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가복음 13:1-13>
  • 무너질 성전을 마주하고 앉았을때 
  • 08/09/2014 새벽묵상 설교  


  • 설교문의 본문 그림은 인터넷 갈무리함 

 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마가복음 13: 1 - 13> 

제목 : <마가복음 13: 1 - 13> 무너질 성전을 마주하고 앉았을때






[ 마가복음 13장 1절 - 13절 ]

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3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조용히 묻되 

4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6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7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8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

9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로 말미암아 너희가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그들에게 증거가 되려 함이라 

10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11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12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13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제목 : 무너질 성전을 마주하고 앉았을 때  


오늘 말씀의 제목을 < 무너질 성전을 마주하고 앉았을 때 >라고 서정적으로 정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을 그렇게 서정적이거나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마가복음 13장은 소위 < 소묵시 >라고 불리울 만큼 마지막때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 배경이 바로 < 예루살렘이며 성전 >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 예언 >이라기 보다는 < 선언 >입니다. 그리고 계속적으로 명령형으로 이러한 상황과 일들이 일어날 때 우리가 어떻게 주의해야하고 두려워하지 않고 조심해야 하는지 경고하고 권면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마가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의 당부는 3가지입니다. 

< 주의해야 하라. 두려워하지 마라. 조심하라 >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과 제자들의 질문과 대답이 있었던 공간적 배경은 바로 < 성전이 바라보이는 감람산 >이었습니다. 이 감람산이라는 곳은 <성전으로 지나가는 일종의 톨게이트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특히 감람산은 성전을 훤히 다 보이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가복음 11장-12장에 <예루살렘>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유월절을 지키기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in & out>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그토록 사모하고 존중하는 < 성전 >을 보았습니다. 화려한 장식과 웅장한 돌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이 주는 영적인 상징들을 느꼈습니다. 이스라엘에 그리고 예루살렘 여전히 건재해 있는 성전을 바라보는 것 만으로 그들의 신앙심을 깊어져갔습니다. 


유대인의 신앙의 중심에는 < 성전 > 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흔히 유대인의 신앙을 < 성전 신앙 >이라고 말합니다. 


오늘도 예루살렘에 방문해보면 여전히 무너지 성전의 한 벽면인 통곡의 벽앞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고 그 벽돌 사이에 자신에 기도의 소원을 적어서 꼿아 놓고 있는 유대인들을 봅니다. 그만큼 유대인들에게 성전이 주는 상징성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토록 숭상하고 바라보았던 <예루살렘 성전> 무너질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고대 문헌인 < 유대전쟁사 >나 <요세푸스>의 기록을 보면 성전의 기초돌 하나의 길이가 무려 45규빗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 만큼 성전의 웅장함 그 자체였습니다. 성전의 존재 자체만으로 유대인들의 마음을 압도할만한 경외감을 주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대단하고 큰 건물에 대해 관심이 있었습니다. 

< 이 돌들이 어떠하면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


그러나 예수님은 <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라고 되묻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역사적으로 AD70년에 있을 <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을 선언하셨습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 성전의 돌들의 웅장함에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오직 성전을 사모하고 바라보는 신앙을 가진것이죠 >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 성전의 돌들은 무너질것이면 새로운 성전이 세워진것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으로 휘장이 찢어지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새롭고 산길이 열리는 것. 모두다 제사장이 되고 모두다 성전이 되는 그일을 꿈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옛성전을 무너져야하고 새성전이 우리의 마음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되시고 산돌이 되십니다. > 


성경은 분명히 이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로이 지어질 성전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몸이 곧 성전인 것도 말씀하시며 손으로 지은 성전을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의 이 예수님의 성전파괴의 선언은 < 옛 성전의 유효기간이 만료 되었음, Expire >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예수님의 선언을 들었던 제자들은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종종 제자들이 그들의 예상과 기대를 깨뜨려버리시는 예수님의 말씀의 놀라고 당황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나와서 감람산에 도착하여 앉아서 멀리보이는 성전을 바라보고 앉았을 것입니다. 그때 다시 제자들은 2가지 질문을 합니다. 


< 그렇다면... 예수님... 그럼 말씀하신 그 일이 언제 일어나며 어떤 징조가 있습니까 ? >라고 묻습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여전히 종말적인 징조에 관심이 있습니다. 일종의 < 종말에 대한 호기심 >입니다


사실 누구나 < 종말에 대한 호기심 > 있습니다. 종말이 언제인지? 종말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 사인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 종말에 대한 호기심이 아니라 종말에 대한 각성 > 이었습니다. 제자들의 관심과 질문은 종말이 언제인지? 그 징조가 무엇인지? 관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과 대답은 < 우리가 종말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 >에 대한 요청이며 경고 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강조점은 종말의 일어날 난리와 재난과 지진과 핍박에 대한 것들에 대해서 말씀하셨지만 그것 보다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러한 당연히 오게될 종말의 일에 대해서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행동할것인가? 어떻게 살것인가?가가 더 중요한 것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저는 오늘 말씀에 대해서 종말에 대한 우리의 각성이 무엇인가?

 종말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에 대해서 3가지로 주목해보았습니다. 


1/ 우리 앞에 놓여있는 세상의 미래는 어떻게 될것인가?

2/ 우리가 당하게 될 세상의 미혹은 무엇인가?

3/ 우리가 마주하고 서야할 세상의 미움에 대해 무엇을 할수 있수 있는가?


<세상의 미래 / 세상의 미혹 / 세상의 미움 >이라는 이 3가지의 도전앞에 우리는 서있습니다. 


1/ 우리 앞에 놓여있는 세상의 미래는 어떻게 될것인가?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이 세상의 살아오면서 세상의 뉴스를 보면서 이 세상이 안전하다고 느끼십니까?아니면 여전히 불안하다고 느끼십니까? 네 이 세상의 미래는 여전히 불안합니다. 세상에서 들려오는 뉴스의 대부분은 분쟁과 갈등 그리고 전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제 뉴스에도 미국이 이라크 반군의 거점을 공격했다는 뉴스입니다. 사실 최근에 이라크에선 반군들이 일어나서 자신의 종교를 강요하고 다른 것에 대해 무자비한 공격과 살상을 가합니다. 


어제 CNN 뉴스에 이슬람극단주의자들이 이라크 최대의 기독교도시인 카라코쉬를 점령하여 도망가지못한 모든 기독교인들을 죽이고 있다고 전했습니다.산으로 도망간  가족은 물과 음식이 없어 죽어가고...이들은 심지어 기독교가정의 아이들까지 목베어 죽이는 등의 잔혹 행위를 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긴장관계를 예의 주시하고 있습니다. 그냥 평안히 날라가던 비행기가 미사일에 격추됩니다. 





여전히 이스라엘과 하마스는 치열한 미사일공격과 서로 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상자들이 나고 서로에 대한 복수가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에는 에볼라 바이러스가 심각하게 퍼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을 우리가 어떻게 대할까요? 

우리는 이세상의 미래는 단 한번도 조용하고 평안하고 안전했던적이 없습니다. 계속 갈등과 반목이 계속되고 전쟁과 난리가 일어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이 세상의 미래 역시 그렇게 안전하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이 선언은 실제로 유대의 고대 역사를 보면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난리와 난리의 소문이 일어나고 재난이 계속되었습니다. 


로마의 네로황제가 죽은 이후에 일년 사이에 세왕이 서로 죽이고 죽고 하는 일드리 일어났습니다. 


AD 36년에 파르티아 전쟁, 헤롯 안디바와 나바테아의 왕 아레타ㅡ 전쟁과 같은 극심한 혼란의 정국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AD61년에 소아시아의 지진, 폼페이 지진, 예루살렘의 지진과 같은 실제로 있었던 대형 재난들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 이런 일들이 반드시 일어나야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다, 복음이 모든 민족들에게 먼저 반드시 전파되어야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앞에 놓여있는 세상의 미래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불안한 세상의 미래는 우리는 < 주의하고 두려워하지 말고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은 멈추지 않고 계속 전해져야합니다 > 이것이 예수님의 요청입니다. 


2/ 우리가 당하게 될 세상의 미혹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놓여 있는 쉽지 않는 세상의 미래는 우리의 신앙과 믿음을 미혹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믿음을 송두리째 흔들리게 만듭니다. 세상의 불안과 공포는 우리의 믿음 견고하게도 하지만 우리의 믿음을 흔들리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이 세상의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교사들이 우리의 마음을 미혹합니다. 

 이 세상의 쾌락과 즐거움이 우리의 마음을 미혹합니다.  

 이 세상의 불안과 두려움이 우리의 마음을 미혹합니다. 


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6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이 세상의 미래는 우리를 미혹합니다. 우리는 가만 두지 않습니다. 


우리가 교회 다닌다고 해서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우리가 교회 만 다닌다고 해서 우리의 믿음의 안전이 확보되지 않습니다. 

불안한 세상의 미래는 절대 우리의 믿음의 안전을 확보해 주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안전은 진리의 복음과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미혹되지 않으는 방법은 < 서서 진리의 띠를 띠는 것입니다. > 

그리고 < 주의하고 두려워하지 말고 조심하면서 당당히 우리앞에 놓여 있는 

신앙의 도전들앞에서 서서 말할수 있어야합니다. >


3/ 우리가 마주하고 서야할 세상의 미움에 대해 무엇을 할수 있수 있는가?


마지막날 우리가 당할 일들은 세상의 공회앞에서 잡혀서 세상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믿음이 거짓된 것이 아님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세상의 불안한 미래는 우리의 믿음을 미혹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미혹은 우리를 미워합니다. 세상의 미움이 남아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장차 공회에 잡혀서 심문을 받을 것을 선언하십니다다. 세상의 미움을 사서 애매히 고난받는 일들이 일어 납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상의 미움을 사는 일은 바로 복음을 다시 전할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잡혀서 고난당할 때 바로 그떄가 믿음과 복음을 증거하고 증언하는 기회가 됩니다. 


최근에 한국에 위안부 할머니 두분이 미 국방부에 고위 관료들앞에서 일제의 만행을 증언했다고 하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대단한 일이죠. 그 할머니들의 증언이 얼마나 미국방부의 정책을 바꾸지는 모르지만 그 할머니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놓여있는 사명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의 복음과 능력을 증언하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증인이며 증언자가 되어야합니다. 더 나아가 < 증거자 >가 되어야합니다. 


예수님의 이 종말이 언제인지? 종말의 징조가 무엇인지? 관심을 갖는 제자들이 < 종말에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지? >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바로 복음의 증인으로 복음의 증언자로 그리고 증거자로 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앞에 놓여있는 세상의 미래와 세상의 미혹과 세상의 미움에 대한 우리의 대책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것은 우리의 힘을 할수 없고 오직 성령으로 가능합니다. 

11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12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13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우리게 주어지 놀라운 은혜는 < 우리가 세상의 미움앞에 당당하게 서기만 하면 성령의 말이 말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끝까지 견디면 우리에게 구원이 주어집니다. > 


한국에 지금 교황이 방문하다고 날리입니다. 

프란시스코 교황이 그동안 좋은 이미지와 소박한 삶의 모습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도전이 되었습니다. 그의 행동과 말이 그의 삶의 내용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의 미움이 아니라 사랑을 받고 있음을 봅니다. 


왜 사람들이 교황을 숭배할까요? 

바로 교황에게서 자신들에게 없는 신적인 권위와 사랑을 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왜? 기독교안에 이런 사람이 없을까? 생각해 봅니다. 

세상이 미워하기는 커녕 할수 있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봅니다. 

바로 그것은 세상의 앞에 자신의 믿음과 신앙을 당당하게 보여줄 삶의 인격과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과 신앙은 알고 믿었지만 삶의 내용물이 없는 것이죠. 그냥 형식적이 종교적인 모양만 가진채 사람들의 감동시킬 그 어떤 것도 없는 이죠..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최소한 세상이 우리의 삶의 내용과 예수님 닮은 인격을 부러워하게는 만들어야합니다. 그것 때문에 어떤 이들은 더 미워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어떤 이들은 그것 때문에 우리를 향한 영적인 호기심과 애정를 갖게 될것입니다. 


  • <마가복음 12:28-34>
  • 사랑의 이중계명 
  • 08/07/2014

  • 설교문의 그림은 갈무리함  


 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마가복음 12:28 - 34> 

제목 : <마가복음 12:28 - 34> 사랑의 이중계명  




[ 마가복음 12장 28절-34절 ]

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저희의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대답 잘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2.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제목 : 사랑의 이중계명 

오늘 말씀은 마가복음 11장과 12장에서 이어지고 있는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몇가지 논쟁중에 하나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에 의구심을 품고 있던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이 예수님과 논쟁을 함으로 예수님이 틀렸다것을 나타내고자 하는 숨은 의도가 있는 논쟁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서 어떤 모순을 찾고자하는 숨은 동기가 있는 논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가시돋힌 질문 공세를 하고 예수님에게서 그릇된 답변을 찾기 위해 논쟁을 벌립니다. 




어제는 그 당시의 친로마의 성향을 띄고 있는 현실주의자들인 사두개인들과의 < 부활에 관한 논쟁 >에 대해서 예수님의 지혜로운 답변과 의표를 찌르는 듯한 대답을 들어습니다. 


오늘 말씀은 율법과 계명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 한 서기관 >의 대화를 토해서 < 큰 계명 논쟁 >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두개인들과 예수님 사이에 논쟁을 듣고 있던 서기관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서기관은 예수님께 첫째 계명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의 답변의 내용은 어떻습니까? 


마치 신명기에 모세가 < 쉐마 이스라엘 >이라고 말하고 신명기를 전하듯이 예수님도 < 쉐마 이스라엘, 이스라엘 들으라 >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 첫째는 유일하신 여호와를 마음, 목숨, 뜻, 힘을 다해서 사랑하는 것이다. 둘째 계명은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라고 하는 오랜 율법에서 강조되어 왔던 것을 한번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 >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강조는 각각의 계명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서 유기적으로 서로의 원인이 되고 서로의 결과가 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이러한 예수님의 계명에 대한 강조점을 지혜롭게 알아 들은 서기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 34.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


소위 <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 >이라고 하는 < 사랑의 이중계명 >이 <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고 연결되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한번더 연결시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2가지 포인트가 있다면 


1/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고 말하는 < 사랑의 이중율법, 이중계명 > 어떻게 서로의 원인과 결과가 되고 연결되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2/ 이러한 사랑의 이중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멀지 않음을 느끼는 것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율법에 충실한 유대인들은 자주 이런 질문을 하곤 했습니다. 

< 율법중에서 큰 것, 작은 것, 가벼운 것, 무거운 것이 무엇입니까?>


그래서 그러한 율법의 크기와 경중을 따지면서 율법 613개의 계명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서기관들과 유대인들은 율법의 중요성을 따지기는 잘했지만 < 율법의 본연의 의도나 정신과 원리들 >을 놓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을 때 그속에서 담겨있는 하나님의 의도와 원리들을 놓친채 그냥 형식적으로 율법의 순위를 매겨서 그것을 형식적으로 지키려고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맛있는 찐빵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앙금/앙꼬는 확인해보지 않은채 찐빵의 크기만 보고 < 우와 이 찐빵은 정말 맛있는 찐빵이야 >라고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과 같은것입니다. 실제로 찐빵의 본연의 맡은 찐빵속에 있는 팥앙꼬에 달려 있습니다



율법이나 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당시 서기관들과 유대인들은 율법의 크기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계명속에 담겨 있는 본연의 핵심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보고 겉만 그럴싸한 < 회칠한 무덥 같다고 > 하셨습니다. 바로 형식주의 외식주의 였던 것입니다. 


