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7/02/20014 새벽묵상설교 
  • <마가복음 1:16-34>
  • 하나님의 나라의 제자도 


  • @ 설교본문의 그림 인터넷 갈무리함  

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마가복음 1: 16 - 34>


제목 : <마가복음 1:16-34> 하나님 나라의 제자도


[1:16-34]

(1: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18)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1: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1:20)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1:21)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1:22)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1:23)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1: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1:2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1: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1:27)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1:28)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1:29)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1:30)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1:31)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1:32)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1:33)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1:34)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제목 : 하나님 나라의 제자도

 

우리는 복음서를 읽고 묵상할 때면 4가지 사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입니다. 복음서는 우리에게 바로 예수님은 누구신가?에 대한 바른 이해를 제공해줍니다.
  • 둘째는 예수 그리스동의 활동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은 죄사함을 주고 우리를 회개 케하고 놀라운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게 하십니다.
  • 셋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와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 넷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반응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정체와 활동 그리고 가르침을 보고서 예수님을 믿고 따를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을 거부하고 죽일 것인가?를 반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부터 이러한 <예수그리스도의 정체/활동/가르침/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한지를 알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가복음 11절에서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는 마가복음의 선포를 보았습니다

마가는 <복음의 시작>이라는 말로 <시작 / :아르케>는 말을 강조합니다.


< 시작 >이라는 말은 < 원천 / 기원 >을 의미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의 기원이기에 그 기원으로부터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주목해서 보아야합니다.


복음의 기원이시며 복음의 시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이 말씀에는 3가지 강조점 있습니다

< 때가 찼다 > <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 > <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




<때가 찼다>는 것은 역사의 결정적인 순간이 왔음을 의미합니다. 바로 선지자들의 예언이 성취되는 순간이 왔고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경험되어질 때가 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제 막 이루어지려고 한다는 뜻입니다. 마가는 복음을 설명할때마다 예수님의 사역을 설명할때마다 의도적으로 < 하나님의 나라 >에 대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가복음이 누구를 대상으로.. 누구를 독자로 쓰여졌는지?를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 하나님 나라 >를 강조하고 있는지를 알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을 읽은 1세기 청중들은 바로 로마에서 고난받고 핍밥받고 있는 성도들을 위해서 쓰여졌습니다. 


마가복음의 기록연대를 AD65-70년을 보는데 그때는 바로 로마 황제의 박해로 순교에 직면하는 고난속에서 살고 있는 성도들이 이 복음서를 읽게 하는 것이 목적이였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의도적으로 <고난>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나라 로마의 통치와 다스림을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너희가 진정으로 고대하고 경험해야할 나라가 있다 바로 그것이 < 하나님 나라 >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마가복음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말하는 동시에 미래에 도래할 하나님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재 로마 나라의 통치와 다스림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 >는 메시지는 그들에는 말수 없은 소망과 강력한 위로의 메시지 이엇을 것입니다.

 



복음서는 < 예견된 하나님의 나라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 >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복음서를 <예수님의 생애의 이야기나 전기>로 생각하는 우리가 복음서를 읽을 때 예수님을 일생을 다른 글이 아니라 < 예수그리스도를 생생하게 경험하고 지금 현재도 경험하고 느끼고 있는 증언이요 고백으로 보아야합니다.

 

마가는 바로 그러한 <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하나님 나라를 고백 하고 있습니다. > 이러한 증언과 고백은 우리에게 < 전심으로 주께로 돌아서 예수 가전한 복음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믿을 갖는 반응 >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살펴봅시다

마가가 우리에게 복음을 이해함에 있어서 가져야할 이해는 < 하나님 나라 >입니다

이것을 마태는 <하늘 나라 / 천국 >이라는 유대식표현으로 바꾸었습니다.

 

분명 예수님의 사역은 <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 >는 선언에서 시작됩니다. 그후의 이야기를 담고있는 오늘 본문은 하나님 나라와 관련하여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 읽은 본문은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있었던 몇가지 사건들을 간략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 가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 >는 부름에 주저 없이 반응하는 자신의 첫 번째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권세를 갖고 가르치시고 귀신을 좇아내시고 시몬의 장모를 고치시고 더 나아가 가버나움에서 질병과 귀신을 모두 물리치는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 이러한 일들은 예수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어떤 관련이 있는 일일까요?


< 하나님 나라는 현재에 경험될수 있는 나라 이며 미래에 임할 나라입니다. >

< 하나님 나라는 현재 예수님 자신을 통해서 실현되고 있습니다. >

<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오셔서 통치와 다스림이 무엇인지 보여주신 나라입니다. >

 


1/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을 따르기로 초청하시는 제자들과 함께 세워가는 나라입니다. 주님께서 가장 우선적으로 하신일은 < 혼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그 일을 다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과 같은 제자로 부르시는 일이었습니다. >


예수님은 어부와 같이 평범한 일상에 머물고 있고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이들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제자는 자신이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고 하나님 나라에 동참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입니다. 제자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제자는 스스로의 의사에 의해서 아니라 예수님의 선택에 의해서 부름을 받습니다. < 부르심 과 선택 >을 통해서 우리는 결정해야합니다. < 따를 것인지 ? 아님 거부할것인지? >를 반응해야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오해하기 쉬운 단어는 < 버려두고 >라는 단어입니다.

16- 20절에 <따르다>는 동사가 3번 나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 부르심과 선택 >을 강종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반응으로 2번 등장하고 있는 단어가 < 버려두고 >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을 흔히 많은 분들이 오해합니다. < 거부하고 거절하다 >는 조금 부정적인이 용어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 버려두고 >라는 단어는 < 그냥 그대로 있도록 놓아 두고 >의 의미가 있습니다.


