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 GSC새벽 큐티설교 <딤후 1:3-10> ==


제목 : 부끄러워하지 말라( 3:17-21 )



[딤후 1:3-10]

(딤후 1:3)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딤후 1:4)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딤후 1:5)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딤후 1:6)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딤후 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딤후 1:8)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딤후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딤후 1: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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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부끄러워 하지 말라(딤후 1:3-10)

 

사도바울을 디모데후서의 서신을 통해서 에베소에서 자신의 후임으로 목회를 하고 있는 아들 같은 디모데에게 목회적 권면과 당부 그리고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디모데후서 115절에 의하면

(딤후 1:15)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느니라

네로 황제의 박해시기에 많은 변절자들. 복음과 믿음을 저버리는 이들이 교회안에 생겨 났습니다. 쉽게 말해서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사도 바울을 부끄러워하고 복음에 이탈자들이 생겨났습니다. 바로 그 대표적인 이름이 < 부겔로와 허모게네 >입니다.

 

디모데후서 말씀을 보면서 유독 제 마음에 다가왔던 문구 하나는 

<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 >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디모데 후서 1장에만도 3번이나 등장합니다.

(딤후 1:8)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딤후 1:12)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딤후 1:16) 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이 전한 복음이나 복음을 전한 바울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여기서 쓰여지 <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 에파이스퀴노마이 >는 말은 < 부끄러움 당하다 >는 부정적인 의미을 갖고 있는 동시에 < 부끄러워하지 말고 고백하라 >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냥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은 소극적인 자세를 넘어서 조금 더 적극적인 자세를 포함합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복음을 자랑하며 고백하는 일에 당당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디모데후서 1장에 사도바울의 당부와 권면 사도바울의 분명한 고백과 확신이 뭍어납니다. 사도바울의 디모데의 가슴에 다시금 부어주고 싶었던 강한 확신은 바로 < 복음 >이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는 4번에 걸친 복음에 대한 부탁이 등장합니다.

1장에 < 복음을 지키라 > 2장에 <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으라 >

3장에 <복음안에 계속 거하라 > 4장에 < 복음을 전파하라 >

 

사도바울이 아들같은 디모데를 생각하면 늘 기도와 눈물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기도가운데 항상 디모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디모데를 생각하면 감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늘 기도와 감사는 눈물을 드러났습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를 기억합니다.

오늘 본문 3-5절은 새번역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나는 밤낮으로 기도를 할 때에 끊임없이 그대를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나는 조상들을 본받아 깨끗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나는 그대의 눈물을 기억하면서, 그대를 보기를 원합니다. 그대를 만나봄으로 나는 기쁨이 충만해지고 싶습니다. 나는 그대 속에 있는 거짓 없는 믿음을 기억합니다.“

 

구절에서 사도바울은 < 생각 : 모나오마이>이라는 단어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3-5절에 <생각하다>는 동사를 각구절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정확한 표현은 <생각나게 하는 것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바로 기억하고 회상해보는 것입니다. 자신의 아들 디모데를 생각하고 기억해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의 기억속에 있는 디모데안에 중요한 3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청결한 양심입니다. 둘째는 사랑의 눈물이니다.

셋째는 거짓없는 믿음입니다.


이것은 디모데전서에서 사도바울이 언급했습니다.

(딤전 1:5)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청결한 양심은 이기적이지 않은 마음의 중심을 의미합니다. 양심은 아우런 편견도 없는 공평한 판단력이 아니라 뜻과 행위에 있어서의 <자아인식>입니다. 특별히 <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자유롭게 된 양심 >을 말합니다

.

사랑의 눈물은 사도바울은 디모데와 마지막 작별할 때 흘렸던 눈물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거짓없는 믿음은 <위선적이지 않은 믿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위선적이지 않은 디모데의 부모의 신앙을 잘 전수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누군가의 기억속에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되지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아야합니다.

나는 정말 청결한 양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기억되고 있는지?

나는 정말 사랑의 눈물을 흘릴수 있느 사람이라고 기억되고 있는지?

나는 정말 위선적이지 않는 거짓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는지?

 

저는 종종 제가 사역했던 교회들의 교우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생각해보곤 합니다. 지나온 사역의 현장들을 돌아볼때면 그들은 나를 누구라고 기억하고 있었을까?

 

제가 지난주 달라스에서 한국에서 제가 가르쳤던 제자를 5년만에 만났습니다. 지금 그 친구와 하루를 보내는 특별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들의 학교친구를 함께 만났는데 그 친구들이 저를 알고 있었습니다. 제자 저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했다는 겁니다. < 아 그분이 그분이야 !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

 

문뜩 궁금했습니다. 제자에게 물었죠 < 너 친구들에게 나에게 대해서 뭐라고 말했니? > 라고 물었습니다. 그대 제 제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 제 평생의 맨토라고 내가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고.. >

제 이런 사람입니다. ㅎㅎ

누군가에게 어떻게 이 기억되느냐?는 우리의 삶의 내용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를 생각할 때 < 양심/ 눈물 / 믿음 >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신의 기억속에 있는 디모데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6-7절을 새번역을 읽으면 이런 이유로 나는 그대를 일깨워서, 그대가, 나의 안수로 말미암아, 그대 속에 간직하고 있는 하나님의 은사에 다시 불을 붙이게 하려고 합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

 

다시 바울은 디모데의 가슴을 뜨겁게 하고자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강한 어조를 도전하고 있습니다.

(딤후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바슬레이 슐링크 < 예수님과 멀어지게 된 45가지 이유 >

우리 안에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 두 가지가 공존한다. 하나는 온 세상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즉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십자가를 거부하는 것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10:38).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2:3)

 


<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는 말씀이 < 복음과 함께 복을 받으라 >가 되면서 기독교 신앙은 변질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 고난을 받으라 >는 도전은 < 나와 함께 고난에 동참하라 >는 초청과 같은 것입니다. 바울의 복음을 향한 초청은 바로 고난의 자리로 한걸음더 나아가는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사는 것

복음을 위해서 살아내는 것

그것은 고난을 경험하는 일입니다.

 

(딤후 2:11)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복음을 위해서 살겠다고 작정하는 일은 주와 함께 죽으러 가는 것을 작정하는 일입니다. 동시에 복음을 위해서 살아내는 것은 주와 함께 살아나는 입니다.

 

주님을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땅에서 청결한 양심과 사랑의 눈물 그리고 거짓없는 믿음을 기억할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복음 때문에 복음을 위해서 당한 고난을 기억할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 가장 즐겁게 우리와 함께할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을 위한 우리의 당부이며 요청입니다.

 

== 2015 GSC새벽 큐티설교 <3:17-21> ==


제목 : 나를 본 받으라 ( 3:17-21 )





[3:17-21]

(3: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3: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3: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3: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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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나를 본 받으라 ( 3:17-21 )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나를 본 받으라 고 말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의미는 잘 연단되고 만들어지 틀을 수요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서서 < > 이라고 말하는 말은 <튀포스>인데 <튑토>라는 단어에서 나온말입니다. 튑토라는 말은 < 무언가를 때리고 쳐서 만들어진 틀 / 흔적 / 자취 / 모형 >을 말합니다.

< >은 사도바울의 말씀대로 살려고하는 온전한 경건, 복음대로 살아내려는 삶의 내용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자주 사도바울은 이 < 본받는 것 >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뿐이 아니고 고전 11:1절 에서도 똑 같은 말을 했습니다.

(고전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살후 3:9)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살전 1:9)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살전 1: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살전 1: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살전 1: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사랑하는 여러분. 누군가에게 < 나를 본 받으라 / 나 만큼 해 / 나처럼 해 >라고 말하기는 것이 쉬운 일까요? 어려운 일일까요?


성도들의 본이 되어야하는 목자인 저 자신부터 이러한 권면과 요청은 쉽지 않습니다.

< 집사님 저를 보시고 아시고.. 제가 어떻게 살고 있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제발 저처럼만 해보세요. 저를 본받아 보세요 > 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제 딸 엘림이도 자주 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 아빠 목사님이잖아 목사님 왜그래 이런 말을 들으때면 마음이 찔립니다.

 

우리의 풍습으로 보면 이 같은 말은 좀 교만한 말 같이도 들리고 좀 지나친 과신 같기도 한 느낌이 드는 그런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풍습으로는 나를 본 받으라는 식의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말을 하게 된 사도바울의 심정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사도바울이 자신을 본받으라고 했을까요?

어떤 의도에서 자신을 본받으라고 했을까요?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은

< 바울 자신이 얼마라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자신을 쳐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며 몸부림 치고 있는가? 그리고 그리스도를 본 받으려고 할 때 세상의 헛된것들에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죽고 있는가?

바울 자신이 얼마나 복음을 위해서 살기로 결단하고 그 복음을 살아내고 있는가 ? >

 

나를 변화시키지 못한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 복음으로 내가 변화된 것이 없다면 나는 다시 복음을 들어야한다. < 나를 향한 복음이 먼저이다. 나의 변화가 먼저이다. >

 

# 목회 그 위험한 부르심


자기를 향한 복음이 없다. 세상은 향한 복음은 외치지만 매일 같이 자신을 향한 복음을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복음이 외침에 불과 하고 복음이 아무 변화도 일으키지 못한다.

 

이것에서 바울의 < 나를 본받으라 >라고 말하는 이러한 자신감? 용기 ?가 나오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이 말씀을 옥중에서 밖에 있는 성도들에게 들려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옥중에 앉아 있는 바울은 지금 밖에 있는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걱정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는 사회적으로 굉장한 무질서가 있었고 신앙적으로는 이단들이 침투해 들어오고 있는 때 였습니다. 또한 세속적인 풍조가 교회까지 파고 들어 오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생활의 기본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옥중에 앉아 있는 바울은 밖에 있는 성도들이 걱정이 됩니다.

 

미셔널 처치 세미나 < 나침판의 정북 방향을 행하기 위해서 계속 떨림을 갖고 있다 > 교회가 본질적 교회에 대한 떨림. 복음에 대한 떨림, 선교적 교회에 대한 떨림이 있어야한다. 성도는 선교적 삶과 여정에 대한 떨림을 갖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바울은 두고 오는 성도들이 미덥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밖에 있는 성도들이 흔들림이 없이 신앙생활을 하게 하기 위하여 무엇인가 지침을 내려 줄 필요를 느낀 것입니다. 이같은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로서 어떤 권위 있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을 제시 해 줄 필요를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하게 된 말이 나를 본 받으라 는 말입니다. 뿐만아니라 17절에서 나와 함께 행하는 자들을 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나와 함께 행하는 자는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서서 < 보라 >는 의미는 < 주시하고 주목하고 보라 >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세상이 혼탁한데도 불구하고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혼신을 다해서 십자가의 삶을 살고 있으니 그들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8절에서 말하기를 내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노니 너희는 십자가의 원수가 되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너희만은 그렇게 살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삶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19절에서 세 가지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배로 하나님을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번영신학. 기복신앙. 자기중심

탐욕의 복음의 교회를 망치고 있습니다.

저희의 신은 배요”(19) 이 말의 뜻은 지금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 살아가고 있는 목적이 배를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즉 배를 위해서 온 신경을 다 쏟고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본질을 놓치는 것입니다. 선교가 어느 순간 교회의 부수적 사역이 되어버린..

 

사람들이 즐기며 살아가기 위해서 예수도 다음이고, 하나님도 다음이고, 오직 관심은 먹고 즐기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염려하고 있는 그 당시의 세상풍조 입니다.

어느 시대나 이 배가 문제 입니다. 배를 채우는 문제, 이 세상에서 가장 기본급의 문제가 이 배의 문제입니다. 지금도 하루에 순전히 배를 채우지 못해서 죽어가고 있는 인구가 1만명씩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굶어서 얻은 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인구가 10만명씩이나 된다고 합니다. 배고파 보지 않은 사람은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가를 모릅니다. 배가 고프게 되면 나머지 문제는 모두 다음 입니다.

 

로마제국에서 가장 큰 문제가 이 문제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매일 같이 먹는 일로 소일했습니다. 매일 같이 연회를 베풀고 먹고 마시는 일로 즐기고 살았습니다. 나중에는 이 일이 더 심해져서 싫토록 먹고 약을 먹고 토해 내고 또 싫 토록 먹고 마시고 약을 먹고는 토해 냅니다. 그래서 하수구에 흐르는 물이 파란색으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나라가 온전하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역사가는 로마의 멸망은 저 하수구의 파색깔에서 비롯되었다고 까지 말했습니다. 물론 사람은 먹고 배가 불러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삶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는 말입니다. 그것이 생활의 전부가 되면 그것이 곧 신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배의 신앙 입니다. 하나님 보다 배를 더 중시하고, 신앙 보다 먹는 문제에 더 우선하고, 예수 보다 세상을 더 좋아하면 그것은 모두 배를 신으로 삼고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배의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눈물로서 당부한 첫번째 당부 입니다.

