섬기지 않고 거부하고 투옥되고 순교를 당한 교회와 목회자가 있었습니다.





결국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면서 바로 이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부류><신사참배에 참여하는 부류>로 나눕니다

이것이 교회의 분열과 나눔의 시작이 됩니다





해방 후 한국 교회에는 신사 참배 회개 문제가 일제 잔재 청산의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었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 생긴 교단이 제가 속한 < 고신 교단 >입니다


어떤일들은 신사참배문제를 회개하고 돌아온 이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신사참배하는데은 어쩔수 없는 이유가 있다고 회개를 거부하는 부류들이 있었습니다. 


국교회와 교단의 문제는 < 회개가 없이 서로를 향한 정죄가 있었기에 교단이 분열되고 교회가 갈등을 맞았습니다. 신앙의 문제를 정치의 문제로 풀어간 것이 분열의 시작이었습니다. 오늘도 한국교회의 이러한 고질적인 문제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

 

우리 한국교회 역사속에서 < 신앙의 순수성과 예배의 진실성 >을 지켜내는 것에 많은 위기와 갈등이 있었습니다.


오늘 에스라 4장에 등장하고 있는 상황역시 그러한 < 위기의 시대 >의 도전앞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 우리의 시대가 예배의 감격을 경험할수 있는 은혜의 시대, 감격의 시대인 동시에 우리의 예배가 방해받고 예배가 실패할수 있는 위기의 시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우리가 예배하기를 결단하고 예배에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집중하지 않으면

우리의 예배의 집중력은 세상의 수많은 방해와 유혹속에서 실패하고 맙니다.

우리의 예배는 집중력을 잃지 않은 것이 중요합니다.


< 우리의 예배가 무언가에 의해서 방해받을수 있다. >

< 우리의 예배가 누언가에 의해서 계속 공격받고 있다. >

< 우리의 예배가 어디선가 잘못되어 갈수 있다 > 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오늘 우리는 오늘 말씀을 보면서 이런 <적용질문>을 만들 수 있습니다.

1/ 나의 예배를 가장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가?


2/ 나의 예배는 나의 필요에 의해서 드려지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고 싶은가?


3/ 내가 진정으로 예배하고 싶은 동기와 중심은 무엇인가?



4/ 내안에 짬짜면 신앙같은 선명하지 못한 신앙은 무엇인가?








  • <에스라 3:1-13>
  • 감격의 시대 : 다시 세우는 예배 




  • @ 설교문 그림은 인터넷 갈무리함  




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에스라 3:1-13>


제목 : <에스라 3:1-13> 감격의 시대 : 다시 세우시는 예배



[에스라31-13]

1. 이스라엘 자손이 각자의 성읍에 살았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일제히예루살렘에 모인지라

2.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그의 형제제사장들과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그의 형제들이 다 일어나 이스라엘 하나님의제단을 만들고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번제를 그 위에서 드리려 할새

3.무리가 모든 나라백성을 두려워하여 제단을 그 터에 세우고 그 위에서 아침 저녁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며

4. 기록된 규례대로 초막절을 지켜 번제를 매일 정수대로 날마다 드리고

5. 그 후에는 항상 드리는 번제와 초하루와 여호와의 모든 거룩한 절기의 번제와 사람이 여호와께 기쁘게 드리는 예물을 드리되

6. 일곱째 달 초하루부터 비로소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으나 그 때에 여호와의 성전 지대는 미처 놓지 못한지라

7. 이에 석수와 목수에게 돈을 주고 또 시돈 사람과 두로 사람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기름을 주고 바사왕 고레스의 명령대로 백향목을 레바논에서 욥바해변까지 운송하게 하였더라

8.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이른 지 이 년 둘째 달에 스알디엘의 아들스룹바벨과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다른 형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무릇 사로잡혔다가 예루살렘에 돌아온 자들이 공사를 시작하고 이십 세 이상의 레위 사람들을 세워 여호와의 성전 공사를 감독하게 하매

9. 이에 예수아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형제들과 갓미엘과 그의 아들들과 유다 자손과 헤나닷 자손과 그의 형제 레위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하나님의 성전 일꾼들을 감독하니라

10. 건축자가 여호와의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자손 레위 사람들은 제금을 들고 서서 이스라엘 왕다윗의 규례대로 여호와를 찬송하되

 11. 찬양으로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이르되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 기초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

12.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

13. 백성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간하지 못하였더라


 

제목 : 감격의 시대 : 다시 세우는 예배

 

오늘 본문은 이제 본격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온 본연의 목적인 <성전 재건의 준비>가 시작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 에스라서의 기록과 말씀의 내용을 후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어떻게 유대인들이 이 에스라서를 읽었을까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은 이 에스라서를 읽고 이방나라 페르시아로부터 돌아온 유대민족과 그들이 이루어낸 대 역사 성전재건의 사건이 그들에게는 < 감격 >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에스라서에 성전재건의 기록들과 역사들은 유대인들에게는 < 감격의 시대 >을 알게하는 그런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오늘의 에스라 3장의 장면을 보아도 얼마나 감격적인 일인지 옅볼수 있습니다.


이방나라에 잡혀가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민족이 모두다 없어질 위기에 처했었습니다. 흔적도 없이 나라가 사라졌고 그들이 살던 땅도 빼앗겼습니다. 그들의 영적인 자존심이요 핵심가치였던 성전마처 처참하게 느부갓네살의 손에 의해서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에게 성전이 무너졌다는 것은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게임오버, 디엔드 >를 알리는 신호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마지막희망마져 사라지고 그들의 눈앞에 무너진 성전은 < 자신들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듯한 절망감 >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하나님이 그들에게 약속하여 주신 약속에 땅에 살수 없도록 포로로 잡혀갑니다. 심지어 그들이 이름조차도 바벨론식 이름으로 바꿔야만했습니다


어제 2장의 본문에 보면 그들의 족보도 모른 사람들이 많았고 심지어 제사장들의 가문조차도 그들의 이름이나 뿌리를 밝히지 못하고 불분명해서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는데 제외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그들이 포로로 잡혀간 70년의 세월은 < 잊혀진 세월 잃어버린 시간 >이었습니다. 페르시아의 식민지의 백성으로 살아야 했고 그들의 정체성을 상실했던 < 정체성의 위기요, 상실의 시대 >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 감격의 시대 >가 도래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도움과 선한 손길로 그들은 이방땅 페르시아에서 기적같이 돌아오고 됩니다. 그러고 7월이 되었습니다.


최근의 국제 뉴스중에서 가장 뜨거운 뉴스가 < 스코틀랜드 >의 독립투표에 관한 뉴스일것입니다. 아마도 오늘 오전이면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 연방에서 독립하느냐? 마느냐?가 투표로 결정됩니다. 실제로 잉글랜드는 < 엥글로 색슨족 >입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는 < 캘트족 >입니다. 같은 나라이지만 실제로는 민족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스코틀랜드는 영국으로 독립을 원했습니다. 서로 다른 민족이기 때문이죠. 아마도 스코틀랜드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으로 결정하게 되면 정말 < 감격적인 환희 >가 거리에 넘쳐 날것입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 에스라 3장에서 돌아온 이스라엘백성들은 드디어 7월을 맞이합니다. 7월은 <일곱째달><다스리월>로써 유대인들이 1년중에 종교적으로 가장 거룩한 날로 여기고 있습니다. 71일은 나팔절, 710일은 속죄일, 722일은 초막절입니다. 아마도 제사장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이러한 거룩한 달을 맞아서 먼저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리도록 결심을 한 것 같습니다.

 

실제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정착한 기간은 3개월동안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인 바벨론에서 팔레스틴까지 돌아오는 거리가 1.440킬로( 마일)미터 정도인데 그당시로는 걸어서와야 하기에 약 4개월 정도가 걸립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제 제사를 드리는 때가 9-10월 정도라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겨울철이 지난 봄경에 바벨론을 출발해서 4개월 정도 여행을 한 끝에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일제히 모여서 제사를 드리고 초막절을 지킨 것은 그들이 돌아온진 얼마되지 않아서 일것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토로 돌아온 뒤 약 3개월 후일것입니다.


 

그 기간을 보내는 동안 어쩌면 조심스러운 시간을 보냅니다. 새롭게 삶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집도 짓고 밭도 일구고 일단 먹고 살 일들을 했겠죠.. 그러다가 3개월이라는 시간이 흐릅니다.

