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7/02/20014 새벽묵상설교 
  • <마가복음 1:16-34>
  • 하나님의 나라의 제자도 


  • @ 설교본문의 그림 인터넷 갈무리함  

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마가복음 1: 16 - 34>


제목 : <마가복음 1:16-34> 하나님 나라의 제자도


[1:16-34]

(1: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18)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1: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1:20)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1:21)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1:22)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1:23)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1: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1:2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1: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1:27)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1:28)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1:29)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1:30)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1:31)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1:32)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1:33)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1:34)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제목 : 하나님 나라의 제자도

 

우리는 복음서를 읽고 묵상할 때면 4가지 사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입니다. 복음서는 우리에게 바로 예수님은 누구신가?에 대한 바른 이해를 제공해줍니다.
  • 둘째는 예수 그리스동의 활동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은 죄사함을 주고 우리를 회개 케하고 놀라운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게 하십니다.
  • 셋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와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 넷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반응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정체와 활동 그리고 가르침을 보고서 예수님을 믿고 따를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을 거부하고 죽일 것인가?를 반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부터 이러한 <예수그리스도의 정체/활동/가르침/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한지를 알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가복음 11절에서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는 마가복음의 선포를 보았습니다

마가는 <복음의 시작>이라는 말로 <시작 / :아르케>는 말을 강조합니다.


< 시작 >이라는 말은 < 원천 / 기원 >을 의미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의 기원이기에 그 기원으로부터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주목해서 보아야합니다.


복음의 기원이시며 복음의 시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이 말씀에는 3가지 강조점 있습니다

< 때가 찼다 > <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 > <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




<때가 찼다>는 것은 역사의 결정적인 순간이 왔음을 의미합니다. 바로 선지자들의 예언이 성취되는 순간이 왔고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경험되어질 때가 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제 막 이루어지려고 한다는 뜻입니다. 마가는 복음을 설명할때마다 예수님의 사역을 설명할때마다 의도적으로 < 하나님의 나라 >에 대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가복음이 누구를 대상으로.. 누구를 독자로 쓰여졌는지?를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 하나님 나라 >를 강조하고 있는지를 알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을 읽은 1세기 청중들은 바로 로마에서 고난받고 핍밥받고 있는 성도들을 위해서 쓰여졌습니다. 


마가복음의 기록연대를 AD65-70년을 보는데 그때는 바로 로마 황제의 박해로 순교에 직면하는 고난속에서 살고 있는 성도들이 이 복음서를 읽게 하는 것이 목적이였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의도적으로 <고난>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나라 로마의 통치와 다스림을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너희가 진정으로 고대하고 경험해야할 나라가 있다 바로 그것이 < 하나님 나라 >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마가복음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말하는 동시에 미래에 도래할 하나님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재 로마 나라의 통치와 다스림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 >는 메시지는 그들에는 말수 없은 소망과 강력한 위로의 메시지 이엇을 것입니다.

 



복음서는 < 예견된 하나님의 나라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 >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복음서를 <예수님의 생애의 이야기나 전기>로 생각하는 우리가 복음서를 읽을 때 예수님을 일생을 다른 글이 아니라 < 예수그리스도를 생생하게 경험하고 지금 현재도 경험하고 느끼고 있는 증언이요 고백으로 보아야합니다.

 

마가는 바로 그러한 <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하나님 나라를 고백 하고 있습니다. > 이러한 증언과 고백은 우리에게 < 전심으로 주께로 돌아서 예수 가전한 복음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믿을 갖는 반응 >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 본문을 살펴봅시다

마가가 우리에게 복음을 이해함에 있어서 가져야할 이해는 < 하나님 나라 >입니다

이것을 마태는 <하늘 나라 / 천국 >이라는 유대식표현으로 바꾸었습니다.

 

분명 예수님의 사역은 <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 >는 선언에서 시작됩니다. 그후의 이야기를 담고있는 오늘 본문은 하나님 나라와 관련하여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 읽은 본문은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있었던 몇가지 사건들을 간략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 가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 >는 부름에 주저 없이 반응하는 자신의 첫 번째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권세를 갖고 가르치시고 귀신을 좇아내시고 시몬의 장모를 고치시고 더 나아가 가버나움에서 질병과 귀신을 모두 물리치는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 이러한 일들은 예수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어떤 관련이 있는 일일까요?


< 하나님 나라는 현재에 경험될수 있는 나라 이며 미래에 임할 나라입니다. >

< 하나님 나라는 현재 예수님 자신을 통해서 실현되고 있습니다. >

<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오셔서 통치와 다스림이 무엇인지 보여주신 나라입니다. >

 


1/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을 따르기로 초청하시는 제자들과 함께 세워가는 나라입니다. 주님께서 가장 우선적으로 하신일은 < 혼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그 일을 다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과 같은 제자로 부르시는 일이었습니다. >


예수님은 어부와 같이 평범한 일상에 머물고 있고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이들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제자는 자신이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고 하나님 나라에 동참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입니다. 제자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제자는 스스로의 의사에 의해서 아니라 예수님의 선택에 의해서 부름을 받습니다. < 부르심 과 선택 >을 통해서 우리는 결정해야합니다. < 따를 것인지 ? 아님 거부할것인지? >를 반응해야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오해하기 쉬운 단어는 < 버려두고 >라는 단어입니다.

16- 20절에 <따르다>는 동사가 3번 나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 부르심과 선택 >을 강종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반응으로 2번 등장하고 있는 단어가 < 버려두고 >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을 흔히 많은 분들이 오해합니다. < 거부하고 거절하다 >는 조금 부정적인이 용어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 버려두고 >라는 단어는 < 그냥 그대로 있도록 놓아 두고 >의 의미가 있습니다.


또 하나의 오해는 이 4명의 제자들을 부르실 때 <갑자가 불러서 당황스럽게 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오늘 본문 16절을 유심히 보면 예수님은 이들을 부를 때 사전 지식이 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1: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본문의 원어를 살펴보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의 부르시는 장면에서 이미 예수님은 제자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기 위해서 < 천천히 걷고 있었고 주목하여 보았고 그 이름을 불렀습니다. > 놀라운 것은 < 시몬과 안드레가 형제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부친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초면이 아닌것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사람을 제자로 부르시는 일에서부터 그 놀라운 일들이 시작되고 있음을 볼수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묵상해볼수 있는 것은 나는 하나님 나라에 어떤 사람으로 초청받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나라의 원리와 다른 가르침을 경험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하신 사역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특히 안식일에 특히 회당에서 가르치고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이들의 반응을 < 뭇사람이 그 교훈에 놀라니 >라고 반응합니다.


유독 예수님은 안식일에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치는 일을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 하필 안식일일까요?

 

안식일은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의 일을 다 마치셔서 더 할 일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안식일은 의미가 없어 졌습니다.


하나님의 질서와 통치가 죄로 인해 파괴된것입니다. 바로 예수님 안식일에 가르치시고 고치시는 사건은 하나님의 나라가 < 에덴의 회복 >을 경험케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결핍되어서 온 문제를 새롭게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질서와 원리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유대인들이 한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영적인 원리들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유대왕국의 회복을 생각했던 로마나라에서 정치적인 회복을 생각했던 하나님의 나라가 이렇게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충격이었습니다.

 

3/ 하나님의 나라에서 치유와 회복의 일들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이 실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의 권세와 능력으로 행할수 있는 무엇인지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현재적 사실을 말해주는 사건이 바로 < 귀신이 쫓겨나는 사건 >입니다. 여기서 귀신은 < 더러운 영들>입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내어 쫓으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거기 이미 임했음을 증거하셨습니다. 바로 귀신인 내어 쫓아졌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탄의 나라(귀신의 나라)에 속한 자를 해방시켜서 하나님 나라로 이동시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실현된 것이다. 귀신이 쫓겨감은 하나님 나라가 실현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치유 이적을 동반한 것은 (귀신을 내어쫓고, 병자 고치심)하나님 나라의 실현(시위 :Demonstration)입니다실제 행동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마가의 복음선포는 일관되게 < 하나님 나라 >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을 따르기로 초청하시는 제자들과 함께 세워가는 나라입니다.

2/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나라의 원리와 다른 가르침을 경험하게 합니다.

3/ 하나님의 나라에서 치유와 회복의 일들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들입니다.

 

오늘 그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곁에 와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같이 그 하나님 나라의 제자로써 어떻게 주님을 따르면 

그 능력을 시용하며 살 것 인지?를 결정해야합니다




[ 하나님의 나라란? (이승구교수)]


천국 복음을 믿고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 온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우리에게 임하여 온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참된 신자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동시에 믿는 사람이다. 예수님께서 가져다주신 영적인 하나님 나라가 여기 현존하고 있다는 것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자신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아서만 이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 안에 있다는 것을 믿고, 그 나라 백성으로 열심히 살면서 동시에 이 땅에 영적으로 임하여 왔고,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그 나라가 예수님의 재림 때에 그 나라의 극치에 이를 것을 고대하면서 날마다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기를 주님의 재림 때까지 그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에 대한 기대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영적으로 여기 임하여 왔다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근거한 것이다. 현재성을 믿는 사람만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을 제대로 믿는 것이다. 미래에 나타나게 될 극치의 하나님 나라를 참으로 믿는 사람은 현재 그 나라가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임하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믿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둘 다 믿지 않은 것도 불신앙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선택해 믿는 것도 큰 불신앙이다. 우리는 예수님과 그의 사도들이 가르쳐준 그대로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모두 믿어야 한다.


 이를 참으로 믿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그 말 뜻 그대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살아간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마땅한 의무이지만 동시에 하나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잘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가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존중하며 그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성경의 가르침을 잘 받아 가는 성경의 사람들이며, 성령님께 온전히 순종해 가는 성령의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을 성경은 “신령한 자”라고 말한다.


[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의 나라 (톰라이트) ]


오해된 하나님 나라 
저자는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가야할 천국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럼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가서 경험하는 하나님 나라만 생각하는 것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이런 사고는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나 설교, 그리고 많은 책에 스며들어 있다. 

희망은 지옥을 탈출하는 것처럼 이 세상을 벗어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희망은 언제나 부활에서 출발한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부활과 함께 할 때 더 큰 의미를 갖게 하며, 이 부활은 궁극적인 희망을 낳게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창조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희망이지만, 그것은 다가올 종말론 성취만을 고대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삶 가운데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의 역동성이다. 

저자는 낙원이나 천국에 대한 기대는 언제나 부활에서 시작됨을 강조한다. 부활에 대한 견해를 믿는 종교는 유대교나 기독교 외에는 없다. 물론 유대교도 기독교가 말하는 부활과 다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그를 믿는 이들에 대한 부활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 저자는 부활에 대한 바른 이해가 천국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톰 라이트는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완성은 종말론적 성취에서 이뤄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된 새 창조를 통해 이 땅에서 실현되어야 할 것을 강조한다. 그것은 “이 세상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 위에 주님이신 예수님의 주권에 기초해 이 세상으로 나아가는 사명을 의미”한다. 

결국 기독교적 희망의 근본적 왜곡은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의 열망과 현재적 하나님 나라에 대한 방치다. 현재의 세상을 내버려 둠으로써 아무런 지지도 받지 않고 활동할 수 있게 하는 정적주의를 저자는 경고 한다.










  • 07/01/2014 새벽묵상설교 
  • 마가복음 1:1-15
  • 예비된 목음의 시작 


 @ 설교본문중 그림은 인터넷 갈무리함 


제목 :  예비된 복음의 시작 <마가복음 1:1-15>


[1:1-15]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1: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1: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1:4)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1: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1:6)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1:7)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1: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1:9)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1:10)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11)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1:12)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13)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1: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지난주까지 <말라기>서를 묵상하고 이제 7월부터 새로운 본문인 신약에 <마가복음>을 묵상하게 됩니다. 특히 복음서를 묵상할때면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한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 복음 >입니다.

 

우리가 흔히 < 마태복음 / 마가복음 / 누가복음 / 요한복음 >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는 이 4복음서의 원래의 이름은 < 마태가 전한 복음, 마태에 의해서 전해진 복음 >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오늘 묵상본문인 <마가복음>역시 < 마가가 전한복음, 마가에 의해서 전해진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음을 주시면서 하나의 내용의 4개의 앵글을 갖고 있는 통일되고 다양한 복음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각각의 복음서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주목하고 강조하고 전하고 있는지가 다르게 나타납니다. < 마태복음은 왕으로 오신 예수, 마가복음은 고난의 종으로 오신 예수, 누가복음은 인자이신 예수, 요한복음은 말씀(로고스)이신 예수 >에 대한 복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부터 우리가 살펴 보게될 <마가복음>은 이러한 복음서중에서도 <오리지날 복음>이라고 할 만큼 복음서 중에서 복음에 대해서 가장 중요하고 액기스같은 것들을 간결하고 핵심적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기록연대를 보아도 4복음서보다 가장 먼저 기록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은 이 < 마가복음 >< 무엇보다 우선된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사복음서중에서 가장 짧습니다. 마태복음의 5/8정도의 분량입니다. 그래서 흔히 초신자나 성경을 처음 대한 이들에게 권하는 복음서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이 마가복음의 또하나의 별명이 < 선교의 복음 >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나라에 초기 전달되어진 복음서도 바로 <마가복음>이었습니다. 일명 쪽복음이였죠.  



그리고 마가복음의 < 고난의 복음 >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마가복음 초기의 예수님의 탄생과 사역들을 간략 간략하게 생략한채 본론의 핵심을 달려가기 위해서 마치 숨가쁘게 달려가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서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단어중 하나가 < , 즉시 >이라는 말이 41번 나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비유에 대해서 5번나오고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 사건은 15번 나옵니다

의도적으로 마가복음서는 예수님의 행적중심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행적중에서 그가 말하고 싶은 한가지 주제가 있었습니다.


