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6/06/2014 GSC 새벽큐티설교
  • 사무엘하 18장 16절-23절 
  • 다윗의 슬픈 가족사 
  • 기드론 골짜기 잔혹사

 @ 본문의 그림은 설교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인터넷에서 갈무리함


[삼하 18:16-23]

(삼하 18:16) 요압이 나팔을 불어 백성들에게 그치게 하니 그들이 이스라엘을 추격하지 아니하고 돌아오니라

(삼하 18:17) 그들이 압살롬을 옮겨다가 수풀 가운데 큰 구멍에 그를 던지고 그 위에 매우 큰 돌무더기를 쌓으니라 온 이스라엘 무리가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니라

(삼하 18:18) 압살롬이 살았을 때에 자기를 위하여 한 비석을 마련하여 세웠으니 이는 그가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내게 없다고 말하였음이더라 그러므로 자기 이름을 기념하여 그 비석에 이름을 붙였으며 그 비석이 왕의 골짜기에 있고 이제까지 그것을 압살롬의 기념비라 일컫더라

(삼하 18:19)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빨리 왕에게 가서 여호와께서 왕의 원수 갚아 주신 소식을 전하게 하소서

(삼하 18:20) 요압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오늘 소식을 전하는 자가 되지 말고 다른 날에 전할 것이니라 왕의 아들이 죽었나니 네가 오늘 소식을 전하지 못하리라 하고

(삼하 18:21) 요압이 구스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본 것을 왕께 아뢰라 하매 구스 사람이 요압에게 절하고 달음질하여 가니

(삼하 18:22)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다시 요압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아무쪼록 내가 또한 구스 사람의 뒤를 따라 달려가게 하소서 하니 요압이 이르되 내 아들아 너는 왜 달려가려 하느냐 이 소식으로 말미암아서는 너는 상을 받지 못하리라 하되

(삼하 18:23) 그가 한사코 달려가겠노라 하는지라 요압이 이르되 그리하라 하니 아히마아스가 들길로 달음질하여 구스 사람보다 앞질러가니라




기드론 골짜기 잔혹사 <다윗의 슬픈 가족사 >


 오늘 사무엘하에서 등장하고 있는 다윗왕의 이야기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의 합한자라고 칭함받는 다윗왕의 삶에서 어울리 않을 것 같은 < 다윗 왕가의 뼈아프고 슬픈 가족사 >의 한 에피소드를 보고 있습니다.윗왕의 아들들의 반목 그리고 압살롬의 반역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왕의 권력을 찬탈>하고자 하는 허망한 노력과 시도들을 보게됩니다. 


다윗왕의 슬픈 가족사를 통해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찾을 수 있으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가정은 찾기 힘듭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은 될수 있으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가가 되긴 쉽지 않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가정사를 보기가 드뭅니다. 


저는 오늘 아버지의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서 일어난 < 압살롬의 난 >이 그 아비의 군대와 군대 장군에 의해서 재압당하고 허망한 죽음을 맞은 이 사건에 대해서 이름 하길 < 기드론 골짜기 잔혹사 >라고 별칭을 붙이고 싶습니다. 


< 기드론 골짜기 >는 감람산과 예루살렘 사이들 흐르고 유대광야를 지나 사해로 흘러 가는 데 이 기드론 시내를 사이로 왕권을 둘러싼 반역과 도망 그리고 추격이 시작되었습니다.






마치 한국에서 서울 양재동 양재IC근처를  < 말죽거리하고 하듯이 > 이 기드론 시내는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지배하기 위해 지나가야하는 통로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압살롬의 구덩이 돌무덤이 이 < 기드론 시내 > 근처 에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오늘 이스라엘에 가면서 그곳에 조그마한 탑을 하나 세워놓고 < 압살롬의 기념비 >라고 만들어 놓았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삼하 18:18) 압살롬이 살았을 때에 자기를 위하여 한 비석을 마련하여 세웠으니 이는 그가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내게 없다고 말하였음이더라 그러므로 자기 이름을 기념하여 그 비석에 이름을 붙였으며 그 비석이 왕의 골짜기에 있고 이제까지 그것을 압살롬의 기념비라 일컫더라




 저는 이 < 기드론 골짜기 > 가 다윗의 이스라엘의 왕으로 있으면서 수없이 겪었던 왕위 쟁탈싸움에서 지나왔던 그런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기드론 시내를 오가며 때로는 도망자로 때로는 추격자로 그의 삶의 여정이 만들어 졌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기드론 시내에서 그렇게 빛나는 외모와 자랑할 만한 머리카락을 가졌던 누구나 <왕제감>이라고 생각했던 압살롬의 허망한 죽을 봅니다. 그리고 이 기드론 시내에서 다윗의 가정의 슬픈 가족사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지를 봅니다. 



 오늘 본문은 죽은 압살롬이 구덩이에 던져지고 그위에 돌무더기가 쌓이는 허망하는 죽음을 기록하고 있고, 내일 본문은 그 압살롬의 죽음에 대해서 비통하게 울부 지는 한 아비의 허망하는 울부짖을 살펴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머물러야할 다윗왕의 가정에 이토록 슬픈 가정사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무엇때문 일까요? 


압살롬의 이름에는 < 샬롬 >이라는 의미의 <평화>라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압샬롬>의 뜻은 < 내 아버지는 평화이시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점에서는 그 이름을 지어준 다윗은 끝까지 아들 압살롬의 반역과 악한 동기에도 불구하고 그를 용납하고 품었습니다. 어쩌면 그 이름을 지어준 아버지의 진심었을 것입니다. 


더 이상의 아픈 가정사를 남기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압살롬의 군대를 재압하러간 군대장군에게 <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삼하 18:5)." 내 아들 압살롬 만은 너그러이 대우해서 살려달라 >고 요청합니다. 하지만 정작 그 이름을 갖고 있는 아들 압살롬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끝까지 반역의 길을 걷지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그러나 어떻게 됩니다. 처음에 반역하여 그술의 망명객으로 도망간 압살롬을 아버지 다윗과 화해시키려 애썼던 장수 요압의 손에 의해서 죽임을 당합니다. 어쩌며 요압은 한번 정도는 압살롬의 왕제감이기에 기회를 주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충실한 신하였던 요압의 판단은 < 더 이상은 안된다 >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나뭇가에 머리카락이 걸려 매달려 있는 압살롬을 처참하게 죽이고 맙니다. 


 오늘 우리는 다윗의 슬픈 가정사. 이 기드론 시내에 일어난 잔혹사에 대해서 어떻게 묵상해볼 수 있을까요? 여기 우리는 압살롬의 그릇된 동기로 시작된 그의 허망한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보야 합니다.


원래 압살롬에 자신이 <3남 1녀>의 자식이 있었습니다. 

(삼하 14:27) 압살롬이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딸의 이름은 다말이라 그는 얼굴이 아름다운 여자더라

그러나 아름다운 아비에 아름다운 자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데려가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이름이 기억되기 위해서 자신을 위해서 이미 <기념비>를 만들어 놓은 상태였습니다. 


 비록 자신이 이름이 후대에 기리 기리 기념되기 위해서 기념비를 미리 만들어 놓았지만 그것은 화려하고 웅장한 무덤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허망하고 초라한 초라한 돌무더기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의 죽음 조차도 전쟁에서 장렬하게 싸웠던 장수의 멋진 죽음이 아니다 도망가다 나뭇가지에 머리카락이 걸려 죽임 당한 < 어이없고 어처구니 >없는 <코메디같은 죽음>것을 기억되고 있는 이 사실만이 남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오늘 이 압살롬의 코메디 같은 죽음을 보면서 그의 허망한 무덤과 쓸데없어 보이는 기념비를 보며서 < 우리의 죽음이 어떤 죽음올 기억되며 어떤 기념비를 세울것인가 >를 생각해야합니다. 


오늘 날짜가 6월 6일입니다. 한국에서는 <현충일>입니다. 

이날이면 나라를 위해 목숨바친 순국선열들 호국영영들을 기념합니다. 그래서 동작동 국립묘지에 참배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 나라를 위해 싸우다 목숨을 버린 애국열사와 국군장병들 >을 생각하면 그들의 넋을 기리는 행사들을 합니다. 이런 국립 현충원에 세겨진 이름들은 참으로 명예롭고 자랑스러운 이름이 됩니다.


 그러나 오늘 압살롬의 기념비가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 다윗 가정의 슬픈 가족사 >의  기념비가 되어 버렸습니다.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기고 그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고 

그 사람의 죽음의 명예로움을 생각합니다. 

When a person dies, the name still remains 

The person's face will be reminded

The person's death will be a honored monument memorial


한 사람의 죽음은 삶의 끝인 동시에 

그 사람의 삶의 내용을 평가하는 시간입니다

When a person dies it is the end, and also,

 it is the time to judge that person's life.


제가 어떤 글을 보다가 압살롬의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쓴 글을 보았습니다. 


압살롬이 죽고 나니 비석 하나 남았습니다.

압살롬. 자기만을 위하여 < 살롬 >  이름 값도 못하고

명예롭지 못한 이름만 남기고 갔습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주위 사람들의 불편함은 모르고 평화도 만들지못하고

욕심만 채우려 해도 채울 수 없음을....


압살롬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압살롬의 죽음이 

어리석은 죽음이라고 생각한 4가지 이유를 정리해보았습니다.  


첫째는 압살롬은 아버지가 지어준 <샬롬>이라는 

         이름 값도 못하고 죽은 사람입니다. 


둘째는 압살롬은 빛나는 외모 수려한 머리카락을 선물로 받은 

          인물값도 못하고 죽은 사람입니다.


셋째는 압살롬은 다윗왕의 아들의 자리를 부여받고 자신이 세운 기념비석에도 

          어울리지 않은 자리 값도 못하고 죽은 사람입니다. 


넷째는 압살롬은 끝까지 참고 용납해준 아버지 다윗의 사랑도 모른채 

          사랑 값도 못하고 죽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이 어리석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 이름값 / 인물값 / 자리값 / 사랑값 > 이 네가지 우리가 죽은 이후에 평가되는 덕목들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더 붙인다면 < 은혜값 >라고 할수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값 하고 살아는가? > 물어 보아야 합니다. 

< 오늘날은 나는 어떤 값을 하고 사는 가? >




  • GSC 새벽묵상 설교 05/14/2014
  • 사무엘하 7:18-29
  •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으니  



[삼하 7:18-29]

(삼하 7:18)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삼하 7:19) 주 여호와여 주께서 이것을 오히려 적게 여기시고 또 종의 집에 있을 먼 장래의 일까지도 말씀하셨나이다 주 여호와여 이것이 사람의 법이니이다

(삼하 7:20) 주 여호와는 주의 종을 아시오니 다윗이 다시 주께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삼하 7:21) 주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주의 뜻대로 이 모든 큰 일을 행하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셨나이다

(삼하 7:22) 그런즉 주 여호와여 이러므로 주는 위대하시니 이는 우리 귀로 들은 대로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신이 없음이니이다

(삼하 7:23) 땅의 어느 한 나라가 주의 백성 이스라엘과 같으리이까 하나님이 가서 구속하사 자기 백성으로 삼아 주의 명성을 내시며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주의 땅을 위하여 두려운 일을 애굽과 많은 나라들과 그의 신들에게서 구속하신 백성 앞에서 행하셨사오며

(삼하 7:24) 주께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세우사 영원히 주의 백성으로 삼으셨사오니 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삼하 7:25) 여호와 하나님이여 이제 주의 종과 종의 집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영원히 세우셨사오며 말씀하신 대로 행하사

(삼하 7:26) 사람이 영원히 주의 이름을 크게 높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 하게 하옵시며 주의 종 다윗의 집이 주 앞에 견고하게 하옵소서

(삼하 7:27)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의 귀를 여시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셨으므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주께 간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삼하 7:28) 주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며 주의 말씀들이 참되시니이다 주께서 이 좋은 것을 주의 종에게 말씀하셨사오니

(삼하 7:29) 이제 청하건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하니라




제목 :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으니


우리가 기도할 때 언제 가장 기도가 잘 되고 잘 되지 않을까요? 

