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3:28-39 

배제의 시대 포용의 은혜  


 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사무엘하 3:28-39 >

제목 : 배제의 시대 포용의 은혜 



[삼하 3:28-39]

(삼하 3:28) 그 후에 다윗이 듣고 이르되 넬의 아들 아브넬의 피에 대하여 나와 내 나라는 여호와 앞에 영원히 무죄하니

(삼하 3:29) 그 죄가 요압의 머리와 그의 아버지의 온 집으로 돌아갈지어다 또 요압의 집에서 백탁병자나 나병 환자나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나 칼에 죽는 자나 양식이 떨어진 자가 끊어지지 아니할지로다 하니라

(삼하 3:30) 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가 아브넬을 죽인 것은 그가 기브온 전쟁에서 자기 동생 아사헬을 죽인 까닭이었더라

(삼하 3:31) 다윗이 요압과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아브넬 앞에서 애도하라 하니라 다윗 왕이 상여를 따라가

(삼하 3:32) 아브넬을 헤브론에 장사하고 아브넬의 무덤에서 왕이 소리를 높여 울고 백성도 다 우니라

(삼하 3:33) 왕이 아브넬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이르되 아브넬의 죽음이 어찌하여 미련한 자의 죽음 같은고

(삼하 3:34) 네 손이 결박되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차꼬에 채이지 아니하였거늘 불의한 자식의 앞에 엎드러짐 같이 네가 엎드러졌도다 하매 온 백성이 다시 그를 슬퍼하여 우니라

(삼하 3:35) 석양에 뭇 백성이 나아와 다윗에게 음식을 권하니 다윗이 맹세하여 이르되 만일 내가 해 지기 전에 떡이나 다른 모든 것을 맛보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하매

(삼하 3:36) 온 백성이 보고 기뻐하며 왕이 무슨 일을 하든지 무리가 다 기뻐하므로

(삼하 3:37) 이 날에야 온 백성과 온 이스라엘이 넬의 아들 아브넬을 죽인 것이 왕이 한 것이 아닌 줄을 아니라

(삼하 3:38) 왕이 그의 신복에게 이르되 오늘 이스라엘의 지도자요 큰 인물이 죽은 것을 알지 못하느냐

(삼하 3:39) 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 대로 갚으실지로다 하니라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의 말씀은 자신의 수하 요압의 손에 죽은 아브넬의 장사하고 그를 애도하는 장면입니다. 

 사울의 정권에서 다윗의 정권으로 이양이 되고 있는 이러한 정권이양기의 시점에서 원한 맺힌 피의 복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울의 충실한 신하였던 아브넬을 죽이는 것은 어쩌면 다윗에서 당연한 결과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자신에게 그토록 모진 고통을 주는데 앞장섰던 아브넬을 애도하면 그를 죽은 요압을 칭찬해주기는커녕 요압에게 저주를 퍼붓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대목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이해가 되십니까?


우리가 흔히 아는 역사의 이야기나 대하드라마 속에서 한 정권이 바뀔 때는 < 보복과 피의 숙청, 폭력과 반목 >이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야만 세워지는 정권이 더 든든히 설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특히 서로에게 맺힌 원한과 상처가 많을 때는 더더욱 서로에게 처참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가 흔히 아는 역사 드라마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다윗은 아브넬의 화해의 손을 피의 복수로 갚지 않고 그와 화해하는 방법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심지어 고맙게도 아브넬을 처리해준 요압에게 상을 내리기는커녕 그를 저주합니다. 


(삼하 3:29) 그 죄가 요압의 머리와 그의 아버지의 온 집으로 돌아갈지어다 또 요압의 집에서 백탁병자나 나병 환자나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나 칼에 죽는 자나 양식이 떨어진 자가 끊어지지 아니할지로다 하니라


마치 삼족을 멸하는 것 같은 저주를 퍼붓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다윗이 삼족으로 멸해야하는 사람은 요압이 아니라 아브넬 입니다. 


요압이 다윗 대신에 골칫덩어리가 될지도 모를 사울의 사람 아브넬을 죽여준 것은 < 고마운 일 >입니다. 그리고 요압이 자신의 동생 아사헬의 죽음에 복수를하는 것은 요압에게선 < 당연한 일 >입니다. 다윗은 이 < 고맙고 당연한 일 >을 뒤집어 놓고 있습니다. 


