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무엘상 30:21-31
  • 은혜를 아는자가 은혜를 베푼다.  
  •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중심으로 사람을 향한 배려와 배풂이 흘러나왔기에 그가 이스라엘에서 가장 오래 기억되는 왕이 될수 있었습니다. 


새벽 큐티 설교 <사무엘상 30:21-31>



[삼상 30:21-31]

(삼상 30:21) 다윗이 전에 피곤하여 능히 자기를 따르지 못하므로 브솔 시내에 머물게 한 이백 명에게 오매 그들이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을 영접하러 나오는지라 다윗이 그 백성에게 이르러 문안하매

(삼상 30:22) 다윗과 함께 갔던 자들 가운데 악한 자와 불량배들이 다 이르되 그들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은즉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은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주지 말고 각자의 처자만 데리고 떠나가게 하라 하는지라

(삼상 30:23) 다윗이 이르되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넘기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삼상 30:24) 이 일에 누가 너희에게 듣겠느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동일할지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 하고



(삼상 30:25) 그 날부터 다윗이 이것으로 이스라엘의 율례와 규례를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

(삼상 30:26) 다윗이 시글락에 이르러 전리품을 그의 친구 유다 장로들에게 보내어 이르되 보라 여호와의 원수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에게 선사하노라 하고

(삼상 30:27) 벧엘에 있는 자와 남방 라못에 있는 자와 얏딜에 있는 자와

(삼상 30:28) 아로엘에 있는 자와 십못에 있는 자와 에스드모아에 있는 자와

(삼상 30:29) 라갈에 있는 자와 여라므엘 사람의 성읍들에 있는 자와 겐 사람의 성읍들에 있는 자와

(삼상 30:30) 홀마에 있는 자와 고라산에 있는 자와 아닥에 있는 자와

(삼상 30:31) 헤브론에 있는 자에게와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왕래하던 모든 곳에 보내었더라


제목 : 은혜를 아는 자가 은혜를 베푼다.


사무엘상 마지막 대목에서는 ? 다윗이 하나님과 백성이 마음에 합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록 사울 왕을 피해서 블레셋 아기스 왕을 돕고 그의 보호를 받고 있지만 그의 선택과 결정은 항상 자신의 민족인 연약한 히브리 사람에 대한 마음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블레셋 아기스왕의 신하들의 모함과 비난에도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하심으로 자신이 자신의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과 전쟁을 행해야하는 애매한 어려움을 피하게 됩니다.

우리가 살펴보는 이 사무엘상에의 다윗의 삶의 여정과 사울의 삶의 여정은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초기 이스라엘 나라의 왕으로 세워진 이 두 인물이 왜? 다른 선택과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사무엘상 기자는 이 사무엘서를 1차 독자인 히브리사람들에게 쓰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합하여 세운 사울왕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여 세워지 다윗왕이 얼마나 다른 선택과 결과 그리고 중심을 가지고 있는지를 대비시키는 목적이 있습니다. 또한 이들의 삶의 여정 속에서 보여진 모습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그리고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것인지?를 보여주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참다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왕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 이 시대에 사무엘서를 읽고 있는 2차 독자인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람의 삶의 내용과 선택은 어떠해야하는지?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에게 무엇을 보기를 원하시는지? ”에 대해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사무엘서 기자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왜? 사울을 버리고 다윗을 선택해야만 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사울은 하나님께 다시금 쓰임받을 기회를 계속 놓치고 있고, 다윗은 하나님께 쓰임받을 기회를 계속 붙잡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다윗이 아말렉과의 전쟁에 함께 가지 못했던 사람들을 돌아본고 배려하고 베푸는 장면입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블레셋과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긍휼로 제외되어 그들이 거처했던 시글락으로 돌아왔다. 그들이 제 3일에 시글락에 이르렀을 때에 아말렉 사람들은 이미 남방과 시글락을 침노하였는데 그들이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거기 있는 사람들을, 어른이나 아이나 여자나 다 사로잡아 끌고 그들의 길을 갔습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성에 이르렀을 때 성은 이미 불탔고 그들의 아내와 자녀들은 사로잡혀간 후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아말렉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치라 말씀하시죠.


가던 중에 애굽사람 한 소년의 인도를 받습니다. 그 소년은 다윗의 일행을 아말렉 사람들의 진영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들이 내려가 보니 아말렉 사람들은 온 땅에 가득하여 블레셋 사람의 땅과 유다 땅에서 크게 탈취하였음을 인해 먹고 마시며 기뻐 춤추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새벽부터 혹은 저녁부터 이튿날 저물 때까지 그들을 쳤고 약대 타고 도망한 소년 사백 명 외에는 피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윗은 아말렉 사람이 취했던 모든 것을 도로 찾았고 그 두 아내를 구원하였고 그들의 탈취하였던 것 곧 무리의 자녀들이나 빼앗겼던 것의 크고 작은 모든 것을,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이 도로 찾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도로 찾게 해주셨습니다. 그들은 또 아말렉 사람들의 양떼와 소떼를 다 취하였습니다.

다윗이 이왕에 피곤하여 능히 자기를 따르지 못하므로 브솔 시내에 머물게 한 이백 인에게 오자 그들은 다윗과 그와 함께한 백성을 영접하러 나왔습니다.

다윗이 그들에게 이르러 문안하였습니다.


그때 다윗과 함께 갔던 자 중에 악한 자와 불량한자들이 다 말했습니다.

여기서 < 불량배 >들은 < 비류한자. ‘벨리알의 아들들,' 무가치한 자들 >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은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주지 말고 각 사람의 처자만 주어 데리고 떠나가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말합니다.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붙이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이 일에 누가 너희를 듣겠느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일반일지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


다윗은 그들이 취한 노획물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이며 또 백성의 다수가 똑같이 나누는 것을 원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그 악한 자들의 주장을 눌렀다. 그 날부터 다윗은 이것으로 이스라엘의 율례와 규례를 삼았고 그것이 훗날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또 다윗은 시글락에 이르러 그 탈취물을 그 친구 유다 장로들에게 보내며 "보라 여호와의 원수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에게 선사하노라" 하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이 전쟁을 어떤 중심으로 치루고 있는지?를 옅볼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 전쟁의 시작은 자신의 전쟁인 아닌 여호와의 전쟁으로 치루고 있었습니다. 그것의 첫 번째 증거는 전쟁을 치루기 전에 여호와께 묻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다윗은 이 전쟁의 결과는 자신의 능력이 아닌 여호와의 능력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고백합니다. <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저들을 우리손에 붙이셨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이 전쟁의 기쁨을 자신의 능력을 과시거나 자기 자랑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전쟁에서 이긴 전리품을 즐거이 나눠줌으로 하나님이 함께하신일임을 함께 기뻐하길 원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손으로 이루어진 이들을 나의 손으로 만들어낸 것으로 바꾸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셔야할 영광을 내가 가로채고 내가 그 영광과 자랑을 누리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받으셔야할 합당한 영광을 드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음을 합당하게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말, , 그리고 걸음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요즈음 성도님들이 카카오톡으로 좋은 글을 보내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 글들중에 참 좋은 글들이 많습니다. 그런 좋은 글들은 따로 메모를 해놓고 있습니다.

최근에 받은 글 중에서 참 좋은 글 내용이 있었습니다.



< 사람이 선물이다 >

스물에는 세상을 바꾸겠다며 돌을 들었고,

서른에는 아내를 바꾸어 놓겠다며 눈초리를 들었고,

마흔에는 아이들 바꾸고 말겠다며 매를 들었고

쉰에야바뀌어야 할 사람이 바로 나임을 깨닫고 들었던 것 다 내려놓았습니다.

어디서 태어날지는 선택할 수 없지만, 어디서 죽을지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어떤 얼굴로 태어날지는 선택할 수 없지만, 어떤 얼굴로 죽을지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선택이 삶의 선택입니다.

사람은 실수하는 것이 정상이고,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것이 정상입니다.

사랑이란, 실수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정상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사랑은.. 사람과 하늘이 나눠 가진 성품입니다.....

우리가 일을 하지만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람이지요.

사람과의 관계가 참 중요합니다.

자신을 내려놓기 전에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닙니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일은 실패하면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사람과 관계는 한번 깨지면 회복하기가 힘들어요.....

관계가 고통스러운 까닭은.. 하나님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을 인간에게서 찾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실수가 전공이고, 부족함이 특징입니다 ..



 

오늘 본문의 다윗은 하나님과의 좋은 관계가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를 만드는 <배려와 배픎>으로 이어집니다. 사람에게서 < 배려와 베풂 >많은 좋은 관계를 만드는 것이 없지요. 다윗은 자신이 나눠 주어야할 것을 기꺼이 나눠줍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왔다는 인정과 확신 때문입니다.


