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화목하시나요?(롬12:18,살전5:13,잠17:1)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인생에 최종목표가 무엇인가”라는 설문조사에서 가장 많이 나온 답은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행복하시고, 화목하신가요? 롬12:18 에 화목하라는 "어떤 사람과 더불어 평화롭게 살다"는 뜻입니다. 사회학자 가드너는 모든 것을 다 잃어도 가정이 있으면 다 잃은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현대 사회의 위기는 가정의 위기로서, 깨어진 가정이 많고, 가정을 못이루는 1인 가구가 많습니다. 모 항공사 회장일가의 갑질 파문으로 부정직과 잘못된 모습이 언론에 보도되었습니다. 재벌이라서 행복하고 아무 문제 없어 보이지만, 잠17: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제육이 가득하면서 다투고 사는 것 보다 낫습니다. 서로 화목하기 위해서는 첫째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해야 합니다. “할 수 있거든”은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가능한 최선을 다해 “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롬 12:18은 롬 12:1과 연결되어 우리 몸은 거룩한 산 제물이고,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이므로 화목하지 못한 관계 때문에 하나님께 드리는 산 제물과 영적 예배의 삶에 방해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솔로몬은 부자를 “제육이 집에 가득한 자(잠17:1), 살진 소를 먹는 자(잠15:17) “라고 표현합니다. 당시에 부자는 좋은 소를 잡아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화목제를 드리고 기름을 태운 뒤 남은 고기를 나눠먹으면서도 화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 5:23-24에서도 예물을 제단에 드리기 전에 먼저 화목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산제물과 영적예배를 드리는 삶이 되기 위해 화목해야합니다. 두 번째, 서로를 귀하게 여기며 사랑하므로 화목해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귀하게 여기는 것을 느낄 때가 언제입니까? 서로에 대한 격려가 넘치고, 서로에 대한 칭찬과 감사를 표현하며, 서로를 세워줄 때 입니다. 중요한 단어는 ”가장 귀히 여기며”인데 이 단어는 “ 존중하다”는 의미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존중하는 말을 하고 격려하는 말을 하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다고 하더라도 사람과 화목하지 않으면 그것은 진정한 영적 예배가 아닙니다. 가정과 교회에서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과 화목하고, 서로 귀하게 여기며 사랑하므로 영적예배를 드리는 삶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서로 용서하시나요?(골3:18-21,잠15:20,잠23:25) 인생의 끝이 가까운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4가지 말은 “보고 싶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용서합니다.” 이고, 후회하는 것은 더 사랑하고 더 용서하지 못한 것이라고 합니다. 챨스 스탠리 목사님은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하고 자신을 용서하고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성경의 명령 중 가장 어려운 것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엡 4:32 서로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 같이 하라고 하신 말씀대로 용서할 수 있는 이유는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탤런트 故김영애씨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편해진 것은 미운 사람이 없어진거라고 간증했습니다. 남을 비판하는 심판자가 되지 말고 서로를 바라보며 너그럽고 따뜻하게 대해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서로에게 자주 용서를 구하고 있으신가요? 가정에서 용서와 화해를 이루기 위해서 먼저 자녀들은 부모님을 즐겁고 기쁘게 해드려야 됩니다. 잠23:25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하셨는데, 효도는 다른 특별한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즐거움에 관심을 갖고 기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제가 나이가 들고 부모가 되면서 한 가지 깨달아가는 것은 < 부러운 부모는 있어도 부끄러운 부모는 없다 >는 사실입니다. 