 

에스라 31- 2절에

1. 이스라엘 자손이 각자의 성읍에 살았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일제히예루살렘에 모인지라

2.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그의 형제제사장들과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그의 형제들이 다 일어나 이스라엘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고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번제를 그 위에서 드리려 할새

 

3개월이 지난후에 각자의 성읍에서 살던 이들이 일제히 예루살렘으로 모입니다. 그 중심에는 < 제사장들인 예수아와 스룹바벨, 그의 형제들 > 있습니다.

어느 정도 먹고 살수 있을 말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여 단을 쌓고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고 모세의 율법대로 초막절을 지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와 3개월이 흐른 시점이 초막절을 지키는 시점과 맞았습니다. 오늘의 달력으로 말하면 9-10월즘이 되겠죠.


조금 재미있게 표현하면 < 바벨론에서 돌아온 후 3개월, 10월의 어느 멋진날에 제사를 드리고 단을 쌓습니다. >


다윗 집안의 출신인 스룹바벨은 앞쪽으로 나서게 됩니다. 대제사장 예수아(여호수아)와 함께 그는 제단을 그 본래 있던 자리에 다시 세울 책임을 맡습니다. 놀랍게도 솔로몬의 시대에 솔로몬의 성전이 완성되고 봉헌될때가 때가 바로 10월의 어느날 초막절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우리교회 설립주년도 10월 이네요..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 감격의 시대 >를 보내고 있습니다

다시금 회복되고는 제단을 바라보면서

다시 드려지는 제사의 향기를 맡으면서

다시 지켜지는 은혜의 절기를 지키면서

그리고 다신 기초가 놓아지고 있는 임재의 성전을 바라보면서

예배가 회복되어지는 감격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는 감격만은 있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 자신의 땅을 돌와왔지만 그땅을 차지하고 있는 < 사마리아 사람들 >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에스라 33-4

3.무리가 모든 나라백성을 두려워하여 제단을 그 터에 세우고 그 위에서 아침 저녁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며

4. 기록된 규례대로 초막절을 지켜 번제를 매일 정수대로 날마다 드리고

5. 그 후에는 항상 드리는 번제와 초하루와 여호와의 모든 거룩한 절기의 번제와 사람이 여호와께 기쁘게 드리는 예물을 드리되

6. 일곱째 달 초하루부터 비로소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으나 그 때에 여호와의 성전 지대는 미처 놓지 못한지라

 

그러나 그 두려움도 내려놓고 하나님께 제단을 세우고 번제를 드리며 규례대로 초막절을 지키면 여호와께 드리는 예물을 드리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감격과 환희는 우리의 삶에서 드리는 예배의 현장에서 결정됩니다

예배의 퀄리티가 우리의 삶의 퀄리티이면 우리의 감격의 퀄리티입니다.


오늘 본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행위를 4가지 동사로 요약할수 있습니다. < 세우고 - 드리고 - 지키고 - 드리는 >것을 요약됩니다.


먼저 우리의 삶에 무너진 잊혀진 제단을 세우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합니다. 그것이 개인적인 예배의 제단일수도 있고 공동체의 성전이 될수 있습니다. 예배하는 행위는 우리안에 무져있던 예배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 여호와의 유월절 >이라는 찬양에 보면 마지막 가사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 내안에 무너졌던 모든 예배 다 살아나리라. >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안에 무너졌던 모든 예배가 다 살아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냥 무너진 상태로 내버려두고 있습니까

아님 죽었고 무너졌던 예배를 다시 살리도록 몸부림 치고 있습니까?

 

두 번째 하나님께 온전한 헌신과 사랑과 감사를 표현하는 번제를 드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4-5절에 < 번재를 매일 정수대로 날마다 드리고 그후에는 항상 드리는 번제와 ...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마음에 와닿는 메시지는 번제를 드리는 자세입니다. < 매일... 날마다.. 항상 .. > 실제로 이스라엘백성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모세의 율법대로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번제는 <매일 항상 날마다 드리는 우리의 예배>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경험을 매일 같이 날마다 그리고 항상 경험하는 것이 참다운 예배자의 삶입니다. 우리의 삶의 매일 항상 날마다 감격의 시대를 만들어 내는 방법은 우리의 일상속에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을 위한 < 매일의 예배의 감격 >을 경험하게 될것입니다.


이런말이 있죠 < 에브리데이 해피데이 > 우리의 삶의 에브리데이 해피데이가 되는 것은 바로 < 내 삶에서 매일 예배가 드려지고 있고 예배를 경험하고 있을 때 > 가능합니다.

 

세 번째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때를 지켜서 하나님을 기쁘게해 드리는 것이 있어야합니다. 이스라엘의 절기와 그들이 드리는 예물의 중심에는 < 하나님의 기쁨 위하여 >라는 의미가 항상 따라 다닙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때, 하나님의 기쁨이 드리는 예물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자주 이렇게 노래 부르죠

<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



바꾸어서 말하면서 <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지지 못하면 하나님의 기쁨이 되지 못합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의 절기와 예물은 자신이 < 하나님 만을 기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되기 원합니다 >라고 하는 표현이었습니다.


항상 예배의 중심에는 < 나의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에 주목>행합니다. 내가 받을 은혜보다는 하나님께서 주실 은혜에 대한 기대가 먼저입니다. 내가 받고 싶은 말씀보다 하나님께서 주실 말씀에 대한 기쁨이 먼저입니다.

항상 우리의 신앙에 감격이 상실될때는 예배가 나중심을 바뀌어 있을때입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70년의 바벨론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와서 그들안에 가장 먼저 회복되기 원하셨던 마음은 < 예배의 감격>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예배의 감격을 회복하는 시대가 바로 에스라의 시대였으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적에 바로 그러한 감격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어떻게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찬양하면 소리치면 울면 웃으면 즐거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지가 나옵니다.

에스라 311-13

 11. 찬양으로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이르되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 기초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

12.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

13. 백성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간하지 못하였더라

 

얼마나 기쁘고 감격적이었는지? 큰소리로 노래하고 큰소리로 통곡하고 큰소리로 함성을 지르고 큰소리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가 그 도시를 가득채웠습니다. 바로 < 감동과 감격의 도가니 deep emotion>가 된것이죠.


다 표현할수 없고 다 주체할수 없는 기쁨이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아네 있음을 봅니다.

 

그 사랑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사랑 얼마나 날 부요케하는지

그 사랑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그 사랑 얼마나 나를 감격하게 하는지

 

우리는 이것을 주목해서 보아합니다.


1/ 무엇이 나를 감격하게 하고 기쁨게 하는가?

 


2/ 나는 매일 날마다 항상 예배에 성공하고 있는가?

 


3/ 나를 주체할수 없게 만드는 예배는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 <에스라 1:1-5 ; 2:1-2>
  • 100년동안 다시 세우는 예배공동체 
  • 09/16/2014

@ 설교문 그림은 인터넷 갈무리함 


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에스라 1:1-5, 2:1-2>


제목 : <에스라1:1-5, 2:1-2> 다시 세우시는 예배공동체




 

[에스라11-5]

1.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2.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3.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4.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머물러 살든지 그 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그 밖의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 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에 세울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예물을 기쁘게 드릴지니라 하였더라

5.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나니




[ 에스라 21-2]

1. 옛적에 바벨론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바벨론으로 갔던 자들의 자손들 중에서 놓임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 도로 돌아와 각기 각자의 성읍으로 돌아간 자

2. 곧 스룹바벨 예수아 느헤미야 스라야 르엘라야와 모르드개와 빌산 미스발 비그왜 르훔 바아나 등과 함께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명수가 이러하니





제목 : 100년동안 다시 세우시는 예배 공동체

 

지난주간까지 <에스더서>가 끝나고 이번주부터 <에스라서>본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은 에스라서의 전체적인 개관적인 흐름을 이해하는 1장과 2장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흔히 <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는 동시대의 상황을 배경으로 각기 다른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살펴볼수 있는 말씀입니다. 


< 에스더 느헤미야 에스더 >를 연대기적으로 배열한다면 < 에스라 - 에스더 - 느혜미야 >로 재배열할수 있을 것입니다.


