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마가복음 14 : 12-21 >
  • 끝까지 함께 할수 없는 사람 
  • 08/13/2014 새벽묵상 설교 


@ 설교문 그림 인터넷 갈무리함 

 

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마가복음 14: 12 - 21> 

제목 : <마가복음 14: 12 - 21> 끝까지 함께 할수 없는 사람 





[ 마가복음 14장 12절 - 21절 ]

12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13 예수께서 제자 중의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14 어디든지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15 그리하면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라 하시니 

16 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께서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니라

17 저물매 그 열둘을 데리시고 가서 

18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19 그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니 

20그들에게 이르시되 열둘 중의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21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제목 : 끝까지 함께 먹었지만 끝까지 함께할수 없는 사람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시러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시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사복음서중에서 가장 짧은 복음서입니다. 총 16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짧은 복음서의 기록중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시는 장면이며 그 고난을 준비하시는 마지막 유월절, 마지막 예루살렘에서의 모습입니다. 




마가는 마치 숨가쁘게 예수님의 마지막 유월절과 예루살렘에서의 십자가의 고난으로 달려 오고 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을 < 고난의 종 >으로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세하는 예수님의 생애의 부분을 간략 간략하게 요약하고 이제 그가 강조하고 싶었던 고난받으시는 예수님, 고난받으시는 종으로 오신 예수님을 포커싱하고 주목하고 있는 것이지요.



오늘 말씀은 바로 예수님의 고난당하심에 앞서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마지막 유월절을 준비하고 그 유월절에서 어떻게 제자들과 보내셨는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어떤 방을 미리 예약하셨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리고 마치 첩보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조금은 수상하게 조금은 의심스럽게 조금은 조심스럽게 유월절에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를 나누시기 위한 장소를 섭외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별명을 이렇게 붙어보았습니다. 

< 수상하지만 이상하지는 않는 본문 > 

< 조심스러웠지만 의심스럽지는 않는 본문 > 


어떤 학자들은 오늘 본문을 <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이 함께 드러나는 본문 >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과 유사한 본문이 < 예수님꼐서 예루살렘 입성때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면서 빌려온 나귀를 구하는 장면 >과 아주 흡사합니다. 


먼저 시간적인 배경을 보면 < 무교절의 첫날 즉 유월절의 양을 잡는 날에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적인 배경에 대해서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합니다. 

유월절은 니산월 14일입니다. 보통 그날 늦은 오후나 이른 저녁, 즉 두 저녁사이에 양을 잡습니다. 그리고 양을 먹는 것은 그 다음날 먹습니다. 그날을 < 무교절 첫날 >이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의 관습으로는 < 그 전날 잡고 그 날에는 약을 먹습니다. > 그래서 < 양을 잡을 날인가? 양을 다음날인가 ? > 의문을 갖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양잡는 날에 먹기 위해서 그 전날에 양을 미리 잡아 놓고 유대인들이 양잡는 날에 드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이스라엘의 구원의 절기인 유월절에 맞쳐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은 어떤 날입니까?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이집트의 장자들을 죽이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양의 피를 문에 바르고 그 안에 들어가서 죽음을 면했던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무교절은 유월절 이후 6일 동안을 그날을 기억하면서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을 먹는 절기이지요. 부풀리지 않고 딱딱한 그 떡을 먹으면서 급하게 이집트를 탈출했던 그 구원의 날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하나인 이 절기를 기념하면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이집트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을 기억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이 유월절에 맞춰져 있다는 것은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무교절의 첫날 즉 유월절 양을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 어디서 유월절 식사를 할것인지?> 묻습니다. 유월절 식사는 예루살렘 성안에서 해야 했습니다. 제자들은 무교병, 쓴 나물, 포도주와 양고기등을 준비하고 먹어야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 두명인 누가복음 22장에 언급하고 있는 베드로와 요한을 베다니에서 예루살렘 성안으로 보내시며 < 물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따라가서 그 남자가 들어가는 집의 주인에게 객실이 어디있는지 물어보라>고 말씀합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추측할수 있는 것은 < 예수님께서 은밀하게 비밀스럽게 제자들과의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은밀하게 마련하고 예약해 두었던 식사 장소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 

이것이 예수님께서 신적인 능력으로 행하신 일인지? 아니면 미리 미리 이 일을 위해서 섭외를 해두신것인지 ? 알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 은밀하게 준비하고 계십니다. > 



그것을 알수 있는 것은 <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고 있다는 것과 가룟유대가 예수님을 배신할 음모가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월적 식사인 성만찬을 통해서 주고자하셨던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혹이나 그 일이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 은밀하게 장소를 섭외하고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셨습니다. >


또 하나 우리가 알아두야할 오늘 본문의 유대적인 문화을 바로 알고 이해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에 다락방은 그냥 작은 다락방이 아닙니다. 큰 사랑채입니다. 왜냐하면 유월적 식사는 온 가족이 함께 먹는 식사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12명의 제자들과 식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유대적인 문화의 배경을 생각해보면 유월절 식사는 12명만 있었던 식사가 아니라 제자들과 그들의 가족이 다 같이 먹을수 있는 장소였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몇 명이 예수님과 식사를 하셨는지 알수 없습니다다. 그러나 유대적인 배경을 생각하면 마지막 유월절 식사는 12명 이상의 식사이면 다락이 아닌 큰 사랑채에 있었던 일입니다. 



