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가복음 12:28-34>
  • 사랑의 이중계명 
  • 08/07/2014

  • 설교문의 그림은 갈무리함  


 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마가복음 12:28 - 34> 

제목 : <마가복음 12:28 - 34> 사랑의 이중계명  




[ 마가복음 12장 28절-34절 ]

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저희의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대답 잘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2.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제목 : 사랑의 이중계명 

오늘 말씀은 마가복음 11장과 12장에서 이어지고 있는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몇가지 논쟁중에 하나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에 의구심을 품고 있던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이 예수님과 논쟁을 함으로 예수님이 틀렸다것을 나타내고자 하는 숨은 의도가 있는 논쟁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서 어떤 모순을 찾고자하는 숨은 동기가 있는 논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가시돋힌 질문 공세를 하고 예수님에게서 그릇된 답변을 찾기 위해 논쟁을 벌립니다. 




어제는 그 당시의 친로마의 성향을 띄고 있는 현실주의자들인 사두개인들과의 < 부활에 관한 논쟁 >에 대해서 예수님의 지혜로운 답변과 의표를 찌르는 듯한 대답을 들어습니다. 


오늘 말씀은 율법과 계명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 한 서기관 >의 대화를 토해서 < 큰 계명 논쟁 >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두개인들과 예수님 사이에 논쟁을 듣고 있던 서기관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서기관은 예수님께 첫째 계명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의 답변의 내용은 어떻습니까? 


마치 신명기에 모세가 < 쉐마 이스라엘 >이라고 말하고 신명기를 전하듯이 예수님도 < 쉐마 이스라엘, 이스라엘 들으라 >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 첫째는 유일하신 여호와를 마음, 목숨, 뜻, 힘을 다해서 사랑하는 것이다. 둘째 계명은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라고 하는 오랜 율법에서 강조되어 왔던 것을 한번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 >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강조는 각각의 계명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서 유기적으로 서로의 원인이 되고 서로의 결과가 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이러한 예수님의 계명에 대한 강조점을 지혜롭게 알아 들은 서기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 34.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


소위 <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 >이라고 하는 < 사랑의 이중계명 >이 <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고 연결되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한번더 연결시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2가지 포인트가 있다면 


1/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고 말하는 < 사랑의 이중율법, 이중계명 > 어떻게 서로의 원인과 결과가 되고 연결되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2/ 이러한 사랑의 이중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멀지 않음을 느끼는 것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율법에 충실한 유대인들은 자주 이런 질문을 하곤 했습니다. 

< 율법중에서 큰 것, 작은 것, 가벼운 것, 무거운 것이 무엇입니까?>


그래서 그러한 율법의 크기와 경중을 따지면서 율법 613개의 계명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서기관들과 유대인들은 율법의 중요성을 따지기는 잘했지만 < 율법의 본연의 의도나 정신과 원리들 >을 놓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을 때 그속에서 담겨있는 하나님의 의도와 원리들을 놓친채 그냥 형식적으로 율법의 순위를 매겨서 그것을 형식적으로 지키려고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맛있는 찐빵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앙금/앙꼬는 확인해보지 않은채 찐빵의 크기만 보고 < 우와 이 찐빵은 정말 맛있는 찐빵이야 >라고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과 같은것입니다. 실제로 찐빵의 본연의 맡은 찐빵속에 있는 팥앙꼬에 달려 있습니다



율법이나 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당시 서기관들과 유대인들은 율법의 크기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계명속에 담겨 있는 본연의 핵심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보고 겉만 그럴싸한 < 회칠한 무덥 같다고 > 하셨습니다. 바로 형식주의 외식주의 였던 것입니다. 