주로 이 세가지 말씀은 이스라엘의 1,2,3차 포로귀환이 진행되었던 5세기에 일어난 사건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원래 히브리 원문 성경에는 < 에스라와 느헤미야 >가 한 권으로 책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bc 538-433년까지 약 100년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바사왕 고레스왕부터 캄비아스, 다리오, 아하수에로, 아닥사스다왕까지의 여러대의 걸친 페르시아 제국의 세속의 역사와 함께 쓰여지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주된 이야기와 사건들의 배경은 <3번에 걸친 바벨론 포로 귀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다 시피 이스라엘과 유다백성들이 이방나라 <앗수르와 바벨론>에 멸망합니다.


이 멸망은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앗수르 마져도 바벨론 대제국앞에 무릎을 꿇고  그 사이에서 이스라엘과 유다백성들은 3번에 걸쳐서 포로로 잡혀갑니다.

그리고 바벨론은 바사나라 곧 페르시아 대 제국에 의해서 멸망하게 됩니다. 


바벨론에서 70년의 포로생활을 한후에 3번에 걸쳐서 포로귀환이 이루어집니다. 1차귀환은 < 스룹바벨 >과 함께, 2차 귀환은 < 에스라 >와 함께, 3차 귀환은 <느헤미야>와 함께 돌아오게 됩니다.


우리는 3번에 걸쳐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간것은 < 바벨로 유수 >라고 

말합니다.



 3번에 걸쳐서 바벨론에서 돌아온것을 < 바벨론 포로 귀환 >이라고 말합니다. 공교롭게도 3번에 걸쳐서 잡혀가고 3번에 걸쳐서 돌아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과 유다백성이 구사일생으로 70년의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올수 있는 것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손길과 구원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역대기서를 보면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의 예루살렘의 파괴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는 장면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끝맺고 있습니다.

 

역대하 36:21-23

21. 이에 토지가 황폐하여 땅이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더라

22.바사의 고레스 왕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여호와께서 바사의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23. 바사 왕 고레스가 이같이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을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그의 백성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이 역대하 마지막장 마지막절은 고스란히 에스라 11-3절에 다시 반복하고 있습니다.

1.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2.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역대기 기자는 유대인들이 바벨론을 떠나 귀환하는 문제를 미결상태로 남겨놓은 반면에 에스라는 그 귀환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과정속에는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손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예레미야를 통해서 자신의 백성이 돌아올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예레미야 25:11-13

11. 이 모든 땅이 폐허가 되어 놀랄 일이 될 것이며 이 민족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의 왕을 섬기리라

12.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칠십 년이 끝나면 내가 바벨론의 왕과 그의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악으로 말미암아 벌하여 영원히 폐허가 되게 하되

13. 내가 그 땅을 향하여 선언한 바 곧 예레미야가 모든 민족을 향하여 예언하고 이 책에 기록한 나의 모든 말을 그 땅에 임하게 하리라

 

예레미야 29:10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그리고 이사야 451절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돌아오는 일에 <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종 >의 역할을 바사 나라 < 고레스왕(Cyrus) >이 감당할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45:1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그 앞에 열국을 항복하게 하며 내가 왕들의 허리를 풀어 그 앞에 문들을 열고 성문들이 닫히지 못하게 하리라

 



오늘 에스라서에 기록되어 있는 바벨론 포로 귀환의 사건은 갑자기 일어나는 행운같은 일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고 그것을 이루어가시는 구속의 역사와 성취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속의 시간표가 구속의 시간표로 바뀌는 장면입니다.


실패의 시간표가 은혜의 시간표로 바뀌는 역사입니다. 


우리는 에스라서속에 담겨있는 <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와 성취 >를 주목해서 보아야 합니.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속의 역사속에서 자기 백성을 끝까지 보호하시고 끝까지 자신이 하신 약속을 지키시는지를 우리는 주목해서 보아야 합니다.

 

에스라서 11절을 읽으면서

1.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


< 바사왕 고레스 원년에 >에는 대목은 세속의 역사적인 배경을 설명해줍니다. 그러나 <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라는 대목에서 이 세속의 역사를 도구삼아 자신의 구속의 역사를 써내려 가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손길과 계획을 주목해서 보아야합니다.

바로 이 대목이 세속사가 구속사가 바뀌는 대목입니다. 세속의 주인공이 하나님의 선한 일에 주인공이 되는 대목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상적인 시간과 일어나는 사건들 그리고 상황들>은 그냥 세상적인 시간과 사건들이 아님을 명심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우리에게 <일상처럼 주어진 시간과 일어나는 사건들 그리고 상황들>을 구속의 은혜와 고백으로 바꿔내는 능력이 있어야합니다.


우리의 일상을 구속의 묵상으로 바꾸는 능력

우리의 시간을 구원의 시간으로 바꾸는 능력

우리의 상황을 구원의 감격으로 바꾸는 능력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을 구속사로 다시 써내려가는 능력입니다.

 

에스라서는 바로 그냥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일어나는 포로 귀환의 사건들만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포로 귀환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바벨론의 포로 유수의 70년의 시간, 그리고 그들이 자신에게 약속했던 그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기까지 100년의 시간을 어떻게 우리는 바라보아야 할까요?

 

먼저 우리는 왜 ?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고 심판을 당했나를 생각해보아야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철저하게 하나님께 버림 받는 심판의 고통을 당했던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그것은 < 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실패한 예배공동체였습니다. 실패한 예배자들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이 자부했던 예배의 처소인 성전도 철저하게 파괴되고 맙니다.

그들이 범죄와 가증한 태도로 하나님만을 예배하지 않았습니다. 이방나라를 의지하고 이방신을 섬기고 이방사람들과 교제하는 이들이 하나님이 참을수 없는 심판을 만들게 된것입니다. 스스로 웅덩이를 판격이 되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는 바로 < 예배의 실패 >였습니다. 제사장들이 타락하고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우상을 섬겼고 가증한 일을 행했습니다. 실제로 포로로 잡혀갈때보면 대부분이 < 제사장들과 지도자들, 귀족들이었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이들을 심판하십니다.


그러한 70년의 고통과 고난의 시간이 지나고 그들이 돌아오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그들 다시 돌아오게 하셔야 했을까요?


바로 그 이유는 < 그들이 다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보기 원

하셨기 때문입니다. >


나님께서는 바사왕 고레스의 호의와 조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이 오래전부터 약속하고 주었던 땅으로 돌아가게하십니다


그 주된 이유는 < 다시 예배공동체를 세우셔서 다시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예배자들로 세우기 위함 >이었습니다.


스룹바벨과 에스라, 느헤미야가 돌아와서 가장 먼저한 일은 바로 < 성전을 재건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예배 공동체를 다시는 세우는 일입니다.


실제로 에스라1장에 보면 바사왕 고레스(키루스)< 성전 재건을 허락하고 지원하고 있습니다. > 이것은 있을수 없는 일입니다. 이방신 말둑을 섬기고 있는 바사왕이 자신의 신도 아닌 다른 나라 신을 섬기도록 허락하는 일은 가히 상상할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바사왕 고레스의 유화적인 정책과 태도를 사용하십니다. 고레스의 자비로운 통치의 이면에는 < 하나님의 감동 >이 있었습니다





오늘 에스라 1장은 분명히 그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사왕 고레스왕의 이면에 일아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성전이 재건되고 제사가 재확립됩니다.


그리고 에스라 1장 마지막 절을 보면 놀랍겠도 빼앗겼던 성전기물들을 가지고 가게하고 성전을 건축하는 자금을 지원받게 됩니다. 어찌 이런일이 ... 세상에 이런일이... 믿거나 말거나 ...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이것 역사 하나님이 이루시는 구원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에스라 2장에 언급되어 있는 포로귀환자 명단을 면밀히 보면 < 제사장들, 제사에 수종드는 자들, 그리고 성전에 허드렛일을 하는 이방족속 느디니사람들 >이 주된 사람들 42,350명이 돌아오게 됩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성전건축과 제사를 회복하시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할 사람들 입니다.





그러한 사람중에 < 아론의 16대손, 스라야의 아들, 학사겸 제사장인 에스라 >를 통해서 그 일들을 주도하게 하십니다. 바로 에스라를 통해서 예루살렘의 성전을 재건할 뿐아니라 이스라엘 다시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공동체로 재건하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다.

