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에스라 4:1-10>
  • 위기의 시대 : 멈출수 없는 예배 




  @ 설교문중에 그림은 인터넷 갈무리 


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에스라 4:1-10>


제목 : <에스라 4:1-10> 위기의 시대 : 더이상 멈출수 없는 예배




 

[에스라 41-10]

1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한다 함을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듣고

2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도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같이 너희 하나님을 찾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 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하니

3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

4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5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 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계획을 막았으며

6 또 아하수에로가 즉위할 때에 그들이 글을 올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을 고발하니라

7 아닥사스다 때에 비슬람과 미드르닷과 다브엘과 그의 동료들이 바사 왕 아닥사스다에게 글을 올렸으니 그 글은 아람 문자와 아람 방언으로 써서 진술하였더라

8 방백 르훔과 서기관 심새가 아닥사스다 왕에게 올려 예루살렘 백성을 고발한 그 글에

9 방백 르훔과 서기관 심새와 그의 동료 디나 사람과 아바삿 사람과 다블래 사람과 아바새 사람과 아렉 사람과 바벨론 사람과 수산 사람과 데해 사람과 엘람 사람과

10 그 밖에 백성 곧 존귀한 오스납발이 사마리아 성과 유브라데 강 건너편 다른 땅에 옮겨 둔 자들과 함께 고발한다 하였더라

 



제목 : 위기의 시대 < 더 이상 멈출수 없는 예배 >

 

70년동안 포로로 잡혀서 돌아온 유다백성들의 감격의 제사와 환희의 시간이 지나고 이제 본격적인 성전건축의 대역사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페르시아왕 고레스왕의 도움을 힘입어 그리고 돌아온 백성들이 힘을 다해 그들의 믿음과 구원 그리고 신앙의 증표와 같은 < 성전 재건 >의 박차를 다하고 있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백성들에는 < 감격의 시대 >였습니다. < 어찌 우리가.. 이러한 놀라운일에 사용되어진단 말인가? >라고 말할수 있는 감격과 기쁨이 넘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 감격의 시대 > 지나고 < 위기의 시대 >가 도래합니다




바로 그것은 그들이 유다땅에 돌아오기 전에 이미 유다땅에 살고 있는 소위 < 사마리아 사람들 >의 방해였습니다.

 

오늘 본문 에스라 4장에서는 순조롭게 순탄하게 진행될 것 같았던 < 성전 재건 >의 대역사가 심각한 위기와 갈등에 봉착하게 되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의 자손의 성전 재건을 방해하는 세력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 위기의 시대 >가 왔음을 알고 있고 다양한 성전 재건을 중단케하고 방해하는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전재건 뿐만아니라 예루살렘 성의 재건을 방해하는 세력들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에스라 4:1>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한다 함을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듣고

 

성전 건축을 방해하는 세력이 등장한 때는 바로 

<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한다는 소문을 듣고 난후였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이미 < 유다백성들이 포로로 돌아온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이 돌아오는 것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무리들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어제 본문 에스라 3장에도 그러한 <포로로 돌아온 유다백성들>을 못마땅하게 지켜보던 무리가 있었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에스라3:3>

3.무리가 모든 나라백성을 두려워하여 제단을 그 터에 세우고 그 위에서 아 침 저녁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며

여기서 < 무리가 열국 백성을 두려워하여 >라는 말은 < 비록 무리가 열국 백성을 두 려워하였지만 >으로 번역하는 것이 맞습니다.


< 모든 나라 백성 >이라는 말은 < 이미 유다땅에 살고 있는 그땅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 그들은 그 당시 팔레 스틴 땅과 그 주변 지역에 살던 여러 민족들을 가리킵니다. 그들 중 대표적 인 민족은 사마리아인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오늘 본문에도 기록하고 있는 것과 같이 <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 >이 됩니다.

 


오늘 본문 42절이후에 보면 그들의 구체적인 모습과 행동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2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도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같이 너희 하나님을 찾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 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하니

3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

 

여기서 < 소위 사마리아인들 >의 요구와 제안이 무엇입니까?

< 자기들도 하나님을 섬기니 같이 성전을 건축하자 >는 제안입니다.


이러한 소위 < 타협안 >에 대해서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이스라엘 족장들은 <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말하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 하고 대답을 합니다.

 

바로 이것인 가장 큰 위기와 갈등의 시작이 됩니다.