아침편지로 잘 알려진 고도원씨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라는 책에 세 가지 방문이라는 글이 나옵니다.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대체로 <세가지 방문>을 잘 한다는 말을 듣는다. <입의 방문>, <손의 방문>, <발의 방문>이 그것이다. <입의 방문>은 부드러운 말로 주위 사람을 칭찬하고 용기를 주는 방문이고, <손의 방문>은 편지를 써서 사랑하는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고, <발의 방문>은 상대가 힘들 때 망설이지 않고 찾아가는 것이다. 모두 신체를 이용한 마음의 전달법들이다. ”





미국의 카네기 공대 졸업생을 추적 조사한 결과, 그들은 한결같이 이구 동성으로

"성공하는데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은 15%밖에 영향을 주지 않았으며 나머지 85%가 인간관계였다." 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의 합당한 중심으로 사람을 향한 배려와 배풂이 흘러 나왔기에 

그가 이스라엘에서 가장 오래 기억될 왕이 될수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26:1-15>   선으로 악을 이기라

다시 사울과 다윗 이야기의 배경과 무대는 십 광야 십 황무지 >로 돌아옵니다너무도 놀랍게도 앞에서 사무엘상 24장의 배경과 상황이 그대도 재현되고 있는 장면이 바로 오늘 사무엘상 26장 십 광야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사무엘상 26:1-15>  선으로 악을 이기라


[삼상 26:1-12]

(삼상 26:1) 십 사람이 기브아에 와서 사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다윗이 광야 앞 하길라 산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매

(삼상 26:2) 사울이 일어나 십 광야에서 다윗을 찾으려고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과 함께 십 광야로 내려가서

(삼상 26:3) 사울이 광야 앞 하길라 산 길 가에 진 치니라 다윗이 광야에 있더니 사울이 자기를 따라 광야로 들어옴을 알고

(삼상 26:4) 이에 다윗이 정탐꾼을 보내어 사울이 과연 이른 줄 알고

(삼상 26:5) 다윗이 일어나 사울이 진 친 곳에 이르러 사울과 넬의 아들 군사령관 아브넬이 머무는 곳을 본즉 사울이 진영 가운데에 누웠고 백성은 그를 둘러 진 쳤더라

(삼상 26:6) 이에 다윗이 헷 사람 아히멜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에게 물어 이르되 누가 나와 더불어 진영에 내려가서 사울에게 이르겠느냐 하니 아비새가 이르되 내가 함께 가겠나이다

(삼상 26:7) 다윗과 아비새가 밤에 그 백성에게 나아가 본즉 사울이 진영 가운데 누워 자고 창은 머리 곁 땅에 꽂혀 있고 아브넬과 백성들은 그를 둘러 누웠는지라

(삼상 26:8)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하니

(삼상 26:9)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

(삼상 26:10) 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삼상 26:11)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삼상 26:12) 다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아무도 보거나 눈치 채지 못하고 깨어 있는 사람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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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나발과 아비가엘의 이야기가 나온후에 다시 사울과 다윗의 추격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다시 사울과 다윗 이야기의 배경과 무대는 < 십 광야 / 십 황무지 >로 돌아옵니다. 너무도 놀랍게도 앞에서 사무엘상 24장의 배경과 상황이 그대도 재현되고 있는 장면이 바로 오늘 사무엘상 26장 십 광야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사울이 3천명과 함께 다윗을 찾으러 십 광야로 내려가 진을 칩니다. 다윗이 도움을 주었던 십 사람들이 다윗의 있는 곳을 알려줌으로 다시 사울과 다윗의 추격전으로 이어집니다.


사무엘상의 마지막 대목은 두사람의 대조적인 행동인 두드러지게 드러납니다.

어떻 해서든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이 받은 은혜를 잊은 채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의 모습과 어떻해서든지 사울의 자리를 지켜주려고 은혜를 베풀면서 도망을 치고 있는 다윗의 모습을 봅니다.

 

사울과 다윗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다루는 방식이 달랐습니다.

사울은 은혜를 잊어 버렸고 다윗은 은혜를 기억했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감정과 원함에 매여 있었고 다윗은 자신의 감정과 원함에 매여 있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주변의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오직 자신의 마음에 민감하게 행동했고, 다윗은 자신의 주변의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마음에 민감하게 행동했습니다.


사무엘상 24장에 사울은 십 황무지 동굴속에서 다윗에서 죽을 뻔한 일을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예치못한 곳에서 자신이 미명하게 죽을 뻔 일을 불행중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것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시는 또 한번의 회개의 기회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다윗에서 어떤 은혜를 입었는지? 그리고 그 배후에 하나님이 자신에게 어떤 회복의 기회를 주고 계시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당한 굴욕감과 모욕감 그리고 주변사람에게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보여지는지에 대한 수치심에 쌓여서 다윗을 죽이려는 그 추격전에 다시금 나서게 된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자신의 감정과 마음이 거기에 매이는 것을 주의해야합니다. 


종종 사람과 사람사이에 원수 맺는 일을 보면 그렇게 큰 문제에서 일어나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사소하고 작은 일들 속에서 서운함을 만들어내고 그 속에서 사탄마귀가 틈을 타고 계속 그 마음에 매여서 사람에 대한 원수 맺는 것이 생깁니다.

그래서 오해하고 원망하고 미워하고 욕합니다. 정작 어떤 큰 사건이 서로에게 원수 맺게하는 일보다는 사소한 감정들이 사소한 상황들이 관계 속에서 원수 맺는 일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의 상태와 상황을 민감하게 다시보게 하십니다.

내 마음안에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

내 마음에 숨어있는 잘못된 동기는 무엇인지?

내 마음에 무엇이 나를 거기에 메이게 하는지?를 살피도록 하십니다.

 

사울과 다윗의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이러한 민감함의 차이였습니다.

성령님은 오늘 우리로 하여금 각각의 처한 상황과 관계속에서 일어나는 감정과 마음을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우리의 마음안에 말씀하십니다.

니가 지금 어떤 마음으로 어떤 중심으로 무엇하려 하느냐

성령님에 민감한 사람은 사람의 소리에 치우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관심과 관점에 집중합니다.

 

사울과 다윗 둘다 위기가 있었습니다.

위기라는 말은 < 위험한 기회 >라는 말입니다. 사울은 다윗에게 죽을 뻔한 위험한 기회를 계속적으로 <복수와 원수맺음>으로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에게 죽을 뻔한 위험한 기회를 계속적으로 <은혜와 긍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은혜 받은 기회를 은혜 베풀기회로 바꿔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울의 선택입니다

그러나 은혜 받은 기회를 은혜 베풀 기회로 바꿔놓고 있는 것이 다윗의 선택입니다.

 

다윗이 자신을 따르는 아비새와 함께 밤에 사울에게도 나아갑니다

그때 사울은 진 가운데에 누어서 자고 창은 머리 곁 땅에 꽂혀 있었습니다.


그때 같이 간 아비새가 말합니다. < 하나님께서 오늘날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나로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가 또 다시 다윗에게 왔습니다. 사울왕을 죽이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 할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때 다윗의 반응과 말을 보십시오.

(삼상 26:9)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

(삼상 26:10) 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삼상 26:11)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이 다윗의 고백 속에 담겨있는 중심은 무엇일까요? 3가지 중심이 있습니다.

1) 원수는 내가 갚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갚는 것이다.


2) 왕는 내가 스스로 그 자리를 차지는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시는 것이다.


3) 내가 원하는 것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있을 때 

     항상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 선택해야한다.


여기서 다윗의 탁월함을 나오는 것이죠.. 오늘 상황과 관련된 로마서 말씀에

[12:18-21]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12: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바로 다윗의 모습이 바로 < 선으로 악을 이기는 장면 >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서 가져나온 물건중에 < >이 있습니다. 이 창은 사울이 다윗을 수없이 죽이려했던 그 무기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사울이 다윗을 해하려 할때는 이 <>이 등장합니다.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온 다윗은 그를 위하여 수금을 타고 있을 때 사울은 그를 창으로 죽이려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이기고 돌아와 사울을 위하여 수금을 탈 때에도 그를 창으로 찔러 죽이려 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의 억울함을 호소하자 사울이 화가 나서 요나단을 죽이려고 던진것도 창이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했던 그 창으로 사울을 죽일수 있었습니다. 보란 듯이 세상에 웃음이 될수 있도록 자신을 죽이려고 겨누었던 그 창으로 사울을 죽일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창을 그렇게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사울에게서 그 창을 가져오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사울에게서 그 창을 치워버립니다. 다윗의 이 행동은 사울에게서 악한 동기와 행동을 가져가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사울에게서 그 창은 <악한 마음>을 상징하는 물건입니다. 그러난 다윗은 사울에게서 그 창을 가져 나옴으로 사울의 <악한 마음>을 가져 오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놀랍게도 성경에 보면 그 사건 이후로 사울의 모습은 다윗을 더 이상 위협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에서 우리의 감정속에 있는 그릇된 에너지가 내 삶의 에너지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분노와 원망과 미움을 나의 삶의 에너지로 삼지 말아야합니다. 사울하면 어떻하면 내가 받은 이 수모와 원한을 되갚아줄까? 하지 않으면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악을 선으로 이기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지난주 심각한 지진이 났습니다


한 며칠 동안은 잠을 잘 때면 지진이 또 날까 겁이 났습니다. 조금만 흔들려도 잠기 깨곤했습니다. 지진으로 물건들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고 얼마나 지진이 위력적인지도 경험했습니다.