요즘 한국에 조금 안좋은 유행어가 있습니다. < 관피아, 철피아, >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치 마피아서처럼 어떤 자기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서 관행. 은폐, 왜곡, 거짓을 행하는 조직사회를 비꼬는 말이죠. 최근에 군대도 역시 < 군피아 >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새인들 사두개인 서기관들이 마치 < 바피아, 사피아, 서피아 >들이 이었습니다. 자신의 기득권과 관행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의 등장과 가르침이 못마땅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것이 오늘의 본문의 논쟁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이러한 공격적인 질문과 논쟁속에서 자신의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하고 계십니다. 


앞에서 우리가 오늘 말씀에서 주목해야할 첫째번째는 

1/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고 말하는 < 사랑의 이중율법, 이중계명 > 어떻게 서로의 원인과 결과가 되고 연결되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에 신명기 6장 4절-5절을 인용하시면서 < 하나님 사랑 >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시면서 < 이웃 사랑 >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가지 사랑의 계명이 바로 최고의 율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이웃사랑의 동기가 됩니다.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척도이며 표현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수 있어야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할수 있는 힘과 능력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할수 있어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사랑의 이중계명은 서로가 영향를 주고 받습니다. 

서로에게 원인이 되고 서로에게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여기서 < 마음/목숨/뜻/힘을 다한다 >는 의미는 < 자신의 전존재와 정체성의 모든 것을 을 다하여 > 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의 존재를 쏟아 붇는 일입니다. 




놀랍게도.. 이러한 사랑의 이중계명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눈으로 이 사랑의 이중계명이 실현되어 짐을 보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바로 이 사랑의 < 이중계명 > 실현되고 구현되는 현장입니다. 



처음의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이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는 완성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출발이 우리를 향한 사람으로 완성된것이죠. 거꾸로 말하면 우리를 사랑하심을 보여주심으로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증명하셨습니다. 


바로 이점에 오늘 사랑의 이중계명의 강조점입니다. 


2/ 이러한 사랑의 이중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멀지 않음을 느끼는 것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서기관이 지혜로운 대답을 합니다. 


32.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서기관을 지혜가 있었습니다. < 마음/지혜/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제물의 예배보다 더 나은 예배 >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로 사랑하는 행위를 바로 예배하는 행위로 연결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사랑의 이중계명을 <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이미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는 것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클라이 막스는 < 네가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라고 말하는 예수님의 칭찬에서 볼수 있습니다. 




과연 이 사랑의 이중계명과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연결되어 질수 있을까? 

어떻게 연관이 될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에 의해서 증명되며 마침내 그 정체를 드러냅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의 원리에 의해서 운영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의 이중계명을 요청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이 완성되고 실현되고 있는 것을 경험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것을 지켜보고 아는 자가 경험하는 나라가 아니라 

사랑의 이중계명을 실천할 용기가 있는 사람에게 가까이 와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실체가 드러나는 현장이 바로 예수님의 치유의 현장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실 때 등장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 저들을 불쌍히 여기서 저들을 민망히 여기서 >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치유가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거나 자신의 실력을 쇼업 하는 것이 아니라 < 사랑의 동기 >바로 <치유의 역사>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치유의 사건을 보면서 

하나님 나라가 이렇게 임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 치유와 회복 >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중심에는 바로 < 사랑의 이중계명 :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 >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 치유와 회복 > 일어납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바로 이 것이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입니다. 


우리가 이 사랑의 이중계명을 실천하기 시작할 때 그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랄싸한 예배 분위기와 임재의 어울리는 데코레이션을 해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소소한 일상에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 >을 다해서 사랑하기 시작할 때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우리의 사소한 관계에서 서로를 진심으로 네 몸과 같이 사랑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납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디 먼곳 외딴곳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머무는 곳이 있습니다. 

사랑이 드러나면 사랑이 보여지면 하나님 나라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랑할 마음이 생기는 순간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기에 가장 좋은 타이밍입니다.


오늘 우리안에 하나님 사랑할 마음이 생겨나고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 나라가 멀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안에 이웃을 사랑할 마음이 생겨났습니까?

바로 하나님 나라가 이미 당신안에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와 사랑의 이중계명의 관계입니다.  




  •  <마가복음 10 : 17 - 31> 
  •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 07/29/2014 새벽묵상설교 

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마가복음 10:17 - 31>


제목 : <마가복음 10: 17 - 31>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 마가복음 10:17-31 ]

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쌔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0.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22.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23.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24.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25.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26.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27.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28. 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31.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제목 : 오히려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오늘 말씀은 < 한 부자 청년과 예수님의 대화 >와 이어지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대화 >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두 대화는 질문과 답변의 형태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특별이 두 대화의 주제는 서로 묘한 연결을 갖고 있습니다.



한 부자 청년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수 있습니까 ? >라고 하는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수 있습니까 ? >라고 하는 질문입니다.


이 핵심적인 질문에서부터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하시는 핵심 메시지가 결정됩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께 갑자기 찾아온 부자 청년과 예수님을 줄곳 따라온 제자들에게 < 영생, 하나님 나라가 어떤 사람에게 주어지는지? 그리고 영생,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질문에 대답해주신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갑자가 찾아온 부자 청년은 <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갔고 >, 줄고 따라온 제자들은 < 심히 놀라고 두려운 마음으로 > 예수님을 쫓고 있습니다.





먼저 왜? 그들이 했던 질문에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그렇게 만족스럽지 못한 조금은 당황스러운 반응을 보였을까?를 먼저 생각해보아야합니다.


바로 그것은 < 그들이 질문을 했을때는 그들이 기대했던 대답이 있었을 것이다 >는 사실입니다. 부자 청년과 예수님의 대화속에서 부자청년은 아주 자신감 있게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합니다. 그러나 결국 부자청년은 예수님의 대답에 아주 자신감없이 돌아갑니다. 무언가? 예수님에게서 내가 기대하고 만족할만한 대답을 얻지 못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의 대화속에서 부자 청년과의 대화의 장면을 옆에서 보면서 자신들은 부자청년과 달리 <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르고 있다 >이 놀라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지 없이 예수님께서 제시한 대답을 듣고는 < 이해할수 없다, 동의가 되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부자청년은 예수님께 질문하고 대답하는 과정에서 그는 신앙적이고 종교적인 자신감에 가득찬 찬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자심감이 예수님께서 <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하게 했습니.


제자들은 예수님께 질문하고 대답하는 과정에서 다른 이들과 다를 자신들은 예수님의 제자로써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르고 있다는 제자로써의 자부심으로 <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하게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이들의 < 숨은 동기와 의도 그리고 기대 >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 부자청년과 예수님의 대화 ><제자들과 예수님의 대화>속에서 숨은 동기와 의도 그리고 기대를 찾는 것이 아주 재미있는 묵상포인트 , 관전 포인트가 될것입니다.

 

보통 우리가 재미있는 영화들을 볼때면 감독이 의도적으로 다음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복선>이라는 것을 깔아 놓습니다. 그래서 감독이 주고자 하는 숨은 동기와 의도 그리고 기대가 드러나도로 합니다. 그러나 쉽게 그 복선을 찾기가 힘듭니다. 대체로 무대 소품이나 등장인물을 대사를 통해서 작가가 심어 놓은 복선을 찾아 낼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대화의 내용을 보면서 구체적인 숨은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먼저 부자청년과 예수님과의 대화입니다.


오늘 본문의 부자청년과 예수님과의 대화는 마태복음 19장 누가복음 18장에도 기록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다른 복음서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이 사람은 부자이고 청년이었으며 관원이었습니다. 그는 부유한 젊은 관원이었습니다.


이 부유한 젊은 관원은 상당한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열심과 신념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서 < 달려와 꿇고 앉았습니다. > 이것은 그가 갖고 있는 < 신앙적인 열심과 종교적인 인격 >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 선한 선생님 ! 선한 랍비여 ! >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우리가 볼수 있는 것은 < 예수님을 선하다고 말하고 예수님을 랍비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달리 볼수 있는 것은 <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지 않고 있다 >는 점입니다. 바로 이점이 이 부유한 젊은 관원이 예수님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를 알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원을 주시는 주로 보지 않고 한수 가르쳐주시는 종교적인 선생으로 유대적인 훌륭한 선생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 그가 아직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구원과 영생을 이해하기 쉽지 않은 자신의 종교적인 신앙으로 구원에 다가서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인상적인 것은 < 내가 무엇을 하여야 >라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말하고 부자청년은 < 영생을 무엇을 하여야 얻을수 있는 것 >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질문을 예수님께서서 원하시는 질문으로 바꿔 본다면 < 선하신 주님이시여, 내가 당신을 믿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 >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부자 청년은 < 예수님은 누구이신지 보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하는지 >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부자 청년이 이해하고 있는 영생. 자신이 기대하고 있는 영생이 있었습니다


< 자신이 무엇을 해야만 얻을수 있는 영생, 자신이 예수 선생처럼 선함을 이루어야만 영생의 길을 알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여전히 < 율법적인 의과 율법적인 선 >을 알고 지키고 행해야만 그것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유대적인 영생관에 매여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유대교적 영생은 선을 알고 선을 행하는 것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합니다. < 은혜의 구원이 아니라 행위의 구원입니다. > 


그래서 부자 청년은 예수님에게서 구원이 주어진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예수님에게서 구원을 얻는 선함을 한수 배우고자 한수 터득하고자 나아온것입니다.


그러한 의도를 하셨던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 ? 나를 선하다 하느냐 ? 선하신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 > 이것은 예수님의 유도 질문과 같은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선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부자청년의 고백을 이끌어내기 위한 유도질문입니다. < 네가 계명을 아나니 > 라고 말씀하시면 < 십계명 >을 이야기하십니다. < 영생을 얻기 위해서 선하신 하나님이 주신 계명들 알고 지키는 것이 있지 않느냐 ? >라고 하는 일반적인 유대적 구원관에서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도된 대답, 부자 청년의 반응을 보려고 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된 대답입니다.

 

그 대답에 부자청년은 < 내가 다 지켰다 > 라고 대답합니다. 부자청년의 대답을 숨은 의도와 동기를 파악하면 다음 같이 바꿔서 말할수 있습니다.



< 제가 어려서부터 선함을 알고 선함을 지키기 위해서 십계명도 알고 지켰습니다. 그래서 이정도면 영생을 얻기에 어떻습니까? 선생님이 생각하시기에 제가 영생을 받기에 충분한가요? 이 정도면 영생을 얻기에 부족한것이 없지 않습니까? 또 제가 부자로써서 복을 받고 있는 것을 보면 아시잖습니까? >


그당시에 랍비들은 < 부자가 되면 하나님의 선함과 복이 임했다 >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부자가 되었다면> 충분히 하나님의 인정과 복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인정하는 부자로써 겉으로 보기에도 영생을 얻기에도 충분해보이고 자신 스스로도 계명을 다 지켰다고 자심감 있게 말하는 이 부자 젊은 관원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 오히려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 하시면서 예상밖의 21-22절의 말씀을 주십니다.


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22.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주셨을까요?


부자 청년이 하나님의 계명이 선한줄 알고 지키고 복은 받았지만 진정으로 영생은 이것만으로 충분치 않다고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이땅에서 물질적인 복받음이나 이땅에서 율법행함이 영생의 조건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고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 나눠주어도 하늘의 복의 기대와 만족으로 > 살수 있는 사람이 영생을 얻을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땅의 소유권을 하나님께 이전시킬수 있는 그 사람이 바로 영생을 얻을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땅의 소유에 매이지 않을수 있어야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오늘 이 본문에서 오해한다. < 예수님은 부자를 싫어하시는가? 예수님은 우리가 부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는가? 그렇다면 예수 믿는 사람은 항상 가난하게 살아야하는가 ? >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당시 유대인들이 부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오해가 생깁니다.


오늘 본문에도 마치 예수님께서 부자를 아주 부정적으로 보는 것처럼 보입니다. < 재물이 있는자나 부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 마치 약대가 바늘귀에 나가는 것이 더쉬울만큼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어렵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23.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24.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25.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바로 이 본문은 마치 < 부자들을 당황스러게 하거나 부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을 하시게 되는 예수님 당시의 유대적인 배경을 이해해야합니다. 그당시 유대인들은 재물이 많고 부자가되는 것을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자가 되고 관원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영생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의 부자들은 악착같이 부를 모아야서 사람들에게 자신이 부자인 것을 자랑했습니다. 그것으로 자신의 종교적인 신앙이 이정도 된다고 생각하는 교만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 부자가 되는 것은 자신이 더 율법적인 구원에 가까워진다고 생각하는 사회적인 통념 종교적인 관념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시대적인 상황을 알고 있는 예수님께서 그 시대를 일종에 풍자한것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일종의 과정법으로 그 시대의 부자들에게 충격요법으로 < 약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만큼 어렵다 >라고 말한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예수님의 이 충격적인 선언이 조금 과하다 생각해서 <약대>라는 히브리어 단어 < 카멜론>을 다른 비슷한 발음인 < 카밀론 >으로 바꾸어 발음했습니다. < 카밀론 >이라는 뜻은 < 밧줄 >이라는 뜻입니다. < 밧줄이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 >이라고 바꾸어서 읽었습니다.

 

실제로 부자의 의미는 < 가진자, 잘사는 사람 >의 의미보다는 < 하나님 나라보다는 이땅의 소유에 집착하는 자 >라고 볼수 있습니다. 여전히 이땅에 소유의 집착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소유나 복을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게 들어갈수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 찾아온 부자 청년이 바로 그런한 사람의 대표적인 모습니다.

 

이러한 부자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에 대해서 충격적인 선언을 들은 제자들은 두가지 마음이었습니다. < 아니 이럴수가? 그렇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르는 우리는 해당사항이 있는 것 아닌가? 아니야 더 많은 보상이 있을 거야 ? >하는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숨은 동기와 의도 그리고 기대로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말합니다. <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수 있습니까?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는데 ... >라고 말합니다.


그러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27.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바로 하나님의 구원을 우리가 무언가 해야 얻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얻을수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부자 청년과 제자들의 공통점은 < 영생과 구원을 위해서 무언가 해야... 무언가 보여주야 얻는다고 하는 유대교적 이해>를 벗어나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구원의 조건은 인간의 조건이나 가치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다 하시는 놀라운 은혜이면 놀라운 능력입니.

 

그래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삶은 <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31.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무언가를 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전적인 능력에 달려 있는 일입니다.

 

그 당시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가족 중심의 유대교 공동체를 포기하고 그들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위해 가족을 뒤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육체적인 자족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가족의 일원으로 영접될것입니다. 그 결과 핍박과 박해가 주어지지만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복도 주어집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놓여있는 기대이며 보상입니다. 현세에서 하나님의 나라 백성과 가족이 되는 보상이며 내세에서는 영적인 부요함에 참여하는 영생을 보상받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것이 있다면..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그러나 많은 첫째들이 말째들이 되고 말째들이 첫째들이 될 것이다. 그릇된 보상의 기대에 대한 경고입니다. 또한 자동적으로 첫 번째 자리를 확보하지 못한다고 하는 분명한 선언입니다. 

 

오늘 말씀을 4가지로 정리해보면 ...

 

1/ 영생과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조건과 가치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 영생과 하나님 나라는 인간 스스로의 선함, 부요함, 완전함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2/ 영생과 하나님 나라는 소유권을 이전하는 것이며 소유권 포기를 의미한다.

