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인의 등불

맹인 한 사람이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 

손에 등불을 든 채 걸어오고 있습니다.

마주 오던 한 사람이 물어 보았습니다.
앞을 볼 수 없는데 등불을 왜 들고 다닙니까?

맹인이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제게 부딪히지 않기 위해서요.

이 등불은 내가 아닌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일본의 부모들은 자녀에게 어느 장소에서든 

남에게 폐를 끼치는 행동을 하지 말라며 훈계한답니다.

미국의 부모들은 자녀에게 남에게 양보 하라고 가르친답니다.

그에 반해 한국의 부모들은 자녀에게 

절대 남에게 지지 말라고 가르친답니다.

우리에게 왜 배려와 겸손이 쉽게 자리를 잡지 못하는가를 알려주는 이야기 같습니다.



TistoryM에서 작성됨


우리의 눈앞에 벌어지는 재난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것인가를 고민해야한다. 



지금 대한민국은 집단 우울증에 빠져있다. 

지금 우리조국은 집단 트라우마에 빠져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것이라는 무념으로 달래기에는 

너무도 큰일 우리 눈앞에 벌어지고 있다.

지난 과거 우리에게 이 보다 더 큰 사건과 사고는 많았다. 


하지만.. 모두다 잊어버렸다. 

그리고 또 다시 되풀이 되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후회하고 원망하고 죄책감과 책망으로 

냄비 끊듯이 끌어 오르고 있다. 


그럼에도 그 마음이 식을까봐.. 또 그렇게 잊혀질까봐.. 또 그렇게 잊어질 즈음에 또.. 또.. 또 

일어날까봐... 불보듯 뻔한 일들을 눈앞에서 보고 있다. 




[김세형 칼럼] 세월號를 기억하자


국민은 무엇을 집단기억으로 승화시키는가. 찬란한 영광의 순간, 혹은 절대로 반복해선 안되는 치욕의 사건들이다. 


미국은 일본의 진주만 폭격이 있은 후 "진주만을 기억하라, 우리가 알라모를 기억했던 것처럼…"이란 군가를 부르며 2차 대전 참전을 결정했다. 우리는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로 시작되는 6ㆍ25의 노래를 잊지 않는다.





역사에서, 경험에서 배우지 못한 국민은 앞날이 없다. 한국은 이제 세월호(號)의 참변을 DNA에 새겨야 한다. 영국인들이 `버큰헤드호를 기억하라(remember Birkenhead)`고 162년 전의 교훈을 말하듯, 






우리도 "세월호를 기억하라"고 말해야 하겠다. 


영국 해군의 자랑이었던 버큰헤드호는 1852년 병사와 가족 630명을 태우고 항해 도중 새벽 2시에 암초와 충돌했다. 


구명정 3척은 180명밖에 구조할 수 없었고 부녀자가 130명 있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지휘자 시드니 세틴 대령은 병사들을 갑판 위에 집합시키고 한편에선 부녀자들이 안전하게 승선토록 도왔다. 구명정이 내려진 지 얼마 후 세틴을 포함한 군인 전원은 심해로 침몰해 들어갔다. 침몰 시 `여자와 어린이 먼저`의 전통은 이때부터 세워졌다고 새뮤얼 스마일스는 자조론에 썼다. 그로부터 60년 후 타이태닉호 침몰사건(1912년 4월)에서 E J 스미스 선장은 버큰헤드호의 정신을 제대로 이어받았다. 구명보트의 한계로 승객 2224명 가운데 생존자는 710명이었는데 여성 75%, 어린이 50%의 생존율을 보였다. 남성의 생존율은 17%에 불과했다. 승객들이 무질서하려 할 때 "영국인다워라(Be British)"고 한 스미스 선장의 말은 그의 묘지 청동상에 기록돼 있다. 


세월호 참사를 두고 하인리히법칙을 운위하는 사람들이 많다. 중상자 1명이 나오면 가볍게 다친 사람이 29명이고 부상을 당할 뻔한 아찔한 순간을 당한 사람이 300명이나 된다는 1대29대300의 법칙이다. 요컨대 사고가 나려면 그전에 그런 조짐이 무수히 보인다는 얘기다. 세월호야말로 오늘의 참사를 예견한 전조가 한 다발도 넘는다.


20년 된 고물선을 왜 증축하게 해서 배가 균형을 잃도록 당국이 눈감았으며, 권장해역을 두고 물살이 급한 맹골수도를 1~2등 항해사가 운항하지 않았고, 막상 사고가 나고 장관→청와대 보고까지 39분이나 걸려 황금의 시간을 놓치게 했느냔 말이다. 돈벌레 같은 청해진해운 같은 회사에 왜 영업권을 줬는지 알 수 없다. 그 모든 어른들의 해이와 비겁함이 250명 이상 미성년 고등학생을 죽게 했다. 책임감 있는 선장, 일본의 해상보안청 같은 지휘체계만 있었더라도 한 명도 안 죽었을 수도 있다. 배가 뒤집힌 채 하늘이 준 마지막 시간, 140분간 한국의 집단지성, 창조정신은 죽었다.


큰 사고 하나 터지니 한국의 속살이 훤히 드러나 CNN 등은 한국을 마음껏 비웃었다. 한국의 후진적 관행, 선장은 악마 그런 말을 썼는데 사실은 한국은 3류로 디스카운트하란 말이나 진배없다. 스미스 선장의 말을 풍자해 `Be Korean!`이란 신조어가 나오지 않은 게 다행이다. 한국엔 그동안 대형사고가 꽤 많았다. 삼풍백화점 붕괴(501명 사망ㆍ1995년), 대구지하철 참사(192명 사망ㆍ2003년), 위도 훼리호 참사(292명 사망ㆍ1993년), 성수대교 붕괴 등등.