그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 ! 저 물건이 언제 저기 올라가 있었지? ! 내가 깨질 물건을 저기에 올려 놓았네 ... 이제 저걸 내려놓아야지 ! >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진으로 물건이 떨어지고 깨지고 상한 경험을 하고서는 우리 집안에서 넘어지고 깨지고 흔들릴 만한 것들을 찾아 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내려놓게 되었지요. 참다운 내려놓음을 준비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마음 안에도 지진같이 조금만 흔들어도 깨어질 것들이 많습니다. 계속 내 마음을 무너지게 하고 나를 넘어지게 하고 나를 상하게 하는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어느 순간에 나도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올려놓은 그런 분노, 원망, 상처, 미움, 원수맺음과 같은 마음들이 있지는 않습니까?


언젠 가는 그것들이 내 마음을 안에서 떨어져 내 마음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습니다. 내 마음이 엉망이 되기(mess up) 전에 그것을 바로 잡는 것이 필요합니다.

 

< 사랑을 베푸는 자에게 있어서 사랑이 실패로 끝난다 하더라도

 사랑은 역시 최선의 길이다. > 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다윗의 행동은 우리에게 끝까지 놓지 말아야할 마음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은 은혜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그 선한 마음을 부여잡고 그대로 행동하고 그대로 선택하면 사는 것입니다. 나의 인간적인 욕심과 감정을 부여잡지 않고 원수를 원수 갚음으로 매듭짓지 않고 조용히 사울의 창을 가져옴으로 선으로 악을 이기는 모습을 부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이 원수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은혜 베풀기회로 삼는

그런 탁월한 삶의 내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원수는 내가 갚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갚으신다. 그리고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대로 행동하면 하나님의 뜻은 만드신 이룬다는 이 하나님께 대한 강력한 신뢰가 다윗을 이스라엘의 두 번째왕으로 세우고 계십니다.

 

리차드 램브란트의 이야기입니다. 

이집트에 주둔한 적이 있었던 한 영국 상사가 자신에 관한 이런 이야기입니다.


내가 있던 부대에 예수를 믿는 민간인이 하나 있었는데, 우리들이 그 사람을 되게 못살게 굴었습니다. 비가 몹시 내리던 어느 날 밤 그는 지쳐서 들어와서는 잠자리에 들기 전 기도를 하려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나는 진흙이 잔뜩 묻은 내 장화를 그 사람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지만, 그는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 장화가 깨끗이 닦여져서 내 침대 옆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것이 나에 대한 그의 보답이었고, 그 대답이 내 마음을 녹였습니다.나는 그 날 구원받았습니다.









  • [사무엘상 21:10-15] 두려움에서 도망치기
  •  Main Idea : 다윗은 사울을 두려워 도망쳤다. 그러나 더 중요한것은 다윗은 그 마음의 두려움에서 도망쳐야 했다. 사람이 두려워 사람을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의 진정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께로 내 마음이 도망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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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 21:10-15]

(삼상 21:10)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삼상 21:11)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말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

(삼상 21:12) 다윗이 이 말을 그의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삼상 21:13) 그들 앞에서 그의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삼상 21:14) 아기스가 그의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삼상 21:15)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 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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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두려움으로부터 도망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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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사울의 위협을 피해서 도망하고 있는 다윗으로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억울한 누명, 정처없는 도망자의 삶, 끊임없는 추격, 아슬아슬한 위기탈출... 고달픈 도망자의 신세가 되고 만 다윗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있은 본문 사무엘상 21장에 등장하고 있는 다윗의 모습을 통해서 가장 많이 등장하고 있는 다윗의 심정은 바로 < 두려움 >입니다. 사람과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그를 애워싸고 그를 심각한 위기속에 몰아놓습니다. 


 다윗은 라마나욧에서 놉땅으로 그리고 이제는 이방 블레셋의 도시인 가드로 도망을 칩니다.  다윗에 대한 갖는 두려움의 대상은 바로 < 사람 > 이었습니다. 


삼상 21장 10절에 <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아나 > 

삼상 21장 12절에 < 가드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 


이러한 사람에 대한 두려움은 그를 자신이 머물고 있는 자리에서 < 도망치도록 >만들었고 자신을 < 미친척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래전에 보았던 헤리슨 포드 주연의 영화 < 도망자 >라는 영화가 떠 오릅니다. 어울하게 살인범의 누명을 쓰고 사형선고를 받고 교도소를 향하던 헤리슨 포드는 호송버스안에서 몇몇 죄수들의 탈주를 하는 사고속에서 탈주범의 누명을 쓰고 도망자가 됩니다. 이러한 사실을알게된 킴블형사는 제라드을 잡기위해서 추격을 벌립니다. 살인범에서 탈주범으로 ... 엎친데 덮친 것 같은 상황의 연속입니다. 스릴과 서스펜스의 연속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도망자 다윗의 상황도 같습니다. 사울에서 도망쳤던 다윗은 이제는 블레셋 아기스에게서도 도망쳐야만 했습니다. 다윗이 자기 나라 이스라엘에 더 이상 머물곳이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일종의 정치적인 망명을 계획하고 자신이 죽였던 블레셋 장수 골리앗의 고향인 가드땅으로 발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다윗에게선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도 다윗을 한눈에 알아봅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죠. 


다윗에 대한 소문은 이미 들었던 내용이었습니다. 어찌 자신들의 자랑이었던 골리앗을 물맺돌로 죽였던 그 사건을 모를 리가 있겠습니다. 블레셋에게서 다윗은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신화적이며 입지전적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난 사울에게서 도망치고 있는 다윗의 모습은 더 이상 블레셋 가드땅 아기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나선 사람은 사람들의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나선 사람은 사람들에게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사람들의 익숙한 방식은 인생의 절대절명의 위기고 원치않은 위험을 경험하면 가장 먼저 손을 뻗는 태도는 < 사람을 의지하는 것 >입니다. 이것은 너무도 쉽고 너무도 간편한 방법입니다. 다윗도 자신의 도망자의 삶에서 자신이 의지했던 사람들이 었습니다. < 다윗, 사무엘 그리고 엘리멜렉 그리고 블레셋의 아기스왕 까지 > 


우리는 어려운 일이 생기면 두려움이 일이 생기면 사람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의지하고 도움을 요청했던 그 사람에 대한 기대는 깨어지고 실망하고 때로는 더 큰 위기가 찾아옵니다. 


위기라는 단어는 < 위험 >이라는 단어와 < 기회 >라는 단어가 합쳐진것입니다. 

우리는 위기를 만나면서 위험한 사항을 어떠한 기회로 바꾸어야 할지를 생각해얍합니다. 우리는 위기의 순간에 그 위기를 탈출할 기회를 사람을 의지하고 사람에게 도움을 구할 기회로 삼을지.. 아니면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삼을지를 생각해야합니다. 


다윗에게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 골리앗의 칼 >입니다. 그가 쥐고 있는 골리앗의 칼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신의 이길수 없는 싸움을 이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다윗하고 있는 싸움은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 해야만 이길수 있는 싸움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아무리 다윗에게서 제사장의 떡을 먹고 골리앗을 칼을 쥐고 있어도.. 자신의 마음안에 있는 < 두려움 >과 싸워서 이기지 못하면 계속된 < 두려움 >이 애워싸고 결국에는 그 <두려움>으로 함몰되고 말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도움 < 두려움 >과 맞써 싸워야합니다. 우리에게서 두려운 마음은 우리를 치명적인 결함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에게 찾아온 두려움을 처음에 제압하지 않으면 결국에는 더 큰 두려움에 우리의 마음을 내어 놓게 되고 또 더 큰 두려움에 내 마음이 사로잡히게 됩니다.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은 오직 한가지입니다. 그것은 < 도울힘이 없는 없는 인생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 >입니다. 


다윗이 도망자의 삶에서 철저하게 훈련받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두려움에서 도망치는법 >입니다. 더 이상 두려운 상황에서 두려운 사람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두려운 마음에서 도망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두려운 마음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옮기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작은 두려움이 스며들고 작은 두려움을 허용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더 큰 두려움을 허용하게 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을 방해받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두려움과의 치열한 전쟁을 벌리는 것입니다. 사단마귀는 우리에게 가장 손쉬


운 방법으로 < 두려움 >을 심어 놓습니다. 그 두려움의 싹이 나서 우리의 마음의 밭을 온통 <두려움>으로 가득차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다윗처럼 미친척한다고 두려움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인도의 설화중에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마술사가 쥐를 관찰하다가 쥐가 고양이 앞에서 벌벌 떨며 두려워하는 쥐가 불쌍해졌습니다. 마술사는 마술을 부려 쥐를 고양이로 변하게 했습니다. 변신한 고양이가 이번에는 개를 몹시 두려워하는 것이 아닌가. 더 불쌍한 마음을 가진 마술사는 다시 한 번 마술을 사용해서 이 고양이를 개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개가 된 고양이는 이번에는 호랑이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닌가. 이 모습도 불쌍히 여긴 마술사는 개를 호랑이로 변신시켜 주었습니다. 동물의 왕 호랑이야 두려울 것이 있겠는가 싶었는데 호랑이는 사냥꾼의 총을 두려워 전전긍긍했습니다. 사냥꾼을 두려워하는 호랑이를 보면서 마술사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어떻게 해도 너의 두려움이 끝나지 않으므로 너는 별 수 없는 쥐새끼다. 다시 쥐로 돌아가라.” 원래 모습인 쥐로 되돌려 놓았다는 인도이야기이다.   