 

두번째는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여지기 말라는 당부입니다.

위대한 교회가 위험한 교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세상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오래입니다.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다”(19)

어거스틴은 그의 참회록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젊었을 때는 죄를 짓는 일이 장쾌한 일로 인식되었었다. 그래서 큰 죄를 지을수록 남자 답게 인식되었었고 자랑스러웠다. 그래서 동료들은 그것을 부러워 하기 까지 했었다. 그런데 새 사람이 되고 보니 그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었는지 모른다고 술회 했습니다.

 

교회와 성도는 세상이 부러워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에 부끄러운 공동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을 가만히 살펴 보십시요. 오늘은 마땅히 부끄러워 해야 할 것들이 자랑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아무런 변화가 없는 성장은 자랑일까요? 부끄러움 일까요?

사도 바울은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여기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마땅히 부끄러워 해야 할 것들이 영광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여기지 말라는 말을 할 그 당시에 가장 큰 이단이 있었습니다. 것이 에피큐리안이즘이라고 하는 정신적 쾌락주의입니다. 영지주의입니다.

 

이 사람들은 영만 깨끗하면 되지 육신은 마구 둥굴려도 죄가 않된다고 우기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습게 살았습니다.

 

디오게네스 같은 사람은 통 속에서 쪼구리고 살았습니다. 사람이 마음만 평안하면 됐지 생활은 어떻게 해도 괜찮다고 하며 무질서 하게 살았습니다. 그들은 개 같이 사는 것을 영광으로 알고 개 같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이것을 부끄러운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질서도 없고, 정돈되지 않은 삶은 무질서한 삶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질서 있는 삶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것이 영광인 줄 알고 살았습니다. 그것이 또 진리인양 성도들이 자꾸만 유혹되어 따라 갑니다. 그래서 경고하게 된 것 입니다. “너희는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삼지 말라이것이 눈물로서 당부한 두번째 부탁입니다.

 

세번째 당부는 땅의 일만 생각하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저희는 땅의 일만 생각하는 자라”(19)

 

신앙생활은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 보는 생활입니다. 뜻을 하나님의 나라에 두고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내 육신은 비록 이 땅에서 살고 있지만 내 정신과 마음과 뜻은 하늘에 두고 살아가는 생활, 이것을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몸은 하나님 앞에 나와 있는데 정신과 마음이 모두 이 세상에 깊이 빠져 있기 때문에 문제 입니다.

우리의 정신이나 뜻, 그리고 관심이 이 땅 위에만 집중되어 있으면 영적인 생활은 소멸되고 맙니다. 뜻을 잃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관심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완전히 땅의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속물이 되는 것입니다.

 





@ 어떤 어린아이 하나가 길을 가다가 동전 하나를 줏었습니다. 이 아이는 그때부터 동전 줏는 재미로 땅만 쳐다 보고 살았습니다. 덕분에 땅에 떨어진 물건들을 많이 줏었다고 합니다. 일평생 줏어 모은 것이 단추 29,519, 머리핀 54,172, 동전 수천개를 줏었습니다. 그런 것을 줍느라고 그는 일생 동안 하늘의 푸르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저 아름다운 태양도 보지를 못했습니다.

 




더구나 세상의 자연과 꽃들의 아름다움 조차 보지를 못하고 오직 땅만을 쳐다 보고 살아 온 것입니다. 이것을 넝마주이 인생이라고 합니다. 넝마주이 인생에게는 꿈이 없습니다. 저 하늘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있다면 오직 땅에 널려 있는 쓰레기 뿐입니다. 그래서 땅에만 관심을 갖고 살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3:7-11]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3: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관심을 두고 사십니까.

여러분을 지금 움직이고 있는 제일의 관심이 무엇 입니까.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다 뜻을 두고 살아가십니까. 사도바울은 지금 옥중에 앉아서 밖에 있는 성도들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눈물로서 서너가지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1) 배로 신을 삼지 말라.

2) 부끄러운 것을 영광인줄로 착각하지 말라.

3) 땅의 일에만 너무 골몰하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멧시지 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깊은 깨달음과 하나님의 새로운 격려가 여러분에게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 2015 GSC 새벽 큐티 설교 <고전 6:1-13> ==



제목 : <고전6:1-13> 알지 못하느냐




 

바이블타임 본문 < 고전 5-8> 본문 중에서

 

[고전 6:1-11]

(고전 6:1)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고전 6: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고전 6: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고전 6:4)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고전 6: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고전 6:6)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고전 6:7)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고전 6:8)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

(고전 6: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고전 6:10)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고전 6: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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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함께 묵상하고 있는 고린도 교회는 많은 이슈들과 문제들을 앉고 있는 교회 였습니다. 바울을 고린도교회를 바라보면서 그리고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고린도 교회에 대한 소문을 들으면서 고린도교회가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떤 것을 바로 잡아야 하는지? 분명하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아주 영적이면서 아주 세속화된 교회 였습니다.

고린도교회는 경제적으로 부유하였지만 영적으로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아주 지적이면서 아주 율법적인 교회였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아주 신앙적이면서 아주 비도덕적인 교회였습니다.

고린도교회는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였지만

속으로 심각하게 병든 교회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고린도교회에 대해서 분명한 어조로 그리고 단호한 말로 교회의 문제들에 대해서 편지하고 있습니다




리가 함께 읽고 있는 고린도전서의 각 장마다 고린도교회가 갖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사도바울의 진단과 처방이 나오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의 각 장을 넘길때면 오늘은 어떤 문제를 고린도교회가 꾸지람과 책망을 듣게 되나는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고린도전서를 설교하는 것이 설교자에 부담이 되는 본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책망을 전해야한다는 부담이지요. 그리고 또한 이 책망이 곧 저와 오늘의 교회를 향한 책망이기에 더 뜨끔하고 마음 한컨이 아려옵니다.


다른 여러 서신서들에서 사도바울은 성도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면서 교회안에 있는 교리적인 논쟁들 그리고 거짓교사들에 대한 주의를 당부하는 조금은 조심스럽고 걱정스러운 어조로 서신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를 향한 편지해서 사도바울을 안타까움과 선한 분노가 담겨 있음을 보게 되지요.

 

이것 역시 세속에 물들지 않고 복음과 믿음을 지키기를 바라는 목회자의 애정. 목자의 심정 그리고 그리스도의 마음에서 나오는 동기에서 출발한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의 진리에 견고하게 서서 어떠한 헛된 것들.. 어떠한 불의한 것들이...어떤한 죄악된 것들이 주님의 교회에 침투하지 못하도록 강하게 경계하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불의한 것에 병들고 오염되는 것에 대한 심한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는 것 지요...

 

그래서 고린도 전서의 각장에는 사도바울의 < 성도들과 교회에 대한 책망과 죄의 대한 지적, 잘못되어가는 일에 대한 교정, 자신과 복음에 대한 오해에 대한 해명 >이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강하고 센 어조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6장에 사도바울의 안타까움을 한마디로 표현하고 있는 문구가 있다면 그것은 < 알지 못하느냐 > 라는 말입니다. 말은 고린도전서에 6번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3/9/15/16/19/ 에 등장합니다.


(고전 6: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고전 6: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이미 알고 있고 이미 배운 바대로 살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책망하고 있는 것죠.

 

<알지못하느냐?>라는 말속에 바울의 답답하고 안타까움 심경이 담겨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주 자신의 마음을 < 알지못하느냐 ? > 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고린도전서의 전체의 분위기와 바울을 심정을 알수 있는 물음과 외침이 바로 <알지못하느냐>라는 말 한마디속에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고전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 5:6)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 9:13)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오늘 고린도전서 6장에 사도 바울이 다루고 있는 교회의 이슈는 무엇입니까 ?

바로 <송사>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송사는 세상법정에 교회안에서 일어나는 문제들. 교인들끼리 일어난 사소한 문제들을 세상법정에 가져가서 판단 받는 일에 대한 사도바울의 책망과 권면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고린도 교회안에서 일어난 교인들끼리 일어난 사소한 문제들을 교회안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그것을 세상법정까지 가져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사도바울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일어나고 있는 이 이슈가 오늘 현대교회.. 오늘날 지금 여기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 교회들에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문제라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최근에 교계뉴스나 기독신문을 펼치면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기사역시 <교회안에 분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랑의교회 차압/두레교회 김진홍목사/삼일교회>


들 교회들의 세상법정 소송이야기는 교인의 가십거리가 될 뿐아니라 세상속에서 교회의 부끄러움이 되고 있는 것이 참으로 통탄하고 안타까운 이야기입니다.

 

한마디로 세상에 이런일이...”라고 말할만한 일이 고린도교회안에서도 있었고 지금 오늘 이민교회... 한국교회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이것이 현실이며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의 고린도교회 당신의 문화적인 배경을 생각해보면... 아마도 고린도 교회안에서 일어난 소송의 문제는 아마도 교인들끼리 <금전거래에서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많은 학자들의 이 소송의 원인이 < 형사상의 문제라기보다는 민사상의 문제에서 >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교인들끼리 버러진 억울한 금전적 손해에 대해서 세상법정으로 가져 간 것입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소송을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교회안에 지휘가 높고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영향력이있는 이들이 그러한 소송의 주도적인 역할 했을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그 당시 로마법제도에 의하면 법정은 빈민들이나 심지어는 평민들도 쉽게 갈만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사회적으로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사실상 세상법정에서 판결을 받는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로마 통치하에 고린도에서 보통 법정은 < 아고라 >라고 불리는 시장의 중심부에 있었습니다. 그기에 판사가 앉아서 재판을 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제국의 사회 규범에 따르면 오직 부자와 권력자들만이 상대방을 법정에 세울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추측해본다면.. 고린도교회에 일어난 소송의 문제는 교회안에서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고 경제적으로 부요한 사람이 교회안에 약하고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 어떤 금전적인 것을 빌려주었는데 그것을 받지 못하니까


지위가 높은 교인이 자신에게 손해를 끼친 지위가 낮은 교인을 <시장 한가운데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세워서 재판을 받게 한 것>이라는 추측을 할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일에 대해서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일은 불의한 일이며 이것은 세상에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누가 누구를 판단할수 있느냐 ? 라고 말합니다.

사랑과 용서의 복음을 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리고 누가 누구를 판단할수 있느냐

그리고 교회안에서 이 문제를 판단하고 해결할 수 없느냐

라고 하는 요청을 합니다.


교회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세상법정에.. 세상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판단 받게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 사도바울이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아마다 이런 심정으로 고린도전서 6장을 기록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교회안에 사랑과 용납이 어디 있으며... 도대체 교회안에서 용서와 화해가 어디있느냐.. 정말 부끄러워서 눈을 들 수가 없도다.. 도대체 세상이 이런일이 어디 있으며.. 세상에 이러한 어처구니 없는 일이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다니.. 기가차서 말이 안나온다... 정말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수가 없다.


(고전 6:4)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고전 6: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그리고 사도바울의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너희 장차 주님의 오셔서 재림하는 날에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너희가 세상을 판단하고 천사를 판단할 것이지...

너희 형제를 판단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안에서 한 형제가 서로를 판단하여 세상의 법정까지 가는 그일을 어리석고 불의한 일이며 세상앞에 부끄러운 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스스로 허물을 만드는 일이며 이미 분명한 허물이 되고 있다고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 6: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고전 6:6)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고전 6:7)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고전 6:8)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이러한 문제 생길 때 가져야할 자세를 말해줍니다.

<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안에서 성도간에 < 판단과 비난 >의 이슈는 항상 도사리고 있습니. 

이것은 어쩔수 없는 연약함이 우리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우리는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이 바르고 옳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느낌과 감정 그리고 판단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항상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자신의 시각으로 그 사람을 바라봅니다.


이러한 마음과 생각은 우리의 거짓되고 부패한 죄성/습성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이것은 범죄한 아담의 본성이며 범죄한 가인의 생각입니다. 아담은 하와를 판단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판단했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판단하고 하나님을 판단했습니다.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는 연약함입니다.


종종 연약한 사람들중에는 자신이 재판관되고 자신이 수사반장이 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잘 잘못을 따지고 반드시 바로잡고 반드시 이기고 말겠다는 세상적인 마음에 휩싸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와 용납.. 용서와 화해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이 없이 여전히 세상적인 거짓된 동기와 불순한 동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도 사도바울도 우리에게는 분명히 권하고 있습니다. 판단하지 말라.. 그리고 오히려 손해보기를 자처하라.. 말씀하십니다.