요즘 한국에 조금 안좋은 유행어가 있습니다. < 관피아, 철피아, >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치 마피아서처럼 어떤 자기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서 관행. 은폐, 왜곡, 거짓을 행하는 조직사회를 비꼬는 말이죠. 최근에 군대도 역시 < 군피아 >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새인들 사두개인 서기관들이 마치 < 바피아, 사피아, 서피아 >들이 이었습니다. 자신의 기득권과 관행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의 등장과 가르침이 못마땅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것이 오늘의 본문의 논쟁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이러한 공격적인 질문과 논쟁속에서 자신의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하고 계십니다. 


앞에서 우리가 오늘 말씀에서 주목해야할 첫째번째는 

1/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고 말하는 < 사랑의 이중율법, 이중계명 > 어떻게 서로의 원인과 결과가 되고 연결되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에 신명기 6장 4절-5절을 인용하시면서 < 하나님 사랑 >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시면서 < 이웃 사랑 >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가지 사랑의 계명이 바로 최고의 율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이웃사랑의 동기가 됩니다.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척도이며 표현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수 있어야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할수 있는 힘과 능력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할수 있어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사랑의 이중계명은 서로가 영향를 주고 받습니다. 

서로에게 원인이 되고 서로에게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여기서 < 마음/목숨/뜻/힘을 다한다 >는 의미는 < 자신의 전존재와 정체성의 모든 것을 을 다하여 > 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의 존재를 쏟아 붇는 일입니다. 




놀랍게도.. 이러한 사랑의 이중계명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눈으로 이 사랑의 이중계명이 실현되어 짐을 보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바로 이 사랑의 < 이중계명 > 실현되고 구현되는 현장입니다. 



처음의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이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는 완성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출발이 우리를 향한 사람으로 완성된것이죠. 거꾸로 말하면 우리를 사랑하심을 보여주심으로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증명하셨습니다. 


바로 이점에 오늘 사랑의 이중계명의 강조점입니다. 


2/ 이러한 사랑의 이중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멀지 않음을 느끼는 것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서기관이 지혜로운 대답을 합니다. 


32.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서기관을 지혜가 있었습니다. < 마음/지혜/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제물의 예배보다 더 나은 예배 >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로 사랑하는 행위를 바로 예배하는 행위로 연결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사랑의 이중계명을 <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이미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는 것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클라이 막스는 < 네가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라고 말하는 예수님의 칭찬에서 볼수 있습니다. 




과연 이 사랑의 이중계명과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연결되어 질수 있을까? 

어떻게 연관이 될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에 의해서 증명되며 마침내 그 정체를 드러냅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의 원리에 의해서 운영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의 이중계명을 요청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이 완성되고 실현되고 있는 것을 경험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것을 지켜보고 아는 자가 경험하는 나라가 아니라 

사랑의 이중계명을 실천할 용기가 있는 사람에게 가까이 와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실체가 드러나는 현장이 바로 예수님의 치유의 현장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실 때 등장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 저들을 불쌍히 여기서 저들을 민망히 여기서 >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치유가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거나 자신의 실력을 쇼업 하는 것이 아니라 < 사랑의 동기 >바로 <치유의 역사>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치유의 사건을 보면서 

하나님 나라가 이렇게 임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 치유와 회복 >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중심에는 바로 < 사랑의 이중계명 :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 >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 치유와 회복 > 일어납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바로 이 것이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입니다. 


우리가 이 사랑의 이중계명을 실천하기 시작할 때 그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랄싸한 예배 분위기와 임재의 어울리는 데코레이션을 해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소소한 일상에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 >을 다해서 사랑하기 시작할 때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우리의 사소한 관계에서 서로를 진심으로 네 몸과 같이 사랑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납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디 먼곳 외딴곳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머무는 곳이 있습니다. 

사랑이 드러나면 사랑이 보여지면 하나님 나라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랑할 마음이 생기는 순간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기에 가장 좋은 타이밍입니다.


오늘 우리안에 하나님 사랑할 마음이 생겨나고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 나라가 멀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안에 이웃을 사랑할 마음이 생겨났습니까?

바로 하나님 나라가 이미 당신안에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와 사랑의 이중계명의 관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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