인간의 내면안에 있는 두려움은 절대 다른 대체물이나 사람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직 참 평안과 위로를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에서 해결할수 있습니다. 


(시 146:3)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시 146:5)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오늘 본문에 다윗은 블레셋 가드땅으로 가기로 선택하면서 < 하나님을 묻거나 하나님을 도움을 요청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판단과 선택을 생각합니다. 다윗의 도망자의 삶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 됩니다. 

 다윗의 마음을 애워싸고 있는 그 두려움에서 도망치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때로는 여러분이 당하고 있는 삶의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으신가?

때로는 내가 의지할 사람을 찾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그 결과는 계속 삶의 상황에 도망쳐야하고.. 계속 의지할 사람이 두려운 사람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될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위기의 순간에 가장 먼저해야할 일은.. 

우리 마음 안에 있는 두려움에서 도망치는 것입니다. 



<찬397 주 사랑안에 살면 > 

주 사랑 안에 살면 나 두렴 없으며 

그 사랑 변함 없어 늘 마음 편하다 

저 폭풍 몰아쳐서 내 마음 떨려도 

주 나의 곁에 계셔 겁낼 것 없어라



세상의 길위에서 하나님 나라를 답하다.(마태복음 7:13-21)



 [마 7:13-21]

(마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마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마 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마 7: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

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마 7: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마7:18) 좋은나무가나쁜열매를맺을수없고못된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마 7: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마 7: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

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오늘 함께 살펴보게 될 말씀의 제목은 “ 세상의 길위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답 하다 ”라는 조금 책 제목같은 타이들을 붙여보았습니다. 조금더 오늘 설교의 제 목을 풀어서 말하면 “ 세상의 길위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는 길을 답하다 라는 제목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에 가는 길을 아시는지요?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에 머무는 방법을 아시는지요?


오늘 본문은 하나님 나라의 선포인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마지막 대목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 예수 님의 어록>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에도 마태복음과 비슷한 예수님의 산상수훈 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산상수훈이라는 말뜻은 < 산위에서 전하신 빼어난 말씀 >이란 뜻입니다. 또 이 것을 < 산상 보훈 >이라고 말하는데 그 뜻은 < 산위에서 전하신 보배로운 말씀 >이라는 듯입니다. 그만큼 빼어나고 보배로운 말씀입니다.


이 산상수훈은 < 예수님이 자신이 누구이며 ? 자신이 어디에 속한 존재인지? 자신이 어떤 것을 위해 오셨는지? >를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동시에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하는 소위 제자라고 자청하는 이들에서 <“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 이 어디에 속한 존재인지? 자신이 어떤 것을 위해 살아야하는지? ”>을 예수님 께서 요청하고 도전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요약하면.. 예수님이 누구인지와 나를 따르는 제자는 어떠해야하는지?를 말씀 해주고 있습니다.


이 산상수훈은 주님을 따르겠다고 결정한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며 이땅 의 나라가 아닌 하나님 나라에 소속된 사람이어 야하는 것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존재와 소속을 분명히 하는 예수님의 제자라면 그 하나님 나라 의 원리과 법칙을 따라서 그것을 근거로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죠.


예수님은 자신이 가야하는 십자가의 길과 여정을 가는 도중에서 자신을 보기 위해 자신을 따르기 위해 찾아온 무리들을 보시고 잠시 멈추시고 가버나움 근처 의 조그마한 언덕에 올라가 앉으시고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셨습니다.


가시던 세상의 그 길을 멈추시고 세상의 그 길위에서 예수님에게 온 무리과 그 리고 제자라고 자청하는 이들을 바라보시고 < 하나님 나라를 답하셨습니다. >

산상수훈이 시작하는 처음에 이렇게 쓰여있습니다.


(마 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마 5: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이 말씀을 듣는 이들 중에는 예수님을 그냥 보러온 예수님을 궁금해 하는<무리 : 오크로스>도 있었고, 스스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결정하고 따라온 예수님의 제자들과 제법 율법을 알고 유대적인 지식이나 있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이 어떻 게 하는가? 의심의 눈빛을 주시하면서 뭔가 얻을게 있는가 싶어 찾아온 < 제자 : 마데테스 >도 있었습니다.


이들 모두다 가던 길을 멈추시고 자신들에게 놀랍고 권위있는 말씀을 전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스펄전은 “그는 왕답게 말씀하셨다” 고 썼습니다. “왕적 확신” 또는 “주권”을

가지고그렇게하신것입니다.존칼빈은 “이상하고뭐라형언할수없고이례

적인 위엄이 사람들의 마음을 그에게 이끌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무리들과 제자들에게 한번도 들어보지 못하는 새로운 말 씀이였고 그들의 가슴에 강력한 도전과 권위로 들려왔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하실수 있었던 근거는 “ 예수님은 자신 누구이며.. 어디에 소속한 존재인지.. 무 엇을 하러 여기에 있는지 ? ” 분명히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종종 우리의 믿음과 신앙이 흐리멍텅해질 때가 있습니다. 분명하고 선명하지 않 을 때 있습니다. 그렇때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묻습니다.

“ 너는 누구니? 너는 어디소속이니? 너는 무엇하고 있니 ? ”

제가 대학생때에 선교 한국에 가서 도전받은 어떤 선교사님의 설교중에 아직도 잊지 못하는 3가지 구호가 있습니다.


“ 예수 생명 , 예수 소명, 예수 사명 ” 3가지 어명이 있다는 거였습니다. 


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 생명을 받아 누리고 전하는 어명 !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 소명을 받고 즐거워해야하는 어명 !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 사명을 받고 그대로 행해야는 어명 !


그때 그 선교사님들이 예수 믿는 척하면서 흐리멍텅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삶이 흐릿해질 때면..왜?? 예수 믿는지 흐릿해질때면 다시 소리쳐라 ! 제발


오늘 이 산상수훈은 우리가 이 세상의 길위에서 이 세상의 길을 가는 동안 우 리가 무엇을 분명히 붙잡고 어떤 기준과 가치로 선택하고 반응하고 살아야하는 지 분명히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바로 이 세상의 길위에서 하나님 나라가는 길.. 하나님 나라을 경험하면 사는 디렉션을 주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산상수훈 설교의 마지막 설교입니다. 예수님의 이 설교 는 그 당시 유대인들이 들었던 수많은 서기관들과 율법사들의 메시지와 다른 메 시지였습니다. 이 산상수훈은 유대인들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삶을 살아야한다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따르고 자기의 방식에 익숙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들에게 예수님의 이 도전은 놀라움과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태복음 7장 마지막절에 이 산상 수훈 설교에 대한 유대인 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는데..


(마 7: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마 7: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여기서 <놀라다>라는 의미의 헬라어 의미는 강력합니다. < 경악을 금치 못 하다 >라는 말로 번역할수 있습니다. 충격을 받았다는 정도가 아니라 마치 무언가 방망이에 얻어 맞은 듯 어안이 벙벙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율법을 다시금 해석하고 하나님 나라의 백 성된 우리의 삶의 방식,원리,태도가 무엇인지?를 도전하고 있습니다. 지금 은 우리가 이땅에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맞추어진 삶을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도전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산상에서 이루어진 천상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원리과 기준을 따른다고 말하고 자기 의와 거짓된 교훈만 가득하고 하나님 나라와는 전혀 상관없이 살고 있는 율법주의자들에게 일침 을 가면서 너무 쉬우면서 너무 어려운 하나님나라와 연결되어 사는 삶이 무 엇인지?를 말씀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안에 천국복음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연결되는 채 널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도 예수님도 자신의 복음 선포의 첫 마디가 “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라 ”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천국 복음을 받아들이면 우리안 에는 주체할수 없을 정도의 회개가 일어납니다. 나 자신을 주님 앞에 쏟아놓고 엎드리면 자신의 무익하고 자신 의 부정함을 고백합니다. 자신 안에 있는 죄를 낫낫히 고백하는 이들이 일 어납니다. 참된 복음을 우리를 회개의 자리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참으로 회개하는 이들에게 세상에서 경험할수 없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게 됩니 다

.

참된 복음은 참된 회개를 만듭니다.

참된 회개는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치열하게 싸웁니다.

참되 거룩함은 우리안에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게 합니다.