고린도교회에 일어난 이 소송의 문제는 교회의 하나됨을 깨뜨립니.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분열시킵니다. 바울이 그것을 알기에 다시금 이 문제를 언급하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고전 6: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우리는 주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안에서 새롭게하심을 날마다 경험하는 사람입니다. 내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성령의 씻으심과 거룩케하심과 의롭하심의 우리가 가장 큰 위로입니다. 이것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용납하고 사랑하고 포용하는 에너지가 됩니다. 사람의 판단보다 하나님의 판단이 더 중요합니다.

 


@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은 심판을 생각하고 있다.

원래 로댕은 지옥의 문이라는 작품에 생각하는 사람을 많은 사람들의 모습속에 한 모습으로 만들어 넣었습니다. 생각하는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할까요?


전날밤에 옷을 어디에 두었는지 고민하고 있을리는 없습니다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분리된 영원한 심판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받은 용납만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어떤 사랑과 용납을 다른 사람에게 하는지 알수 있습니다.

 

그 사랑이 식어지고 그 용납받음을 기억하지 못하니까? 교회안에 다툼이 있고 판단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죠..

 

부족한 사람이 있다면 세워서 온전케하고 때로는 기다려주고 배려하고

지적보다는 따뜻한 위로와 격려가 사람을 더 세워갑니다. 이것인 사랑과 용납받은 사람이 해야하는 노력입니다




 

== GSC 새벽 큐티 설교 <사도행전 20:25-38> ==


제목 :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312장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If Thou but stuffer God to guide Thee]



Georg Neumark 작사(1621-1681)


이 찬송가를 작사 작곡한 <게오르크 노이마르크>는 중부 독일 랑엔살차(Langensalza)에서 태어났습니다. 노이마르크는 많은 역경과 고통을 믿음으로 인내하여 승리한 사람으로, 그 대부분의 찬송시를 고난의 시기에 썼습니다.


이 찬송가는 그가 스무살이 되던 1641년에 지은 것입니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노이마르크는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쾨닉스베르크로 떠났습니다. 일련의 상인들의 틈에 끼던 중, 강도를 만나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기도서 한권과 옷 속에 넣고 꿰매버린 동전 몇 개뿐>이었습니다. 대학에 진학하려던 그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고, 직장을 구하려고 애썼으나 30년 전쟁의 당시로서는 허사였습니다. 그는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걸식으로 연명하였습니다. 추운 12월이 되서 그는 키일(Kiel)이라는 도시에 도착했습니다.


그 곳에서 목사로 일하고 있던 옛 친구를 만나게 되었고 그 친구의 주선으로 스테판 헤닝 판사의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방황과 걸식>이 끝난 기쁨은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그의 길을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 그는 당장 붓을 들어 이 곡을 작사 작곡하였다고 합니다.


노이마르크는 1643년 쾨닉스베르크로 가서 그가 원했던 법학을 공부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총 34편의 찬송시를 지었는데 그 중에서 이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Wer nur den lieben Gott laesst walten 독일찬송가 298)이 가장 유명합니다. 바하는 이 곡조로 그의 칸타타 93번을 작곡하였고 멘델스존도 칸타타 8사도 바울에 이 곡을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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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8]

(20:25)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20:26)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20:27)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20: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20:29)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20:30)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20: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20:32)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20:3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20:34)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20:35)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20:36)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20:37)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20:38)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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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한국의 기독교 신앙에서 있어서 가장 독보적인 신앙의 전통은 < 순교적인 신앙 >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일제의 지배와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민족의 격동기와 함께 한국의 기독교 신앙은 발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입니다. 이러한 때마도 신사참배와 같은 강력한 신앙의 도전앞에 맞서서 믿음을 지키고 진리를 파수하는 믿음의 거장들을 보게 됩니다. 흔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주기철 목사님과 같은 분이죠.


1940년 주기철 목사님이 옥에 투옥되기 전에 그해 여름에 남긴 마지막 설교의 내용은 아직도 우리에게 많은 도전을 줍니다.





설교의 마지막에 이런 내용으로 설교를 하십니다.

주님을 위하여오는 고난을 내가 피하였다가 다음에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옥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누리고

고난 의 잔 은 어찌하고 왔느냐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 하랴!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 를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다음 주님이 너는 내가준 유일한 유산 인 고난의 십자가 를 어찌 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 하랴 ! ”


주님이 우리에게 사명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사명으로 죽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모두다 주님 앞에서 설 때 우리에게 물으실겁니다.

고난의 잔을 어찌하고 왔느냐 ?” “ 너는 나를 위해 어떤 고난을 감수했느냐 ? ”

우리의 믿음의 신앙중에 우리에게 강한 도전이 되는 몇가지 신앙 있습니다.


여주동행 : 주님과 날마다 동행하는 삶 ” 

지사충성 : 죽기까지 충성하는 삶

일사각오 : 한번 죽을 각오를 하면 사는 삶

 

주기철 목사님은 옥고를 치르고 돌아가시기 까지 시간이 날때마다 설교시간마다 

< 일사 각오 >의 삶을 강조하셨습니다.


신사참배문제로 투옥직전에 그의 설교 주제는 <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가자 >였습니다. < 예수 따라 일사각오, 남을 위해 일사각오, 부활의 진리위해 일사각오 >였습니다.


생사여탈의 대권을 잡은 임금앞에서 그 죄를 책망하는 세례요한도 일사각오였고 나단이나 낙스, 루터 역시 일사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일사각오 연후에 예언하는 것이요. 그런 일사각오로 예언자의 권위가 서는 것입니다. 여러분 몰라서 말 못하십니까? 왜 벙어리 개가 되었습니까? 오늘의 목사도 일사각오를 갖은 연후에 할말을 하고 목사의 권위, 예언자의 권위가 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개 순사앞에서 쩔쩔 매고서야... 부활의 복음이 우리들에게 이르기까지 피로써 전하여 왔습니다. 로마제국의 잔혹한 박해 아래 50만 성도가 피를 흘렸습니다. 로마 교황의 핍박아래 100만 성도가 피를 뿌렸습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은 피로써 쓰여졌고 피로써 전하여 졌습니다. 피로써 전하여진 부활의 복음을 우리가 또한 피로써 지키고 전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자고 다짐하였던 도마의 일사각오 다짐은 오늘 우리에게도 요정되어집니다. ”

 

이러한 일사각오의 원조는 오늘 본문 사도행전 20장에 사도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의 장로와 감독들.. 교회 리더십들에게 해준 마지막 고별설교. 마지막 당부와 권면에서 더 분명하게 볼수 있습니다. 아마도 주기철목사님과 같은 믿음의 선배들은 바로 사도바울을 이 아름다운 일사각오의 본을 따라서 살았던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고 있는 본문의 분위기는 아주 비범하면서 아주 슬픈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이제 여러분의 얼굴을 다시못할 것 같습니다. 라고 하는 바울의 말속에는 사도바울의 비장함과 아쉬움이 담겨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주기철 목사님의 고백처럼 자신이 지금 죽으러가는 자리로 고난의 잔을 마시러 자신이 자기 발로 나아가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 걸음의 그의 인간적인 결심이나 결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성령의 매인바되고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 하는 삶에서 나온 것입니다. 어떤 인간적인 생각이나 어떤 인간적인 주저함도 없이 그를 강력하게 붙들고 이끌고 계시는 성령님의 강권하심과 이끄심이 그로 하여금 주를 위해 죽기를 각오하는 삶으로 그를 이끌고 있습니다. 


이제 내가 무엇을 두려워 하리고. 이제 내가 무엇을 무서워하리오.. 오직 예수. 오직 복음. 오직 사명을 따라 그 걸음을 성령의 매인바 되어서 그 길을 가고자 합니다. ”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죽음과 고난을 감지하고 그 자리로 스스로 걸어 들어갈 각오 바로 일사각오의 모습으로 오늘 이 권면과 당부를 하고 있습니다.

(20:27)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사도바울은 하나님과 사람에 복음의 증언자로써 복음의 전달자로써 < 꺼리길 것이 없는 사람 >이었습니다. 그는 최선을 다해서 당당하게 주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은 소명을 따라 행동합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은 생명을 그 사명을 위해 사용합니다.


[21:12-13]

(21: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21:13)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운 사람은 바로 < 죽기를 각오한 사람 >입니다.

죽기 살기로 잠깐 사는 사람이 있고.

죽기 살길로 영원히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부류의 사람입니까?


사도 바울의 신앙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으니 그의 말과 행동이 < 거리낌이 없습니다. >. 일사각오의 신앙의 가장 큰 도전은 < 거리낌없이 사는 삶 >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눈치보지 않고 세상에 비굴하게 무릎꿇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사거나 맞추지 않으려 하는 오직 복음의 합당한 것이 전부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저는 사도바울을 마지막 당부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에게 묻습니다. < 너는 얼마나 거리낌없이 전하고 얼마나 거리낌없이 살고 얼마나 거리낌없이 생활하고 있는가? > ... 여전히 부족한 삶을 돌아봅니다.


사도바울이 자신이 에베소 교회를 3년동안 목회를 할 때 어떤 마음으로 교우들을 섬겼는지가 나옵니다.

(20: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역과 목회를 어떤 마음을 그 일을 감당했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20:19-21]

(20: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20:20)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20: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사명의 동기는 겸손과 눈물이었습니다. 사명의 과정은 시험과 고난이었습니다.

사명의 결과는 거리낌없이 전한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증언이었습니다.

어제는 바울이 자신의 삶을 겸손과 눈물 로 참았다고 말하고 있고

오늘은 바울이 자신의 사역을 눈물과 훈계 로 섬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역할수 있는 원동력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20:32)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 주와 그 은혜의 말씀 >이 그로 하여금 <겸손과 눈물>로 참게 만들었고, <눈물과 훈계>로 섬기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교회의 리더십들에게 너희가 삼가라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고 사랑하는 교우들이 주와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능히 든든히 서있길 원한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주와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사도바울은 <눈물>이 있는 사역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부탁하면서 두 번이 < 눈물 >이 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교회 리더십인 < 감독과 장로들 >에게 부탁하고 당부합니다.


< 교회를 다시리고 치리할려고마 하지 말고 그들을 마치 양떼를 돌보듯이 보살시고 돌보아야 한다. 특별히 주와 은혜의 말씀으로 그들을 세우고 일으키고 어떤 악한 거짓교훈이 들어오지 않도록 그들이 깨어서 지켜야합니다. >라고 합니다.

 

바울은 감독들에게 자기 대신 교회와 교우들을 잘 부탁하는 당부를 하고 있습니다


감독이라고 해서 성도들을 감시하고 감독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감독자들은 < 돌보자는 자>들입니다. 권세를 부리거나 다스리는 자가 아닙니다


돌보는 자들입니다. 성도들의 연약함을 돌보고 성도들의 약함을 든든히 주와 은혜의 말씀으로 세어야가야 합니다.


바울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이라면 < 교회의 리더십은 돌보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마르지 않는 눈물을 가진 사람이어야합니다. >는 것입니다


군림하거나 다스리는 자가 아니라. 연약함을 돌아보고 입에나 나오는 말이 은혜의 말씀이어야 하고 행하는 행동이 복음과 진리의 말씀에 합당해야합니다. 그들의 눈에는 마르지 않는 눈물이 있어야합니다.


(20:35)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우리는 < 나에게 어떤 본이 될만한 것이 있는가 > 물어야 합니다.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주는 일이 복이라는 것을 고백을 하는 넉넉한 믿음의 소유가자 바로 교회 리더십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사도바울이 아주 인상적인 내용을 삽입합니다.

(20:3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20:34)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이것은 일종의 사도바울을 받았던 오해들이 있음을 알수 있는 대목입니다.


어떨 때는 오해만 하지 않아도 80% 이해한 것입니다.

오해만 하지 않아도 이해해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도바울의 마지막 당부가 있은후에.. 눈물의 송별이 진행됩니다.


(20:37)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20:38)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사도행전 20장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에게 계속 되내이고 있습니다. “ 너는 지금 어떤 각오로 살고 있니 ? 너는 거리낌없는 사역과 삶을 살고 있니? 라고 묻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이 비범하고 독보적인 고백은 복음의 일꾼으로 자처하는 우리에게 강한 도전이 됩니다. 우리의 삶의 지표와 방향을 지시해주는 것 같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처음 불렀던 찬송가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찬양의 마지막 가사처럼

(3) 주 찬양하고 기도하며 네 본분 힘써 다하라

주 약속하신 모든 은혜 네게서 이뤄지리라

참되고 의지하는 자 주께서 기억하시리 아멘





== 2015 GSC 새벽 큐티 설교 <요한복음 14:1-14> ==


제목 :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14:1-14]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14: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14: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14: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14: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14: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4: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4: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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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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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은 16장까지 예수님의 마지막 강화/설교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14장에 시작되고 있는 예수님을 마지막 말씀은 < 13장에 가룟유다의 배신과 베드로의 부인의 예고 >이후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당부이면서 권면의 말씀입니다.