잠15:20에 “어미를 업신 여긴다”는 인격적으로 경멸하고 멸시한다는 의미입니다. 부모용서하기 책을 쓴 레슬리 필즈 자매는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학대와 폭행을 경험했지만, 아버지를 용서하게 된 이야기를 쓰면서 부모라는 이름만으로 충분하고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이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가정에서 용서와 화해를 위해자녀들이 부모를 기쁘게 해드려야 한다면, 부모들은 자녀들의 감정에 관심을 가지고 자녀의 감정을 인정해야 합니다. 부모가 자신의 감정을 자녀들에게 솔직하게 나누는 것을 어려워합니다. 화목하지 않은 가정에는 대화가 없고, 대화를 하더라도 상대의 감정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골 3:21 자녀를 노엽게 하다는 단어는 “ 화나게 하고 흥분시키다”는 의미이고, 낙심하게 하다는 단우는 “의기소침하게 만들다 “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의 말과 표정이 자녀들에게 어떻게 보여졌을까요? 부모와 자식간에 관계가 어렵고 풀기가 힘든 부분이 있다면, 용서 하시고 용서를 구하십시오. 부러운 부모는 있어도 부끄러운 부모는 없어야 하고, 미안한 지식은 있어도 미운 자식은 없어야 합니다 서로 용서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가정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서로 사랑하시나요?(고전12:31-13:3) “서로가 보는 서로에 대하여” 라는 주제로 화목, 용서, 사랑, 겸손을 통해 어떻게 성경적인 좋은 관계를 만드는지 나누고 있습니다. 가정과 교회 안에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고, 서로 사랑하면 제자됨을 증명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 받은 사랑으로 가득 채워서 그 사랑을 서로에게 전해야 합니다. 주일마다 울리는 우리교회 종소리를 들을 때마다 사랑의 종소리처럼 들립니다. 찬양가사처럼 사랑의 종소리가 우리 교회를 감싸는 은혜가 있길 원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랑장 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 주일로 지키는데, 고린도전서 12장부터14장에서는 ‘신령한 은사들’을 주셨고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려줍니다. 은사는 성령께서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시는 것입니다(고전12:11) . 특별한 사람에게만 성령님을 통해 은사와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은사를 받을 수 있는데, 고린도 교회는 그릇된 우월의식으로 영적인 교만이 가득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런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고전 12:31에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면서 가장 좋은 길을 보이겠다고 합니다 . 더욱 큰 은사는 무엇일까요? 바울은 사랑장을 쓰기 전에 왜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했을까요? 자랑은 많았으나 사랑은 없었던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더 큰 은사는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신령한 은사를 주신 동기와 은사를 사용할 때 중심이 되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고전13장에는 구절 마다 “사랑이 없으면 “이 반복됩니다. 사랑이 없으면 어떤 신령한 은사일지라도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좋은 가정이나 좋은 교회는 문제가 없는 곳이 아닙니다. 허물과 문제를 사랑으로 덮어 주어서 문제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을 곡으로 만든 정두영 목사님은 폐결핵으로 고통이 있었음에도 쾌락에 빠져 살다가, 부흥집회에서 은혜를 받고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를 15분만에 지었다고 합니다. 이 찬양의 가사와 같은 사랑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이 세 단어는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의 시작이며 끝입니다. 성령충만은 곧 사랑충만입니다. 성령의 은사 중에 가장 큰 은사인 사랑의 은사를 사모하시고 가정과 교회에서 서로 사랑하시길 바랍니다.