- 재물에 매이지 않고 재물에 대한 관점을 전환을 요구하신다. 

-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얻는 자는 내것을 내것으로 주장하지 않으려 한다.


3/ 영생과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세상적 기대를 거부하고 거절한다.

- 무엇을 하여야 .. 무엇을 얻을수 있습니까? 라고 말하지 않는다. 

- 누구를 믿어야 됩니까? 말한다. 


4/ 영생과 하나님 나라는 세상적인 우열의 순위와 관련하지 않는다.

- 율법의 완벽함 / 부자의 축복 / 순서상의 먼저

 



오늘 본문과 관련한 찬양 이야기 

찬 94장 주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주예수 보다더 귀한것은 없네 / 영어 가사 / 해설


I’d Rather Have Jesus.(주 예수 보다 더 귀한 분은 없네) 영어가사해설

이 찬송의 가사는 1922년도에 Rhea F. Miller(밀러) 부인에 의해 쓰여졌지만, 1946년 이후 줄곧 빌리 그레이엄 전도팀과 함께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미국의 사랑받는 복음 가수’(‘America’s beloved gospel singer’)로 유명한 George Beverly Shea(쉬어)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답니다.

 

Shea가 주일아침 예배를 위해 준비하던 중, 어머니의 피아노 앞에서 우연히 발견된 이 가사에 멜로디가 붙여져, Shea의 나이 21세 때, 처음으로 공중 앞에서 불러진 후부터, 이 곡은 인생에서 자신의 신앙적인 결심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찬송(Signature Song)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답니다.

이제 그 내용을 통해 정말 고귀한 신앙간증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I’d Rather Have Jesus.(난 차라리 예수님을 가지고 싶다오.)


1. I’d rather have Jesus than silver or gold;

 I’d rather be His than have riches untold;

I’d rather have Jesus than houses or lands;

 I’d rather be led by His nail-pierced hand

  금이나 은보다 난 차라리 예수님을 가지고 싶다네. 

엄청난 부를 가지는 것보다 오히려 주님의  것이 되고 싶다네. 

큰 집들과 넓은 땅을 가지는 것보다 난 주님을 가지고 싶다네. 

오히려 주님의 못자국 난 손으로 이끌림을 받으려네.


<Refrain>Than to be the king of a vast domain,  

Or be held in sin’s dread sway;

I’d rather have Jesus than anything  This world affords today.   

<후렴> 넓은 영토를 지닌 왕이 되는 것보다, 

끔직한 죄악의 힘에 사로잡히는 것보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난 예수님을 가지고 싶다네. 

이 세상은 오늘만 지나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라네.

 

2. I’d rather have Jesus than men’s applause; 

 I’d rather be faithful to His dear cause;

I’d rather have Jesus than worldwide fame; 

 I’d rather be true to His holy name    

   사람들의 칭송을 받기보다 차라리 예수님을 가지고 싶다네. 그 분의 소중한 큰 목적에 충실하고 싶다네. 나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유명한 명성보다 오히려 주님과 함께 하고 싶다네. 그 분의 거룩한 이름 앞에서 진실되기를 원한다네.

 

3. He’s fairer than lilies of rarest bloom; 

 He’s sweeter than honey from out the comb;

He’s all that my hungering spirit needs;  

 I’d rather have Jesus and let Him lead   

   그 분은 진귀하게 피어나는 백합보다 더 순결하시다네. 벌집에서 따온 꿀보다 더 달콤하시다네. 주님은 내 갈급한 심령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라네. 나는 차라리 주님과 함께 하려네, 그 분이 날 인도하시도록 하려네.




낙타냐 밧줄이냐, 바늘귀냐 '침공문'이냐?


     "내가 다시 자네들한테 말하네만, 낙타가 바늘귀(원문: 바늘구멍)로 통과하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왕국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쉬우이!" (마 19:24 사역)    



예수님이 부자의 구원/영생 문제에 관해 말씀하신 마태복음서 19:25, 마르쿠스복음 10:25, 루카복음 18:25 등은 모두 거의 같은 문장입니다.


그런데 교계 일각에서 낙타는 본래 '밧줄'이라야 더 걸맞고, 바늘귀는 '침공문'(針孔門)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어 왔습니다. 


전자의 주장은 아람어에서 낙타 즉 '가믈라'(그리스어의 '카밀로스'에 해당)라는 낱말이 밧줄이라는 뜻도 있으니까 문장의 어감 상 밧줄이 더 어울린다는 관점에서죠. 


또 후자는 본래 예루샬렘에 침공문이라는 이름의 좁은 문이 있었다든지 광야에 낙타 한 마리도 어렵사리 통과하는 골짜기의 협곡이 있다는 의미에섭니다.  

그런 견해들을 한 번 따져 보기로 하지요.


중요한 것은..성경학자들이나 독자들의 느낌이 아니라 과연 예수님이 본래 어떤 의도로 말씀하셨나 입니다. 


우선, '밧줄'이라는 견해는 상당히 일리는 있어 보이지요.

    1. 위 세 구절 모두 낙타(약대/camel)가 그리스어 원문에 '카멜로스'로 돼 있습니다. 그런데 후기의 그리스 사본 몇 가지는 카멜론(대격/목적형) 대신 '카밀론'(밧줄/거룻줄: 배를 나루에 잡아 매어놓은)으로 돼 있습니다.

    2. 공교롭게도 아람어 성경 역본인 신약 '페쉬타'는 아람어 '가믈라'(굵은 밧줄)로 돼 있어 이 역시 은근히 '밧줄' 쪽 손을 줍니다. 그래서 아람어에서 번역한 성경인 '람사' 역을 비롯한 일부 소수의 번역들이 '밧줄' 설을 따르고 있습니다.

    3. 바늘 가는 데 실 간다는 말도 있듯, 상식적으로 낙타보다는 밧줄이 덜 우스꽝스럽고 더 조화되고 하모니를 이룬다는 느낌입니다. 게다가 낙타의 털실로 짠 밧줄이라는 주장까지도 있습니다. ..

그러나(이 '그러나'가 문제지요)..


'밧줄' 쪽을 지지하는 가장 초기 사본들은 5세기 경의 아르메니아/그루지야 사본(둘 다 번역판)들입니다. 대문자 사본(949년)도 있고, 비잔틴 전승의 소문자 사본들(13,59,124,130,437,472,543)도 있습니다. 대부분 서기 1000년으로 꺾힌 뒤 형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설의 특징을 좀 살펴 보면..


첫째로, '밧줄'로 번역된 번역판은 매우 희귀합니다. 무수한 원어학자들/성경학자들이 연구해 옮긴 대부분의 성경 번역들이 '낙타'로 돼 있습니다. 

  

둘째로, 수많은 성경원문 사본들 중 극소수 사본만이 이 설을 뒷받침합니다.


셋째로, 그 사본들조차 퍽 후기의 것들입니다.


넷째로, 신약사본들이 희귀하던 중세 교회사 초기에 몇몇 '교부'들의 빈약한 추정들이 그런 설을 북돋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리게네스의 '카테나' 단편(마태 19:24), 알렉산드리아의 퀴릴로스(마 19:24 주석 '파트릴로기아 그레카'(=그리스 교부 문서) 72.429D), 테오퓔 투스(마 19장. '파트릴로기아 그레카' 123.356D) 등이 그것이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서 윗 구절에서 '더 쉽다'는 의미의 그리스어 낱말 '유코포테로스'의 원형 '유코포스'는 우선적으로 "가벼운 수고로도"라는 뜻입니다. 분명히 어떤 산 존재를 뜻합니다. 즉 밧줄 같은 무생물엔 영 걸맞지 않는 뉘앙스의 낱말이지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침공문?


이제 크게 두 번 째로..윗 구절 후반부의 바늘귀 대신 주장돼 온 '침공문'설을 생각해 보렵니다.


이것은 고대 예루샬렘에 '바늘귀'(=바늘구멍)란 이름의 작은 문이 있었다는 주장입니다. 그 문으로는 낙타가 지나가려면 짐을 다 내리고도 구부정하게 구부려야, 심지어 무릎을 꿇어야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통과하기 어려운 문이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광야의 협곡에 낙타 한 마리도 통행하기에도 비좁은 지점이 있었다는 말과도 통합니다. 


역시 그럴 듯한 주장이지요. 이 학설은 안셀무스, 토마스 아퀴나스 등이 주장합니다. 또한 외경의 하나인 소위 '페트로 복음서'에 따르면 페트로가 하나님께 그런 권능이 있으심을 보여 주려고 어떤 '대문'을 초자연적으로 확장시켰다는 다소 황당한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문이나 그 정도의 협곡이 있었는지, 또 예수님이 특별히 그 곳을 집어 말씀하셨는지는 역사적으로 전혀 입증되지 않고 있습니다!  

위 두 가지 설에 대한, 매우 중요한 반증이 하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원 의도와도 간접 연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대 유대의 라삐 문서(rabbinics)에 이와 유사한 전통적인 과장법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바빌론 포로기 때 형성된 것으로 알려진 유대 외전의 하나-바빌론 탈무드 '바바 메찌아'(중간대문이란 뜻)에 다음 구절이 나오지요.


    라삐 쉐 이 라삐 아므람에게 말합니다: "아마도 님은 '폼베디타'(현 이라크에 있던 고대 바빌론의 도시. 한 유대인 학파의 본거지)파의 한 분이신가 봅니다. 코끼리를 이끌어 바늘귀로 통과시킬 수 있다는." 

불가능을 뜻하지요!


그밖에도 같은 문서의 38b에도 "코끼리를 바늘귀로 통과시킬 수 있는 사람"이란 말이 있습니다. 같은 문서 '베라코트' 55b에도 "그들은 한 사람에게도 황금 종려나무, 바늘귀로 통과하는 코끼리를 보여 주지 않는다"란 구절도 있습니다.

비슷한 과장법이 폭 넓게 유포돼 있다는 얘기지요.



그리스에는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다섯 마리 코끼리를 한 쪽 팔 아래 숨기는 게 더 쉬울 것이다."


로마 시대엔 이런 속담이 있었습니다. 

"한 마리 메뚜기가 코끼리를 낳는 게 더 쉬울 것이다."


그러므로 정말 얼토당토 않은 코끼리 비유보다는 예수님의 낙타 비유가 오히려 훨씬 덜 과장돼 있다고 할 수 있지요!


단지 문맥 상의 조화를 위해 '밧줄' 설을 끝내 고집한다면, 예수님은 우스꽝스런 과장이나 유머 감각이 전혀 없으셔야 한다는 강압적인 의도도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다양한 말씀에서, 분명히 그분에게도 과장법도 유머 감각도 있으셨음을 우리는 느낍니다. 


다음을 보십시오.

    "눈먼 이끔이들, 그대들은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구나!" (마태 23:24)

사람이 낙타를 통째로 삼키다(!)니..이것은 과장법이 아니던가요? 또 은근히 신랄하고도 유머스럽지 않나요? 따라서 맨 처음 전술한 낙타-바늘 은유와 이 낙타 은유와는 거의 전혀 모순된다거나 불균형을 이루지 않습니다.


    주님의 원 의도


이제 끝으로..우리는 다시 한 번 위 말씀에서 예수님의 본디 의도를 짚을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선, 부자의 자기노력으로 천국 입국이 불가능함을 이 과장법으로써 극단적으로 표현하십니다. 좀 더 보편적으로..사람으로서는-사람의 행위로서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마 19:26A). 


따라서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뤄짐을 반증하고 계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으로서는 불가능도 가능해짐을 곁들여 강조하십니다(마 19:26b, 창 18:14 참조).


전자마술사들은 낙타를 '액화'해 바늘귀로 통과시키는 것을 보여 준다고 합니다. 저 유명한 동화/영화-'윌리 원카의 초컬  공장'은 통통한 말썽꾸러기 어린이를 전자 원심분리기 비슷한 기계에다 넣고 초컬  재료처럼 순식간에 '분해'시켰다가 재생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불필요한 우화적 기적보다는.. 

실제로, 예리코의 자캐우스(  19:1-10), 아리마테의 요 (마 27:57)과 같은 거부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음을 입증하셨습니다. 또 행전에 나타난 초기교회 시대에도 그런 부자들이 있었습니다(행 4:34, ).


하지만..젊은 관원/율법사/부자는 슬기에 있어 영생의 비결에 근접했고 예수님이 제자의 한 명으로 초청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넘치는 가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 주고 따르라는 한 마디에 낙담해 슬피 돌아갔습니다. 

즉..그는 그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간곡한 권고로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불가능한 '낙타'였던 셈입니다! 


고기잡이 배와 부친까지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던 일부 제자들과는 무척 대조적인 모습이지요. 

그 젊은 관원/재벌은 왜 영성을 얻는 데 실패했을까요? 


재물의 신 맘몬을 숭상한 탓이지요. 맘몬 신을 끝까지 놓치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보다는 맘몬 신을 선택한 것입니다. 역시 선택이 극히 중요해지는 대목입니다. 


주님이 이 점에 대해 참으로 적절한 경구를 주셨습니다.

    "아무라도 두 주인을 섬길 순 없소. 한 쪽을 미워하고 다른 한 쪽을 사랑하든지 한 쪽을 소중히 여기고 다른 한 쪽을 무시하게 되오. 그대들은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가 없소!" (마 6:24 참고:   16:13)


미련한 부자는 자신을 위해선 축재(蓄財)를 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는 풍요롭지 못한 사람이었지요(  12:21). 

 

성경은 거듭거듭 부자가 구원받기 어렵다는 말씀들을 합니다. 또 부자가 되려는 탐욕을 품지 말라고 합니다(팀A=딤전 6:9). 

그런 한편,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을 잘 섬기는 (졸부 아닌) 거부도 있었음을 밝혀 줍니다.


그럼 도대체 우리더러 어떡하라는 말일까요..?

우리는 먼저 가난이 모든 성도를 위한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라는 생각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 모두가 모자람과 결핍이 아닌 풍요를 누리길 바라시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영광 가운데 풍요를 따라 우리의 모든 것을 채우시는 야웨 이레-늘 마련해 주시고 예비해 주시는 위대한 공급자이십니다. 아브라함의 모든 복이 예수 크리스토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 모두가 거부가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 중 남달리 큰 재물을 일종의 은사로서 누릴 수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거듭나기도 했으려니와 맘의 폭도 넓어 복음을 위해 성도와 함께 늘 나눠 주길 즐기고 좋아 하는 사람들을 가리키지요. 드물지만 우리 주변에 그런 선한 부자들이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선 목적을 내세우면서 속으로는 지구촌 정복을 뀌하는 세상 비밀집단에 연계됐기에 자선가 생색이나 내고 나라의 면세혜택이나 누리고 이름과 '자선기금'을 내 놓는 거부 명사들을 의로운 크리스천 부호들과 혼동하면 안됩니다.  


그리고 베스트셀러나 '줄줄이 집회'로 졸지에 돈방석에 앉은 교계 명사들, 헌금을 받아 챙겨 수백만불 짜리 호화주택에 살면서 호화 자동차를 굴리는 텔리밴젤리스트들은 정말 천국에 갈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그렇게 사는 걸 알면서도 계속 헌금을 퍼 부어 주는 교인들도 문제고)!    