 

[13:30-31]

(13: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13: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떠나자 예수님은 마지막 자신이 하고 싶었던 남겨 두었던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바로 그 첫 번째 말씀이 < 새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


[13:34-35]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이 새계명에 대한 이야기는 14장에도 동일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14: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놀랍습니다. 가롯유다의 떠남과 베드로의 배신사이에 주어진

< 서로 사랑하라는 새계명 >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또하나 우리가 주목해야할 할 것은 베드로와 도마의 질문 그리고 빌립의 질문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 주여 어디로 가시니이까 ? >


도마도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길을 어떻게 알겠삽나이까 >


빌립도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기로 마음을 먹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말 아이러니이죠?

 

예수님을 어디로 가는지? 예수님이 무엇하러 가는지 ? 알지 못한채 그냥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시는 길도 모를 뿐아니라 예수님이 그들이 가야할 길임을 모르고 있습니다.


@ 기독 대조적인 영화 / 쿼바디스(오늘날 교회의 문제인식) & 제자 옥한흠

주여 어디로 가시나까? 주여 따르겠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오늘 본문 요한복음 14장에서는 그들을 향한 위로와 권면 그리고 명령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41절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이 짦은 한 구절이 마지막 예수님의 강화가 어떤 내용으로 흘러고 가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시그널과 같은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있지만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못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먼저 위로를 전합니다. <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

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안에 있었던 < 근심을 이미 다 알고 있었더는 이야기 >입니다. 제자들의 근심은 무엇입니까?

그렇게 계산에 능하고 사리에 밝았던 가룟유다도 예수님을 떠나고 그렇게 열심히 특심이었던 베드로도 닭이 울기 전에 예수님을 3번 부인한다고 하고 ...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그들이 왜 ?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지? ? 예수님을 믿어야하는지? 의심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에 정말 예수님을 계속 따르며 살아야 하는지? 근심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자주 자주 본질적인 질문앞에서 다시금 서야할 때가 있습니다.

나는 왜? 예수님을 믿고 있는지? 나는 왜 ?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지?

나는 정말 계속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고 살수 있는지?

물어 보아야합니다.

 

저는 새가족이 우리교회오시면 첫 번째 교회 공동체에 대해서 이야기할면 꼭 강의 중에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어려운 마음과 결정으로 우리 교회에 잘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소중히 여기는 만큼 저희도 여러분을 소중히 여기기를 원합니다. 이제부터 새롭게 시작되는 교회 생활에서 여러분은 왜? 예수 믿은지 ? 왜 교회에 오는지?를 다시금 생각해 보시는 계기가 되시길 바랍니다 > 라고 꼭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 본질적인 교회는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면 저는 < 교회의 본질에 대해서 고민하고 질문하는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 바로 < 본질적인 질문과 답을 할수 있는 교회가 본질적인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 답을 세상의 원리나 가치에서 찾지 않고 성경과 복음,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는 교회가 본질적인 교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주님을 따른 것에 자신과 확신이 없었던 제자들에게 말씀합니다. <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말라 > 이것은 주님이 제자들에게 주시는 위로인 동시에 오늘을 살고 있는 교회들과 우리들을 향한 위로입니다. <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

 

그들이 앞날을 불안해하고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그리고 있잖아 내 아버지 집에 거할곳이 많다 그래서 내가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 >라고 조금더 구체적인 위안과 위로를 예수님은 우리에게 전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은 제자들의 근심? 우리에게는 없나요?

주님을 믿고 따르면서 우리는 주님을 믿지못하고 근심합니다.

주님과 함께하면서도 우리는 주님이 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우리의 대부분의 근심은 세상적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어떻게 머물고 살것인가? 세상에서 나는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예수님을 따르면 정말 내가 덕을 볼수 있는가? 혹시 예수님을 따르다 내가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닌가 ? 정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옳은 선택이며 판단인가?

 

이러한 근심과 고민속에 있는 그 당시 제자들과 오늘의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우리의 위로와 위안은 세상적인 것이 아닌 것을 말씀합니다. 우리가 오늘을 살면서 기억해 내야하는 위로는 < 내 아버지 집에.. 나를 위해 예비된 처소 >를 생각하면 사는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14: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도마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14: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빌립이 예수님께 요구합니다.

(14: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도마와 빌립의 질문속에는 그들의 안에 있는 불안함과 근심이 고스란히 묻어 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권면과 명령을 전합니다. <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 제자들에게 믿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믿음은 그들이 갖고 있는 근심을 물리치고 그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분명하고 선명하게 해줍니다.

 

예수님은 단지 그들의 선생된 자신만 믿어! 나만 따라와! 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 성부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


이 말씀은 < 성부 하나님을 믿어라 그리고 나도 믿어라 >

여기서 < 믿는 것은 인격적이며 관계적인 신뢰 >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에 대한 완벽한 신뢰입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지난 3년동안 예수님을 따르면서 예수님을 향한 나름의 기대를 갖고 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떠날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분이 하실 사역이 무엇인지?를 받아들고 믿어야하는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바로 이 메시지는 그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의 말씀과 연결됩니다.


[14:10-11]

(14: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4: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4:13-14]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바로 이 대목은 예수님의 사역이 혼자만의 사역이 아니라 삼위하나님의 사역임을 말해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곧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어떻게 연결되어있는지를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도마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어떤 장소가 어디인지?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은 장소가 압니다. 인격체이신 성부 하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바로 성부 하나님께 이른 길은 구원에 이르는 길인데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라고 말씀하신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았다면 성부 하나님도 알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빌립이 요구한 < 주여 아버지를 보여 주옵소서 그리면 족하겠나이다 >라고 하는 말의 대답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소 설이 하나 있습니다.

 

솅키에 비치(H.Sienkiewicz)가 쓴 쿠오바디스라고 하는 소 설입니다. 


로마의 네로 황제 의 박해가 절정에 달하자 당 시 로마 시에 머물고 있던 교회 지도자 베드로는 신변 의 위협을 절실하게 느끼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때 그 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성도 들이 와서 눈물을 흘리며 간 청을 했습니다.

 

"사도님, 우 리는 죽어도 괜찮습니다. 그 러나 사도님께서 만일 우리 를 떠나시기라도 한다면 로 마 교회는 완전히 흩어지고 맙니다. 그러니 부디 몸을 피하십시오."

성도들이 하도 눈물겹게 간청을 하자 베드 로는 환난이 지나기까지 당 분간 몸을 피하기로 하고 밤 중에 로마 시를 빠져 나왔습 니다.

 

새벽이 가까워오는 무렵 에 그는 그 유명한 아피안 가드로 무거운 발걸음을 한 걸음 한 걸음 옮기고 있었습 니다. 이윽고 날이 밝기 시 작했습니다. 동쪽에서 황금 빛 찬란한 빛을 뿜으며 떠오 르는 태양이 그의 눈에 들어 왔습니다. 그는 그 태양을 보는 순간 현란한 태양 빛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 습을 환상으로 보고는 깜짝 놀라서 다급히 무릎을 꿇었 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물 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 시나이까?" 그 당시 사용하 던 라틴어로 말하면 '쿠오 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입니다. 또 신약성경 이 기록된 헬라어로 바꾼다 면 '퀴리에 푸 휘파게이 스'(kyrie pou hypageis)라는 말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 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 다.

 

 

"네가 나의 백성을 버리 고 나오다니 내가 가서 그들 을 위해 한번 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려고 한다." 이 말에 충격을 받은 베드로는 한참동안 고개를 떨군 채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를 못했습 니다. 오랜 시간을 침묵 속 에 돌부처처럼 앉아 있던 베 드로는 드디어 결심이 선 듯 몸을 일으켜 자기가 오던 길 로 다시 발걸음을 돌렸습니 다. '예수님이 그곳으로 가신 다는데 나도 따라가야지.'

 

로마로 돌아간 그는 결국 십자가형을 받게 되었습니 다. 그런데 그는 자기와 같 은 죄인이 어떻게 스승 되신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똑바로 못 박힐 수 있겠느냐 라며 자기를 거꾸로 매달아 줄 것 을 요청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의 요청대로 십자 가에 거꾸로 달림으로 영광 스런 순교의 재물이 되었다 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성경에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 면 전설일 수 있습니다. 또 문학가가 이것을 미적으로, 문학적으로 묘사를 했기 때 문에 상당히 부풀어진 부분 도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 다. 그러나 베드로가 로마에 서 주님을 따라가려다가 십 자가에서 순교했다는 것은 모든 기독교 역사학자들이 인정하는 정설입니다.

 

 

 

 

 

== GSC 새벽 큐티 설교 <누가복음 18:1-14> ===


제목: 기도가 자연스럽나요?





[18:1-14]

(18: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18:2)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18: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18: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18: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18:6)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18: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18: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8: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8: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8: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제목 : 기도가 자연스럽나요?


기도의 태도의 3박자 < 간절함 + 끈질김 + 겸손 >입니다.


기도는 당신의 스페어 타이어 입니까? 아니면 당신의 핸들입니까?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여사의 말입니다.



여러분은 왜? 기도하십니까? ? 기도가 즐거우십니까?

여러분은 기도가 자연스럽습니까? 아니면 어색하십니까?


 

오늘 누가복음 18장에는 우리에게 일종의 기도의 샘플링을 보여주는 비유 2가지가 나옵니다. 하나는 조금 부정적이지만 긍정적으로 보시는 기도이고 하나는 일반적이지 않지만 특별하게 보시고 평가하시는 기도입니다.



바로 < 불의한 재판장에게 구하는 한 과부의 기도 > < 세리의 기도 >입니다.

이 두비유를 말씀하시는 이유를 1절에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18: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이 두 비유는 주님이 < 항상 기도해야한다 > 그러나 < 낙심하지 말아야한다 > 라고 하는 기도의 가장 중요한 2가지 태도를 설명해주시기 위해서 언급하신 비유입니다. 다소 예상치 못한 예수님 식의 특별한 비유라고 할수 있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기도하고 계신가요?

항상 기도하기를 쉬지 않고 계신지요

그리고 낙심하지 않고 기도하고 계신가요?


오늘 본문은 하물며 불의한 재판관에게도 이렇게 간절하게 계속 구하는 과부가 있는데.. 심지어 세상사람들이 손가락질 하는 세리들도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하는데.. 그러면 너희는 어떠하냐? 라고 묻고 있습니다.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교회에 다닌지 얼마 안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한동안 왜 기도를 할까? 하는 의문에 쌓여 있다가, 담임목사님 를 찾아갔습니다.

왜 기도합니까?』라고 그는 물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는 형제님, 왜 뻐꾸기가 노래하고, 왜 독수리가 창공을 향해 비상할까요? 』라고 반문했습니다.

그거야 본능이지요, 자연 발생적이지요초신자가 대답하자 목사는 말했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뻐꾸기는 노래하도록 지음을 받았고, 독수리는 창공을 날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도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기도가 자연스러워야하는 우리의 태도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기도가 부자연스럽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가 여러분의 삶에 본능처럼 자연스러운 일이 되고 계신가요? 여전히 기도는 작심해야 하는 일.. 여전히 결심과 결단이 필요한 부담스러운 일 정도가 생각되지는 않으신지요.

아마 이른 아침에 차를 타고 새벽에 나오는 여러분은 기도가 즐겁고..

기도가 중요하고 ... 기도가 필요하다고 느끼신 분들이라고 믿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에는 2가지에 대한 기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첫째는 불의한 재판관에게 끈질기게 간청하는 한 과부의 이야기

둘째는 바리새인들과 세리의 기도에 대한 이야기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7장에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말씀하시면.. 누가복음 18장에 들어서면서 < 기도 > 에 대한 이야기로 전환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의도는 그리스도인들은 한 과부와 마찬가지로 무관심과 무서운 반대에 부딪힐 때 에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불의한 재판관이 결국 고통스러울 정도로 신원을 요구하는 과부의 원한을 해결해 주었다면 주님은 자기 백성들의 기도에 더욱 확실히 웅답하시지 않겠는가?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도할 때는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를 보여주려는 바리새인들과 같은 외식된 기도가 아닌 자신을 낮추고 겸손히 엎드리는 세리의 기도를 원하십니다.

 

이 짧은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강조하는 앞 단락의 결론 역할을 하고 있다. 기도를 포기하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올바른 반웅이 아니다. 오히려 성도 들은 예수님의 재림과 하나님 나라의 임함을 볼수록 더욱 겸손히 세리와 같이 자신을 낮추고 겸손히 기도하는 자세가 필요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몇가지 도전은

1/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경험케 하는 중요한 도구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이렇게 자주 물어야합니다. “ 기도가 무엇인가? 기도가 우리에게 왜 필요 한가 ? ”라고 물어야합니다. 기도는 아는 것만으로 되는 일은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의 생활이 되어야하고 우리에게 몸에 베인 습관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기도에 대해서 알고 기도에 관해서 아는 것보다 기도 그 자체를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721절에서

(17: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하느냐?고 하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으므로 너희가 한 과부처럼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고 세리처럼 겸손히 기도하면 그 나라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내안에 경험케 하는 중요한 우리 삶의 방식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연결되어지는 브리지입니다.