마가가 말하고 싶은 본론의 핵심은 바로 < 예수의 고난, 고난받으로 오신 예수님, 십자가에 죽으러 오신 예수님 그리고 죽임당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을 보여주기 위해서 < 거두 절미 >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서에 분량중에 가장 많은 부분이 바로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대목에 사용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것을 알수 있습니다.

 

오늘 마가복음의 1장의 서막을 열면서 

마가복음 11절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이 짧은 한 구절속에서 <마가가 전한 복음>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마가가 전하고 싶었던 복음의 주제는 2가지입니다.

첫째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아는 것에서 시작된다.

둘째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시작하셨다.


오늘 본문을 유심히 살펴보면 <복음>과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는 4개의 단어가 있음을 주목해볼 수 있습니다.

 

바로 < 시작 / 준비 / 전파 / 믿음 >이라는 단어입니다.

복음의 시작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복음의 준비는 구약의 이사야를 비롯한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되어서 오늘 성취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복음의 전파는 마지막 죄사함을 받게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한 선지자인 세례요한으로부터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성령의 

세례을 받으라고 전하는 예수님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복음의 믿음은 바로 이러한 에수그리스도의 초청을 받아 들이는

 우리의 반응입니다.

 

이러한 <복음의 시작/ 복음의 준비/ 복음의 전파/ 복음의 믿음>위해서 처음 등장하고 있는 복음의 메신저, 복음의 전달자인 3사람을 주목해볼수 있습니다.


바로 < 마가와 세례요한 그리고 예수님 >입니다.

 

1/ 오늘 마가복음의 시작에서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고 첫 대목을 기록하고 있는 <마가요한>입니다.


오늘 마가복음을 기록하고 있는 < 마가요한 >은 누구입니까?


바로 바나바의 사촌 그 <마가 요한>, 제자들에게 집회장소를 제공했던 그 <마가요한>, 사도행전 전도여행에 그 <마가 요한>입니다.

바울의 일차전도여행에 그 전도여행을 견디지 못해 자기 집으로 돌아간 그 마가요한, 그 일 이후부터는 베드로의 곁에서 베드로의 통역자로 베드로의 비서와 같이 있었던 그 마가 요한. 바울이 마지막에 보고 싶어서 데리고 오라고 했던 그 마가요한이 맞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심지어 주께서 잡히시던 밤에 한 청년이 따라오다가 벌거벗은 채 도망쳤다고 기록하고 있는 그 청년이 바로 <마가요한>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마가요한>이 오늘 <복음의 시작>을 알리고 있습니다.


 <겁쟁이 같고 신실하지 못한 사람>은 그 부족한 마가요한의 입을 통해서 <복음서>의 첫 번째 계시가 쓰여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마가복음> 11절을 묵상하면서 놓치지 말아야할 중요한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은 복음을 감당할만한 자격이나 능력이나 커리어가 있는 사람만이 전할수 있는 복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실패하고 능력 없고 어딘가 부족하지만 다시금 회복되고 예수의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이 전할수 있는 그리고 <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는 분명한 증언 >을 할수 있는 사람이면 됩니다.

 

많은 학자들은 <가요한>이 처음 복음의 시작을 알리면서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고 말한 것은 그가 <베드로의 비서로써 통역자로써> 베드로의 고백을 그대로 옮겼거나아니면 그도 역시 베드로의 설교를 통역하면서 베드로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들은 아마도 마가요한은 <베드로의 복음을 대신 적어주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오늘 <마가복음>에서 <마가가 전한복음>은 과거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과거시제>로 쓰여있지 않고 < 현제시제 >로 쓰여있습니다. 특히 < 과거의 사건을 현재 시재로 표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목격자로써 눈으로 보고 그것을 현재의 일로 증언하고 있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복음은 무결점의 사람에게 어울리는 말씀이 아니라 실패하고 좌절하고 연약한 우리도 증언할수 있는 하나님의 계시라는 사실입니다
.

 

2/ 복음의 시작에서 신약과 구약의 복음의 다리를 잇고 있는 <세례자 요한>을 주목해서 봅니다. 우리가 흔히 세례요한은 < 세례자 요한 또는 세례를 주는자 요한 >이라고 해야 할것입니다.

공교롭게 <요한>이란 이름이 또 등장합니다. <마가요한/세례자요한>




세례자 요한의 등장은 구약의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가는 말라기 31절과 이사야 403절을 인용하면서 이 예언들이 세례요한을 통해서 어떻게 성취되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3: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40:3)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여기서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은 < 복음의 시작 >은 갑자기 등장한 < 예수 >를 통해서 시작된 생뚱맞은 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갑작스러운 사건이나 예기치 못한 해프닝이 아닙니다


바로 구약의 선지자들로부터 <예언되고> 오늘 세례자 요한를 통해서 <예비>되었던 바로 < 준비된 시작 >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의 시작인 비로 준비된 시작이라는 것은 <예언과 예비>를 통해서 이루어진것입니다. 바로 수많은 선지자들의 예치는 소리들이 있었고 그 소리가 세례의 요한 의 광야의 외치는 소리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이 예언을 통해서 주의 길이 예비되어졌고 세례 요한가 죄사함의 회개의 운동이 바로 예수님의 등장을 알리는 일종의 < 예고편 >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볼 것은 <복음의 시작>은 바로 <죄사함의 회개>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례요한 시대에 회개의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다른말로 복음의 전달될 마음밭이 준비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죄에 대해서 민감해지고 죄를 자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복음을 받아들이 준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 바로 주의 길을 예비하는 방법은 한가지 이 세상 속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죄에대해서 민감해하고 

죄를 자각하기 시작하는 무브먼트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

우리의 죄에 대한 민감한 반응은 복음을 쉽게 받아들이게 합니다. 그리고 회개하게하고 다시금 거듭 태어남의 증거인 <세례>받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묵상해 보아야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주의 길, 복음의 길을 예비할만한 

죄에 대한 민감함과 회개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우리는 교회는 얼마나 주의 길을 예비하는데 

합당한 죄사함과 회개의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

 

3/ 복음의 시작에서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전하고 믿음으로 초청하고 있는 < 예수 그리스도 >를 만납니다.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일은 < 하나님 나라 >를 경험하는 일이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믿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전하신 복음 바로 < 천국 복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원리과 통치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원리과 통치입니다.


이것은 <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때 >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인식은 < 하나님 나라 >에 대한 인식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임재와 회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임했고 아직 임하지 않은 나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매일 같이 회개하고 매일같이 

복음을 다시 복음을 받아들이기 원합니다.


최근에 한국에 < 다시 복음앞에. RETURN TO THE GOSPEL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오늘 이 시대는 < 하나님의 나라 >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변질되었기 때문이고 복음의 세속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서 필요한 것은 < 다시 복음앞에, 예수 다시보기 >를 해야합니다. 교회가 복음으로 세상을 압도하지 못하고 세상이 교회를 압도하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알려야합니다. 죄의 심각성을 알려합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외쳐야합니다.


오늘 우리는 점점 더 복음을 외면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점점 더 복음이 변질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점점 더 복음을 들어도 변화하고 있지 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어떤 복음을 붙잡아야 할지?

무엇이 복음의 본질인지? 심각하게 생각해야합니다.


오늘 본문에 놀랍게도 14절에

(1: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요한이 잡힌후 바로 이어서 예수님이 요한이 전한 복음을 다시금 전달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자신이 복음을 가져왔음을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초래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잡힌후 예수님이 전하셨다면...

예수님이 잡히고 그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성취하시고 완성하신 그후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우리도 역시 <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여기 왔으니 회개하고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으라 >고 외쳐야 되지 않을까

 


  • 06/18/2014 GSC새벽큐티설교 
  • 사무엘하 22장 22절-51절 
  • 구원의 노래 그리고 시선 
  • @ 설교문중에 그림은 인터넷 갈무리함  


제목 : 구원의 노래 그리고 시선


 

[삼하 22:22-51]

(삼하 22:22)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을 행함으로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삼하 22:23) 그의 모든 법도를 내 앞에 두고 그의 규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삼하 22:24) 내가 또 그의 앞에 완전하여 스스로 지켜 죄악을 피하였나니

(삼하 22:25)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공의대로, 그의 눈앞에서 내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삼하 22:26)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삼하 22:27)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이다

(삼하 22:28)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를 살피사 낮추시리이다

(삼하 22:29) 여호와여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어둠을 밝히시리이다

(삼하 22:30)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진으로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넘나이다

(삼하 22:31)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진실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시로다

(삼하 22:32)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

(삼하 22:33) 하나님은 나의 견고한 요새시며 나를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시며

(삼하 22:34) 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삼하 22:35)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 활을 당기도다

(삼하 22:36) 주께서 또 주의 구원의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

(삼하 22:37)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내 발이 미끄러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삼하 22:38) 내가 내 원수를 뒤쫓아 멸하였사오며 그들을 무찌르기 전에는 돌이키지 아니하였나이다

(삼하 22:39) 내가 그들을 무찔러 전멸시켰더니 그들이 내 발 아래에 엎드러지고 능히 일어나지 못하였나이다

(삼하 22:40) 이는 주께서 내게 전쟁하게 하려고 능력으로 내게 띠 띠우사 일어나 나를 치는 자를 내게 굴복하게 하셨사오며

(삼하 22:41) 주께서 또 내 원수들이 등을 내게로 향하게 하시고 내게 나를 미워하는 자를 끊어 버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삼하 22:42) 그들이 도움을 구해도 구원할 자가 없었고 여호와께 부르짖어도 대답하지 아니하셨나이다

(삼하 22:43) 내가 그들을 땅의 티끌 같이 부스러뜨리고 거리의 진흙 같이 밟아 헤쳤나이다

(삼하 22:44) 주께서 또 나를 내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나를 보전하사 모든 민족의 으뜸으로 삼으셨으니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

(삼하 22:45) 이방인들이 내게 굴복함이여 그들이 내 소문을 귀로 듣고 곧 내게 순복하리로다

(삼하 22:46) 이방인들이 쇠약하여 그들의 견고한 곳에서 떨며 나오리로다

(삼하 22:47)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삼하 22:48) 이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보복하시고 민족들이 내게 복종하게 하시며

(삼하 22:49) 나를 원수들에게서 이끌어 내시며 나를 대적하는 자 위에 나를 높이시고 나를 강포한 자에게서 건지시는도다

(삼하 22:50) 이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모든 민족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삼하 22:51) 여호와께서 그의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원하도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하였더라

 

제목 : 구원 노래  그리고 시선

 

어제부터 살펴보고 있는 사무엘하 22장의 말씀은 < 다윗에게 자신의 전 생애를 걸쳐 구원을 베푸시고 승리를 주신 하나님에 대한 묵상과 찬양 그리고 고백 >을 담은 시편입니다. 시편 18편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여 반복하고 있는 시편입니다.

 

제가 작년 연말 금요예배에 이 본문 <사무엘하 2232-36>로 설교를 했습니다. < 내 영혼은 안전합니다 >라고 설교했죠. 오늘 아침에 하나님이 새롭게 주시는 은혜가 기대가 되어서 새로운 관점에서 묵상을 해보았습니다.

 

이런 다윗의 시편은 특별히 주해를 하거나 강해를 할 것이 따로 필요없이 그냥 읽기만 해도 은혜가 되고 읽기만해도 적용이 되는 그런 [ 거저 그 은혜로운 본문 ]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윗의 지나오는 삶의 세월을 알고 있다면..

우리가 다윗의 지나온 인생 여정의 우여곡절을 보아 왔다면...

우리가 다윗의 삶에서 흘러온 험악한 시간여행을 살펴보았다면...

오늘 이 다윗의 고백이 그냥 쉬운 고백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다윗의 생애과 그가 지금 여기까지 와서 지난 삶의 여정을 돌아 볼 때 자신의 삶을 붙들고 자신의 지키시고 보호하신 이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알고 고백할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지요.

 

어떤 주석을 보니 오늘 이 사무엘하 22장을 평가하면서 이런 글을 썼습니다.


< 다윗은 자신의 파란만장한 생애 가운데서 경험했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구원을 조금도 거침없는 사상력과 영감에 찬 내용으로 노래하고 있다. 그의 벅찬 감격과 희열은 그 노랫말을 초시간적이면 우주적인 표현으로 가득 매우게 했으며, 그의 넘치는 신앙열을 통해 뿜어낸 찬미는 시대를 초월한 모든 신앙인들의 영혼의 노래가 되게 했다. >

 

많은 학자들은 이 사무엘하 22장의 기록시기를 < 다윗의 신앙이 가장 고조되던 가장 피크였던 시기였던 하나님께 성전건축을 요청했을 당시 사무엘하 7-8장의 그 시점 >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확히 어느 다윗의 어느 시기에 기록되었는지는 알수 없지만 그가 자신의 삶에서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목도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다윗은 분명히 외치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삼하 22:32)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

(삼하 22:47)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나의 반석을 찬송하며 내 구원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몇일전 Father’s DAY 였습니다. 저희집 아이들이 이제는 컷는지 ? 참 아버지로써 보람있고 감동적인 편지를 저에게 주었습니다. 자기가 손수 만든 그림카드에 한글로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 아빠가 내 아빠가 되어 주어서 고마워. 아빠 힘들어한거 알아,, 내가 마사지 쿠폰줄게 .. 아빠는 나를 웃게 해죠요. > 분명 아이들 배후에 엄마가 아빠에게 쓰라고 했겠지만. 평상시에 자신들이 생각한 아빠의 느낌과 아빠에 대한 고마움에 대해서 썼겠죠.



 


오늘 사무엘하 22장의 다윗의 고백 역시 자신의 삶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노래하고 있습니다


한마다로 다윗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 공의롭고 자비로운 구원자이십니다. 그래서 그 구원으로 의인에게 베푸십니다 >

 

여기서 다윗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2가지의 행동입니다.

첫째는 공의롭고 자비로운 구원자가 베푸시는 하나님의 보호와 능력입니다.