나에게 문제가 많을 때일까요? 문제가 없을 때일까요? 

상황이 가장 나빠졌을 때일까요? 상황이 가장 나아졌을 때일까요? 


 놀랍게도 문제가 없어지고 상황이 다 좋아지면 연약한 우리는 기도의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항상에 우리의 문제는 기도를 우리의 필요의 수준에 따라 그 기도의 수준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 기도생활의 아이러니 ]입니다. 


 문제가 있거나 상황이 어려울 때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수 없는 문제와 상황앞에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왜 기도해야 할지 분명합니다. 

최소한 하나님이 누구인지? 내가 하나님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안다면 그것은 우리의 최소한의 선택이며 제일 쉽고 빠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제와 어려움이 있을 때면 “ 울며 불며 주님 ! 모든 것이 문제입니다. 저는 할수 없습니다. 당신 밖에 없습니다. ”라고 간절히 매달립니다. 


 그러나 문제가 없어지고 상황이 좋아질 때 우리는 무엇을 기도해야할지 모른 경우가 많습니다.  나를 곤고하게 하는 문제가 없어지고 상황이 좋아지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어색해합니다.


 별로 간절함도 없고 그 다지 애원하고 매달릴 문제가 없어서 ...하나님을 더는 나의 상황으로 귀찮게 해드리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에 그냥 하나님께 “ 다 좋습니다. 다 괜찮습니다. 이 대로가 좋사오니 ... ”라고 쉬운 방식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는 모든 상황속에서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은혜의 방편으로 우리가 기도의 깊은 자리로 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기도는 [ 문제해결의 도구나, 필요한 것을 얻는 채널 ]이 아니라

 [ 하나님과의 사귐이요, 깊은 관계 유지의 방편 ]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기도에 있어서 우리의 문제 해결보다 우선되는 것이

 바로 [ 하나님과의 사귐 ]입니다. 


다윗은 바로 이 하나님과 사귐이 깊은 사람입니다. 그가 광야에서 쫓겨 다닐때에도 그가 왕궁에서 머물면서 있을 때에도 그는 이 하나님과의 사귐을 놓치 않은 사람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전존재와 자신의 전 생애에 속에서 하나님이 누구인지? 그 분에 비해서 나는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기도는 [ 하나님이 누구신지 ? ]와 [ 내가 누구인지? ]라는 

이 두가지 질문에 답하는 시간입니다. 


다윗은 오늘 본문의 기도속에서 이 두가지 질문에 분명한 대답과 고백 그리고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탁월한 신앙의 내용은 그의 기도속에서 뭍어나옵니다. 종종 어떤 분들의 기도의 내용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신앙의 내용과 수준을 옅볼 수 있습니다. 


 종종 교우들 중에 [ 기도를 부담스러워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것은 기도를 사람들 앞에 하는 것이라는 그릇된 부담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사람들 앞에 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적인 욕심이며 자기 중십니다. 


기도는 [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시간 ]입니다. 

기도는 [ 하나님 앞에 들어가는 행동 ]입니다. 

기도는 [ 하나님 앞에 들어가 머무는 예배 ]입니다. 




오늘 본문의 다윗의 기도의 모습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삼하 7:18)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오늘 이 기도를 드리는 있는 다윗의 기도는 어떤 상황입니까? 

곤고한 때입니까 ? 형통한때입니까? 모든 상황이 다 좋아진 그때에 아무 문제가 없어진 그때에 다윗은 <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 있다 >는 것은 < 여호와의 법궤가 있는 장막에 들어가 머물러 있다 >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여호와 앞에 머무는 시간, 행동, 예배를 드리고 있는 장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상황속에서 모든 순간에 모든 일들속에서 우리의 중심이 < 여호와 앞에 들어가 머물러 >있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그속에서 우리가 < 여호와를 부르기를 >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다윗은 하나님을 < 주 여호와 >라고 6번이나 반복해서 부릅니다. 

다윗 고백하고 있는 < 아도나이 야훼 >는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그냥 저멀리서 다윗을 내려다보고만 있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에게 다가와 그를 붙잡아 주시고 그를 세우시고 왕으로 삼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자신이 세우신 뜻과 계획을 반드시 이루시고 마시는 주권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자신이 약속한 것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과 자기 사람을 끝까지 견고케하시는 변함없는  하나님입니다. 


다윗은 그 < 주 하나님 >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광야의 목동일때도 그가 황무지로 쫓지는 도망자 일때도 그가 왕궁에 머물며 왕이 되었을때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사실은 < 다윗의 주 하나님은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살아서 역사하신다 >는 것입니다. 


오늘의 다윗의 기도는 < 역대상 17장 >에도 반복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이 기도속에서 우리는 형통할 때 어떻게 기도해야하는지를 배웁니다. 모든 상황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기도를 할수 있는지 그 모범을 배웁니다. 


오늘 아침에는 바로 그것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다윗의 기도는 3가지 질문 / 3가지 고백 / 3가지 인정을 이루어져 있습니다. 


1/ 다윗의 기도 속에는 분명한 < 3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

여호와 앞에서 나는 누구입니까?

여호와 앞에서 나는 무엇을 하였습니까?

여호와 앞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오늘 본문의 기도의 시작에 다윗은 물음에서 기도를 시작합니다. 


(삼하 7:18)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오늘 본문의 다윗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무언가를 물으면서 그것에 대한 자신이 고백과 인정을 담아 내고 있습니다. 


< 내가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다시 주께 무슨 말씀을 하오리까 ?.. 땅의 어느 한 나라가 주의 백성 이스라엘과 같으리까?.. > 이 다윗의 질문 같은 기도는 그가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고백과 인정을 담아내기 위한 도입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은 정말 하나님께 궁금해서 묻는 질문이 아니라 자신이 갖고 있는 확신을 다시금 재차 하나님으로부터 확인하는 질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기도속에는 하나님앞에서 < 나는 누구인지? >물어보아야합니다. 그리고 < 나는 무엇을 하였습니까? 나는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 >라고 불어보아야합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 주 여호와는 나를 아시고 내가 그것을 압니다. 그리고 주외에는 신이 없습니다 > 


(삼하 7:20) 주 여호와는 주의 종을 아시오니 

            다윗이 다시 주께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삼하 7:21) 주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주의 뜻대로 이 모든 큰 일을 행하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셨나이다

(삼하 7:22) 그런즉 주 여호와여 이러므로 주는 위대하시니 이는 우리 귀로 들은 대로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신이 없음이니이다


2/ 다윗의 기도속에는 이 3가지 질문에 어울리는 3가지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여호와 앞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여호와 앞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나는 여호와 밖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늘의 다윗의 기도의 내용을 보면 < 하나님께서 약속하고 이루신 일이니 하나님이 끝까지 책임지셔야합니다.>라는 고백보다 < 하나님 저는 아무것도 압니다. 하님이 다 하신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님께 맡깁니다. >라고 하는 고백입니다. 


다윗은 지금 자신이 누리고 있는 평안, 명성, 칭찬, 존경, 영광이 어디서 주어진것인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세운 나라가 아닌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이며 하나님이 그 나라와 백성의 참된 왕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자신의 기도속에 하나님이 자신에게 행하신 일에 대한 고백을 빠뜨리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함을 부여잡고 다윗은 기도하고 있습니다. 


(삼하 7:27)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의 귀를 여시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셨으므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주께 간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3/ 다윗의 기도속에는 3가지 인정이 담겨있습니다.


당신이 나를 아시는 것을 제가 압니다. 

당신이 나를 위해 하신 일을 제가 압니다. 

당신이 나의 집을 견고케 하시고 복주실 것을 제가 압니다. 



다윗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이 어떻게 이루어가고 만들어가고 계시는 분명히 인정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그 자리와 평안이 어디에서 흘러나오고 있는지를 인정합니다. 그리고 이후에 자신의 집과 나라의 견고함이 누구의 손에 달려있는지도 인정합니다. 또한 자신에게 삶에 복을 주시는 복의 근원이 누구인지도 인정합니다. 


오늘의 이 다윗의 기도는 우리가 배워야하고 알아야할 기도의 모범을 잘 보여줍니다. 


<질문/고백/인정>이라는 3가지 패턴을 갖고 있는 이 다윗의 기도는 그 기도의 중심에는 자기의 욕심이나 자기의 중심이 담겨있지 않고 오직 < 하나님의 마음 >만 담겨져있습니다. 자신의 삶의 안전과 평안이 왔을 때 다윗은 < 하나님을 향한 흔들리지 않은 중심 >으로 그의 전존재와 전 생애가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인정하면 < 여호와 앞에 나아가 머물고 >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 이렇게 기도해야합니다. 


여호와 앞에서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여호와 앞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신이 나를 아시는 것을 제가 압니다. 

여호와 앞에서 나는 무엇을 하였습니까 ? 나는 여호와 앞에서 아무것도 한것이 없습니다. 당신이 나를 위해 하신 일임을 제가 압니다. 

여호와 앞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 

나는 여호와 밖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이 나의 삶의 견고케하시고 복주실 것임을 제가 압니다


이 기도가 우리의 삶에 늘 넘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사무엘하 3:28-39 

배제의 시대 포용의 은혜  


 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사무엘하 3:28-39 >

제목 : 배제의 시대 포용의 은혜 



[삼하 3:28-39]

(삼하 3:28) 그 후에 다윗이 듣고 이르되 넬의 아들 아브넬의 피에 대하여 나와 내 나라는 여호와 앞에 영원히 무죄하니

(삼하 3:29) 그 죄가 요압의 머리와 그의 아버지의 온 집으로 돌아갈지어다 또 요압의 집에서 백탁병자나 나병 환자나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나 칼에 죽는 자나 양식이 떨어진 자가 끊어지지 아니할지로다 하니라

(삼하 3:30) 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가 아브넬을 죽인 것은 그가 기브온 전쟁에서 자기 동생 아사헬을 죽인 까닭이었더라

(삼하 3:31) 다윗이 요압과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아브넬 앞에서 애도하라 하니라 다윗 왕이 상여를 따라가

(삼하 3:32) 아브넬을 헤브론에 장사하고 아브넬의 무덤에서 왕이 소리를 높여 울고 백성도 다 우니라

(삼하 3:33) 왕이 아브넬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이르되 아브넬의 죽음이 어찌하여 미련한 자의 죽음 같은고

(삼하 3:34) 네 손이 결박되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차꼬에 채이지 아니하였거늘 불의한 자식의 앞에 엎드러짐 같이 네가 엎드러졌도다 하매 온 백성이 다시 그를 슬퍼하여 우니라

(삼하 3:35) 석양에 뭇 백성이 나아와 다윗에게 음식을 권하니 다윗이 맹세하여 이르되 만일 내가 해 지기 전에 떡이나 다른 모든 것을 맛보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하매

(삼하 3:36) 온 백성이 보고 기뻐하며 왕이 무슨 일을 하든지 무리가 다 기뻐하므로

(삼하 3:37) 이 날에야 온 백성과 온 이스라엘이 넬의 아들 아브넬을 죽인 것이 왕이 한 것이 아닌 줄을 아니라

(삼하 3:38) 왕이 그의 신복에게 이르되 오늘 이스라엘의 지도자요 큰 인물이 죽은 것을 알지 못하느냐

(삼하 3:39) 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 대로 갚으실지로다 하니라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의 말씀은 자신의 수하 요압의 손에 죽은 아브넬의 장사하고 그를 애도하는 장면입니다. 

 사울의 정권에서 다윗의 정권으로 이양이 되고 있는 이러한 정권이양기의 시점에서 원한 맺힌 피의 복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울의 충실한 신하였던 아브넬을 죽이는 것은 어쩌면 다윗에서 당연한 결과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자신에게 그토록 모진 고통을 주는데 앞장섰던 아브넬을 애도하면 그를 죽은 요압을 칭찬해주기는커녕 요압에게 저주를 퍼붓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대목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이해가 되십니까?