바로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안에 거하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케하는... 하나님안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중요한 삶의 도구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경험케하기 위해서는 너희가 깨어서 항상 기도하고... 심지어 불의한 청지기와 같은 세상의 도전과 방해를 만나도 포기함이 없는 기도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도가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간구할 때 주님은 성도에게 속히 오셔서 성도의 원한과 어울함을 갚아 주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도할때의 하나님의 태도가 나옵니다.

(18: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 하물며.... 오래 참으시겠느냐 ... 속히 .... 풀어주시리라.. >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기도하는 삶은 하나님 나라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경험하는 유일한 도구는 바로 우리가 기도하고 있고 그 깊은 기도를 맛보는 삶입니다.

 

기도는 나의 자격이 아니라 하니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행위이며 그분의 호의를 믿고 뻔뻔하게 구하는 행동입니다.

 

2/ 기도에는 3가지 동작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견고한 믿음입니다.

둘째는 쉬지 않는 끈질김입니다.

셋째는 더 많은 겸손함입니다.

 

첫째는 견고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두려함 없이 나아가는 마음입니다.

오늘 말씀에 불의한 재판관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도 없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불의한 재판관이 많은 시대가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도 없고 하나님을 예배함도 없고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어쩌면 시간낭비처럼 보이고 어쩌면 어리석은 일처럼 보일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기도하는 우리를 보는 시각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요구합니다. 기도하는 삶의 이면에는 믿음의 분명히 있습니다. 믿음 없이 기도할수 없고 기도할 때 더큰 믿음이 생깁니다.

기도의 뒷면에는 믿음이라는 이름이 쓰여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우리의 믿음을 보여는 유일한 삶의 방식은 <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고.. 우리가 기도하는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

 

우리의 믿음은 간절함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간절하지 않다면 우리는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 세상에서 너희의 믿음을 보겠느냐 >

 

둘째는 끈질김입니다. 기도는 항상 무시로 성령안에서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흘러 나오는 것이어야하고.. 우리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을 연결시키는 영적인 플러그입니다.

강청하는 과부의 탁월한 영성은 바로 < 포기하지 않는 끈질김 >입니다. 이 여인에게 이 끈질김은 믿음의 행위였고 소망을 붙잡는 일이었습니다.

 

기도란 하나님의 뜻을 내 인생을 향한 약속의 말씀으로 붙들고 그 약속이 내인생 가운데 이루어지길 간절히 간구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기도 응답이 속히 오지 않는다고.... 멈추거나 주저하거나 기도가 드문드문해지면 않되는 것이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가장 먼저해야할 행동은 내가 뭘 원하는지 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원함을 계속 표현하는 것이다. ” ( 밴스타인)

기도는 하나님의 긍휼에 호소하는 일입니다. 내힘으로 되지 않고 나는 자격이 없고 나는 할 수 없고 그러나 당신만이 할수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기도하고 싶은 마음마저 없다면, 우리는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칼빈)

기도란 그리스도의 능력을 붙잡는 손이다. 기도는 어둠 속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거울이다.

 

셋째로 더 많은 겸손입니다. 기도는 겸손으로 길들어져야 쉽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겸손을 통해서 쉽게 그 길을 열어 놓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외식되고 가식된 기도습관을 지적하십니다. 사람들에게 부여주기 위한 종교적인 의식이나 행위로써 기도를 요청하고 있지 않습니다.

기도는 중심의 진실함으로 겸손히 주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8: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스펄젼 목사님은 마른 눈 가지고는 천국에 못 들어간다. 기도하지 않고 성공했으면, 성공한 그것 때문에 망한다.(스펼젼)


옷을 만드는 것은 재단사의 일이고, 구두를 수선하는 것은 구두장이의 일이고, 기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일이다. 기도의 실패자는 생활의 실패자이다.

(이 엠 바르너)


기도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그 어느 것도 없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 묵상하는 질문 >------------------

1/ 나는 얼마나 기도할 때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는가?

2/ 나는 얼마나 기도이면에 있는 믿음을 살피고 있는가?

3/ 나는 얼마나 끈질기게 그리고 더 겸손하게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는가?

== 2015 GSC 새벽 큐티 설교 <요한복음 5:39-47> ==



제목 : 어찌 나를 믿을수 있느냐 ?






[5:39-47]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5: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5:41)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5: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5: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5: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5:45)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

(5:46)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5:47)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제목 : 어찌 나를 믿을수 있느냐 ?


오늘 말씀은 제법 긴 요한복음 5장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요한복음 5장은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된 병자를 치유하시는 사건에서 시작됩니다. 이 치유는 하나의 기적인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그당시에서 없었던 일종의 사회적인 파장을 일으키는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치유의 사건이 바로 유대인들의 안식일에 일어난 사건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치유되고 회복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안식일을 범하는 일이 었고 또한 율법을 어기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신후에 그 사람에게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당시에 유대인들의 율법의 구체적인 세칙이 있었는데. 그 세칙에는 < 안식일에는 사람이 1km이상의 길을 걸어서는 안되며 환자가 누워 있는 침상을 운반 할 수는 있지만 환자가 누워있지 않는 침상을 운반해서는 안되도록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

바로 그러한 하지 말라야할 일들을 안식일에 하라고 명하시는 예수님이 었습니다. 그 당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던 불편한 시선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당시에 바리새인들과 유대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도대체 예수라는 자가 뭐길래? 무슨 권위로 자신이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할 일을 명하는가? 하는 곱지 않은 시선과 의문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 더 그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던 것은 바로 <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됨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찌 참람하게 이러한 말을 할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무슨 근거로 무슨 이유로 감히 이런 말을 할수 있단 말인가? 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 당시 바리새인들과 유대지도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이시다는 것과 그리고 자신 하나님의 아들되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특히 이러한 <안식일 논쟁>을 벌일때마다 그러한 자신의 존재를 변호하고 설명하셔야만 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자기 변호인 동신에 자신의 하나님됨과 하나님의 아들됨을 증거를 분명히 말해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특히 이것은 요한복음 전체의 목적이며 분위기 이기도 합니다.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임하신 예수님이 누구인지? >를 주목하고 설명하고 설교하고 있는 성경이 바로 요한 복음입니다. 4복음서중에서 아주 신학적이며 아주 기독론적인 성경이 바로 요한 복음이입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의 문체는 강화체입니다. 강화체라는 것은 설교체라는 것입니다. 어떤 구체적인 주제와 목적을 가지고 그것을 분명한 어조로 설명하고 설교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요한복음입니다.

 

그러한 이유에서 오늘 요한 복음 5장의 내용에 많은 부분이 예수님이 왜? 하나님의 아들인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을 알려주마 !와 같은 형태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요한 복음 5장의 하반절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됨에 대한 증거를 4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1/ 세례요한의 증거입니다. 유대인들이 권위있다고 생각하는 인물인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어떻게 말했는지?가 첫 번째 증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증거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리스도에 대한 또 다른 증거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2/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역사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권능을 보고서 놀랐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기적과 이적이 바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입증해줍니다.


3/ 하나님께서 친히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하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변화산상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자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마지막 증거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4/ 성경 곧 구약성경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하는 증거입니다.

이것은 그당시 율법을 잘 알고 있는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아주 친숙한 증거입니다.

이마 구약의 말씀을 통해서 메시야 예수그리스도가 어떤 모습을 어떤 사역으로 어떤 존재로 오게 될지를 예언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있었지만 <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고 >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바로 이점을 오늘 분문에서 예수님께서 지적해내고 꼬집어 내고 있는 것이죠.

그당시의 유대지도자들 꽤나 율법을 연구하고 읽었다고 자부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율법을 읽고 연구해본들 < 주제 파악도 못하고 개념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5:39-40]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그 당시의 율법주의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은 <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했고 예수님께로 오지 않았으며 그리고 예수님을 영접하지도 믿지도 않았습니다. > 바로 이유는 무엇인지?를 문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 그들에 일침을 가합니다.

(5: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의 모습을 한탄하시며 이렇게 2번이나 말씀하십니다.

(5: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5:47)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저는 이 말씀에게 저에게 강한 도전으로 다가오는 말씀이 바로 < 어찌 나를 믿을수 있느냐?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바로 이 책망과 안타까움이 담긴 예수님의 음성은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음성으로 다가와야합니다.


< 어찌 나를 믿을수 있느냐 ?>는 질문은 그당시에 율법주의자들이나 형식적인 유대종교에 머물고 있는 이들을 위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오늘 말씀을 듣고 읽고 있지만 참으로 주님을 만지못하고 살고 있는 이중적인 신앙으로 살고 있는 오늘의 우리의 신앙을 향해 주신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 너는 교회를 오래다니고 성경을 그렇게 자주 접하고 대하고 직분을 받고 교회에 머물고 있으면서도.. 어찌 나를 믿을수 있느냐?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 >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아침에 우리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강한 도전은


< 정말 나를 알아보긴 하니? 정말 내 말길을 알아듣고 있는 거니 ? 아니 정말 나를 원하고 사랑하고 믿고싶기는 하는 거냐 ? >라고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율법주의자들에게 주신 말씀이지만 반대로 오늘 너무도 편한한 시선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있는 형식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말씀으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이 < 어찌 나를 믿을수 있느냐 ? > 의문을 던진 유대인들의 문제를 보아야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그러한 개념조차 없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그들의 3가지로의 문제점을 나누고 싶습니다.


1/ 자신들이 원하는 것만 믿고 싶은 자기중심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이 성경에서 읽은 메시야는 그들이 지금 눈앞에서 보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수없이 읽었지만 자신들이 원하고 바라고 믿고 싶은 자기 중심적인 메시야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것입니다. 왜냐하면 뭐나 자신들이 생각하던 메시야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성경을 읽어도 고정관념과 잘못된 생각으로 사로잡혀 있기에 성경을 읽어도 참된 주님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지요.

바로 이것이 우리도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바로 우리의 아전인수와 같은 신앙이 주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합니다.

 

2/ 본질보다는 형식에 매여 있는 껍데기 신앙입니다.

율법주의 문제는 사랑의 본질은 잃어 버린채 사랑이 없는 형식적인 종교적인 원칙만을 내세운다는 것입니다. 특히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사역을 하실때마다 논쟁의 벌렸던 주제가 안식일 논쟁입니다. ?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할 일을 합니까? 라고 하는 질문을 합니다. 그때마다 예수님은 < 그러면 안식일에 진정으로 무엇을 해야 하느냐 ? >라는 대답을 응대합니다. 그러면서 안식일에 일어날 일은 바로 치유와 회복이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정작 해야 하는 것은 하지 않은 채 하지 말아야할 것만 찾아내서 그것에 집착하는 것이 껍데기 신앙입니다. 우리는 항상 신앙생활을 하면서 < 본질과 형식 >이라는 이 두 균형잡기를 해야합니다. 본질을 놓치면 껍데기만 남습니다. 그러난 본질을 잘 싸고 있는 껍데기만큼 온전한 것은 없습니다.

 

3/ 하나님의 영광보가 사람의 영광을 구하는 자기 자랑입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이유가와 동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의로움과 거룩함을 드러내고 자랑하고자하는 자랑꺼리를 만들어내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5:41-42]

(5:41)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5: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그들이 율법을 지키는 동기는 하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사람에게 영광을 얻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바로 예수님은 그 동기를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적하셨죠.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도 < 어찌 나를 믿을수 있느냐 ?>는 예수님을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유대인들처럼 우리에 있는 숨어있는 < 자기중심, 껍데기 신앙, 자기 자랑 >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오늘 이 아침에 우리 자신에 물어보아야합니다. <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것이 너희속이 있는가? 나는 예수님이 참으로 누구신지? 알고 믿고 있는지 ? >

 

찰스 웨슬리

< 내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헐떡이며라도 그분의 이름을 말할수만 있다면 행복하리라. 그분을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라. 그리고 죽음속에서 외치라. 보라. 어린양을 보라 >

 

루이스 

<당신은 선택해야만 한다. 주님은 과거에도 지금도 변함없이 하나님의 아들이든가 아니면 미친 사람 혹은 그보다 더 못한 어떤 것이든가 둘중 하나이다. 당신은 이 사람의 어리석은 말을 묵살할수 있다. 그에게 침을 뱉고 또 그를 마귀로 몰아 줄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발 아래 엎드려 주님이시며 하나님이시라고 부를수도 있다. >





 

== 2015GSC 새벽 큐티 설교 <요한복음4:19-30> ==


@ 설교문중 그림 인터넷 갈무리함 




제목 : 참 예배자


[4:19-30]

(4:19)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4: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4: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4: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4: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4: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4:27)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

(4: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4: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4:30)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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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참 예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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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1월 한달의 본문이 < 요한 복음 >입니다. 특별히 오늘 요한복음 4장에 주제는 < 예배 >입니다. 특히 올해 우리교회의 영적인 방향이 < 예배가 삶이 되고 삶이 예배가 되라>는 주제가 절묘하게 어울리는 본문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제가 특새가 끝나고 오늘 제가 설교할 본문이 무얼까 미리 찾아 보았는데요. 깜짝 놀랐습니다. 어찌 이런일이.. 어찌 이럴수가 ? 이제 2월 부터는 더 이상 생명의 삶으로 설교도 하지 않는데 이렇게 절묘한 조화가 있을수가 ? 하고 주어진 본문에 놀라웠습니다. 전문용어로 < 아다리가 잘되었다 >라고 할수 있는 본문이 바로 오늘 < 요한 복음 419-30>입니다.