도리어 요압을 책망하고 요압과 요압의 집을 축복하지 않고 저주하고 있습니다. 


왜? 다윗은 이러한 상식밖의 행동을 보여주고 있을까요? 


그 이유를 오늘 본문에 30절에서 한번 찾아 볼수 있습니다. 


(삼하 3:30) 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가 아브넬을 죽인 것은

            그가 기브온 전쟁에서 자기 동생 아사헬을 죽인 까닭이었더라


 다윗은 스스로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사울의 시대는 끝이 나고 다윗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자신의 시대를 열어주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무엘하 3장 1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지요..


(삼하 3:1)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


분명한 사실은 사울의 세력과 다윗의 세력간의 피의 전쟁이 오랫동안 있었습니다. 그 결과 대세가 기울고 있었습니다. 이제 사울의 세력은 점점 약해지고 다윗의 세력은 점점 강해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다윗은 계속 그런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 언제까지 이 피의 시대가 계속될것인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면 하나님의 계획인가 ? >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했던 다윗은 이러한 고민을 계속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래서 그가 원했던 새 시대의 모습은 더 이상의 반목이나 원수맺음이 아니라 < 화해와 포용 >의 시대를 원했을 것입니다.

< 배제의 시대에 포용의 은혜 >를 선택했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 화해와 포용의 첫 번째 시대를 여는 것이 바로 사무엘하 1장에 등장하는 < 사울와 요나단을 추모하고 애도하면 마치 헌정시 >에서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인 다윗의 시대에 자신이 기대하는 화해와 포용의 시대의 요청이었습니다.  


그리고 화해와 포용의 시대를 요청하는 두 번째 요청이 바로 < 사울의 신하 아브넬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를 위해 치루는 장례 >였습니다. 


바로 이것인 다윗의 중심이라는 것을 옅볼 수 있는 것은 당연히 행할 수 있는 요압의 복수조차도 다윗은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피의 복수를 멈추지 않고 있는 요압과 그의 집을 저주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더 이상의 인간의 < 원한맺음과 원수 갚음 >과 같은 인간적인 방식과 시대를 거부해야할 때가 왔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이 통치하는 시대는 그런 방식으로 운영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 화해, 용서, 용납, 포용 >과 같은 방식으로 .... 

세상이 이해할수 없는 방식으로 그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 

그 하나님의 나라의 다스림이 실행되어야하는 것을 알았기에 다윗은 자신의 원한을 자신의 원수를 피의 복수로 마무리 짓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다윗의 중심을 알수 있은 것은 아브넬를 장례하는 행렬에 자신 뿐아니라 아브넬을 죽였던 요압까지도 그 행렬에 따라가 그를 위해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아브넬 앞에서 애도하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삼하 3:31-32]

(삼하 3:31) 다윗이 요압과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아브넬 앞에서 애도하라 하니라 다윗 왕이 상여를 따라가

(삼하 3:32) 아브넬을 헤브론에 장사하고 아브넬의 무덤에서 왕이 소리를 높여 울고 백성도 다 우니라


여러분.. 이 장면을 상상해보십시오.. 이 장례식 장면을 그려보십시오..


그토록 자신을 죽이려 사울과 함께 칼과 창을 들고 달려온 사울의 총사령관 아브넬이었습니다. 다윗에게서 아브넬은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처음 다윗이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죽였을 때에 처음 다윗의 손을 잡고 사울왕에게 인도하는 이가 아브넬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두 사람의 필연과 악연이 시작되었습니다. 


다윗의 앞날에 가장 위험한 인물이 될뻔 했던 아브넬을 위해 < 추모의 노래 >를 짓고 있습니다. 이 노래는 그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고 있습니다. 


[삼하 3:33-34]

(삼하 3:33) 왕이 아브넬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이르되 아브넬의 죽음이 어찌하여 미련한 자의 죽음 같은고

(삼하 3:34) 네 손이 결박되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차꼬에 채이지 아니하였거늘 불의한 자식의 앞에 엎드러짐 같이 네가 엎드러졌도다 하매 온 백성이 다시 그를 슬퍼하여 우니라


그리고 다윗이 음식도 거른채 아브넬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다윗의 슬픔과 애도를 보고 아브넬을 죽인 것이 다윗이 아닌 것을 알게 됩니다. 