화성 씨랜드 참사에서 아이를 잃은 충격에 국가훈장을 반납하고 뉴질랜드로 이민을 떠난 김순덕 씨의 아픔을 기억하는가. 우리는 정신을 못 차렸다. 세월은 시간과 시간의 흐름을 합친 묘한 말이다. 세월이 흐르면 세월호 사건은 일단락될 것이다. 그 후 정신 차려 국가 소프트웨어를 개조하지 않으면 또 재앙은 시간을 두고 찾아올 것이다. 애달픈 고등학생 수백 명의 영혼을 헛되지 않게 하자. 세월호를 기억하자. 세월호를 잊지 말자.




디트리히 본회퍼의 기도와 고백


본회퍼는 독일 루터교회의 목사이자 신학자이며 반나치운동가였다. 히틀러를 암살하기 위한 첩보국에 관여를 하다가 발각되어 핍박을 받고 처형당한 목사로 알려져있다. 

그가 베를릴 신학교 학부를 졸업할 때 쓴 졸업 논문 ‘성도의 교제’ (communio sanctorum) 를 칼 바르트가 극찬했을 정도로 그는 순교자이기 이전에 탁월한 신학자였다. 

오늘날까지도 전문적인 신학과 철학 교육을 받지 못한 대부분의 평신도들 뿐 아니라 목사들까지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덴마크의 기독교 사상가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이 죄에 대한 회개 없이 용서받을 수 있다는 값싼 은혜를 독일 교회에 가져왔음을 그의 저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에서 비판한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 라인홀트 니버가 유니온 신학교에 그를 위한 교수자리를 마련해 놓고 미국으로의 망명을 권유했지만, 그는 독일 국민들과 고난을 함께 하지 않는다면, 전쟁이 끝났을 때 독일교회를 재건하는 일에 동참할 수 없다면서 이를 거부한 일화는 그의 됨됨이를 잘 보여준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시작이다’ 라는 유언을 남기고 히틀러가 직접내린 사형명령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본회퍼의 기도문은 가슴을 찡하게 한다. 

예수를 따르기 위해 마땅히 고난의 길을 걸었고, 연약한 육신의 몸을 입었지만 예수만을 의지하며 박해의 시기에 모범이 되었다.

 그가 처형당한지 한달도 되지 않아 2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렸음을 생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그는 독일교회가 히틀러를 그리스도로 숭배하고 있을 때 

홀로 목소리를 낸 순교자라는 점에서 일제시대 때 기독교가 신사참배를 강요당하자 많은 목사들이 타협, 신사참배를 하고있을 때, 홀로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온갖 고문을 다 받고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님을 닮았다. 그는 진정으로 이 땅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을 소망한 그리스도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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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리히 본회퍼 기도

모든 존재의 근원이신 당신 앞에 죄인 된 몸으로 우리가 섰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등졌습니다. 큰 거짓이 머리 드는 것을 보면서 

진실을 영예롭게 하지 않았습니다.


형제들의 절박한 처지를 보면서 자신의 안전만을 두려워했습니다.
모든 자비의 근원이신 당신 앞에 죄를 고백하며 우리가 섰습니다.

무서운 시절의 소란이 끝나면, 우리에게 확신의 시절을 주소서.
이 오랜 어둠 속 방황이 끝나면, 

우리로 하여금 밝은 햇빛 아래로 걷게 하소서.


거짓의 굽은 길이 끝나면, 우리에게 당신 말씀의 길을 열어주소서.
그리고 당신께서 우리의 범죄를 씻어주실 때까지, 

우리로 하여금, 주여, 견디게 하소서.

오, 하느님, 이른 새벽 제가 당신을 바라고 웁니다.
저를 도와주시어 기도하게 하시고 오직 당신만을 생각하게 하소서.
혼자서는 기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제 안에는 어둠이 있지만 당신과 함께, 거기엔 빛이 있습니다.
저는 혼자지만 당신은 저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제 가슴은 연약하지만 당신은 언제나 강하십니다.
저는 쉬지를 못하지만 당신 안에는 평안이 있습니다.


제 안에는 고통이 있지만 당신 안에는 인내가 있습니다.
당신의 길을 저는 알 수 없지만 

제가 가야 할 길을 당신은 아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 당신은 저처럼 가난하셨고 비천하셨고,
저처럼 체포당하여 친구들로부터 격리되셨습니다.


당신은 인간의 모든 비통함을 아십니다.
제 안에, 저의 고독 안에 당신이 계십니다.


당신은 저를 잊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저를 찾아내십니다.
제가 당신을 알고 사랑하기를 당신은 간절히 바라십니다.
주님, 당신의 부르는 소리를 듣고, 제가 당신을 따라갑니다.

거룩하신 성령님, 절망에서 지켜줄 믿음을 저에게 주소서.
당신과 다른 모든 이들을 향한 사랑을 제 속에 담아주시어
그 어떤 증오에도 고통에도 오염되지 않게 하소서.
두려움에서 건져줄 믿음을 저에게 주소서.

오, 주 하느님, 크나큰 곤경이 저를 덮쳤습니다.
걱정 근심이 저를 삼켰고, 저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오, 하느님, 저를 위로하시고 도와주소서.
당신이 주시는 것들을 견뎌내도록 저에게 힘을 주소서.
두려움이 저를 다스리지 못하게 하소서.