우리는 다  시대의 바르질래(슈무엘B=삼하 17:27-29, 19:31,32, 왕들B=왕하 2:7, 에즈라 2:61, 네헤미야 7:3) 같은 슬기로운 부자가 될지언정, 다 을 냉대한 (아비가일의 전남편) 나발(슘B 25:2, 5-13, 18-34), 어리석은 졸부의 비유(  12:16-21)처럼, 또는 맨날 잔치하면서 라자로에겐 찌꺼기나 먹이던 부자(  16:19-31)처럼 미련한 거부는 되지 말아야 합니다.

 

(출처: http://truthnlove.tistory.com/entry/낙타와-바늘귀 )








 


  • <마가복음 9:1-13>
  •  저희가 이해하지 못했던 영광스러운 고난
  • 07/24/2014 새벽묵상 설교 


@ 설교문중에 그림은 인터넷 갈무리함 


제목 : <마가복음 9: 1 - 13> 저희가 이해하지 못했던 영광스러운 고난



[마가복음 9:1-13]

1.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3.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만큼 심히 희어졌더라

4.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나타나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거늘

5.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6.이는 저희가 심히 무서워하므로 저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함이더라

7.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8.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 뿐이었더라

9.저희가 산에서 내려 올 때에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10.저희가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11.이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2.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13.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임의로 대우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제목 : 저희가 이해하지 못했던 영광스러운 고난

 

오늘 말씀 마가 복음 9장은 우리 잘 아는 < 변화산에 예수님의 제자 3인방 >과 함께 올라가서 거기서 주님이 받으실 고난과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여전히 제자들은 그 놀라운 관경을 목격하면서도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흔히 오늘 본문을 <변화산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먼저 주목해야할 사실은 이 변화산 사건이 언제 어디서 있었느냐 ?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마가복음 91절에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자들도 있느니라 >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조금더 정확히 번역하면 < 여기 서 있는 자들 중의 몇사람은 죽기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음을 또는 임하여 있음을 볼자들도 있느니라 >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강조하게 위해서 쓰여진 시제는 < 목적격의 완료 능동 분사 3인칭 단수>가 쓰여졌습니다. 


실제로 오늘 마가복음 91절은 변화산 사건이전에 주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앞절에 마가복음 827절에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있었던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함께 연결해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 주는 그리스도 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하는 이 놀라운 복음 선언, 복음적 고백에 대해서 예수님도 자신이 숨겨두었던 고백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 여기 있는 자들중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했음을 느끼는 자들.. 아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 이것은 예수님의 선지자적 선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의미 >와 제자들이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의미 >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을 본다 >는 개념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공생애의 사역을 통해서 병자들을 치유하고 죄인들에게 죄사함을 주는 것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하나님 나라의 실현과 도래를 의미합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가장 결정적인 방식은 바로 < 예수님의 고난 받으심과 죽음 그리고 부활 >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생각하는 <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의미 >는 다분히 정치적인 것이었습니다. 로마의 지배에서 해방을 의미하며 그들의 해방자로써의 메시아의 역할을 기대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이 이땅에오심으로 이미 실현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왕적 통치가 이미 예수님을 통해서 실현되고 있으며 사탄의 왕국을 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하나님 나라의 완벽한 다스림이 시작되었고 승리가 선언되는 그런 놀라운 사건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나라가 겨자씨처럼 볼품없이 눈에 금방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 계속 자라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식해야합니다.

 

참 재미 있는 것은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제자들은 모습속에서 오늘 그들처럼 예수님을 따르고 믿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많이 봅니다. 솔직히 제자들의 모습들은 황당하기 보다는 어쩌면 우리의 신앙과 너무도 닮아 있어서 정겹기도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보여주신 놀라운 기적이 보았음에도 여전히 믿음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대해서 정확히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보여주신 놀라운 일들에 대해서 자기식으로 믿고 이해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들은대로 살지 못하고 자기가 아는대로 살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놀라운 신앙고백은 있었지만 그 고백에 어울리는 삶의 결단은 없었습니다.

 

믿음의 과정은 바른 고백과 정확한 이해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과정은 바른 고백과 정확한 이해위에 믿음의 행동이 있어야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럴싸한 고백은 있었지만 예수님의 복음,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에 대한 이해력이 떨어졌습니다. 그러니 어떠한 믿음의 행동도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변화산에 사건에서 제자들이 한일은 그 관경속에서 여전히 < 두려워하고... 초막셋을 짓겠다... 진짜 엘리야는 언제 오느냐 ?>라고 하는 그런 황당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자기들을 변화산으로 데려가셔서 그 놀라운 관경을 보여주셨는지? 그 변화산에서 예수님은 어떤 분인지?를 눈으로 목격하게 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고 그 변화산 사건이후에 내일 본문이지만 < 악령에 들린 소년을 고치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는 제자들의 믿음의 행동 >이 이어집니다.


믿음은 놀라운 고백만큼이나 정확한 이해와 그때 따르는 행동이 중요합니다.

 

최근에 나오는 책중에 참으로 인상적인 책이 있습니다.

카일 아이드먼 < 제자는 행동한다. aha 법칙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카일 아이들먼 미국 켄터키 주 루이빌에 있는 사우스이스트 크리스천교회의 교육목사이며 [팬인가, 제자인가], [거짓 신들의 전쟁]의 저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입니다.

깨달으라, 정직하라, 행동하라!!

더 이상 믿는다고 말만 하지 말라
진짜 제자에게는 반드시 변화된 삶이 나타난다

이제 그만 읽어라이제 그만 구경하라
이제 그만 말하라이제 그만 놀아라!
행동할 때가 되었다!


많은 이들의 삶에서 아하’ (AHA, 각성 Awakening, 정직 Honesty, 행동 Action의 첫 글자를 조합해서 저자가 만든 단어)가 일어나지 않는 까닭이 바로 그것 때문이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깨닫게 되는 놀라운 사실은

제자는 더 이상 믿는다고 알고 있다고 고백만 하지 말고 그 믿고 고백한데로 살아내는 사람입니다. 제자는 변화산에서 머물러 있는 것으로 도취되어서 그곳에 머물기를 좋아하는 것에 멈추지 말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그 일에 이루는 것이 중요한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에 소위 < 변화산 변형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왜? 예수님께서 이 소위 3인방 베드로 <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을 데리고 산에가셔서 예수님이 어떻게 변화되시는지? 예수님이 누구와 함께 있는지?를 보여주셔야 했을까?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 마가 복음 92절 에 <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고백이 있었던 엿새후에.. 그리고 가이샤랴 빌립보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산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갑니다. 아마다 그때가 초막절이 가까운 때였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라고 급하게 뭔가 그날의 감흥을 말하면서 < 초막 셋을 짓겠다 >고 하는 말을 보면서 아마도 < 초막절 전 >이 였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생각합니다.


그러한 정황을 고려할 때 왜? 예수님은 제자들의 데리고 가셨으면 왜? 예수님은 자신의 변형된 모습을 보여주셨으며 왜? 성경의 많은 인물중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했을까?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바로 그것은 예수님은 그곳에서 제자들에게 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 자신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영광 >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오늘 이 변화산 사건은 마치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로 올라운 < 시내산 > 사건과 아주 비슷합니다. 출애굽기 24장을 보면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엿새후에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시내산에 오를 때 3사람을 데리고 갑니다. < 아론 나답 아비후 >를 데리고 갑니다. 오늘 본문에도 3명의 제자들 대리고 갑니다. 그리고 임재의 구름이 등장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학자들은 < 모세 모형론 >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모세에게 시내산에 십계명을 주시고 그 영광된 하나님의 임재의 현장을 보여주고 모세의 얼굴이 빛이 나는 경험을 하게 해주십니다.

 

오늘 이 변화산 사건은 구속사적 성경해석으로 이해해 볼 때 < 신약의 시내산 사건 >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모세의 출애굽 사건에 중심에 시내산이 있었듣이 신약의 예수님의 구원사건과 연결고리 연할 하고 있는 것이 바로 변화산 사건입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 두 사람의 등장이 주는 의미는 구약의 대표자, 한사람은 구원의 대표자, 한사람은 선지자의 대표자 역할을 한 두사람이 예수님과 어울려 있는 모습을 통해서 구약의 메시야 예언이 이제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고 있으면 동시에 과거의 모세의 역할, 엘리야의 역할을 예수님이 동시에 감당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과 사건을 눈으로 보았던 제자들의 반응은 당황스러움과 두려움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은 뭔가 이 느낌을 말해야 하기에 < 초막셋을 짓겠다는 어이없는 발언 >을 합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대한 고백중의 하나가 아니라 <그의 오해에서 비롯된 발언>입니다. 베드로는 대단한 고백도 잘 하지만 대단한 실언도 잘합니다. 나머지 두 제자는 여전히 심히 두려워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소리가 들립니다.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희 말을 들어라 >는 소리가 들입니다. 이장면은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과 비슷합니다.


그때 아주 인상적인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8절에 <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 뿐이었더라 >

저는 < 오직 예수와 자기들 뿐이었다라 >는 대목이 인상적입니다.

결국에는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 오직 예수와 우리 자신들 >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인 오직 예수와 그 믿음대로 제자의 삶을 살기로 결단하는 우리 자신들...

 

예수님의 보여주신 변화산의 모습을 잠깐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변화산의 장면의 도취될 즈음에 그리고 제자들이 여전히 예수님의 메시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10절 저희가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11절 이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제자들은 < 부활이 무엇인지 ? 엘리야가 누구였는지 ? >모르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엘리야의 역할을 했다는 말라기의 예언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의 가장 큰 의문은 < ? 메시야가 고난받고 죽어야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숨은 욕심은 < 고난없이 영광 >을 취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 고난없이 영광 >을 취하고 싶은 마음은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 고난없이 영광 >을 누리는 것은 우리안에 < 쉽게 무너질 믿음 >만 만들어 냅니다.

 

여실히 제자들의 모습에서 < 고난없이 영광 >을 구하는 모습을 봅니다.

아무런 능력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는 믿음이 참믿음이 아니라 거짓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 저들이 알지못했던 영광스러운 고난 >에 대해서 말씀해고 계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오래했다고 교회 오래 다녔다고 복음의 말씀을 많이 들었다고 다 알고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도 많은 부분에서 우리는 제자들처럼 모르고 있거나 오해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놀라운 고백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있다면 우리가 바르게 이해하고 바르게 믿는 것입니다. 오늘 변화산의 사건은 베드로의 가이사랴 빌립보의 고백이후의 사건입니다. 그 이후에 변화산이 주는 의미는 우리가 어떤 영광스러운 고난에 참여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제자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변화산의 어떤 신기한 해프닝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주님의 고난과 부활에 참여할 때 주어질 영광스러움이 무엇인지?을 알려주고 말씀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말씀을 핵심주제이며 목적입니다







  • <마가복음 6:45 - 56> 
  • 당황스러운 일 당연한 믿음 
  • 07/17/2014 새벽큐티 설교 

@ 설교문의 그림 인터넷 갈무리함

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마가복음 6:45 - 56>


제목 : <마가복음 6: 45 - 56> 당황스러운 일 당연한 믿음


[6:45-56]

(6:45)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6:46)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6:47)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6:48)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6:49)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

(6:50) 그들이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

(6:51)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6:52)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6:53)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6:54)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

(6:55)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 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다는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째로 메고 나아오니

(6:56)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제목 : 당황스러운 일과 당연한 믿음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 오병이어 /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5천명을 먹인 놀라운 사건이후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모습과 제자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일명 < 오병이어 그 이후 >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 오병이어 >라는 놀라운 이적과 사건이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먼저 배를 타고 < 건너편 벳새다 >로 보내십니다. 여기서 < 건너편 벳새다 >라는 표현은 정확한 번역은 아닙니다. <건너편 벳새다>가 아닌 < 벳새다 건너편으로>라고 번역해야합니다.

 

벳새다는 갈릴리 호수의 북동쪽 해안 지역에 있고 그 < 벳새다 건너편으로 >간곳은 오늘 본문은 < 게나사렛 땅 >으로 가셨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갈릴리 호수의 북서쪽에 있는 가버나움을 포함한 넓은 지역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예수님은 너무다도 파격적이고 놀라운 < 오병이어 >의 일이 일어난 훈에 먼저 제자들을 그 자리에서 떠나도록 보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조용히 산으로 올라가 기도하십니다.


(6:46)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볼수 있는 의문이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그렇게 급히 서둘 듯이 제자들을 먼저 보내야했을까

왜 예수님은 오병이어 사건이 있은 이후에 서둘러서 아니면 

마치 사역을 잠시 멈추듯이 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셔야만 했을까?


오늘 이 짧은 2구절속에 담겨있는 의미들을 묵상해봅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해볼수 있는 것은 이 < 오병이어 > 사건은 그것을 눈으로 목격했던 사람들에게나 그리고 그 사건을 실행하는데 사용되었던 제자들에게나 어떤 의미였을까?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 < 오병이어 > 사건은 그것으로 눈으로 목격한 사람들에게나 제자들에게나 가히 상상할수 없는 놀라움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같은 일들이 들이 눈앞에 벌어졌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믿음으로만 상상할수 있고 이해될수 있는 일들이 보았습니다.

믿기지 않을수 있는 파격적이고 획기적인 사건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나 제자들이 한번도 보지 못한 방식으로 그들 오천명을 먹이셨고 심지어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한끼 식사>를 해결해주셨습니다. 


그리고도 12광주리가 남았습니다. 그것을 보았고 그것을 생생하게 목격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이 오병이어 사건은 그 이적을 행하신 예수님이나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사람들의 환호과 관심을 받기에 충분한 사건이었습니다


사건은 순쉽간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퍼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도 보았고 예수님이 무엇을 할수 있는지도 보았습니다.

 

늘 먹을 것에 굶주려 있는 이스라엘 사람에게 값이 빵을 얻을 수 있는 기회는 예수님께 찾아오는 것이었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면 빵한조각 얻어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이 < 오병이어 >의 기적에 도취될수 있는 제자들에게 먼저 배를 태워 보내십니다. 그리고 자신은 <기도의 자리>로 들어가십니다.

 

저는 이 대목을 묵상하면서 <? 예수님은 기도하러 가셔야만 했을까? >을 생각하면서 본문에는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예수님의 탁월하신 중심과 동기를 옅볼수 있습니다.

 

<오병이어>사건이후에 사역의 영광을 자기가 취하지 않으시고 사역의 결과에 도취되어 있지 않고 사람의 인기와 환호를 즐기지 않으시는 예수님. 어떤 놀라운 사역의 결과가 있든지 간에 자신의 개인적인 기도의 자리로 나아감으로 그 본질을 놓치 않으시려는 예수님의 이면의 중심을 한번 옅볼수 있습니다.


항상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도 사역의 마무리도 <기도>있다는 것을 배웁니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어떤 사역적인 전환점을 이루어질 때마다 < 기도하러 가신 예수님. 기도하셔야만 했던 예수님 >에 대해서 간결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배워야하는 예수님의 기도생활의 모범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러한 짤막한 < 오병이어 그후>를 기록한 후에 오늘 본문 2가지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밤사경 곧 새벽 3시즈음에 파도치는 바다 위를 걸어 오시는 사건과 아무데나 예수님께서 들어가시는 마을이나 도시나 촌에서 예수님은 옷가에 손을 대기만 해도 나음을 입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여 묵상할수 있는 대목은 예수님을 유령으로 보고 두려워서 당황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시는 예수님은 음성과 어쩌면 의도적으로 제자들의 심정으로 기록하고 있는 52절의 말씀입니다.

