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비방할 때 기뻐하고 칭찬할 때 슬퍼하라.

우리들의 적이 때로는 친한 벗보다 유익할 경우가 있다.
친구는 언제나 우리들의 실수를 묵인해 주지만,
적은 항상 우리의 죄를 들추어내며
우리를 긴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결코 적의 비판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
- 톨스토이

톨스토이는 ‘남들이 자신을 비방하고 욕설할 때 기뻐하고,
칭찬할 때 슬퍼하라. 비난은 그를 공손함으로 이끌어주며
스스로의 해독제가 되어준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명심보감에 나오는
‘나의 장점만 말하는 사람은 나를 해치는 사람이고,
나의 단점을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나의 스승이다.’라는 구절과
궤를 같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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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안녕과 안전 그리고 안심 (시4:8)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시4:8)



내가 편히 눕거나 잠드는 것도, 주님께서 나를 평안히 쉬게 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시4:8, 새번역)

우리가 확보해여할 안녕과 안전 그리고 안심은 무엇인가요?

우리는 자주 묻습니다. 

안녕하세요? 안전하시죠? 안심하세요?

우리는 어떻게 대답하고 있나요.. 

나의 안녕과 안전 그리고 안심을 확보하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내가 미국에 사는것이 안전할까요? 

아니면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안전할까요? 


몇일전에  집에 있는 책장에 책이 떨어지고 책장이 쓰러졌습니다.

책장이 쓰러진 이유는 벽에 책장이 견고하게 붙어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냥 서있는 것만으로 안전할거라고 견고할거라고 생각했지만 

벽에 책장은 반드시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벽에 책장을 부치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때 깨닫는 묵상...

나는 견고하게 붙어 있어야 될 것이 무엇인가? 

주님 안에 붙어있지 않으면 

나는 살수 없는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영혼의 피난처 주님은 나의 도움이 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능력이 됩니다. 

주님은 나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주님밖에 나의 도움이 없습니다

내 마음이 진동하고 흔들릴때 

주님께로 피난처로 삼고 주님께로 나아가야합니다


막흔들리는 내 마음에 문을 박차고

가장 안전한 피난처 주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견고함에 내 삶을 붙어있어야합니다. 

그것 만큼 가장 훌륭한 안전은 없습니다. 

주님께 붙어있어야 산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시4:8)

내가 편히 눕거나 잠드는 것도, 주님께서 나를 평안히 쉬게 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시4:8, 새번역)


지극히 높으신 주님 안에 거하는 자


지극히 높으신 주님 안에 거하는 자


그는 전능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라


그는 전능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라


주는 나의 피난처가 되시며
주는 나의 능력이 되시네


주님 계신 곳에 나 거하리라


주는 나의 하나님 주 나의 하나님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살려면 달아나십시오(Run for your life)




다음은 미국 맨하탄 타임즈 스퀘어 교회의 목사인 카터 콘론(Cater Conlon)의 “살려면 달아나십시오(Run for your life)”라는 설교의 일부이다. 이 설교는 2001년 9.11 테러가 뉴욕에서 발생한 닷새 후에 선포되었던 말씀으로 거짓된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나 설교자로부터 멀리 달아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제 설교를 이전에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던 것처럼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우리의 목숨을 바쳐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주일학교 소풍에 오는 것처럼 와 있는 곳이 아닙니다. 또한 계속적으로 좋은 시간 보내자고 초대하는 곳도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영혼을 두고 하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 저는 사람들이 무너져 내리는 쌍둥이 빌딩에서부터 도망쳐 나올 때 뉴욕의 경찰관들이 했던 말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경찰관들과 소방관들은 사람들을 향하여 “살려면 달아나십시오(Run for your life)”라고 외쳤습니다.


... 그렇습니다. 여러분 살려면 빨리 달아나십시오.
달아나십시오! 오로지 성공과 번영에만 초점을 맞추는 복음으로부터! 
달아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단지 개인적 이득을 위해 사용하는 이들로부터!
달아나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의 호주머니를 노리는 이들로부터! 
달아나십시오! 오직 자아계발에만 초점을 맞추는 복음들로부터! 
달아나십시오! 예수님이 아니라 인간이 영광을 받는 교회들로부터!
달아나십시오! 예수님의 몸 된 교회여, 달아나십시오! 거기서 나오십시오! 부정한 것들을 만지지 마십시오!


