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6/12/2014 GSC새벽묵상설교 
  • 사무엘하 20:1-13
  • 제목 : 치세의 능신(能臣) 난세의 간웅(奸雄)
  • @ 설교본문의 그림 인터넷에서 갈무리함


[ 삼하 20:1-13 ]

(삼하 20:1) 마침 거기에 불량배 하나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세바인데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이었더라 그가 나팔을 불며 이르되 우리는 다윗과 나눌 분깃이 없으며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우리에게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매

(삼하 20:2) 이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따르기를 그치고 올라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따르나 유다 사람들은 그들의 왕과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따르니라

(삼하 20:3) 다윗이 예루살렘 본궁에 이르러 전에 머물러 왕궁을 지키게 한 후궁 열 명을 잡아 별실에 가두고 먹을 것만 주고 그들에게 관계하지 아니하니 그들이 죽는 날까지 갇혀서 생과부로 지내니라

(삼하 20:4) 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위하여 삼 일 내로 유다 사람을 큰 소리로 불러 모으고 너도 여기 있으라 하니라

(삼하 20:5) 아마사가 유다 사람을 모으러 가더니 왕이 정한 기일에 지체된지라

(삼하 20:6) 다윗이 이에 아비새에게 이르되 이제 비그리의 아들 세바가 압살롬보다 우리를 더 해하리니 너는 네 주의 부하들을 데리고 그의 뒤를 쫓아가라 그가 견고한 성읍에 들어가 우리들을 피할까 염려하노라 하매

(삼하 20:7) 요압을 따르는 자들과 그렛 사람들과 블렛 사람들과 모든 용사들이 다 아비새를 따라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뒤쫓으려고 예루살렘에서 나와

(삼하 20:8) 기브온 큰 바위 곁에 이르매 아마사가 맞으러 오니 그 때에 요압이 군복을 입고 띠를 띠고 칼집에 꽂은 칼을 허리에 맸는데 그가 나아갈 때에 칼이 빠져 떨어졌더라

(삼하 20:9) 요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내 형은 평안하냐 하며 오른손으로 아마사의 수염을 잡고 그와 입을 맞추려는 체하매

(삼하 20:10) 아마사가 요압의 손에 있는 칼은 주의하지 아니한지라 요압이 칼로 그의 배를 찌르매 그의 창자가 땅에 쏟아지니 그를 다시 치지 아니하여도 죽으니라 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뒤쫓을새

(삼하 20:11) 요압의 청년 중 하나가 아마사 곁에 서서 이르되 요압을 좋아하는 자가 누구이며 요압을 따라 다윗을 위하는 자는 누구냐 하니

(삼하 20:12) 아마사가 길 가운데 피 속에 놓여 있는지라 그 청년이 모든 백성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아마사를 큰길에서부터 밭으로 옮겼으나 거기에 이르는 자도 다 멈추어 서는 것을 보고 옷을 그 위에 덮으니라

(삼하 20:13) 아마사를 큰길에서 옮겨가매 사람들이 다 요압을 따라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뒤쫓아가니라

 

제목 : 치세의 능신(能臣) 난세의 간웅(奸雄)

 

중국의 소설 삼국지에 보면 < 조조(曹操) >라는 인물을 가르켜 <허자장>이라는 사람으로부터 < 그대는 치세의 능신(能臣)이고, 난세의 간웅(奸雄)이다. >는 평을 듣습니다. 여기서 < 치세의 능신 >이란 나라가 < 잘 다스려질 때는 유능한 신하라는 뜻 >이고, < 난세의 간웅 >이란 < 세상이 어지러울 때는 권모술수에 능한 영웅 >이란 뜻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무엘하에 보여지고 있는 다윗의 시대가 바로 이러한 < 치세와 난세 >사이에 있는 시대 라로 할수 있을 것입니다


압살롬의 반란과 반역이후에 계속 다윗의 시대는 < 난세 >와 같이 어수선하고 어지러운 반목과 갈등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피의 복수와 숙청과 같은 계속 되는 피의 역사가 계속되어가고 있습니다


그 한 중심에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사람이 바로 < 요압 >입니다.

 

<요압>은 다윗을 대신해서 다윗의 정적들이 될 만한 인물들을 제거하고 그리고 다윗을 대신해서 일어나고 있는 < 다윗에게 대항하는 반란의 세력들을 > 제거합니다. 다윗에게는 충신중에 충신입니다. 다윗을 위해서 알아서 그 난세를 잠재우기 위해서 손에 피를 붙이는 것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요압>은 다윗의 편의 서서 이미 <압살롬의 반역>을 압장서서 제압을 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도 보면 공공연하게 다윗을 비난하고 다윗에 대해서 불만과 반대입장을 갖고 있는 < 세바의 난 >을 처리하는 일이나, 다윗을 따르는 일에 미혼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 아마사 >를 자신의 손으로 처리하는 일을 보면 무자비할 정도로 다윗을 위해 그 일들을 해나갑니다.

