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6/07/2013 GSC 새벽묵상설교 
  • 사무엘하 18:24-33
  • 승리보다 샬롬입니다. 

@ 설교본문의 그림 인터넷에서 갈무리함 


[삼하 18:24-33]

(삼하 18:24) 때에 다윗이 두 문 사이에 앉아 있더라 파수꾼이 성 문 위층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보니 어떤 사람이 홀로 달려오는지라

(삼하 18:25) 파수꾼이 외쳐 왕께 아뢰매 왕이 이르되 그가 만일 혼자면 그의 입에 소식이 있으리라 할 때에 그가 점점 가까이 오니라

(삼하 18:26) 파수꾼이 본즉 한 사람이 또 달려오는지라 파수꾼이 문지기에게 외쳐 이르되 보라 한 사람이 또 혼자 달려온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도 소식을 가져오느니라

(삼하 18:27) 파수꾼이 이르되 내가 보기에는 앞선 사람의 달음질이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의 달음질과 같으니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는 좋은 사람이니 좋은 소식을 가져오느니라 하니라

(삼하 18:28) 아히마아스가 외쳐 왕께 아뢰되 평강하옵소서 하고 왕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이르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리로소이다 그의 손을 들어 내 주 왕을 대적하는 자들을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

(삼하 18:29) 왕이 이르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하니라 아히마아스가 대답하되 요압이 왕의 종 나를 보낼 때에 크게 소동하는 것을 보았사오나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나이다 하니

(삼하 18:30) 왕이 이르되 물러나 거기 서 있으라 하매 물러나서 서 있더라

(삼하 18:31) 구스 사람이 이르러 말하되 내 주 왕께 아뢸 소식이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왕을 대적하던 모든 원수를 갚으셨나이다 하니

(삼하 18:32) 왕이 구스 사람에게 묻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구스 사람이 대답하되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청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삼하 18:33)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제목 : 승리보다 샬롬입니다. 


오늘 본문은 압살롬의 죽음이후에 일어난 다윗왕의 비통해하는 심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왕의 군대는 압살롬의 반란군의 전쟁에서 승리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압살롬을 죽이게 됩니다. 



다윗왕에게서 반란군이 진압된 것은 좋은 소식이지만 그토록 < 너그럽게 봐주어서 .. 살아서 데려오기를 기다렸던 아들의 어이없는 없는 죽음 >의 소식은 불편한 소식입니다. 


비록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승전보는 좋은 소식이지만 자신의 아들이 그 전쟁에서 비참하게 죽었다는 비보는 자신이 우려했던 것이 현실이 된 안타까운 소식입니다.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 구스 사람 >과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에 달음질을 합니다. 처음에 < 구스 사람 >이 이 소식을 전하려 달음질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히마아스>가 구스사람보다 앞서서 이 소식을 전하고 싶어서 달음질을 합니다. 이미 요압은 다윗이 이 소식을 들었을 때 무엇에 더 많은 관심이 있을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압은 다윗에 이 소식을 전하는 것을 주저하죠. 


(삼하 18:22)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다시 요압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아무쪼록 내가 또한 구스 사람의 뒤를 따라 달려가게 하소서 하니 요압이 이르되 내 아들아 너는 왜 달려가려 하느냐 이 소식으로 말미암아서는 너는 상을 받지 못하리라 하되


결국에 후발주자였던 < 아히마아스 >가 < 구스 사람 >을 앞질러 왕에게 도착합니다. 그리고 소식을 전합니다. 


오늘 본문에 시작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 때에 다윗이 두문 사이에 앉아 있더라... > 



다윗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전쟁의 승리의 소식을 기다렸을까요? 

아니면 아버지를 버리고 떠나 반역의 길로 갔던

 아들 압살롬을 기다렸을까요? 


다윗은 무엇을 더 원했을까요 ?

전쟁의 승리를 통한 승리의 기쁨을 원했을까요? 

아니면 전쟁의 승리를 통해 샬롬이 회복되는 것을 원했을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다윗 원했던 것은 < 승리보다 샬롬 > 이었습니다. 

다윗이 원했던 것은 < 전쟁의 승리보다 아들 압샬롬 > 이었습니다. 

다윗이 그토록 기다렸던 좋은 소식은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승전보가 아니라 전쟁에서 아들만이라도 자신의 곁으로 돌아왔다는 소식 그것 하나였습니다. 


그토록 자신의 장수들에게 < 내 아들을 잘 부탁해 > 라고 당부했건만 그에게 전달된 소식은 < 아들 압살롬... 내 아버지는 평화이시다는 이름을 가지 내 아들 압샬롬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 


아히마아스가 다윗왕에게 와서 전합니다. 

(삼하 18:28) 아히마아스가 외쳐 왕께 아뢰되 평강하옵소서 하고 왕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이르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리로소이다 그의 손을 들어 내 주 왕을 대적하는 자들을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


아히마아스가 왕에게 한 첫인사가 < 샬롬 ! 평안하십니까? > 였습니다.

 왕에게 샬롬이 있느냐 물었습니다. 

그때 다윗왕는 아히마하스에게 묻습니다. 

< 젊은 압샬롬은 잘 있느냐 > 라고 묻습니다. 

이 부분을 원어 성경을 보면 < 젊은 압샬롬은 샬롬 하느냐 ? 평안하느냐 ? > 라는 의미입니다. 





그제서야 왕의 진심을 알게 된 < 아히마아스 >는 다른 말로 둘러댑니다. 