우리가 흔히 아는 역사의 이야기나 대하드라마 속에서 한 정권이 바뀔 때는 < 보복과 피의 숙청, 폭력과 반목 >이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야만 세워지는 정권이 더 든든히 설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특히 서로에게 맺힌 원한과 상처가 많을 때는 더더욱 서로에게 처참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가 흔히 아는 역사 드라마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다윗은 아브넬의 화해의 손을 피의 복수로 갚지 않고 그와 화해하는 방법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심지어 고맙게도 아브넬을 처리해준 요압에게 상을 내리기는커녕 그를 저주합니다. 


(삼하 3:29) 그 죄가 요압의 머리와 그의 아버지의 온 집으로 돌아갈지어다 또 요압의 집에서 백탁병자나 나병 환자나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나 칼에 죽는 자나 양식이 떨어진 자가 끊어지지 아니할지로다 하니라


마치 삼족을 멸하는 것 같은 저주를 퍼붓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다윗이 삼족으로 멸해야하는 사람은 요압이 아니라 아브넬 입니다. 


요압이 다윗 대신에 골칫덩어리가 될지도 모를 사울의 사람 아브넬을 죽여준 것은 < 고마운 일 >입니다. 그리고 요압이 자신의 동생 아사헬의 죽음에 복수를하는 것은 요압에게선 < 당연한 일 >입니다. 다윗은 이 < 고맙고 당연한 일 >을 뒤집어 놓고 있습니다. 


도리어 요압을 책망하고 요압과 요압의 집을 축복하지 않고 저주하고 있습니다. 


왜? 다윗은 이러한 상식밖의 행동을 보여주고 있을까요? 


그 이유를 오늘 본문에 30절에서 한번 찾아 볼수 있습니다. 


(삼하 3:30) 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가 아브넬을 죽인 것은

            그가 기브온 전쟁에서 자기 동생 아사헬을 죽인 까닭이었더라


 다윗은 스스로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사울의 시대는 끝이 나고 다윗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자신의 시대를 열어주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무엘하 3장 1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지요..


(삼하 3:1)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


분명한 사실은 사울의 세력과 다윗의 세력간의 피의 전쟁이 오랫동안 있었습니다. 그 결과 대세가 기울고 있었습니다. 이제 사울의 세력은 점점 약해지고 다윗의 세력은 점점 강해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다윗은 계속 그런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 언제까지 이 피의 시대가 계속될것인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면 하나님의 계획인가 ? >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했던 다윗은 이러한 고민을 계속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래서 그가 원했던 새 시대의 모습은 더 이상의 반목이나 원수맺음이 아니라 < 화해와 포용 >의 시대를 원했을 것입니다.

< 배제의 시대에 포용의 은혜 >를 선택했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 화해와 포용의 첫 번째 시대를 여는 것이 바로 사무엘하 1장에 등장하는 < 사울와 요나단을 추모하고 애도하면 마치 헌정시 >에서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인 다윗의 시대에 자신이 기대하는 화해와 포용의 시대의 요청이었습니다.  


그리고 화해와 포용의 시대를 요청하는 두 번째 요청이 바로 < 사울의 신하 아브넬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를 위해 치루는 장례 >였습니다. 


바로 이것인 다윗의 중심이라는 것을 옅볼 수 있는 것은 당연히 행할 수 있는 요압의 복수조차도 다윗은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피의 복수를 멈추지 않고 있는 요압과 그의 집을 저주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더 이상의 인간의 < 원한맺음과 원수 갚음 >과 같은 인간적인 방식과 시대를 거부해야할 때가 왔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이 통치하는 시대는 그런 방식으로 운영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 화해, 용서, 용납, 포용 >과 같은 방식으로 .... 

세상이 이해할수 없는 방식으로 그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 

그 하나님의 나라의 다스림이 실행되어야하는 것을 알았기에 다윗은 자신의 원한을 자신의 원수를 피의 복수로 마무리 짓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다윗의 중심을 알수 있은 것은 아브넬를 장례하는 행렬에 자신 뿐아니라 아브넬을 죽였던 요압까지도 그 행렬에 따라가 그를 위해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아브넬 앞에서 애도하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삼하 3:31-32]

(삼하 3:31) 다윗이 요압과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아브넬 앞에서 애도하라 하니라 다윗 왕이 상여를 따라가

(삼하 3:32) 아브넬을 헤브론에 장사하고 아브넬의 무덤에서 왕이 소리를 높여 울고 백성도 다 우니라


여러분.. 이 장면을 상상해보십시오.. 이 장례식 장면을 그려보십시오..


그토록 자신을 죽이려 사울과 함께 칼과 창을 들고 달려온 사울의 총사령관 아브넬이었습니다. 다윗에게서 아브넬은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처음 다윗이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죽였을 때에 처음 다윗의 손을 잡고 사울왕에게 인도하는 이가 아브넬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두 사람의 필연과 악연이 시작되었습니다. 


다윗의 앞날에 가장 위험한 인물이 될뻔 했던 아브넬을 위해 < 추모의 노래 >를 짓고 있습니다. 이 노래는 그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고 있습니다. 


[삼하 3:33-34]

(삼하 3:33) 왕이 아브넬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이르되 아브넬의 죽음이 어찌하여 미련한 자의 죽음 같은고

(삼하 3:34) 네 손이 결박되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차꼬에 채이지 아니하였거늘 불의한 자식의 앞에 엎드러짐 같이 네가 엎드러졌도다 하매 온 백성이 다시 그를 슬퍼하여 우니라


그리고 다윗이 음식도 거른채 아브넬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다윗의 슬픔과 애도를 보고 아브넬을 죽인 것이 다윗이 아닌 것을 알게 됩니다. 


어쩌면 다윗이 아브넬의 죽음을 이렇게 다루어야 했던 분명한 의도 있을 알수 있습니다. 바로 자기의 백성들에게 더 이상의 피의 복수와 원수갚음은 없어야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 이상 사울의 세력과 다윗의 세력이 서로 반목하는 그런 일이 없어야한다는 것 그리고 이제는 서로 화해하고 용납하는 시대가 와야하는 무언의 메시지가 바로 아브넬의 장례식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다윗의 의도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적인 권력투쟁으로 피의 복수를 진행할 자신을 따르는 신복들에게 일종의 간접적인 경고 메시지를 보내는 것입니다. 


(삼하 3:39) 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 대로 갚으실지로다 하니라


대단한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추측해볼수 있는 대목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윗의 이러한 화해와 용납의 태도에서 무엇을 묵상하고 

무엇을 배울수 있는가?를 질문해보아야 합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갈등과 대립를 경험합니다. 

항상 보이지 않는 피의 복수과 원수맺음을 경험하고 살아갑니다. 




크리스채니티투데(Christianity Today)에서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책중 100권중 하나로 선정된 책중에 미로 슬라브 볼프(Miroslav Vof) < 배재와 포용 Exclusion and Embrace>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볼프라는 사람은 동유럽 크로아티아 출신의 신학자입니다. 동유럽의 냉전시대의 격변기를 겪으면서 동유럽안에서 일어난 전쟁과 폭력, 갈등과 반목을 지켜보면서 이러한 시대에 < 나는 십자가에 달린 메시야를 따르는 사람으로 적합한 반응은 무엇인가? 십자가의 메시와 이 폭력적인 세상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를 고민하는 내용입니다. 


이 볼프는 그 폭력의 한 가운데서 고민하고 묵상하면 사유하면서 이 글을 썼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향에서 사람들이 강제수용소에 수감되고 여성들이 강간당하고 교회가 불타고 도시가 파괴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유고연방의 설립과 해체가 반복된느 과정에서 과거 오스만 제국하에 공존했던 다른 종교적 정체성을 가진 민족들 사사의 갈등과 상호 파괴가 ‘ 인종 청소 ’의 양상으로까지 전개되던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이 책의 서두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 나는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아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나에게 적합한 반응을 생각해 내야만 했다. 어떻게 내가 나의 헌신, 욕망, 저항, 분노, 불확실성으로부터 시선을 회피할 수 있겠는가? 최대한 엄격하게 그것들을 곰곰이 따져 보아야 했다. 십자가의 메시지와 폭력의 세상 사이에 있는 긴장이 나에게는, 십자가에 달리신 이를 따르고자 하는 바람과 다른 이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지켜보거나 나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내버려두고 싶지 않은 마음 사이의 갈등으로 다가왔다. 이 책은 지적 투쟁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영적 여정에 관한 기록이기도 하다. ”


이 책의 마지막 대목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 하나님의 정의를 확신하고 하나님의 임재로 마음을 굳게하며 복수의 충동에 사로잡히기를 거부함으로써 폭력의 순환을 끊어야 한다. 원수를 사랑하려고 노력하면 결국 십자가에 달린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부인할수 없다. 하지만 보복하지 않는 값비싼 행동들은 오순절의 평화라는 연약한 열매가 잘 알수 있는 씨앗이된다. ”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오늘의 이 시대를 바라봅니다. 

포용보다는 배제가 더 쉬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쉽게 배제하고 어렵게 포용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다윗의 모습은 이 시대에 우리가 무엇을 할수 있는지? 

이 시대에 무엇을 해야하는지? 말해줍니다. 


더 이상의 세상의 갈등과 반목의 방식을 끊고 

하나님의 나라의 방식인 화해와 용납 그리고 포용으로 나아가도록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 여호와는 악행한자에게 그 악한대로 갚으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우리가 갚아주려하지 말고 우리가 복수하려 하지 말고 

우리가 베풀 수 있는 최고의 선으로 ....

선으로 악을 이기는 상상할수 없는 방식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수 있어야합니다.










  • 사무엘하 1:17-27
  • 슬픔에 대하여 노래하라. 



[삼하 1:17-27]

(삼하 1:17) 다윗이 이 슬픈 노래로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을 조상하고

(삼하 1:18) 명령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 노래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으되

(삼하 1:19) 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삼하 1:20) 이 일을 가드에도 알리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지어다 블레셋 사람들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할례 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

(삼하 1:21) 길보아 산들아 너희 위에 이슬과 비가 내리지 아니하며 제물 낼 밭도 없을지어다 거기서 두 용사의 방패가 버린 바 됨이니라 곧 사울의 방패가 기름 부음을 받지 아니함 같이 됨이로다

(삼하 1:22) 죽은 자의 피에서, 용사의 기름에서 요나단의 활이 뒤로 물러가지 아니하였으며 사울의 칼이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였도다

(삼하 1:23) 사울과 요나단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이러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 그들은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도다

(삼하 1:24) 이스라엘 딸들아 사울을 슬퍼하여 울지어다 그가 붉은 옷으로 너희에게 화려하게 입혔고 금 노리개를 너희 옷에 채웠도다

(삼하 1:25) 오호라 두 용사가 전쟁 중에 엎드러졌도다 요나단이 네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삼하 1:26)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삼하 1:27)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으며 싸우는 무기가 망하였도다 하였더라

 

 

제목 : 슬픔에 대하여 노래하라.


오늘 이 아침에 묵상하게 되는 말씀의 주제는 [ 죽음, 슬픔, 통곡, 애도, 애가 ]라는 주제입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이 전쟁에서 적에서 손이 아닌 자신의 부하의 손에 비명의 최후를 맞은 <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 >을 추모하는 애도하는 그러한 말씀입니다.