성경이 없는 교회들로부터 달아나십시오. 그들의 신학엔 십자가가 없습니다. 말씀을 상고하는 것도 없습니다. 죄를 회개하는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에 대해선 언급도 안합니다. 그런 교회들은 부정한 교회들입니다. 그러니 거기서부터 달아나십시오!
달아나십시오! 죄를 지어도 편안한 교회들로부터. 하나님의 집에 와서 여러분 삶에 죄를 품고 있는데도 그것을 깨닫게 하지 못하는 교회라면 그것은 마귀들의 식탁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 하나님의 강단을 사용하는 정치적 성향을 지닌 사람들로 채워진 강단들로부터 달아나십시오! 


달아나십시오! 민족과 관습 사이에 분열을 외치는 이들로부터 달아나십시오! 
달아나십시오! 거기서 나오십시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자들입니다. 
달아나십시오! 불경하고 발작적인 운동들과 끝없이 공허한 예언을 일삼는 자들로부터!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시여, 살려면 달아나십시오!
달아나십시오! 서서 이야기와 농담을 일삼는 설교자들로부터!
죽을힘을 다하여 달아나십시오!
달아나십시오! 제발 달아나십시오! 어서 속히 달아나십시오!

회개란 한문으로 '뉘우칠 회(悔)' '고칠 개(改)'입니다. 



고칠 개(改, gǎi)는 뱀 사(巳)와 칠 복(攵)이 합쳐진 형태로 뱀과 같은 파충류를 막대기로 때려죽이며 사악한 기운을 없애고 주위 환경을 바꿔가는 데에서 '고치다, 개선하다'는 의미가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뉘우치기만 하는 것은 반 회개에 불과합니다.

뉘우치고 고칠 것을 고치고 끊을 것을 끓을 때 온전한 회개가 되는 것입

니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겉으로 신앙생활을 할지라도 

자기 영혼을 그리스도께 절대 내 맡기깆 않으며 

성령의 역사와 말씀의 명령에도 결코 고분 고분하게 순종하지 않는다. 


회개한 사람의 심령에는 한마디로 그리스도께서 거하신다.

회개한 사람의 삶은 그를 위해 친히 목숨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삶이다. 

그렇다. 회개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계신 그리스도꼐서 사시는 것이다. 


리차드 백서터 / 회개 했는가? 

CARPE DEIM (까르페 디엠) 현재를 즐겨라 






우울증… 목사님도?






이런 가운데 순전한 기독교를 향한 목회자들의 몸부림은 ‘둘 사이에 끼어’(빌 1:23) 고뇌하는 사도바울처럼 보인다. 목회자들은 모든 문제를 온몸으로 떠받치며 달려간다. 이들은 몸을 사리지 않는다. 흔히 종교인(성직자) 수명이 가장 길다고 알려져 있지만 목사들에겐 예외인 것 같다. 목사에게 집중된 과중한 사역은 중압감과 탈진, 우울증이라는 벼랑으로 내몰고 있다.

박현수(가명·49) 목사는 신자 150여명 규모의 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그는 교우들과 허물없이 지내는 편이지만 속마음을 털어놓지는 못한다. 괜히 말했다가 성도들에게 오해를 받은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속 깊은 이야기는 주로 동료 목사들과 하는데 그런 목사들조차 많지 않다. 미국에서 신학공부를 한 탓에 국내 신학교 출신 목사들과 친분이 없다. 그러다가 3년 전부터 갑자기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의욕이 생기지 않았고 몸도 나른했다. 왜 사는가 싶었다. 문득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내에겐 얘기도 꺼내지 못했다.

상담 전문가들에 따르면 목회자들이 우울해지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영적인 고갈과 과도한 목회사역이다. 
영적 고갈에는 목회의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에 대한 정죄, 
사역에 대한 지나친 기대감, 부족한 지적인 능력 등이 작용한다. 

너무 바쁜 활동은 스트레스나 우울증을 일으키는 가장 큰 요인이 된다. 
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 목회자 75%가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목회생활을 그만둘 생각을 한 일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엔 교인들의 끝없는 요구와 많은 설교 횟수, 가정 문제 등이 작용한다.

경기도 일산에서 목회하고 있는 임모(46) 목사는 “요즘은 전도를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것 같다”며 “전도하러 나가면 한국교회에 대한 불신이 너무 팽배해 절망감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목회자가 갑자기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도 했다.

지난해 미국 듀크신학대 목회자건강연구소는 감리교 목회자 1726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우울증 유병률이 8.7∼11.1%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일반인 기준인 5.5%에 비해 두 배가량 높은 수치였다. 
조사에서는 목회자들 중 불안증세를 호소하는 사람이 13.5%에 달했으며 불안과 우울증을 함께 겪는 목회자 비율도 7%가 넘었다.

