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당함으로 주님을 배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에서 배신당함으로

 버림받음의 십자가의 고난을 경험했다. 



십자가의 고난은 예수님으로 채찍과 창 그리고 못박힘의 아픔으로 고통의 소리를 지르게 했지만 그러나 채찍과 창 그리고 못박힘보다 아픈것은 하나님에게 버림받고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그 아픔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울부짖는 신음을 만들었다.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27:46)

세 시쯤에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부르짖어 말씀하셨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그것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다. (마27:46, 새번역)

우리는 고난당하신 예수님을 배운다. 

이것은 예수님의 고난을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고난속에 배신과 버림받음은 가장 빠르게 주님을 배우는 길이다. 그래서 배신과 버림받음의 아픔과 고통속에서 예수님의 성품과 마음으로 참고 견디고 있다면 그것으로 주님을 배우기에 충분하다.

그 고난의 주님을 매일 같이 경험하고 사는 것.. 

그 고난의 주님이 내안에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은...

주님 내안에 내가 주님안에 있는 그 놀라운 신비속에.. 내 삶이 있다며...

어떤 버림받음도.. 어떤 배신도.. 어떤 상처도 

비록 나로하여금 고통의 울부짖음을 만들지만 

주님을 배울수 있어 감사하다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 

예수 내안에.. jesusinsid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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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대연, [칭찬인줄 알았습니다]

너 없으니까 일이 안 된다. 칭찬인 줄 알았습니다.
내가 정말 필요하고 중요한 존재라는 생각에 기분 좋았던 말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없으면 공동체가 무너질 정도로 공동체를 나에게 의존하게 만든 것은 나의 이기적 만족일 수 있습니다.

너만 있으면 된다. 칭찬인 줄 알았습니다.
내가 아주 능력이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에 어깨가 으쓱했던 말입니다. ...
하지만 이것은 독재를 하고 있다는 말일 수 있습니다.

야! 너 천재구나! 칭찬인 줄 알았습니다.
기발한 아이디어가 풍부한 똑똑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코가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사람들을 세워주지 못하고 있다는 말일 수 있습니다.

시키는 대로 잘하네! 칭찬인 줄 알았습니다.
내가 말 잘 듣고 착한 천사와 같다는 생각에 기뻤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새 생각을 하지 못하며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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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스 루카도의 <예수님처럼>


JUST LIKE JESUS


Max Lucado






(히 6:10)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딱 하루만 예수님이 당신이 된다면?


이렇게 도발적인 질문으로 이 책은 시작한다. 


 

「여기서 한 가지 모험을 하려 한다. 커다란 진리를 몇 마디로 요약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만 그래도 해보려 한다. 우리 각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열망을 한두 문장에 담을 수 있다면 아마도 이런 내용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 


그러나 그대로 두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당신이 예수님처럼 되기 원하신다.

 


“반드시 알아야 한다. 관계가 성공하는 것은 죄 있는 쪽이 벌을 받아서가 아니라 죄 없는 쪽에서 베푸는 긍휼 때문이다.”

 

당신은 이렇게 생각한 적은 없는가? 

하나님은 하나님 나름대로의 사업장?이 있고, 나도 나름대로의 사업장이 있다. 


나는 가끔씩 하나님의 사업을 도와주고 하나님도 나의 도움요청을 듣고 들어 주신다. 차마 입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종종 이러한 생각을 할 때가 있다. 하나님과 나는 전혀 다른 구역을 맡아 일하는 사업자들과 같은 것이다. 우스꽝스러운 이 표현을 신학적으로 말하면 이원론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므로 거룩한 곳에 계시고, 우리는 타락한 사람이므로 타락한 세상 속에 살아간다. 성과 속을 엄격하게 구분했던 중세적 신앙관점은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철저하게 부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안에, 우리는 하나님 안에 살아간다. 칼뱅이 주장한 대로 우리의 일터가 교회이고, 교회가 우리의 일터이다. 소명과 직업은 하나다. 


맥스 루카도는 프랭크 로바크라는 선교의 일기를 인용한다.


“1930년 1월 26일. 매 순간 하나님을 느끼고 있다. 의지의 행동이다. 지금 타자기를 두드리고 있는 이 손가락도 하나님이 인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걷는 걸음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흘러나오기 바란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삶을 원하신다. 우리의 생각, 우리의 의지, 우리의 삶, 우리의 친구, 우리의 일터, 우리의 모든 것을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와 분리되어 협력하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의 전부를 원하시는 주인이다.

 
   


우리의 종말의 삶 경험하는 삶은 바로 용서와 포용이다. 