사랑 많으신 아버지로서, 

저의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돌봐주소서.

오, 자비로우신 하느님, 당신께 그리고 이웃들에게 

저지른 저의 모든 죄를 용서하소서.


당신의 은총을 믿어 의지하고 제 생명을 온전히

 당신 손에 맡깁니다.


당신께서 가장 좋으신 대로 저에게 하소서. 

그것이 저에게도 가장 좋겠기 때문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저는 당신과 함께 있고 당신은 저와 함께 계십니다.
주님, 저는 당신의 구원과 당신의 왕국을 기다립니다.

- 디트리히 본회퍼 -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가끔 나더러 말하기를 
감방에서 나오는 나의 모습이 
어찌나 온화하고 명랑하며 확고한지 
마치 자기 성곽에서 나오는 영주 같다는데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또 나에게 말하기를 
감시원과 말하는 나의 모습이 
어찌나 자유롭고 칠절하고 분명한지 
마치 내가 그들의 상전과 같다는데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또 나에게 말하기를 
불우한 날들을 참고 지내는 나의 모습이 
어찌나 평온하게 웃으며 당당한지 
마치 승리만을 아는 투사와 같다는데 

남의 말의 내가 참 나인가? 
아니면 나 스스로 아는 내가 참 나인가? 
새장에 가친 새처럼 불안하고 그리워하며 약한 나, 
목에 졸린 사람처럼 살고 싶어 몸부림치는 나. 

빛과 꽃과 새소리에 주리고 
친절한 말 따뜻한 말동무에 목말라 하고 
석방의 날을 안타깝게 기다리다 지친 나, 
친구의 신변을 염려하다 지쳤다. 

이제는 기도에도 생각과 일에도 지쳐 공허하게 된 나, 
지쳐 이 모든 것에 안녕이라고 말할 준비가 된 나,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나인가? 
오늘은 이 사람이고 내일은 저 사람인가? 
아니면 이 둘이 동시에 나인가? 

남 앞에선 위선자, 
자신 앞에선 비열하게 슬픔에 찬 약한 나인가? 
아니면, 이미 성취된 승리 앞에서 혼란하여 
퇴각하는 패잔병과 같은 것이 내안에 이직도 있단 말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의 이 적막한 질문이 나를 희롱한다. 
하지만 내가 누구이든, 오 하나님!, 당신은 아십니다. 
나는 당신의 것임을!

값싼 은혜 – 디트리히 본회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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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싼 은혜는 우리 교회의 치명적인 적이다.
오늘 우리의 싸움은 값비싼 은혜를 얻기 위한 싸움이다.
값싼 은혜는 싸구려 은혜, 헐값의 용서,헐값의 위로,헐값의 성만찬이다.
그것은 교회의 무진장한 저장고에서 몰지각한 손으로 생각없이 무한정 쏟아내는 은혜이다.

(중략)교훈과 원리의 체계도 값싼 은혜이다.
(중략)죄를 뉘우치지 않고 죄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지도 않으면서,
세상은 자신의 죄를 감싸줄 값싼 커버를 값싼 은혜에서 얻는다.

값싼 은혜는 하나님의 생생한 말씀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부정한다.
값싼 은혜는 죄인을 의롭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의롭다고 하는 것이다.
은혜가 홀로 모든 것을 알아서 처리해줄 테니 모든 것이 케케묵은 상태로 있어도 된다는 것이다.

(중략)값싼 은혜는 우리가 스스로 취한 은혜에 불과하다.
싸구려 은혜는 그리스도를 본받음이 없는 은혜, 십자가 없는 은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곧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은혜에 불과하다.






십자가의 도와 약함4 (김도현교수)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 20:19-23)

[요 20:1-23]
(요 20:1)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요 20:2)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요 20: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요 20: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요 20:5)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요 20:6)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요 20: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요 20: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요 20:9)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요 20:10)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요 20: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요 20: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요 20: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요 20: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요 20: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요 20: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요 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요 20: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요 20: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 20: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요 20: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 20: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요 20: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십자가의 도와 약함은 우리의 교회생활에서 가장 먼저 드러나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십자가의 도와 약함이 가장 많이 드러나는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선교적 교회이다.
선교많이 하는 교회의 의미가 아니라 교회의 본질에 대한 것이다.

부활의 주님은 보내시는 일을 하신다.

교회는 무슨일을 하느냐보다 교회가 무엇인가에 집중해야합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7가지 특징



1/ 교회는 < 소통하는 공동체 >가 되어야 한다.

 안식후 첫날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숨어있었다. 

세상과 단절해 있었습니다. 교회는 세상과 소통하는 공동체이다. 세상을 잘 알아야한다. 그러나 세상에 동화될것 같아서 크리스챤 게토가 만들어지고 단절하는 쉬운 방법를 선택한다. 

우리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 
그러나 사랑만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다.

우리가 세상과 소통하는 이유는 세상이 좋아서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이다.

제자들 가운데 부활의 주님을 직접 만난 제자가 많지 않았기에 문을 잠그고 두려움때문에 숨어있었다.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

제자들에게 홀현이 나타나서 그들 가운데 서계신다. 

자신의 상처받은 모습을 보여주시는 주님... 너희 의 두려움 내가 다 안다..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부활이 머리로 이해되어지는 지식이 아니라 실존적인 진리로 이해되어지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삶에 인카운터 되어야한다.

2/ 교회는 < 예수님 중심 공동체 >가 되어야한다. 

예수님께서 핵심가치가 되어야한다. 
예수님의 섬김의 마음과 행동이 선교적 교회의 가치이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이 누릴수 있는 것을 기꺼이 내려놓는것이다.