어쩌면 다윗이 아브넬의 죽음을 이렇게 다루어야 했던 분명한 의도 있을 알수 있습니다. 바로 자기의 백성들에게 더 이상의 피의 복수와 원수갚음은 없어야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 이상 사울의 세력과 다윗의 세력이 서로 반목하는 그런 일이 없어야한다는 것 그리고 이제는 서로 화해하고 용납하는 시대가 와야하는 무언의 메시지가 바로 아브넬의 장례식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다윗의 의도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적인 권력투쟁으로 피의 복수를 진행할 자신을 따르는 신복들에게 일종의 간접적인 경고 메시지를 보내는 것입니다. 


(삼하 3:39) 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 대로 갚으실지로다 하니라


대단한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추측해볼수 있는 대목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윗의 이러한 화해와 용납의 태도에서 무엇을 묵상하고 

무엇을 배울수 있는가?를 질문해보아야 합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갈등과 대립를 경험합니다. 

항상 보이지 않는 피의 복수과 원수맺음을 경험하고 살아갑니다. 




크리스채니티투데(Christianity Today)에서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책중 100권중 하나로 선정된 책중에 미로 슬라브 볼프(Miroslav Vof) < 배재와 포용 Exclusion and Embrace>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볼프라는 사람은 동유럽 크로아티아 출신의 신학자입니다. 동유럽의 냉전시대의 격변기를 겪으면서 동유럽안에서 일어난 전쟁과 폭력, 갈등과 반목을 지켜보면서 이러한 시대에 < 나는 십자가에 달린 메시야를 따르는 사람으로 적합한 반응은 무엇인가? 십자가의 메시와 이 폭력적인 세상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를 고민하는 내용입니다. 


이 볼프는 그 폭력의 한 가운데서 고민하고 묵상하면 사유하면서 이 글을 썼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향에서 사람들이 강제수용소에 수감되고 여성들이 강간당하고 교회가 불타고 도시가 파괴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유고연방의 설립과 해체가 반복된느 과정에서 과거 오스만 제국하에 공존했던 다른 종교적 정체성을 가진 민족들 사사의 갈등과 상호 파괴가 ‘ 인종 청소 ’의 양상으로까지 전개되던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이 책의 서두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 나는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아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나에게 적합한 반응을 생각해 내야만 했다. 어떻게 내가 나의 헌신, 욕망, 저항, 분노, 불확실성으로부터 시선을 회피할 수 있겠는가? 최대한 엄격하게 그것들을 곰곰이 따져 보아야 했다. 십자가의 메시지와 폭력의 세상 사이에 있는 긴장이 나에게는, 십자가에 달리신 이를 따르고자 하는 바람과 다른 이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지켜보거나 나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내버려두고 싶지 않은 마음 사이의 갈등으로 다가왔다. 이 책은 지적 투쟁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영적 여정에 관한 기록이기도 하다. ”


이 책의 마지막 대목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 하나님의 정의를 확신하고 하나님의 임재로 마음을 굳게하며 복수의 충동에 사로잡히기를 거부함으로써 폭력의 순환을 끊어야 한다. 원수를 사랑하려고 노력하면 결국 십자가에 달린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부인할수 없다. 하지만 보복하지 않는 값비싼 행동들은 오순절의 평화라는 연약한 열매가 잘 알수 있는 씨앗이된다. ”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오늘의 이 시대를 바라봅니다. 

포용보다는 배제가 더 쉬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쉽게 배제하고 어렵게 포용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다윗의 모습은 이 시대에 우리가 무엇을 할수 있는지? 

이 시대에 무엇을 해야하는지? 말해줍니다. 


더 이상의 세상의 갈등과 반목의 방식을 끊고 

하나님의 나라의 방식인 화해와 용납 그리고 포용으로 나아가도록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 여호와는 악행한자에게 그 악한대로 갚으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우리가 갚아주려하지 말고 우리가 복수하려 하지 말고 

우리가 베풀 수 있는 최고의 선으로 ....

선으로 악을 이기는 상상할수 없는 방식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수 있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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