오늘 우리가 진정으로 복음 안에 있다면 날마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내안 에 임했음을 경험해야합니다. 그래서 내 삶이 하나님 나라와 동기화가 되는 경험을 해야합니다. 참다운 영성은 우리의 내면의 세계과 하나님 나라가 동 기화 되는 것입니다. 같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오늘의 삶이 싱크로나이즈(synchronize), 연결되는 커 넥팅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김연아 선수가 이번에 동계올림픽때 <아디오스 노니노>라는 음악에 맞쳐서 점프를 하고 연기를 하고 스케이트를 했습니다.<아디오스 노니노>라는 뜻은 < 안녕 아버지 >라는 뜻입니다. 이 노래는 작곡가 피아졸라가 돌아가신 아 버지를 추모하며 만든 곡입니다. 그 애절한 작곡에 맞춰서 애절하게 마치 자신이 아버지를 추모하듯이 그래서 연기를 했습니다. 음악과 연기가 하나 가되는 동기화되는 순간입니다. 얼마나 김연아의 연기가 아름다웠습니까? 조금 아쉬운 것은 금메달을 못딴것과..요즘 애인 생겨서 서운하긴 하지만...





오늘 예수님의 이 산상수훈은 하나님 나라의 삶이 오늘 이세상의 삶과 어떻 게 연결되어서 우리의 삶에서 동기화 되어야하는지 분명히 말씀해주고 있습 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마지막의 말씀을 전하면서 우리에게 2가지의 하 나님 나라의 방식을 답하고 있습니다.


1/ 쉽지 않고 수월하지 않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선택하라.


[ 마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쉽지 않은 선택을 요구합니다. 우리에게 놓여있는 2 개의 문이 있고 2개의 길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인데 크고 그 길이 넓습니다. 그리고 들어 가는 자가 많습니다. 넓다는 말의 헬라어 ‘유리 코로스’는 ‘육체적으로 즐 겁다, 편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찾는 이가 많다고 하였습니다. 넓다는 것은 가기가 쉽고 수월하고 익숙하다는 것을 의미입니다. 어느 누구나 다 가는 문이요 길이라는 것입니다. 찾기도 쉽고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들어갈수 있는 문이요 길입니다.

둘째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인데 좁고 그 길이 협착합니다.


<좁다>는 말은 <스테노스>는 “ 고통과 가난함이 있는 상태 ”를 의미합니 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은 때로 고통이 있는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협착하다’는 말은 <들리보>라는 말은 < 고난, 압박감, 어려움, 불편 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찾는 이가 적습니다. 힘들고 어렵고 무언가의 용기있는 결정과 선택이 없이는 잘 보이지도 않고 잘 찾기도 쉽지 않는 문이요 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좁은 문, 좁은 길에 익숙해져 있는 사 람이어야 한다고 도전합니다. 왜냐하면 그 길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죠.


예수님은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들어가 라(에이셀다테)’란 명령은 2인칭 복수 부정과거 명령형인데, 이것은 단회 성을 나타냅니다. 즉 좁은 문에 이어진 좁은 길은 걷는 것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지만, 좁은 문을 선택하여 들어가는 것은 단회적 (單回的)인 일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선택하고 영접하는 순간 우 리는 구원의 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문은 우리에게 좁은 길 로 인도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예수 생명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게 쉽지 않은 선 택과 걸음을 요구합니다. 좁은 문을 선택하고 좁은 길을 걷기를 요청합 니다. 이 세상의 선택은 항상 넓은 문을 선택하고 모두다 다 가는 넓은 길을 걸어가기를 요청합니다.


좁은 문 좁은 길을 선택하는 사람은 미전도족속으로 선교를 결정한 선교 사나 특별한 고통스러운 삶을 선택하는 삶에게만 주어지는 삶이 아닙니 다. 하나님 나라의 길이 어디인지? 궁금한 모든 사람에게 요청하고 있습 니다. 생명을 갈망하는 모든 이들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구절이 담겨있는..

(눅 13: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서 힘쓰라고 하는 말은 < 아고니스 조마이 >라는 말입니다. 영어에 <Agony>라고 하는 단어가 이 말과 같은 것인데 이 말은 <고통, 고민, 괴로움, 고투> 라는 뜻입니다. 바로 예수를 믿고 주님이 보여주신 길인 좁은 길 좁은 길을 선택하며 사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뉴욕 중심가에 가면 <브로드웨이>가 있습니다. < 브로드웨이 > 이름 그 자체가 넓은 길이죠.. 누구든지 뉴욕에 가면 브로드웨이를 한번 찾아가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 길을 걸어 다니기도 하고 드라이브도 합니다.




맨하탄에서 시작해서 허드슨 강을 중심으로 알바니까지 이어지는 굉장 한 길입니다. 장장 200km가 넘는 길입니다. 아마 세계에서 가장 긴 길 이요, 넓은 길 중에 하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가보지는 않았습니다. 미국에 있으면서 꼭 한번은 가보고는 싶습니다.

거기에는 세계 금융계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월스트리트 가가 있습 니다. 그길은 돈을 창출하고 돈을 소비합니다. 그리고 유명한 대학도 있 습니다. 그뿐 아니라 사람들이 특별히 그 브로드웨이를 좋아하는 이유는 42번 가에 있는 소위 '타임스 스케어' 때문입니다. 또한 그 길에는 문화 와 예술이 있고 화려한 불빛이 있습니다. 그 길에는 음란하고 퇴폐문화 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즐거움, 쾌락, 인생의 재미를 맛보려고 그 곳을 찾는 사람은 술과 여자, 마약과 도박 같은 것들로 세월 가는 줄 모 르고 즐기고 놀 수 있는 곳이 바로 타임스케어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 이 몰립니다. 그야말로 향락의 거리입니다.


뉴욕 맨하튼의 브로드웨이는 원웨이 (일방통행)길입니다. 그러나 그길에 는 거기에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가는길도 보이 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멸망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브로드웨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그곳을 즐겁게 걷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 고 거룩한 제사장이라는 것을 잊은 채 그 브로드웨이 위에 있길 원합니 다.


그러나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요청합니다.

< 좁은길에서 서서 좁은 문 으로 들어가라 >

그것이 우리를 참다운 예수 생명으로 인도한다라고 말 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삶의 태도는 <생명>을 주목하고 생명을 겨냥한 삶이어야합니다. <예수생명>GPS가 우리를 인도하는데로 살아야합니다. 다수가 주는 안정감에 만족하는 삶이 아니라. 소수일지라도 그것이 예수 생명이 인도하는 길이라면 그 문으로 들어가고 그 길에 서야합니다.


예수 생명을 위해서라면 나의 불편함과 고통을 감수살수 있는 결단과 선 택을 요청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 묻겠습니다.

예수님 믿으니 좋으신가요? 싫으신가요?

예수님 믿으니 기쁘신가요? 슬프신가요?

예수님 믿으니 편안하신가요? 불편하신가요?

예수를 잘 믿으면 믿을수록 이상하게도 내 삶이 불편해집니다. 이전에 내가 하던 방식대로 살수가 없습니다.

이전에 내가 부리던 감정대로 살수가 없습니다.

이전에 내가 좋아하던 것을 포기하게 됩니다.

이전에 내사 사랑했던 것을 싫어지게 됩니다.


예수 믿으면 계속 불편해집니다. 이것이 천국복음의 불편한 진실입니다. 우리가 천국복음에 노출될수록 내 삶의 색깔 내 마음의 색깔이 바뀝니 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적인 결단과 그 이후에 지 속되어야 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된 자로서의 삶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2/ 열매로 하나님의 나라 소속임을 증명하라.


[마 7:16-19]

(마 7: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

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마 7: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마 7: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마 7: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

니라


< 좋은 나무에 아름다운 열매가 맺습니다. >

좋은 열매는 자기가 어떤 좋은 나무에서 왔는지? 증명해 줍니다.

열매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합니다. 열매는 나무의 실존입니다.

우리의 소속이 하나님 나라에 속하고 하나님 나라의 공급을 받고 하나 님 나라에 영향을 받고 있다면.. 우리가 마치 나무에 열매가 붙어있는 것처럼 서로 연결되어서 열매를 보고 나무의 상태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열매로 하나님 나라를 증명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우리 를 심으셨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열매를 맺어야하는 것이 마땅합 니다.


예수님은 길을 가시다고 열매없이 잎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를 보셨습니 다. 그때 그 열매 없음을 저주하셨습니다.


(마 21:19)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예수님이 가장 싫어 하는 우리의 모습은 < 열매없음 >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누릴 것은 다 누리면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존재 를 중명할 어떤 열매도 맺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만큼 주님께 책망받을 만 것이 어디있겠습니까?


우리는 < 열매없음 >에 머물러 있지말고

< 열매맺음 >으로 증명하는 삶이 필요한 것이죠..


(요15:6 )너희가나를택한것이아니요,내가너희를택하여세웠나 니 이는 너 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함이


작은 한알의 겨자씨도 열매를 맺는데 하물며 그보다 더큰 생명의 씨앗 을 받은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가를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얼마나 내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임을 증명하고 입 증해내는 내 삶의 열매 맺음이 있은가?


여전히 주님 ! 하나님 나라의 혜택은 누리고 있는데... 열매가 없네요..

유대 땅에가면 유대인들이 기분 나쁘게 생각하는 나무가 있습니다.