예수님은 상처를 드러내시고 약함을 드러내셨습니다.

3/ 교회는 <예배공동체>가 되어야한다.

선교적 공동체는 부활의 기쁨으로 가득차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예배공동체이다.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했기에 오는 기쁨이 오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손바닥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면



4/ 교회는 <평강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강을 주셨다. 
평강은 두려움의 반대말이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부활을 경험할때 우리의 미래가 보장된 사람이라는 것을 확증하는 것이다.

부활의 완전함. 승리하신 주님이 주시는 강력한 무기이다. 
부활의 주신 주님이 주시는 평강을 받아야한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이 주시는 이 평강이 이다. 

평강을 받는 이유는 이 평강 곧 샬롬을 세상에 퍼트려야합니다.
평강은 복과 관련이 있다.

창세기 1장 28절에 <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 >, 풍성하고 열매맺는 삶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복이다. 그러나 창세기 3장이후에 저주아래서 열매맺지 못하고 결핍이 생기고 분리되어 하나님을 벗어난 삶을 살게 되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주신 복을 회복하고 모든 민족에게 주고자 하나님의 약속이다.

복음이 선포될때마다 평강이 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 : 
부활하신 주님이 두려움속에 있는 제자들에게 평강을 주시고 보내신다.



5/ 교회는 < 보내시는 공동체 >가 되어야한다.

하나님은 부르시고 보내시는 분이시다. 제자들과 선지자들을 보내시고.. 

마지막에 예수님을 보내심을 받았다. 다른 언어 다른 문화를 건너서 보내심을 받았다. 말씀이시지만 육신을 입고 오셨다.

제자들을 보내셨다. 제자들이 바로 교회이다. 교회는 세상으로 보내시는 하나님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위로 부터 거듭남을 경험한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하나님의 나라 가 임하옵소서..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하나님의 통치이다. 
선교적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땅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선교적 교회의 기본은 교회 자체가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은 것이다. 교회는 이 지역과 커뮤니티로 보내신것이다. 하나님이 보내시고 본냄을 받았다.

6/ 교회는 < 성령의 공동체 >가 되어야 한다.

 숨을 내시면서 성령을 받으라 하신다.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는 것이다. 성령충만은 절대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공동체적으로 이해해야한다. 
성령충만한 공동체가 먼저이지 성령충만한 개인이 먼저가 아니다.

각 개인이 성령충만해야만 교회가 성령충만한것이 아니다. 교회가 성령충만해야 개인이 성령충만할수 있다.

7/ 교회는 < 용서의 공동체 >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개인의 죄사함을 경험하는 공동체이다. 
구약시대에 성전에서 제사와 제사장을 통해서 죄사함을 경험할수 있었다. 그러나 제사와 제사장의 타락으로 새로운 방법으로 죄사함이 이루어지도록하셨다. 

교회가 바로 이러한 책임을 주어졌다.

성령을 받은 교회가 죄를 용서하는 특권과 책임이 주어졌다. 

죄를 용서하는 특권을 주신것은 서로 용서하는 것을 실천하도록 하게 하셨다.




선교사님의 전기 : 서서평의 선교사의 전기



독일계 미국 선교사 엘리자베스 샤핑이다.

조선에 도착하게 된다. 6살때 어려서 부터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주했다.
 대학때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면서 선교사로 헌신하게 된다. 
자신의 삶을 선교사로 헌신하면서.. 

<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겠다. 되도록이면 가장 어려운 곳으로 가겠다 > 결정했다.

그러나 카톨릭 신자인 어머님이 극심한 반대를 했다. 모녀의 연이 끊어졌다. 

훌륭한 간호사가되었다. 32살에 처녀에 몸으로 조선으로 오셨다. 여성 500명중에 이름이 있는 사람은 몇명이되지 않았다. 

조선이 가난한자를 돌볼 힘이 없는 나라. 나병한자 환자들을, 소박받아 버림 받은 미망인, 버림받은 어린아이, 고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

그가 남기 삶.. 풍토병 영양실조 그리고 자신의  간호하던 사람의 병을 받았다

침대 앞에 좌우명
<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 not success but service>

교회가 깨달아야하는 말이다.


[시 116:12-14]
(시 116:12)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시 116:13)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시 116:14)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는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주님이 베푸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그런 교회가 되게 하소서








십자가의 도와 약함 3 (김도현교수)
약함의 신학 (고후 12:1-10)



[고후 12:1-10]
(고후 12: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고후 12: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고후 12: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고후 12: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고후 12: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고후 12:6)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고후 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12: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고후 12: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 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그 십자의 도에 드러나는 약함에 대해서 나누고자합니다. 

사도바울의 영적 경험에 대해서 부득불 드러낸다..  

특별히 < 자랑한다 > 는 단어를 사용하는 바울 
11장 -12장에 15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 자랑함에 대한 문화적인 배경 > 

- 고린도 교회인들의 문제들 때문에 < 자랑한다 >는 용어를 일부러 사용하는 것 같다. 그 당시에 로마시대에 자랑할것을 자랑하는 것은 일반적인 문화였다. 지식인들 고위 관리들은 전부다 이룬것에 대해서 <레이스게스타이> 자신이 자랑할것들을 적어서 가져 다닌다.


- 아이구스도의 업적을 자랑하는 대표적인 <레이스 게스타이>를 가지고 있었다. 로마시대의 고관들은 자신의 자랑할것을 기록하고 있다. 일종의 이력서이다. 