 

공교롭게도 오늘 이 본문은 오늘 우리 조국 한국땅에서 지금 겪고 있는 세월호에 희생된 이들의 [ 죽음, 슬픔, 통곡, 애도, 애가 ]와 놀랍게도 연결되고 오버랩되고 있는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 시대에 주시는 우리의 메시지를 살펴보고 묵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삼하 1:17-18]

(삼하 1:17) 다윗이 이 슬픈 노래로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을 조상하고

(삼하 1:18) 명령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 노래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으되

 

다윗은 자신을 그토록 괴롭혔던 사울의 죽음 앞에 그를 기억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를 짓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자신을 그토록 돕고 사랑해주었던 친구 요나단의 죽음앞에 그의 죽음을 통곡하며 그를 위한 추모곡을 헌정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그토록 증오했던 그토록 분노에 가득찼던 애증의 관계인 사울의 죽음을 대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그토록 사랑했던 그토록 고마움으로 가득찼던 애정의 관계요나단의 죽음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다른 그림과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두 사람, 두 용사의 죽음앞에 다윗은 동일한 슬픔과 동일한 공감으로 그 슬픔을 드러내고 그것을 < 활의 노래 >라는 이름으로 < 야살의 책 >에 기록하여 백성들이 그것을 함께 부르고 그것을 기억하기를 그리고 그들의 삶을 잊지 말고 기억하기를 명령하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 다윗의 애가 >는 활의 노래라고 불리웁니다. 활의 노래라는 의미는 실제로 아마 활을 사용하여 연주한 노래였거나 아니면 활을 사용하는 용사를 상징하는 노래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다윗은 두 용사의 죽음을 기억하기 위해 < >이라는 것을 사용하여서 이 노래를 짓고 있습니다. 그리고 < 야살의 책 >< 의인의 책 >이라고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과 지도자들의 영웅적인 업적을 기리는 책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일종은 위인전집과 같은 책이지요. 바로 이러한 다윗이 지은 두 용사의 죽음을 야살의 책에 기록하게 하였습니다.

 

여기서 다윗의 탁월한을 볼수 있습니다. 다윗은 그의 생애동안 사울에게 쫓겨다니면서 죽음의 고비를 여러번 넘겨야했던 < 사울 트라우마 >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던졌던 < 창 트라우마. 도망자 트라우마. 동굴 트라우마 >가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에게 사울이라고 하면 정말 기억하고 싶지 않는 두 번 다시는 생각하기도 싫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바로 트라우마 였을 것입니다.



살아남은자 만이 갖는 일종의 < 생존자 증후군 > 같은 것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오늘 사울과 요나단을 위해 슬픈노래를 지어 부르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들의 행적을 추억하고 그들의 용맹함을 칭찬하고 있는 다윗의 탁월함을 보게 됩니다.

 




어쩌면 오늘의 이 다윗의 노래는 다윗이 사울에게 겪은 숱한 고난과 어려움을 안다면 도저히 나올수 없는 노래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다윗은 이 노래를 만들어서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기억하고 불러주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 다윗의 노래 자체에 주목하기보다는 자신의 트라우마와 같은 사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는 다윗의 마음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고 묵상하면서 이해할수 없는 다윗의 행동에 이렇게 질문해봅니다.


나라면 어땠을까?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나라면 그렇게 할수 있었을까 ?”

 

만약 여러분이라고 어땠을까요? 만약 여러분이란 어떻게 했을까요?

 

자신을 그토록 괴롭혔던 사울이 죽었습니다. 더 이상 자신에 고통을 주는 근심거리가 사라졌습니다. 두 번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이름 사울이 죽었습니다.


그냥 잘 됐다 ~ 이제 나는 자유야 ~ 속으로 웃으면 

속시원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지난날 내가 사울에게 당했던 온갖 수모의 기억들을 지우고 싶지 않았을까요?

더 이상 사울의 이름 조차도 지워버리고 싶지 않았을까요?

오히려 사울과 다른 요나단만 추앙하면서... 

이런 못되고 잘못된 아버지 밑에서 그래서 요나단만은 달랐네하면서 ....

오히려 사울은 저주하고 요나단은 추앙하면서 

그렇게 노래를 만들지 않았을까요?

그동안 자신이 당한 모든 책임을 < 사울과 요나단 >에 돌리고 싶지 않았을까요?

모든 문제를 사울의 탓으로 돌리고 싶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오늘 다윗의 모습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 같으면 다윗처럼 했을까요? 솔직히 그렇지 않았을 확률이 높습니다.


사람의 당한 고통과 상처는 그 고통과 상처를 주는 장면이 사라진다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 고통과 상처 소위 트라우마가 사라지기위 위해서 그것을 극복할수 있는 더 큰 사랑과 위로가 부어져야합니다. 


흔히 4:1의 법칙이 있습니다. 한번 비난의 말을 들으면 그것이 없어지기 까지는 4번의 칭찬의 말을 들어야 그것이 없어집니다.


 아마도 다윗은 자신이 지나온 도망의 삶에서 그리고 외롭고 힘든 광야의 길에서 자신의 고통과 상처로 자신이 당한 트라우마로 계속적인 고통에 시달릴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과 슬픔의 시간을 자신의 삶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함으로 그시간을 이겨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억울하고 도망하는 300명의 사람들과 그 고통을 연대하면 그 고난과 트라우마를 이겨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이 도망다니면서 울부짖으면 지은 시편들을 통해서 다윗이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고 이겨내고 있는지 알수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도망다닐 때 지은 시편들을 보면 초반의 내용들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분노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리고 원수들대한 분노와 저주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고백을 보면 다윗은 그 분노, 그 고통, 그 억울함을 하나님의 부으시는 은혜와 사랑으로 바꿔 내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윗의 탁월함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3:1-2] 압살롬에 쫓길때에...

(3:1)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3:2)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18:1-2] 사울의 손에서 건겨주신 날에

(18:1)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18:2)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오늘 우리 조국 한국은 심각한 불신, 심각한 분노, 심각한 책임전가, 심각한 우울증에 빠져있습니다.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못한 세월호 사건이 한국 사람들의 마음을 침몰시키고 심리적 공항상태에 빠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들려오는 뉴스들을 보거나 들을때면 계속 우리의 마음이 편치 않음을 느낍니. 그렇다고 잊고 살자니 그렇다고 관심을 끄자니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너무 심각해서 그럴수가 없습니다. 한동안 이 일로 계속 마음이 쉽지않고 편치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오열하는 슬픔과 통곡을 보면서...


무책임하고 부도덕한 어른들의 모습의 추악한 실체를 들여다 보면서...


우리는 모든 이 고통과 슬픔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최근에 하도 마음이 답답해서 필립얀시에 < 하나님 제게 왜 이러세요 >라는 책을 읽는 중에 이런 글을 발견했습니다.


필립얀시는 "고통의 시간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는 질문을

"고통의 시간에 교회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고통에 동참하는 교회가 고통당하는 이들의 '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묻는 처절한 물음에 답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고통을 소멸케 할 수는 없으나 고통에 동참하는 교회가 고통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케 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통을 없애도록 부름 받은 초능력자들이 아니다. 고통에 동참하며 성육신의 삶을 살도록 부름 받은 성도일 뿐이다

고통의 의미와 고통의 소멸과 고통의 유익은 십자가가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래서 체휼이 중요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통을 아는 하나님을 기다린다

고통당한 신은 우리 하나님 뿐이니까!. ”

 



오늘날 이 시대와 이 세상의 사람들이 고통당할 때 그 고통을 함께할 수 있는 것은 교회와 기독교가 되어야한다는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현실은 오늘날 한국교회와 우리의 현실은 이 세상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서 교회가 답을 주고 있지 못합니다


 모두다 이 세상에서 당한 그 고통을 고통의 십자가를 아는 교회로 그리고 그 고통을 누구보다 더 많이 공감해줄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로 가져오라고 말수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교회들은 그 고통을 해결할 채널이 되어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현장에서 고통받고있는 이들을 상담하고 있는 서울대 정신건강의 김석주 교수의 인터뷰를 들었습니다


지금 세월호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가장 위로가 되는 사람은 바로 동일한 고통을 겪어본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천안함 유족들, 경주 마우나 리조트 유족들, 씨랜드 사고 유족들이 지금 와서 곁에서 손을 잡아주고 위로해고 격려해주는 것이 가장 큰 위로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코 말을 많이 한다고 성경를 풀어준다고 위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흔한 < 하나님의 뜻이 있을거야 >라고 하는 그런 말뿐인 헛된 위로가는 맞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제가 고통을 겪고 보고 어려움을 겪어보니 그렇습니다.


 고통당한 이들에게 가장 큰 위로는 같이 고통을 겪어보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그 고통을 잘 모른다면 침묵하는 것이 좋고 정말 그 고통을 안다면 같이 분노하는 것이 좋습니다. 무책임한 침묵도 어설픈 분노도 하기 전에 

우리에게 물어야합니다.

< 오늘날 우리는 고통당하는 이들의 고통을 아는가?

오늘날 교회는 고통당하는 이들의 고통을 체휼할수 있는가 >

 

 오늘 다윗의 슬픔의 노래는 고통을 하는 이의 노래입니다


고통을 아는 이 만이 부를수 있는 노래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사울에게 겪은 고통을 이렇게 노래로 바꾸어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살과 같은 친구 요나단의 죽음을 추모하면서 그의 사랑의 이 노래로 바꾸어 부르고 있습니다.

 

[삼하 1:23-24]

(삼하 1:23) 사울과 요나단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이러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 그들은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도다

(삼하 1:24) 이스라엘 딸들아 사울을 슬퍼하여 울지어다 그가 붉은 옷으로 

너희에게 화려하게 입혔고 금 노리개를 너희 옷에 채웠도다

 

 오늘 다윗은 자신의 고통을 탓하기보다는 그들의 노래하는 것을 바꿔내고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함으로써 바로 < 고통받는 이들과의 연대 >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바로 이러한 노래를 지어서 불러줄수 있는 고통을 공감할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함께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노래를 지어 부를수 있는 공동체. 함께 고통받는 이들의 마음을 위로해주는 공동체가 되어야합니다.

 

 만약 이 세상에서 슬픔이 있어나 억울함이 있을 때 진정으로 고통을 알고 공감해줄수 있는 교회로 달려오고 주님 품으로 안겨서 그것을 풀어낼수 있는 그런 진정한 사랑과 회복의 공동체를 꿈꿔 보아야합니다.

 

분노를 슬픔으로 풀어내고 억울함을 공감으로 용납하고

지난 것은 잊고 기억할것만은 반드시 남겨두면서 ...

아픔이 추억이 되고 고통을 은혜로 바꾸어내는 놀라운 은혜로의 회복탄성력을 갖고 있는 그런 공동체. 그런 믿음. 그런 신앙이 있었으면 좋곘습니다.

 

지금 세월호에 희생당한 이들을 추모하는 노래로 

팝페라 가수의 <임형주의 천개의 바람이 되어 >가 있습니.


< 천개의 바람이 되어 >에 이러한 가사가 있습니다.

나의 사진 앞에서 울지 마요 나는 그곳에 없어요

나는 잠들어 있지 않아요 제발 날 위해 울지 말아요

나는 천개의 바람 천 개의 바람이 되었죠

저 넓은 하늘 위를 자유롭게 날고 있죠

 

오늘 다윗의 추모곡과 헌정곡은 이렇게 마치고 있습니다.

 

[삼하 1:25-27]

(삼하 1:25) 오호라 두 용사가 전쟁 중에 엎드러졌도다

요나단이 네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삼하 1:26)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삼하 1:27)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으며 

싸우는 무기가 망하였도다 하였더라

 

이 고백은 고통을 아는 이의 노래이며

슬픔에 대해 진정으로 부를 수 있는 노래입니다.




 










  • 사무엘상 30:21-31
  • 은혜를 아는자가 은혜를 베푼다.  
  •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중심으로 사람을 향한 배려와 배풂이 흘러나왔기에 그가 이스라엘에서 가장 오래 기억되는 왕이 될수 있었습니다. 