 

여기서 <요압>같은 사람이 다윗에게 있어서 참 고마운 것 같지만 <요압>은 다윗을 위한다는 명분하에 자신의 야심과 자신의 숨은 동기를 갖고 그일들을 해나갑니다. 결국 나중에 보면 이 충성스러운 요압도 다윗을 반역하는 것을 보면 <요압>이 이런 과격한 충성뒷편에는 또다른 얼굴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해볼수 있습니다.

 

사무엘하에서 보여지고 있는 다윗의 시대는 그다지 샬롬의 시대는 아니었습니다. 난세중에 난세였습니다. 압살롬의 반란이후로 이스라엘 안에는 많은 후휴증에 남았습니다. 바로 그것은 < 다윗에 대한 불신과 불만 >이었습니다. 압살롬을 따랐던 무리들을 다윗은 아직 통합하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이스라엘 안에는 지역적인 갈등과 뜻이 다른 마음들이 존재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무리들인 오늘 본문 201장에 < 불량배 >라고 표현되어있는 베냐민 지파사람들인 <불량배같은 세바>와 같은자들이었습니다.

 

(삼하 20:1) 마침 거기에 불량배 하나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세바인데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이었더라 그가 나팔을 불며 이르되 우리는 다윗과 나눌 분깃이 없으며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우리에게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단어 있습니다.

 < 마침 거기에 >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장소적으로는 < 길갈 >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시간적으로 < 그후에. 그일로부터 >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바로 앞장에 어떤 일이 있습니까? 1940-43절에 이스라엘 안에서 분열이 일어납니다. 서로 뜻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일들이 일어납니다. < 다윗왕이 환궁을 하는데 이 문제를 이스라엘 공동체전체와 지파와 의논을 하지 않고 유대지파가 주도권을 갖고 이일을 추진했다고 나머지 10지파에서 날리가 납니다. >

 

항상 갈등과 분열은 < 뜻이 다를 때 > 일어납니다. 




혹시 중국의 난세의 역사와 영웅을 다루고 있는 삼국지(三國志)와 수호지(水滸志)에서 <()>라는 글자는 땅지()가 아니라 뜻지()라는 것을 알고 있으십니까

삼국지가 세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 세나라  뜻 >에 대한 이야기인것입니다.








 

바로 분열과 갈등은 바로 뜻을 다르게 품을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이러한 지파들이 같은 뜻을 품지 못하고 서로 오해하고 서로 용납하지 못해서 생긴 일들입니다. 이러한 10지파 이스라엘과 1지파 유다와의 갈등은 나중에 솔로몬 시대에 나라가 분열이되는 계기가 됩니다. 이때부터 시작된 오래된 앙금과 반목은 압살롬의 반역이후에 일어나는 심각한 후휴증이요 상처의 결과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가 생각해볼수 있는 것은 한 가정의 갈등이 나중에 어떻게 민족의 갈등으로 확대 재생산될수 있는지를 우리가 단적으로 볼수 있는 예라고 할수 있습니다.

다윗왕이 지금 지나고 있는 이 난세에는 여전히 남은 갈등과 반목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된 반역의 멈추지 않은 갈등이 나오고 있습니다.

 

< 마침 거기에 불량배 하나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세바인데... > 라고 오늘 본문은 그러한 난세의 배경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세바를 말하길 <불량배>라고 말합니다. 이말은 개역한글성경에는 <난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원어로는 <이쉬 벨리야알>입니다. 그 뜻은 < 약한 사람. 무가치한 사람 >이라는 뜻입니다. 얼마나 이 세바가 다윗에 대한 불만과 비난을 노골적으로 하느냐하면 오늘의 본문에서 2가지 행동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가 < 나팔을 불었다 >는 것입니다. 나팔 곧 쇼파르를 부는 행위는 임박한 재앙과 전쟁을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바로 왕과의 전쟁을 선포하는 행위였습니다.




둘째는 세바가 다윗을 < 이새의 아들 >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을 < 이스라엘의 왕 >이라고 부르지 않고 < 이새의 아들 >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다윗을 진정한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다윗왕을 <폄하>하는 언사입니다

막말파문의 당사자가 바로 <세바>입니다.



세바는 다윗과 전쟁을 선포하고 다윗을 비난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러한 세바를 따르는 무리들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삼하 20:2) 이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따르기를 그치고 올라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따르나 유다 사람들은 그들의 왕과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따르니라


세바를 중심으로한 < 이스라엘파 >와 다윗을 중심으로한 <유다파>가 나뉘는 지역감정과 갈등을 부추기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왕궁으로 돌아 가장 먼저한 일은 < 압살롬과 대낮에 백성들이 보는데서 동침한 10명의 후궁들 >을 처리하는 일이었습니다


. 우리가 흔히 후궁들이 무슨 죄가 있나? 싶겠지만 다윗이 처리한 이 일은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압살롬의 잘못과 후궁들의 합의하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짐작해볼수 있수 있습니다. 다윗은 율법의 처리 규정에 따라 더 이상 다른 남자와 관계를 한 아내를 받아들지 않는 율법대로 10명의 후궁들을 처리합니다.