- 고린도 전후의 기록당시에 이 교회를 시작했던 바울에 대한 의심이 있었다.  이사람이 진정한 사도인가? 이 사람의 이력서가 형편이 없다.

 왜 도데체 이사람은 자랑할것인 없는 사람이 아닌가? 


바울은 자랑할것이 많은데 안하고 있을 뿐이다. 


고린도 후서 11장 18절 


바울의 레이스 게스타이가 나온다.  새번역으로 읽으면 더 의미가 살아난다.  


많은 사람이 육신의 일을 가지고 자랑하니, 나도 자랑해 보겠습니다. (고후11:18, 새번역)


바울은 자랑한다면 나의 고난과 약점들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이상한 자랑을 하고 있다. 


바울이 자랑하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절대로 자랑할수 없는 것을 자랑하고 있다.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능력의 사도라면 

하는 일마다 잘되어야한다. 그리고 가는 길마다 형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일이 잘될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고린도 교회였으나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이 잘 안되었다. 


위험. 고생, 고난, 핍박, 희생, 아픔, 파산 


무엇을 자랑하느냐 ? 나의 약점들을 자랑한다. 

사람들이 자랑할수 없는 것들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32-33절은 그 당시에 문화로는 충격적인 이야기이며 치욕적인 이야기이다. 


성안에서 광주리를 타고 탈출했다. 


그 당시 고린도 교인들의 원하는 상이 있다. 가장 명예로운 것은 <코로나 무랄리스>라는 관을 받게 된다. 전쟁을 할때 적군의 성에 가장 먼저올라간 사람이 이 관을 받게 되어 있다. 



거꾸로 내려가는 삶이란? 어이가 없는 것이다. 

너무나 창피하게 수치스러운 일이다. 


코로나 모랄레스의 정반대를 말하고 있다. 

자기의 약점을 자랑하고 있다고. 

영웅이 아닌 약하디 약한 삶을 도전하고 있다. 


오늘 한국에 스펙 / 논문 표절 / 학위 위조 / 가짜 논문 / 자신의 체면 / 명예를 높이려하는 것이 현실이다. 


자신의 실패를 이력서에 적어두는 사람이 없다. 


다 양반이고 왕족이었다. 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조선시대에 양반계급은 5-10%이다. 대부부은 상민, 중인. 노비 백성이다. 그러나 오늘은 모두다 양반이다. 확실한 신분 세탁이 된것이다. 


옛날의 조상이 뭐했는지 조용히 말하지 않고  다 양반이라고 말한다. 


바울의 정말로 이상한 이력서를 자랑하는 것이다. 

자신의 약점을 기록하고 있다. 

자신의 연약한 능력을 자랑하고 있다. 그 자신의 잘못된것을 기록하고 있다. 



바울은 그당시의 문화와 정반대로 갔다. 


12장 1절에 가면 고린도 교인들이 그렇게 듣고 싶은 자기 자랑이 나오는줄 알았을 것이다. 


14년전에 일어난 일에 대한 것...

바울은 그 경험 자체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다.


6절에 말할길.. 그것을 제 3자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다. 

그 사람을 자랑하려고 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약점만을 자랑하고 있다. 


사도로써의 자격을 있지만 자신의 환상으로 자기를 자랑을 삼지 않겠다..


바울이 그리스도인으로 삶과 행동에 십자가가 보이는가? 

그것으로 사도임으로 증명하고 싶다. 


유대인들은 하늘이 7층으로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바울은 3째 하늘에서 다녀왔다. 

이 체험이 자기 자랑꺼리로 삼지 않겠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십자가가 보이는가? 

드러나고 있는가를 통해서 자신의 누구인지? 증명하고시자 한다. 



<고린도 교회 당시의 배경 > 


고린도시 : 항구도시, 사창지대, 윤리적 타락, 신전의 창녀들이 많았다. 

고린도 인같이 행동한다는 말은 성적인 표현이다. 

하지만 그러한 육적인 문화속에서 영적인 경험을 추구했다. 

영적이면서 세속적인 모순적인 이원론적인 삶이었다. 

육체적으로 죄를 지었지만 영적인것만 좋으면 된다. 


그래서 십자가를 영혼구원의 방법으로만 사용한다. 

십자가는 행위와 관련된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민목회는 사랑, 위로가 필요하다. 어려운 이야기 하지말고 위로해야한다. 맞는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베이비 시팅하는 것처럼 생각해야한다. 


한국에서 지위와 명예가 있었지만... 미국에서 노동하는 사람이 되었다.

미국에서 양복입고 대접좀 받으려고 한다. 대접해주고 위로해주어한다. 

성숙해져서 다른 사람을 섬기겠지.. 라고 생각한다. 


이민교회가 사랑과 위로는 전했을지 몰라도 십자가의 도를 가르치지 않았다. 


현실을 부정하고 좋은 일만 일어날 거라고 가르쳤다. 


- 이민교회는 어린아이 투정 집합소를 만들어 놓았다.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행위의 열매가 나타나야한다. 


너희는 믿음안에 있는가 너희를 시험하고 확증해보라. .... 


미래의 완성될 구원으로 가고 있는지 테스트 해보라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와 함께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고 있는가?


- 예수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있는 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께 버림 받은 사람이다... 

   여기서 너희는 < 복수 >이다. 


- 가나안 성도 : 안나가 성도 / 200만명은 가나안 성도라고 생각한다. 

                       교회를 나가지 않은 상태로 신앙생활하겠다. 


- 교회 공동체에 속해 있지 않으면 자기의 믿음을 시험해보고 확증할 방법이 없다. 내가 고백하는 믿음이 이 공동체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알수 있다. 