새벽 큐티 설교 <사무엘상 30:21-31>



[삼상 30:21-31]

(삼상 30:21) 다윗이 전에 피곤하여 능히 자기를 따르지 못하므로 브솔 시내에 머물게 한 이백 명에게 오매 그들이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을 영접하러 나오는지라 다윗이 그 백성에게 이르러 문안하매

(삼상 30:22) 다윗과 함께 갔던 자들 가운데 악한 자와 불량배들이 다 이르되 그들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은즉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은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주지 말고 각자의 처자만 데리고 떠나가게 하라 하는지라

(삼상 30:23) 다윗이 이르되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넘기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삼상 30:24) 이 일에 누가 너희에게 듣겠느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동일할지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 하고



(삼상 30:25) 그 날부터 다윗이 이것으로 이스라엘의 율례와 규례를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

(삼상 30:26) 다윗이 시글락에 이르러 전리품을 그의 친구 유다 장로들에게 보내어 이르되 보라 여호와의 원수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에게 선사하노라 하고

(삼상 30:27) 벧엘에 있는 자와 남방 라못에 있는 자와 얏딜에 있는 자와

(삼상 30:28) 아로엘에 있는 자와 십못에 있는 자와 에스드모아에 있는 자와

(삼상 30:29) 라갈에 있는 자와 여라므엘 사람의 성읍들에 있는 자와 겐 사람의 성읍들에 있는 자와

(삼상 30:30) 홀마에 있는 자와 고라산에 있는 자와 아닥에 있는 자와

(삼상 30:31) 헤브론에 있는 자에게와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왕래하던 모든 곳에 보내었더라


제목 : 은혜를 아는 자가 은혜를 베푼다.


사무엘상 마지막 대목에서는 ? 다윗이 하나님과 백성이 마음에 합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록 사울 왕을 피해서 블레셋 아기스 왕을 돕고 그의 보호를 받고 있지만 그의 선택과 결정은 항상 자신의 민족인 연약한 히브리 사람에 대한 마음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블레셋 아기스왕의 신하들의 모함과 비난에도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하심으로 자신이 자신의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과 전쟁을 행해야하는 애매한 어려움을 피하게 됩니다.

우리가 살펴보는 이 사무엘상에의 다윗의 삶의 여정과 사울의 삶의 여정은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초기 이스라엘 나라의 왕으로 세워진 이 두 인물이 왜? 다른 선택과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사무엘상 기자는 이 사무엘서를 1차 독자인 히브리사람들에게 쓰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합하여 세운 사울왕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여 세워지 다윗왕이 얼마나 다른 선택과 결과 그리고 중심을 가지고 있는지를 대비시키는 목적이 있습니다. 또한 이들의 삶의 여정 속에서 보여진 모습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그리고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것인지?를 보여주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참다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왕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 이 시대에 사무엘서를 읽고 있는 2차 독자인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람의 삶의 내용과 선택은 어떠해야하는지?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에게 무엇을 보기를 원하시는지? ”에 대해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사무엘서 기자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왜? 사울을 버리고 다윗을 선택해야만 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사울은 하나님께 다시금 쓰임받을 기회를 계속 놓치고 있고, 다윗은 하나님께 쓰임받을 기회를 계속 붙잡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다윗이 아말렉과의 전쟁에 함께 가지 못했던 사람들을 돌아본고 배려하고 베푸는 장면입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블레셋과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긍휼로 제외되어 그들이 거처했던 시글락으로 돌아왔다. 그들이 제 3일에 시글락에 이르렀을 때에 아말렉 사람들은 이미 남방과 시글락을 침노하였는데 그들이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거기 있는 사람들을, 어른이나 아이나 여자나 다 사로잡아 끌고 그들의 길을 갔습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성에 이르렀을 때 성은 이미 불탔고 그들의 아내와 자녀들은 사로잡혀간 후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아말렉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치라 말씀하시죠.


가던 중에 애굽사람 한 소년의 인도를 받습니다. 그 소년은 다윗의 일행을 아말렉 사람들의 진영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들이 내려가 보니 아말렉 사람들은 온 땅에 가득하여 블레셋 사람의 땅과 유다 땅에서 크게 탈취하였음을 인해 먹고 마시며 기뻐 춤추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새벽부터 혹은 저녁부터 이튿날 저물 때까지 그들을 쳤고 약대 타고 도망한 소년 사백 명 외에는 피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윗은 아말렉 사람이 취했던 모든 것을 도로 찾았고 그 두 아내를 구원하였고 그들의 탈취하였던 것 곧 무리의 자녀들이나 빼앗겼던 것의 크고 작은 모든 것을,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이 도로 찾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도로 찾게 해주셨습니다. 그들은 또 아말렉 사람들의 양떼와 소떼를 다 취하였습니다.

다윗이 이왕에 피곤하여 능히 자기를 따르지 못하므로 브솔 시내에 머물게 한 이백 인에게 오자 그들은 다윗과 그와 함께한 백성을 영접하러 나왔습니다.

다윗이 그들에게 이르러 문안하였습니다.


그때 다윗과 함께 갔던 자 중에 악한 자와 불량한자들이 다 말했습니다.

여기서 < 불량배 >들은 < 비류한자. ‘벨리알의 아들들,' 무가치한 자들 >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은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주지 말고 각 사람의 처자만 주어 데리고 떠나가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말합니다.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붙이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이 일에 누가 너희를 듣겠느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일반일지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


다윗은 그들이 취한 노획물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이며 또 백성의 다수가 똑같이 나누는 것을 원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그 악한 자들의 주장을 눌렀다. 그 날부터 다윗은 이것으로 이스라엘의 율례와 규례를 삼았고 그것이 훗날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또 다윗은 시글락에 이르러 그 탈취물을 그 친구 유다 장로들에게 보내며 "보라 여호와의 원수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에게 선사하노라" 하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이 전쟁을 어떤 중심으로 치루고 있는지?를 옅볼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 전쟁의 시작은 자신의 전쟁인 아닌 여호와의 전쟁으로 치루고 있었습니다. 그것의 첫 번째 증거는 전쟁을 치루기 전에 여호와께 묻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다윗은 이 전쟁의 결과는 자신의 능력이 아닌 여호와의 능력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고백합니다. <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저들을 우리손에 붙이셨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이 전쟁의 기쁨을 자신의 능력을 과시거나 자기 자랑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전쟁에서 이긴 전리품을 즐거이 나눠줌으로 하나님이 함께하신일임을 함께 기뻐하길 원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손으로 이루어진 이들을 나의 손으로 만들어낸 것으로 바꾸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셔야할 영광을 내가 가로채고 내가 그 영광과 자랑을 누리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받으셔야할 합당한 영광을 드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음을 합당하게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말, , 그리고 걸음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요즈음 성도님들이 카카오톡으로 좋은 글을 보내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 글들중에 참 좋은 글들이 많습니다. 그런 좋은 글들은 따로 메모를 해놓고 있습니다.

최근에 받은 글 중에서 참 좋은 글 내용이 있었습니다.



< 사람이 선물이다 >

스물에는 세상을 바꾸겠다며 돌을 들었고,

서른에는 아내를 바꾸어 놓겠다며 눈초리를 들었고,

마흔에는 아이들 바꾸고 말겠다며 매를 들었고

쉰에야바뀌어야 할 사람이 바로 나임을 깨닫고 들었던 것 다 내려놓았습니다.

어디서 태어날지는 선택할 수 없지만, 어디서 죽을지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어떤 얼굴로 태어날지는 선택할 수 없지만, 어떤 얼굴로 죽을지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선택이 삶의 선택입니다.

사람은 실수하는 것이 정상이고,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것이 정상입니다.

사랑이란, 실수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정상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사랑은.. 사람과 하늘이 나눠 가진 성품입니다.....

우리가 일을 하지만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람이지요.

사람과의 관계가 참 중요합니다.

자신을 내려놓기 전에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닙니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일은 실패하면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사람과 관계는 한번 깨지면 회복하기가 힘들어요.....

관계가 고통스러운 까닭은.. 하나님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을 인간에게서 찾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실수가 전공이고, 부족함이 특징입니다 ..



 

오늘 본문의 다윗은 하나님과의 좋은 관계가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를 만드는 <배려와 배픎>으로 이어집니다. 사람에게서 < 배려와 베풂 >많은 좋은 관계를 만드는 것이 없지요. 다윗은 자신이 나눠 주어야할 것을 기꺼이 나눠줍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왔다는 인정과 확신 때문입니다.


아침편지로 잘 알려진 고도원씨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라는 책에 세 가지 방문이라는 글이 나옵니다.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대체로 <세가지 방문>을 잘 한다는 말을 듣는다. <입의 방문>, <손의 방문>, <발의 방문>이 그것이다. <입의 방문>은 부드러운 말로 주위 사람을 칭찬하고 용기를 주는 방문이고, <손의 방문>은 편지를 써서 사랑하는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고, <발의 방문>은 상대가 힘들 때 망설이지 않고 찾아가는 것이다. 모두 신체를 이용한 마음의 전달법들이다. ”





미국의 카네기 공대 졸업생을 추적 조사한 결과, 그들은 한결같이 이구 동성으로

"성공하는데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은 15%밖에 영향을 주지 않았으며 나머지 85%가 인간관계였다." 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의 합당한 중심으로 사람을 향한 배려와 배풂이 흘러 나왔기에 

그가 이스라엘에서 가장 오래 기억될 왕이 될수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26:1-15>   선으로 악을 이기라

다시 사울과 다윗 이야기의 배경과 무대는 십 광야 십 황무지 >로 돌아옵니다너무도 놀랍게도 앞에서 사무엘상 24장의 배경과 상황이 그대도 재현되고 있는 장면이 바로 오늘 사무엘상 26장 십 광야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사무엘상 26:1-15>  선으로 악을 이기라


[삼상 26:1-12]

(삼상 26:1) 십 사람이 기브아에 와서 사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다윗이 광야 앞 하길라 산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매

(삼상 26:2) 사울이 일어나 십 광야에서 다윗을 찾으려고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과 함께 십 광야로 내려가서

(삼상 26:3) 사울이 광야 앞 하길라 산 길 가에 진 치니라 다윗이 광야에 있더니 사울이 자기를 따라 광야로 들어옴을 알고

(삼상 26:4) 이에 다윗이 정탐꾼을 보내어 사울이 과연 이른 줄 알고

(삼상 26:5) 다윗이 일어나 사울이 진 친 곳에 이르러 사울과 넬의 아들 군사령관 아브넬이 머무는 곳을 본즉 사울이 진영 가운데에 누웠고 백성은 그를 둘러 진 쳤더라

(삼상 26:6) 이에 다윗이 헷 사람 아히멜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에게 물어 이르되 누가 나와 더불어 진영에 내려가서 사울에게 이르겠느냐 하니 아비새가 이르되 내가 함께 가겠나이다

(삼상 26:7) 다윗과 아비새가 밤에 그 백성에게 나아가 본즉 사울이 진영 가운데 누워 자고 창은 머리 곁 땅에 꽂혀 있고 아브넬과 백성들은 그를 둘러 누웠는지라

(삼상 26:8)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하니

(삼상 26:9)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

(삼상 26:10) 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삼상 26:11)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삼상 26:12) 다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아무도 보거나 눈치 채지 못하고 깨어 있는 사람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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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나발과 아비가엘의 이야기가 나온후에 다시 사울과 다윗의 추격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다시 사울과 다윗 이야기의 배경과 무대는 < 십 광야 / 십 황무지 >로 돌아옵니다. 너무도 놀랍게도 앞에서 사무엘상 24장의 배경과 상황이 그대도 재현되고 있는 장면이 바로 오늘 사무엘상 26장 십 광야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사울이 3천명과 함께 다윗을 찾으러 십 광야로 내려가 진을 칩니다. 다윗이 도움을 주었던 십 사람들이 다윗의 있는 곳을 알려줌으로 다시 사울과 다윗의 추격전으로 이어집니다.


사무엘상의 마지막 대목은 두사람의 대조적인 행동인 두드러지게 드러납니다.

어떻 해서든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이 받은 은혜를 잊은 채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의 모습과 어떻해서든지 사울의 자리를 지켜주려고 은혜를 베풀면서 도망을 치고 있는 다윗의 모습을 봅니다.

 

사울과 다윗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다루는 방식이 달랐습니다.

사울은 은혜를 잊어 버렸고 다윗은 은혜를 기억했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감정과 원함에 매여 있었고 다윗은 자신의 감정과 원함에 매여 있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주변의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오직 자신의 마음에 민감하게 행동했고, 다윗은 자신의 주변의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마음에 민감하게 행동했습니다.