미국의 사례이긴 하지만 국내 목회자 가운데서도 우울증을 앓고 있거나 우울한 성향을 가진 경우가 많다. 죄에 대한 자기검열이 강한 성격일수록 더욱 그렇다는 분석도 나온다. 설교자로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압박감과 강단에서 내려온 뒤 고독감이 이를 부추기는 것이다.

교회 역사에서는 우울증으로 고통 받았던 대가들이 있었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1483∼1546)는 일생동안 우울증과 씨름했다. 



그는 1527년 일기에서 “일주일 이상 죽음과 지옥의 문턱에 서 있었다”고 기록했다. 루터 연구가 롤랜드 베이튼에 따르면 루터는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심한 양극성 장애(우울증과 조증이 반복되는 기분장애)로 고통을 호소했다고 한다.

19세기 부흥운동에 불을 지폈던 영국의 명설교가 찰스 스펄전(1834∼1892) 목사도 중증우울증을 앓았다. 그는 일년에 2∼3개월은 아예 강단에 서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기독교 영성가 헨리 나우웬은 성장과정에서는 기분 장애로, 성인이 되어서는 우울증으로 평생 고통을 받았다.

과도한 목회 사역과 영적 침체 속에서 오는 우울증이 있는가 하면 경쟁적 개교회 시스템이 초래하는 우울증도 존재한다. 김일준(가명·54) 목사는 최근 자신이 졸업한 신학교 모임에 나가지 않는다. 이들 회합에는 대부분 자신보다 큰 교회를 맡은 목사들이 많았고 이들 앞에서 왠지 모를 소외감을 느꼈다. 나름대로는 바른 목회를 지향했고 교인수와 상관없이 목회하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모임에만 가면 늘 초라해 보였다. 놀라운 것은 모임에 나오는 목사들은 이웃 교회를 경쟁상대로 여기는 게 보통이었다. 어떤 선배 목사는 ‘좋은 시절 다 갔다’며 자신의 재정 씀씀이를 지적하는 교회 장로를 흉봤다. 김 목사는 자신이 마치 전쟁터에서 발가벗고 서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총신대 라영환 교수는 “본질에 입각한 목회를 추구하려고 발버둥치지만 경쟁적인 한국교회 풍토 때문에 되레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도 있다”며 “목회의 목표는 교회 성장이 아니라 복음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것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남성 목회자들의 우울 증상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분석한다. 내부 감정을 행동으로 나타내면서 공격적으로 변한다거나 스포츠나 일, 알코올, 포르노물로 관심을 돌린다. 강박적으로 철두철미하게 되거나 자신의 나약함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비슷한 특징이다.

성경에서는 사사 삼손을 비롯해 이스라엘의 첫 임금 사울, 선지자 엘리야 등이 ‘우울’ 인물로 등장한다. 이들은 블레셋의 지배와 지속적인 승리, 갈멜산 기적 이후 각각 우울증을 경험했다. 삼손은 기분 변화가 심했다. 사울왕은 두려움과 분노를 반복했고 자신감을 잃었다. 엘리야는 좌절과 대인기피, 자포자기 속에서 로뎀나무 밑으로 피신했다.

남성사역연구소 이의수 소장은 “남자들의 경우 방향을 잃을 때 우울해지기 쉽다”며 “목회자들은 수시로 자신의 사명과 소명을 점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 길을 걸으라 <유진 피터슨>


흙(dirt)은 그것이 제자리에 있지 않을 때에만

더럽힘의 형용사인 더러움(dirty)이 된다.




우리가 더러운(dirty)이라는 단어를 부정적인 형용사로 사용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더러운 옷, 더러운 얼굴, 더러운 손, 더러운 그릇, 더러운 술수, 더러운 생각, 더러운 책 그러나 흙(dirt)이라고 하는 것은 제자리에 있기만 하면 아무런 부정적인 함의 가없다.


예를 들어 정원이나 화분이나 채소밭에 있는 흙처럼 말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흙으로 지으셨다고 하는 창세기의 진술에는 아무런 부정적인 의미도 들어 있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다. 우리가 만들어진 흙, 그리고 우리가 돌아갈 흙은 우리의 발 아래에 있는 것과 동일한 흙이다. 이것은 우리가 창조계 전체와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며, 인간을 제외한 나머지 세상에도 존엄성을 부여해 준다.


‘흙(dirt)은 그것이 제자리에 있지 않을 때에만 

더럽힘의 형용사인 ’더러운(dirty)이 된다.