 

(6:52)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배를 타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3가지로 당황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들은 예상치 못한 파도가 일고 있는 상황에... 예상치 못하게 물위를 걸오시는 유령같이 보이는 예수님의 모습에.. 그리고 예수님이 오셔서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파도를 잠잠케 하시는 능력에 당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당황하셨습니다. 무엇에 당황하셨느냐 ?

그 놀라운 오병이어 사건을 경험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 놀라운 일을 잊어 버리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해져 있는 <제자들의 마음과 믿음>에 당황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한국에 게그프로그램에서 유행했던 유행어가 있습니다.

< 당황하지 않고.. 00 하면서 끝 >이라는 용어입니다. 한번 들어 보셨는지요?

개그콘서트라는 프로그램에 < 깐죽거리 잔혹사 >라는 코너에서 <조윤호>라는 신인 게그맨이 나와서 잠깐 나와서 하는 행동과 대사가 흥미롭고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 당황하지 않고... 무엇을 해서.. 모든 상황을 끝낸다 >는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제자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는데 < 놀랐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 당황 >하고 있다는 것이죠..

 




http://www.youtube.com/watch?v=4hl-mmplS0o


제자들은 그들을 위협하는 파도에 그리고 그들에게 유령처럼 보이며 다가오는 예수님의 모습에 그리고 그 일을 한번에 잠재우시는 예수님은 능력에 당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놀라운 오병이어 사건이후에 배를 타고 건너면서도 예수님을 찾지도 예수님을 부르지 않고 있는 믿음없이 무디어 있는 제자들의 마음의 상태에 당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하며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이것 하나는 알기를 원하셨을 것입니다.


< 당황스러운 일이 예수님과 함께하면 당연한 일이 된다

   당황하지 안하고 예수님을 찾으며 기도로 끝 ! >

예수님은 오병이어 사건이후에 사람들의 놀라운 반응에 당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후에 당황하지 않고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로 그일을 끝내고 계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파도에 당황했고 예수님에 당황했고 그들이 예수님 때문에 해결되지만 여전히 어떤 기도도 어떤 예수님을 믿는 믿음도 없었습니다. 그냥 당황하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당황스러운 일이 생길 때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고 그일을 끝내고 계십니까? 너무나도 아쉬운 것은 < 우리의 삶에 당황스러운일이 생길 때 우리가 믿음으로 보고 듣고 깨달은 믿음의 방식대로 살지 않고 우리가 익숙하게 살아왔던 보고 듣고 믿는 자기 방식대로 살게 됩니다. >

 

<도루묵같은 신앙>입니다.

오늘 마가복음 52절에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6:52)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그런데 이러한 제자들의 믿음과는 반대로 게네사렛 동네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그들이 오병이어 사건을 눈으로 보지도 못하고 거기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그냥 예수의 소문만으로도 <예수님의 능력 행하심을 믿었습니다.>

 

봐도 잊어버리고 확신하지 못하고 못 믿는 당황스러운 믿음

보지 않고 기억하고 확신하고 믿는 당연한 믿음

이러한 대조적인 믿음을 봅니다.

[6:53-56]

(6:53)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6:54)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

(6:55)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 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다는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째로 메고 나아오니

(6:56)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건너편 게네사렛 땅에서는 예수신 줄 <알아 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어디 계신 줄을 <찾아 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또한 그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님이 어디계신지도 찾지도 않고 예수님의 도움을 간구하지 않은 제자들의 모습

그동안 그들 곁에 계시고 예수님이 그들 곁에 함께하시는데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리고 마음이 둔해져 있는 제자들의 모습

바로 당황스러움에 머물러 있는 제자들의 믿음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께 놀랐다. 그래서 주님을 따랐다.

제자들은 주님을 잊었다. 그래서 주님을 못 알아봤다.

제자들은 주님을 진정으로 몰랐다. 그래서 주님을 부인했다.

 

우리가 당하는 당황스러운 일을 어떻게 당연한 믿음의 반응으로 바꿔낼 것인가?가 바로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제자임을 증명하는 일입니다. 주님의 제자는 예수님을 알아보고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께 간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모든 일에 예수님 때문에 당황하지 않고 기도하면서 그 당황스러운 일을 끝낼수 있는 당황하지 않는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바로 그것에 주님이 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모잘것없는 < 주님이 내 옷자락만 만져주시기만 하면... >이라는 이 믿음이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 당연한 믿음 >입니다


  • 07/02/20014 새벽묵상설교 
  • <마가복음 1:16-34>
  • 하나님의 나라의 제자도 


  • @ 설교본문의 그림 인터넷 갈무리함  

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마가복음 1: 16 - 34>


제목 : <마가복음 1:16-34> 하나님 나라의 제자도


[1:16-34]

(1: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18)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1: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1:20)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1:21)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1:22)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1:23)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1: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1:2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1: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1:27)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1:28)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1:29)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1:30)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1:31)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1:32)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1:33)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1:34)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제목 : 하나님 나라의 제자도

 

우리는 복음서를 읽고 묵상할 때면 4가지 사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입니다. 복음서는 우리에게 바로 예수님은 누구신가?에 대한 바른 이해를 제공해줍니다.
  • 둘째는 예수 그리스동의 활동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은 죄사함을 주고 우리를 회개 케하고 놀라운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게 하십니다.
  • 셋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와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 넷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반응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정체와 활동 그리고 가르침을 보고서 예수님을 믿고 따를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을 거부하고 죽일 것인가?를 반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부터 이러한 <예수그리스도의 정체/활동/가르침/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한지를 알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가복음 11절에서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는 마가복음의 선포를 보았습니다

마가는 <복음의 시작>이라는 말로 <시작 / :아르케>는 말을 강조합니다.


< 시작 >이라는 말은 < 원천 / 기원 >을 의미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의 기원이기에 그 기원으로부터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주목해서 보아야합니다.


복음의 기원이시며 복음의 시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이 말씀에는 3가지 강조점 있습니다

< 때가 찼다 > <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 > <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




<때가 찼다>는 것은 역사의 결정적인 순간이 왔음을 의미합니다. 바로 선지자들의 예언이 성취되는 순간이 왔고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경험되어질 때가 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제 막 이루어지려고 한다는 뜻입니다. 마가는 복음을 설명할때마다 예수님의 사역을 설명할때마다 의도적으로 < 하나님의 나라 >에 대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가복음이 누구를 대상으로.. 누구를 독자로 쓰여졌는지?를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 하나님 나라 >를 강조하고 있는지를 알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을 읽은 1세기 청중들은 바로 로마에서 고난받고 핍밥받고 있는 성도들을 위해서 쓰여졌습니다. 


마가복음의 기록연대를 AD65-70년을 보는데 그때는 바로 로마 황제의 박해로 순교에 직면하는 고난속에서 살고 있는 성도들이 이 복음서를 읽게 하는 것이 목적이였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의도적으로 <고난>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나라 로마의 통치와 다스림을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너희가 진정으로 고대하고 경험해야할 나라가 있다 바로 그것이 < 하나님 나라 >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마가복음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말하는 동시에 미래에 도래할 하나님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재 로마 나라의 통치와 다스림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 >는 메시지는 그들에는 말수 없은 소망과 강력한 위로의 메시지 이엇을 것입니다.

 



복음서는 < 예견된 하나님의 나라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 >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복음서를 <예수님의 생애의 이야기나 전기>로 생각하는 우리가 복음서를 읽을 때 예수님을 일생을 다른 글이 아니라 < 예수그리스도를 생생하게 경험하고 지금 현재도 경험하고 느끼고 있는 증언이요 고백으로 보아야합니다.

 

마가는 바로 그러한 <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하나님 나라를 고백 하고 있습니다. > 이러한 증언과 고백은 우리에게 < 전심으로 주께로 돌아서 예수 가전한 복음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믿을 갖는 반응 >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살펴봅시다

마가가 우리에게 복음을 이해함에 있어서 가져야할 이해는 < 하나님 나라 >입니다

이것을 마태는 <하늘 나라 / 천국 >이라는 유대식표현으로 바꾸었습니다.

 

분명 예수님의 사역은 <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 >는 선언에서 시작됩니다. 그후의 이야기를 담고있는 오늘 본문은 하나님 나라와 관련하여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 읽은 본문은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있었던 몇가지 사건들을 간략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 가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 >는 부름에 주저 없이 반응하는 자신의 첫 번째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권세를 갖고 가르치시고 귀신을 좇아내시고 시몬의 장모를 고치시고 더 나아가 가버나움에서 질병과 귀신을 모두 물리치는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 이러한 일들은 예수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어떤 관련이 있는 일일까요?


< 하나님 나라는 현재에 경험될수 있는 나라 이며 미래에 임할 나라입니다. >

< 하나님 나라는 현재 예수님 자신을 통해서 실현되고 있습니다. >

<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오셔서 통치와 다스림이 무엇인지 보여주신 나라입니다. >

 


1/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을 따르기로 초청하시는 제자들과 함께 세워가는 나라입니다. 주님께서 가장 우선적으로 하신일은 < 혼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그 일을 다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과 같은 제자로 부르시는 일이었습니다. >


예수님은 어부와 같이 평범한 일상에 머물고 있고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이들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제자는 자신이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고 하나님 나라에 동참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입니다. 제자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제자는 스스로의 의사에 의해서 아니라 예수님의 선택에 의해서 부름을 받습니다. < 부르심 과 선택 >을 통해서 우리는 결정해야합니다. < 따를 것인지 ? 아님 거부할것인지? >를 반응해야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오해하기 쉬운 단어는 < 버려두고 >라는 단어입니다.

16- 20절에 <따르다>는 동사가 3번 나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 부르심과 선택 >을 강종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반응으로 2번 등장하고 있는 단어가 < 버려두고 >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을 흔히 많은 분들이 오해합니다. < 거부하고 거절하다 >는 조금 부정적인이 용어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 버려두고 >라는 단어는 < 그냥 그대로 있도록 놓아 두고 >의 의미가 있습니다.


또 하나의 오해는 이 4명의 제자들을 부르실 때 <갑자가 불러서 당황스럽게 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오늘 본문 16절을 유심히 보면 예수님은 이들을 부를 때 사전 지식이 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1: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본문의 원어를 살펴보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의 부르시는 장면에서 이미 예수님은 제자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기 위해서 < 천천히 걷고 있었고 주목하여 보았고 그 이름을 불렀습니다. > 놀라운 것은 < 시몬과 안드레가 형제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부친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초면이 아닌것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사람을 제자로 부르시는 일에서부터 그 놀라운 일들이 시작되고 있음을 볼수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묵상해볼수 있는 것은 나는 하나님 나라에 어떤 사람으로 초청받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나라의 원리와 다른 가르침을 경험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하신 사역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특히 안식일에 특히 회당에서 가르치고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이들의 반응을 < 뭇사람이 그 교훈에 놀라니 >라고 반응합니다.


유독 예수님은 안식일에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치는 일을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 하필 안식일일까요?

 

안식일은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의 일을 다 마치셔서 더 할 일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안식일은 의미가 없어 졌습니다.


하나님의 질서와 통치가 죄로 인해 파괴된것입니다. 바로 예수님 안식일에 가르치시고 고치시는 사건은 하나님의 나라가 < 에덴의 회복 >을 경험케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결핍되어서 온 문제를 새롭게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질서와 원리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유대인들이 한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영적인 원리들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유대왕국의 회복을 생각했던 로마나라에서 정치적인 회복을 생각했던 하나님의 나라가 이렇게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충격이었습니다.

 

3/ 하나님의 나라에서 치유와 회복의 일들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이 실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의 권세와 능력으로 행할수 있는 무엇인지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현재적 사실을 말해주는 사건이 바로 < 귀신이 쫓겨나는 사건 >입니다. 여기서 귀신은 < 더러운 영들>입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내어 쫓으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거기 이미 임했음을 증거하셨습니다. 바로 귀신인 내어 쫓아졌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탄의 나라(귀신의 나라)에 속한 자를 해방시켜서 하나님 나라로 이동시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실현된 것이다. 귀신이 쫓겨감은 하나님 나라가 실현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치유 이적을 동반한 것은 (귀신을 내어쫓고, 병자 고치심)하나님 나라의 실현(시위 :Demonstration)입니다실제 행동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마가의 복음선포는 일관되게 < 하나님 나라 >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을 따르기로 초청하시는 제자들과 함께 세워가는 나라입니다.

2/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나라의 원리와 다른 가르침을 경험하게 합니다.

3/ 하나님의 나라에서 치유와 회복의 일들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들입니다.

 

오늘 그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곁에 와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같이 그 하나님 나라의 제자로써 어떻게 주님을 따르면 

그 능력을 시용하며 살 것 인지?를 결정해야합니다




[ 하나님의 나라란? (이승구교수)]


천국 복음을 믿고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 온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우리에게 임하여 온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참된 신자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동시에 믿는 사람이다. 예수님께서 가져다주신 영적인 하나님 나라가 여기 현존하고 있다는 것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자신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아서만 이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 안에 있다는 것을 믿고, 그 나라 백성으로 열심히 살면서 동시에 이 땅에 영적으로 임하여 왔고,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그 나라가 예수님의 재림 때에 그 나라의 극치에 이를 것을 고대하면서 날마다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기를 주님의 재림 때까지 그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에 대한 기대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영적으로 여기 임하여 왔다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근거한 것이다. 현재성을 믿는 사람만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을 제대로 믿는 것이다. 미래에 나타나게 될 극치의 하나님 나라를 참으로 믿는 사람은 현재 그 나라가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임하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믿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둘 다 믿지 않은 것도 불신앙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선택해 믿는 것도 큰 불신앙이다. 우리는 예수님과 그의 사도들이 가르쳐준 그대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모두 믿어야 한다.


 이를 참으로 믿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그 말 뜻 그대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살아간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마땅한 의무이지만 동시에 하나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잘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가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존중하며 그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잘 받아 가는 성경의 사람들이며, 성령님께 온전히 순종해 가는 성령의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을 성경은 “신령한 자”라고 말한다.


[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의 나라 (톰라이트) ]


오해된 하나님 나라 
저자는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가야할 천국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럼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가서 경험하는 하나님 나라만 생각하는 것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이런 사고는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나 설교, 그리고 많은 책에 스며들어 있다. 

희망은 지옥을 탈출하는 것처럼 이 세상을 벗어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희망은 언제나 부활에서 출발한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부활과 함께 할 때 더 큰 의미를 갖게 하며, 이 부활은 궁극적인 희망을 낳게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창조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희망이지만, 그것은 다가올 종말론 성취만을 고대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삶 가운데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의 역동성이다. 

저자는 낙원이나 천국에 대한 기대는 언제나 부활에서 시작됨을 강조한다. 부활에 대한 견해를 믿는 종교는 유대교나 기독교 외에는 없다. 물론 유대교도 기독교가 말하는 부활과 다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그를 믿는 이들에 대한 부활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 저자는 부활에 대한 바른 이해가 천국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톰 라이트는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완성은 종말론적 성취에서 이뤄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된 새 창조를 통해 이 땅에서 실현되어야 할 것을 강조한다. 그것은 “이 세상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 위에 주님이신 예수님의 주권에 기초해 이 세상으로 나아가는 사명을 의미”한다. 

결국 기독교적 희망의 근본적 왜곡은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의 열망과 현재적 하나님 나라에 대한 방치다. 현재의 세상을 내버려 둠으로써 아무런 지지도 받지 않고 활동할 수 있게 하는 정적주의를 저자는 경고 한다.