또 하나의 오해는 이 4명의 제자들을 부르실 때 <갑자가 불러서 당황스럽게 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오늘 본문 16절을 유심히 보면 예수님은 이들을 부를 때 사전 지식이 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1: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본문의 원어를 살펴보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의 부르시는 장면에서 이미 예수님은 제자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기 위해서 < 천천히 걷고 있었고 주목하여 보았고 그 이름을 불렀습니다. > 놀라운 것은 < 시몬과 안드레가 형제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부친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초면이 아닌것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사람을 제자로 부르시는 일에서부터 그 놀라운 일들이 시작되고 있음을 볼수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묵상해볼수 있는 것은 나는 하나님 나라에 어떤 사람으로 초청받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나라의 원리와 다른 가르침을 경험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하신 사역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특히 안식일에 특히 회당에서 가르치고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이들의 반응을 < 뭇사람이 그 교훈에 놀라니 >라고 반응합니다.


유독 예수님은 안식일에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치는 일을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 하필 안식일일까요?

 

안식일은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의 일을 다 마치셔서 더 할 일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안식일은 의미가 없어 졌습니다.


하나님의 질서와 통치가 죄로 인해 파괴된것입니다. 바로 예수님 안식일에 가르치시고 고치시는 사건은 하나님의 나라가 < 에덴의 회복 >을 경험케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결핍되어서 온 문제를 새롭게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질서와 원리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유대인들이 한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영적인 원리들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유대왕국의 회복을 생각했던 로마나라에서 정치적인 회복을 생각했던 하나님의 나라가 이렇게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충격이었습니다.

 

3/ 하나님의 나라에서 치유와 회복의 일들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이 실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의 권세와 능력으로 행할수 있는 무엇인지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현재적 사실을 말해주는 사건이 바로 < 귀신이 쫓겨나는 사건 >입니다. 여기서 귀신은 < 더러운 영들>입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내어 쫓으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거기 이미 임했음을 증거하셨습니다. 바로 귀신인 내어 쫓아졌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탄의 나라(귀신의 나라)에 속한 자를 해방시켜서 하나님 나라로 이동시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실현된 것이다. 귀신이 쫓겨감은 하나님 나라가 실현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치유 이적을 동반한 것은 (귀신을 내어쫓고, 병자 고치심)하나님 나라의 실현(시위 :Demonstration)입니다실제 행동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마가의 복음선포는 일관되게 < 하나님 나라 >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을 따르기로 초청하시는 제자들과 함께 세워가는 나라입니다.

2/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나라의 원리와 다른 가르침을 경험하게 합니다.

3/ 하나님의 나라에서 치유와 회복의 일들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들입니다.

 

오늘 그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곁에 와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같이 그 하나님 나라의 제자로써 어떻게 주님을 따르면 

그 능력을 시용하며 살 것 인지?를 결정해야합니다




[ 하나님의 나라란? (이승구교수)]


천국 복음을 믿고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 온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우리에게 임하여 온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참된 신자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동시에 믿는 사람이다. 예수님께서 가져다주신 영적인 하나님 나라가 여기 현존하고 있다는 것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자신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아서만 이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 안에 있다는 것을 믿고, 그 나라 백성으로 열심히 살면서 동시에 이 땅에 영적으로 임하여 왔고,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그 나라가 예수님의 재림 때에 그 나라의 극치에 이를 것을 고대하면서 날마다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기를 주님의 재림 때까지 그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에 대한 기대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영적으로 여기 임하여 왔다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근거한 것이다. 현재성을 믿는 사람만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을 제대로 믿는 것이다. 미래에 나타나게 될 극치의 하나님 나라를 참으로 믿는 사람은 현재 그 나라가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임하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믿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둘 다 믿지 않은 것도 불신앙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선택해 믿는 것도 큰 불신앙이다. 우리는 예수님과 그의 사도들이 가르쳐준 그대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모두 믿어야 한다.


 이를 참으로 믿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그 말 뜻 그대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살아간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마땅한 의무이지만 동시에 하나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잘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가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존중하며 그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잘 받아 가는 성경의 사람들이며, 성령님께 온전히 순종해 가는 성령의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을 성경은 “신령한 자”라고 말한다.


[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의 나라 (톰라이트) ]


오해된 하나님 나라 
저자는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가야할 천국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럼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가서 경험하는 하나님 나라만 생각하는 것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이런 사고는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나 설교, 그리고 많은 책에 스며들어 있다. 

희망은 지옥을 탈출하는 것처럼 이 세상을 벗어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희망은 언제나 부활에서 출발한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부활과 함께 할 때 더 큰 의미를 갖게 하며, 이 부활은 궁극적인 희망을 낳게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창조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희망이지만, 그것은 다가올 종말론 성취만을 고대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삶 가운데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의 역동성이다. 

저자는 낙원이나 천국에 대한 기대는 언제나 부활에서 시작됨을 강조한다. 부활에 대한 견해를 믿는 종교는 유대교나 기독교 외에는 없다. 물론 유대교도 기독교가 말하는 부활과 다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그를 믿는 이들에 대한 부활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 저자는 부활에 대한 바른 이해가 천국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톰 라이트는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완성은 종말론적 성취에서 이뤄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된 새 창조를 통해 이 땅에서 실현되어야 할 것을 강조한다. 그것은 “이 세상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 위에 주님이신 예수님의 주권에 기초해 이 세상으로 나아가는 사명을 의미”한다. 

결국 기독교적 희망의 근본적 왜곡은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의 열망과 현재적 하나님 나라에 대한 방치다. 현재의 세상을 내버려 둠으로써 아무런 지지도 받지 않고 활동할 수 있게 하는 정적주의를 저자는 경고 한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