- 나의 삶속에 세상의 기준으로 인정받는 것으로 가득한지? 아니면 하나님의 기준으로 인정받는 것으로 가득한지?


무엇이 자랑되고 있는가?


사도 바울은 약점만을 자랑하고 싶어한다. 

고린도의 오해를 풀어내고 싶어한다.

자신의 영적 경험이 자만하게 만들고 교만하게 만들었다. 


 바울이 어떤 가시를 가지고 있는지? 


- 자신의 가시가 있다. 가시는 고문도구이다. 

   양쪽이 재법긴 도구이다. 사도바울은 <가시:스톨롭스>가 있다고 말한다.

 

- 무엇인지는 알수 없지만..  사도 바울을 계속 고통받게하는 것이다. 

   어떻게 사도가 되어서 저런 가시와 약점을 지닌 사람인가?



우리의 가시는 가장 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것이다. 그것을 컨트롤하고 싶지만 그렇게 되지 못한다. 그래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듯 외면하며 살아간다. 

결혼생활, 단절된 관계. 부서진 관계, 어쩔수 없는 자녀, 육체적인 어려움, 가족중에 겪고 있는것, 자녀들이 겪고 있는것, 깊은 우울증. 패배감, 나혼자 밖에 없다는 깊은 외로움 


우리의 삶의 이러한 가시가 있다. 



크레익 반스 목사님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를 이야기했다. 

자신의 삶의 가시에 대해서 이야기...30여년의 아픔


하나님의 우리 가족의 상처를 통해 

내가 어떤 사역을 해야할지?를 결정하셨다. 


brokenness 드러내는 것...


왜? 바울이 사도이면 고난을 많이 받느냐? 

왜 이렇게 약점이 많고 자랑할것이 없느냐 ? 


가시를 위해 3번 간구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 3번 기도... 오랜기간동아 필사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했다. 바울은 이 가시를 없애다라고 필사적으로 기도했다. 


고린도 교인들이 기대했던것은 < 기도했더니 가시가 없어졌다 >는 그 말을 듣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간증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랜 기간 응답하지 않고 가시는 그대로 남아있고... 

바울을 혼돈스럽고 아쉬울 것이다.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해 보신적인 있나요?

아무 응답도 없으신 하나님의 침묵.... 


마침내 하나님은 바울에 응답하십니다. 

< 내 은혜가 족하다 > 이미 받은 은혜로 충분하다. 라고 말씀하신다.


은혜는 우리의 삶속에 끊임없이 같이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은혜는 우리의 삶속에 있다.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와 좋으심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단순히 죄용서만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삶속에 머물고 계심을 경험하는 것이다. 


바울의 능력이나 강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함이 나타났다. 


< 2세기 바울의 외모 >


 바울은 키가 작고 머리가 벗겨졌고 다리는 휘었고 눈섭이 연결되어 있고 코는 휘었으며.... 그러나 은혜가 충만했더라.... 


그의 삶속에 얼마나 은혜가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능력이 아닌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곳에 있었다. 


가시를 제거함으로 사람의 능력을 나타날수 있어지만 

그러나 가시가 그대로 있음으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났다. 

하나님의 약함 속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게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게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장막을 치게 하려 함이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안에 거하게 ... 

이것은 장막을 치는 것.. 임재와 같이 하심을 의미한다. 


장막중에서 계서서 이스라엘 가운데 계신것처럼... 

약함으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바울의 몸안에 텐트를 치는 것입니다. 


바울의 진리는 이세상의 상식과 벗어나는 것이다. 

이 세상의 파워를 가져야 능력을 행할수 있다고 생각한다. 


< 꼬리가 되지 말게 하시고 머리가 되게 하소서.>

경쟁에서 이겨야한다. 높은 지위에 올라야한다. 그렇게 가르친다. 


병이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사도바울은 오히려 정반대라고 말한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정반대이다. 

세상의 진리가 고린도교회를 사로잡았다. 

세상의 문화와 원리가 < 자랑, 힘, 권력의 문화 >가 지배하고 있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약함속에서 완전해진다. 

우리의 가시를 통해서 그것을 알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다. 



<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도전과 적용 > 


1) 우리가 우리의 가시를 끌어안아야한다. 


 가시를 own 하는 삶이다. 그 약함으로 하나님께 완전히 복종되고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안에 장막치게 하는 것이다. 그 어려운 환경에 벗어나려고만 하지 말고 그것을 끌어 안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해야한다. 


오히려 어려움과 약함가운데 하나님께 드리고 복종하는 것이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의 삶속에 나타난다. 새로운 관점을 받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장막치는 것이다. 


교회는 가시를 안고 가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약하고 부서지고 상한 이들이 모이는 곳이어야한다.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것은 부서진 죄인들이 모인 교회가 되어야한다. 약함을 자랑하는 교회가 되어야한다. 이세상은 자신의 약함을 감추려고 강한척하려합니다. 이 세상은 온갖 허위로 치장합니다. 그뒤에 숨어지냅니다. 


우리의 복음은 예수님께서 거짓없이 드러내셨기에 주님이 발가벗기워 져야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더 솔직해져야한다. 

여러가지 모양으로 치장하지 않고 가식이 없도록 약해져야한다. 

약함을 자랑해야합니다.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납니다. 


상처받은 사람이 치유받으려면 약한사람이 치유할수 있습니다. 


헨리나우웬 / 존베인 / 

상처가 있는 분들이 공동체의 뿌리의 역할을 한다. 

상처가 많은 분들이 공동체의 뿌리 입니다. 