(삼하 18:29) 왕이 이르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하니라 아히마아스가 대답하되 요압이 왕의 종 나를 보낼 때에 크게 소동하는 것을 보았사오나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나이다 하니


그리고 뒤이어 들어온 < 구스 사람 >에게도 묻습니다. 

< 젊은 압샬롬은 샬롬하더냐 ? >라고 묻습니다


결국 다윗왕이 듣고 싶지 않았던 압샬롬의 죽음을 듣게 됩니다. 


(삼하 18:32) 왕이 구스 사람에게 묻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구스 사람이 대답하되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청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눈치없이 다윗의 진심도 모른채 다윗에게 비통한 소식을 전합니다. 


저는 구스사람과 아히마아스를 보면서 < 어렵고 힘든 말도 참 잘 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상대의 입장과 마음의 상태가 어떤지? 무엇을 기대하는 지을 잘 읽고 그 사람이 용납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 < 꼭 해야할 말이 있다면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할 말보다 중요한것은 말을 전달 받을 사람의 마음의 상태입니다. >


제가 한 달전에 이런 글을 제 페이스북에 남긴 적이 있습니다. 

< 세상에는 그것이 알고 싶은 일이 있다. 세상에는 그것을 모르고 싶은 일이 있다. 다 알고 싶을 때도 있고 다 모르고 싶을 때도 있다. 어떤 일은 몰라도 될일을 다 알려주는 이도 있고, 다 알아야할 일을 모른 척하는 이도 있다. 놀라운 것은 내가 알아야 할일은 잘 들리지 않고 내가 몰라도 될일 만 잘 들린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나에게 어떻게 알려주고 있느냐? 그리고 그것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느냐? 이다.  >




다윗에게 자기의 군대가 전쟁에서 승리한 소식은 그것이 알고 싶은 소식이라면 

다윗에게 자기의 아들이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소식은 그것을 모르고 싶은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절에 아들 압살롬의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면 울부짖는 다윗의 비통한 울부 짖음을 봅니다. 


(삼하 18:33)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


우리는 지난 50여일 전부터 한국 진도 팽목항에서 들려운 세월호 유족들 그중에서 생때같은 자식을 읽은 부모들의 오열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생중계를 지켜봐야 했습니다. 


직도 사고가 난지 53일째가 되었는데요. 아직 14명의 실종자가 남아있습니다.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눈물도 마른 안타까운 현실을 보고 있습니다. 계속 < 실종자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수 있도록 > 계속 기도해야 할 것 입니다. 






자식을 잃은 아비의 슬픔을 이루 말할수 없는 고통입니다. 


다윗왕은 < 두문사이에서 아들의 무사히 살아서 자기 곁으로만 돌아오기를 기다렸건만 ..> 아무리 소식을 전하는 이들이 < 왕이여 ! 샬롬 하십니까 ? >라고 물어도 다윗왕의 그 토록 원했던 <샬롬>은 <압샬롬>이었습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이지요. 


다윗이 바랬던 < 샬롬 >은 전쟁에서 자신의 대적자들이 다 없어져서 모든 원수가 갚아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바랬던 < 샬롬 >은 전쟁을 통해서 모든 원수 맺은 것이 풀러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 왠수 같은 아들 압살롬 >이 자신 곁으로 돌아와 다시금 두 사람의 관계가 < 샬롬 곧 평화 >로 회복될 수 있길 기대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아들의 죽음앞에 < 마음이 심히 아팠습니다. > 여기서 마음이 심히 아팠다는 표현은 < 그의 마음이 끊어지듯 요동쳤다는 의미입니다. > 그러면서 다윗은 말합니다. <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압살롬 내아들아 내 아들아 > 


다윗에게서 참된 샬롬은 < 압샬롬 >을 없애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에게 참된 샬롬은 < 압샬롬 >함께 두사람의 관계를 샬롬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힘들게 하고 나를 어렵게 하는 사람을 피하고 얼굴도 보지 않는 것이 내 마음의 샬롬을 유지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속으로 < 저사람 좀 없어져주었으면 .. 저 사람 우리 교회 떠났으면.. 싶은 사람 있나요> 꼴보기 싫은 사람을 피해서 그 꼴 보지 않는다고 해서 내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샬롬, 참된 평안은 어렵지만 불편하지만, 

그 사람과의 화평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이전보다 잘 지내지는 못해도 불편하게 지내는 일은 없어야합니다. 


<용서와 관련하여 이런 글을 본적이 있습니다.> 


때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도저히 지울 수가 없는 분한 일들도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지우고 용서하라. 왜냐하면 그런 기억과 분노들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질을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이 건너야 할 다리를 없애버리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습니다.’(로드 하버트)


‘용서는 어쩌다 한번 하는 행위가 아니라 지속적인 태도입니다.’(마틴 루터 킹 주니어) 상대를 위해서도 용서가 필요하지만 결국,용서는 나를 위해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다윗이 그토록 아들 압살롬을 두문사이에서 기다렸던 것은 바로 압살롬에게 용서를 구하려고하는 기다림이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아비로써 아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 그래서 다윗은 아들의 죽음앞에서 < 차라리 내가 대신 죽었으면 좋으련만 >이라고 아들의 이름을 그토록 비통하게 불렀 던이 아니겠네 생각해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합한 사람은 용서하는 일을 쉽게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합한 가정은 서로에게 용서를 구하는 일이 자연스러운 가정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샬롬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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