 

그리고 요압에게 자신과 사촌지간이 < 아마사 >의 군대와 함께 이 패역부도한 <세바 일당>들을 처리하고 오도록 명령합니다. 그러나 < 아마사 >는 이 왕의 명력에 미혼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삼하 20:4) 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위하여 삼 일 내로 유다 사람을 큰 소리로 불러 모으고 너도 여기 있으라 하니라

(삼하 20:5) 아마사가 유다 사람을 모으러 가더니 왕이 정한 기일에 지체된지라

 

그도 그럴것이...원래 <아마사>는 어떤 사람입니다

어느 편에 있던 사람이었습니까? 바로 압살롬의 편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요압의 사촌이었지만 아사마는 원래부터 다윗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압살롬의 편이었습니다.


(삼하 17:25) 압살롬이 아마사로 요압을 대신하여 군지휘관으로 삼으니라


다윗이 요압과 함께 아마사를 부른 것은 다윗이 더 이상 < 니편 내편 가리지 말고 우리 함께 화평을 이루자> 라고 하는 화해의 제스츄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사>는 다윗이 내민손을 미혼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제가 참 오래전에 재미있는 글을 보았습니다.

< 아부도 일관성이 있으면 충성이 되고

충성도 일관성이 없으면 아부만도 못하다 > 일리가 있는 글입니다.

 

<요압><아마사>는 서로가 집안이었고 사촌지간이었습니다


자신이 따르는 사람이 달라고 자신의 명분이 달라고 자신의 품은 뜻이 달랐습니다. < 니편 내편 >이 달랐습니다

다윗의 탁월한 치세가 바로 < 통합의 정치 >를 할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항상 분쟁과 갈등의 출발은 < 니편과 내편 >의 편가르기를 시작할 때 일어납니다.


그러한 가운데 <화해와 통합>은 없지요. 서로 반목하고 비난하고 폄하합니다.


오늘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문화 기독교가 바로 그러한 반목을 계속 보는 이유가 뭡니까? 자꾸 편가르기를 하는 것입니다. 지난 한국의 선거를 보십시오. 여전히 네가티브 선거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이번 선거에 재미있었던 결과중에 하나는 < 네거티브 전략 >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던 후보들이 당선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한국 사회의 골깊은 갈등은 바로 <사회통합과 화해>가 없는 < 니편과 내편 >을 나누는 반복된는 반목과 갈등에서 일어납니다.

 

다윗왕은 이스라엘 왕국에 계속되는 이러한 <갈등과 반목>을 해결하고자하는 시도로 바로 자신의 상대편에 속해있었던 <아마사>를 품고 그와 함께 나라를 안정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다윗의 뜻대로 되지 못합니다. < 아마사 >의 품은 뜻이 달라고 그리고 다윗을 따라고 있는 <요압>의 품은 뜻이 달랐습니다.

 

결국 이러한 아마사의 미혼적인 태도 때문에 <요압>에게 칼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요압의 칼에 죽임을 당하는 아마사의 죽음 장면을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상상하나는 아마도 <아마사>가 요압에게 칼을 맞으면서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 고마해라 ! 마이 묵었다 아이가 ... > 마치 영화 친구 한 장면이 생각과 같아 보입니다.




(삼하 20:11) 요압의 청년 중 하나가 아마사 곁에 서서 이르되 요압을 좋아하는 자가 누구이며 요압을 따라 다윗을 위하는 자는 누구냐 하니


(삼하 20:12) 아마사가 길 가운데 피 속에 놓여 있는지라 그 청년이 모든 백성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아마사를 큰길에서부터 밭으로 옮겼으나 거기에 이르는 자도 다 멈추어 서는 것을 보고 옷을 그 위에 덮으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치세를 원하는 다윗과 여전히 난세를 만들고 있는 다윗의 주변사람들을 모습을 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오늘 우리의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를 봅니다.

여전히 반목과 갈등 그리고 편가르기가 넘쳐나고 있는 이 시대를 봅니다

권위도 없고 책임도 없고 화해나 통합도 없는 어수선한 오늘의 현실을 봅니다.


그리고 여전히 <니편 내편>으로 서로에게 상처와 아품을 주고 있는 교회들의 갈등을 봅니다

그리고 여전히 사람에게 실망하고 사람에게 상처받고 있는 우리 자신을 봅니다.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바르실래>와 같은 사람보다는 <세바>와 같이 나를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고 비난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모습을 통해서 희망을 봅니다

그리고 그릇된 요압의 모습에서 절망도 봅니다

다윗의 다시 내민 손도 보지만 아마사와 같이 내민손을 뿌리치는 손도 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계의 착각은 < 내가 착하게 대하면 모두 다 나를 착하게 대할 것이다. >

라는 것입니다우리는 이러한 착각을 버려야 좋은 관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좋은 관계의 시작은 무슨 관계이든지 오해하지 않고 

이해하기를 작정하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좋은 관계의 법칙은 손해보기를 각오하는 일이며

 거절될 것을 각오하는 일입니다

좋은 관계의 완성은 상처받아도 또 다시 손을 내밀고 

다가가는 일을 멈추지 않는 일것입니다.

것이 진정한 <화해>이며그것이 진정한 <통합>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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