Faith Beginning from Home(신명기6:4-9) James Lee 목사 신앙인들에게는 세상에서의 성공도 중요하지만, 자녀들이 어떻게 신앙을 잘 이어받을까 하는 관심도 많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명기는 유대인들에게뿐만 아니라 크리스챤들에게 신앙의 유산을 전달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책입니다. 한국어로 신명기는 새로운 율법의 책이라는 뜻이라면, 영어로Deuteronomy는 두번째의 율법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죽기 전 요단강 앞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바라보는 모세는 출애굽 다음세대 자녀들의 앞날을 걱정하는 부모의 심정이었습니다. 모세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이 새로운 세대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정착을 하여 농경생활을 시작할 때 삶이 풍요러워지면 출애굽의 하나님을 잊어버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일평생을 살면서 삶을 마감하는 날까지 하나님을 기억하고 신뢰하며 사는 것이 힘든데, 어떻게 다음 세대가 복음을 믿으며 신앙을 유지해 나갈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같은 고민이 있습니다. 믿음을 배울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는 가정이라고 신명기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신 6장4-9절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사도신경과 같은 신앙의 고백입니다. 이 말씀을 항상 자녀들에게 가르치라고 하는 본문 말씀을 통해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믿음과 치유, 용서와 변화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는 곳은 가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삶이 변화되었다면 가족이 그것을 볼 것이고, 또 우리를 변화시킨 분이 누구신지를 알기 원하게 될 것입니다. 가정에서 말씀의 증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신앙의 본으로 성공할 때 보다 실패하여 부족함을 인정할 때 더 기회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가족에게 상처를 주었을 때, 신앙대로 행하지 못하였을 때 또는 다른 이가 나에게 상처를 주었을 때 서로에게 용서를 구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있습니까? 우리 가족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내가 아직도 부족한 존재이고 실수한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서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 필요한 존재이고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는것을 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헌신은 이 위대한 사랑에 대한 감사의 고백입니다. 이 위대한 사랑이 저와 여러분들의 가정을 변화시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전도에 도전하세요(고전1:17-21)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2가지 중요한 명령이 있는데, 대 계명과 대 위임령입니다. 대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같이 사랑하라는 것이고, 대 위임령은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두 명령의 공통점은 순종이고, 차이점은 대계명은 힘을 다해 지켜야 되고, 대 위임령은 끝내야 할 일 즉 완수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는자로 우리를 부르신 이유와 우리교회가 이곳에 존재하는 이유가 우리에게 주신 남은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얼마나 자주 전하고 계십니까? 생명공동체인 교회가 전도 안하고 생명이 태어나지않으면 더 이상 존재의 가치가 없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유럽교회 건물은 술집, 극장, 이슬람 사원이 되었습니다. 현대 교회의 상황도 <위대한 명령 하지만 전도의 위기 그리고 위험한 교회 > 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능력을 먼저 전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미련한 것(moria)"라는 단어가 여러 번 쓰여있는데, 당시 고린도 사람들과 오늘날 불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것을 지혜롭지 못하고 어리석다고 생각합니다. 1세기 중반의 고린도는 가장 세속적으로 타락한 도시였고, 거칠고 무법적인 도시였기 때문에 전도하기 힘들었습니다. 또한 고린도교회는 서로 분쟁하고 싸우며 파벌을 만들었습니다. 전도하기 힘든 고린도에서 전도를 방해하는 고린도교회가 있었던 것 처럼, 오늘날 전도하기 힘든 세상도 문제이지만 , 전도를 방해하는 교회의 모습이 더 큰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믿는데 교회를 나가지 않는"안나가 성도, 가나안 성도"가 100만 명을 넘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6월부터 Blessings Rose Day를 준비하면서, 우리의 관심은 교회를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금 교회로 돌아오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 한 영혼이라도 주님께로 인도하시길 바랍니다. 전도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의 생각으로 하나님이 하실 가능성을 제한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는 무궁무진한 방법으로, 영혼구원의 도구로 우리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전도라는 단어를 뒤집어 읽으면 < 도전 >이 됩니다. 분명 우리에게 전도는 도전입니다. 교회로 돌아와야 하고 교회로 나와야 살 수 있는 한 영혼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전도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내려놓고,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전도에 도전하시길 부탁드립니다

