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레미야 애가 2: 11-17>
  • 누가 너를 고쳐줄소냐 


# 설교문중 그림 인터넷 갈무리함 

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 예레미야 애가 2:1117 >

제목 : <예레미야애가 2:11-17> 누가 너를 고쳐줄소냐




 

[2:11-17]

(2:11)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딸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 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기절함이로다

(2:12) 그들이 성읍 길거리에서 상한 자처럼 기절하여 그의 어머니들의 품에서 혼이 떠날 때에 어머니들에게 이르기를 곡식과 포도주가 어디 있느냐 하도다

(2:13) 딸 예루살렘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증거하며 무엇으로 네게 비유할까 처녀 딸 시온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비교하여 너를 위로할까 너의 파괴됨이 바다 같이 크니 누가 너를 고쳐 줄소냐

(2:14) 네 선지자들이 네게 대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보았으므로 네 죄악을 드러내어서 네가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지 못하였도다 그들이 거짓 경고와 미혹하게 할 것만 보았도다

(2:15) 모든 지나가는 자들이 다 너를 향하여 박수치며 딸 예루살렘을 향하여 비웃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온전한 영광이라, 모든 세상 사람들의 기쁨이라 일컫던 성이 이 성이냐 하며

(2:16) 네 모든 원수들은 너를 향하여 그들의 입을 벌리며 비웃고 이를 갈며 말하기를 우리가 그를 삼켰도다 우리가 바라던 날이 과연 이 날이라 우리가 얻기도 하고 보기도 하였다 하도다

(2:17) 여호와께서 이미 정하신 일을 행하시고 옛날에 명령하신 말씀을 다 이루셨음이여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무너뜨리사 원수가 너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게 하며 네 대적자들의 뿔로 높이 들리게 하셨도다

 

 


 우리가 묵상하고 있는 있는 예레미야 애가는 

  이스라엘백성들이 상가집에서 불려지는 노래입니.

  이 예레미야 애가는 알파벳 22글자에 맞춘 5편의 노래입니다.


그래서 모든 1-5장까지 22절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3장은 각 문자바다 3개의 절을 만들어서 22X366절로 되어 있습니다. 일종의 운율에 맞는 노래입니다. 흔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외우기 쉽게 기억하기 쉽게 하기 이해서 일부러 히브리어 알파벳에 맞춘것입니다.


이 애가의 노래의 원래 제목은 < 어찌하여 >라는 뜻을 갖고 있지요. 원래 예레미야 애가의 히브리식 제목은 < 어찌하여 >라는 뜻을 같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패망해가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 진노를 경험하고 있는 예루살렘을 의인화 하여 마치 시온의 딸의 죽음을 노래하듯 < 슬픈 애가 >를 부르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계속 하나님께로 돌아오길 그리고 하나님 반대편으로 가던 길을 멈추어서기를 요청하였지만 유다왕과 유다백성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선택하고 결정하는 대로 행했고 그 결과 < 올것이 오고 말하고 말하것이 이루어지고 말았습니다. >

 

패망하는 유대백성들이 이방나라의 손에 넘어가는 가는 것보다 더 예레미야의 마음을 안타깝게 만들었던 것은 < 충분히 이 일들이 일어나지 않게 할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 기회를 놓쳐버렸다>는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 이면에 하나님의 진노의 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2:17) 여호와께서 이미 정하신 일을 행하시고 옛날에 명령하신 말씀을 다 이루셨음이여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무너뜨리사 원수가 너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게 하며 네 대적자들의 뿔로 높이 들리게 하셨도다

 

우리가 삶의 살면서 가장 안타까운 때는 < 경고를 받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 것과 버러질 같은 일이 일어날 때 >입니다. 그 일의 결과와 결론이 뻔히 보일 때 아직 그 일을 멈추지 못하고 돌아서지 못하는 때가 가장 안타깝습니다.