그렇다면 왜? 돌아온 유다사람들은 그곳에 이미 살고 있는 사마리아 사람들과 함께 성전건축을 할수 없었을 까요? 이것은 < 사마리아 사람들 >의 잘못된 신앙과 그릇된 예배의 태도 때문에 함께 할수 없었던 것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 사마리아 사람들과 그들의 신앙 >이 무엇이었는지?부터 알아야합니다.


한마디로 사마리아 신앙은 재미있게 표현하자면 < 짬짜면 신앙 >이었습니다



무언가 < 혼합된 신앙, 정체가 불분명한 신앙 >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중국집에 가면 우리의 고민은 항상 < 짜장면과 짬뽕 >을 선택하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두가지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서 만들어낸것인 바로 < 짬짜면>입니다. 두가지를 다 맛보게하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새롭게 만든 라면중에 < 짜파구리 >라는 라면된 있습니다. < 짜파게티와 너구리 >나면을 합쳐서 새롭게 탄생한 라면입니다.

 

제가 사마리안들의 신앙을 < 짬짜면 신앙 >이라고 말한 것은 < 그들이 신앙이 혼합종교로서 유일한 참신이신 여호와 하나님 만을 섬기는 신앙을 버리고 바벨론과 페르시아 온갖 신들을 함께 섬기는 신앙을 받아 들였습니다. >


사마리아 사람들은 앗수르의 혼합정책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앗수르 나라가 이스라엘을 지배할 때 이방나라는 유다나라의 민족과 신앙을 말살정책을 썼습니다


그래서 앗수르는 이스라엘에 이방사람들을 이주시킵니다. 그리고 이방사람과 유다사람들이 결혼을 하게 만들고 자연스럽게 이방신들을 가져와 섬기게 만듭니다. 바로 이것은 < 민족 혼합정책 >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형성된 민족이 소위 < 사마리아 사람들 >입니다.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앗수르 사람들을 사마리아 땅에 이주시킨 일은 열왕기하 1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왕기하 17:24> 앗수르 왕 이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 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매 저희가 사마리아 를 차지하여 그 여러 성읍에 거하니라

 

그런데 그들은 사마리아 땅에서 여호와 하나님를 섬긴 것이 아니고 그들의 신들과 여호와를 함께 섬기려 했습니다. 그들은 우상숭배자들 이었고 혼합주의자들,종교 다원주의자들이었습니다.


<열왕기하 17:28-34, 41>은 그들에 대해 자세히 기록합니다.

이에 사마리아에서 사로잡혀간 제사장 중 하나가 와서 벧엘에 거하며 백성에게 어떻게 여호와 경외 할 것을 가르쳤더라.그러나 각 민족이 각기 자기의 신상들을 만들어 사마리아 사람의 지은 여러 산당에 두되 각 민족이 자기의 거한 성읍 에서 그렇게 하여 바벨론 사람들은 숙곳브놋을 만들었고 굿 사람들은 네르갈을 만들었고 하맛 사람들은 아시마를 만들었고 아와 사람들은 닙하스와 다르닥을 만들었고 스발와임 사람들은 그 자녀를 불살라 그 신 아드람멜렉과 아남멜렉에게 드렸으며 저희가 또 여호와를 경외하 여 자기 중에서 사람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택하여 그 산당에서 자기 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게 하니라.이와 같이 저희가 여호와도 경외하 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저희가 오늘까지 이전 풍속대로 행하여 여호와를 경외치 아니하며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이라 이름을 주신 야곱의 자손에게 명하신 율례와 법도와 율법과 계명을 준행치 아니하는도다.

 

사마리아를 중심해 거주했던 그들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자들 이 아니었기 때문에 스룹바벨과 유다 지도자들은 그들과 함께 여호와 의 전을 건축할 수 없었습니다.