사무엘상 24장에 사울은 십 황무지 동굴속에서 다윗에서 죽을 뻔한 일을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예치못한 곳에서 자신이 미명하게 죽을 뻔 일을 불행중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것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시는 또 한번의 회개의 기회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다윗에서 어떤 은혜를 입었는지? 그리고 그 배후에 하나님이 자신에게 어떤 회복의 기회를 주고 계시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당한 굴욕감과 모욕감 그리고 주변사람에게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보여지는지에 대한 수치심에 쌓여서 다윗을 죽이려는 그 추격전에 다시금 나서게 된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자신의 감정과 마음이 거기에 매이는 것을 주의해야합니다. 


종종 사람과 사람사이에 원수 맺는 일을 보면 그렇게 큰 문제에서 일어나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사소하고 작은 일들 속에서 서운함을 만들어내고 그 속에서 사탄마귀가 틈을 타고 계속 그 마음에 매여서 사람에 대한 원수 맺는 것이 생깁니다.

그래서 오해하고 원망하고 미워하고 욕합니다. 정작 어떤 큰 사건이 서로에게 원수 맺게하는 일보다는 사소한 감정들이 사소한 상황들이 관계 속에서 원수 맺는 일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의 상태와 상황을 민감하게 다시보게 하십니다.

내 마음안에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

내 마음에 숨어있는 잘못된 동기는 무엇인지?

내 마음에 무엇이 나를 거기에 메이게 하는지?를 살피도록 하십니다.

 

사울과 다윗의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이러한 민감함의 차이였습니다.

성령님은 오늘 우리로 하여금 각각의 처한 상황과 관계속에서 일어나는 감정과 마음을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우리의 마음안에 말씀하십니다.

니가 지금 어떤 마음으로 어떤 중심으로 무엇하려 하느냐

성령님에 민감한 사람은 사람의 소리에 치우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관심과 관점에 집중합니다.

 

사울과 다윗 둘다 위기가 있었습니다.

위기라는 말은 < 위험한 기회 >라는 말입니다. 사울은 다윗에게 죽을 뻔한 위험한 기회를 계속적으로 <복수와 원수맺음>으로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에게 죽을 뻔한 위험한 기회를 계속적으로 <은혜와 긍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은혜 받은 기회를 은혜 베풀기회로 바꿔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울의 선택입니다

그러나 은혜 받은 기회를 은혜 베풀 기회로 바꿔놓고 있는 것이 다윗의 선택입니다.

 

다윗이 자신을 따르는 아비새와 함께 밤에 사울에게도 나아갑니다

그때 사울은 진 가운데에 누어서 자고 창은 머리 곁 땅에 꽂혀 있었습니다.


그때 같이 간 아비새가 말합니다. < 하나님께서 오늘날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나로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가 또 다시 다윗에게 왔습니다. 사울왕을 죽이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 할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때 다윗의 반응과 말을 보십시오.

(삼상 26:9)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

(삼상 26:10) 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삼상 26:11)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이 다윗의 고백 속에 담겨있는 중심은 무엇일까요? 3가지 중심이 있습니다.

1) 원수는 내가 갚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갚는 것이다.


2) 왕는 내가 스스로 그 자리를 차지는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시는 것이다.


3) 내가 원하는 것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있을 때 

     항상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 선택해야한다.


여기서 다윗의 탁월함을 나오는 것이죠.. 오늘 상황과 관련된 로마서 말씀에

[12:18-21]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12: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바로 다윗의 모습이 바로 < 선으로 악을 이기는 장면 >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서 가져나온 물건중에 < >이 있습니다. 이 창은 사울이 다윗을 수없이 죽이려했던 그 무기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사울이 다윗을 해하려 할때는 이 <>이 등장합니다.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온 다윗은 그를 위하여 수금을 타고 있을 때 사울은 그를 창으로 죽이려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이기고 돌아와 사울을 위하여 수금을 탈 때에도 그를 창으로 찔러 죽이려 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의 억울함을 호소하자 사울이 화가 나서 요나단을 죽이려고 던진것도 창이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했던 그 창으로 사울을 죽일수 있었습니다. 보란 듯이 세상에 웃음이 될수 있도록 자신을 죽이려고 겨누었던 그 창으로 사울을 죽일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창을 그렇게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사울에게서 그 창을 가져오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사울에게서 그 창을 치워버립니다. 다윗의 이 행동은 사울에게서 악한 동기와 행동을 가져가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사울에게서 그 창은 <악한 마음>을 상징하는 물건입니다. 그러난 다윗은 사울에게서 그 창을 가져 나옴으로 사울의 <악한 마음>을 가져 오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놀랍게도 성경에 보면 그 사건 이후로 사울의 모습은 다윗을 더 이상 위협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에서 우리의 감정속에 있는 그릇된 에너지가 내 삶의 에너지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분노와 원망과 미움을 나의 삶의 에너지로 삼지 말아야합니다. 사울하면 어떻하면 내가 받은 이 수모와 원한을 되갚아줄까? 하지 않으면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악을 선으로 이기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지난주 심각한 지진이 났습니다


한 며칠 동안은 잠을 잘 때면 지진이 또 날까 겁이 났습니다. 조금만 흔들려도 잠기 깨곤했습니다. 지진으로 물건들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고 얼마나 지진이 위력적인지도 경험했습니다.


그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 ! 저 물건이 언제 저기 올라가 있었지? ! 내가 깨질 물건을 저기에 올려 놓았네 ... 이제 저걸 내려놓아야지 ! >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진으로 물건이 떨어지고 깨지고 상한 경험을 하고서는 우리 집안에서 넘어지고 깨지고 흔들릴 만한 것들을 찾아 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내려놓게 되었지요. 참다운 내려놓음을 준비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마음 안에도 지진같이 조금만 흔들어도 깨어질 것들이 많습니다. 계속 내 마음을 무너지게 하고 나를 넘어지게 하고 나를 상하게 하는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어느 순간에 나도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올려놓은 그런 분노, 원망, 상처, 미움, 원수맺음과 같은 마음들이 있지는 않습니까?


언젠 가는 그것들이 내 마음을 안에서 떨어져 내 마음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습니다. 내 마음이 엉망이 되기(mess up) 전에 그것을 바로 잡는 것이 필요합니다.

 

< 사랑을 베푸는 자에게 있어서 사랑이 실패로 끝난다 하더라도

 사랑은 역시 최선의 길이다. > 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다윗의 행동은 우리에게 끝까지 놓지 말아야할 마음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은 은혜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그 선한 마음을 부여잡고 그대로 행동하고 그대로 선택하면 사는 것입니다. 나의 인간적인 욕심과 감정을 부여잡지 않고 원수를 원수 갚음으로 매듭짓지 않고 조용히 사울의 창을 가져옴으로 선으로 악을 이기는 모습을 부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이 원수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은혜 베풀기회로 삼는

그런 탁월한 삶의 내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원수는 내가 갚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갚으신다. 그리고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대로 행동하면 하나님의 뜻은 만드신 이룬다는 이 하나님께 대한 강력한 신뢰가 다윗을 이스라엘의 두 번째왕으로 세우고 계십니다.

 

리차드 램브란트의 이야기입니다. 

이집트에 주둔한 적이 있었던 한 영국 상사가 자신에 관한 이런 이야기입니다.


내가 있던 부대에 예수를 믿는 민간인이 하나 있었는데, 우리들이 그 사람을 되게 못살게 굴었습니다. 비가 몹시 내리던 어느 날 밤 그는 지쳐서 들어와서는 잠자리에 들기 전 기도를 하려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나는 진흙이 잔뜩 묻은 내 장화를 그 사람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지만, 그는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 장화가 깨끗이 닦여져서 내 침대 옆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것이 나에 대한 그의 보답이었고, 그 대답이 내 마음을 녹였습니다.나는 그 날 구원받았습니다.









  • [사무엘상 21:10-15] 두려움에서 도망치기
  •  Main Idea : 다윗은 사울을 두려워 도망쳤다. 그러나 더 중요한것은 다윗은 그 마음의 두려움에서 도망쳐야 했다. 사람이 두려워 사람을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의 진정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께로 내 마음이 도망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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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 21:10-15]

(삼상 21:10)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삼상 21:11)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말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

(삼상 21:12) 다윗이 이 말을 그의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삼상 21:13) 그들 앞에서 그의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삼상 21:14) 아기스가 그의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삼상 21:15)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 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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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두려움으로부터 도망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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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사울의 위협을 피해서 도망하고 있는 다윗으로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억울한 누명, 정처없는 도망자의 삶, 끊임없는 추격, 아슬아슬한 위기탈출... 고달픈 도망자의 신세가 되고 만 다윗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있은 본문 사무엘상 21장에 등장하고 있는 다윗의 모습을 통해서 가장 많이 등장하고 있는 다윗의 심정은 바로 < 두려움 >입니다. 사람과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그를 애워싸고 그를 심각한 위기속에 몰아놓습니다. 


 다윗은 라마나욧에서 놉땅으로 그리고 이제는 이방 블레셋의 도시인 가드로 도망을 칩니다.  다윗에 대한 갖는 두려움의 대상은 바로 < 사람 > 이었습니다. 


삼상 21장 10절에 <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아나 > 

삼상 21장 12절에 < 가드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 


이러한 사람에 대한 두려움은 그를 자신이 머물고 있는 자리에서 < 도망치도록 >만들었고 자신을 < 미친척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래전에 보았던 헤리슨 포드 주연의 영화 < 도망자 >라는 영화가 떠 오릅니다. 어울하게 살인범의 누명을 쓰고 사형선고를 받고 교도소를 향하던 헤리슨 포드는 호송버스안에서 몇몇 죄수들의 탈주를 하는 사고속에서 탈주범의 누명을 쓰고 도망자가 됩니다. 이러한 사실을알게된 킴블형사는 제라드을 잡기위해서 추격을 벌립니다. 살인범에서 탈주범으로 ... 엎친데 덮친 것 같은 상황의 연속입니다. 스릴과 서스펜스의 연속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도망자 다윗의 상황도 같습니다. 사울에서 도망쳤던 다윗은 이제는 블레셋 아기스에게서도 도망쳐야만 했습니다. 다윗이 자기 나라 이스라엘에 더 이상 머물곳이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일종의 정치적인 망명을 계획하고 자신이 죽였던 블레셋 장수 골리앗의 고향인 가드땅으로 발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다윗에게선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도 다윗을 한눈에 알아봅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죠. 


다윗에 대한 소문은 이미 들었던 내용이었습니다. 어찌 자신들의 자랑이었던 골리앗을 물맺돌로 죽였던 그 사건을 모를 리가 있겠습니다. 블레셋에게서 다윗은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신화적이며 입지전적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난 사울에게서 도망치고 있는 다윗의 모습은 더 이상 블레셋 가드땅 아기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나선 사람은 사람들의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나선 사람은 사람들에게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사람들의 익숙한 방식은 인생의 절대절명의 위기고 원치않은 위험을 경험하면 가장 먼저 손을 뻗는 태도는 < 사람을 의지하는 것 >입니다. 이것은 너무도 쉽고 너무도 간편한 방법입니다. 다윗도 자신의 도망자의 삶에서 자신이 의지했던 사람들이 었습니다. < 다윗, 사무엘 그리고 엘리멜렉 그리고 블레셋의 아기스왕 까지 > 


우리는 어려운 일이 생기면 두려움이 일이 생기면 사람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의지하고 도움을 요청했던 그 사람에 대한 기대는 깨어지고 실망하고 때로는 더 큰 위기가 찾아옵니다. 


위기라는 단어는 < 위험 >이라는 단어와 < 기회 >라는 단어가 합쳐진것입니다. 

우리는 위기를 만나면서 위험한 사항을 어떠한 기회로 바꾸어야 할지를 생각해얍합니다. 우리는 위기의 순간에 그 위기를 탈출할 기회를 사람을 의지하고 사람에게 도움을 구할 기회로 삼을지.. 아니면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삼을지를 생각해야합니다. 