< 소돔 사과 >라는 것인데.. 그 나무의 열매는 정말 보기 좋고 탐스럽게 생겼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 열매를 따면 < 퍽 > 하는 소리와 함께 터지 는데 그 열매 안에는 공기와 먼지만 날리고 먹지 못하는 씨들만 가득합니다. 어떤 열매의 과즙도 단맛도 내지 못하는 그냥 공갈빵과 같은 그런 열매가 있습니다. 얼마나 기분 나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의 의의 나무로 이 땅에 심으셨습니다.


(사 61:3)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보혈과 피 값으로 우리를 이땅에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보기 위해서 심으셨지만.. 아무것도 맺지 못하고 있다면 얼마나 하나님으로썬 당황스러운 일이겠습니까?


바로 찍어서 불어 던지는 일이 일어납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이 번제단 불쏘시게로 사용했던 나무가 < 열매 맺지못한 무화과 나무 >였습니다. 유대인든 과감하게 열매맺지 못한 무화과 나무를 잘라버렸습니다. 왜냐 하면 다른 열매 맺는 나무들이 먹을 물을 소비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미국과 한국에 많은 교회와 목회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할 존경할 만한 교회와 목회자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신뢰도가 추락했습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천국복음을 받았다고 자부 하지만 어떤 열매 맺음도 없었습니다. 최근에 기윤실에 조사한 여론조사 에서 기독교가 신뢰할만하다 생각하는 사람이 10명 2명 20%정도 밖에 안된다는 심각한 통계를 보았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라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세 상은 교회와 성도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살고 있는가에 관심이 있습 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같이 살고 있지만 예수쟁이 저들은 우리하고는


다른 뭔가가 있을 거야? 다른 특별한 삶의 모습이 있을거야? 하는 막연 한 기대를 갖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여지없이 그것이 무너 지고 맙니다. 속된말로 니나 내나.. 멍멍이나 소나 다 똑같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마 7: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기독교에서 목회자중에서 열매가 있는 신앙의 본을 사람을 꼽으라면 < 고 한경직 목사님>을 꼽습니다. 신사참배를 한 과오도 있으신 분이지만 그의 말년에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회개하며 자신의 삶의 마무리하며 아름다운 퇴장을 보여준 분입니다. 인품과 영성이 많은 목회자들의 롤모 델이 되기도 한 분이죠.. 고 한경직 목사님께서 마지막으로 가족들에게 남기 유언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없다. 땅 한 평, 집 한켠이 없다. 내 이름으로 있는 재 산이 있다면 그것은 공적인 것이다. 내가 너희들에게 남기는 것은 없지 만 너희들을 위해 늘 기도하고 있다."

”내가 길을 가면서 꽃씨를 뿌리면 지나간 길에 많은 꽃이 핀다. 또 꽃이 피면 열매도 맺힐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지나가는 길에 혹 좋지 못한 씨 를 뿌리면 잡초가 날 뿐이다. 그러니까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좋은 씨 를 많이 뿌리라...”


< 이 세상 살아갈 때 좋은 씨를 많이 뿌려라 > 귀한 도전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좁은 문 좁은 길로 가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입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 는 생명을 바라고 보고 그 문을 그 길을 지나고 있습니다. 


좁은 문이 좋 은 문이 되기란 쉽지 않습니다. <ᄇ>과<ᄒ>의 차이지만 ...


좋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삶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어떤 존재이면 어떤 삶이 되어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면 우리는 열매 맺기를 힘써야합니다.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는 동안 계속 제 입에 머물고 있는 찬양 하나 있 었습니다. < 새347장(통367장) '십자가를 내가 지고' >입니다.


이 찬송은 스코트랜드의 헨리 라이트 목사가 지은 찬양입니다. 스코트랜 드 켈소(Kelso) 부근의 한 작은 어촌 마을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거 친 뱃사람이었습니다. 가난하고 비천한 가정에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잃 고 고아원에서 심각한 가난과 싸우며 자랐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환경에 서도 영시 부문으로 최우수상을 세번이나 받았으면 탁월한 문학 실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는 의사가 되려고 하였으나 허약한 체질이 원인이 되어 포기하고 21살에 영국 국교회 목사가 되어 어릴적 고향같은 조그마한 어 촌 브릭스 햄에서 23년을 목회하였습니다. 어촌마을 교회에서 목회를 하 는동안 우락부락하고 몰상식하며 부도덕하고 난폭한 뱃사람들 사이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연약한 그에게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욕과 악담으로 도전해 오는 그들에게 계속 미소를 지어야 했고, 아픈 몸으로 건장한 그들을 수종들어야 했습니다. 참으로 감당하기 힘든 십자 가 가요 좁은 길이었습니다. 그는 찬송시에서 고백합니다.


2절에...'주도 욕을 당했으니 나도 욕을 당하리 세상 친구 간사하되 예수 진실하도다 예수 나를 사랑하사 빛난 얼굴 뵈시면 원수들이 미워하나 염 려할것 없도다'

처음에 그는 욕도 많이 당했습니다. 무뚝뚝한 어부들로부터 조소와 비 난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도 욕을 당하였는데 자기가 욕을 당하는 것 쯤은 당연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세상 친구들은 이기적이고 간사하고 위로받은 길이 없으나 사랑 많으신 신실하신 예수님 빛난 얼굴 뵈시니 원수들이 미워하나 염려할것 하나 없었습니다.


3절에 ... '내가 핍박 당할 때에 주의 품에 안기고 세상 고초 당할수록 많은 위로 받겠네 주가 주신 기쁨외에 기뻐할것 무어냐 주가 나를 사랑 하니 기뻐할것 뿐이라'


세상에서 핍박당해도 우리는 주님의 품으로 피할 수 있고 세상에서 당 하는 고초가 크면 클수록 하늘의 위로도 크고 이토록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기쁨이 넘치니 어찌 아니 기쁘랴!



우리가 이 세상의 길을 걸어가면서 하나님 나라의 길 가는 삶은 바로 이 찬 송의 가사와 같은 삶. 이 찬송의 가사와 같은 은혜를 경험하며 사는 것입니 다.

우리 모두다 반드시 주님 앞에 설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에게 물으실겁니다.


“ 너는 어느 문으로 어느길로 왔느냐 ? ”

“ 니가 갈가지온 그리고 보여준 열매는 뭐지 ? ”

“ 예! 주님 ! 저는 좋은 길 좁은문으로 왔구요.. 주님 여기 제가 가져온 열매입니다. ” 라고 말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것이 이 세상의 길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우리의 답입니다. 아멘 !


[ 기도와 도전 ] ========================================



우리는 지금까지 어느길 어느 문으로 가는 것을 즐거워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에게 어떤 열매맺음이 있었습니다. 

브로드웨이로 행했던 우리의 삶의 회개하고 열매없음을 통회합시다. !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하나님나라의 속한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의 방법대로 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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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무엘상 23:15-39] 좋은 친구가 있나요
  • Main Idea : 다들 나에게서 나갈때 내게로 들어오는 사람이다. 요나단은 바로 다윗에게 그런 친구이다. 우리에게 그런 좋은 친구가 있는가?


[설교음성 파일 ]

https://soundcloud.com/yonghwan-shin/2014-03-25-1


[삼상 23:15-29]

(삼상 23:15) 다윗이 사울이 자기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나온 것을 보았으므로 그가 십 광야 수풀에 있었더니

(삼상 23:16)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삼상 23:17)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니라

(삼상 23:18) 두 사람이 여호와 앞에서 언약하고 다윗은 수풀에 머물고 요나단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삼상 23:19) 그 때에 십 사람들이 기브아에 이르러 사울에게 나아와 이르되 다윗이 우리와 함께 광야 남쪽 하길라 산 수풀 요새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삼상 23:20) 그러하온즉 왕은 내려오시기를 원하시는 대로 내려오소서 그를 왕의 손에 넘길 것이 우리의 의무니이다 하니

(삼상 23:21) 사울이 이르되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삼상 23:22) 어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그는 심히 지혜롭게 행동한다 하나니 너희는 가서 더 자세히 살펴서 그가 어디에 숨었으며 누가 거기서 그를 보았는지 알아보고

(삼상 23:23) 그가 숨어 있는 모든 곳을 정탐하고 실상을 내게 보고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가리니 그가 이 땅에 있으면 유다 몇 천 명 중에서라도 그를 찾아내리라 하더라

(삼상 23:24) 그들이 일어나 사울보다 먼저 십으로 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광야 남쪽 마온 광야 아라바에 있더니

(삼상 23:25)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찾으러 온 것을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아뢰매 이에 다윗이 바위로 내려가 마온 황무지에 있더니 사울이 듣고 마온 황무지로 다윗을 따라가서는

(삼상 23:26) 사울이 산 이쪽으로 가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산 저쪽으로 가며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급히 피하려 하였으니 이는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고 잡으려 함이었더라

(삼상 23:27) 전령이 사울에게 와서 이르되 급히 오소서 블레셋 사람들이 땅을 침노하나이다

(삼상 23:28) 이에 사울이 다윗 뒤쫓기를 그치고 돌아와 블레셋 사람들을 치러 갔으므로 그 곳을 셀라하마느곳이라 칭하니라

(삼상 23:29) 다윗이 거기서 올라가서 엔게디 요새에 머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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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속된 다윗의 도망과 사울의 추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찾기 위해서 매일같이 그를 찾아 나섭니다. 오늘 본문 앞절인 14절에 보면 


(삼상 23:14)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


 사울이 다윗을 찾는 일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도움속에서 다윗은 여러번의 위기와 고비를 넘기고 있습니다. 처음의 도망칠때만해도 사람을 의지했던 다윗은 이제는 여러 위기를 경험하면서 하나님께 순간 순간 물으면 그의 걸음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비로 사울에게 쫓기는 신세이지만 오히려 자신을 따르는 600명의 사람들을 붙여주며 심지어 블레셋에 곤경에 처한 그일라 사람을 도와주게 됩니다. 