길을 나선 사람에게 기다리는 일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다. 길을 간다는 것은 목적지를 향해 간다는 뜻이다. 열심에 차 있고 결의가 굳은 여행자에게 기다리는 일이란 오로지 방해로만, 갈 길을 지연시키는 것으로만 여겨질 뿐이다. 뛰건, 산책하건, 차를 몰건, 개를 산책시키건, 길을 갈 때는 길을 가는 것이 우리가 하는 일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길을 나서겠는가?


하지만 길을 가다가 더 이상 길을 가지 못하게 되는 때가 있다. 다리가 부러진다거나, 사고 때문에 도랑에 주저앉게 된다거나, 지름길인 줄 알고 갔다가 수렁에 빠져 무력하게 갇히거나 할 수 있다


그럴 때 우리는 기다린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쾌활한 행인들이 지나가면서 우리에게 아무리 많은 격려의 말을 해준다 해도, 천국 길을 가는 우리들을 아무리 열심히 응원하면서 충고를 해주고 성경을 인용해 준다 해도(“허리띠를 띠고”, “네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인내로써...경주를 하며”), 달라지는 것은 없다. 우리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아무런 대책이 없다.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한다.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다른 사람도 우리를 위해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한다. 우리는 “깊은 곳에서”기도한다.


우리가 더러운(dirty)이라는 단어를 부정적인 형용사로 사용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더러운 옷, 더러운 얼굴, 더러운 손, 더러운 그릇, 더러운 술수, 더러운 생각, 더러운 책 그러나 흙(dirt)이라고 하는 것은 제자리에 있기만 하면 아무런 부정적인 함의 가없다.


예를 들어 정원이나 화분이나 채소밭에 있는 흙처럼 말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흙으로 지으셨다고 하는 창세기의 진술에는 아무런 부정적인 의미도 들어 있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다. 우리가 만들어진 흙, 그리고 우리가 돌아갈 흙은 우리의 발 아래에 있는 것과 동일한 흙이다. 이것은 우리가 창조계 전체와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며, 인간을 제외한 나머지 세상에도 존엄성을 부여해 준다. ‘흙(dirt)은 그것이 제자리에 있지 않을 때에만 더럽힘의 형용사인 ’더러운(dirty)이 된다.




사람마다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과 싸우는 방식은 다르다. 

사랑하는 사람은 허그(hug)원한다. 

허그로 사람은 그 사람의 품에 을 얻는다.

그러나 싸우는 사람은 클린치(clinch)를 원한다. 

클린치로 사람은 그 사람의 품에서 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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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는 날


한신대에 구약학을 가르치시던 김정준 교수님이 계셨다. 이분이 폐결핵으로 소천하기 전에 지었던 “내가 죽는 날”이라는 제목의 시는 신앙인들에게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내가 죽는 날 


그대들은 "저 좋은 낙원에 이르니" 찬송을 불러주오 

요한계시록 20장 이하를 끝까지 읽어주오

그리고 나의 묘비에는 이것을 새겨주오 

 ‘임마누엘’ 단 한 마디만을...
내가 죽는 날은 비가 와도 좋다 

그것은 나의 죽음을 상징하는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예수의 보혈로 내 죄 씻음을 받은 감격의 눈물이기 까닭에. 
내가 죽는 날은 바람이 불어도 좋다 

그것은 내 모든 이 세상 시름을 없이 하고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내 길을 준비함이기 때문에. 
내가 죽는 날은 눈이 부시도록 햇빛이 비치어도 좋다 

그것은 영광의 주님 품안에 안긴 그 얼굴의 광채를 보여줌이라. 
내가 죽는 시간은 밤이 되어도 좋다 

캄캄한 하늘이 내 죽음이라면 

 저기 빛나는 별의 광채는 새 하늘에 옮겨진 내 눈동자이어라. 
오! 내가 죽는 날 

나를 완전히 주님의 것으로 부르시는 날 

나는 이 날이 오기를 기다리노라. 
다만 주님의 뜻이라면 

이 순간에라도 닥쳐오기를 

번개와 같이 닥쳐와 번개와 함께 사라지기를. 
그 다음은 내게 묻지 말아다오 

내가 옮겨진 그 나라에서만 

내 소식 알 수 있을 터이니 

내 얼굴 볼 수 있을 터이니.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죽음은 절망의 구렁텅이가 아니라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포근한 귀향이다. 당신은 언제든 그 나라에 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세계의 분쟁은 종교분쟁에서 일어난다.

종교의 분파주의가 테러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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