둘째는 이 공의롭고 자비로운 구원자의 도움을 구하는 우리의 태도와 행동입니다.


< 구원을 베푸시는 자와 구원을 경험할수 있는자 > 이 두 가지의 행동이 이루어질 때

 비로서 < 놀라운 구원의 역사 >를 경험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을 아무게나 행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의로운자를 구원하시고 의로운 행위대로 보응하십니다.

 

[삼하 22:21-22] 여호와께서 내 공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 갚으셨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을 행함으로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공의대로, 그의 눈앞에서 내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분명히 다윗은 자신의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 하나님은 < 반석, 요새, 건지시는자, 피할 바위, 방패, 구원의 뿔, 높은 망대, 피난처, 구원자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시편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구원과 관련한 단골 메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원에는 조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성품에 어울리는 우리의 성품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에 어울리는 우리의 반응

또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어울리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고난 당할때와 구원 받을때를 알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삶을 숱한 고난속에서 고난의 이유를 묵상했습니다. 그럴때마다 그 고난에서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서 알았습니다


< 아하 ! 고난속에서 건짐을 받는 영적인 이유가 있구나. 하나님이 이 고난속에서 나에게 찾으시고 원하시는 것이 있었구나 ! >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삼하 22:27-28]

(삼하 22:27)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이다

(삼하 22:28)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를 살피사 낮추시리이다

 

다윗에게 구원을 받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 고난 받는 상황보다 고난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상태 >였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속에서 분명하게 깨닫는 것은 < 하나님의 시선과 관심>이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하나님께 < 의롭게 그리고 깨끗하게 > 머물러 있느냐?가 자신에게 주어질 구원의 수준을 결정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호와의 구원은 절대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구원을 베푸실 여호와는 구원받기에 합당한 자를 구원하십니다.


구원 베풀자와 구원 받을 자의 합작품이 바로 < 여호와의 구원의 역사 >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다윗은 여호와의 구원의 역사만을 노래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구원을 경험할수 있었던 자신의 마음의 내용을 노래하고 있고 그 중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가장 제 가슴을 벅차게 만드는 구절이 있다면

(삼하 22:30)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진으로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넘나이다

(삼하 22:34) 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삼하 22:39) 내가 그들을 무찔러 전멸시켰더니 그들이 내 발 아래에 엎드러지고 능히 일어나지 못하였나이다

(삼하 22:44) 주께서 또 나를 내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나를 보전하사 모든 민족의 으뜸으로 삼으셨으니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

 

우리가 다윗의 고백을 통해서 분명하게 깨닫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걸음의 안전함을 제공해줍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계획의 든든함을 제공해줍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행동의 담대함을 제공해줍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우리의 모든 시선을 주님께 향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계속 저를 흥얼 거리게하는 찬양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전도단 김명선 간사 지은 < 시선 >이라는 찬양입니다. 아마 유듀브에 찾아 보시면 어떤 곡인지 아실텐데요 ... 그 찬양 가사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 시선 김명선간사 >

내게로 부터 눈을 들어 주를 보기 시작할 때 주의 일을 보겠네

내 작은 마음 돌이키사 하늘의 꿈꾸게 하네 주님을 볼때

모든 시선을 주님께 드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느낄 때

내 삶은 주의 역사가 되고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네

 

성령이 나를 변화시켜 모든 두렴 사라질 때 주의 일을 보겠네

황폐한 땅 한가운데서 주님 마음 알게 되리 주님을 볼 때

모든 시선을 주님께 드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느낄 때

세상은 주의 나라가 되고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네

 


< 시선 찬양 링크 > 

http://www.youtube.com/watch?v=kAOQ-L9fw_8






< 내 삶이 주의 역사가 되고 하나님이 일하시 시작할 때 > 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 내게로부터 눈을 들어 주를 보기 시작할 때 >입니다.


오늘 사무엘하 22장에 다윗의 시선은 하나님의 구원과 역사를 향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 노래를 지으면서 자신과 자신의 나라 그리고 자신의 후손들이 이 시선을 잃어 버리지 않기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삼하 22:50) 이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모든 민족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삼하 22:51) 여호와께서 그의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원하도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하였더라

 

말씀을 맺습니다.


최근에 < 천개의 심장 >이라는 책을 쓴 아프리카 케나의 <이시온>선교사님의 글을 보았습니다. 그 책에 이렇게 쓰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두 개의 산을 넘어야한다


우리가 넘어야할 첫 번째 산은 나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하는 것이다


또한 두 번째 넘어야할 산은 하나님께 나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이다.


오늘 이 사무엘하 22장을 묵상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두가지 물음이 있습니다.


< 나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그리고 하나님께 나는 어떤 사람인가 >


  • 06/12/2014 GSC새벽묵상설교 
  • 사무엘하 20:1-13
  • 제목 : 치세의 능신(能臣) 난세의 간웅(奸雄)
  • @ 설교본문의 그림 인터넷에서 갈무리함


[ 삼하 20:1-13 ]

(삼하 20:1) 마침 거기에 불량배 하나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세바인데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이었더라 그가 나팔을 불며 이르되 우리는 다윗과 나눌 분깃이 없으며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우리에게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매

(삼하 20:2) 이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따르기를 그치고 올라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따르나 유다 사람들은 그들의 왕과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따르니라

(삼하 20:3) 다윗이 예루살렘 본궁에 이르러 전에 머물러 왕궁을 지키게 한 후궁 열 명을 잡아 별실에 가두고 먹을 것만 주고 그들에게 관계하지 아니하니 그들이 죽는 날까지 갇혀서 생과부로 지내니라

(삼하 20:4) 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위하여 삼 일 내로 유다 사람을 큰 소리로 불러 모으고 너도 여기 있으라 하니라

(삼하 20:5) 아마사가 유다 사람을 모으러 가더니 왕이 정한 기일에 지체된지라

(삼하 20:6) 다윗이 이에 아비새에게 이르되 이제 비그리의 아들 세바가 압살롬보다 우리를 더 해하리니 너는 네 주의 부하들을 데리고 그의 뒤를 쫓아가라 그가 견고한 성읍에 들어가 우리들을 피할까 염려하노라 하매

(삼하 20:7) 요압을 따르는 자들과 그렛 사람들과 블렛 사람들과 모든 용사들이 다 아비새를 따라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뒤쫓으려고 예루살렘에서 나와

(삼하 20:8) 기브온 큰 바위 곁에 이르매 아마사가 맞으러 오니 그 때에 요압이 군복을 입고 띠를 띠고 칼집에 꽂은 칼을 허리에 맸는데 그가 나아갈 때에 칼이 빠져 떨어졌더라

(삼하 20:9) 요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내 형은 평안하냐 하며 오른손으로 아마사의 수염을 잡고 그와 입을 맞추려는 체하매

(삼하 20:10) 아마사가 요압의 손에 있는 칼은 주의하지 아니한지라 요압이 칼로 그의 배를 찌르매 그의 창자가 땅에 쏟아지니 그를 다시 치지 아니하여도 죽으니라 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뒤쫓을새

(삼하 20:11) 요압의 청년 중 하나가 아마사 곁에 서서 이르되 요압을 좋아하는 자가 누구이며 요압을 따라 다윗을 위하는 자는 누구냐 하니

(삼하 20:12) 아마사가 길 가운데 피 속에 놓여 있는지라 그 청년이 모든 백성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아마사를 큰길에서부터 밭으로 옮겼으나 거기에 이르는 자도 다 멈추어 서는 것을 보고 옷을 그 위에 덮으니라

(삼하 20:13) 아마사를 큰길에서 옮겨가매 사람들이 다 요압을 따라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뒤쫓아가니라

 

제목 : 치세의 능신(能臣) 난세의 간웅(奸雄)

 

중국의 소설 삼국지에 보면 < 조조(曹操) >라는 인물을 가르켜 <허자장>이라는 사람으로부터 < 그대는 치세의 능신(能臣)이고, 난세의 간웅(奸雄)이다. >는 평을 듣습니다. 여기서 < 치세의 능신 >이란 나라가 < 잘 다스려질 때는 유능한 신하라는 뜻 >이고, < 난세의 간웅 >이란 < 세상이 어지러울 때는 권모술수에 능한 영웅 >이란 뜻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무엘하에 보여지고 있는 다윗의 시대가 바로 이러한 < 치세와 난세 >사이에 있는 시대 라로 할수 있을 것입니다


압살롬의 반란과 반역이후에 계속 다윗의 시대는 < 난세 >와 같이 어수선하고 어지러운 반목과 갈등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피의 복수와 숙청과 같은 계속 되는 피의 역사가 계속되어가고 있습니다


그 한 중심에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사람이 바로 < 요압 >입니다.

 

<요압>은 다윗을 대신해서 다윗의 정적들이 될 만한 인물들을 제거하고 그리고 다윗을 대신해서 일어나고 있는 < 다윗에게 대항하는 반란의 세력들을 > 제거합니다. 다윗에게는 충신중에 충신입니다. 다윗을 위해서 알아서 그 난세를 잠재우기 위해서 손에 피를 붙이는 것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요압>은 다윗의 편의 서서 이미 <압살롬의 반역>을 압장서서 제압을 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도 보면 공공연하게 다윗을 비난하고 다윗에 대해서 불만과 반대입장을 갖고 있는 < 세바의 난 >을 처리하는 일이나, 다윗을 따르는 일에 미혼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 아마사 >를 자신의 손으로 처리하는 일을 보면 무자비할 정도로 다윗을 위해 그 일들을 해나갑니다.

 

여기서 <요압>같은 사람이 다윗에게 있어서 참 고마운 것 같지만 <요압>은 다윗을 위한다는 명분하에 자신의 야심과 자신의 숨은 동기를 갖고 그일들을 해나갑니다. 결국 나중에 보면 이 충성스러운 요압도 다윗을 반역하는 것을 보면 <요압>이 이런 과격한 충성뒷편에는 또다른 얼굴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해볼수 있습니다.

 

사무엘하에서 보여지고 있는 다윗의 시대는 그다지 샬롬의 시대는 아니었습니다. 난세중에 난세였습니다. 압살롬의 반란이후로 이스라엘 안에는 많은 후휴증에 남았습니다. 바로 그것은 < 다윗에 대한 불신과 불만 >이었습니다. 압살롬을 따랐던 무리들을 다윗은 아직 통합하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이스라엘 안에는 지역적인 갈등과 뜻이 다른 마음들이 존재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무리들인 오늘 본문 201장에 < 불량배 >라고 표현되어있는 베냐민 지파사람들인 <불량배같은 세바>와 같은자들이었습니다.

 

(삼하 20:1) 마침 거기에 불량배 하나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세바인데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이었더라 그가 나팔을 불며 이르되 우리는 다윗과 나눌 분깃이 없으며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우리에게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단어 있습니다.

 < 마침 거기에 >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장소적으로는 < 길갈 >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시간적으로 < 그후에. 그일로부터 >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바로 앞장에 어떤 일이 있습니까? 1940-43절에 이스라엘 안에서 분열이 일어납니다. 서로 뜻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일들이 일어납니다. < 다윗왕이 환궁을 하는데 이 문제를 이스라엘 공동체전체와 지파와 의논을 하지 않고 유대지파가 주도권을 갖고 이일을 추진했다고 나머지 10지파에서 날리가 납니다. >

 

항상 갈등과 분열은 < 뜻이 다를 때 > 일어납니다. 




혹시 중국의 난세의 역사와 영웅을 다루고 있는 삼국지(三國志)와 수호지(水滸志)에서 <()>라는 글자는 땅지()가 아니라 뜻지()라는 것을 알고 있으십니까

삼국지가 세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 세나라  뜻 >에 대한 이야기인것입니다.








 

바로 분열과 갈등은 바로 뜻을 다르게 품을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이러한 지파들이 같은 뜻을 품지 못하고 서로 오해하고 서로 용납하지 못해서 생긴 일들입니다. 이러한 10지파 이스라엘과 1지파 유다와의 갈등은 나중에 솔로몬 시대에 나라가 분열이되는 계기가 됩니다. 이때부터 시작된 오래된 앙금과 반목은 압살롬의 반역이후에 일어나는 심각한 후휴증이요 상처의 결과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가 생각해볼수 있는 것은 한 가정의 갈등이 나중에 어떻게 민족의 갈등으로 확대 재생산될수 있는지를 우리가 단적으로 볼수 있는 예라고 할수 있습니다.

다윗왕이 지금 지나고 있는 이 난세에는 여전히 남은 갈등과 반목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된 반역의 멈추지 않은 갈등이 나오고 있습니다.

 

< 마침 거기에 불량배 하나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세바인데... > 라고 오늘 본문은 그러한 난세의 배경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세바를 말하길 <불량배>라고 말합니다. 이말은 개역한글성경에는 <난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원어로는 <이쉬 벨리야알>입니다. 그 뜻은 < 약한 사람. 무가치한 사람 >이라는 뜻입니다. 얼마나 이 세바가 다윗에 대한 불만과 비난을 노골적으로 하느냐하면 오늘의 본문에서 2가지 행동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가 < 나팔을 불었다 >는 것입니다. 나팔 곧 쇼파르를 부는 행위는 임박한 재앙과 전쟁을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바로 왕과의 전쟁을 선포하는 행위였습니다.




둘째는 세바가 다윗을 < 이새의 아들 >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을 < 이스라엘의 왕 >이라고 부르지 않고 < 이새의 아들 >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다윗을 진정한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다윗왕을 <폄하>하는 언사입니다

막말파문의 당사자가 바로 <세바>입니다.