 자기 코가 석자인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서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네 손에 붙이리라 ” 

다윗은 그일라를 구원해주는 놀라운 사건을 경험한 후에 다시 사울을 피해 도망을 칩니다. < 십 황무지 수풀에 머물게 됩니다. > 


 다윗에서 십 황무지 수풀은 < 자신의 몸을 피할 은신처 >였습니다. 그때 다윗은 자신의 친구인 요나단과 마지막 조우를 하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이 본문에서 다윗에게 찾아온 요나단이 어떤 친구인가?에 주목하고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좋은 친구가 있으신가요? 여러분이 생각할 때 좋은 친구는 어떤 사람인가? 좋은 친구의 조건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려합니다. 


 젊은 남자와 여자가 나이가 들면 꼭 필요한 것 순위를 매겼는데 

 여자는 <재산/친구/건강/애견/남편> 남자는 <건강/아내/재산/취미/친구> 

 더 나이가 들면 여자는 <딸/돈/건강/친구/찜질방> 

 남자는<마무라/아내/애들엄마/집사람/와이프>  라고 합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중에 하나가 < 친구 관계 >입니다. 


친구란 어떤 사람인가? 정의를 내려보면.. 어떤 사람은 이런 인상적인 정의를 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 사람들이 나에게서 다 나갈 때 나에게로 들어오는 사람이다 ”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참으로 인상적인 말이지요


오늘 본문에 요나단은 다윗에게 그런 친구였습니다. 사람들이 다 다윗에게서 멀어질 때 다윗을 향해서 걸어 들어오는 그런 친구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숨기기위해서 < 십 황무지 수풀 >에 숨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고 있었던 요나단은 다윗에게 찾아들어옵니다. 자신의 아버지가 다윗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다윗이 자신이 아버지를 이어 왕이 되는 자리에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를 아는 그가 어떻게 그렇게 다윗에게 걸어들어 올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다윗와 요나단의 깊은 우정과 친구관계에서 설명할수 있었습니다. 이 친구관계는 그저 사이좋은 그런 좋은 친구관계를 벗어나 그 두사람 사이에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실하게 이해하고자하는 순종과 신실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오직 그들안에 있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의 동기만이 있었습니다. 


 다윗와 요나단은 서로 그렇게 신실한 관계를 만들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중심을 이어주고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순수한 마음의 작용이 그들을 친구로 묶어 주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분노와 질투로 억울한 도망자 신세가 되었지만 자신을 붙들고 계신 하나님의 손길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요나단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마음에 쌓아두지 않았습니다. 요나단의 애매한 어려움을 이해하고 오히려 요나단과 사울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의 진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이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떠나 다윗에게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더 이상의 이해관계나 욕심을 갖기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드렸습니다. 오히려 애매히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쫓기고 있는 다윗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흔히 아무리 좋은 관계라도 <이해관계>가 얽히면 그 관계가 지속되기가 쉽지않습니다. <이해관계란 이익과 손해, 이득과 손실을 따지는 관계입니다.> 그렇게 좋던 관계도 그렇게 잘 지내던 관계도 자신이 손해보거나 억울한 일이 생기면 쉽게 그 관계가 흐트러집니다. 그래서 서로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서로에게 분노의 마음을 품지고... 어쩔수 없는 어려움입니다. 


 모든 사람은 예외없이 이러한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손해보지 않으려하고 자신이 억울하게 사람들에게 당하는 것이 싫습니다. 그래서 어떻해서든지 자신이 손해보는 쪽보다는 이득을 얻는 쪽으로 머리를 굴리고 계산을 합니다. 


 그러한 좋은 인간관계은 < 이득과 손해를 따지는 이해관계 >가 아니라 < 서로의 입장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또다른 이해해주는 관계 >를 만들어야 합니다. 상대방의 그 입장이 되어지고 그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헤아리고 살피는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 바보는 적이 없다. 그리고  친구가 많다. > 왜 그럴까요? 바보는 <이해관계>를 만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보는 모든 사람을 수용하고 인정하게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나보다 훨씬 똑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종종 친구가 많은 사람들이 부럽습니다. 그래서 친구가 많은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을 보면 어떤 사람인가를 보았습니다. 딱 2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 첫째는 먼저가 많이 말하기보다는 듣는 사람이다. 둘째는 상대방을 인정해주고 격려하는 사람이다. >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친구가 있습니까? 이해관계를 따지는 친구가 있습니까? 아니면 진정으로 이해해주는 친구가 있습니까? 


부부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관계는 영혼의 친구입니다. 서로의 사랑과 이해가 필요한 관계입니다. 너무 따지지 않는 것입니다. 종종 부부싸움을 할때는 남편은 아내의 감정에 집중하지 않고 문제가 일어난 사실에 집중합니다. 그래서 < 범인 찾기 >를 합니다. 한사람은 도망자가 되고 한사람은 추격자가 됩니다. 사생결단하면서 도망치고 추격하고 그런 관계를 만듧니다. 

사울과 다윗의 관계는 도망치고 추격하는 그런 관계였다면 다윗와 요나단의 관계는 숨어있지만 조용히 다가오는 관계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다윗와 요나단의 이 관계속에서 좋은 친구의 조건을 3가지로 묵상해보았습니다. 


1/ 좋은 친구는 아무도 찾는이 없을 내게 찾아오는 친구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나단은 자신의 아버지 사울의 눈을 피해서 다윗을 찾아갑니다. 

(삼상 23:16)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요나단이 다윗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며 용기입니다. 좋은 관계는 먼저 다가서는 그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자신은 가만히 있고 좋은 사람이 나에게 다가오길 기다립니다. 그러면 결코 좋은 관계를 만들 수 없습니다. 좋은 관계는 먼저 내가 좋은 사람으로 다가가는 일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에게 내가 찾아가는 그일이 바로 가장 좋은 관계를 만듭니다. 


2/ 좋은 친구는 힘을 잃었을 때 나를 격려해주시는 친구입니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찾아와 한일은 무엇입니까? 바로 도망자로 숨어있는 다윗에게 용기를 잃지 않기를.. 그리고 글에게 힘과 격려를 불러 넣습니다. 

(삼상 23:16)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이 말은 < 그가 하나님 안에서 그의 손을 강하게 했다 >는 뜻입니다. 

(삼상 23:17)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니라


요나단은 다윗의 손을 붙잡고 말했을 것입니다. < 친구가 하나님손의 너를 붙잡고 있다 두려워말라. 결코 내 아버지가 너를 해하지 못할 것이다 > 

 좋은 친구의 조건은 < 격려 >입니다. 우리는 우리자신에게 물어야합니다. <나는 어떤 격려의 사람인가? 나는 격려하고 있는가? 격려받고 있는가? > 


항상 문제만 지적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항상 격려하는 사람인가?
최근에 제가 즐겨하는 말중에 < 이게 문제야.. 이번 문제는.. .. 문제는 문제는... > 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회의를 하거나 말을 할 때 < 문제야 ... 문제는 >이라는 말을 빼보고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해보았더니.. 훨씬 말이 부드러워졌고 제 입에서 오히려 격려하는 말들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격려는 문제를 지적하는 일을 멈추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구나하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맘에 들지 않으면 격려할수 없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을 바꿔놓으면 격려할수 있는 것입니다. 


3/ 좋은 친구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 알아주는 친구입니다. 

요나단은 알고 있었습니다. 

(삼상 23:17)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니라

쉽지 않은 요나단의 고백입니다.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을 때 요나단은 분명한 확신을 갖고 다윗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나단의 그냥 대세를 읽은 처세가 아니없습니다. 요나단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약속과 경외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쉽지않은 고백과 인정을 하게 한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의 인정하는 것에 인색할 때가 많습니다. 나보다 나은것이나 나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우월의식이나 때로는 열등감에서 쌓여서 좋은 관계를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서로 알아가주는 것이 좋은 관계의 원리입니다. 인정할 때 기쁨으로 인정해주는 것 그것이 좋은 관계의 출발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오늘 어떤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주변에 어떤 사람과 친하게 지내고 있습니까?