 

특히 이 본문은 송목사님의 쓰신 책 < 오후 5시에 온 사람 >Chapter 2< 정오의 태양아래에서 >라는 주제의 본문이기도합니다. 오래전에 송목사님이 이 본문으로 설교를 한 것으로 기억하구요..

이 책에서 예수님께 찾아온 사마리아 여인의 상처를 말하고 있습니다. < 정오의 태양보다 따가운 눈총을 피해 나온 여인, 이 사마리아 여인은 더러운 여자가 아니라 상처받고 짓밟힌 여인, 대인기피증에 시달린 여인 >

 

그리고 이 여인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라고 말한 여인의 아픔을 이해하신 주님 >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가?

< 수치와 부끄러움으로 꽉 차 있던 인생, 혹여 머리카락이라도 보일까 꼭곡 숨어지야 했던 그녀가 자신의 아픔과 상처를 온세상 사람에게 말할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정오의 태양에 이글거리는 시간에 찾아오신 주님은 아무것도 없는 여인에게 모든 것 그 이상을 주셨다. 주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우리 영혼의 가난과 상처를 직시하시고 어느 누구도 만나주지 않고 위로해주지 않을 것 같은 우리에게 찾아오신다. 최악의 장소, 최악의 사람, 최악의 시간이라 할지라도 하늘의 은혜를 막을수 없다. 우리가 누구이든, 어디에 있든, 때가 어떻든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의 소망이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2015년 우리에게 주어진 묵상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 예배 >일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 예배자이면 예배자의 삶 >일것입니다.


특히 요한복음에 '예배'라고 하는 말, 예배드린 자, 라고 하는 말이 열 세 번나오는데 그 가운에 오늘 봉독한 요한복음 4장에 열 번이나 집중적으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예배가 무엇인가를 알고싶 으면 예배라는 단어가 등장된 그곳을 열심히 묵상하면 알 수가 있어요. 요한복음 4장만 잘 이해해도 예배가 무엇인지,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되는 것인지, 우리에게 잘 가리켜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주동안 내내 이 본문가지고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배가 무엇입니까? 예배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예배자의 삶이란 어떤 것입니까? 오늘 요한 복음 4장에서 만난 우물가의 여인의 변화는 한 여인의 상처와 아픔이 치유되고 회복되고 변화된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이 여인을 예배자로 회복시키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예배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이방 땅 사마리아에 예배가 무엇인지? 말씀해주시는 장면입니다.

 

어떤 예배에 관한 책을 보다가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 예배는 하나님과 술래잡기를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잡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잡으시도록 보이는데 숨어야합니다. 자꾸 보이 않는데 숨으면 하나님은 그냥 지나쳐 버리십니다. >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신것에 우리 자신을 숨기지않고 드러내는 것입니다. 좋은 예배자는 하나님이 찾기 좋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배란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모시는 과정입니다.

예배란 하나님을 향한 모든 가치있는 응답입니다

(Worship is any and every worthy response to God.

 

오늘 본문은 요한복은 4장의 내용을 우리가 어떤 예배자이면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어떤 사람인지?을 알게해주는 정말 귀하고 중요한 본문입니다.

 

하나님은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예배자를 찾고 있다는 것은 2가지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1) 예배자가 찾을 만큼 별로 없다. 2) 예배자를 찾을 만큼 예배를 좋아하신다

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읽을 수록 하나님은 예배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온전히 드리는 이들에게 놀라운 이들을 경험케하시고 형통의 역사를 주신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우리안에 진정한 하나님의 얼굴이 드러나는 시점은 바로 예배할 때입니다.

그리고 우리안에 진정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시점은 바로 예배할때입니다.

그러한 참된 예배자 . 참 예배자를 하나님이 찾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이 갈릴리로 가는 도중에 사마리아 한 여인을 만납니다.

처음시작은 물한잔 주이소 에서 시작해서 마지막은 예배하라 로 끝나는

이상하고도 진진한 대화들로 되어 있는 그런 본문입니다.

 

신약성경시대의 팔레스타인 지방은 북쪽의 갈릴리와 남쪽의 유대 및 그 가운데의 사마리아로 나뉘어져 있어습니다. 이중 갈릴리는 예수님이 자랐고 또한 주로 활동하신 곳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가끔은 유월절과 같은 유대인들의 명절에 유대의 예루살렘으로 가기도 하셨습니다.


한번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유대에 와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다가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돌아가셨습니다. 사마리라를 통과하던 중 <수가>라고 불리는 한 사마리아의 도시에 이렀는데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서 가까운 곳이 었습니다.

거기에는 야곱의 우물이라는 한 우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여행에 지쳐 그 우물곁에 앉으셨는데 그때가 당시의 시간으로 여섯시쯤 요즘 시간으로 낮 12시쯤이었습니다. 정말 뜨거운 태양빛이 내리 쬐는 그러한 시간이었습니다.

한여인이 물을 길르러 우물가로 다가왔습니다. 예수님은 물을 달라고 하면서 그 여인과의 대화를 시작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먹을 것을 사로 시내에 들어간 뒤었습니다.

 

(4: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4: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4: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이제 본격적으로 이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가 시작됩니다.

저는 이 말씀을 통해서 --- 예배자는 어떤 사람인가? 집중해서 살펴보고자합니다.

 

1. 예배자는 예수님이 찾아오는 사람입니다.

예배자는 예수님을 만난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께 우리가 찾아오시전에 주님이 먼저 나를 찾아오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주님이 여러분을 찾아오는 은혜가 있길 바랍니다.

예배자에게 주님은 반드시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4: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사마리아인에게 예수님은 찾아오셨습니다.사실 성경의 역사을 이해하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불편한 관계였습니다. 당시 유대인은 사마리아 사람을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인은 불결한 사람, 더러운사람, 불경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마리아인은 여자였습니다. 여자를 경시하는 풍조가 있었기 때문에

여자 사마리아인 하면 정말 접근 금지 입니다.

사마리인을 유대인들은 개 취급했습니다. 개만도 못하고 -- 개보다 못하고 -- 개같은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신분상 유대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무척 싫어했습니다. 오랜시간에 걸쳐 심각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사이에는 2가지의 문제가 존재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상종치 않았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거리감이었죠.


1) 예배의 정통성의 문제 : 이방신의 예배했던 사람들, 금송아지 예배자들, 배은망덕한 예배자들. 우상숭배 예배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던. 잘못된 예배를 가졌습니다.

2) 혈통의 문제 -- 이방의 잡족 출신, 혼열족,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혈통과 편견과 선입관을 버리고 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에서 주님의 놀라운 기적과 치유를 경험했던 이들은

주님이 찾아 오심을 경험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자주 모셔드려야합니다. 바로 그것이 예배입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 말을 겁니다. 예수님과 대화를 시도합니다.

바로 이장면은 바로 이 여인에게 예배가 시작되는 장면입니다.

그런 여인에게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이 사마리아 땅에 오신것은 주님의 의도가 깔려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예수님께서 일부러 여기로 오셨다고 확신합니다.

 


2. 예배자는 영적인 목마름과 굶주림이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예배자의 시작점은 바로 타는 목마름, 갈망, 갈증, 굶주림에서 시작됩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남들의 시선과 눈을 피해서 -- 우물가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물을 기르고 가는 것이 그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말할수 없는 아픔이 이었습니다. 그는 신분상 사마리아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결혼을 5번이나 실패하고 거절당한 아픔과 상처와 응어리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여인에게는 자유함이 없었습니다. 사람들 만나는 것도 싫었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오지 않은 정말 무더운 시간에 나왔던 것입니다.

 

실제로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낮12시는 방에 문을 닫고 -- 가게도 하지않고 -- 그냥 집에 있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러나 그녀가 그 시간에 사람의 눈을 피해서 나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그녀의 아픔과 상처와 고통 그리고 거절감이 얼마나 큰지를 말해줍니다. 그녀는 그 상처를 감추고 싶었습니다. 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비난과 비아냥 거림을 견딜수 없었습니다.

 

5번의 결혼 실패는 그녀로 하여금 위축되게 만들고 자신없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실망스러운 모습이며 자신의 낮은 자존감, 의기소침함이었습니다.

마음에 한없는 빈곳이 그녀를 강타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렸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자살충동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이 여인의 아픔을 2가지로 요약한다면

1) 숨기고 싶은 아픈 과거가 있습니다.

2) 드러내고 싶지 않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날도 여인은 다른 때처럼 물을 길으러 우물가로 나왔습니다. 어제도 마셨고 그저께도 마셨고 한주전 한달전 아니 태어나면서부터 마셔온 물을 또 마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물론 내일도 모레도 일년후도 결국 죽을때까지 물을 마셔야 하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거기서 만난 낯선 사람이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물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배자는 과거와 아픔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자가 더 잘 예배할수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100살때까지 자식이 없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요셉도 형에게 버림 받은 아픔이 있었습니다.

야곱도 아버지를 속이는 아품이 있었습니다.

모세도 사람을 주이고 도망친 아픔이 있었습니다.

다윗도 밧세바를 범하는 아품이 있었습니다.

엘리야도 갈멜산대결이후에 자신을 죽여달라는 우울증에 빠지는 아품이 있었습니다.

히스기야도 자신이 죽을 병에 걸리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도 자신의 일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아픔이 있었습니다.

다니엘도 사자굴에 들어가는 아품이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의 배신을 당하는 아픔과 십자가의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다 그 아픔을 이겨내고 그 과거에 얽매이지 아니히고 하나님을 예배한 사람들입니다. 모두가 그 아픔을 딛고 예배하기로 결단한 사람들입니다.

예배자는 자신의 아픔과 숨기고 싶은 마음 대로를 가지고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이미 사마리아 여인의 아픔과 갈급함을 아셨습니다.

 

토미테니의 책 굶주린 예배자 라는 책을 보면

우리는 4가지에 굶주린자들이 되어야한다고 말합니다.


1) 하나님의 임재에 굶주린 예배자가 되어야한다.

하나님을 굶주린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 하나님께 굶주린다 는 말은 지금까지의 삶에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가 없었기 때문에 만조하지 못한다느 것을 의미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밥먹는 것이고 하나님께 밥상을 차려드리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랑에 굶주린 예배자가 되어야합니다.

3) 하나님의 영광에 굶주린 예배자가 되어야합니다.

4) 하나님의 부흥에 굶주린 예배자가 되어야합니다.



이러한 굶주림과 목마름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도록 하나님을 구하도록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만듭니다.


여인은 물을 달라고 하신 주님께서 그에게 물을 주겠다고 하시니

그녀는 놀랐습니다. “ 어디서 당신은 생수 얻겠사옵니까? ”라고 묻습니다.

(4: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4:15)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예배의 경험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영적인 갈급함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예배자는 목마른 자입니다. 영적인 갈망이 있는 자입니다.


영적갈망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우리는 껄덕거려야 합니다.

요엘 120절에 같은 표현이 등장하고 있는데

(1:20) 들짐승도 주를 향하여 헐떡거리오니 시내가 다 말랐고 들의 풀이 불에 탔음이니이다


토미테니는 자신의 책 하나님 당신을 갈망합니다. ”에서

하나님 그분은 타는 목마름으로 자신을 구하는 자들에게만 오신다. 마음을 깨끗이 비운후 회개의 길로 나아가라. ‘ 진정 하나님을 아는가스스로에게 물어보라. 꺼져 버린 갈급함의 불이 다시 지펴질 것이다 -- 굶주린 자들은 빵을 찾아 헤매고 있다. 텅빈 교회 찬장에 만족하지 말고 바닥에 떨어진 빵 부스러기들을 줍지 말라. 천국 오븐에서 구워진 따끈따끈한 빵을 구하라. ”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42: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이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참예배자의 모습이 있습니다. 영적 갈망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갈급함입니다.