이스라엡 백성의 실패는 < 예배의 실패 >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은 < 예배의 재건>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에스라서를 통해서 주목해서 묵상해야할 것은

1/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이 기뻐하는 새성전을 다시 세우고 계시는가?

2/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이 원하는 예배를 받기 위해 남은 예배자들를 구원하시는가?

3/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이 원하시는 예배공동체를 세우시는가?

 

이것을 주목해서 보아합니다.

다시 세우는 성전 재건 


다시 모으시는 예배자들 


다시 일으키시는 예배공동체

이것이 에스라서를 묵상하는 핵심방향입니다.

우리는 반대로 우리는 이렇게 적용질문을 만들어 볼수 있습니다.


1/ 나에게 무너져있고 실패하고 있는 성전은 없는가?


2/ 나는 마지막까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자인가?


3/ 나의 가정과 교회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공동체가 되고 있는가?










  • <에스더 5:1-9>
  • 왕이 반한 그녀 왕에게 반전을 요구하다.
  • 09/09/2014 


@ 설교문 그림 인터넷 갈무리함 

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에스더 5: 1 - 9>


제목 : <에스더 5: 1 - 9> 왕이 반한 그녀 왕에게 반전을 요구하다




1. 제삼일에 에스더가 왕후의 예복을 입고 왕궁 안 뜰 곧 어전 맞은편에 서니 왕이 어전에서 전 문을 대하여 왕좌에 앉았다가

2.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매우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 규를 그에게 내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 규 끝을 만진지라

3. 왕이 이르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냐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 하니

4. 에스더가 이르되 오늘 내가 왕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사오니 왕이 좋게 여기시거든 하만과 함께 오소서 하니

5. 왕이 이르되 에스더가 말한 대로 하도록 하만을 급히 부르라 하고 이에 왕이 하만과 함께 에스더가 베푼 잔치에 가니라

6. 잔치의 술을 마실 때에 왕이 에스더에게 이르되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뇨 곧 허락하겠노라 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뇨 나라의 절반이라 할지라도 시행하겠노라 하니

7. 에스더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소청, 나의 요구가 이러하니이다

8. 내가 만일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고 왕이 내 소청을 허락하시며 내 요구를 시행하시기를 좋게 여기시면 내가 왕과 하만을 위하여 베푸는 잔치에 또 오소서내일은 왕의 말씀대로 하리이다 하니라

9. 그 날 하만이 마음이 기뻐 즐거이 나오더니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있어 일어나지도 아니하고 몸을 움직이지도 아니하는 것을 보고 매우 노하나




제목 : 왕이 반한 그녀가 왕에게 반전을 요구하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5장부터는 3번의 잔치를 중심으로 벌어진 에피소드를 그리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부분부터는 <에스더서의 이야기중에서> 아주 극적인 장면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보통 TV 드라마에 어떤 극적인 장면이 나 올 때면 시청률이 몇 퍼센트 나왔다고 할 만큼 어느 한 장면이 빼 놓을 수 없는 클라이막스를 말해줍니다


오늘 에스더서 5장에 왕의 잔치에 나아가 소위 왕의 성은을 입게 되는 이러한 에스더서의 장명은 에스더서의 가장 흥미롭고 가장 시청률이 많이 나올만한 명장면이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에스더서를 드라마로 빗대어 말하면 에스더서는 흥행할만한 드라마의 3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가족 드라마>입니다. 한 유대의 소녀가 성장기와 성공기가 그려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 아픈 가족사와 민족사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방나라 페르시아에서 이름을 바꾸면서 현실에 한번 잘 살아보려고 서바이벌 해왔던 아픈 가족사가 있습니다.


둘째는 <막장 드라마>입니다. 좋은 아내와 며느리에게 나쁜 시어머니가 등장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갈등구조가 막장 같은 치열한 증오와 복수를 만들어냅니다. 에스더서에는 좋은 이야기나 교훈적인 이야기만 등장하지 않습니다. 시대의 악역을 담당하고 있는 하만의 등장과 역할은 에스더서가 막장드라마의 특징을 갖기에 충분합니다. 하만은 유대인들에게 아말렉의 후손으로 오래 원한과 미움을 갖고 있는 그런 인물입니다. 하만과 모르드개의 갈등은 서로 깊은 원한이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셋째는 <반전드라마>입니다. 에스더서에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각 장마다 각 장면마다 나타나고 있는 반전의 사건들입니다. 반전은 상황이 바뀌는 것입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해서 그 드라마의 분위기와 흘러가는 이야기를 바꿔 놓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이 에스더가 우리에게 주는 재미입니다.

 

이러한 에스더서는 <가족드라마/막장드라마/반전드라마>3가지 특징을 갖고 이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드라마를 손수 쓰고 계신 작가가 있습니다. 바로 < 여호와 하나님 >이십니다. 제가 지난번에게도 강조했지만 에스더서는 흥미로운 이야기로만 보지 말아야합니다. 에스더서를 우리에게 드라마와 같이 이야기와 같이 주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파악하는 일, 그리고 에스더를 통해서 만들어내는 에피소드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손과 섭리를 발견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손이 어떻게 에스더의 이야기를 새로운 이야기로 바꿔놓고 계시는지를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생명의 삶의 책에서 오늘 본문의 제목을 <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용기가 만날 때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름 괜찮은 제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조금 덧붙여서 < 하나님의 손과 사람의 손이 마주칠 때...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행동이 함께 일할 때 >라고 덧붙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에피소드의 타이틀을 이렇게 요약하고 싶습니다.

< 왕이 반한 그녀가 왕에게 반전을 요구하다 >


오늘 본문에 에피스도에게하나님이 일하시는 놀라운 일은 바로 <아하수에로 왕이 에스더에게 반했다는 것입니다. > 그리고 < 아하수에로 왕에게 에스더가 드라마의 반전을 일으키는 요구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바로 이 < 반함이 반전이 되는 >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로 바뀌고 있는 소위 터닝포인트와 같은 에피소드가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된 흐름은 하만이 에스더와 모르드개 그리고 유다백성들을 멸절시키려는 <막장드라마>로 짜져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막장 드라마가 반전드라마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더의 지혜와 용기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하만의 계략과 의도를 뒤집어 놓는 반전드라마의 시작이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에 51-2절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1. 제삼일에 에스더가 왕후의 예복을 입고 왕궁 안 뜰 곧 어전 맞은편에 서니 왕이 어전에서 전 문을 대하여 왕좌에 앉았다가

2.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매우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 규를 그에게 내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 규 끝을 만진지라


바로 어떻게 에스더가 어떻게 왕이 눈에 들고 어떻게 왕의 성은을 입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후궁중에서 수많은 궁중의 여인중에서 그렇게 눈여겨보지 않았던 에스더가 왕의 눈안에 드는 대목입니다. 왕이 에스더에게 반하는 장면입니다.

 

바로 이 잔치가 있기전에 < 유대인들은 3일동안 에스더와 함께 금식을 했습니다. > 그리고 에스더 용기를 내어 죽으면 죽으리다는 고백을 실행하는 행동을 감행합니다. 왕의 부름을 입지 않았는데오 왕궁안뜰에 들어가서 왕을 보려하는 것입니다. 그전까지 에스더는 왕의 부름을 입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4장에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전한 말속에서 에스더의 상황과 중심을 알수 있습니다.

411. 왕의 신하들과 왕의 각 지방 백성이 다 알거니와 남녀를 막론하고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뜰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가면 오직 죽이는 법이요 왕이 그 자에게 금규를 내밀어야 살 것이라 이제 내가 부름을 입어 왕에게 나가지 못한 지가 이미 삼십 일이라 하라 하니라

 

416.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에스더가 부름을 받지 않고 왕에게 나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죽음 각오하는 < 죽으면 죽으리라 >는 소위 < 일사각오 >의 용기를 갖기까지 쉽지 않은 고뇌와 결정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에스더의 고백과 결정은 < 하나님의 손에 자신의 생명을 거는 일이며 하나님의 손에 자신의 인생을 거는 일입니다. >

 

잠언 211절에 보면 < 왕의 마음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 > 라는 말씀있습니다. 에스더는 이러한 믿음이 있었던 것이죠..