 

오늘 이 < 애가 >를 쓰고 있는 예레미야는 바로 그런 안타까운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수없이 경고하고 권면하고 전했던 그 경고가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그 안타까운 현실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께 기름부은 왕은 도망하려고 시도했으나 체포되었습니다. 제사장과 선지자들은 모두 성소에서 살해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맹렬한 진노로 이스라엘의 모든 군대와 병력을 무력화 시켰습니다. 그토록 유다백성들이 사랑했던 예루살렘 성은 철저하고 무너지고 파괴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 어찌하여 > 이런 일이.. 라고 할 만하는 그 일들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 예레미야 애가 2장에는 < 예루살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징벌 >이 어떠한 수준인지? 분명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관심의 초점은 의인화된 예루살렘으로부터 하나님께서 행하고 계신 하나님께서 주도하고 계신 이 진노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 눈으로 보고 있는 안타까운 유다의 현실을 슬퍼하며 울부짖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5가지의 현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패망의 풍경과 같은 모습입니다.

 

1) 예루살렘이 이방나라의 군대에 의해서 포위되어서 당해서 굶주림과 배고품

[2:11-12]

(2:11)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딸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 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기절함이로다

(2:12) 그들이 성읍 길거리에서 상한 자처럼 기절하여 그의 어머니들의 품에서 혼이 떠날 때에 어머니들에게 이르기를 곡식과 포도주가 어디 있느냐 하도다

 

먹을 것을 구하며 어미의 품에서 목숨을 잃어가는 아이들을 묘사하며 예레미야는 울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어찌하여 이런 참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단 말인가 !

 

2) 그러한 현실속에서 헛된 위로를 슬퍼하는 친구들을 필사적으로 위로하는 사람들의 모습

    이미 절망이 가득한 현실들 

(2:13) 딸 예루살렘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증거하며 무엇으로 네게 비유할까 처녀 딸 시온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비교하여 너를 위로할까 너의 파괴됨이 바다 같이 크니 누가 너를 고쳐 줄소냐

 

어찌하여 이 현실을 비유하며 비교할까? 그리고 어찌하여 누가 이 현실속에서 위로하며 고쳐줄수 있으랴 !

 

3) 자신들의 거짓말을 믿도록 백성들을 격려하며 예루살렘의 멸명을 서둘러 불러오고 있는 거짓선지자들의 모습

(2:14) 네 선지자들이 네게 대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보았으므로 네 죄악을 드러내어서 네가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지 못하였도다 그들이 거짓 경고와 미혹하게 할 것만 보았도다

 

어찌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에 사로잡혀 있고 어찌하여 거짓 경고와 미혹을 보고 있는가?

 

4) 세상의 조롱거리고 비웃음 거리가 되어 버린 현실

(2:15) 모든 지나가는 자들이 다 너를 향하여 박수치며 딸 예루살렘을 향하여 비웃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온전한 영광이라, 모든 세상 사람들의 기쁨이라 일컫던 성이 이 성이냐 하며

(2:16) 네 모든 원수들은 너를 향하여 그들의 입을 벌리며 비웃고 이를 갈며 말하기를 우리가 그를 삼켰도다 우리가 바라던 날이 과연 이 날이라 우리가 얻기도 하고 보기도 하였다 하도다

 

어찌하여 우리가 저들의 비웃음 거리고 되고 저들의 삼킨바 되었는가 ?

 

5) 재앙을 당한 남은자들이 낙망하여 하나님께 끊임없이 울부짖고 있는 모습

[2:18-19]

(2:18) 그들의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딸 시온의 성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를 쉬게 하지 말지어다

(2:19) 초저녁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각 길 어귀에서 주려 기진한 네 어린 자녀들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 하였도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유다의 멸망의 현실을 지켜보고 그것을 < 어찌하여 > 라는 노래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예레미야의 심정으로 바꿔서 리메이크 해서 불러 보면 이런 노래가 될것입니다.

어찌하여 이런 참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단 말인가 !

어찌하여 이 현실을 비유하며 비교할까?

그리고 어찌하여 누가 이 현실속에서 위로하며 고쳐줄수 있으랴

어찌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에 사로잡혀 있고

어찌하여 거짓 경고와 미혹을 보고 있는가

어찌하여 우리가 저들의 비웃음 거리가 되고 저들의 삼킨바 되었는가 ?