다윗에게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 골리앗의 칼 >입니다. 그가 쥐고 있는 골리앗의 칼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신의 이길수 없는 싸움을 이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다윗하고 있는 싸움은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 해야만 이길수 있는 싸움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아무리 다윗에게서 제사장의 떡을 먹고 골리앗을 칼을 쥐고 있어도.. 자신의 마음안에 있는 < 두려움 >과 싸워서 이기지 못하면 계속된 < 두려움 >이 애워싸고 결국에는 그 <두려움>으로 함몰되고 말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도움 < 두려움 >과 맞써 싸워야합니다. 우리에게서 두려운 마음은 우리를 치명적인 결함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에게 찾아온 두려움을 처음에 제압하지 않으면 결국에는 더 큰 두려움에 우리의 마음을 내어 놓게 되고 또 더 큰 두려움에 내 마음이 사로잡히게 됩니다.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은 오직 한가지입니다. 그것은 < 도울힘이 없는 없는 인생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 >입니다. 


다윗이 도망자의 삶에서 철저하게 훈련받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두려움에서 도망치는법 >입니다. 더 이상 두려운 상황에서 두려운 사람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두려운 마음에서 도망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두려운 마음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옮기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작은 두려움이 스며들고 작은 두려움을 허용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더 큰 두려움을 허용하게 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을 방해받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두려움과의 치열한 전쟁을 벌리는 것입니다. 사단마귀는 우리에게 가장 손쉬


운 방법으로 < 두려움 >을 심어 놓습니다. 그 두려움의 싹이 나서 우리의 마음의 밭을 온통 <두려움>으로 가득차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다윗처럼 미친척한다고 두려움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인도의 설화중에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마술사가 쥐를 관찰하다가 쥐가 고양이 앞에서 벌벌 떨며 두려워하는 쥐가 불쌍해졌습니다. 마술사는 마술을 부려 쥐를 고양이로 변하게 했습니다. 변신한 고양이가 이번에는 개를 몹시 두려워하는 것이 아닌가. 더 불쌍한 마음을 가진 마술사는 다시 한 번 마술을 사용해서 이 고양이를 개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개가 된 고양이는 이번에는 호랑이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닌가. 이 모습도 불쌍히 여긴 마술사는 개를 호랑이로 변신시켜 주었습니다. 동물의 왕 호랑이야 두려울 것이 있겠는가 싶었는데 호랑이는 사냥꾼의 총을 두려워 전전긍긍했습니다. 사냥꾼을 두려워하는 호랑이를 보면서 마술사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어떻게 해도 너의 두려움이 끝나지 않으므로 너는 별 수 없는 쥐새끼다. 다시 쥐로 돌아가라.” 원래 모습인 쥐로 되돌려 놓았다는 인도이야기이다.   





인간의 내면안에 있는 두려움은 절대 다른 대체물이나 사람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직 참 평안과 위로를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에서 해결할수 있습니다. 


(시 146:3)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시 146:5)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오늘 본문에 다윗은 블레셋 가드땅으로 가기로 선택하면서 < 하나님을 묻거나 하나님을 도움을 요청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판단과 선택을 생각합니다. 다윗의 도망자의 삶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 됩니다. 

 다윗의 마음을 애워싸고 있는 그 두려움에서 도망치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때로는 여러분이 당하고 있는 삶의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으신가?

때로는 내가 의지할 사람을 찾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그 결과는 계속 삶의 상황에 도망쳐야하고.. 계속 의지할 사람이 두려운 사람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될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위기의 순간에 가장 먼저해야할 일은.. 

우리 마음 안에 있는 두려움에서 도망치는 것입니다. 



<찬397 주 사랑안에 살면 > 

주 사랑 안에 살면 나 두렴 없으며 

그 사랑 변함 없어 늘 마음 편하다 

저 폭풍 몰아쳐서 내 마음 떨려도 

주 나의 곁에 계셔 겁낼 것 없어라




  • [사무엘상 23:15-39] 좋은 친구가 있나요
  • Main Idea : 다들 나에게서 나갈때 내게로 들어오는 사람이다. 요나단은 바로 다윗에게 그런 친구이다. 우리에게 그런 좋은 친구가 있는가?


[설교음성 파일 ]

https://soundcloud.com/yonghwan-shin/2014-03-25-1


[삼상 23:15-29]

(삼상 23:15) 다윗이 사울이 자기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나온 것을 보았으므로 그가 십 광야 수풀에 있었더니

(삼상 23:16)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삼상 23:17)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니라

(삼상 23:18) 두 사람이 여호와 앞에서 언약하고 다윗은 수풀에 머물고 요나단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삼상 23:19) 그 때에 십 사람들이 기브아에 이르러 사울에게 나아와 이르되 다윗이 우리와 함께 광야 남쪽 하길라 산 수풀 요새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삼상 23:20) 그러하온즉 왕은 내려오시기를 원하시는 대로 내려오소서 그를 왕의 손에 넘길 것이 우리의 의무니이다 하니

(삼상 23:21) 사울이 이르되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삼상 23:22) 어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그는 심히 지혜롭게 행동한다 하나니 너희는 가서 더 자세히 살펴서 그가 어디에 숨었으며 누가 거기서 그를 보았는지 알아보고

(삼상 23:23) 그가 숨어 있는 모든 곳을 정탐하고 실상을 내게 보고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가리니 그가 이 땅에 있으면 유다 몇 천 명 중에서라도 그를 찾아내리라 하더라

(삼상 23:24) 그들이 일어나 사울보다 먼저 십으로 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광야 남쪽 마온 광야 아라바에 있더니

(삼상 23:25)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찾으러 온 것을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아뢰매 이에 다윗이 바위로 내려가 마온 황무지에 있더니 사울이 듣고 마온 황무지로 다윗을 따라가서는

(삼상 23:26) 사울이 산 이쪽으로 가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산 저쪽으로 가며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급히 피하려 하였으니 이는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고 잡으려 함이었더라

(삼상 23:27) 전령이 사울에게 와서 이르되 급히 오소서 블레셋 사람들이 땅을 침노하나이다

(삼상 23:28) 이에 사울이 다윗 뒤쫓기를 그치고 돌아와 블레셋 사람들을 치러 갔으므로 그 곳을 셀라하마느곳이라 칭하니라

(삼상 23:29) 다윗이 거기서 올라가서 엔게디 요새에 머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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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속된 다윗의 도망과 사울의 추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찾기 위해서 매일같이 그를 찾아 나섭니다. 오늘 본문 앞절인 14절에 보면 


(삼상 23:14)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


 사울이 다윗을 찾는 일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도움속에서 다윗은 여러번의 위기와 고비를 넘기고 있습니다. 처음의 도망칠때만해도 사람을 의지했던 다윗은 이제는 여러 위기를 경험하면서 하나님께 순간 순간 물으면 그의 걸음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비로 사울에게 쫓기는 신세이지만 오히려 자신을 따르는 600명의 사람들을 붙여주며 심지어 블레셋에 곤경에 처한 그일라 사람을 도와주게 됩니다. 


 자기 코가 석자인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서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네 손에 붙이리라 ” 

다윗은 그일라를 구원해주는 놀라운 사건을 경험한 후에 다시 사울을 피해 도망을 칩니다. < 십 황무지 수풀에 머물게 됩니다. > 


 다윗에서 십 황무지 수풀은 < 자신의 몸을 피할 은신처 >였습니다. 그때 다윗은 자신의 친구인 요나단과 마지막 조우를 하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이 본문에서 다윗에게 찾아온 요나단이 어떤 친구인가?에 주목하고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좋은 친구가 있으신가요? 여러분이 생각할 때 좋은 친구는 어떤 사람인가? 좋은 친구의 조건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려합니다. 


 젊은 남자와 여자가 나이가 들면 꼭 필요한 것 순위를 매겼는데 

 여자는 <재산/친구/건강/애견/남편> 남자는 <건강/아내/재산/취미/친구> 

 더 나이가 들면 여자는 <딸/돈/건강/친구/찜질방> 

 남자는<마무라/아내/애들엄마/집사람/와이프>  라고 합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중에 하나가 < 친구 관계 >입니다. 


친구란 어떤 사람인가? 정의를 내려보면.. 어떤 사람은 이런 인상적인 정의를 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 사람들이 나에게서 다 나갈 때 나에게로 들어오는 사람이다 ”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참으로 인상적인 말이지요


오늘 본문에 요나단은 다윗에게 그런 친구였습니다. 사람들이 다 다윗에게서 멀어질 때 다윗을 향해서 걸어 들어오는 그런 친구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숨기기위해서 < 십 황무지 수풀 >에 숨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고 있었던 요나단은 다윗에게 찾아들어옵니다. 자신의 아버지가 다윗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다윗이 자신이 아버지를 이어 왕이 되는 자리에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를 아는 그가 어떻게 그렇게 다윗에게 걸어들어 올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다윗와 요나단의 깊은 우정과 친구관계에서 설명할수 있었습니다. 이 친구관계는 그저 사이좋은 그런 좋은 친구관계를 벗어나 그 두사람 사이에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실하게 이해하고자하는 순종과 신실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오직 그들안에 있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의 동기만이 있었습니다. 


 다윗와 요나단은 서로 그렇게 신실한 관계를 만들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중심을 이어주고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순수한 마음의 작용이 그들을 친구로 묶어 주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분노와 질투로 억울한 도망자 신세가 되었지만 자신을 붙들고 계신 하나님의 손길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요나단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마음에 쌓아두지 않았습니다. 요나단의 애매한 어려움을 이해하고 오히려 요나단과 사울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의 진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이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떠나 다윗에게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더 이상의 이해관계나 욕심을 갖기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드렸습니다. 오히려 애매히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쫓기고 있는 다윗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흔히 아무리 좋은 관계라도 <이해관계>가 얽히면 그 관계가 지속되기가 쉽지않습니다. <이해관계란 이익과 손해, 이득과 손실을 따지는 관계입니다.> 그렇게 좋던 관계도 그렇게 잘 지내던 관계도 자신이 손해보거나 억울한 일이 생기면 쉽게 그 관계가 흐트러집니다. 그래서 서로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서로에게 분노의 마음을 품지고... 어쩔수 없는 어려움입니다. 


 모든 사람은 예외없이 이러한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손해보지 않으려하고 자신이 억울하게 사람들에게 당하는 것이 싫습니다. 그래서 어떻해서든지 자신이 손해보는 쪽보다는 이득을 얻는 쪽으로 머리를 굴리고 계산을 합니다. 


 그러한 좋은 인간관계은 < 이득과 손해를 따지는 이해관계 >가 아니라 < 서로의 입장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또다른 이해해주는 관계 >를 만들어야 합니다. 상대방의 그 입장이 되어지고 그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헤아리고 살피는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 바보는 적이 없다. 그리고  친구가 많다. > 왜 그럴까요? 바보는 <이해관계>를 만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보는 모든 사람을 수용하고 인정하게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나보다 훨씬 똑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종종 친구가 많은 사람들이 부럽습니다. 그래서 친구가 많은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을 보면 어떤 사람인가를 보았습니다. 딱 2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 첫째는 먼저가 많이 말하기보다는 듣는 사람이다. 둘째는 상대방을 인정해주고 격려하는 사람이다. >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친구가 있습니까? 이해관계를 따지는 친구가 있습니까? 아니면 진정으로 이해해주는 친구가 있습니까? 


부부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관계는 영혼의 친구입니다. 서로의 사랑과 이해가 필요한 관계입니다. 너무 따지지 않는 것입니다. 종종 부부싸움을 할때는 남편은 아내의 감정에 집중하지 않고 문제가 일어난 사실에 집중합니다. 그래서 < 범인 찾기 >를 합니다. 한사람은 도망자가 되고 한사람은 추격자가 됩니다. 사생결단하면서 도망치고 추격하고 그런 관계를 만듧니다. 

사울과 다윗의 관계는 도망치고 추격하는 그런 관계였다면 다윗와 요나단의 관계는 숨어있지만 조용히 다가오는 관계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다윗와 요나단의 이 관계속에서 좋은 친구의 조건을 3가지로 묵상해보았습니다. 


1/ 좋은 친구는 아무도 찾는이 없을 내게 찾아오는 친구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나단은 자신의 아버지 사울의 눈을 피해서 다윗을 찾아갑니다. 