전도의 밥상-예수님과 함께 하는 밥상(눅15:1-10) 오래 전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에 누군가를 만나면 “식사하셨습니까?” 하면서, 끼니를 걱정해주는 정겨운 인사가 있었습니다. 한국사람들에게 같이 식사를 한다는 것은 같은 식구가 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식구(食口)’는 한자로 ‘밥 식(食)’자에 ‘입 구(口)’자를 쓰는 것처럼 한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우리는 함께 먹고 나누는 나성한미교회 식구로 모였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는 식사하시는 모습이 자주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와 어떤 식사를 나누셨는가?를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식사는 < 전도의 밥상 >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초대한 사람들 또는 예수님을 식사자리에 초대한 사람들은 모두 주님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반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죄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으로 초대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복음의 밥상에 함께한 대표적인 사람들은 베드로, 베디나의 나사로, 세리 마태 그리고 삭개오입니다. 한 여자가 귀한 향유 옥합을 가지고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고(마26:7), 예수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함께 했습니다.(마9:10) 또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전도의 사명을 맡기셨던 곳도 유월절 만찬을 나누는 식사자리였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물고기 잡으러 간 제자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셨습니다. (요21:12-13)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에 매여서 죄인과 같이 먹는 예수님의 밥상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수근거렸습니다. 눅15:2에 “수군거리다”는 “투덜거리다 불평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누군가에게 수군거린다면, “내가 바리새인이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향해 수군거리는 바리새인들에게 잃은 것을 찾는 비유 즉,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잃은 아들(탕자)의 3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전도에 대한 말씀을 할 때 이 비유들을 들었지만, 잃은 것을 찾는 것에 초점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와 식사를 할 때 , 그리고 누가 수근 거릴 때 말씀하셨는지에 초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식사에는 꼭 죄인들과 연약한 자들 그리고 치유가 필요한 자들이 초대되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예수님을 초대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을 맘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우리 나성한미교회의 식사는 전도의 밥상이 되어서 누군가를 복음으로 초대하여 전도의 밥상을 함께하는 교회되길 축복합니다

전도의 향기- 너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후2:14-17)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신다면 우리에게 예수님의 향기가 나야 됩니다. 장미꽃에는 장미향이 나는 것 처럼 예수님의 향기가 그리스도인을 증명해줍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 너는 그리스도의 향기라 >는 우리의 중요한 정체성을 말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전도에 열심을 내지 않고 오히려 교회 안에 있는 분쟁과 갈등이 많았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사람으로 디도를 보내었습니다. 바울은 2차 전도 여행중에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고 성령에 이끌려서 간 드로아에서는 전도의 문이 열렸고, 드로아에서 형제 디도를 만나기로 했으나 만나지 못해 안타까운 마음이 있었습니다.고린도 교회에 상황을 듣지 못했으나, 오히려 감사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 얻는 사람들에게나 멸망 당하는 사람에게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복음을 전하는 전도의 향기입니다 . 첫째 전도의 향기는 놀라운 승리의 향기를 풍기는 것입니다. 로마시대에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개선행렬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며 향품을 태웠습니다. 이 향기를 통해 멀리서도 전쟁의 승리를 알 수 있었으나, 포로로 끌려온 사람들에게는 죽음의 향기가 되었습니다. 복음이라는 유앙겔리온 역시 황제가 왕위에 등극하는 기쁜소식을 전하는데서 유래합니다. 복음은 참된 왕이오셔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놀라운 승리의 소식이고, 이것을 전하고 승리의 향기를 내는 것이 전도입니다. 둘째 전도의 향기는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전하는것입니다. 본문에 향기는 냄새(fragrance)와 향기(aroma) 두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fragrance)는 마리아가 자신의 전부인 향유를 깨뜨렸을 때, 집에 가득하였던 냄새입니다.(요12:3) 전도는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붓는 것입니다. 향기(aroma)는 구약의 제사에 제물을 드릴 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향기를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전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예배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2:16) 누가 이 일을 감당하겠느냐고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향기 입니다. 우리에게 승리의 향기,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 그리고 생명의 향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잃어버린 한 영혼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전도의 편지 : 너는 그리스도의 편지라 (고후 3:1-5) 지난 한달 동안 전도 설교를 준비하면서 어떻게 전도에 도전을 드릴지 고민하며 서재에 있는 전도에 관련된 책을 찾아보았습니다. 