  • 07/01/2014 새벽묵상설교 
  • 마가복음 1:1-15
  • 예비된 목음의 시작 


 @ 설교본문중 그림은 인터넷 갈무리함 


제목 :  예비된 복음의 시작 <마가복음 1:1-15>


[1:1-15]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1: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1: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1:4)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1: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1:6)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1:7)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1: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1:9)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1:10)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11)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1:12)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13)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1: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지난주까지 <말라기>서를 묵상하고 이제 7월부터 새로운 본문인 신약에 <마가복음>을 묵상하게 됩니다. 특히 복음서를 묵상할때면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한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 복음 >입니다.

 

우리가 흔히 < 마태복음 / 마가복음 / 누가복음 / 요한복음 >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는 이 4복음서의 원래의 이름은 < 마태가 전한 복음, 마태에 의해서 전해진 복음 >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오늘 묵상본문인 <마가복음>역시 < 마가가 전한복음, 마가에 의해서 전해진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음을 주시면서 하나의 내용의 4개의 앵글을 갖고 있는 통일되고 다양한 복음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각각의 복음서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주목하고 강조하고 전하고 있는지가 다르게 나타납니다. < 마태복음은 왕으로 오신 예수, 마가복음은 고난의 종으로 오신 예수, 누가복음은 인자이신 예수, 요한복음은 말씀(로고스)이신 예수 >에 대한 복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부터 우리가 살펴 보게될 <마가복음>은 이러한 복음서중에서도 <오리지날 복음>이라고 할 만큼 복음서 중에서 복음에 대해서 가장 중요하고 액기스같은 것들을 간결하고 핵심적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기록연대를 보아도 4복음서보다 가장 먼저 기록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은 이 < 마가복음 >< 무엇보다 우선된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사복음서중에서 가장 짧습니다. 마태복음의 5/8정도의 분량입니다. 그래서 흔히 초신자나 성경을 처음 대한 이들에게 권하는 복음서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이 마가복음의 또하나의 별명이 < 선교의 복음 >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나라에 초기 전달되어진 복음서도 바로 <마가복음>이었습니다. 일명 쪽복음이였죠.  



그리고 마가복음의 < 고난의 복음 >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마가복음 초기의 예수님의 탄생과 사역들을 간략 간략하게 생략한채 본론의 핵심을 달려가기 위해서 마치 숨가쁘게 달려가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서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단어중 하나가 < , 즉시 >이라는 말이 41번 나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비유에 대해서 5번나오고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 사건은 15번 나옵니다

의도적으로 마가복음서는 예수님의 행적중심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행적중에서 그가 말하고 싶은 한가지 주제가 있었습니다.


마가가 말하고 싶은 본론의 핵심은 바로 < 예수의 고난, 고난받으로 오신 예수님, 십자가에 죽으러 오신 예수님 그리고 죽임당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을 보여주기 위해서 < 거두 절미 >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서에 분량중에 가장 많은 부분이 바로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대목에 사용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것을 알수 있습니다.

 

오늘 마가복음의 1장의 서막을 열면서 

마가복음 11절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이 짧은 한 구절속에서 <마가가 전한 복음>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마가가 전하고 싶었던 복음의 주제는 2가지입니다.

첫째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아는 것에서 시작된다.

둘째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시작하셨다.


오늘 본문을 유심히 살펴보면 <복음>과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는 4개의 단어가 있음을 주목해볼 수 있습니다.

 

바로 < 시작 / 준비 / 전파 / 믿음 >이라는 단어입니다.

복음의 시작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복음의 준비는 구약의 이사야를 비롯한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되어서 오늘 성취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복음의 전파는 마지막 죄사함을 받게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한 선지자인 세례요한으로부터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성령의 

세례을 받으라고 전하는 예수님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복음의 믿음은 바로 이러한 에수그리스도의 초청을 받아 들이는

 우리의 반응입니다.

 

이러한 <복음의 시작/ 복음의 준비/ 복음의 전파/ 복음의 믿음>위해서 처음 등장하고 있는 복음의 메신저, 복음의 전달자인 3사람을 주목해볼수 있습니다.


바로 < 마가와 세례요한 그리고 예수님 >입니다.

 

1/ 오늘 마가복음의 시작에서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고 첫 대목을 기록하고 있는 <마가요한>입니다.


오늘 마가복음을 기록하고 있는 < 마가요한 >은 누구입니까?


바로 바나바의 사촌 그 <마가 요한>, 제자들에게 집회장소를 제공했던 그 <마가요한>, 사도행전 전도여행에 그 <마가 요한>입니다.

바울의 일차전도여행에 그 전도여행을 견디지 못해 자기 집으로 돌아간 그 마가요한, 그 일 이후부터는 베드로의 곁에서 베드로의 통역자로 베드로의 비서와 같이 있었던 그 마가 요한. 바울이 마지막에 보고 싶어서 데리고 오라고 했던 그 마가요한이 맞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심지어 주께서 잡히시던 밤에 한 청년이 따라오다가 벌거벗은 채 도망쳤다고 기록하고 있는 그 청년이 바로 <마가요한>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마가요한>이 오늘 <복음의 시작>을 알리고 있습니다.


 <겁쟁이 같고 신실하지 못한 사람>은 그 부족한 마가요한의 입을 통해서 <복음서>의 첫 번째 계시가 쓰여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마가복음> 11절을 묵상하면서 놓치지 말아야할 중요한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은 복음을 감당할만한 자격이나 능력이나 커리어가 있는 사람만이 전할수 있는 복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실패하고 능력 없고 어딘가 부족하지만 다시금 회복되고 예수의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이 전할수 있는 그리고 <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는 분명한 증언 >을 할수 있는 사람이면 됩니다.

 

많은 학자들은 <가요한>이 처음 복음의 시작을 알리면서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고 말한 것은 그가 <베드로의 비서로써 통역자로써> 베드로의 고백을 그대로 옮겼거나아니면 그도 역시 베드로의 설교를 통역하면서 베드로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들은 아마도 마가요한은 <베드로의 복음을 대신 적어주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오늘 <마가복음>에서 <마가가 전한복음>은 과거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과거시제>로 쓰여있지 않고 < 현제시제 >로 쓰여있습니다. 특히 < 과거의 사건을 현재 시재로 표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목격자로써 눈으로 보고 그것을 현재의 일로 증언하고 있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복음은 무결점의 사람에게 어울리는 말씀이 아니라 실패하고 좌절하고 연약한 우리도 증언할수 있는 하나님의 계시라는 사실입니다
.

 

2/ 복음의 시작에서 신약과 구약의 복음의 다리를 잇고 있는 <세례자 요한>을 주목해서 봅니다. 우리가 흔히 세례요한은 < 세례자 요한 또는 세례를 주는자 요한 >이라고 해야 할것입니다.

공교롭게 <요한>이란 이름이 또 등장합니다. <마가요한/세례자요한>




세례자 요한의 등장은 구약의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가는 말라기 31절과 이사야 403절을 인용하면서 이 예언들이 세례요한을 통해서 어떻게 성취되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3: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40:3)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여기서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은 < 복음의 시작 >은 갑자기 등장한 < 예수 >를 통해서 시작된 생뚱맞은 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갑작스러운 사건이나 예기치 못한 해프닝이 아닙니다


바로 구약의 선지자들로부터 <예언되고> 오늘 세례자 요한를 통해서 <예비>되었던 바로 < 준비된 시작 >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의 시작인 비로 준비된 시작이라는 것은 <예언과 예비>를 통해서 이루어진것입니다. 바로 수많은 선지자들의 예치는 소리들이 있었고 그 소리가 세례의 요한 의 광야의 외치는 소리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이 예언을 통해서 주의 길이 예비되어졌고 세례 요한가 죄사함의 회개의 운동이 바로 예수님의 등장을 알리는 일종의 < 예고편 >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볼 것은 <복음의 시작>은 바로 <죄사함의 회개>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례요한 시대에 회개의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다른말로 복음의 전달될 마음밭이 준비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죄에 대해서 민감해지고 죄를 자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복음을 받아들이 준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 바로 주의 길을 예비하는 방법은 한가지 이 세상 속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죄에대해서 민감해하고 

죄를 자각하기 시작하는 무브먼트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

우리의 죄에 대한 민감한 반응은 복음을 쉽게 받아들이게 합니다. 그리고 회개하게하고 다시금 거듭 태어남의 증거인 <세례>받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묵상해 보아야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주의 길, 복음의 길을 예비할만한 

죄에 대한 민감함과 회개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우리는 교회는 얼마나 주의 길을 예비하는데 

합당한 죄사함과 회개의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

 

3/ 복음의 시작에서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전하고 믿음으로 초청하고 있는 < 예수 그리스도 >를 만납니다.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일은 < 하나님 나라 >를 경험하는 일이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믿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전하신 복음 바로 < 천국 복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원리과 통치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원리과 통치입니다.


이것은 <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때 >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인식은 < 하나님 나라 >에 대한 인식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임재와 회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임했고 아직 임하지 않은 나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매일 같이 회개하고 매일같이 

복음을 다시 복음을 받아들이기 원합니다.


최근에 한국에 < 다시 복음앞에. RETURN TO THE GOSPEL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오늘 이 시대는 < 하나님의 나라 >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변질되었기 때문이고 복음의 세속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서 필요한 것은 < 다시 복음앞에, 예수 다시보기 >를 해야합니다. 교회가 복음으로 세상을 압도하지 못하고 세상이 교회를 압도하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알려야합니다. 죄의 심각성을 알려합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외쳐야합니다.


오늘 우리는 점점 더 복음을 외면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점점 더 복음이 변질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점점 더 복음을 들어도 변화하고 있지 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어떤 복음을 붙잡아야 할지?

무엇이 복음의 본질인지? 심각하게 생각해야합니다.


오늘 본문에 놀랍게도 14절에

(1: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요한이 잡힌후 바로 이어서 예수님이 요한이 전한 복음을 다시금 전달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자신이 복음을 가져왔음을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초래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잡힌후 예수님이 전하셨다면...

예수님이 잡히고 그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성취하시고 완성하신 그후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우리도 역시 <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여기 왔으니 회개하고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으라 >고 외쳐야 되지 않을까

 


  • 06/18/2014 GSC새벽큐티설교 
  • 사무엘하 22장 22절-51절 
  • 구원의 노래 그리고 시선 
  • @ 설교문중에 그림은 인터넷 갈무리함  


제목 : 구원의 노래 그리고 시선


 

[삼하 22:22-51]

(삼하 22:22)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을 행함으로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삼하 22:23) 그의 모든 법도를 내 앞에 두고 그의 규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삼하 22:24) 내가 또 그의 앞에 완전하여 스스로 지켜 죄악을 피하였나니

(삼하 22:25)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공의대로, 그의 눈앞에서 내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삼하 22:26)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삼하 22:27)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이다

(삼하 22:28)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를 살피사 낮추시리이다

(삼하 22:29) 여호와여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어둠을 밝히시리이다

(삼하 22:30)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진으로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넘나이다

(삼하 22:31)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진실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시로다

(삼하 22:32)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

(삼하 22:33) 하나님은 나의 견고한 요새시며 나를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시며

(삼하 22:34) 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삼하 22:35)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 활을 당기도다

(삼하 22:36) 주께서 또 주의 구원의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삼하 22:37)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내 발이 미끄러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삼하 22:38) 내가 내 원수를 뒤쫓아 멸하였사오며 그들을 무찌르기 전에는 돌이키지 아니하였나이다

(삼하 22:39) 내가 그들을 무찔러 전멸시켰더니 그들이 내 발 아래에 엎드러지고 능히 일어나지 못하였나이다

(삼하 22:40) 이는 주께서 내게 전쟁하게 하려고 능력으로 내게 띠 띠우사 일어나 나를 치는 자를 내게 굴복하게 하셨사오며

(삼하 22:41) 주께서 또 내 원수들이 등을 내게로 향하게 하시고 내게 나를 미워하는 자를 끊어 버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삼하 22:42) 그들이 도움을 구해도 구원할 자가 없었고 여호와께 부르짖어도 대답하지 아니하셨나이다

(삼하 22:43) 내가 그들을 땅의 티끌 같이 부스러뜨리고 거리의 진흙 같이 밟아 헤쳤나이다

(삼하 22:44) 주께서 또 나를 내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나를 보전하사 모든 민족의 으뜸으로 삼으셨으니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

(삼하 22:45) 이방인들이 내게 굴복함이여 그들이 내 소문을 귀로 듣고 곧 내게 순복하리로다

(삼하 22:46) 이방인들이 쇠약하여 그들의 견고한 곳에서 떨며 나오리로다

(삼하 22:47)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삼하 22:48) 이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보복하시고 민족들이 내게 복종하게 하시며

(삼하 22:49) 나를 원수들에게서 이끌어 내시며 나를 대적하는 자 위에 나를 높이시고 나를 강포한 자에게서 건지시는도다

(삼하 22:50) 이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모든 민족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삼하 22:51) 여호와께서 그의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원하도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하였더라

 

제목 : 구원 노래  그리고 시선

 

어제부터 살펴보고 있는 사무엘하 22장의 말씀은 < 다윗에게 자신의 전 생애를 걸쳐 구원을 베푸시고 승리를 주신 하나님에 대한 묵상과 찬양 그리고 고백 >을 담은 시편입니다. 시편 18편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여 반복하고 있는 시편입니다.

 

제가 작년 연말 금요예배에 이 본문 <사무엘하 2232-36>로 설교를 했습니다. < 내 영혼은 안전합니다 >라고 설교했죠. 오늘 아침에 하나님이 새롭게 주시는 은혜가 기대가 되어서 새로운 관점에서 묵상을 해보았습니다.

 

이런 다윗의 시편은 특별히 주해를 하거나 강해를 할 것이 따로 필요없이 그냥 읽기만 해도 은혜가 되고 읽기만해도 적용이 되는 그런 [ 거저 그 은혜로운 본문 ]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윗의 지나오는 삶의 세월을 알고 있다면..

우리가 다윗의 지나온 인생 여정의 우여곡절을 보아 왔다면...

우리가 다윗의 삶에서 흘러온 험악한 시간여행을 살펴보았다면...

오늘 이 다윗의 고백이 그냥 쉬운 고백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다윗의 생애과 그가 지금 여기까지 와서 지난 삶의 여정을 돌아 볼 때 자신의 삶을 붙들고 자신의 지키시고 보호하신 이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알고 고백할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지요.

 

어떤 주석을 보니 오늘 이 사무엘하 22장을 평가하면서 이런 글을 썼습니다.


< 다윗은 자신의 파란만장한 생애 가운데서 경험했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구원을 조금도 거침없는 사상력과 영감에 찬 내용으로 노래하고 있다. 그의 벅찬 감격과 희열은 그 노랫말을 초시간적이면 우주적인 표현으로 가득 매우게 했으며, 그의 넘치는 신앙열을 통해 뿜어낸 찬미는 시대를 초월한 모든 신앙인들의 영혼의 노래가 되게 했다. >

 

많은 학자들은 이 사무엘하 22장의 기록시기를 < 다윗의 신앙이 가장 고조되던 가장 피크였던 시기였던 하나님께 성전건축을 요청했을 당시 사무엘하 7-8장의 그 시점 >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확히 어느 다윗의 어느 시기에 기록되었는지는 알수 없지만 그가 자신의 삶에서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목도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다윗은 분명히 외치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삼하 22:32)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

(삼하 22:47)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몇일전 Father’s DAY 였습니다. 저희집 아이들이 이제는 컷는지 ? 참 아버지로써 보람있고 감동적인 편지를 저에게 주었습니다. 자기가 손수 만든 그림카드에 한글로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 아빠가 내 아빠가 되어 주어서 고마워. 아빠 힘들어한거 알아,, 내가 마사지 쿠폰줄게 .. 아빠는 나를 웃게 해죠요. > 분명 아이들 배후에 엄마가 아빠에게 쓰라고 했겠지만. 평상시에 자신들이 생각한 아빠의 느낌과 아빠에 대한 고마움에 대해서 썼겠죠.