(삼상 23:16)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요나단이 다윗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며 용기입니다. 좋은 관계는 먼저 다가서는 그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자신은 가만히 있고 좋은 사람이 나에게 다가오길 기다립니다. 그러면 결코 좋은 관계를 만들 수 없습니다. 좋은 관계는 먼저 내가 좋은 사람으로 다가가는 일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에게 내가 찾아가는 그일이 바로 가장 좋은 관계를 만듭니다. 


2/ 좋은 친구는 힘을 잃었을 때 나를 격려해주시는 친구입니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찾아와 한일은 무엇입니까? 바로 도망자로 숨어있는 다윗에게 용기를 잃지 않기를.. 그리고 글에게 힘과 격려를 불러 넣습니다. 

(삼상 23:16)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이 말은 < 그가 하나님 안에서 그의 손을 강하게 했다 >는 뜻입니다. 

(삼상 23:17)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니라


요나단은 다윗의 손을 붙잡고 말했을 것입니다. < 친구가 하나님손의 너를 붙잡고 있다 두려워말라. 결코 내 아버지가 너를 해하지 못할 것이다 > 

 좋은 친구의 조건은 < 격려 >입니다. 우리는 우리자신에게 물어야합니다. <나는 어떤 격려의 사람인가? 나는 격려하고 있는가? 격려받고 있는가? > 


항상 문제만 지적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항상 격려하는 사람인가?
최근에 제가 즐겨하는 말중에 < 이게 문제야.. 이번 문제는.. .. 문제는 문제는... > 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회의를 하거나 말을 할 때 < 문제야 ... 문제는 >이라는 말을 빼보고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해보았더니.. 훨씬 말이 부드러워졌고 제 입에서 오히려 격려하는 말들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격려는 문제를 지적하는 일을 멈추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구나하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맘에 들지 않으면 격려할수 없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을 바꿔놓으면 격려할수 있는 것입니다. 


3/ 좋은 친구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 알아주는 친구입니다. 

요나단은 알고 있었습니다. 

(삼상 23:17)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니라

쉽지 않은 요나단의 고백입니다.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을 때 요나단은 분명한 확신을 갖고 다윗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나단의 그냥 대세를 읽은 처세가 아니없습니다. 요나단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약속과 경외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쉽지않은 고백과 인정을 하게 한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의 인정하는 것에 인색할 때가 많습니다. 나보다 나은것이나 나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우월의식이나 때로는 열등감에서 쌓여서 좋은 관계를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서로 알아가주는 것이 좋은 관계의 원리입니다. 인정할 때 기쁨으로 인정해주는 것 그것이 좋은 관계의 출발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오늘 어떤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주변에 어떤 사람과 친하게 지내고 있습니까?


좋은 친구는 아무도 찾는이 없을 때 내가 다가오는 사람이며 내가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좋은 친구는 내가 힘을 잃었을 때 내게 격려해주는 사람이면 내가 격려해야할 사람입니다. 그리고 좋은 친구는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을 때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면 나도 그러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는 이해관계를 뛰어넘은 영적인 은혜관계. 서로 이해하는 관계였습니다. 이 둘의 관계의 중심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신실한 하나님의 약속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면서 나는 어떤 관계를 맺고 살고 있는지 돌아보는 하루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사무엘상 23:1-15] 은혜로운 추격전  
  • Main Idea : 다윗을 도망과 사울의 추격은 은혜롭지 않은 추격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과 함께하십니다. 다윗에게는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지만 하나님은 그 추격전을 은혜로운 시간으로 바꿔 놓으십니다.  


[설교음성파일]

https://soundcloud.com/yonghwan-shin/2014-03-26/s-5pnCD


[삼상 24:1-15]

(삼상 24:1)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쫓다가 돌아오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더이다 하니

(삼상 24:2)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새

(삼상 24:3)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삼상 24:4)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삼상 24:5)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삼상 24: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삼상 24:7)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

(삼상 24:8) 그 후에 다윗도 일어나 굴에서 나가 사울의 뒤에서 외쳐 이르되 내 주 왕이여 하매 사울이 돌아보는지라 다윗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삼상 24:9)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

(삼상 24:10) 오늘 여호와께서 굴에서 왕을 내 손에 넘기신 것을 왕이 아셨을 것이니이다 어떤 사람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하지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 하였나이다

(삼상 24:11) 내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 자락만 베었은즉 내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오늘 아실지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삼상 24:12)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삼상 24:13) 옛 속담에 말하기를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하였으니 내 손이 왕을 해하지 아니하리이다

(삼상 24:14)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의 뒤를 쫓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음이니이다

(삼상 24:15) 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심판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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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울과 다윗의 추격전은 계속이어지고 있습니다. 어제 읽은 본문 사무엘상 23장의 마지막절에 다윗이 도움의 주었던 십 사람들의 배신과 사울의 그릇된 확신속에서 다윗은 사면초과에 몰리게 됩니다. 절대 절명의 위기의 몰리게 된 다윗은 더 이상의 갈곳도 없는 막다른 곳에 몰리게 됩니다. 그리고 사울의 군사들에게 애워싸이게 되죠. 그때 마다 하나님이 일을 행하십니다.


 바로 블레셋이 침노했다는 소식에 급히 사울은 자신의 걸음을 바꿔야만 했던 참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사울은 다시 다윗을 쫓게 됩니다. 

(삼상 24:1)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쫓다가 돌아오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더이다 하니

(삼상 24:2)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새


다시 잠시 멈추었던 사울의 추격전을 시작됩니다. 엔게디 광야에서 그리고 엔게디동굴에서 있는 다윗을 찾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바로 오늘 말씀의 장면입니다. 


오늘 본문의 장면부터 상황의 뒤바뀌게 됩니다. 사울이 다윗의 목숨을 살려준 것이 아니라 다윗의 사울의 목숨을 살려주는 예상치 못한 반전이 일어납니다. 


 사무엘상을 통해서 사울과 다윗의 추격전을 살며보면 예상치 못한 반전의 연속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가장 긴장감있게 만들고 가장 통쾌한 순간은 바로 예상치 못한 반전의 시나리오를 볼 때 아주 흥미진진함을 느낍니다. 


 오늘 사울과 다윗의 추격전 이야기가 우리에게 많은 드라마틱한 감동을 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예상치 못한 반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반전이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함께하심의 차이에서 일어납니다. 


 사울도 처음에는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완악하고 거짓된 마음을 하나님의 함께하심과는 점점 멀어지는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말로는 < 하나님이 다윗을 나의 손에 붙이셨다. 여호와의 복인 너희에게 있기를 원한다 >라고 그럴듯하게 꾸미고 있지만 정작 사울에게서 하나님의 함께하심은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가 사울에게 쫓기면서 도망자신세를 지나는 동안 그의 마음에 더큰 확신이로 찾아온 것이 바로 < 하나님의 함께하심 >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안에 있는 하나님의 함께하심에 확신이 있었기에 그 순간순간의 위기를 넘길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경험할때마다 하나님의 공급하심, 하나님의 보호하심,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래서 비록 도망자의 삶이었지만 하나님의 손을 경험하는 은혜도 더해갔습니다. 


사울에게서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떠나는 것은 더 이상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는 그의 삶에 반전을 일으킵니다.  

다윗에게서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머무는 것은 그의 삶의 상황을 뒤집어 놓는 반전을 일으킵니다. 


 추격자 사울은 삼천명을 병사를 거리고 다윗을 찾으러 엔게디 광야에 이릅니다. 그 엔게디 광야에는 석회굴들이 많은 산이며 거기있는 어떤 굴들은 수백명 혹은 수천명 들어갈수 있는 큰 굴들도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3절에 재미난 것은 

(삼상 24:3)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사울이 굴에 이들어간 이유를 < 뒤를 보러 들어가니라 > 여기서 이 표현은 < 그 발을 가리운다 >는 의미인데 일종의 < 용변을 보거나 잠을 자려고 >라는 의미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용변을 보러들어갔다니 다윗에 죽음을 맞을번한 변을 당하게 됩니다.> 


용변을 보러갔다 이 변을 당하여 변사로 발견될 뻔한.... 웃지못할 상황이 벌어진것입니다. < 이런 변이 있나 > 


 다윗에게서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기회가 옵니다. 

그렇게 다윗을 추격하던 사울이 이러한 어이없는 상황에서 다윗에게 치욕스러운 일을 당하게 됩니다. 다윗에게 옷자락을 배임으로 < 자신의 목숨이 다윗의 손에 >이었음을 경험하는 것.. < 다윗의 긍휼로 목숨을 연명하게 된 이 어처구니 없는 경험 > 바로 사울의 굴욕사건 그 자체 였을 것입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죽임을 당할번한 위기는 사무엘상 26장에 한번더 나옵니다. 그때에는 사울의 창과 물병만 가져옵니다. 사무엘서 기자는 의도적으로 다윗이 사울의 목숨을 살려주는 비슷한 사건을 2번이나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당혹스러운 이야기들의 반복을 문학적인 용어로 < 더플 플롯 >이라고합니다. 하나의 이야기속에서 두 개의 이야기 줄기가 뒤엉켜있는 기법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어떤이들인 사무엘상 24장과 26장은 같은 이야기라고 말하기도하고 어떤 이들은 다른 이야기를 말합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두배경도 비슷한 지역에서 벌어진 일고 이야기 구조도 아주 흡사합니다. 어찌되었든 사무엘서기자는 사무엘상 24장과 26장이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사울을 죽이지 않은 다윗의 마음과 중심입니다. 

(삼상 24:4)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다윗의 사람들은 다윗에게 말합니다. 이 상황을 완전히 뒤바꿔놓을 기회가 왔음을 말합니다. < 네 생각에 좋은대 그에게 행하라. 바로 오늘 그날입니다. >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들의 말대로 하지 않습니다. <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었습니다. > 사울을 죽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다음 구절입니다. 

(삼상 24:5)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않고 사울의 옷자락을 벤 것은 그에게 긍휼을 베푼 행동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에게 선의를 베푼 증거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왜? 그 일 하나만으로 < 다윗의 마음이 찔렸을까요? > 


많은 해석자들은 다윗의 이 행동에는 그의 숨은 동기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 대목은 단순히 사울의 옷자락을 자름으로 그에게 내가 긍휼을 베풀어주었다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 이 왕권을 사울로부터 빼앗고 싶은 그의 숨은 속마음. 역심을 옅볼 수 있는 장면 >이라는 것입니다. 


왕의 옷은 고대 근동에서 왕권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사울의 옷자락을 벤 것은 그의 인격에 손을 댐과 같았고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왕을 대적하여 손을 드는 일이었습니다. 


왕의 옷자락을 자락을 자리는 행위는 그의 마음에 숨은 < 역심 >이 있음을 들통나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내면의 있는 욕심과 역심을 알게 된것이죠..


그리고 사울왕에서 호소합니다. 

[삼상 24:9-10]

(삼상 24:9)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

(삼상 24:10) 오늘 여호와께서 굴에서 왕을 내 손에 넘기신 것을 왕이 아셨을 것이니이다 어떤 사람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하지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 하였나이다


(삼상 24:12)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삼상 24:15) 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심판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이것은 다윗의 애절한 호소이며 그의 중심의 고백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익숙한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하나님의 마음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울은 익숙한 사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와 함께했지만 하나님과 함께하는 일에서 실패했습니다. 다윗은 편안한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 하나님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고 사소한 판단과 사소한 결정도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차이가 결정적인 반전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의 모든 인간적인 판단은 유보한채 자신의 유리한 상황조차도 내려놓은채 

오직 하나님의 판단과 결정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중심에만 집중하고 있는 다윗의 모습을 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우리는 우리의 삶에 우리가 유익한 상황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하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혹시 우리는 우리가 유익 한쪽으로 결정하고 선택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유익한 쪽으로 결정하고 선택해야하는 사람임이 잊지 말아야합니다. 


우리가 놓치지 말았어야 하는 절호의 찬스가 온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이 아니면 멈출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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