상처와 약한 사람을 돌보아야하는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약함을 드러내는 사람이다. 

Wounded Healer 가 될수 있습니다. 


약함을 드려내고 안심하고 자랑하는 교회가 되어야한다. 

자기의 강함을 자랑하는 교회가 아니다. 



2/하나님의 은혜가 흘러가야한다. 

  은혜가 유통되는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은혜가 넘치는 통로가 되어야한다. 


은혜가 들어가긴 가는데 거기만 가며 꽉막히는 것이 문제이다.
은혜가 흘러넘치는
  통로가 되어야합니다. 


받은 은혜가 다른 사람에 흘러가는 통로인가 ? 막다른 골목인가?


물이 바다 덮은 같이 흘러 넘쳐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가시들에 대해서 너무도 잘 안신다. 예수님은 가시관을 쓰셨기에... 우리의 가시를 하나 하나 뽑아서 이미 그 고통을 겼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족합니다. 

이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를 충분히 받았습 니다. 우리의 고통과 약함속에서 그 고통에서 벗어나느것보다 지금 일어나느 일들이 이 약함이 하나님의 창조한 목적 가운데 한 부분으로 이루고 있다는 확신입니다. 


이 세상은 이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비웃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원리가 가능한지 이미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약함 끌어안고 하나님 찬양하면 나아가십시다. 

진정 강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합시다. 








십자가의 도와 약함2 (김도현교수)

십자가의 의미 (롬 5:8)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십자가의 의미 : 하나님의 사랑 / 하나님의 정의 / 하나님의 승리

왜 ? 십자가가 의미있는가 ? 

기독교는 죽음의 의미에 대해 관심이 있다.
왜 ? 죽었는가를 강조한다.


1/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것이다.

- 확증하셨느니라 ? 현재형이다<  확증하고 있습니다 >
- 아직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 ....
- 우리의 죄가 무엇인가?
성경에서 죄는 우리의 행위보다는 관계와 연관 되어있다. 
그 관계를 끊고 다른 어떤 주인에게 갔다.

- 주인을 바꿔버림으로 다른 주인의 속성을 따르게 되었다. 
  우리맘이 아닌 그 주인의 뜻에 의해서 살도록 ...,

- 로마서에서 하마르티아( 죄)는 The Sin / 죄를 존재같이 설명함 / 하나님되신 다른 존재에 속해있다 사람은 항상 누군가에 속해있다
절대로 중립적일수 없다

존재와 결정 선택을 하는 삶
하나님은 우리를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우리를 자유케하는 것 ...,

- 누군가 자기의 죄값을 치룰 필요가 없는 분이 그것을 치루어야했다. 
- 죄가 요구하는 대로 예수그리스도께서 담당하셨다. 
- 하나님의 사랑은 행동으로 일어나고 과거의 한번 이루어진것 뿐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확증되어지는 것이다.



2/ 십자가는 하나님의 정의를 의미한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어떤분인가를 드러낸다.

하나님의 character 가 드러내는데 바로 하나님의 정의를 드러낸다.

•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나타남 : 하나님이 세운 율법을 예수를 통해 새언약으로 바꾸고 자신이 세우신 원리를 지키셨다. 



3/ 십자가는 하나님의 승리를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써 악의 세력을 물리치셨다.

- 이 세상은 악의 원리에 의해 사는 것이다. 이 세상의 정보들이 in put 하고 있다.

- 십자가의 원리는 그것을 뒤집어 엎는다.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악의 원리가 이기는 것 같지만 정세와 권세를 무장해제 시키셔서.. 승리하신 사건이 바로 십자가이다. 부활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 이 말씀을 통한 우리의 적용 > 

•십자가의 사랑 : 용납과 용서 / 행동

십자가의 정의 : 불의와 같이 갈수없다. 불의와 타협할게 없다

나라가 임하옵시며 ... 거기에 갈 생각만 합니다.그러나 우리가 원해야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경험되어지는 것이다. 

•십자가의 승리 : 패배감에 젖어 있을수 없음

< 계시록 5: 15 > 이 노래가 우리의 노래가 되도록 

12 그들은 큰 소리로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권세와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하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13 나는 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와 바다에 있는 모든 피조물과, 또 그들 가운데 있는 만물이, 이런 말로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분과 어린 양께서는 찬양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영원무궁 하도록 받으십시오."
14 그러자 네 생물은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서 경배하였습니다.
(계5:12-14, 새번역)












십자가의 도와 약함1 (김도현교수)  
< 십자가의 도 (고전 1:18-30) >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하이델 베르크 교리문답의 제 1조항이 생각납니다. 


하이델베르크 제 1조 항

우리의 위로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요,​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 회개는 골방에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 자리에서 가던길를 돌이키는 것이다. 메타노이라 (μετάνοια)라는 말은 익숙하게 가는 

삶의 자리에서 돌이키는것. 돌아서는 것을 말한다.