세바는 다윗과 전쟁을 선포하고 다윗을 비난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러한 세바를 따르는 무리들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삼하 20:2) 이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따르기를 그치고 올라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따르나 유다 사람들은 그들의 왕과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따르니라


세바를 중심으로한 < 이스라엘파 >와 다윗을 중심으로한 <유다파>가 나뉘는 지역감정과 갈등을 부추기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왕궁으로 돌아 가장 먼저한 일은 < 압살롬과 대낮에 백성들이 보는데서 동침한 10명의 후궁들 >을 처리하는 일이었습니다


. 우리가 흔히 후궁들이 무슨 죄가 있나? 싶겠지만 다윗이 처리한 이 일은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압살롬의 잘못과 후궁들의 합의하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짐작해볼수 있수 있습니다. 다윗은 율법의 처리 규정에 따라 더 이상 다른 남자와 관계를 한 아내를 받아들지 않는 율법대로 10명의 후궁들을 처리합니다.

 

그리고 요압에게 자신과 사촌지간이 < 아마사 >의 군대와 함께 이 패역부도한 <세바 일당>들을 처리하고 오도록 명령합니다. 그러나 < 아마사 >는 이 왕의 명력에 미혼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삼하 20:4) 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위하여 삼 일 내로 유다 사람을 큰 소리로 불러 모으고 너도 여기 있으라 하니라

(삼하 20:5) 아마사가 유다 사람을 모으러 가더니 왕이 정한 기일에 지체된지라

 

그도 그럴것이...원래 <아마사>는 어떤 사람입니다

어느 편에 있던 사람이었습니까? 바로 압살롬의 편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요압의 사촌이었지만 아사마는 원래부터 다윗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압살롬의 편이었습니다.


(삼하 17:25) 압살롬이 아마사로 요압을 대신하여 군지휘관으로 삼으니라


다윗이 요압과 함께 아마사를 부른 것은 다윗이 더 이상 < 니편 내편 가리지 말고 우리 함께 화평을 이루자> 라고 하는 화해의 제스츄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사>는 다윗이 내민손을 미혼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제가 참 오래전에 재미있는 글을 보았습니다.

< 아부도 일관성이 있으면 충성이 되고

충성도 일관성이 없으면 아부만도 못하다 > 일리가 있는 글입니다.

 

<요압><아마사>는 서로가 집안이었고 사촌지간이었습니다


자신이 따르는 사람이 달라고 자신의 명분이 달라고 자신의 품은 뜻이 달랐습니다. < 니편 내편 >이 달랐습니다

다윗의 탁월한 치세가 바로 < 통합의 정치 >를 할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항상 분쟁과 갈등의 출발은 < 니편과 내편 >의 편가르기를 시작할 때 일어납니다.


그러한 가운데 <화해와 통합>은 없지요. 서로 반목하고 비난하고 폄하합니다.


오늘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문화 기독교가 바로 그러한 반목을 계속 보는 이유가 뭡니까? 자꾸 편가르기를 하는 것입니다. 지난 한국의 선거를 보십시오. 여전히 네가티브 선거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이번 선거에 재미있었던 결과중에 하나는 < 네거티브 전략 >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던 후보들이 당선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한국 사회의 골깊은 갈등은 바로 <사회통합과 화해>가 없는 < 니편과 내편 >을 나누는 반복된는 반목과 갈등에서 일어납니다.

 

다윗왕은 이스라엘 왕국에 계속되는 이러한 <갈등과 반목>을 해결하고자하는 시도로 바로 자신의 상대편에 속해있었던 <아마사>를 품고 그와 함께 나라를 안정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다윗의 뜻대로 되지 못합니다. < 아마사 >의 품은 뜻이 달라고 그리고 다윗을 따라고 있는 <요압>의 품은 뜻이 달랐습니다.

 

결국 이러한 아마사의 미혼적인 태도 때문에 <요압>에게 칼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요압의 칼에 죽임을 당하는 아마사의 죽음 장면을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상상하나는 아마도 <아마사>가 요압에게 칼을 맞으면서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 고마해라 ! 마이 묵었다 아이가 ... > 마치 영화 친구 한 장면이 생각과 같아 보입니다.




(삼하 20:11) 요압의 청년 중 하나가 아마사 곁에 서서 이르되 요압을 좋아하는 자가 누구이며 요압을 따라 다윗을 위하는 자는 누구냐 하니


(삼하 20:12) 아마사가 길 가운데 피 속에 놓여 있는지라 그 청년이 모든 백성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아마사를 큰길에서부터 밭으로 옮겼으나 거기에 이르는 자도 다 멈추어 서는 것을 보고 옷을 그 위에 덮으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치세를 원하는 다윗과 여전히 난세를 만들고 있는 다윗의 주변사람들을 모습을 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오늘 우리의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를 봅니다.

여전히 반목과 갈등 그리고 편가르기가 넘쳐나고 있는 이 시대를 봅니다

권위도 없고 책임도 없고 화해나 통합도 없는 어수선한 오늘의 현실을 봅니다.


그리고 여전히 <니편 내편>으로 서로에게 상처와 아품을 주고 있는 교회들의 갈등을 봅니다

그리고 여전히 사람에게 실망하고 사람에게 상처받고 있는 우리 자신을 봅니다.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바르실래>와 같은 사람보다는 <세바>와 같이 나를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고 비난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모습을 통해서 희망을 봅니다

그리고 그릇된 요압의 모습에서 절망도 봅니다

다윗의 다시 내민 손도 보지만 아마사와 같이 내민손을 뿌리치는 손도 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계의 착각은 < 내가 착하게 대하면 모두 다 나를 착하게 대할 것이다. >

라는 것입니다우리는 이러한 착각을 버려야 좋은 관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좋은 관계의 시작은 무슨 관계이든지 오해하지 않고 

이해하기를 작정하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좋은 관계의 법칙은 손해보기를 각오하는 일이며

 거절될 것을 각오하는 일입니다

좋은 관계의 완성은 상처받아도 또 다시 손을 내밀고 

다가가는 일을 멈추지 않는 일것입니다.

것이 진정한 <화해>이며그것이 진정한 <통합>의 길입니다.










  • 06/07/2013 GSC 새벽묵상설교 
  • 사무엘하 18:24-33
  • 승리보다 샬롬입니다. 

@ 설교본문의 그림 인터넷에서 갈무리함 


[삼하 18:24-33]

(삼하 18:24) 때에 다윗이 두 문 사이에 앉아 있더라 파수꾼이 성 문 위층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보니 어떤 사람이 홀로 달려오는지라

(삼하 18:25) 파수꾼이 외쳐 왕께 아뢰매 왕이 이르되 그가 만일 혼자면 그의 입에 소식이 있으리라 할 때에 그가 점점 가까이 오니라

(삼하 18:26) 파수꾼이 본즉 한 사람이 또 달려오는지라 파수꾼이 문지기에게 외쳐 이르되 보라 한 사람이 또 혼자 달려온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도 소식을 가져오느니라

(삼하 18:27) 파수꾼이 이르되 내가 보기에는 앞선 사람의 달음질이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의 달음질과 같으니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는 좋은 사람이니 좋은 소식을 가져오느니라 하니라

(삼하 18:28) 아히마아스가 외쳐 왕께 아뢰되 평강하옵소서 하고 왕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이르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리로소이다 그의 손을 들어 내 주 왕을 대적하는 자들을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

(삼하 18:29) 왕이 이르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하니라 아히마아스가 대답하되 요압이 왕의 종 나를 보낼 때에 크게 소동하는 것을 보았사오나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나이다 하니

(삼하 18:30) 왕이 이르되 물러나 거기 서 있으라 하매 물러나서 서 있더라

(삼하 18:31) 구스 사람이 이르러 말하되 내 주 왕께 아뢸 소식이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왕을 대적하던 모든 원수를 갚으셨나이다 하니

(삼하 18:32) 왕이 구스 사람에게 묻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구스 사람이 대답하되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청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삼하 18:33)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제목 : 승리보다 샬롬입니다. 


오늘 본문은 압살롬의 죽음이후에 일어난 다윗왕의 비통해하는 심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왕의 군대는 압살롬의 반란군의 전쟁에서 승리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압살롬을 죽이게 됩니다. 



다윗왕에게서 반란군이 진압된 것은 좋은 소식이지만 그토록 < 너그럽게 봐주어서 .. 살아서 데려오기를 기다렸던 아들의 어이없는 없는 죽음 >의 소식은 불편한 소식입니다. 


비록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승전보는 좋은 소식이지만 자신의 아들이 그 전쟁에서 비참하게 죽었다는 비보는 자신이 우려했던 것이 현실이 된 안타까운 소식입니다.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 구스 사람 >과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에 달음질을 합니다. 처음에 < 구스 사람 >이 이 소식을 전하려 달음질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히마아스>가 구스사람보다 앞서서 이 소식을 전하고 싶어서 달음질을 합니다. 이미 요압은 다윗이 이 소식을 들었을 때 무엇에 더 많은 관심이 있을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압은 다윗에 이 소식을 전하는 것을 주저하죠. 


(삼하 18:22)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다시 요압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아무쪼록 내가 또한 구스 사람의 뒤를 따라 달려가게 하소서 하니 요압이 이르되 내 아들아 너는 왜 달려가려 하느냐 이 소식으로 말미암아서는 너는 상을 받지 못하리라 하되


결국에 후발주자였던 < 아히마아스 >가 < 구스 사람 >을 앞질러 왕에게 도착합니다. 그리고 소식을 전합니다. 


오늘 본문에 시작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 때에 다윗이 두문 사이에 앉아 있더라... > 



다윗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전쟁의 승리의 소식을 기다렸을까요? 

아니면 아버지를 버리고 떠나 반역의 길로 갔던

 아들 압살롬을 기다렸을까요? 


다윗은 무엇을 더 원했을까요 ?

전쟁의 승리를 통한 승리의 기쁨을 원했을까요? 

아니면 전쟁의 승리를 통해 샬롬이 회복되는 것을 원했을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다윗 원했던 것은 < 승리보다 샬롬 > 이었습니다. 

다윗이 원했던 것은 < 전쟁의 승리보다 아들 압샬롬 > 이었습니다. 

다윗이 그토록 기다렸던 좋은 소식은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승전보가 아니라 전쟁에서 아들만이라도 자신의 곁으로 돌아왔다는 소식 그것 하나였습니다. 


그토록 자신의 장수들에게 < 내 아들을 잘 부탁해 > 라고 당부했건만 그에게 전달된 소식은 < 아들 압살롬... 내 아버지는 평화이시다는 이름을 가지 내 아들 압샬롬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 


아히마아스가 다윗왕에게 와서 전합니다. 

(삼하 18:28) 아히마아스가 외쳐 왕께 아뢰되 평강하옵소서 하고 왕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이르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리로소이다 그의 손을 들어 내 주 왕을 대적하는 자들을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


아히마아스가 왕에게 한 첫인사가 < 샬롬 ! 평안하십니까? > 였습니다.

 왕에게 샬롬이 있느냐 물었습니다. 

그때 다윗왕는 아히마하스에게 묻습니다. 

< 젊은 압샬롬은 잘 있느냐 > 라고 묻습니다. 

이 부분을 원어 성경을 보면 < 젊은 압샬롬은 샬롬 하느냐 ? 평안하느냐 ? > 라는 의미입니다. 





그제서야 왕의 진심을 알게 된 < 아히마아스 >는 다른 말로 둘러댑니다. 

(삼하 18:29) 왕이 이르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하니라 아히마아스가 대답하되 요압이 왕의 종 나를 보낼 때에 크게 소동하는 것을 보았사오나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나이다 하니


그리고 뒤이어 들어온 < 구스 사람 >에게도 묻습니다. 

< 젊은 압샬롬은 샬롬하더냐 ? >라고 묻습니다


결국 다윗왕이 듣고 싶지 않았던 압샬롬의 죽음을 듣게 됩니다. 


(삼하 18:32) 왕이 구스 사람에게 묻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구스 사람이 대답하되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청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눈치없이 다윗의 진심도 모른채 다윗에게 비통한 소식을 전합니다. 


저는 구스사람과 아히마아스를 보면서 < 어렵고 힘든 말도 참 잘 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상대의 입장과 마음의 상태가 어떤지? 무엇을 기대하는 지을 잘 읽고 그 사람이 용납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 < 꼭 해야할 말이 있다면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할 말보다 중요한것은 말을 전달 받을 사람의 마음의 상태입니다. >


제가 한 달전에 이런 글을 제 페이스북에 남긴 적이 있습니다. 

< 세상에는 그것이 알고 싶은 일이 있다. 세상에는 그것을 모르고 싶은 일이 있다. 다 알고 싶을 때도 있고 다 모르고 싶을 때도 있다. 어떤 일은 몰라도 될일을 다 알려주는 이도 있고, 다 알아야할 일을 모른 척하는 이도 있다. 놀라운 것은 내가 알아야 할일은 잘 들리지 않고 내가 몰라도 될일 만 잘 들린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나에게 어떻게 알려주고 있느냐? 그리고 그것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느냐? 이다.  >




다윗에게 자기의 군대가 전쟁에서 승리한 소식은 그것이 알고 싶은 소식이라면 

다윗에게 자기의 아들이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소식은 그것을 모르고 싶은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절에 아들 압살롬의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면 울부짖는 다윗의 비통한 울부 짖음을 봅니다. 


(삼하 18:33)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


우리는 지난 50여일 전부터 한국 진도 팽목항에서 들려운 세월호 유족들 그중에서 생때같은 자식을 읽은 부모들의 오열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생중계를 지켜봐야 했습니다. 


직도 사고가 난지 53일째가 되었는데요. 아직 14명의 실종자가 남아있습니다.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눈물도 마른 안타까운 현실을 보고 있습니다. 계속 < 실종자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수 있도록 > 계속 기도해야 할 것 입니다. 






자식을 잃은 아비의 슬픔을 이루 말할수 없는 고통입니다. 


다윗왕은 < 두문사이에서 아들의 무사히 살아서 자기 곁으로만 돌아오기를 기다렸건만 ..> 아무리 소식을 전하는 이들이 < 왕이여 ! 샬롬 하십니까 ? >라고 물어도 다윗왕의 그 토록 원했던 <샬롬>은 <압샬롬>이었습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이지요. 