 

용기를 내어 에스더는 왕의 부름을 입지 않았는데 왕앞에서 옷을 차려있고 왕의 안뜰로 들어 갔습니다. 이때 왕이 <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보았습니다 >




그리고 아하수에로 왕의 마음에 < 본즉 매우 사랑스러우므로 >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의 원문을 보면 < 그 여자는 그의 눈에 은혜를 얻었다 > 라고 말합니다. 사극으로 말하면 < 성은이 망극한 상황 / 성은을 입는 상황 >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왕이 한눈에 반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실제로 오늘 이스라엘에 유대인들이 부림절을 지킬때면 마치 에스더가 예복을 입고 왕을 기다린것처럼 사람들이 화려한옷을 입고 길거리로 나와서 부림절을 축제를 합니다. 오늘날 커스텀을 입고 하베스트 페스티발을 하는 것처럼 유대인들은 부림절을 그렇게 자신이 에스더가 된 듯이 화려한 옷을 입고 잔치를 보냅니다.

 





최근에 만들어진 영화중에 300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오늘 성경의 배경의 되는 페르시아제국과 그리스 스파르타와 전쟁을 다룬 전쟁영화입니다





그런데 이 <300>이라는 영화에 주된 등장인물에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인 바로 아하수에로 >입니다. 그영화에서 묘사하고 있는 <아하수에로왕>은 아주 신적이고 신비한 존재로 묘사가 됩니다. 신적 권위를 갖고 부소불위의 권력으로 전쟁터로 나아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영화를 보면 이러한 거대제국 페르시아와 맞써서 싸우는 스파르타의 300용사를 그리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전쟁영화다 보닌 피튀기는 전쟁씬이 많아서 이 영화감독은 그 장면마다 흑백으로 처리합니다. 아주 인상적인 영화죠.. 이 영화에서 아하수에로왕이 하는 대사중에 아주 인상적인 대사 한마디가 있습니다. < 나는 관대하다 But I am kind , But I am a generous god >입니다. 이 대사는 자신과 맞서 싸우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오늘 에스더 5장에 나오는 아하수에로 왕의 모습도 < 지극히 관대한 모습을 봅니다. > 그래서 페르시아의 살아있는 신적인 존재인 아하수에로왕의 <금규> <왕의 홀>을 내밀며 에스더에게 성은을 베풉니다.

 

바로 이 대목이 < 왕이 반한 그녀가 왕에게 반전을 요구하는 > 중요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왕은 에스더에게 < 소원을 말해봐. 이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리라 >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왕이 에스더에게 반했으면 이렇게 까지 말했을 싶은 생각이들 정도 입니다. 그때 에스더는 자신이 이 자리에 나와서 이러한 놀라운 성은을 입게 되는 이유를 잊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는 자신의 민족을 살리려는 간절한 요청이 있었고 그 일을 위해 자신을 위해 금식하며 기도하는 유다민족이 있을 잊지 않았습니다.

 

바로 지혜롭게 왕의 잔치에 하만을 초대할 것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다음 계획을 진행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오늘 이 반전 드라마의 서막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묵상할수 있을까요? 소위 이 성은이 망극한 이러한 에피소드속에서 무엇을 보아야 할까요


우리에게 이러한 적용질문들을 던져볼수 있어야합니다.


1/ 이 세상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이루시는 반전의 역사를 어떻게 기대하면 살것인가? 내 삶의 수많은 에피소드속에서 어떤 반전이 있었는가?

 

2/ 내 삶에 일어나는 소위 잘됨과 잘 풀림과 같은 하나님의 성은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어떻게 하나님의 눈으로 이해하면서 살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잊지 않고 발견하면서 살 것인가 ?

 

3/ 나는 기도하고 기대하고 기다리며 시도하는 일들이 무엇이 있는가? 하나님의 응답과 역사는 기도하는 손과 시도하는 발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어떻게 경험하고 살고 있는가?

 

4/ 오늘 우리에게 세상이 반할만한 모습이 있는가? 세상은 우리가 그들처럼 비겁할 때보다 오히려 그들에게 없는 용기와 믿음으로 반응할 때 더 매력을 느낀다










  • <에스더 1:13-22>
  • 별이 빛나는 밤에 
  • 09/02/2014 새벽묵상설교 

  • @설교문 그림 인터넷 갈무리함  






[ 에스더 1장 13절 - 22절 ]

13 왕이 사례를 아는 현자들에게 묻되 (왕이 규례와 법률을 아는 자에게 묻는 전례가 있는데

14 그 때에 왕에게 가까이 하여 왕의 기색을 살피며 나라 첫 자리 앉은 자는 바사와 메대의 일곱 지방관 곧 가르스나와 세달과 아드마다와 다시스와 메레스와 마르스나와 므무간이라)

15 왕후 와스디가 내시가 전하는 아하수에로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아니하니 규례대로 하면 어떻게 처치할까

16 므무간이 왕과 지방관 앞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왕후 와스디가 왕에게만 잘못했을 뿐 아니라 아하수에로 왕의 각 지방의 관리들과 뭇 백성에게도 잘못하였나이다

17 아하수에로 왕이 명령하여 왕후 와스디를 청하여도 오지 아니하였다 하는 왕후의 행위의 소문이 모든 여인들에게 전파되면 그들도 그들의 남편을 멸시할 것인즉

18 오늘이라도 바사와 메대의 귀부인들이 왕후의 행위를 듣고 왕의 모든 지방관들에게 그렇게 말하리니 멸시와 분노가 많이 일어나리이다

19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실진대 와스디가 다시는 왕 앞에 오지 못하게 하는 조서를 내리되 바사와 메대의 법률에 기록하여 변개함이 없게 하고 그 왕후의 자리를 그보다 나은 사람에게 주소서

20 왕의 조서가 이 광대한 전국에 반포되면 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여인들이 그들의 남편을 존경하리이다 하니라

21 왕과 지방관들이 그 말을 옳게 여긴지라 왕이 므무간의 말대로 행하여

22 각 지방 각 백성의 문자와 언어로 모든 지방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남편이 자기의 집을 주관하게 하고 자기 민족의 언어로 말하게 하라 하였더라







제목 : 별이 빛나는 밤에 


이제 9월 한달 동안 함께 묵상하게 될 말씀 본문이 < 에스더 / 에스라 > 이 두 성경을 살펴보게 됩니다. 조금은 다른 스토리와 갖고 있는 두 말씀이지만 이 두 성경은 같은 시대적 배경과 상황속에서 주신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오늘 에스더서에 기록된 사건들은 에스라 6장과 7장 사이에 발생한 것입니다. 

바사나라인 “아하수에로 3년“이란 주전 483년입니다. 





오늘은 이제 9월에 살펴보게될 < 에스더서 >에 담겨 있는 

큰 그림, 빅아이디어. 메인 아이디어 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고자 합니다. 


 왜? 에스더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어 졌는가? 

어떻게 ? 에스더서를 묵상하고 그속에서 핵심 메시지를 찾아야 하는가? 

우리는 이 에스더서를 통해서 무엇을 붙들어야 하는가?를 생각해보려합니다 


 우리는 < 에스더서 >를 읽을 때면 아주 흥미진한 < 동화 이야기 > 같은 느낌으로 읽게됩니다.



 디즈니의 이야기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가 있다면 < 신데렐라 / 백설공주 > 이야기가 있듯이 성경에서 가장 흥미롭고 재미있는 스토리가 있다면 바로 < 페르시야 나라의 왕궁의 에스더 >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 에스더 >라는 인물을 생각하면 두가지의 흥미로운 이미지를 생각합니다. 

< 하나는 신데렐라와 같은 이미지와 하나는 유관순 언니와 같은 이미지 >입니다. 


   


신데렐라와 같은 의미를 떠올리는 이유는 < 이방나라의 포로로 잡혀가서 모르드개의 손에 자란 에스더가 왕후가 되는 과정이 참으로 극적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유관순 언니와 같은 이미지를 떠올리는 이유는 < 하만의 음모와 계략으로 죽을 당할뻔한 자신의 민족을 구원하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함과 동시에 “ 죽으면 죽으리라 ”는 아주 멋진 말로 에스더의 삶이 기억되기 때문이다. >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동화적인 이미지와 영웅적인 이미지 이면 담겨 있는 하나님이 에스더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고자했던 본연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에스더서에 대한 평가는 다양합니다. 많은 이들은 에스더서에 기록된 이야기들인 너무도 극적인 반전 드라마 같아서 실제로 일어난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에스더를 소설같은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BC5세기 고대 문헌에 보면 바사나라에 대한 기록을 통해서 보면 < 그당시 궁중의 관례나 특사파견, 애곡 금지 >와 같은 역사적인 사실을 아주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 에스더서는 < 교훈과 역사>입니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에스더서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고 그속에 담겨 있는 < 하나님의 음성 >에 귀기울여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에스더의 극적인 반전 드라마와 같은 이야기속에서 어떤 하나님의 음성을 귀담아 들을수 있을까요? 