보통 유월절 식사는 목요일 저녁에서 시작하여 자정 이전에 마쳤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식탁에 앉아서 식사를 나눈 것이 아니라 비스듬이 누어서 떡을 나눠 먹었스니다. 


그래서 레오날드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의 그림은 성경적이지 않은 그림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테이블을 위해서 앉아서 먹는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그 당시의 식사 장면이 아니라 헬라식으로 바꿔놓은 일종의 왜곡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의 손과 가룟유다의 손이 어느 한 그릇에 동시에 머물렀습니다. 흔히 떡 그릇이락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20그들에게 이르시되 열둘 중의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21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이 본문에 나오는 < 그릇 >은 일종의 빵을 찍어 먹는 생과일 식초가 담겨 있는 소스 그릇입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 식사때 이 식초 물이 담긴 그릇은 2-3인에 하나씩 식탁에 배치해 놓습니다. 유대인들은 식사 때 빵을 포크로 찍어 먹기도 보다는 손으로 떼서 그 그릇의 식초에 빵을 찍어 먹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빵을 < 발사미 식초와 올리브 기름 > 담긴 그릇에 찍어 먹는 것처럼...바로 가룟유다와 예수님이 함께 손이 간 그릇은 바로 < 소스 그릇 >입니다. 


이런 유대적인 문화배경을 알고 성경을 읽으면 더 구체적이고 더 선명하게 본문을 이해할수 있습니다.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묵상하고 깨달아야할 것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합니다. 

1/ 예수님의 마지막 유월절 식사는 수상하지만 이상하지 않은 예견된 식사입니다.

예수님의 고난받으시는 그 유월절은 구약의 유월절의 사건의 재현입니다. 자신이 유월절 어린양이 되셔서 피를 뿌림이 되셔서 우리에게 구원을 전해주시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이 마지막 장면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고난이 우리에게 어떤 놀라운 의미이며 가치인지?을 알려주는 일입니다. 


2/ 예수님과 끝까지 함께 먹었지만 끝까지 함께 할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와 함께 먹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오늘 본문 14절에.. 

14 어디든지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제 마음에 묵상이 되었던 말씀은 < 네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 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과 함께 먹기를 원하십니다. 그 음식은 바로 예수님안에 있는 생명의 떡과 잔이 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나눠 먹은 것은 바로 < 생명 >입니다. 생명의 양식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명의 양식을 먹는 순간에 마음에 다른 마음을 품은 가룟유다가 있었습니다. 바로 < 끝까지 함께 먹기는 먹었지만 끝까지 함께할수 없는 사람 >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룟유다에게 생명을 얻을 음식을 나눠주었지만..

가룟유다는 예수님에게 생명을 뺏을 음모을 꾸미고 있었습니다. 


가룟유다에 대해서 신학적인 논쟁과 의구심이 많습니다..

최근에 <유다복음>이라는 영지주의 문서가 발견되면서 가룟유다에 대해서 제조명하고 부정적인 시각보다는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 < 유다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잡하시기 전에 <가룟유다와 일주일동안 대화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금 신비적이고 수상한 이야기로 가득차 있지요... 


어떤 이들을 가룟유다를 동정합니다. 

그래서 < 유다의 배신을 어떻게 볼것인가 ? 유다의 행동이 정당하지 않은가 ? >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 구원의 도구로 사용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유다의 배신은 하나님의 예정인가? 자유의지인가? >에 대해서 말합니다. 많은 신학적인 논쟁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 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 >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 나지 않았게 했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왜 나게 해서 그렇게 불행한 일을 하게 하는가? 이건 처음부터 정해진 각본대로 움직인것이지? 가룟유다의 잘못이 아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흔히 < 가룟유다의 딜레마 >라고 합니다. 오늘 다 설명할수 없기에..

가룟유다에 대해서 성경적인 이해를 돕는 책이 있습니다. 

< 가룟유다의 딜레마 / 김기현 목사 >책이 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수 있는 것은 가룟유다의 중심에는 

< 탐심이 있었고 그것을 사탄이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 >입니다. 

성경은 그 중심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아담의 범죄가 자유의지의 틈사이에 사탄의 유혹이 들어 온 것처럼 

가룟유다의 자유의지의 틈사이에 사탄의 탐심이 들어 온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실패를 알수 있었지만 알려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가룟유다의 배신을 알고 계셔지만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3/ 예수님께 < 나는 아니지요 >하는 사람는 있었지만 <나 입니다>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실패속에서도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룟유다의 배신속에서도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말씀은 저는 < 가룟유다의 회개의 기회 >라고 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가룟유다나 어떤 제자도 < 나는 아니지요 >라고 말해지... < 예수님 접니다 >라고 말하는 제자는 없었습니다. 


이점에서 사도바울의 고백과 차이가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는 계속 고백합니다. 

< 저는 죄인중에 괴수입니다. > 


우리는 우리의 신앙에서 모순을 찾고 싶어합니다. 

신앙의 딜레마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중심에는 < 주님을 부인하고 싶어하는 인간적인 욕망 >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딜레마에 집중하기보다는 

신앙의 카스리마에 압도되어야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딜레마를 찾기보다는 내 마음의 숨은 딜레마를 찾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볼 때 신앙은 모순입니다. 

그러나 믿음에서 볼 때 신앙은 순종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끝까지 음식을 나누고 내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숨은 음모를 찾아내야합니다. 그리고 주님 ! 제가 주님을 죽일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사람입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배신했습니다. 

그렇게 고백할수 있는 것이 축복이며 은혜입니다. 

그것이 주님과 생명의 떡을 나눠먹을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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