다윗이 바랬던 < 샬롬 >은 전쟁에서 자신의 대적자들이 다 없어져서 모든 원수가 갚아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바랬던 < 샬롬 >은 전쟁을 통해서 모든 원수 맺은 것이 풀러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 왠수 같은 아들 압살롬 >이 자신 곁으로 돌아와 다시금 두 사람의 관계가 < 샬롬 곧 평화 >로 회복될 수 있길 기대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아들의 죽음앞에 < 마음이 심히 아팠습니다. > 여기서 마음이 심히 아팠다는 표현은 < 그의 마음이 끊어지듯 요동쳤다는 의미입니다. > 그러면서 다윗은 말합니다. <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압살롬 내아들아 내 아들아 > 


다윗에게서 참된 샬롬은 < 압샬롬 >을 없애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에게 참된 샬롬은 < 압샬롬 >함께 두사람의 관계를 샬롬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힘들게 하고 나를 어렵게 하는 사람을 피하고 얼굴도 보지 않는 것이 내 마음의 샬롬을 유지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속으로 < 저사람 좀 없어져주었으면 .. 저 사람 우리 교회 떠났으면.. 싶은 사람 있나요> 꼴보기 싫은 사람을 피해서 그 꼴 보지 않는다고 해서 내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샬롬, 참된 평안은 어렵지만 불편하지만, 

그 사람과의 화평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이전보다 잘 지내지는 못해도 불편하게 지내는 일은 없어야합니다. 


<용서와 관련하여 이런 글을 본적이 있습니다.> 


때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도저히 지울 수가 없는 분한 일들도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지우고 용서하라. 왜냐하면 그런 기억과 분노들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질을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이 건너야 할 다리를 없애버리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습니다.’(로드 하버트)


‘용서는 어쩌다 한번 하는 행위가 아니라 지속적인 태도입니다.’(마틴 루터 킹 주니어) 상대를 위해서도 용서가 필요하지만 결국,용서는 나를 위해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다윗이 그토록 아들 압살롬을 두문사이에서 기다렸던 것은 바로 압살롬에게 용서를 구하려고하는 기다림이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아비로써 아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 그래서 다윗은 아들의 죽음앞에서 < 차라리 내가 대신 죽었으면 좋으련만 >이라고 아들의 이름을 그토록 비통하게 불렀 던이 아니겠네 생각해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합한 사람은 용서하는 일을 쉽게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합한 가정은 서로에게 용서를 구하는 일이 자연스러운 가정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샬롬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 06/06/2014 GSC 새벽큐티설교
  • 사무엘하 18장 16절-23절 
  • 다윗의 슬픈 가족사 
  • 기드론 골짜기 잔혹사

 @ 본문의 그림은 설교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인터넷에서 갈무리함


[삼하 18:16-23]

(삼하 18:16) 요압이 나팔을 불어 백성들에게 그치게 하니 그들이 이스라엘을 추격하지 아니하고 돌아오니라

(삼하 18:17) 그들이 압살롬을 옮겨다가 수풀 가운데 큰 구멍에 그를 던지고 그 위에 매우 큰 돌무더기를 쌓으니라 온 이스라엘 무리가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니라

(삼하 18:18) 압살롬이 살았을 때에 자기를 위하여 한 비석을 마련하여 세웠으니 이는 그가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내게 없다고 말하였음이더라 그러므로 자기 이름을 기념하여 그 비석에 이름을 붙였으며 그 비석이 왕의 골짜기에 있고 이제까지 그것을 압살롬의 기념비라 일컫더라

(삼하 18:19)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빨리 왕에게 가서 여호와께서 왕의 원수 갚아 주신 소식을 전하게 하소서

(삼하 18:20) 요압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오늘 소식을 전하는 자가 되지 말고 다른 날에 전할 것이니라 왕의 아들이 죽었나니 네가 오늘 소식을 전하지 못하리라 하고

(삼하 18:21) 요압이 구스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본 것을 왕께 아뢰라 하매 구스 사람이 요압에게 절하고 달음질하여 가니

(삼하 18:22)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다시 요압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아무쪼록 내가 또한 구스 사람의 뒤를 따라 달려가게 하소서 하니 요압이 이르되 내 아들아 너는 왜 달려가려 하느냐 이 소식으로 말미암아서는 너는 상을 받지 못하리라 하되

(삼하 18:23) 그가 한사코 달려가겠노라 하는지라 요압이 이르되 그리하라 하니 아히마아스가 들길로 달음질하여 구스 사람보다 앞질러가니라




기드론 골짜기 잔혹사 <다윗의 슬픈 가족사 >


 오늘 사무엘하에서 등장하고 있는 다윗왕의 이야기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의 합한자라고 칭함받는 다윗왕의 삶에서 어울리 않을 것 같은 < 다윗 왕가의 뼈아프고 슬픈 가족사 >의 한 에피소드를 보고 있습니다.윗왕의 아들들의 반목 그리고 압살롬의 반역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왕의 권력을 찬탈>하고자 하는 허망한 노력과 시도들을 보게됩니다. 


다윗왕의 슬픈 가족사를 통해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찾을 수 있으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가정은 찾기 힘듭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은 될수 있으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가가 되긴 쉽지 않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가정사를 보기가 드뭅니다. 


저는 오늘 아버지의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서 일어난 < 압살롬의 난 >이 그 아비의 군대와 군대 장군에 의해서 재압당하고 허망한 죽음을 맞은 이 사건에 대해서 이름 하길 < 기드론 골짜기 잔혹사 >라고 별칭을 붙이고 싶습니다. 


< 기드론 골짜기 >는 감람산과 예루살렘 사이들 흐르고 유대광야를 지나 사해로 흘러 가는 데 이 기드론 시내를 사이로 왕권을 둘러싼 반역과 도망 그리고 추격이 시작되었습니다.






마치 한국에서 서울 양재동 양재IC근처를  < 말죽거리하고 하듯이 > 이 기드론 시내는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지배하기 위해 지나가야하는 통로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압살롬의 구덩이 돌무덤이 이 < 기드론 시내 > 근처 에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오늘 이스라엘에 가면서 그곳에 조그마한 탑을 하나 세워놓고 < 압살롬의 기념비 >라고 만들어 놓았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삼하 18:18) 압살롬이 살았을 때에 자기를 위하여 한 비석을 마련하여 세웠으니 이는 그가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내게 없다고 말하였음이더라 그러므로 자기 이름을 기념하여 그 비석에 이름을 붙였으며 그 비석이 왕의 골짜기에 있고 이제까지 그것을 압살롬의 기념비라 일컫더라




 저는 이 < 기드론 골짜기 > 가 다윗의 이스라엘의 왕으로 있으면서 수없이 겪었던 왕위 쟁탈싸움에서 지나왔던 그런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기드론 시내를 오가며 때로는 도망자로 때로는 추격자로 그의 삶의 여정이 만들어 졌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기드론 시내에서 그렇게 빛나는 외모와 자랑할 만한 머리카락을 가졌던 누구나 <왕제감>이라고 생각했던 압살롬의 허망한 죽을 봅니다. 그리고 이 기드론 시내에서 다윗의 가정의 슬픈 가족사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지를 봅니다. 



 오늘 본문은 죽은 압살롬이 구덩이에 던져지고 그위에 돌무더기가 쌓이는 허망하는 죽음을 기록하고 있고, 내일 본문은 그 압살롬의 죽음에 대해서 비통하게 울부 지는 한 아비의 허망하는 울부짖을 살펴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머물러야할 다윗왕의 가정에 이토록 슬픈 가정사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무엇때문 일까요? 


압살롬의 이름에는 < 샬롬 >이라는 의미의 <평화>라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압샬롬>의 뜻은 < 내 아버지는 평화이시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점에서는 그 이름을 지어준 다윗은 끝까지 아들 압살롬의 반역과 악한 동기에도 불구하고 그를 용납하고 품었습니다. 어쩌면 그 이름을 지어준 아버지의 진심었을 것입니다. 


더 이상의 아픈 가정사를 남기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압살롬의 군대를 재압하러간 군대장군에게 <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삼하 18:5)." 내 아들 압살롬 만은 너그러이 대우해서 살려달라 >고 요청합니다. 하지만 정작 그 이름을 갖고 있는 아들 압살롬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끝까지 반역의 길을 걷지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그러나 어떻게 됩니다. 처음에 반역하여 그술의 망명객으로 도망간 압살롬을 아버지 다윗과 화해시키려 애썼던 장수 요압의 손에 의해서 죽임을 당합니다. 어쩌며 요압은 한번 정도는 압살롬의 왕제감이기에 기회를 주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충실한 신하였던 요압의 판단은 < 더 이상은 안된다 >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나뭇가에 머리카락이 걸려 매달려 있는 압살롬을 처참하게 죽이고 맙니다. 


 오늘 우리는 다윗의 슬픈 가정사. 이 기드론 시내에 일어난 잔혹사에 대해서 어떻게 묵상해볼 수 있을까요? 여기 우리는 압살롬의 그릇된 동기로 시작된 그의 허망한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보야 합니다.


원래 압살롬에 자신이 <3남 1녀>의 자식이 있었습니다. 

(삼하 14:27) 압살롬이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딸의 이름은 다말이라 그는 얼굴이 아름다운 여자더라

그러나 아름다운 아비에 아름다운 자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데려가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이름이 기억되기 위해서 자신을 위해서 이미 <기념비>를 만들어 놓은 상태였습니다. 


 비록 자신이 이름이 후대에 기리 기리 기념되기 위해서 기념비를 미리 만들어 놓았지만 그것은 화려하고 웅장한 무덤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허망하고 초라한 초라한 돌무더기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의 죽음 조차도 전쟁에서 장렬하게 싸웠던 장수의 멋진 죽음이 아니다 도망가다 나뭇가지에 머리카락이 걸려 죽임 당한 < 어이없고 어처구니 >없는 <코메디같은 죽음>것을 기억되고 있는 이 사실만이 남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오늘 이 압살롬의 코메디 같은 죽음을 보면서 그의 허망한 무덤과 쓸데없어 보이는 기념비를 보며서 < 우리의 죽음이 어떤 죽음올 기억되며 어떤 기념비를 세울것인가 >를 생각해야합니다. 


오늘 날짜가 6월 6일입니다. 한국에서는 <현충일>입니다. 

이날이면 나라를 위해 목숨바친 순국선열들 호국영영들을 기념합니다. 그래서 동작동 국립묘지에 참배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 나라를 위해 싸우다 목숨을 버린 애국열사와 국군장병들 >을 생각하면 그들의 넋을 기리는 행사들을 합니다. 이런 국립 현충원에 세겨진 이름들은 참으로 명예롭고 자랑스러운 이름이 됩니다.


 그러나 오늘 압살롬의 기념비가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 다윗 가정의 슬픈 가족사 >의  기념비가 되어 버렸습니다.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기고 그 사람의 얼굴을 기억하고 

그 사람의 죽음의 명예로움을 생각합니다. 

When a person dies, the name still remains 

The person's face will be reminded

The person's death will be a honored monument memorial


한 사람의 죽음은 삶의 끝인 동시에 

그 사람의 삶의 내용을 평가하는 시간입니다

When a person dies it is the end, and also,

 it is the time to judge that person's life.


제가 어떤 글을 보다가 압살롬의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쓴 글을 보았습니다. 


압살롬이 죽고 나니 비석 하나 남았습니다.

압살롬. 자기만을 위하여 < 살롬 >  이름 값도 못하고

명예롭지 못한 이름만 남기고 갔습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주위 사람들의 불편함은 모르고 평화도 만들지못하고

욕심만 채우려 해도 채울 수 없음을....


압살롬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압살롬의 죽음이 

어리석은 죽음이라고 생각한 4가지 이유를 정리해보았습니다.  


첫째는 압살롬은 아버지가 지어준 <샬롬>이라는 

         이름 값도 못하고 죽은 사람입니다. 


둘째는 압살롬은 빛나는 외모 수려한 머리카락을 선물로 받은 

          인물값도 못하고 죽은 사람입니다.


셋째는 압살롬은 다윗왕의 아들의 자리를 부여받고 자신이 세운 기념비석에도 

          어울리지 않은 자리 값도 못하고 죽은 사람입니다. 


넷째는 압살롬은 끝까지 참고 용납해준 아버지 다윗의 사랑도 모른채 

          사랑 값도 못하고 죽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이 어리석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 이름값 / 인물값 / 자리값 / 사랑값 > 이 네가지 우리가 죽은 이후에 평가되는 덕목들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더 붙인다면 < 은혜값 >라고 할수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값 하고 살아는가? > 물어 보아야 합니다. 

< 오늘날은 나는 어떤 값을 하고 사는 가? >




  • GSC 새벽묵상 설교 05/14/2014
  • 사무엘하 7:18-29
  •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으니  



[삼하 7:18-29]

(삼하 7:18)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삼하 7:19) 주 여호와여 주께서 이것을 오히려 적게 여기시고 또 종의 집에 있을 먼 장래의 일까지도 말씀하셨나이다 주 여호와여 이것이 사람의 법이니이다

(삼하 7:20) 주 여호와는 주의 종을 아시오니 다윗이 다시 주께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삼하 7:21) 주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주의 뜻대로 이 모든 큰 일을 행하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셨나이다

(삼하 7:22) 그런즉 주 여호와여 이러므로 주는 위대하시니 이는 우리 귀로 들은 대로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신이 없음이니이다

(삼하 7:23) 땅의 어느 한 나라가 주의 백성 이스라엘과 같으리이까 하나님이 가서 구속하사 자기 백성으로 삼아 주의 명성을 내시며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주의 땅을 위하여 두려운 일을 애굽과 많은 나라들과 그의 신들에게서 구속하신 백성 앞에서 행하셨사오며

(삼하 7:24) 주께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세우사 영원히 주의 백성으로 삼으셨사오니 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삼하 7:25) 여호와 하나님이여 이제 주의 종과 종의 집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영원히 세우셨사오며 말씀하신 대로 행하사

(삼하 7:26) 사람이 영원히 주의 이름을 크게 높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 하게 하옵시며 주의 종 다윗의 집이 주 앞에 견고하게 하옵소서

(삼하 7:27)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의 귀를 여시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셨으므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주께 간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삼하 7:28) 주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며 주의 말씀들이 참되시니이다 주께서 이 좋은 것을 주의 종에게 말씀하셨사오니

(삼하 7:29) 이제 청하건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하니라




제목 :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으니


우리가 기도할 때 언제 가장 기도가 잘 되고 잘 되지 않을까요? 