 


오늘 사무엘하 22장의 다윗의 고백 역시 자신의 삶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노래하고 있습니다


한마다로 다윗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 공의롭고 자비로운 구원자이십니다. 그래서 그 구원으로 의인에게 베푸십니다 >

 

여기서 다윗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2가지의 행동입니다.

첫째는 공의롭고 자비로운 구원자가 베푸시는 하나님의 보호와 능력입니다.


둘째는 이 공의롭고 자비로운 구원자의 도움을 구하는 우리의 태도와 행동입니다.


< 구원을 베푸시는 자와 구원을 경험할수 있는자 > 이 두 가지의 행동이 이루어질 때

 비로서 < 놀라운 구원의 역사 >를 경험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을 아무게나 행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의로운자를 구원하시고 의로운 행위대로 보응하십니다.

 

[삼하 22:21-22] 여호와께서 내 공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 갚으셨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을 행함으로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공의대로, 그의 눈앞에서 내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분명히 다윗은 자신의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 하나님은 < 반석, 요새, 건지시는자, 피할 바위, 방패, 구원의 뿔, 높은 망대, 피난처, 구원자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시편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구원과 관련한 단골 메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원에는 조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성품에 어울리는 우리의 성품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에 어울리는 우리의 반응

또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어울리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고난 당할때와 구원 받을때를 알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삶을 숱한 고난속에서 고난의 이유를 묵상했습니다. 그럴때마다 그 고난에서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서 알았습니다


< 아하 ! 고난속에서 건짐을 받는 영적인 이유가 있구나. 하나님이 이 고난속에서 나에게 찾으시고 원하시는 것이 있었구나 ! >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삼하 22:27-28]

(삼하 22:27)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이다

(삼하 22:28)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를 살피사 낮추시리이다

 

다윗에게 구원을 받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 고난 받는 상황보다 고난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상태 >였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속에서 분명하게 깨닫는 것은 < 하나님의 시선과 관심>이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하나님께 < 의롭게 그리고 깨끗하게 > 머물러 있느냐?가 자신에게 주어질 구원의 수준을 결정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호와의 구원은 절대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구원을 베푸실 여호와는 구원받기에 합당한 자를 구원하십니다.


구원 베풀자와 구원 받을 자의 합작품이 바로 < 여호와의 구원의 역사 >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다윗은 여호와의 구원의 역사만을 노래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구원을 경험할수 있었던 자신의 마음의 내용을 노래하고 있고 그 중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가장 제 가슴을 벅차게 만드는 구절이 있다면

(삼하 22:30)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진으로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넘나이다

(삼하 22:34) 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삼하 22:39) 내가 그들을 무찔러 전멸시켰더니 그들이 내 발 아래에 엎드러지고 능히 일어나지 못하였나이다

(삼하 22:44) 주께서 또 나를 내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나를 보전하사 모든 민족의 으뜸으로 삼으셨으니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

 

우리가 다윗의 고백을 통해서 분명하게 깨닫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걸음의 안전함을 제공해줍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계획의 든든함을 제공해줍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행동의 담대함을 제공해줍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우리의 모든 시선을 주님께 향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계속 저를 흥얼 거리게하는 찬양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전도단 김명선 간사 지은 < 시선 >이라는 찬양입니다. 아마 유듀브에 찾아 보시면 어떤 곡인지 아실텐데요 ... 그 찬양 가사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 시선 김명선간사 >

내게로 부터 눈을 들어 주를 보기 시작할 때 주의 일을 보겠네

내 작은 마음 돌이키사 하늘의 꿈꾸게 하네 주님을 볼때

모든 시선을 주님께 드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느낄 때

내 삶은 주의 역사가 되고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네

 

성령이 나를 변화시켜 모든 두렴 사라질 때 주의 일을 보겠네

황폐한 땅 한가운데서 주님 마음 알게 되리 주님을 볼 때

모든 시선을 주님께 드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느낄 때

세상은 주의 나라가 되고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네

 


< 시선 찬양 링크 > 

http://www.youtube.com/watch?v=kAOQ-L9fw_8






< 내 삶이 주의 역사가 되고 하나님이 일하시 시작할 때 > 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 내게로부터 눈을 들어 주를 보기 시작할 때 >입니다.


오늘 사무엘하 22장에 다윗의 시선은 하나님의 구원과 역사를 향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 노래를 지으면서 자신과 자신의 나라 그리고 자신의 후손들이 이 시선을 잃어 버리지 않기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삼하 22:50) 이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모든 민족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삼하 22:51) 여호와께서 그의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원하도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하였더라

 

말씀을 맺습니다.


최근에 < 천개의 심장 >이라는 책을 쓴 아프리카 케나의 <이시온>선교사님의 글을 보았습니다. 그 책에 이렇게 쓰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두 개의 산을 넘어야한다


우리가 넘어야할 첫 번째 산은 나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이다


또한 두 번째 넘어야할 산은 하나님께 나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이다.


오늘 이 사무엘하 22장을 묵상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두가지 물음이 있습니다.


< 나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그리고 하나님께 나는 어떤 사람인가 >


  • 06/12/2014 GSC새벽묵상설교 
  • 사무엘하 20:1-13
  • 제목 : 치세의 능신(能臣) 난세의 간웅(奸雄)
  • @ 설교본문의 그림 인터넷에서 갈무리함


[ 삼하 20:1-13 ]

(삼하 20:1) 마침 거기에 불량배 하나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세바인데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이었더라 그가 나팔을 불며 이르되 우리는 다윗과 나눌 분깃이 없으며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우리에게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매

(삼하 20:2) 이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따르기를 그치고 올라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따르나 유다 사람들은 그들의 왕과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따르니라

(삼하 20:3) 다윗이 예루살렘 본궁에 이르러 전에 머물러 왕궁을 지키게 한 후궁 열 명을 잡아 별실에 가두고 먹을 것만 주고 그들에게 관계하지 아니하니 그들이 죽는 날까지 갇혀서 생과부로 지내니라

(삼하 20:4) 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위하여 삼 일 내로 유다 사람을 큰 소리로 불러 모으고 너도 여기 있으라 하니라

(삼하 20:5) 아마사가 유다 사람을 모으러 가더니 왕이 정한 기일에 지체된지라

(삼하 20:6) 다윗이 이에 아비새에게 이르되 이제 비그리의 아들 세바가 압살롬보다 우리를 더 해하리니 너는 네 주의 부하들을 데리고 그의 뒤를 쫓아가라 그가 견고한 성읍에 들어가 우리들을 피할까 염려하노라 하매

(삼하 20:7) 요압을 따르는 자들과 그렛 사람들과 블렛 사람들과 모든 용사들이 다 아비새를 따라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뒤쫓으려고 예루살렘에서 나와

(삼하 20:8) 기브온 큰 바위 곁에 이르매 아마사가 맞으러 오니 그 때에 요압이 군복을 입고 띠를 띠고 칼집에 꽂은 칼을 허리에 맸는데 그가 나아갈 때에 칼이 빠져 떨어졌더라

(삼하 20:9) 요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내 형은 평안하냐 하며 오른손으로 아마사의 수염을 잡고 그와 입을 맞추려는 체하매

(삼하 20:10) 아마사가 요압의 손에 있는 칼은 주의하지 아니한지라 요압이 칼로 그의 배를 찌르매 그의 창자가 땅에 쏟아지니 그를 다시 치지 아니하여도 죽으니라 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뒤쫓을새

(삼하 20:11) 요압의 청년 중 하나가 아마사 곁에 서서 이르되 요압을 좋아하는 자가 누구이며 요압을 따라 다윗을 위하는 자는 누구냐 하니

(삼하 20:12) 아마사가 길 가운데 피 속에 놓여 있는지라 그 청년이 모든 백성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아마사를 큰길에서부터 밭으로 옮겼으나 거기에 이르는 자도 다 멈추어 서는 것을 보고 옷을 그 위에 덮으니라

(삼하 20:13) 아마사를 큰길에서 옮겨가매 사람들이 다 요압을 따라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뒤쫓아가니라

 

제목 : 치세의 능신(能臣) 난세의 간웅(奸雄)

 

중국의 소설 삼국지에 보면 < 조조(曹操) >라는 인물을 가르켜 <허자장>이라는 사람으로부터 < 그대는 치세의 능신(能臣)이고, 난세의 간웅(奸雄)이다. >는 평을 듣습니다. 여기서 < 치세의 능신 >이란 나라가 < 잘 다스려질 때는 유능한 신하라는 뜻 >이고, < 난세의 간웅 >이란 < 세상이 어지러울 때는 권모술수에 능한 영웅 >이란 뜻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무엘하에 보여지고 있는 다윗의 시대가 바로 이러한 < 치세와 난세 >사이에 있는 시대 라로 할수 있을 것입니다


압살롬의 반란과 반역이후에 계속 다윗의 시대는 < 난세 >와 같이 어수선하고 어지러운 반목과 갈등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피의 복수와 숙청과 같은 계속 되는 피의 역사가 계속되어가고 있습니다


그 한 중심에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사람이 바로 < 요압 >입니다.

 

<요압>은 다윗을 대신해서 다윗의 정적들이 될 만한 인물들을 제거하고 그리고 다윗을 대신해서 일어나고 있는 < 다윗에게 대항하는 반란의 세력들을 > 제거합니다. 다윗에게는 충신중에 충신입니다. 다윗을 위해서 알아서 그 난세를 잠재우기 위해서 손에 피를 붙이는 것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요압>은 다윗의 편의 서서 이미 <압살롬의 반역>을 압장서서 제압을 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도 보면 공공연하게 다윗을 비난하고 다윗에 대해서 불만과 반대입장을 갖고 있는 < 세바의 난 >을 처리하는 일이나, 다윗을 따르는 일에 미혼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 아마사 >를 자신의 손으로 처리하는 일을 보면 무자비할 정도로 다윗을 위해 그 일들을 해나갑니다.

 

여기서 <요압>같은 사람이 다윗에게 있어서 참 고마운 것 같지만 <요압>은 다윗을 위한다는 명분하에 자신의 야심과 자신의 숨은 동기를 갖고 그일들을 해나갑니다. 결국 나중에 보면 이 충성스러운 요압도 다윗을 반역하는 것을 보면 <요압>이 이런 과격한 충성뒷편에는 또다른 얼굴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해볼수 있습니다.

 

사무엘하에서 보여지고 있는 다윗의 시대는 그다지 샬롬의 시대는 아니었습니다. 난세중에 난세였습니다. 압살롬의 반란이후로 이스라엘 안에는 많은 후휴증에 남았습니다. 바로 그것은 < 다윗에 대한 불신과 불만 >이었습니다. 압살롬을 따랐던 무리들을 다윗은 아직 통합하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이스라엘 안에는 지역적인 갈등과 뜻이 다른 마음들이 존재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무리들인 오늘 본문 201장에 < 불량배 >라고 표현되어있는 베냐민 지파사람들인 <불량배같은 세바>와 같은자들이었습니다.

 

(삼하 20:1) 마침 거기에 불량배 하나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세바인데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이었더라 그가 나팔을 불며 이르되 우리는 다윗과 나눌 분깃이 없으며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우리에게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단어 있습니다.

 < 마침 거기에 >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장소적으로는 < 길갈 >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시간적으로 < 그후에. 그일로부터 >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바로 앞장에 어떤 일이 있습니까? 1940-43절에 이스라엘 안에서 분열이 일어납니다. 서로 뜻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일들이 일어납니다. < 다윗왕이 환궁을 하는데 이 문제를 이스라엘 공동체전체와 지파와 의논을 하지 않고 유대지파가 주도권을 갖고 이일을 추진했다고 나머지 10지파에서 날리가 납니다. >

 

항상 갈등과 분열은 < 뜻이 다를 때 > 일어납니다. 




혹시 중국의 난세의 역사와 영웅을 다루고 있는 삼국지(三國志)와 수호지(水滸志)에서 <()>라는 글자는 땅지()가 아니라 뜻지()라는 것을 알고 있으십니까

삼국지가 세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 세나라  뜻 >에 대한 이야기인것입니다.








 

바로 분열과 갈등은 바로 뜻을 다르게 품을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이러한 지파들이 같은 뜻을 품지 못하고 서로 오해하고 서로 용납하지 못해서 생긴 일들입니다. 이러한 10지파 이스라엘과 1지파 유다와의 갈등은 나중에 솔로몬 시대에 나라가 분열이되는 계기가 됩니다. 이때부터 시작된 오래된 앙금과 반목은 압살롬의 반역이후에 일어나는 심각한 후휴증이요 상처의 결과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가 생각해볼수 있는 것은 한 가정의 갈등이 나중에 어떻게 민족의 갈등으로 확대 재생산될수 있는지를 우리가 단적으로 볼수 있는 예라고 할수 있습니다.

다윗왕이 지금 지나고 있는 이 난세에는 여전히 남은 갈등과 반목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된 반역의 멈추지 않은 갈등이 나오고 있습니다.

 

< 마침 거기에 불량배 하나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세바인데... > 라고 오늘 본문은 그러한 난세의 배경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세바를 말하길 <불량배>라고 말합니다. 이말은 개역한글성경에는 <난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원어로는 <이쉬 벨리야알>입니다. 그 뜻은 < 약한 사람. 무가치한 사람 >이라는 뜻입니다. 얼마나 이 세바가 다윗에 대한 불만과 비난을 노골적으로 하느냐하면 오늘의 본문에서 2가지 행동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가 < 나팔을 불었다 >는 것입니다. 나팔 곧 쇼파르를 부는 행위는 임박한 재앙과 전쟁을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바로 왕과의 전쟁을 선포하는 행위였습니다.




둘째는 세바가 다윗을 < 이새의 아들 >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을 < 이스라엘의 왕 >이라고 부르지 않고 < 이새의 아들 >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다윗을 진정한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다윗왕을 <폄하>하는 언사입니다

막말파문의 당사자가 바로 <세바>입니다.



세바는 다윗과 전쟁을 선포하고 다윗을 비난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러한 세바를 따르는 무리들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삼하 20:2) 이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따르기를 그치고 올라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따르나 유다 사람들은 그들의 왕과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따르니라


세바를 중심으로한 < 이스라엘파 >와 다윗을 중심으로한 <유다파>가 나뉘는 지역감정과 갈등을 부추기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왕궁으로 돌아 가장 먼저한 일은 < 압살롬과 대낮에 백성들이 보는데서 동침한 10명의 후궁들 >을 처리하는 일이었습니다


. 우리가 흔히 후궁들이 무슨 죄가 있나? 싶겠지만 다윗이 처리한 이 일은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압살롬의 잘못과 후궁들의 합의하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짐작해볼수 있수 있습니다. 다윗은 율법의 처리 규정에 따라 더 이상 다른 남자와 관계를 한 아내를 받아들지 않는 율법대로 10명의 후궁들을 처리합니다.