어찌하여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려야 되지 않겠는가?

어찌하여 너는 네 마음을 주의 얼굴앞에 물쏟듯 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오호라.. 나는 보았네, 나는 보고 있네 이러한 우리네 현실을

 

사랑하는 여러분

이러한 예레미야의 울부짖음과 슬픈노래가 그 당시 유다만의 현실입니까?

 

구속사적 성경해석의 고전인 반더발 성경연구라는 책을 쓴 < 반더발 >은 이 유다의 현실을 유다 나라의 타락과 패망을 보기보다는 < 교회의 타락과 패망 >을 묵상해야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은 구약의 교회입니다. 유다의 백성과 지도자들은 구약의 교회의 성도이며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예레미야의 애가는 < 타락한 교회의 이야기이며 애곡하는 교회 >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점에서 이 예례미야가 슬퍼하고 안타까워하고 있는 구약의 유다의 상황과 오늘의 교회들의 상황과 그리고 우리의 영적인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묘사하고 있는 유다의 패망의 풍경이 그래로 오늘 한국교회와 이민교회안에서 부여지는 풍경들입니다.

그리 낯설지 않은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들에 대해 예레미야의 심정으로 울고 기도하는 이들이 많이 않다는 것이 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한국교회안에 일어나는 뉴스들을 들을 때면 < 어찌 이런일이 ... >라고 생각할 만한 기상천회한 뉴스들이 많습니다. 교회안에서 그리고 교회밖에서..

 

이미 교회가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비웃음 거리가 된지 오래입니다.

이미 사람들은 교회지도자들과 목회자들을 신뢰할수 없는 사람으로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배부른 비만의 상태인 한국교회는 물이 있으나 먹을 물이 없는 먹을 것이 있으나 배고픈 영적인 현실속에 놓여있습니다.

 

세상의 문화와 세계관에 포로가 되어서 영적인 아사 직전에 놓여있습니다.

교회안에서 서로를 위로하고 서로를 치유하지만 세상을 위로하고 세상을 치유하는 일에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주의 복음과 진리의 말씀을 전해야하는 교회와 목회자들은 거짓된것들이 미혹되어 거짓된 것들만 전달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더 이상 교회를 신뢰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냥 비웃음거리가 되어 버린 것이 오래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현실속에서 우리가 정작해야할 < 하나님앞에 울어야할 참 다운 회개와 돌이킴 >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 어찌하여 ... > 라고 바라보고 만 있습니다.

저 역시도 이러한 판단과 진단을 말하고 있지만 < 당신은 이 일을 위해 뭐하고 있냐 ? > 물으면 자신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제안에 이러한 예례미야의 심정을 회복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먼저 저 자신부터... 오늘의 현실을 바로 보고 예례미야의 시선과 중심을 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예레미야의 혼자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수 없었지만 그는 최소한 그의 마음안에는 하나님의 시선과 중심으로 서 있었습니다.

그래고 계속 선포했고 계속 기도했고 계속 울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제마음에 이런 기도가 있었습니다. 너는 한해동안 우리 교회와 성도들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예례미야의 심정과 마음으로 선포했으면 기도했으면 울부짖어 보았는가? 물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회개했습니다. 예레미야는 < 계속 선포했고 계속 기도했고 계속 울었는데.. 너는 뭐했냐.. 올해도 그렇게 시간만 보내고... 매일의 현실에 집착하면 매일 헛된 감정과 마음에 주목하며 살지 않았느냐 ? > 이렇게 하나님이 저에게 물어 오시는 것 같았습니다.

 

회개했습니다. 죄송했습니다. 더 할말이 없었습니다.

제가 잘할께요 ! 하고 싶었지만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해야죠.. 다시 회복해야죠.

그것이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시닌깐요.

예레미야의 심정으로 계속 선포하고 계속 기도하고 계속 울부짖고 싶습니다.

할수만 있다면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