나에게 문제가 많을 때일까요? 문제가 없을 때일까요? 

상황이 가장 나빠졌을 때일까요? 상황이 가장 나아졌을 때일까요? 


 놀랍게도 문제가 없어지고 상황이 다 좋아지면 연약한 우리는 기도의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항상에 우리의 문제는 기도를 우리의 필요의 수준에 따라 그 기도의 수준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 기도생활의 아이러니 ]입니다. 


 문제가 있거나 상황이 어려울 때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수 없는 문제와 상황앞에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왜 기도해야 할지 분명합니다. 

최소한 하나님이 누구인지? 내가 하나님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안다면 그것은 우리의 최소한의 선택이며 제일 쉽고 빠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제와 어려움이 있을 때면 “ 울며 불며 주님 ! 모든 것이 문제입니다. 저는 할수 없습니다. 당신 밖에 없습니다. ”라고 간절히 매달립니다. 


 그러나 문제가 없어지고 상황이 좋아질 때 우리는 무엇을 기도해야할지 모른 경우가 많습니다.  나를 곤고하게 하는 문제가 없어지고 상황이 좋아지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어색해합니다.


 별로 간절함도 없고 그 다지 애원하고 매달릴 문제가 없어서 ...하나님을 더는 나의 상황으로 귀찮게 해드리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에 그냥 하나님께 “ 다 좋습니다. 다 괜찮습니다. 이 대로가 좋사오니 ... ”라고 쉬운 방식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는 모든 상황속에서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은혜의 방편으로 우리가 기도의 깊은 자리로 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기도는 [ 문제해결의 도구나, 필요한 것을 얻는 채널 ]이 아니라

 [ 하나님과의 사귐이요, 깊은 관계 유지의 방편 ]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기도에 있어서 우리의 문제 해결보다 우선되는 것이

 바로 [ 하나님과의 사귐 ]입니다. 


다윗은 바로 이 하나님과 사귐이 깊은 사람입니다. 그가 광야에서 쫓겨 다닐때에도 그가 왕궁에서 머물면서 있을 때에도 그는 이 하나님과의 사귐을 놓치 않은 사람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전존재와 자신의 전 생애에 속에서 하나님이 누구인지? 그 분에 비해서 나는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기도는 [ 하나님이 누구신지 ? ]와 [ 내가 누구인지? ]라는 

이 두가지 질문에 답하는 시간입니다. 


다윗은 오늘 본문의 기도속에서 이 두가지 질문에 분명한 대답과 고백 그리고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탁월한 신앙의 내용은 그의 기도속에서 뭍어나옵니다. 종종 어떤 분들의 기도의 내용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신앙의 내용과 수준을 옅볼 수 있습니다. 


 종종 교우들 중에 [ 기도를 부담스러워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것은 기도를 사람들 앞에 하는 것이라는 그릇된 부담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사람들 앞에 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적인 욕심이며 자기 중십니다. 


기도는 [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시간 ]입니다. 

기도는 [ 하나님 앞에 들어가는 행동 ]입니다. 

기도는 [ 하나님 앞에 들어가 머무는 예배 ]입니다. 




오늘 본문의 다윗의 기도의 모습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삼하 7:18)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오늘 이 기도를 드리는 있는 다윗의 기도는 어떤 상황입니까? 

곤고한 때입니까 ? 형통한때입니까? 모든 상황이 다 좋아진 그때에 아무 문제가 없어진 그때에 다윗은 <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 있다 >는 것은 < 여호와의 법궤가 있는 장막에 들어가 머물러 있다 >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여호와 앞에 머무는 시간, 행동, 예배를 드리고 있는 장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상황속에서 모든 순간에 모든 일들속에서 우리의 중심이 < 여호와 앞에 들어가 머물러 >있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그속에서 우리가 < 여호와를 부르기를 >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다윗은 하나님을 < 주 여호와 >라고 6번이나 반복해서 부릅니다. 

다윗 고백하고 있는 < 아도나이 야훼 >는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그냥 저멀리서 다윗을 내려다보고만 있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에게 다가와 그를 붙잡아 주시고 그를 세우시고 왕으로 삼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자신이 세우신 뜻과 계획을 반드시 이루시고 마시는 주권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자신이 약속한 것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과 자기 사람을 끝까지 견고케하시는 변함없는  하나님입니다. 


다윗은 그 < 주 하나님 >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광야의 목동일때도 그가 황무지로 쫓지는 도망자 일때도 그가 왕궁에 머물며 왕이 되었을때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사실은 < 다윗의 주 하나님은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살아서 역사하신다 >는 것입니다. 


오늘의 다윗의 기도는 < 역대상 17장 >에도 반복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이 기도속에서 우리는 형통할 때 어떻게 기도해야하는지를 배웁니다. 모든 상황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기도를 할수 있는지 그 모범을 배웁니다. 


오늘 아침에는 바로 그것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다윗의 기도는 3가지 질문 / 3가지 고백 / 3가지 인정을 이루어져 있습니다. 


1/ 다윗의 기도 속에는 분명한 < 3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

여호와 앞에서 나는 누구입니까?

여호와 앞에서 나는 무엇을 하였습니까?

여호와 앞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오늘 본문의 기도의 시작에 다윗은 물음에서 기도를 시작합니다. 


(삼하 7:18)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오늘 본문의 다윗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무언가를 물으면서 그것에 대한 자신이 고백과 인정을 담아 내고 있습니다. 


< 내가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다시 주께 무슨 말씀을 하오리까 ?.. 땅의 어느 한 나라가 주의 백성 이스라엘과 같으리까?.. > 이 다윗의 질문 같은 기도는 그가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고백과 인정을 담아내기 위한 도입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은 정말 하나님께 궁금해서 묻는 질문이 아니라 자신이 갖고 있는 확신을 다시금 재차 하나님으로부터 확인하는 질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기도속에는 하나님앞에서 < 나는 누구인지? >물어보아야합니다. 그리고 < 나는 무엇을 하였습니까? 나는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 >라고 불어보아야합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 주 여호와는 나를 아시고 내가 그것을 압니다. 그리고 주외에는 신이 없습니다 > 


(삼하 7:20) 주 여호와는 주의 종을 아시오니 

            다윗이 다시 주께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삼하 7:21) 주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주의 뜻대로 이 모든 큰 일을 행하사 

            주의 종에게 알게 하셨나이다

(삼하 7:22) 그런즉 주 여호와여 이러므로 주는 위대하시니 이는 우리 귀로 들은 대로는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신이 없음이니이다


2/ 다윗의 기도속에는 이 3가지 질문에 어울리는 3가지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여호와 앞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여호와 앞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나는 여호와 밖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늘의 다윗의 기도의 내용을 보면 < 하나님께서 약속하고 이루신 일이니 하나님이 끝까지 책임지셔야합니다.>라는 고백보다 < 하나님 저는 아무것도 압니다. 하님이 다 하신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님께 맡깁니다. >라고 하는 고백입니다. 


다윗은 지금 자신이 누리고 있는 평안, 명성, 칭찬, 존경, 영광이 어디서 주어진것인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세운 나라가 아닌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이며 하나님이 그 나라와 백성의 참된 왕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자신의 기도속에 하나님이 자신에게 행하신 일에 대한 고백을 빠뜨리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함을 부여잡고 다윗은 기도하고 있습니다. 


(삼하 7:27)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의 귀를 여시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셨으므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주께 간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3/ 다윗의 기도속에는 3가지 인정이 담겨있습니다.


당신이 나를 아시는 것을 제가 압니다. 

당신이 나를 위해 하신 일을 제가 압니다. 

당신이 나의 집을 견고케 하시고 복주실 것을 제가 압니다. 



다윗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이 어떻게 이루어가고 만들어가고 계시는 분명히 인정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그 자리와 평안이 어디에서 흘러나오고 있는지를 인정합니다. 그리고 이후에 자신의 집과 나라의 견고함이 누구의 손에 달려있는지도 인정합니다. 또한 자신에게 삶에 복을 주시는 복의 근원이 누구인지도 인정합니다. 


오늘의 이 다윗의 기도는 우리가 배워야하고 알아야할 기도의 모범을 잘 보여줍니다. 


<질문/고백/인정>이라는 3가지 패턴을 갖고 있는 이 다윗의 기도는 그 기도의 중심에는 자기의 욕심이나 자기의 중심이 담겨있지 않고 오직 < 하나님의 마음 >만 담겨져있습니다. 자신의 삶의 안전과 평안이 왔을 때 다윗은 < 하나님을 향한 흔들리지 않은 중심 >으로 그의 전존재와 전 생애가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인정하면 < 여호와 앞에 나아가 머물고 >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 이렇게 기도해야합니다. 


여호와 앞에서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여호와 앞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신이 나를 아시는 것을 제가 압니다. 

여호와 앞에서 나는 무엇을 하였습니까 ? 나는 여호와 앞에서 아무것도 한것이 없습니다. 당신이 나를 위해 하신 일임을 제가 압니다. 

여호와 앞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 

나는 여호와 밖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이 나의 삶의 견고케하시고 복주실 것임을 제가 압니다


이 기도가 우리의 삶에 늘 넘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사무엘하 3:28-39 

배제의 시대 포용의 은혜  


 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사무엘하 3:28-39 >

제목 : 배제의 시대 포용의 은혜 



[삼하 3:28-39]

(삼하 3:28) 그 후에 다윗이 듣고 이르되 넬의 아들 아브넬의 피에 대하여 나와 내 나라는 여호와 앞에 영원히 무죄하니

(삼하 3:29) 그 죄가 요압의 머리와 그의 아버지의 온 집으로 돌아갈지어다 또 요압의 집에서 백탁병자나 나병 환자나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나 칼에 죽는 자나 양식이 떨어진 자가 끊어지지 아니할지로다 하니라

(삼하 3:30) 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가 아브넬을 죽인 것은 그가 기브온 전쟁에서 자기 동생 아사헬을 죽인 까닭이었더라

(삼하 3:31) 다윗이 요압과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아브넬 앞에서 애도하라 하니라 다윗 왕이 상여를 따라가

(삼하 3:32) 아브넬을 헤브론에 장사하고 아브넬의 무덤에서 왕이 소리를 높여 울고 백성도 다 우니라

(삼하 3:33) 왕이 아브넬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이르되 아브넬의 죽음이 어찌하여 미련한 자의 죽음 같은고

(삼하 3:34) 네 손이 결박되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차꼬에 채이지 아니하였거늘 불의한 자식의 앞에 엎드러짐 같이 네가 엎드러졌도다 하매 온 백성이 다시 그를 슬퍼하여 우니라

(삼하 3:35) 석양에 뭇 백성이 나아와 다윗에게 음식을 권하니 다윗이 맹세하여 이르되 만일 내가 해 지기 전에 떡이나 다른 모든 것을 맛보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하매

(삼하 3:36) 온 백성이 보고 기뻐하며 왕이 무슨 일을 하든지 무리가 다 기뻐하므로

(삼하 3:37) 이 날에야 온 백성과 온 이스라엘이 넬의 아들 아브넬을 죽인 것이 왕이 한 것이 아닌 줄을 아니라

(삼하 3:38) 왕이 그의 신복에게 이르되 오늘 이스라엘의 지도자요 큰 인물이 죽은 것을 알지 못하느냐

(삼하 3:39) 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 대로 갚으실지로다 하니라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의 말씀은 자신의 수하 요압의 손에 죽은 아브넬의 장사하고 그를 애도하는 장면입니다. 

 사울의 정권에서 다윗의 정권으로 이양이 되고 있는 이러한 정권이양기의 시점에서 원한 맺힌 피의 복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울의 충실한 신하였던 아브넬을 죽이는 것은 어쩌면 다윗에서 당연한 결과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자신에게 그토록 모진 고통을 주는데 앞장섰던 아브넬을 애도하면 그를 죽은 요압을 칭찬해주기는커녕 요압에게 저주를 퍼붓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대목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이해가 되십니까?


우리가 흔히 아는 역사의 이야기나 대하드라마 속에서 한 정권이 바뀔 때는 < 보복과 피의 숙청, 폭력과 반목 >이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야만 세워지는 정권이 더 든든히 설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특히 서로에게 맺힌 원한과 상처가 많을 때는 더더욱 서로에게 처참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가 흔히 아는 역사 드라마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다윗은 아브넬의 화해의 손을 피의 복수로 갚지 않고 그와 화해하는 방법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심지어 고맙게도 아브넬을 처리해준 요압에게 상을 내리기는커녕 그를 저주합니다. 


(삼하 3:29) 그 죄가 요압의 머리와 그의 아버지의 온 집으로 돌아갈지어다 또 요압의 집에서 백탁병자나 나병 환자나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나 칼에 죽는 자나 양식이 떨어진 자가 끊어지지 아니할지로다 하니라


마치 삼족을 멸하는 것 같은 저주를 퍼붓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다윗이 삼족으로 멸해야하는 사람은 요압이 아니라 아브넬 입니다. 


요압이 다윗 대신에 골칫덩어리가 될지도 모를 사울의 사람 아브넬을 죽여준 것은 < 고마운 일 >입니다. 그리고 요압이 자신의 동생 아사헬의 죽음에 복수를하는 것은 요압에게선 < 당연한 일 >입니다. 다윗은 이 < 고맙고 당연한 일 >을 뒤집어 놓고 있습니다. 