 

그리고 요압에게 자신과 사촌지간이 < 아마사 >의 군대와 함께 이 패역부도한 <세바 일당>들을 처리하고 오도록 명령합니다. 그러나 < 아마사 >는 이 왕의 명력에 미혼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삼하 20:4) 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위하여 삼 일 내로 유다 사람을 큰 소리로 불러 모으고 너도 여기 있으라 하니라

(삼하 20:5) 아마사가 유다 사람을 모으러 가더니 왕이 정한 기일에 지체된지라

 

그도 그럴것이...원래 <아마사>는 어떤 사람입니다

어느 편에 있던 사람이었습니까? 바로 압살롬의 편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요압의 사촌이었지만 아사마는 원래부터 다윗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압살롬의 편이었습니다.


(삼하 17:25) 압살롬이 아마사로 요압을 대신하여 군지휘관으로 삼으니라


다윗이 요압과 함께 아마사를 부른 것은 다윗이 더 이상 < 니편 내편 가리지 말고 우리 함께 화평을 이루자> 라고 하는 화해의 제스츄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사>는 다윗이 내민손을 미혼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제가 참 오래전에 재미있는 글을 보았습니다.

< 아부도 일관성이 있으면 충성이 되고

충성도 일관성이 없으면 아부만도 못하다 > 일리가 있는 글입니다.

 

<요압><아마사>는 서로가 집안이었고 사촌지간이었습니다


자신이 따르는 사람이 달라고 자신의 명분이 달라고 자신의 품은 뜻이 달랐습니다. < 니편 내편 >이 달랐습니다

다윗의 탁월한 치세가 바로 < 통합의 정치 >를 할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항상 분쟁과 갈등의 출발은 < 니편과 내편 >의 편가르기를 시작할 때 일어납니다.


그러한 가운데 <화해와 통합>은 없지요. 서로 반목하고 비난하고 폄하합니다.


오늘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문화 기독교가 바로 그러한 반목을 계속 보는 이유가 뭡니까? 자꾸 편가르기를 하는 것입니다. 지난 한국의 선거를 보십시오. 여전히 네가티브 선거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이번 선거에 재미있었던 결과중에 하나는 < 네거티브 전략 >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던 후보들이 당선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한국 사회의 골깊은 갈등은 바로 <사회통합과 화해>가 없는 < 니편과 내편 >을 나누는 반복된는 반목과 갈등에서 일어납니다.

 

다윗왕은 이스라엘 왕국에 계속되는 이러한 <갈등과 반목>을 해결하고자하는 시도로 바로 자신의 상대편에 속해있었던 <아마사>를 품고 그와 함께 나라를 안정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다윗의 뜻대로 되지 못합니다. < 아마사 >의 품은 뜻이 달라고 그리고 다윗을 따라고 있는 <요압>의 품은 뜻이 달랐습니다.

 

결국 이러한 아마사의 미혼적인 태도 때문에 <요압>에게 칼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요압의 칼에 죽임을 당하는 아마사의 죽음 장면을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상상하나는 아마도 <아마사>가 요압에게 칼을 맞으면서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 고마해라 ! 마이 묵었다 아이가 ... > 마치 영화 친구 한 장면이 생각과 같아 보입니다.




(삼하 20:11) 요압의 청년 중 하나가 아마사 곁에 서서 이르되 요압을 좋아하는 자가 누구이며 요압을 따라 다윗을 위하는 자는 누구냐 하니


(삼하 20:12) 아마사가 길 가운데 피 속에 놓여 있는지라 그 청년이 모든 백성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아마사를 큰길에서부터 밭으로 옮겼으나 거기에 이르는 자도 다 멈추어 서는 것을 보고 옷을 그 위에 덮으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치세를 원하는 다윗과 여전히 난세를 만들고 있는 다윗의 주변사람들을 모습을 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오늘 우리의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를 봅니다.

여전히 반목과 갈등 그리고 편가르기가 넘쳐나고 있는 이 시대를 봅니다

권위도 없고 책임도 없고 화해나 통합도 없는 어수선한 오늘의 현실을 봅니다.


그리고 여전히 <니편 내편>으로 서로에게 상처와 아품을 주고 있는 교회들의 갈등을 봅니다

그리고 여전히 사람에게 실망하고 사람에게 상처받고 있는 우리 자신을 봅니다.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바르실래>와 같은 사람보다는 <세바>와 같이 나를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고 비난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모습을 통해서 희망을 봅니다

그리고 그릇된 요압의 모습에서 절망도 봅니다

다윗의 다시 내민 손도 보지만 아마사와 같이 내민손을 뿌리치는 손도 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계의 착각은 < 내가 착하게 대하면 모두 다 나를 착하게 대할 것이다. >

라는 것입니다우리는 이러한 착각을 버려야 좋은 관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좋은 관계의 시작은 무슨 관계이든지 오해하지 않고 

이해하기를 작정하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좋은 관계의 법칙은 손해보기를 각오하는 일이며

 거절될 것을 각오하는 일입니다

좋은 관계의 완성은 상처받아도 또 다시 손을 내밀고 

다가가는 일을 멈추지 않는 일것입니다.

것이 진정한 <화해>이며그것이 진정한 <통합>의 길입니다.










  • 06/07/2013 GSC 새벽묵상설교 
  • 사무엘하 18:24-33
  • 승리보다 샬롬입니다. 

@ 설교본문의 그림 인터넷에서 갈무리함 


[삼하 18:24-33]

(삼하 18:24) 때에 다윗이 두 문 사이에 앉아 있더라 파수꾼이 성 문 위층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보니 어떤 사람이 홀로 달려오는지라

(삼하 18:25) 파수꾼이 외쳐 왕께 아뢰매 왕이 이르되 그가 만일 혼자면 그의 입에 소식이 있으리라 할 때에 그가 점점 가까이 오니라

(삼하 18:26) 파수꾼이 본즉 한 사람이 또 달려오는지라 파수꾼이 문지기에게 외쳐 이르되 보라 한 사람이 또 혼자 달려온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도 소식을 가져오느니라

(삼하 18:27) 파수꾼이 이르되 내가 보기에는 앞선 사람의 달음질이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의 달음질과 같으니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는 좋은 사람이니 좋은 소식을 가져오느니라 하니라

(삼하 18:28) 아히마아스가 외쳐 왕께 아뢰되 평강하옵소서 하고 왕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이르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리로소이다 그의 손을 들어 내 주 왕을 대적하는 자들을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

(삼하 18:29) 왕이 이르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하니라 아히마아스가 대답하되 요압이 왕의 종 나를 보낼 때에 크게 소동하는 것을 보았사오나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나이다 하니

(삼하 18:30) 왕이 이르되 물러나 거기 서 있으라 하매 물러나서 서 있더라

(삼하 18:31) 구스 사람이 이르러 말하되 내 주 왕께 아뢸 소식이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왕을 대적하던 모든 원수를 갚으셨나이다 하니

(삼하 18:32) 왕이 구스 사람에게 묻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구스 사람이 대답하되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청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삼하 18:33)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제목 : 승리보다 샬롬입니다. 


오늘 본문은 압살롬의 죽음이후에 일어난 다윗왕의 비통해하는 심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왕의 군대는 압살롬의 반란군의 전쟁에서 승리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압살롬을 죽이게 됩니다. 



다윗왕에게서 반란군이 진압된 것은 좋은 소식이지만 그토록 < 너그럽게 봐주어서 .. 살아서 데려오기를 기다렸던 아들의 어이없는 없는 죽음 >의 소식은 불편한 소식입니다. 


비록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승전보는 좋은 소식이지만 자신의 아들이 그 전쟁에서 비참하게 죽었다는 비보는 자신이 우려했던 것이 현실이 된 안타까운 소식입니다.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 구스 사람 >과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에 달음질을 합니다. 처음에 < 구스 사람 >이 이 소식을 전하려 달음질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히마아스>가 구스사람보다 앞서서 이 소식을 전하고 싶어서 달음질을 합니다. 이미 요압은 다윗이 이 소식을 들었을 때 무엇에 더 많은 관심이 있을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압은 다윗에 이 소식을 전하는 것을 주저하죠. 


(삼하 18:22)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다시 요압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아무쪼록 내가 또한 구스 사람의 뒤를 따라 달려가게 하소서 하니 요압이 이르되 내 아들아 너는 왜 달려가려 하느냐 이 소식으로 말미암아서는 너는 상을 받지 못하리라 하되


결국에 후발주자였던 < 아히마아스 >가 < 구스 사람 >을 앞질러 왕에게 도착합니다. 그리고 소식을 전합니다. 


오늘 본문에 시작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 때에 다윗이 두문 사이에 앉아 있더라... > 



다윗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전쟁의 승리의 소식을 기다렸을까요? 

아니면 아버지를 버리고 떠나 반역의 길로 갔던

 아들 압살롬을 기다렸을까요? 


다윗은 무엇을 더 원했을까요 ?

전쟁의 승리를 통한 승리의 기쁨을 원했을까요? 

아니면 전쟁의 승리를 통해 샬롬이 회복되는 것을 원했을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다윗 원했던 것은 < 승리보다 샬롬 > 이었습니다. 

다윗이 원했던 것은 < 전쟁의 승리보다 아들 압샬롬 > 이었습니다. 

다윗이 그토록 기다렸던 좋은 소식은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승전보가 아니라 전쟁에서 아들만이라도 자신의 곁으로 돌아왔다는 소식 그것 하나였습니다. 


그토록 자신의 장수들에게 < 내 아들을 잘 부탁해 > 라고 당부했건만 그에게 전달된 소식은 < 아들 압살롬... 내 아버지는 평화이시다는 이름을 가지 내 아들 압샬롬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 


아히마아스가 다윗왕에게 와서 전합니다. 

(삼하 18:28) 아히마아스가 외쳐 왕께 아뢰되 평강하옵소서 하고 왕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이르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리로소이다 그의 손을 들어 내 주 왕을 대적하는 자들을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


아히마아스가 왕에게 한 첫인사가 < 샬롬 ! 평안하십니까? > 였습니다.

 왕에게 샬롬이 있느냐 물었습니다. 

그때 다윗왕는 아히마하스에게 묻습니다. 

< 젊은 압샬롬은 잘 있느냐 > 라고 묻습니다. 

이 부분을 원어 성경을 보면 < 젊은 압샬롬은 샬롬 하느냐 ? 평안하느냐 ? > 라는 의미입니다. 





그제서야 왕의 진심을 알게 된 < 아히마아스 >는 다른 말로 둘러댑니다. 

(삼하 18:29) 왕이 이르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하니라 아히마아스가 대답하되 요압이 왕의 종 나를 보낼 때에 크게 소동하는 것을 보았사오나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나이다 하니


그리고 뒤이어 들어온 < 구스 사람 >에게도 묻습니다. 

< 젊은 압샬롬은 샬롬하더냐 ? >라고 묻습니다


결국 다윗왕이 듣고 싶지 않았던 압샬롬의 죽음을 듣게 됩니다. 


(삼하 18:32) 왕이 구스 사람에게 묻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구스 사람이 대답하되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청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눈치없이 다윗의 진심도 모른채 다윗에게 비통한 소식을 전합니다. 


저는 구스사람과 아히마아스를 보면서 < 어렵고 힘든 말도 참 잘 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상대의 입장과 마음의 상태가 어떤지? 무엇을 기대하는 지을 잘 읽고 그 사람이 용납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 < 꼭 해야할 말이 있다면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할 말보다 중요한것은 말을 전달 받을 사람의 마음의 상태입니다. >


제가 한 달전에 이런 글을 제 페이스북에 남긴 적이 있습니다. 

< 세상에는 그것이 알고 싶은 일이 있다. 세상에는 그것을 모르고 싶은 일이 있다. 다 알고 싶을 때도 있고 다 모르고 싶을 때도 있다. 어떤 일은 몰라도 될일을 다 알려주는 이도 있고, 다 알아야할 일을 모른 척하는 이도 있다. 놀라운 것은 내가 알아야 할일은 잘 들리지 않고 내가 몰라도 될일 만 잘 들린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나에게 어떻게 알려주고 있느냐? 그리고 그것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느냐? 이다.  >




다윗에게 자기의 군대가 전쟁에서 승리한 소식은 그것이 알고 싶은 소식이라면 

다윗에게 자기의 아들이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소식은 그것을 모르고 싶은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절에 아들 압살롬의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면 울부짖는 다윗의 비통한 울부 짖음을 봅니다. 


(삼하 18:33)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


우리는 지난 50여일 전부터 한국 진도 팽목항에서 들려운 세월호 유족들 그중에서 생때같은 자식을 읽은 부모들의 오열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생중계를 지켜봐야 했습니다. 


직도 사고가 난지 53일째가 되었는데요. 아직 14명의 실종자가 남아있습니다.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눈물도 마른 안타까운 현실을 보고 있습니다. 계속 < 실종자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수 있도록 > 계속 기도해야 할 것 입니다. 






자식을 잃은 아비의 슬픔을 이루 말할수 없는 고통입니다. 


다윗왕은 < 두문사이에서 아들의 무사히 살아서 자기 곁으로만 돌아오기를 기다렸건만 ..> 아무리 소식을 전하는 이들이 < 왕이여 ! 샬롬 하십니까 ? >라고 물어도 다윗왕의 그 토록 원했던 <샬롬>은 <압샬롬>이었습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이지요. 


다윗이 바랬던 < 샬롬 >은 전쟁에서 자신의 대적자들이 다 없어져서 모든 원수가 갚아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바랬던 < 샬롬 >은 전쟁을 통해서 모든 원수 맺은 것이 풀러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 왠수 같은 아들 압살롬 >이 자신 곁으로 돌아와 다시금 두 사람의 관계가 < 샬롬 곧 평화 >로 회복될 수 있길 기대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아들의 죽음앞에 < 마음이 심히 아팠습니다. > 여기서 마음이 심히 아팠다는 표현은 < 그의 마음이 끊어지듯 요동쳤다는 의미입니다. > 그러면서 다윗은 말합니다. <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압살롬 내아들아 내 아들아 > 


다윗에게서 참된 샬롬은 < 압샬롬 >을 없애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에게 참된 샬롬은 < 압샬롬 >함께 두사람의 관계를 샬롬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힘들게 하고 나를 어렵게 하는 사람을 피하고 얼굴도 보지 않는 것이 내 마음의 샬롬을 유지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속으로 < 저사람 좀 없어져주었으면 .. 저 사람 우리 교회 떠났으면.. 싶은 사람 있나요> 꼴보기 싫은 사람을 피해서 그 꼴 보지 않는다고 해서 내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샬롬, 참된 평안은 어렵지만 불편하지만, 

그 사람과의 화평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이전보다 잘 지내지는 못해도 불편하게 지내는 일은 없어야합니다. 


<용서와 관련하여 이런 글을 본적이 있습니다.> 


때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도저히 지울 수가 없는 분한 일들도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지우고 용서하라. 왜냐하면 그런 기억과 분노들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질을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이 건너야 할 다리를 없애버리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습니다.’(로드 하버트)


‘용서는 어쩌다 한번 하는 행위가 아니라 지속적인 태도입니다.’(마틴 루터 킹 주니어) 상대를 위해서도 용서가 필요하지만 결국,용서는 나를 위해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다윗이 그토록 아들 압살롬을 두문사이에서 기다렸던 것은 바로 압살롬에게 용서를 구하려고하는 기다림이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아비로써 아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 그래서 다윗은 아들의 죽음앞에서 < 차라리 내가 대신 죽었으면 좋으련만 >이라고 아들의 이름을 그토록 비통하게 불렀 던이 아니겠네 생각해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합한 사람은 용서하는 일을 쉽게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합한 가정은 서로에게 용서를 구하는 일이 자연스러운 가정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샬롬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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