좋은 친구는 아무도 찾는이 없을 때 내가 다가오는 사람이며 내가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좋은 친구는 내가 힘을 잃었을 때 내게 격려해주는 사람이면 내가 격려해야할 사람입니다. 그리고 좋은 친구는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을 때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면 나도 그러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는 이해관계를 뛰어넘은 영적인 은혜관계. 서로 이해하는 관계였습니다. 이 둘의 관계의 중심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신실한 하나님의 약속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면서 나는 어떤 관계를 맺고 살고 있는지 돌아보는 하루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사무엘상 23:1-15] 은혜로운 추격전  
  • Main Idea : 다윗을 도망과 사울의 추격은 은혜롭지 않은 추격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과 함께하십니다. 다윗에게는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지만 하나님은 그 추격전을 은혜로운 시간으로 바꿔 놓으십니다.  


[설교음성파일]

https://soundcloud.com/yonghwan-shin/2014-03-26/s-5pnCD


[삼상 24:1-15]

(삼상 24:1)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쫓다가 돌아오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더이다 하니

(삼상 24:2)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새

(삼상 24:3)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삼상 24:4)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삼상 24:5)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삼상 24: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삼상 24:7)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

(삼상 24:8) 그 후에 다윗도 일어나 굴에서 나가 사울의 뒤에서 외쳐 이르되 내 주 왕이여 하매 사울이 돌아보는지라 다윗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삼상 24:9)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

(삼상 24:10) 오늘 여호와께서 굴에서 왕을 내 손에 넘기신 것을 왕이 아셨을 것이니이다 어떤 사람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하지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 하였나이다

(삼상 24:11) 내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 자락만 베었은즉 내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오늘 아실지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삼상 24:12)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삼상 24:13) 옛 속담에 말하기를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하였으니 내 손이 왕을 해하지 아니하리이다

(삼상 24:14)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의 뒤를 쫓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음이니이다

(삼상 24:15) 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심판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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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울과 다윗의 추격전은 계속이어지고 있습니다. 어제 읽은 본문 사무엘상 23장의 마지막절에 다윗이 도움의 주었던 십 사람들의 배신과 사울의 그릇된 확신속에서 다윗은 사면초과에 몰리게 됩니다. 절대 절명의 위기의 몰리게 된 다윗은 더 이상의 갈곳도 없는 막다른 곳에 몰리게 됩니다. 그리고 사울의 군사들에게 애워싸이게 되죠. 그때 마다 하나님이 일을 행하십니다.


 바로 블레셋이 침노했다는 소식에 급히 사울은 자신의 걸음을 바꿔야만 했던 참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사울은 다시 다윗을 쫓게 됩니다. 

(삼상 24:1)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쫓다가 돌아오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더이다 하니

(삼상 24:2)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새


다시 잠시 멈추었던 사울의 추격전을 시작됩니다. 엔게디 광야에서 그리고 엔게디동굴에서 있는 다윗을 찾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바로 오늘 말씀의 장면입니다. 


오늘 본문의 장면부터 상황의 뒤바뀌게 됩니다. 사울이 다윗의 목숨을 살려준 것이 아니라 다윗의 사울의 목숨을 살려주는 예상치 못한 반전이 일어납니다. 


 사무엘상을 통해서 사울과 다윗의 추격전을 살며보면 예상치 못한 반전의 연속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가장 긴장감있게 만들고 가장 통쾌한 순간은 바로 예상치 못한 반전의 시나리오를 볼 때 아주 흥미진진함을 느낍니다. 


 오늘 사울과 다윗의 추격전 이야기가 우리에게 많은 드라마틱한 감동을 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예상치 못한 반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반전이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함께하심의 차이에서 일어납니다. 


 사울도 처음에는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완악하고 거짓된 마음을 하나님의 함께하심과는 점점 멀어지는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말로는 < 하나님이 다윗을 나의 손에 붙이셨다. 여호와의 복인 너희에게 있기를 원한다 >라고 그럴듯하게 꾸미고 있지만 정작 사울에게서 하나님의 함께하심은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가 사울에게 쫓기면서 도망자신세를 지나는 동안 그의 마음에 더큰 확신이로 찾아온 것이 바로 < 하나님의 함께하심 >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안에 있는 하나님의 함께하심에 확신이 있었기에 그 순간순간의 위기를 넘길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경험할때마다 하나님의 공급하심, 하나님의 보호하심,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래서 비록 도망자의 삶이었지만 하나님의 손을 경험하는 은혜도 더해갔습니다. 


사울에게서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떠나는 것은 더 이상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는 그의 삶에 반전을 일으킵니다.  

다윗에게서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머무는 것은 그의 삶의 상황을 뒤집어 놓는 반전을 일으킵니다. 


 추격자 사울은 삼천명을 병사를 거리고 다윗을 찾으러 엔게디 광야에 이릅니다. 그 엔게디 광야에는 석회굴들이 많은 산이며 거기있는 어떤 굴들은 수백명 혹은 수천명 들어갈수 있는 큰 굴들도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3절에 재미난 것은 

(삼상 24:3)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사울이 굴에 이들어간 이유를 < 뒤를 보러 들어가니라 > 여기서 이 표현은 < 그 발을 가리운다 >는 의미인데 일종의 < 용변을 보거나 잠을 자려고 >라는 의미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용변을 보러들어갔다니 다윗에 죽음을 맞을번한 변을 당하게 됩니다.> 


용변을 보러갔다 이 변을 당하여 변사로 발견될 뻔한.... 웃지못할 상황이 벌어진것입니다. < 이런 변이 있나 > 


 다윗에게서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기회가 옵니다. 

그렇게 다윗을 추격하던 사울이 이러한 어이없는 상황에서 다윗에게 치욕스러운 일을 당하게 됩니다. 다윗에게 옷자락을 배임으로 < 자신의 목숨이 다윗의 손에 >이었음을 경험하는 것.. < 다윗의 긍휼로 목숨을 연명하게 된 이 어처구니 없는 경험 > 바로 사울의 굴욕사건 그 자체 였을 것입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죽임을 당할번한 위기는 사무엘상 26장에 한번더 나옵니다. 그때에는 사울의 창과 물병만 가져옵니다. 사무엘서 기자는 의도적으로 다윗이 사울의 목숨을 살려주는 비슷한 사건을 2번이나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당혹스러운 이야기들의 반복을 문학적인 용어로 < 더플 플롯 >이라고합니다. 하나의 이야기속에서 두 개의 이야기 줄기가 뒤엉켜있는 기법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어떤이들인 사무엘상 24장과 26장은 같은 이야기라고 말하기도하고 어떤 이들은 다른 이야기를 말합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두배경도 비슷한 지역에서 벌어진 일고 이야기 구조도 아주 흡사합니다. 어찌되었든 사무엘서기자는 사무엘상 24장과 26장이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사울을 죽이지 않은 다윗의 마음과 중심입니다. 

(삼상 24:4)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다윗의 사람들은 다윗에게 말합니다. 이 상황을 완전히 뒤바꿔놓을 기회가 왔음을 말합니다. < 네 생각에 좋은대 그에게 행하라. 바로 오늘 그날입니다. >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들의 말대로 하지 않습니다. <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었습니다. > 사울을 죽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다음 구절입니다. 

(삼상 24:5)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않고 사울의 옷자락을 벤 것은 그에게 긍휼을 베푼 행동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에게 선의를 베푼 증거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왜? 그 일 하나만으로 < 다윗의 마음이 찔렸을까요? > 


많은 해석자들은 다윗의 이 행동에는 그의 숨은 동기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 대목은 단순히 사울의 옷자락을 자름으로 그에게 내가 긍휼을 베풀어주었다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 이 왕권을 사울로부터 빼앗고 싶은 그의 숨은 속마음. 역심을 옅볼 수 있는 장면 >이라는 것입니다. 


왕의 옷은 고대 근동에서 왕권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사울의 옷자락을 벤 것은 그의 인격에 손을 댐과 같았고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왕을 대적하여 손을 드는 일이었습니다. 


왕의 옷자락을 자락을 자리는 행위는 그의 마음에 숨은 < 역심 >이 있음을 들통나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내면의 있는 욕심과 역심을 알게 된것이죠..


그리고 사울왕에서 호소합니다. 

[삼상 24:9-10]

(삼상 24:9)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

(삼상 24:10) 오늘 여호와께서 굴에서 왕을 내 손에 넘기신 것을 왕이 아셨을 것이니이다 어떤 사람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하지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 하였나이다


(삼상 24:12)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삼상 24:15) 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심판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이것은 다윗의 애절한 호소이며 그의 중심의 고백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익숙한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하나님의 마음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울은 익숙한 사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와 함께했지만 하나님과 함께하는 일에서 실패했습니다. 다윗은 편안한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 하나님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고 사소한 판단과 사소한 결정도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차이가 결정적인 반전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의 모든 인간적인 판단은 유보한채 자신의 유리한 상황조차도 내려놓은채 

오직 하나님의 판단과 결정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중심에만 집중하고 있는 다윗의 모습을 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우리는 우리의 삶에 우리가 유익한 상황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하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혹시 우리는 우리가 유익 한쪽으로 결정하고 선택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유익한 쪽으로 결정하고 선택해야하는 사람임이 잊지 말아야합니다. 


우리가 놓치지 말았어야 하는 절호의 찬스가 온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이 아니면 멈출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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