도리어 요압을 책망하고 요압과 요압의 집을 축복하지 않고 저주하고 있습니다. 


왜? 다윗은 이러한 상식밖의 행동을 보여주고 있을까요? 


그 이유를 오늘 본문에 30절에서 한번 찾아 볼수 있습니다. 


(삼하 3:30) 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가 아브넬을 죽인 것은

            그가 기브온 전쟁에서 자기 동생 아사헬을 죽인 까닭이었더라


 다윗은 스스로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사울의 시대는 끝이 나고 다윗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자신의 시대를 열어주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무엘하 3장 1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지요..


(삼하 3:1)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


분명한 사실은 사울의 세력과 다윗의 세력간의 피의 전쟁이 오랫동안 있었습니다. 그 결과 대세가 기울고 있었습니다. 이제 사울의 세력은 점점 약해지고 다윗의 세력은 점점 강해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다윗은 계속 그런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 언제까지 이 피의 시대가 계속될것인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면 하나님의 계획인가 ? >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했던 다윗은 이러한 고민을 계속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래서 그가 원했던 새 시대의 모습은 더 이상의 반목이나 원수맺음이 아니라 < 화해와 포용 >의 시대를 원했을 것입니다.

< 배제의 시대에 포용의 은혜 >를 선택했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 화해와 포용의 첫 번째 시대를 여는 것이 바로 사무엘하 1장에 등장하는 < 사울와 요나단을 추모하고 애도하면 마치 헌정시 >에서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인 다윗의 시대에 자신이 기대하는 화해와 포용의 시대의 요청이었습니다.  


그리고 화해와 포용의 시대를 요청하는 두 번째 요청이 바로 < 사울의 신하 아브넬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를 위해 치루는 장례 >였습니다. 


바로 이것인 다윗의 중심이라는 것을 옅볼 수 있는 것은 당연히 행할 수 있는 요압의 복수조차도 다윗은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피의 복수를 멈추지 않고 있는 요압과 그의 집을 저주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더 이상의 인간의 < 원한맺음과 원수 갚음 >과 같은 인간적인 방식과 시대를 거부해야할 때가 왔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이 통치하는 시대는 그런 방식으로 운영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 화해, 용서, 용납, 포용 >과 같은 방식으로 .... 

세상이 이해할수 없는 방식으로 그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 

그 하나님의 나라의 다스림이 실행되어야하는 것을 알았기에 다윗은 자신의 원한을 자신의 원수를 피의 복수로 마무리 짓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다윗의 중심을 알수 있은 것은 아브넬를 장례하는 행렬에 자신 뿐아니라 아브넬을 죽였던 요압까지도 그 행렬에 따라가 그를 위해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아브넬 앞에서 애도하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삼하 3:31-32]

(삼하 3:31) 다윗이 요압과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아브넬 앞에서 애도하라 하니라 다윗 왕이 상여를 따라가

(삼하 3:32) 아브넬을 헤브론에 장사하고 아브넬의 무덤에서 왕이 소리를 높여 울고 백성도 다 우니라


여러분.. 이 장면을 상상해보십시오.. 이 장례식 장면을 그려보십시오..


그토록 자신을 죽이려 사울과 함께 칼과 창을 들고 달려온 사울의 총사령관 아브넬이었습니다. 다윗에게서 아브넬은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처음 다윗이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죽였을 때에 처음 다윗의 손을 잡고 사울왕에게 인도하는 이가 아브넬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두 사람의 필연과 악연이 시작되었습니다. 


다윗의 앞날에 가장 위험한 인물이 될뻔 했던 아브넬을 위해 < 추모의 노래 >를 짓고 있습니다. 이 노래는 그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고 있습니다. 


[삼하 3:33-34]

(삼하 3:33) 왕이 아브넬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이르되 아브넬의 죽음이 어찌하여 미련한 자의 죽음 같은고

(삼하 3:34) 네 손이 결박되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차꼬에 채이지 아니하였거늘 불의한 자식의 앞에 엎드러짐 같이 네가 엎드러졌도다 하매 온 백성이 다시 그를 슬퍼하여 우니라


그리고 다윗이 음식도 거른채 아브넬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다윗의 슬픔과 애도를 보고 아브넬을 죽인 것이 다윗이 아닌 것을 알게 됩니다. 


어쩌면 다윗이 아브넬의 죽음을 이렇게 다루어야 했던 분명한 의도 있을 알수 있습니다. 바로 자기의 백성들에게 더 이상의 피의 복수와 원수갚음은 없어야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 이상 사울의 세력과 다윗의 세력이 서로 반목하는 그런 일이 없어야한다는 것 그리고 이제는 서로 화해하고 용납하는 시대가 와야하는 무언의 메시지가 바로 아브넬의 장례식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다윗의 의도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적인 권력투쟁으로 피의 복수를 진행할 자신을 따르는 신복들에게 일종의 간접적인 경고 메시지를 보내는 것입니다. 


(삼하 3:39) 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 대로 갚으실지로다 하니라


대단한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추측해볼수 있는 대목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윗의 이러한 화해와 용납의 태도에서 무엇을 묵상하고 

무엇을 배울수 있는가?를 질문해보아야 합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갈등과 대립를 경험합니다. 

항상 보이지 않는 피의 복수과 원수맺음을 경험하고 살아갑니다. 




크리스채니티투데(Christianity Today)에서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책중 100권중 하나로 선정된 책중에 미로 슬라브 볼프(Miroslav Vof) < 배재와 포용 Exclusion and Embrace>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볼프라는 사람은 동유럽 크로아티아 출신의 신학자입니다. 동유럽의 냉전시대의 격변기를 겪으면서 동유럽안에서 일어난 전쟁과 폭력, 갈등과 반목을 지켜보면서 이러한 시대에 < 나는 십자가에 달린 메시야를 따르는 사람으로 적합한 반응은 무엇인가? 십자가의 메시와 이 폭력적인 세상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를 고민하는 내용입니다. 


이 볼프는 그 폭력의 한 가운데서 고민하고 묵상하면 사유하면서 이 글을 썼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향에서 사람들이 강제수용소에 수감되고 여성들이 강간당하고 교회가 불타고 도시가 파괴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유고연방의 설립과 해체가 반복된느 과정에서 과거 오스만 제국하에 공존했던 다른 종교적 정체성을 가진 민족들 사사의 갈등과 상호 파괴가 ‘ 인종 청소 ’의 양상으로까지 전개되던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이 책의 서두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 나는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아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나에게 적합한 반응을 생각해 내야만 했다. 어떻게 내가 나의 헌신, 욕망, 저항, 분노, 불확실성으로부터 시선을 회피할 수 있겠는가? 최대한 엄격하게 그것들을 곰곰이 따져 보아야 했다. 십자가의 메시지와 폭력의 세상 사이에 있는 긴장이 나에게는, 십자가에 달리신 이를 따르고자 하는 바람과 다른 이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지켜보거나 나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내버려두고 싶지 않은 마음 사이의 갈등으로 다가왔다. 이 책은 지적 투쟁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영적 여정에 관한 기록이기도 하다. ”


이 책의 마지막 대목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 하나님의 정의를 확신하고 하나님의 임재로 마음을 굳게하며 복수의 충동에 사로잡히기를 거부함으로써 폭력의 순환을 끊어야 한다. 원수를 사랑하려고 노력하면 결국 십자가에 달린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부인할수 없다. 하지만 보복하지 않는 값비싼 행동들은 오순절의 평화라는 연약한 열매가 잘 알수 있는 씨앗이된다. ”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오늘의 이 시대를 바라봅니다. 

포용보다는 배제가 더 쉬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쉽게 배제하고 어렵게 포용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다윗의 모습은 이 시대에 우리가 무엇을 할수 있는지? 

이 시대에 무엇을 해야하는지? 말해줍니다. 


더 이상의 세상의 갈등과 반목의 방식을 끊고 

하나님의 나라의 방식인 화해와 용납 그리고 포용으로 나아가도록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 여호와는 악행한자에게 그 악한대로 갚으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우리가 갚아주려하지 말고 우리가 복수하려 하지 말고 

우리가 베풀 수 있는 최고의 선으로 ....

선으로 악을 이기는 상상할수 없는 방식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수 있어야합니다.










  • 사무엘하 1:17-27
  • 슬픔에 대하여 노래하라. 



[삼하 1:17-27]

(삼하 1:17) 다윗이 이 슬픈 노래로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을 조상하고

(삼하 1:18) 명령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 노래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으되

(삼하 1:19) 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삼하 1:20) 이 일을 가드에도 알리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지어다 블레셋 사람들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할례 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

(삼하 1:21) 길보아 산들아 너희 위에 이슬과 비가 내리지 아니하며 제물 낼 밭도 없을지어다 거기서 두 용사의 방패가 버린 바 됨이니라 곧 사울의 방패가 기름 부음을 받지 아니함 같이 됨이로다

(삼하 1:22) 죽은 자의 피에서, 용사의 기름에서 요나단의 활이 뒤로 물러가지 아니하였으며 사울의 칼이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였도다

(삼하 1:23) 사울과 요나단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이러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 그들은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도다

(삼하 1:24) 이스라엘 딸들아 사울을 슬퍼하여 울지어다 그가 붉은 옷으로 너희에게 화려하게 입혔고 금 노리개를 너희 옷에 채웠도다

(삼하 1:25) 오호라 두 용사가 전쟁 중에 엎드러졌도다 요나단이 네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삼하 1:26)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삼하 1:27)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으며 싸우는 무기가 망하였도다 하였더라

 

 

제목 : 슬픔에 대하여 노래하라.


오늘 이 아침에 묵상하게 되는 말씀의 주제는 [ 죽음, 슬픔, 통곡, 애도, 애가 ]라는 주제입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이 전쟁에서 적에서 손이 아닌 자신의 부하의 손에 비명의 최후를 맞은 <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 >을 추모하는 애도하는 그러한 말씀입니다.

 

공교롭게도 오늘 이 본문은 오늘 우리 조국 한국땅에서 지금 겪고 있는 세월호에 희생된 이들의 [ 죽음, 슬픔, 통곡, 애도, 애가 ]와 놀랍게도 연결되고 오버랩되고 있는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 시대에 주시는 우리의 메시지를 살펴보고 묵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삼하 1:17-18]

(삼하 1:17) 다윗이 이 슬픈 노래로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을 조상하고

(삼하 1:18) 명령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 노래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으되

 

다윗은 자신을 그토록 괴롭혔던 사울의 죽음 앞에 그를 기억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를 짓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자신을 그토록 돕고 사랑해주었던 친구 요나단의 죽음앞에 그의 죽음을 통곡하며 그를 위한 추모곡을 헌정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그토록 증오했던 그토록 분노에 가득찼던 애증의 관계인 사울의 죽음을 대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그토록 사랑했던 그토록 고마움으로 가득찼던 애정의 관계요나단의 죽음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다른 그림과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두 사람, 두 용사의 죽음앞에 다윗은 동일한 슬픔과 동일한 공감으로 그 슬픔을 드러내고 그것을 < 활의 노래 >라는 이름으로 < 야살의 책 >에 기록하여 백성들이 그것을 함께 부르고 그것을 기억하기를 그리고 그들의 삶을 잊지 말고 기억하기를 명령하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 다윗의 애가 >는 활의 노래라고 불리웁니다. 활의 노래라는 의미는 실제로 아마 활을 사용하여 연주한 노래였거나 아니면 활을 사용하는 용사를 상징하는 노래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다윗은 두 용사의 죽음을 기억하기 위해 < >이라는 것을 사용하여서 이 노래를 짓고 있습니다. 그리고 < 야살의 책 >< 의인의 책 >이라고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과 지도자들의 영웅적인 업적을 기리는 책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일종은 위인전집과 같은 책이지요. 바로 이러한 다윗이 지은 두 용사의 죽음을 야살의 책에 기록하게 하였습니다.

 

여기서 다윗의 탁월한을 볼수 있습니다. 다윗은 그의 생애동안 사울에게 쫓겨다니면서 죽음의 고비를 여러번 넘겨야했던 < 사울 트라우마 >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던졌던 < 창 트라우마. 도망자 트라우마. 동굴 트라우마 >가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에게 사울이라고 하면 정말 기억하고 싶지 않는 두 번 다시는 생각하기도 싫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바로 트라우마 였을 것입니다.



살아남은자 만이 갖는 일종의 < 생존자 증후군 > 같은 것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오늘 사울과 요나단을 위해 슬픈노래를 지어 부르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들의 행적을 추억하고 그들의 용맹함을 칭찬하고 있는 다윗의 탁월함을 보게 됩니다.

 




어쩌면 오늘의 이 다윗의 노래는 다윗이 사울에게 겪은 숱한 고난과 어려움을 안다면 도저히 나올수 없는 노래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다윗은 이 노래를 만들어서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기억하고 불러주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 다윗의 노래 자체에 주목하기보다는 자신의 트라우마와 같은 사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는 다윗의 마음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고 묵상하면서 이해할수 없는 다윗의 행동에 이렇게 질문해봅니다.


나라면 어땠을까?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나라면 그렇게 할수 있었을까 ?”

 

만약 여러분이라고 어땠을까요? 만약 여러분이란 어떻게 했을까요?

 

자신을 그토록 괴롭혔던 사울이 죽었습니다. 더 이상 자신에 고통을 주는 근심거리가 사라졌습니다. 두 번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이름 사울이 죽었습니다.


그냥 잘 됐다 ~ 이제 나는 자유야 ~ 속으로 웃으면 

속시원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지난날 내가 사울에게 당했던 온갖 수모의 기억들을 지우고 싶지 않았을까요?

더 이상 사울의 이름 조차도 지워버리고 싶지 않았을까요?

오히려 사울과 다른 요나단만 추앙하면서... 