20권이 넘는 책들에서 발견한 공통된 메시지는 “전도는 주님의 명령이요 우리의 사명이다. 전도를 멈추면 교회의 생명이 멈춘다”는 것입니다. 전도는 책을 읽고 이론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한 명이라도 가슴에 품고 가서 전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전도해봤어” 책의 저자 이충섭 목사님은 개척교회를 힘겹게 섬기시다가 기도 중에 “전도 해 봤어?”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깨닫고 전도를 시작하셨습니다. 다음세대를 고민하고 있는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전도 해 봤어?”라고 지금 물으십니다. 구도자 중심으로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는 윌로우 크릭교회의 빌하이벨스 목사님은 우리는 예수의 바이러스를 가지고 세상을 감염시키는 전도바이러스가 되어야 한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합니다.(고후3:2) 편지는 소개장 즉 추천서인데, 사도의 자격을 의심하고 비난하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자신의 추천서이며 편지라는 것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우리의 어떤 부분이 전도의 편지가 될 수 있을까요? 첫째 복음적인 삶이 전도의 편지입니다. 바울은 18개월동안 고린도에 머물면서 자신의 삶을 다해 전도했고 자신의 삶 자체가 전도의 편지가 되었습니다. 복음이 자신을 변화시켰다면 삶을 통해 주변사람들이 알게 되고 누군가를 하나님과 만나게 이어주는 다리가 될 수 있습니다.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고 매일의 삶이 복음을 전하는 편지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 가슴에 새겨진 전도의 편지를 확신으로 전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비난하고 있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위로하면서 확신을 가지고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축복합니다. 바울의 확신은 하나님께 대한 확신이고 구원의 확신입니다.(고후3:4) 전도의 동기는 구원의 확신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입니다. 전도의 적은 두려움입니다. 우리가 전도하기 위해서 전도에 대한 두려움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과 가슴에 새겨진 복음의 확신이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축구선수 이영표는 선수시절에 다른 동료들과 대화 중에 항상 전도를 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삶으로 전도하고, 십자가 사랑과 구원의 감격으로 누군가에게 확신에 찬 편지를 전하시는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기도의 사람1- 하나님의 벗이 되어 기도하라(창18:22-33) 성경에는 기도를 통해 믿음이 완성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대표적인 기도의 사람이었지만, 처음부터 믿음이 좋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창12:1) 하셨을 때, 아브람은 많은 우상을 숭배하던 수메르 문명에 살고 있었습니다. 우상을 만들어 팔던 생계를 버리고 보여준 땅이 아니라,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하신 말씀에 순종한 아브라함은 나이가 많아 늙었지만 여호와께서 범사에 복을 주셨습니다.(창24:1) 또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습니다.(약2:23) 그는 실수와 실패를 통해 하나님을 더 알아갔고 믿음으로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히11:10) 아브라함의 삶은 부르심, 순종, 바라봄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여정 가운데 텐트를 치는 곳마다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고, 이동하는 중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창12:8) 그의 믿음은 여호와를 위해 쌓은 예배의 제단과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기도를 통해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 예배의 제단이 있으신가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를 드리고 있나요 ? 아브라함이 쌓은 예배와 기도의 제단(altar)이 그를 변화(alter)시켰습니다. 기도는 소원성취의 요구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기도의 교과서라고 불리는 “사귐의 기도” 책에 “기도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귐이고, 사귐의 기도 자체가 응답이며, 우리의 초점이 하나님으로 바뀌고, 기도가 우리를 변화시킨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이 살던 마므레는 상수리 수풀과 나무가 우거진 산지로 척박한 환경이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사자를 보았을때 민감하게 알았고 자신을 떠나지 말라고 간청합니다. 그때 아들의 약속을 주시고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알려주셨습니다. 사라는 웃었지만, 우리는 기도할 때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없음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서있었습니다(창18:22). 원문성경에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 앞에 여전히 서 있으셨다고 쓰여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기도하기를 기다리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기도 앞에 하나님의 기다림이 있으시고, 아브라함은 결국 자신은 티끌이나 재와 같으나 하나님께 구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는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하고, “시선” 찬양의 가사처럼 모든 시선을 하나님께 드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기다리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항상 기도하는 삶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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