 

3. 예배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물에서 시작했던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이제

물에서 남편문제로, 상처와 아픔 문제를 다루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생수를 알게됩니다. 그리고 이제는 예배의 문제로 넘어갑니다.

(4: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이 여인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예배의 생각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대화를 통해서 바꾸어주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가진 잘못된 예배의 생각

1.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온다 )

(4: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 모르고 예배하고 있다. (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

(4: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사마리아인의 마음속에는 예배에 대한 갈망 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배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의 조상들은 이 산 곧 그리심산에서 예배하였는 예루살렘에서만 참 예배를 드릴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하여야 할 것을 본래부터 주장하여왔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에서 예배하여야 정당하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유대 사람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성전을 게르심산에 세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4: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어디서 예배해야 하느냐라는 사마리아 여인의 물음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뜻밖의 것이 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의 이산 도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도 참되 예배의 자리가 될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배가 장소나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신것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예배하다 는 이 예배는 예수님이 쓰시는 용어입니다.

헬라어 프로스퀴네오 라는 말인데 신 앞에 엎드려 땅에 입맞춤으로 사랑과 존경을 표현하는 행동을 가리켰습니다. 그래서 엎드려 절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께 인사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척하는 것입니다.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 하나님존재,다스림,통치,소유권,주재권, 만지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그분이 온세상을 다스리 신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에게 가장 먼저 시작되는 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갔을 때 우리에게 가장 먼저 일어나는 반응도 예배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 계시다는 것을 깨닫고 그분의 현존에 대한 반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기쁘게 대해는 것처럼 존경하는 분을 만나면 반갑게 맞이 하는 것 처럼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사랑과 존경속에서 그분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예배의 습관과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님은

참예배자가 무엇인지? 말씀해주십니다.


[4:23-25]

(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 주님을 2번이나 말씀하시 계십니다. “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른다고 말씀하십니다. ” “ 그리고 그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때가 온다

그 때가 바로 이 때라

- 예수님은 유대인의 예배는 완전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 유대인의 예배가 사마리아인의 예배보다 나은건 사실이지만 완벽하지 않았다.

첫 번째 예배는 영으로 드려야 한다. 그것이 참된 예배다

· 신령으로 드린다는 말은 우리의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외하는 것을 말합니다. 영어 성경에는 in spirit 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 : 인간의 지각 인식 느낌 열망과 같은 감각이다. 우리의 내면, 마음입니다.

- 영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내면의 자아가 참여한다는 뜻이다.


두 번째 예배는 진리로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예배입니다.

진정으로 드린다는 말은 진리 안에서(in truth) 드린다는 말입니다.

예배하려면 진리가 무엇인지? 알아야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진리인 말씀의 기초위에서 우리는 놀라운 능력이 나타 난다.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배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다.

예배는 사랑과 기쁨의 회복이어야 한다.

 

4. 예배자는 하나님이 그토록 찾으시는 사람입니다.

(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 찿는다 라고 말씀하신 것은 너무 귀한 것, 만나기 어려운 것 하나 하나 를 선택한다 는 뜻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귀한 보물을 잊어버렸다고 한다면 온 집안을 다 샅샅이 뒤져서라도 그것을 찿아내려 할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오늘 이 자리를 바라보시면서 응답하시고 축복하실만한 찬송, 기도, 예물을 찿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감동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들을 찾고 계십니다.

특히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을 좋아하는 사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는 사람을 찾으실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예배를 받으실 것입니다.

· 그처럼 하나님을 좋아하는 우리를 예배자로 찾으십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예배를 연극에 비유해서 설명했습니다.

예배를 연극에 비유한다면 우리 모두는 배우이고, 하나님 만이 보시는 분, 관객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인들은 자신을 관객인 줄로 생각합니다. 그는 [예배를 보는 자]입니다.


5. 예배자는 삶이 바뀌는 경험을 개선된 나가 아니라

전혀 다른 나를 만드는 길입니다 .

 

(4: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4: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4:27)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

(4: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4: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4:30)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 이 여인은 이제 인생에 변화와 회복이 일어났다. 그리고 새로운 탈바꿈이 일어났습니다. 조금 개선된 나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나를 만나는 시간을 경험했습니다.

·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예배를 배웠고 참예배자가 되고 예배안에 들어갈수 있었습니다.

예배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참예배가 될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과해합니다. 주님의 보혈의 피공로가 나를 새롭게하고 나를 예배하게 하는 것입니다.

· 그녀 가져왔던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갔다.

· 물동이를 버려두가 갔다는 것은 나는 더 이상 이것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결단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에 나아갔다는 것은 예배자의 감격과 기쁨을 회복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만난 그 주님을 말하고 그 감격과 감동을 설명해주고 싶었습니다.

· 예배하면 그 예배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물동이를 버리는 것입니다. 더 이상의 수치심이나 죄책감이나 더 이상의 자괴감은 들지 않고 담대하고 당당하게 살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을 도전합니다.

우리는 내일이면 이제 영적 전쟁의 현장으로 달려갈것입니다.

그현장에서 당당하게 예배자로 사시길 바랍니다.

1. 예배자는 예수님이 찾아오는 사람입니다.

2. 예배자는 영적인 목마름과 굶주림이 있는 사람입니다.

3. 예배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4. 예배자는 하나님이 그토록 찾으시는 사람입니다.

5. 예배자는 삶이 바뀌는 경험을 개선된 나가 아니라

전혀 다른 나를 만드는 길입니다.

 

주께와 엎드려 경배드립니다.

주 계신 곳엔 기쁨 가득

무엇과도 누구와도 바꿀수 없네

예배드림이 기쁨 됩니다. 

 

 

 



 

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 골로새서 2 : 8 15 >


제목 : < 골로새서 2:8-15 > 구주를 생각만 해도












[2:8-15]

(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2: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2: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2: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2: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2:13)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2:14)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2: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우리가 앞에 불렀던 < 구주를 생각 만해도 > 라는 찬양이 저는 골로새서의 본문의 주제와 가장 잘 어울리는 찬송이라고 생각합니다. 찬송가 85장은 중세 프랑스의 수도사인 클레아보의 성 베르나드(10911153)예수 그 사랑스런 기억이란 제목의 시가 모체가 되어 만들어진 찬양입니다.


이찬양의 원제목은 <아름다운 예수에 대한 묵상이 내 맘에 참 기쁨을 주네

Jesus, The Very Thought of Thee (구주를 생각만 해도>)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열망이 가사 곳곳에 흠뻑 배어 있는 이 곡은 많은 순교자들이 죽음의 문턱에서도 당당하게 주 얼굴을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는 믿음의 확신을 심어준 대표적인 찬송입니다


특히 찬송을 작시한 성 베르나드는 그 시대에 가장 뛰어난 인물로 신학윤리의 극치를 이룬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차후 이 찬송에 인용된 몇 구절은 그의 신학적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가 되었으며, 찬송 가사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이 얼마나 존귀한가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이 찬송은 "중세 시대의 찬송 중에 가장 복음적이고 아름다운 찬송"이라고 극찬을 받은 찬송입니다


이 찬송이 쓰일 당시는 교회의 암흑기 세속에 물들어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타락한 상태 작시자는 그 어두운 상황속에서도 항상 구주만을 생각하며 회개하고 기쁨과 소망을 찾았다고 합니다.

 

역사상 수많은 영혼들이 이 찬송을 부르며 위로를 얻었습니다. 이 찬양과 관려한 일화로 영국의 성 마리아 교회 토머스 싱 목사는 70세의 나이로 임종을 맞이했습니다. 그는 곁에 서서 임종을 지켜 보는 젊은 목사에게 바로 이 찬송을 불러 달라고 부탁했습니다.'주 얼굴 뵈올 때'의 기쁨이 그의 얼굴에 그림자 되어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생각하는 예수에 대한 묵상이 어떠합니까?

올 한해동안 지나오면서 나는 예수님을 얼만큼 생각하고 얼만큼 묵상하며 살았는지? 그리고 오늘 하루를 사는 동안 나는 어떻게 예수님을 묵상하면 살것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 생각한다 >는 말해서 시작됩니다. 생각이 머물기 시작하는 일에서 사랑한다는 행위가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에 사도바울이 써내려가고 있는 골로새서는 온통 < 예수님 생각으로 / 구주를 생각하는 것으로 > 가득차있습니다. 특히 사도 바울을 그 당시에 영지주의 이단과 율법주의의 왜곡된 지식에 영향을 받고 있는 있는 골로새교회와 교인들에게 < 바른 예수님에 대한 생각 / 바른 예수님에 대한 관점 >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전하고 싶었던 가장 중요한 생각. 가장 중요한 요점은 <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가 되기 위해 충만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에 예수님만으로 충분하다 >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는 < 충만하신 그리스도. 충분하신 그리스도 >를 생각하고 묵상하고 전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는 그리스도의 탁월함, 그리스도의 우월함을 고백하고 있는 서신입니다. 골로새서는 어느 서신보다도 기독론이 강한 서신이라고 할수 있죠.

 

기독론의 핵심은 예수그리스도의 참 하나님 되신 신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참 사람되신 인성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구속사역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아는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 되시기에 충만하십니다.

우리가 고백하고 찬양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참 사람이 되시기에 충만하십니다.

그래서 이 충만하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그분 한분의 존재만으로도 그분 한분의 역할만으로 충분합니다...


<충만하신 그리스도>는 우리가 믿는 믿음의 대상에 대한 [존재적 표현]입니다.

 <충분하신 그리스도>는 우리가 믿는 믿음의 대상에 대한 [고백적 표현]입니다.


주님 안에는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주님안에는 모라잘것이 하나도없는 자격이 미달될것이 하나도 없는 충만하십니다..

 

제가 교회에서 일을 하고 오후 쯤이면 아이들에게 전화가 옵니다. < 아빠 언제와요 > 그러면 제가 < ? 뭐 사갈까 >라고 묻습니다. 그러면 애들이 < 그냥 일찍와요 >라고 말합니다.


제가 저희 집 아이들에게는 제가 아빠로써 <충만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저를 생각할때마다 다른 어떤 것보다 아빠 하나로써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아빠가 집에 오는 것으로 집이 충만해지고 자신들은 충분하다는 표현입니다.

아빠가 집에 올 때 피자를 사오거나 아이스크림을 사오는 것을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빠가 오는 것으로 그 다음의 것을 자연적으로 따라올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충만하신 그리스도는 우리가 믿는 믿음의 대상에 대한 존재적 표현입니다. 주님의 어떠하심을 말할 때 < 주님은 우리의 구주가 되시기에 충만하신 분입니다. > 그래서 우리는 고백합니다. < 주님 한분으로 충분합니다 > 라고.. 충분하신 그리스도는 우리가 믿는 믿음의 대상에 대한 고백적 표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살펴보고 있는 골로새서 본문은 우리의 신앙과 믿음의 오리지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탁월하며.. 얼마나 우월하며.. 얼마다 가치있는 분인지를 바울을 논리적인 변증으로 설명하고 있는 서신입니다


골로새교인들은 바울이 직접 찾아가서 가르친 복음을 전하는 교인은 아니었습니다. 골로새교인들은 에바브라라는 훌륭한 성경교사의 가르침을 받아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골로새교인들은 에바브라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며.. 복음이 무엇인지? 들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안에 들어온 세상적인 철학, 세상적인 사상. 세상적인 관념과 세계관이 그들의 신앙을 흔들고 있었고.. 의문을 제기하며... 그리스도의 진정성.. 하나님의 오리지널이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많은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마치 진품인 예수그리스도를 짝퉁 그리스도로 변질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죠...

 

오늘 골로새서의 영적인 상황이.. 짝퉁을 들고 진품을 무시하는 형태입니다. 이미테이션을 가지고.. 그것이 오리지널인냥 우기는 사람들이 등장하는데서 본서신이 쓰여진 배경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보면... < 철학과 헛된 속임수,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 >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2:8)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사도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이러한 잡다한 사상과 철학 그리고 전통에 대해서 주의하> 여기서 < 철학 > 이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이 곳에서만 등장합니다. <이것이 너희를 노략한다.> 이 말은 이것이 너희를 < 포로잡고. 유괴한다 > 그래서 그러한 사탕발림에 넘어가지 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 짝퉁이고.. 짜가이고.. 이것은 오리지널이 아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골로새는 에베소에서 서방으로 가는 무역로 상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자연히 동서교통의 중요한 장소로서 동서문물의 교류가 활발한 곳입니다. 모든 무역도시가 그러하듯 많은 상인과 여행객들의 출입이 잦은 관계로 각종 철학과 종교사상이 혼합된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골로새 성도들은 혼합주의에 대한 위험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골로새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교인들이 거의 다 이방사람들이었습니다.