어제와 오늘의 말씀의 본문인 에스더 1장은 에스더가 왕후과 되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더서에 등장하는 인물로는 바사 나라 곧 페르시아 제국의 왕인 < 아하수에로 >가 등장합니다. 


 “아하수에로“란 바사(Pe-rsia)의 통치자를 가리키는 명칭입니다. 아하수로에는 본래 이름이 아닙니다.  애굽의 통치자를 가리키는 명칭으로서 애굽의 통치자를 “바로/파라오“(Pharaoh)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사 나라의 통치자를 < 아하수에로 >라로 불렀습니다. 그래서 원래 헬라식 이름은 < 크셀크세스 >입니다. 이 왕은 < 인도로부터 아프리까 수단까지 이르는 제국을 > 다스렸습니다. 그는 다리오 1세의 아들로서 거대한 부와 수산에 새로 세운 호화로운 궁전을 물려 받았습니다. 





영화중에 300이라는 영화에 인물이 바로 < 아하수에로 > 바로 < 크세르크세스 >가 등장합니다. 





에스더 1장을 보면 아하수에로가 큰 잔치를 벌린 곳이 < 수산궁 >입니다. 

원래 < 수산 >이라는 왕궁은 < 겨울에 지내는 수도 > 였습니다. 이 수산궁은 페르시아 제국의 3대 수도중 하나였습니다. 왕들이 겨울에는 바벨론에 봄에는 수산궁에 여름에 악메다에서 보냈습니다. 오늘 이 수산궁이 어디 있느냐 하면 < 이란 > 남쪽에 < 수사 >라는 지명 있는 그곳입니다. 


 오늘날 고고학자들이 그당시 < 수산궁 > 있었던 자리를 발굴해보았더니  그 규모가 어머 어마 했다고 합니다. 황제의 알현실과 후궁들의 규방 그리고 정원의 규모가 대단했다고 합니다. 






 에스더가 왕후가 될 당시에 바사나라와 아하수에로 왕은 대한 권세와 통치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속에서 < 아하수에로 왕은 대단한 잔치를 베풉니다. 그러난 그 잔치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 집니다. 왕후 와스디가 왕의 잔치의 초대를 거절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 결과 예상치 못했던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 에스더 >입니다. 


바로 여기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계획속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반전드라마가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 에스더 1장은 바로 그러한 배경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에스더서를 시작하면서 에스더서의 제목을 < 별이 빛나는 밤에 >라고 지어 봤습니다. 마치 저녁 라디오 프로같은 이름이죠.. 

그런데 에스더를 < 별이 빛나는 밤에 >라고 지은데는 그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원래 에스더라는 이름은 바벨론식 이름입니다. 그 뜻은 < 별 >이라는 뜻입니다. 원래 발음은 <이스터>입니다. < 페르시아의 별 >이라는 뜻입니다. 재미있는 것이다. <스더>와 <스타>가 같은 어원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원래 에스더는 유대이름은 < 하닷사 >입니다. 그 뜻은 < 상록수 / 아름다운 나무 >라는 뜻입니다. 


에스더는 그녀는 B.C. 597년 느브갓네살 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로 잡아갈시 베냐민 지파의 포로중 3대 증손인 '아비하일'의 딸로서 부모가 일찍 죽었음으로 사촌오빠인 모르드개의 양녀로 양육을 받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보잘 것 없는 포로였던 에스더가 < 페르시아의 별 > 되는 순간이 바로 오늘 본문의 순간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오늘 원래 왕후인 < 와스디 >의 이름은 뜻은 < 아름다운 여인 >이라는 뜻입니다. 


페르시아의 가장 아름다운 여인 와스디를 폐위시키고 예상치 못한 인물 <아름다운 나무 >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유대의 포로의 자녀가 왕후가 되는 일은 참으로 획기적이고 극적인 반전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에스더서를 서브타이틀을 < 별이 빛나는 밤에 > 라고 붙였습니다. 페르시아의 어두운 포로시절의 밤에 별처럼 빛나는 하나님의 사람 에스더를 우리가 주목해보는 것입니다. 조금더 부연하면 < 별이 빛나는 밤에 홀로 서있는 상록수 >라고 말할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에스더를 묘사하는 이미지입니다. 


그러한 에스더에 대한 인물에 대한 묵상이난 영웅적인 삶과 동시에 우리가 살펴보아야 하는 중요한 < 빅 아이디아 >가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빠지기 쉬운 실수는 교훈적이고 감동적인 < 스토리만 >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속에 담겨 있는 < 핵심 메시지, 메인 아이디어 >를 놓칠때가 많습니다. 


이러한 에스더의 극적인 반전 드라마 이면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는 사랑 그리고 변함없인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볼수 있습니다. 


우리는 에스더서를 묵상하면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3가지있습니다. 


1/ 에스더서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계획입니다. 

에스더를 흔히 소설같은 이야기로 생각했던 이유는 이 에스더 속에는 구체적인 하나님의 계시나 여호와의 대한 언급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왕의 이름이 28번이나 언급되는 반면 하나님의 이름이 언급된 일은 없다는 것이 특징적입니다.  

 비록 에스더서에서 여호와의 이름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이 이야기들속에는 < 하나님의 보이지 않은 손길 > < 하나님의 보이지 않은 생각 > < 하나님의 보이지 않은 계획 >이 있습니다. 이 < 하나님의 손길 / 생각 / 계획 >을 우리는 < 하나님의 섭리 > 라고 말합니다.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서를 일을때면 우리가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할 메시지는 

< 하나님이 이야기들의 배후에 어떻게 일하고 계신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스토리 이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비하인드 생각을 찾아내야합니다. 


2/ 에스더서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를 보호사는 사랑입니다.

에스더서는 가장 주요 이야기구조는 < 아하수에로 왕과 왕후 에스더 > < 하만과 모르드게 > <이방나라 페르시야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대조적인 갈등구조로 등장합니다. 이것은 서로간에 긴장과 갈등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에스더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부여주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포로생활중에 떻게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책임지시는지?를 말해줍니다. 


에스더서에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임을 면하게 되는 < 부림절 >에 대한 배경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간사한 신하들에게 둘려 싸여서 정치를 하고 있는 < 아하수에로 왕>와 왕을 통해서 자신의 음흉한 의도를 드러내고 있는 < 모략꾼 하만 >이 등장합니다. 이에 대응하여 하만의 계략을 간파하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고자하는 열망을 가진 < 모르드개 >와 그의 동기부여를 받은 < 죽으면 죽으리라의 고백을 하는 에스더 >가 등장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등장인물을 흥미진한 이야기속에서 극적인 반전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그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이 자기백성을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사랑하시는지?를 보야합니다. 


 에스더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 에스더 >가 처음부터 그렇게 왕앞에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만큼 < 신앙과 믿음에 당당한 여인 >이 아니었습니다. 그냥은 어쩌다 왕후가 되어서 인생이 잘 풀린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이 에스더를 들어 쓰십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쓸만한 도구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를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식으로 쓰실만한 도구가 되게 그녀의 마음을 붙잡아 놓으십니다. 


바로 이것인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모든 것을 다 하실수 있으시지만 하나님은 연약하고 부족하고 늘 주저하고 늘 자신없는 우리를 자신의 일에 끼워 놓으십니다. 


우리는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에 사역에 끼워놓고 계시는 하나님의 캐스팅을 보아야합니다. 연기력도 실력도 없는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드라마에 캐스팅하셨다는 사실이 바로 우리가 경험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3/ 에스더서속에서 우리는 변함없이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봅니다. 


하나님의 비록 포로로 잡혀가 살지는 유다백성이지만 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고 계십니다. 이스라엘백성이 포로로 잡혀간 것은 하나님 때문이 아닙니다. 