이런 못되고 잘못된 아버지 밑에서 그래서 요나단만은 달랐네하면서 ....

오히려 사울은 저주하고 요나단은 추앙하면서 

그렇게 노래를 만들지 않았을까요?

그동안 자신이 당한 모든 책임을 < 사울과 요나단 >에 돌리고 싶지 않았을까요?

모든 문제를 사울의 탓으로 돌리고 싶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오늘 다윗의 모습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 같으면 다윗처럼 했을까요? 솔직히 그렇지 않았을 확률이 높습니다.


사람의 당한 고통과 상처는 그 고통과 상처를 주는 장면이 사라진다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 고통과 상처 소위 트라우마가 사라지기위 위해서 그것을 극복할수 있는 더 큰 사랑과 위로가 부어져야합니다. 


흔히 4:1의 법칙이 있습니다. 한번 비난의 말을 들으면 그것이 없어지기 까지는 4번의 칭찬의 말을 들어야 그것이 없어집니다.


 아마도 다윗은 자신이 지나온 도망의 삶에서 그리고 외롭고 힘든 광야의 길에서 자신의 고통과 상처로 자신이 당한 트라우마로 계속적인 고통에 시달릴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과 슬픔의 시간을 자신의 삶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함으로 그시간을 이겨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억울하고 도망하는 300명의 사람들과 그 고통을 연대하면 그 고난과 트라우마를 이겨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이 도망다니면서 울부짖으면 지은 시편들을 통해서 다윗이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고 이겨내고 있는지 알수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도망다닐 때 지은 시편들을 보면 초반의 내용들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분노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리고 원수들대한 분노와 저주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고백을 보면 다윗은 그 분노, 그 고통, 그 억울함을 하나님의 부으시는 은혜와 사랑으로 바꿔 내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윗의 탁월함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3:1-2] 압살롬에 쫓길때에...

(3:1)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3:2)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18:1-2] 사울의 손에서 건겨주신 날에

(18:1)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18:2)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오늘 우리 조국 한국은 심각한 불신, 심각한 분노, 심각한 책임전가, 심각한 우울증에 빠져있습니다.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못한 세월호 사건이 한국 사람들의 마음을 침몰시키고 심리적 공항상태에 빠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들려오는 뉴스들을 보거나 들을때면 계속 우리의 마음이 편치 않음을 느낍니. 그렇다고 잊고 살자니 그렇다고 관심을 끄자니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너무 심각해서 그럴수가 없습니다. 한동안 이 일로 계속 마음이 쉽지않고 편치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오열하는 슬픔과 통곡을 보면서...


무책임하고 부도덕한 어른들의 모습의 추악한 실체를 들여다 보면서...


우리는 모든 이 고통과 슬픔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최근에 하도 마음이 답답해서 필립얀시에 < 하나님 제게 왜 이러세요 >라는 책을 읽는 중에 이런 글을 발견했습니다.


필립얀시는 "고통의 시간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는 질문을

"고통의 시간에 교회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고통에 동참하는 교회가 고통당하는 이들의 '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묻는 처절한 물음에 답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고통을 소멸케 할 수는 없으나 고통에 동참하는 교회가 고통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케 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통을 없애도록 부름 받은 초능력자들이 아니다. 고통에 동참하며 성육신의 삶을 살도록 부름 받은 성도일 뿐이다

고통의 의미와 고통의 소멸과 고통의 유익은 십자가가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래서 체휼이 중요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통을 아는 하나님을 기다린다

고통당한 신은 우리 하나님 뿐이니까!. ”

 



오늘날 이 시대와 이 세상의 사람들이 고통당할 때 그 고통을 함께할 수 있는 것은 교회와 기독교가 되어야한다는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현실은 오늘날 한국교회와 우리의 현실은 이 세상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서 교회가 답을 주고 있지 못합니다


 모두다 이 세상에서 당한 그 고통을 고통의 십자가를 아는 교회로 그리고 그 고통을 누구보다 더 많이 공감해줄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로 가져오라고 말수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교회들은 그 고통을 해결할 채널이 되어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현장에서 고통받고있는 이들을 상담하고 있는 서울대 정신건강의 김석주 교수의 인터뷰를 들었습니다


지금 세월호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가장 위로가 되는 사람은 바로 동일한 고통을 겪어본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천안함 유족들, 경주 마우나 리조트 유족들, 씨랜드 사고 유족들이 지금 와서 곁에서 손을 잡아주고 위로해고 격려해주는 것이 가장 큰 위로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코 말을 많이 한다고 성경를 풀어준다고 위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흔한 < 하나님의 뜻이 있을거야 >라고 하는 그런 말뿐인 헛된 위로가는 맞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제가 고통을 겪고 보고 어려움을 겪어보니 그렇습니다.


 고통당한 이들에게 가장 큰 위로는 같이 고통을 겪어보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그 고통을 잘 모른다면 침묵하는 것이 좋고 정말 그 고통을 안다면 같이 분노하는 것이 좋습니다. 무책임한 침묵도 어설픈 분노도 하기 전에 

우리에게 물어야합니다.

< 오늘날 우리는 고통당하는 이들의 고통을 아는가?

오늘날 교회는 고통당하는 이들의 고통을 체휼할수 있는가 >

 

 오늘 다윗의 슬픔의 노래는 고통을 하는 이의 노래입니다


고통을 아는 이 만이 부를수 있는 노래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사울에게 겪은 고통을 이렇게 노래로 바꾸어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살과 같은 친구 요나단의 죽음을 추모하면서 그의 사랑의 이 노래로 바꾸어 부르고 있습니다.

 

[삼하 1:23-24]

(삼하 1:23) 사울과 요나단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이러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 그들은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도다

(삼하 1:24) 이스라엘 딸들아 사울을 슬퍼하여 울지어다 그가 붉은 옷으로 

너희에게 화려하게 입혔고 금 노리개를 너희 옷에 채웠도다

 

 오늘 다윗은 자신의 고통을 탓하기보다는 그들의 노래하는 것을 바꿔내고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함으로써 바로 < 고통받는 이들과의 연대 >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바로 이러한 노래를 지어서 불러줄수 있는 고통을 공감할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함께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노래를 지어 부를수 있는 공동체. 함께 고통받는 이들의 마음을 위로해주는 공동체가 되어야합니다.

 

 만약 이 세상에서 슬픔이 있어나 억울함이 있을 때 진정으로 고통을 알고 공감해줄수 있는 교회로 달려오고 주님 품으로 안겨서 그것을 풀어낼수 있는 그런 진정한 사랑과 회복의 공동체를 꿈꿔 보아야합니다.

 

분노를 슬픔으로 풀어내고 억울함을 공감으로 용납하고

지난 것은 잊고 기억할것만은 반드시 남겨두면서 ...

아픔이 추억이 되고 고통을 은혜로 바꾸어내는 놀라운 은혜로의 회복탄성력을 갖고 있는 그런 공동체. 그런 믿음. 그런 신앙이 있었으면 좋곘습니다.

 

지금 세월호에 희생당한 이들을 추모하는 노래로 

팝페라 가수의 <임형주의 천개의 바람이 되어 >가 있습니.


< 천개의 바람이 되어 >에 이러한 가사가 있습니다.

나의 사진 앞에서 울지 마요 나는 그곳에 없어요

나는 잠들어 있지 않아요 제발 날 위해 울지 말아요

나는 천개의 바람 천 개의 바람이 되었죠

저 넓은 하늘 위를 자유롭게 날고 있죠

 

오늘 다윗의 추모곡과 헌정곡은 이렇게 마치고 있습니다.

 

[삼하 1:25-27]

(삼하 1:25) 오호라 두 용사가 전쟁 중에 엎드러졌도다

요나단이 네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삼하 1:26)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삼하 1:27)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으며 

싸우는 무기가 망하였도다 하였더라

 

이 고백은 고통을 아는 이의 노래이며

슬픔에 대해 진정으로 부를 수 있는 노래입니다.




 










  •   <갈라디아서 3:10-18>  법보다 약속입니다.
  • 율법은 인간적 성취를 요구한다. 그러나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일에 대한 믿음을 요구한다. 율법은 요구사항을 만들고 우리에게 복종을 요구한다. 하지만 복음은 약속을 제시하고 우리에게 믿음을 요청한다. - 존스토트 -


[3:10-18]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3: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3:15)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3: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3: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


 지난주간에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로 잠간 쉬었던 < 갈라디아서 >를 다시 묵상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서신중에서 가장 앞선 기록인 갈라디아서는 초기 사도바울의 복음의 열정과 그의 뜨거움을 옅 볼수 있는 서신입니다.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복음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이상 어리석게 너희가 유대의 전통이나 할례나 율법에 매여 있지 말고 복음이 주는 참된 자유를 맛보고 그렇게 담대하게 살아가기를 도전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전체의 6장을 3부분으로 나누어서 복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1-2장은 < 은혜의 복음을 변호함

3-4장은 < 은혜의 복음을 설명함 >

 5-6장은 < 은혜의 복음을 적용함 >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3장은 사도바울이 < 은혜의 복음을 설명함에 있어서 모세의 율법보다 먼저 있었던 아브라함의 믿음, 아브라함의 의롭게 여김을 가지고 복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방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그 이방에서 복음을 받아들고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계속 고민스럽게 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우선인가? 아니면 유대인이 되는 것이 먼저인가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중요 한가 ? 아니면 유대인으로 사는 것이 중요한가 ? 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도 율법을 버릴 수가 없었고 그 율법을 버리는 것이 그들에게 상당히 위험한 결정이었습니다. 심지어 유대에서 가만히 들어온 거짓 교사들이 그들의 마음을 충동질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면서 율법을 지켜야한다고 율법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그들에게 찾아오는 것이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은혜의 복음을 설명하면서 모세의 율법보다 먼저 있었던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가지고 옵니.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게 여겨진바 된 것은 그에게 율법의 행위로 있어서 되어진 것이 아니라 < 그가 믿는 믿음 때문이라 >라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 율법은 죄를 다루기 위한 것이지 의를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아브라함보다 훨씬 후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훨씬 뒤에 만들어진 율법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보다 먼저일수가 없다는 것이 바울의 핵심적인 논리입니다. 그래서 율법보다 우선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기능은 죄를 드러내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세상에서 구별된 의식과 질서를 따르도록 돕기 위한 것입니다


율법의 궁극적인 기능은 죄를 지으면 초래하게 되는 심각한 저주가 무엇인지?를 알리고 경고하는 데 있습니다. 결코 율법을 행함으로 의를 이루거나 믿음을 갖지는 못합니다. 그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율법입니다


오로지 율법의 기능은 < 믿음을 돕기 위한 것 >입니다.


율법은 인간적 성취를 요구한다. 그러나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일에 대한 믿음을 요구한다. 율법은 요구사항을 만들고 우리에게 복종을 요구한다. 하지만 복음은 약속을 제시하고 우리에게 믿음을 요청한다. - 존스토트 -



율법은 정의의 법정이지만 복음은 은혜의 보좌이다. - 조지 스윈녹 -

 

오늘 본문에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그 율법의 저주를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대신 담당하심으로 우리에게 주어져야할 율법의 저주를 속량하셨습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감당해할 율법의 저주가 없어진 샘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길를 따르지 않고 우리를 위해서 율법을 완성하시고 율법의 저주에게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이 열렸음을 알아야합니다.

 

우리에게 놓여있는 2가지 루트(ROUTE)가 있습니다.

율법을 다 지키며 의롭게 되고 그렇게 사는 루트가 있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 그렇게 사는 루트가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율법을 통해 의롭 되는 사람이 없으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사람은 있습니다. 바로 그것을 아브라함의 믿음과 의롭게 여김이 보여주었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를 뒤집어 쓰시고 죽으신 예수님이 그 새롭고 산길을 여셨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저주아래 묶어 놓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덕분으로 예수님의 덕택에 그 율법에서 빠져나와서 그 은혜와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놀라운 주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묵상하며 도전 받는 것은

우리의 믿음은 율법보다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의롭게 됨은 율법의 행위보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참된 복은 율법안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3가지 사실이 우리의 복음의 참다운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덕분에게 우리에게 주어져야할 율법의 저주가 치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이 우리도 약속을 유업을 받은 아브라함의 자녀와 복을 누리는 자들로 우리를 끼워주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십자가 사건은 율법아래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감당하는 사건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저주를 받으신 것이다. 이 방법으로 우리를 되찾아 왔습니다. 율법의 저주를 끊기 위해서 그분이 스스로 저주를 받는바가 되고 저주를 받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다는 것은 그렇게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저주를 담당하고 뒤집어쓰시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를 진다고 말할 때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박힌다고 말할 때 그 의 의미는 율법의 저주를 다 담당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죄를 뒤집어 쓰고 많은 이들의 유익을 위해서 살아야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저주받으심이 오늘 우리에게 복받음으로 이어집니다. 구약성경에서 < 저주와 복 >은 항상 대조를 이루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됩니다. 오늘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예수님안에서 이루어진 < 저주와 복 >에대한 분명한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각각 하나님의 약속과 계명에 대한 순종이 복을 위한 필요조건이었습니다.


하지만 갈라디아 교회에게는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나무에 달려 저주가 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구원(이신칭의)의 차원의 복을 위한 필요조건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9-10절의 복과 저주의 현재적 특성은 구원의 차원이라기보다는 현재적인 삶과 관련된 복과 저주의 차원을 말한다.

 

우리에게 <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게 되는 > 놀라운 일들이 주어졌습니다.


(3: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율법의 저주가 아브라함으로 복으로 바뀌는 그 과정속에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을 누리고 있음을 확증해주시는 것이 바로 <성령의 약속>입니다.

 

성령께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을 개런티<guarantee>해주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약속의 복을 워런티<Warrantee>해주십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 그리스도을 믿고 성령님을 받아들이는 우리에게 주어진 복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율법보다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의롭게 됨은 율법의 행위보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참된 복은 율법안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