 

믿기 전에 이방인이었기에 그들이 과거에 가지고 있던 이방 종교적 전통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시에 그런 거짓 가르침에 쉽게 넘어갈 위험성이 많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골로새서는 바울이 전한 기독교의 복음이 헬라의 혼합종교의 체계 속으로 녹아 들어가고 있을 때 이것을 바로 잡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되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바울은 혼합주의로부터 복음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다시한번 그리스도의 유일성, 절대성, 우주론적인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골로새 성도들을 복음에 바로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 당시 골로새교회는 4가지 중요한 철학과 사상들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1) 영지주의 사상 : 영지주의는 영은 선하고 물질은 악하다는 이원론적 사고방식입니다. 영적인 하나님과 물질적인 세계 사이의 존재론적 이원론을 말합니다. 그래서 선하시고 영적인 존재인 그리스도가 악한 육체를 입을 수 없고.. 우리에게 나타난 그리스도는 오리지날이 아니고 그냥 그림자와 같은 존재,, 환영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하나님됨과 구주됨을 부인합니다.

영지주의는 플라톤의 철학. 헬레니즘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 유출설 ). 동방종교, 유대교가 혼합된... 철학인 동시에 세계관입니다.

2) 금욕주의 사상 < 스토아 학파철학 >

3) 천사숭배 사상. 신비주의 4) 율법주의 사상

 

4가지가... 그리스도의 오리지널을 훼손하고.. 의심하고.. 영향을 주었습니다.

1)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에 완벽함에 대한 부인( 이원론적 접근 )

2) 그리스도를 피조물로만 전락시키는 평가절하 ( 인간예수..조명 )

3)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 대한 불만족과 불충분성..( 뭔가 다른 양념이? )

4) 그리스도안에서 있는 성도들의 정체성을 의심 ( 율법주의, 신비적체험 )

 

그래서 사도바울은 참 사람이시고 참 하나님이심에 대해서 다시금 강조하고.. 흔들리지 않은 영적인 진리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골로새서를 쓴 목적이 바로 너희가 알고 듣고 영향받은 철학을 쫓지 말고.... 그리스도 한분만으로 충분하다.. 그리스도안에 모든 것이 충만하다고 강조하고 있는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에서 충만하신 분이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짝퉁이 아니라 오리지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짝퉁을 오리지널로 생각하고 그러한 사상과 철학에 영향받지 말라.. 그러한 전통과 유전에 영향받지 말라.. 경고하고 권면해주고 있습니다.

(2:9)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영지주의 사상에 < 충만 : 플레로마 >은 하나님과 이세상 사이에 영적인 존재가 있어서.. 그 영적인 존재들이 채워지는 것을 충만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육체 안에 그대로 하나님의 신성의 충만함이 있다고 <그대로 집을 지어서 거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원히 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요한복음에서 1:14절에서 말하는 < 말씀이 육신되는 사건 >입니다..

 

바로 참 하나님이시면서 참 사람이신 신성과 인성이 충만하고 충분하신 그리스도가 어떤 사역을 하셨는지를 보면 그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역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완벽하게 이루시는 예수님의 사역이 예수님의 존재를 증명해줍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자가 되기시기에 충만하신 분으로 우리가 그분을 믿기에 충분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 완전한 구원 / 완전한 용서 / 완전한 승리 > 때문에 그렇습니다.

1) 완전한 구원의 사건 : 신령한 할례 (11.12)

[2:11-12]

(2: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2: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 우리는 손을 하지 않은 할례를 받은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의 할례 곧 마음의 할례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죽었다가 다시 살라나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2) 완전한 용서의 사건 : 죄의 용서 (13.14)

[2:13-14]

(2:13)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2:14)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문에 쓴 증서 곧 <죄의 차용증>.. 우리가 죄인이라고 율법을 통해서 발부되었던 그 <죄의 티켓>이 모두 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취소되고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3) 완전한 승리의 사건 : 악의 세력을 정복 (15)

(2: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 더 놀라운 것은 더 이상 세상의 정사와 권세가 우리를 지배하지 않도록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승리하셨습니다.

이 부분을 이렇게 다른 성경에 번역합니다.

(2:15)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2:15)그리고 모든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의 무장을 해제시키셔서, 그들을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포로로 내세우심으로써,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삼으셨습니다.

오늘 문제점들 그리스도을 전하는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이 세상의 세계관속에서의 위협은 크게 3가지입니다.

1) 신앙의 상대화(절대가치의 상대화/다양한 가치인정 포스터 모던 신앙)

2) 복음의 희석화(물어진 주의 보혈/다른 것으로 대체됨/다른 은혜를 구함

3) 믿음의 무능력화(힘없는 그리스도인/믿음이 영향력 발휘안됨)

충만하신 그리스도는 우리가 믿는 믿음의 대상에 대한 존재적 표현입니다.

충분하신 그리스도는 우리가 믿는 믿음의 대상에 대한 고백적 표현입니

 

참 하나님이시고 참 사람이신 충만하시고.. 완벽하시고 완전하신 그리스도가... 우리의가 믿는 분이십니다. 동시에.. 그 그리스도 한분만으로 나는 만족하고.. 충분합니다.. 라고 우리는 고백해야합니다.

주님 한분만으로 나는 만족해 내 모든 것되신 주를 찬양해..

나의 영원한 생명 되신 예수님 목소리 높혀 찬양해...








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 골로새서 1 : 9 20 >


제목 : < 골로새서 1 :9-20> 나의 믿음 약할때에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1: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1:10)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1:11)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1:12)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1: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안에서 거하게 하시고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이번주부터 예레미야 애가가 끝이 나고 < 골로새서 > 묵상하게 됩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의 서신서를 묵상할 때 먼저 생각해보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이 편지를 누구에게 무엇 때문에 쓰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 서신은 반드시 수신자가 있고 편지를 쓰고 있는 교회가 있습니다. 어떤 분명한 목적과 이유를 가지고 사도바울은 서신서들을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바울서신을 묵상하기에 앞서서 이 서신은 왜? 기록했는지? 그리고 이 편지를 통해서 사도바울이 이 편지를 받고 읽고 있는 수신자인 교회와 성도가 어떻게 하기를 기대하는지? 서신의 이유와 목적이 분명히 드러나있습니다. 이것을 먼저 이해할 때 바울서신을 묵상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흐름이 잡히게 됩니다.


오늘 묵상하는 골로새서 1장은 사도바울이 왜? 골로새 교회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가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무엇을 강조하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힘주어 말하고 싶은지?를 볼수 있는 대목입니다.

 

내일 본문이기도한데요.. 골로새서 123절에 바로 사도바울이 이 골로새 교회에게 쓰는 편지를 쓰고 있는 직접적인 배경이요 이유입니다.


(1: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바울은 골로새 교회와 교인들에게 부탁이 있었습니다. <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그 믿음의 터위에 굳게 서있야 한다. 그리고 너희가 들은바 복음의 소망에 흔들리지 말아야한다 > 이러한 당부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 골로새 교회가 무언가에 의해서 믿음이 흔들리고 굳게 서있지 못하다 >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흔들리고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흔들리지 아니하도록 격려해야할 필요를 느낀 것입니다.


골로새서의 메시지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이미 받음 복음을 굳게 붙잡을수 있다면 이 복음만으로도 감사하고 감격하며 살아야 할 이유가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 본문인 골로새서 1장에 초두에 우리가 가진것에 대해서 3가지를 분명히 말합니다.

[1:4-5]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첫째는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너희의 믿음

둘째는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

셋째는 너희를 위해 하늘에 싸아둔 소망 있음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러한 < 믿음 / 사랑 / 소망 >이 너희를 견고케하고 너희를 견디하게 하고 너희를 오래참게하는 능력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골로새 교회는 사도바울이 한번도 방문해본적인 없은 자생적으로 생긴 교회입니다. 골로새에 살던 사람 가운데 에바브라라는 사람이 에베소에서 사도바울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에베소에서 사도바울에게 복음을 듣습니다. 그리고 에바브라는 자신의 고향인 골로새로 돌아와서 신앙의 공동체인 골로새교회를 세웁니다.


성경 어디에도 사도바울이 골로새를 방문했다는 기록이나 흔적이 없습니다. 그만큼 골로새 교회는 아주 자생적으로 사도바울이 세운 교회가 아니라 <에바브라>라는 헌신된 복음전도자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골로새교회는 에베소 교회나 고린도교회처럼 사도바울의 가르침을 받거나 양육을 받은 교회가 아니기에 아직은 조금은 어설픈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쉽게 흔들리기 쉬운 교회였습니다. 아직 기본기가 탄탄하거나 아직 기초가 든든한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 이렇게 흔들리기 쉬운 골로새교회에 이단 교리들이 침투해오기 시작했습니다


소위 영지주의(그노시스)이단과 유대적인 율법주의가 들어와서 거짓된 환상과 지식들을 퍼뜨리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에바브라의 수고와 헌신으로 성도들이 모이고 열심을 내고 모였는데 믿음의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다가 보니 이러한 영지주의 이단과 율법주의가 들어와서 그들이 받음 복음을 흔리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사도바울이 이 골로새교회를 격려하고 바로 세워야겠다는 생각으로 이 < 골로새서 > 서신을 보내게 된것입니다.

 

오직 < 흔들리고 있는 골로새교회와 성도들의 믿음을 바로잡고 견고케하기 위해서 > 편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골로새교회를 향한 애정과 사랑은 그가 < 기도하고 있다 >는 표현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1:3)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1: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사도바울은 골로새교회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들었습니다. 그소식을 듣던 날부터 이제까지 항상 골로새교회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감사가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과 복음이 지금 이단교리에 의해서 흔들리고 있다는 소식에 안타까워하며 다시 기도하고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이 사도바울이 골로새교회를 한 그의 애정과 감사 그리고 기도가 표현되어 있는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골로새교회를 향한 사도바울의 간절한 기도가 담겨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골로새 교회 성도들의 영적 성숙을 위해 기도합니다. 특별히 두가지를 강조합니다. 그 두가지는 다름 아니 그들이 <알아야할 할것><그들이 행해야할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들이 알아야 할 것을 알고 행해야 할 것을 행할 때 그들의 영적 성숙이 이루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이 골로새교회가 믿음위에 굳게 서서기를 기도하면서 원했던 기도는


1/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을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지게 해달하는 기도였습니다.

(1: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 하나님의 뜻 >을 아는 것으로 채워지게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사도바울이 가장먼저 기도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으면 좋겠다는 기도는 <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나님의 뜻대로 살수 있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의 뜻을 바꾸어서 말하면 < 하나님의 기대 >입니다.

특히 < 신령한 지혜와 총명 >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지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신령한 지혜는 < 하나님이 주신 실제적인 지식을 사용하는 능력 >을 말합니다. <총명>< 거짓된 것을 분별해내는 분별력>을 말합니다.

그당시 골로새교회의 믿음을 흔들고 있었던 영지주의를 잘 분별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바란다는 당부가 이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영지주의 자들과 같은 거짓된 지혜와 지식에 흔들리지 말하고 하나님의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그것들을 바로 알고 잘 분별해서 오직 < 하나님의 뜻만이 너희안에 채워지길 바란다 >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가기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1:10)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우리의 믿음의 성숙의 과정은 하나님을 뜻을 알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말할 때 < 아는 것 >< 지속적이고도 체험적인 앎>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과정을 하나님을 믿는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되고 온전케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사도바울은 골로새서에서도 바로 이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 그리고 그대로 행하는 것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며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기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너희가 주께 합당하게 행하기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1:10)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여기서 < 주께 합당하게 행한다 >는 의미는 < 주님의 인격과 속성에 일치하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바울은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행해야 할 것을 말합니다.

< 범사에 기쁘시게하고 모든 선한 얼매를 맺고 하나님을 아는 것게 자라고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참음에 이르고 ..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해야한다 >고 구체적인 우리가 무엇을 행해야할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골로새서 1:13-20절부터는 너희가 믿고 고백하고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 >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것이 골로새서의 기록목적입니다.

 

(2: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믿음의 성장과 성숙 그리고 견고함과 견딤은 우리안에 얼마나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가고 얼마나 하나님의 뜻이 내게 채워지고 얼마나 그분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는냐?에 달려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골로새교회를 위해서 편지하면서 그가 계속된 기도속에서 오늘 우리를 위한 기도도 담겨있습니다.

너무도 쉽게 흔들리기 쉬운 믿음을 갖고 있는 우리에게

너무도 자주 무너지고 있는 신앙을 움겨쥐고 있는 우리에게

이렇게 요청합니다.

 

너희안에 하나님의 뜻이 채워지길 원한다.

너희안에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자라가길 원한다.

너희가 주께 합당하게 살아가가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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