자기들이 스스로 웅덩이를 판것입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서 구원의 음성을 드려주었고 살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러나 목이 곧고 귀가 박혀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돌이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사람을 일으키시고 하나님의 방식을 그일을 행하십니다. 이방나라에 살면서도 그들이 변함없는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의 신실함을 보게 하십니다. 


바로 에스더서는 유대인들에게 그러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우리가 절망할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향한 변함없은 약속이 있기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 부림절 >은 가장 큰 절기입니다. 이 부림절이 주는 의미는 어떠한 상황과 고난에도 하나님은 우리의 편이 되어 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에게서 구원의 절기는 < 유월절 >과 < 부림절 >입니다. 


 이날 유대인들은 구원의 노래를 부르고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을 찬양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최근에 < 명량 >이라는 영화 1600만 관객을 동원하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영웅적인 이야기를 명량해전이란 배경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 영화를 보신분들은 아시겠지만 영화의 여러분에서 < 극적인 반전 >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 영화속에있는 하나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바로 그것은 <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는 방법이 무엇인가 ? >라는 것입니다. 이순신은 <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는 탁월한 영웅 >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처음 에스더스를 읽으면 < 극적인 반전 드라마 >를 봅니다. 그리고 < 에스더가 두려움을 죽으면 죽으리라는 용기를 바꾸는 믿음을 봅니다. >


그러나 < 반전드라마나 에스더의 용기 >만큼이나 중요하게 주목해야할 것은 바로 < 드러내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그리고 여인의 용기를 하나님의 구원의 일로 바꾸어 놓으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약속 >을 볼수 있어야합니다. 바로 그것이 오늘 우리손에 < 에스더서>가 있는 이유일 것입니다. 




[ 에스더서를 묵상하면서 생각해보아야할  주제와 질문들 ]

  •  밤에 홀러 서있는 상록수 같은 여인 에스더 
  • 에스더서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지 않고도 믿음의 이야기를 남길수 있다. 
  • 드러나지 않으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 드러내야 할때 행동으로 보여주며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는 한 여인의 정절과 의리 
  •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는 능력 에스더 : 에스더는 처음부터 용감한 여인이 아니었다. 현실주의자였다. 이기적이면 중도적이었다. 모르드개는 혁명적이고 변혁적이었다. 
  • 눈에 보이는대로 믿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고 믿고 순종하는 믿음 
  • 수많은 음모와 모략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은 분명히 서리라. 하나님의 역사는 승리하리라. 
  • 세상의 역사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반전 드라마 
  • 이 세상에서 우리의 믿음은 어떻게 충돌을 일으키는가? 
  • 이 세상의 역사속에서 하나님의 역사의 반전을 어떻게 기대하면 살것인가?
  • 이 세상의 역사속에서 궁극적으로 무엇이 승리하는가? 

Pastor Mark Driscoll
Sep 04, 2012


5 reasons why Esther may be the toughest Bible book I’ve ever preached

1. Esther is a stunning story.

Esther and Ruth (which was one of the favorite Bible books I’ve ever preached) are the only two books of the Bible in which the human hero is in fact a heroine—and a single childless one at that. This book of the Bible has some of the most amazingly complex and intriguing characters—from the god-like Xerxes who appears to this day in the video game Assassins Creed II and Frank Miller’s film 300 , to Esther the orphan girl raised by her cousin Mordecai, and the scoundrel Haman—you simply cannot beat the cast of characters in this story. Those wanting to watch a movie based upon the book might enjoy One Night with the King .

2. Esther is painfully normal.

She grows up in a very lukewarm religious home as an orphan raised by her cousin. Beautiful, she allows men to tend to her needs and make her decisions. Her behavior is sinful and she spends around a year in the spa getting dolled up to lose her virginity with the pagan king like hundreds of other women. She performs so well that he chooses her as his favorite. Today, her story would be, a beautiful young woman living in a major city allows men to cater to her needs, undergoes lots of beauty treatment to look her best, and lands a really rich guy whom she meets on The Bachelor and wows with an amazing night in bed. She’s simply a person without any character until her own neck is on the line, and then we see her rise up to save the life of her people when she is converted to a real faith in God.

3. Esther has been widely avoided.

Zero commentaries on the book were published in the first seven centuries of the Christian church. As far as we can tell, John Calvin never preached from Esther, and Martin Luther despised it, saying, “I am so great an enemy to the second book of Maccabees, and to Esther, that I wish they had not come to us at all, for they have too many heathen unnaturalities.” Very few preachers in the history of the church and more recent years have touched the book. Occasionally a preacher will do a handful of messages from the book, but rarely if ever has a well-known preacher preached through the entire book. So, that’s exactly what I’m going to do. We will walk through Esther verse by verse.

4. Esther has been grossly misinterpreted.

Feminists have tried to cast Esther’s life as a tragic tale of male domination and female liberation. Many evangelicals have ignored her sexual sin and godless behavior to make her into a Daniel-like figure, which is inaccurate. Some have even tried to tie her story in with modern-day, sex-slave trafficking as she was brought before the powerful king as part of his harem. What’s the truth? We will see, as I’m still studying and praying. At the very least, the Community Group and Women’s Bible Study discussions around Esther will be interesting.

5. Esther is a godless book.

God is never mentioned in the book. Esther is not mentioned anywhere else in the Bible. Except for explaining the origins of the Jewish feast of Purim, the book seems entirely secular and without any remote reference to God. No one prays, no miracles happen, and God never shows up in any way. But, as we will see, God is throughout the book like a silhouette. He works throughout the book, not through his visible hand of miracle, but rather his invisible hand of providence. For those who wonder if God is in their life because they have not seen or heard him, Esther’s life is like yours and God’s work in her life will reveal to you God’s work in your own.

Join us on September 16 at a Mars Hill church near you for the beginning of the Esther sermon series Watch the series trailer and download the wallpapers.




  • < 마가복음 14 : 12-21 >
  • 끝까지 함께 할수 없는 사람 
  • 08/13/2014 새벽묵상 설교 


@ 설교문 그림 인터넷 갈무리함 

 

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마가복음 14: 12 - 21> 

제목 : <마가복음 14: 12 - 21> 끝까지 함께 할수 없는 사람 





[ 마가복음 14장 12절 - 21절 ]

12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13 예수께서 제자 중의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14 어디든지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15 그리하면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라 하시니 

16 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께서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니라

17 저물매 그 열둘을 데리시고 가서 

18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19 그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니 

20그들에게 이르시되 열둘 중의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21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제목 : 끝까지 함께 먹었지만 끝까지 함께할수 없는 사람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시러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시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사복음서중에서 가장 짧은 복음서입니다. 총 16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짧은 복음서의 기록중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시는 장면이며 그 고난을 준비하시는 마지막 유월절, 마지막 예루살렘에서의 모습입니다. 




마가는 마치 숨가쁘게 예수님의 마지막 유월절과 예루살렘에서의 십자가의 고난으로 달려 오고 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을 < 고난의 종 >으로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세하는 예수님의 생애의 부분을 간략 간략하게 요약하고 이제 그가 강조하고 싶었던 고난받으시는 예수님, 고난받으시는 종으로 오신 예수님을 포커싱하고 주목하고 있는 것이지요.



오늘 말씀은 바로 예수님의 고난당하심에 앞서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마지막 유월절을 준비하고 그 유월절에서 어떻게 제자들과 보내셨는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어떤 방을 미리 예약하셨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리고 마치 첩보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조금은 수상하게 조금은 의심스럽게 조금은 조심스럽게 유월절에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를 나누시기 위한 장소를 섭외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별명을 이렇게 붙어보았습니다. 

< 수상하지만 이상하지는 않는 본문 > 

< 조심스러웠지만 의심스럽지는 않는 본문 > 


어떤 학자들은 오늘 본문을 <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이 함께 드러나는 본문 >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과 유사한 본문이 < 예수님꼐서 예루살렘 입성때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면서 빌려온 나귀를 구하는 장면 >과 아주 흡사합니다. 


먼저 시간적인 배경을 보면 < 무교절의 첫날 즉 유월절의 양을 잡는 날에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적인 배경에 대해서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합니다. 