용서는 관용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용서는 단호한 태도로 악에 이름을 붙이고 치욕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용서는 우리가 이후에 어떤 사람이 될것인가를 악으로 하여금 결정하도록 허락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이다. 서는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를 현재의 삶에서 실현하라는 명령이다. 


- 악의 문제와 하나님의 정의(톰라이트)-






“행복하기 때문에 웃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기 위해서 웃어야 한다”




15초만 박장대소해도 몸에 좋은 호르몬이 분비되어서 치매가 예방되고 수명이 연장된다는 연구결과도 발표됐다.


잘 웃는 사람의 특징 중 하나는 나누고 싶은 생각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나누면 배가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잘 웃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가두는 마음을 가져 영혼이 자유롭지 못하다.


요즈음 여기저기서 어렵다고들 아우성이지만 그럼에도 호황을 누리는 기업이 있다. 경영에 웃음을 도입한 펀(fun)경영을 하거나 펀 리더들이 경영하는 기업들이다. 어떤 기업은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신나게 춤출 수 있도록 DDR을 설치하는가 하면 사원들의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한 경영주의 노력이 행복윤활유가 되어 사원들의 사기를 높이고 있다.








 

가능하다면 깊은 대화를 나누심이 어떨까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나누는 대화에 깊이의 차이가 있을까요? 

더 깊은 대화, 덜 깊은 대화가 있을까요? 

있다면 얼마나 깊은 대화가 있을까요? 

우리는 보통 어느 수준의 대화를 나누며 살고 있는 걸까요?


 쟌 파월(John Powell)은 그의 저서 “Why Am I Afraid to Tell You Who I Am? 당신에게 내가 누구인가를 말하기를 두려워하는 이유, Argus Commmunications, 1969, pp.54-62)“에서 대화의 깊이를 다섯 등급으로 나누어 말하고 있습니다:


 제5급 대화는 표면층의 대화로서 일상적인 수준의 인사말을 가리킵니다.


 “안녕하세요? 네! 별 일 없으세요? 네! 안녕히 가세요. 네! 또 봐요. 네“ 하는 정도의 대화죠. 물론 우리의 대화는 이 표면층의 5급 대화부터 시작이 되는 것이죠. 시작이 잘 풀리면 다음 대화로 한 단계 더 깊어질 수 있는 겁니다. 살다가 보면 인사말 정도의 대화조차 나누지 않고 지낼 수도 있습니다.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죠. 대인관계의 친밀성을 누리지 못하고 사는 것이 되니까요.


 제4급 대화는 사실 보고적인 수준의 대화를 의미합니다.

 “내일은 날씨가 덥겠답니다. 아마 섭씨 30도가 넘겠다나 봐요. 오늘은 오후에 한때 소나기가 내린답니다“ 하는 대화죠. 어떤 일에 대한 사실 혹은 정보를 교환하는 대화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대화는 대개 단답형이고 간단히 끝나게 되기가 쉽습니다.


 제3급 대화는 의견교환적인 대화를 가리킵니다. 

“내일 날씨가 덥겠다니 땀 깨나 흘리겠군요. 오늘 오후에 소나기가 내린다면 우산을 준비해야 되겠네요“ 하는 대화입니다. 어떤 일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는 대화를 뜻합니다.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상대방의 의견을 들어보는 대화는 좀더 마음이 열린 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2급 대화는 감정교환적인 대화를 뜻합니다. 

기쁨, 즐거움, 슬픔, 괴로움, 분노, 사랑, 섭섭함 등의 다양한 감정을 공감하는 대화죠. 물론 한 편이 다른 편에게 자신의 감정을 일방적으로 쏟아 놓는 것은 대화라고 할 수 없습니다. 상대방이 그러한 감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공감할 때 비로소 대화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나 지금 화가 나 있어요.“

 “화가 나시다뇨?“

 “당신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셨잖아요?“

 “무슨 약속 말씀입니까?“

 “생각 안 나세요?“

 “글쎄요.“

 “아니, 오늘이 무슨 날이죠?“

 “아 - , 미안해요. 오늘이 우리 아들 음악회 하는 날인데 내가 그만 깜빡 잊고 이렇게 늦게 왔으니. 여보, 당신 화가 난 걸 알겠어요. 어서 서두릅시다.“

 

 이처럼 어느 한 편이 표현한 감정을 공감하고 그에 따른 정직한 반응을 보이는 것을 감정이 통하는 대화라고 할 수 있죠. 만일 표현된 감정을 부인하거나 반박하거나 무관심하게 대하면 그 감정은 증폭되어 스트레스가 더 많이 쌓이게 되겠죠.



 제1급 대화는 속마음 교환적인 대화입니다. 