유다민족안에는 2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 포로로 잡혀갔지만 순수한 혈통과 순수한 신앙을 지키고 순수한 예배를 드렸던 사람들

그러나 

< 포로로 잡혀가지 않았지만 혼합된 혈통과 순수한 신앙을 지키지 못하고 혼합된 예배를 드렸던 사람들 >로 나눕니다


이들이 따로 떨어져 살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 포로로 잡혀갔단 이들이 돌아오면서부터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순수한 예배를 드렸던 사람들이 혼합된 예배를 드렸던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것에서부터 < 위기의 시대 >가 도래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장면의 모습을 어떻게 보십니까? 사마리아 사람들과 돌아온 유다사람들이 함께 성전을 재건해야한다고 생각하십니다. 아니면 오늘 유다사람들이 보여준 모습처럼 분명한 선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에스라서에서 < 사람들이 사마리아 사람들과 함께 성전을 지을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 


이미 우리는 3장에서 유다인들이 자신의 고국땅으로 돌아와 드리는 첫 예배와 제사의 장면을 보았습니다. 감격과 환희의 시대가 열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면에서 빠진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은 < 회개와 자복 >입니다.

 

아마 사마리아사람들이 예배와 제사를 드리는 돌아온 유다사람들과 함께 < 자신이 행한 잘못들과 잘못된 신앙을 돌이키고 회개와 자복 >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면 어쪄면 함께 성전을 건축하는 일을 이룰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마리아 사람들은 중심에는 < 그들이 혼합된 신앙 소위 짬짜면 신앙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


사마리아 사람들이 함께 성전을 짓자는 동기속에는 < 거짓된 동기와 순수하지 못한 목적 >이 있었습니다. < 유일한 참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들의 수많은 신중에 하나로 여기는 거짓된 동기 > 그리고 < 다른 여러신들의 도움을 받아 복받으면 살았는데 이제 여호와 하나님한테도 복받으면 살아보자 하는 순수하지 못한 목적 >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사마리아인들이 지나온 자신의 잘못된 신앙을 반성하거나 회개하는 대목이 안나오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 이유를 찾을수 있습니다.

 

오래전 한국 기독교 역사에 신앙 순수성을 입증하는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 신사참배>사건입니다






우리나라가 일제식민지에 있을 때 교회도 일제천황 폐하를 섬기고 절하는 것을 요청받습니다. 이 신사참배의 사건은 공교롭게도 <한국 교회 장로교 교파의 태동>과도 아주 밀접한 관계있습니다.


일제 천황을 신으로 섬기는일에 찬동하고 신사참배를한 교회와 목회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제 천황을 신으로 섬기지 않고 거부하고 투옥되고 순교를 당한 교회와 목회자가 있었습니다.





결국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면서 바로 이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부류><신사참배에 참여하는 부류>로 나눕니다

이것이 교회의 분열과 나눔의 시작이 됩니다





해방 후 한국 교회에는 신사 참배 회개 문제가 일제 잔재 청산의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었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 생긴 교단이 제가 속한 < 고신 교단 >입니다


어떤일들은 신사참배문제를 회개하고 돌아온 이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신사참배하는데은 어쩔수 없는 이유가 있다고 회개를 거부하는 부류들이 있었습니다. 


국교회와 교단의 문제는 < 회개가 없이 서로를 향한 정죄가 있었기에 교단이 분열되고 교회가 갈등을 맞았습니다. 신앙의 문제를 정치의 문제로 풀어간 것이 분열의 시작이었습니다. 오늘도 한국교회의 이러한 고질적인 문제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

 

우리 한국교회 역사속에서 < 신앙의 순수성과 예배의 진실성 >을 지켜내는 것에 많은 위기와 갈등이 있었습니다.


오늘 에스라 4장에 등장하고 있는 상황역시 그러한 < 위기의 시대 >의 도전앞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 우리의 시대가 예배의 감격을 경험할수 있는 은혜의 시대, 감격의 시대인 동시에 우리의 예배가 방해받고 예배가 실패할수 있는 위기의 시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우리가 예배하기를 결단하고 예배에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집중하지 않으면

우리의 예배의 집중력은 세상의 수많은 방해와 유혹속에서 실패하고 맙니다.

우리의 예배는 집중력을 잃지 않은 것이 중요합니다.


< 우리의 예배가 무언가에 의해서 방해받을수 있다. >

< 우리의 예배가 누언가에 의해서 계속 공격받고 있다. >

< 우리의 예배가 어디선가 잘못되어 갈수 있다 > 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오늘 우리는 오늘 말씀을 보면서 이런 <적용질문>을 만들 수 있습니다.

1/ 나의 예배를 가장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가?


2/ 나의 예배는 나의 필요에 의해서 드려지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고 싶은가?


3/ 내가 진정으로 예배하고 싶은 동기와 중심은 무엇인가?



4/ 내안에 짬짜면 신앙같은 선명하지 못한 신앙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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