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라디아서 3:10-18>  법보다 약속입니다.
  • 율법은 인간적 성취를 요구한다. 그러나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일에 대한 믿음을 요구한다. 율법은 요구사항을 만들고 우리에게 복종을 요구한다. 하지만 복음은 약속을 제시하고 우리에게 믿음을 요청한다. - 존스토트 -


[3:10-18]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3: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3:15)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3: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3: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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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간에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로 잠간 쉬었던 < 갈라디아서 >를 다시 묵상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서신중에서 가장 앞선 기록인 갈라디아서는 초기 사도바울의 복음의 열정과 그의 뜨거움을 옅 볼수 있는 서신입니다.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복음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이상 어리석게 너희가 유대의 전통이나 할례나 율법에 매여 있지 말고 복음이 주는 참된 자유를 맛보고 그렇게 담대하게 살아가기를 도전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전체의 6장을 3부분으로 나누어서 복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1-2장은 < 은혜의 복음을 변호함

3-4장은 < 은혜의 복음을 설명함 >

 5-6장은 < 은혜의 복음을 적용함 >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3장은 사도바울이 < 은혜의 복음을 설명함에 있어서 모세의 율법보다 먼저 있었던 아브라함의 믿음, 아브라함의 의롭게 여김을 가지고 복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방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그 이방에서 복음을 받아들고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계속 고민스럽게 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우선인가? 아니면 유대인이 되는 것이 먼저인가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중요 한가 ? 아니면 유대인으로 사는 것이 중요한가 ? 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도 율법을 버릴 수가 없었고 그 율법을 버리는 것이 그들에게 상당히 위험한 결정이었습니다. 심지어 유대에서 가만히 들어온 거짓 교사들이 그들의 마음을 충동질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면서 율법을 지켜야한다고 율법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그들에게 찾아오는 것이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은혜의 복음을 설명하면서 모세의 율법보다 먼저 있었던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가지고 옵니.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게 여겨진바 된 것은 그에게 율법의 행위로 있어서 되어진 것이 아니라 < 그가 믿는 믿음 때문이라 >라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 율법은 죄를 다루기 위한 것이지 의를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아브라함보다 훨씬 후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훨씬 뒤에 만들어진 율법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보다 먼저일수가 없다는 것이 바울의 핵심적인 논리입니다. 그래서 율법보다 우선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기능은 죄를 드러내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세상에서 구별된 의식과 질서를 따르도록 돕기 위한 것입니다


율법의 궁극적인 기능은 죄를 지으면 초래하게 되는 심각한 저주가 무엇인지?를 알리고 경고하는 데 있습니다. 결코 율법을 행함으로 의를 이루거나 믿음을 갖지는 못합니다. 그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율법입니다


오로지 율법의 기능은 < 믿음을 돕기 위한 것 >입니다.


율법은 인간적 성취를 요구한다. 그러나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일에 대한 믿음을 요구한다. 율법은 요구사항을 만들고 우리에게 복종을 요구한다. 하지만 복음은 약속을 제시하고 우리에게 믿음을 요청한다. - 존스토트 -



율법은 정의의 법정이지만 복음은 은혜의 보좌이다. - 조지 스윈녹 -

 

오늘 본문에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그 율법의 저주를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대신 담당하심으로 우리에게 주어져야할 율법의 저주를 속량하셨습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감당해할 율법의 저주가 없어진 샘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길를 따르지 않고 우리를 위해서 율법을 완성하시고 율법의 저주에게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이 열렸음을 알아야합니다.

 

우리에게 놓여있는 2가지 루트(ROUTE)가 있습니다.

율법을 다 지키며 의롭게 되고 그렇게 사는 루트가 있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 그렇게 사는 루트가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율법을 통해 의롭 되는 사람이 없으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사람은 있습니다. 바로 그것을 아브라함의 믿음과 의롭게 여김이 보여주었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를 뒤집어 쓰시고 죽으신 예수님이 그 새롭고 산길을 여셨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저주아래 묶어 놓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덕분으로 예수님의 덕택에 그 율법에서 빠져나와서 그 은혜와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놀라운 주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묵상하며 도전 받는 것은

우리의 믿음은 율법보다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의롭게 됨은 율법의 행위보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참된 복은 율법안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3가지 사실이 우리의 복음의 참다운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덕분에게 우리에게 주어져야할 율법의 저주가 치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이 우리도 약속을 유업을 받은 아브라함의 자녀와 복을 누리는 자들로 우리를 끼워주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십자가 사건은 율법아래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감당하는 사건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저주를 받으신 것이다. 이 방법으로 우리를 되찾아 왔습니다. 율법의 저주를 끊기 위해서 그분이 스스로 저주를 받는바가 되고 저주를 받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다는 것은 그렇게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저주를 담당하고 뒤집어쓰시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를 진다고 말할 때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박힌다고 말할 때 그 의 의미는 율법의 저주를 다 담당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죄를 뒤집어 쓰고 많은 이들의 유익을 위해서 살아야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저주받으심이 오늘 우리에게 복받음으로 이어집니다. 구약성경에서 < 저주와 복 >은 항상 대조를 이루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됩니다. 오늘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예수님안에서 이루어진 < 저주와 복 >에대한 분명한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각각 하나님의 약속과 계명에 대한 순종이 복을 위한 필요조건이었습니다.


하지만 갈라디아 교회에게는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나무에 달려 저주가 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구원(이신칭의)의 차원의 복을 위한 필요조건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9-10절의 복과 저주의 현재적 특성은 구원의 차원이라기보다는 현재적인 삶과 관련된 복과 저주의 차원을 말한다.

 

우리에게 <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게 되는 > 놀라운 일들이 주어졌습니다.


(3: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율법의 저주가 아브라함으로 복으로 바뀌는 그 과정속에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을 누리고 있음을 확증해주시는 것이 바로 <성령의 약속>입니다.

 

성령께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을 개런티<guarantee>해주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약속의 복을 워런티<Warrantee>해주십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 그리스도을 믿고 성령님을 받아들이는 우리에게 주어진 복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율법보다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의롭게 됨은 율법의 행위보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참된 복은 율법안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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