유월절은 니산월 14일입니다. 보통 그날 늦은 오후나 이른 저녁, 즉 두 저녁사이에 양을 잡습니다. 그리고 양을 먹는 것은 그 다음날 먹습니다. 그날을 < 무교절 첫날 >이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의 관습으로는 < 그 전날 잡고 그 날에는 약을 먹습니다. > 그래서 < 양을 잡을 날인가? 양을 다음날인가 ? > 의문을 갖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양잡는 날에 먹기 위해서 그 전날에 양을 미리 잡아 놓고 유대인들이 양잡는 날에 드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이스라엘의 구원의 절기인 유월절에 맞쳐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은 어떤 날입니까?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이집트의 장자들을 죽이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양의 피를 문에 바르고 그 안에 들어가서 죽음을 면했던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무교절은 유월절 이후 6일 동안을 그날을 기억하면서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을 먹는 절기이지요. 부풀리지 않고 딱딱한 그 떡을 먹으면서 급하게 이집트를 탈출했던 그 구원의 날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하나인 이 절기를 기념하면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이집트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을 기억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이 유월절에 맞춰져 있다는 것은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무교절의 첫날 즉 유월절 양을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 어디서 유월절 식사를 할것인지?> 묻습니다. 유월절 식사는 예루살렘 성안에서 해야 했습니다. 제자들은 무교병, 쓴 나물, 포도주와 양고기등을 준비하고 먹어야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 두명인 누가복음 22장에 언급하고 있는 베드로와 요한을 베다니에서 예루살렘 성안으로 보내시며 < 물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따라가서 그 남자가 들어가는 집의 주인에게 객실이 어디있는지 물어보라>고 말씀합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추측할수 있는 것은 < 예수님께서 은밀하게 비밀스럽게 제자들과의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은밀하게 마련하고 예약해 두었던 식사 장소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 

이것이 예수님께서 신적인 능력으로 행하신 일인지? 아니면 미리 미리 이 일을 위해서 섭외를 해두신것인지 ? 알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 은밀하게 준비하고 계십니다. > 



그것을 알수 있는 것은 <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고 있다는 것과 가룟유대가 예수님을 배신할 음모가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월적 식사인 성만찬을 통해서 주고자하셨던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혹이나 그 일이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 은밀하게 장소를 섭외하고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셨습니다. >


또 하나 우리가 알아두야할 오늘 본문의 유대적인 문화을 바로 알고 이해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에 다락방은 그냥 작은 다락방이 아닙니다. 큰 사랑채입니다. 왜냐하면 유월적 식사는 온 가족이 함께 먹는 식사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12명의 제자들과 식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유대적인 문화의 배경을 생각해보면 유월절 식사는 12명만 있었던 식사가 아니라 제자들과 그들의 가족이 다 같이 먹을수 있는 장소였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몇 명이 예수님과 식사를 하셨는지 알수 없습니다다. 그러나 유대적인 배경을 생각하면 마지막 유월절 식사는 12명 이상의 식사이면 다락이 아닌 큰 사랑채에 있었던 일입니다. 



보통 유월절 식사는 목요일 저녁에서 시작하여 자정 이전에 마쳤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식탁에 앉아서 식사를 나눈 것이 아니라 비스듬이 누어서 떡을 나눠 먹었스니다. 


그래서 레오날드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의 그림은 성경적이지 않은 그림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테이블을 위해서 앉아서 먹는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그 당시의 식사 장면이 아니라 헬라식으로 바꿔놓은 일종의 왜곡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의 손과 가룟유다의 손이 어느 한 그릇에 동시에 머물렀습니다. 흔히 떡 그릇이락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20그들에게 이르시되 열둘 중의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21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이 본문에 나오는 < 그릇 >은 일종의 빵을 찍어 먹는 생과일 식초가 담겨 있는 소스 그릇입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 식사때 이 식초 물이 담긴 그릇은 2-3인에 하나씩 식탁에 배치해 놓습니다. 유대인들은 식사 때 빵을 포크로 찍어 먹기도 보다는 손으로 떼서 그 그릇의 식초에 빵을 찍어 먹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빵을 < 발사미 식초와 올리브 기름 > 담긴 그릇에 찍어 먹는 것처럼...바로 가룟유다와 예수님이 함께 손이 간 그릇은 바로 < 소스 그릇 >입니다. 


이런 유대적인 문화배경을 알고 성경을 읽으면 더 구체적이고 더 선명하게 본문을 이해할수 있습니다.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묵상하고 깨달아야할 것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합니다. 

1/ 예수님의 마지막 유월절 식사는 수상하지만 이상하지 않은 예견된 식사입니다.

예수님의 고난받으시는 그 유월절은 구약의 유월절의 사건의 재현입니다. 자신이 유월절 어린양이 되셔서 피를 뿌림이 되셔서 우리에게 구원을 전해주시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이 마지막 장면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고난이 우리에게 어떤 놀라운 의미이며 가치인지?을 알려주는 일입니다. 


2/ 예수님과 끝까지 함께 먹었지만 끝까지 함께 할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와 함께 먹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오늘 본문 14절에.. 

14 어디든지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제 마음에 묵상이 되었던 말씀은 < 네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 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과 함께 먹기를 원하십니다. 그 음식은 바로 예수님안에 있는 생명의 떡과 잔이 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나눠 먹은 것은 바로 < 생명 >입니다. 생명의 양식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명의 양식을 먹는 순간에 마음에 다른 마음을 품은 가룟유다가 있었습니다. 바로 < 끝까지 함께 먹기는 먹었지만 끝까지 함께할수 없는 사람 >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룟유다에게 생명을 얻을 음식을 나눠주었지만..

가룟유다는 예수님에게 생명을 뺏을 음모을 꾸미고 있었습니다. 


가룟유다에 대해서 신학적인 논쟁과 의구심이 많습니다..

최근에 <유다복음>이라는 영지주의 문서가 발견되면서 가룟유다에 대해서 제조명하고 부정적인 시각보다는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 < 유다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잡하시기 전에 <가룟유다와 일주일동안 대화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금 신비적이고 수상한 이야기로 가득차 있지요... 


어떤 이들을 가룟유다를 동정합니다. 

그래서 < 유다의 배신을 어떻게 볼것인가 ? 유다의 행동이 정당하지 않은가 ? >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 구원의 도구로 사용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유다의 배신은 하나님의 예정인가? 자유의지인가? >에 대해서 말합니다. 많은 신학적인 논쟁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 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 >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 나지 않았게 했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왜 나게 해서 그렇게 불행한 일을 하게 하는가? 이건 처음부터 정해진 각본대로 움직인것이지? 가룟유다의 잘못이 아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흔히 < 가룟유다의 딜레마 >라고 합니다. 오늘 다 설명할수 없기에..

가룟유다에 대해서 성경적인 이해를 돕는 책이 있습니다. 

< 가룟유다의 딜레마 / 김기현 목사 >책이 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수 있는 것은 가룟유다의 중심에는 

< 탐심이 있었고 그것을 사탄이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 >입니다. 

성경은 그 중심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아담의 범죄가 자유의지의 틈사이에 사탄의 유혹이 들어 온 것처럼 

가룟유다의 자유의지의 틈사이에 사탄의 탐심이 들어 온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실패를 알수 있었지만 알려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가룟유다의 배신을 알고 계셔지만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3/ 예수님께 < 나는 아니지요 >하는 사람는 있었지만 <나 입니다>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실패속에서도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룟유다의 배신속에서도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말씀은 저는 < 가룟유다의 회개의 기회 >라고 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가룟유다나 어떤 제자도 < 나는 아니지요 >라고 말해지... < 예수님 접니다 >라고 말하는 제자는 없었습니다. 


이점에서 사도바울의 고백과 차이가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는 계속 고백합니다. 

< 저는 죄인중에 괴수입니다. > 


우리는 우리의 신앙에서 모순을 찾고 싶어합니다. 

신앙의 딜레마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중심에는 < 주님을 부인하고 싶어하는 인간적인 욕망 >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딜레마에 집중하기보다는 

신앙의 카스리마에 압도되어야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딜레마를 찾기보다는 내 마음의 숨은 딜레마를 찾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볼 때 신앙은 모순입니다. 

그러나 믿음에서 볼 때 신앙은 순종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끝까지 음식을 나누고 내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숨은 음모를 찾아내야합니다. 그리고 주님 ! 제가 주님을 죽일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사람입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배신했습니다. 

그렇게 고백할수 있는 것이 축복이며 은혜입니다. 

그것이 주님과 생명의 떡을 나눠먹을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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