마음 속에 간직한 미래의 꿈이나 계획, 소망, 부끄러운 일, 고민거리, 문제들까지도 스스럼 없이 나누는 대화죠. 이러한 대화를 가장 깊은 속 깊은 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로 신뢰하는 관계라야 속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사생활의 비밀을 지켜 줄 것을 서로 확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누어지는 대화가 바로 1급대화인 것이죠. 이러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를 확보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자리에서 1급대화를 일 주일에 30분 이상 나누시는 분이 얼마나 되는지 물었습니다. 손을 드신 분들이 10분의 1도 채 못 되었습니다. 대개가 인사말과 사실보고적인 대화 정도에서 머물고 있었습니다. 편안하게 의견교환을 하는 대화를 하는 사람들도 많지는 않았습니다. 감정교환적인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은 더 적었습니다.


 여러분의 대화 수준은 어떻습니까? 1급대화까지 나누며 살고 계십니까? 식당에서 일하시는 분이 자기는 손님 중에 연애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부부인지 식사하는 모습을 보면 구별이 간다고 하시더군요. 부부도 결혼생활을 얼마나 오래 했는지, 서로 사이가 좋은지 어느 정도 짐작이 간대요. 연애하는 사람들은 아기자기한 대화를 친근하게 나누는데, 결혼한 부부는 별로 말이 없이 식사만 한대나 봐요. 네, 여러분 자신의 경우는 어떠신지요? 나이 들수록 더욱 속 깊은 대화를 나누며 살아보지 않으실래요? 가능하다면 깊은 대화를 나누심이 어떨까요? 자, 오늘도 좋은 하루 만드시기 바랍니다.


(월간 <교회와신앙> 2001년 8월호)



염색

                                         ㅡ 나영자 시인 

 

주님으로 푹 물이들면 좋겠습니다

 

물감이 천에 물을 들이듯

주님으로 제가 물이 들면 좋겠습니다

 

가르치는것과 사는것 따로있고

아는 것과 행하는 것 따로 있으며

깨달음과 실천이 따로가 아니라

 

주님의 삶이 

내몸에 배어버려서

그냥 사는것이

예수님을 닮을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

 

주님의 말씀 줄줄 외우지 못해도

조리있게 진리를 변증하지 못해도

 

그냥 사는것이

말씀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주님으로

푹 물이 들어 버리면 

참 좋겠습니다.




어려움을 주신 신께 감사해야 한단다.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나 자세는
문제를 그저 어렵게만 보지 말고
헤쳐 나가야 할 도전쯤으로 받아들이는 거야.
물론 그렇게 여겨도 여전히 장애물인 것은
변함이 없겠지만 긍정적인 시선으로 볼 수 있을 거야.
그러니 매 순간 우리가 어려움을 겪도록 한
신의 섭리에 감사해야 한단다.”
- ‘어린왕자, 두 번째 이야기’에서

“어려움에 감사하라고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이어집니다.
“그럼, 왜냐하면 그런 태도나 자세가 널 성장시켜서
완벽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게 해주거든.
만약 우리 삶에 놓인 장애물을 이렇게 호의적으로 바라보면
그것들에 대해 불평하면서 허비하는 시간의 낭비도 줄이고,
더 알찬 삶을 살 수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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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부족해야 꽃이 핀다.

“물이 부족해야 땅속에 있는 물을 찾기 위해서
뿌리가 안간힘을 다해 뻗어갑니다.
그래야 꽃도 피지요.
화초가 꽃을 피우는 이유가 종자를 번식하기 위함인데
물이 부족해서 위기를 느껴야 종자를 번식할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 김용태, ‘야해야 청춘’에서

산세비에리아를 분갈이하려고 화원에 갔을 때 주인이
“화초에 물을 많이 주면 뿌리가 자라지 못합니다”라며
들려준 이야기랍니다.


결핍이 창조를 낳는다는 것은 자연과 인간사의 이치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편함을 싫어하고 편안함을 추구합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이 드문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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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과 늙음을 구별하는 법



믿음이 있으면 젊은 것이고, 의혹이 있으면 늙은 것이다.
자신감이 있으면 젊은 것이고, 두려워하면 늙은 것이다.
희망이 있다면 젊은 것이고, 절망한다면 늙은 것이다.
세월은 피부에 주름을 만들지만,
사라진 열정은 영혼에 주름을 만들다.
- 가오위엔, ‘승풍파랑’에서

철강왕 카네기와 맥아더 장군 사무실 벽에 걸려있던 내용이라고 합니다.
사무엘 울만의 청춘이라는 시에도 유사한 내용이 나옵니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기간이 아니라 마음가짐을 말합니다.
젊음과 늙음은 나이와 육체가 아닌,
열정과 희망, 호기심과 도전에 의해 구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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