< 아모스 8장 11절 - 14절 >
11 그 날이 온다. 나 주 하나님이 하는 말이다. 내가 이 땅에 기근을 보내겠다. 사람들이 배고파 하겠지만, 그것은 밥이 없어서 겪는 배고픔이 아니다. 사람들이 목말라 하겠지만, 그것은 물이 없어서 겪는 목마름이 아니다. 주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서, 사람들이 굶주리고 목말라 할 것이다.
12 그 때에는 사람들이 주의 말씀을 찾으려고 이 바다에서 저 바다로 헤매고, 북쪽에서 동쪽으로 떠돌아다녀도, 그 말씀을 찾지 못할 것이다.
13 그 날에는 아름다운 처녀들과 젊은 총각들이 목이 말라서 지쳐 쓰러질 것이다.
14 사마리아의 부끄러운 우상을 의지하고 맹세하는 자들, '단아, 너의 신이 살아 있다', '브엘세바야, 너의 신이 살아 있다' 하고 맹세하는 자들은 쓰러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암8:11-14, 새번역)

•오늘 시대의 문제는 < 긍정의 복음 / 풍요신학 >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 본훼퍼는 독일교회의 심각한 문제를 지적하면서 " 독일교회는 값싼은혜를 구하는 것이 문제이다 "라고 지적했다. 긍정의 복음이 독일교회를 망쳤다. 
독일사회는 무기력함에 빠졌있었고 독일 교회는 값싼은혜만 구했다. 

  • 값싼은혜 : 감정에 호소한 은혜 / 축복을 외침 / 사람들이 듣기원하는 말씀 /

                      세상에 즐길것이 많다. 그것을 즐기기 위한 복음이 외쳤다. 




우리는 이러한 독일교회의 지나온 실패와 문제를 
오늘 우리 이민교회와 한국교회에서 그대로 보고 있다는 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이다

우리는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용도가 무엇인가?

고민하고 다시 묵상해야할 때이다. 


십자가의 용도는 죄사함에 받는것로 끝나지 않고 
그것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말해준다.


•십자가의 도는 < 십자가의 원리 >를 말한다. 

고전 1:18 :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이다.

•영적인 비법이란? 좋은 삶을 누리는 것. 향상된 삶의 원리 ( 고린도교회의 원함) 이라고 생각한다. 

• 고린교회 교인들은 십자가는 구원받는 용도로 끝났고 그들이 원하는 것은 지혜로 삶이 향상되는 것으로 원했다. 이것이 그들을 잘못된 십자가와 값싼은혜와 같은 것을 만들어 냈다. 

•구원 문제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구원이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것과 구원과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하다.

•십자가는 계속 우리에 필요한 나의 밖에 일어난 사실이며 
내 안에 일어나는 경험이다.

•이사야서 29장 인용 : 유다에 대한 메시지

<이사야 29:13-14절>
13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고, 입술로는 나를 영화롭게 하지만, 그 마음으로는 나를 멀리하고 있다. 그들이 나를 경외한다는 말은, 다만, 들은 말을 흉내내는 것일 뿐이다.
14 그러므로 내가 다시 한 번 놀랍고 기이한 일로 이 백성을 놀라게 할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들에게서 지혜가 없어지고, 총명한 사람들에게서 총명이 사라질 것이다. (사29:13-14, 새번역)


하나님을 믿었더니 ..... 좋은 일 있을수 있다
그래서 나도 믿으면 그렇게 되나요? 라고 많이들 생각한다. 

우리가 결과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 문제이다.
현상이나 결과가 있을 때 믿는 것은 우리가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이상한 성공신학  / 풍요신학 / 기복신학 / 천박한 자본주의 / 긍정신학


십자가의 진리는 모순적인 것이다. 

이성적이고 설득력있는 진리가 아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 인간의 영광의 신학 >에 대한 항거에서 시작되었다. 



  • 잘못된 사실 : 하나님만 믿으면 모든것이 잘 될것이다
                         잘되는 사람만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이 < 권력, 탐욕, 이기적, 욕심쟁이 >로 만들어 버렸다. 



    십자가의 신학을 회복함으로 약함의 신학을 바로 세워야 한다. 

    교회가 약한자와의 연대가 아니라 강한자와 연대를 계속하고 있다.
    교회가 힘없는 이들 가까이 있지 않고 교회가 힘있는 이들과 더 친밀하다.

    교회가 세상적인 성공에 주목할때 문제가 생긴다.


  • 이라크에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요청한 무슬림들의 타협은 < 다른 모든 종교행위는 해도 되지만 예수를 하나님으로 부르지 마라 >고 요청했다. 
  • 여기에서 이라크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실패가 있었다. 
무슬림들이 기독교인들을 우습게 여기는 가장 큰 이유는 자기들은 자신들의 믿음으로 인하여 목숨을 내어놓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믿는 것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자들이 없다고 믿는 것이다.

  • 세상과 타협을 한 교회 vs 세상의 핍박을 받는  교회


    우리는 이 시점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 다시금 고민해보아야 한다. 
  • 고난의 경험들이 말씀으로 재해석되어야 한다.

< 설교중에 언급한 내용에 참고 할 사항 >

  • 본회퍼는 많은 독일 교회가 나치 정권을 지지하고 나서자 진정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쫓는 제자의 삶을 회복해야 한다는 고백교회(the confessing Church)를 동료들과 함께 설립하고 나치정권에 대항운동을 주도하였다. 그 후 런던에서 2년간 목회하고 되돌아와 목사들을 양성하는 지하 신학교에서 산상설교를 중심으로 신약성경을 강의하였다.그의 강의는 청중들에게 숨이 막힐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는데 그때에 “값싼 은혜, 값비싼 은혜”를 설명하였던 것이다. 그 강의안 자필원고를 중심하여「제자도」(Discipleship)라는 책이 나왔고 한국어 번역판은 독일어 원제 “Nachfolge” (직역하면, ‘뒤따름’, ‘following after’)에서 영감을 얻어「나를 따르라」란 책으로 출간되었다.이 책은 제목이 말하듯이 제자를 부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청에 “단순한 순종”(simple obedience)으로 살아갈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 값싼 은혜 : 본회퍼는『제자도』에서 복음에 대한 이해와 순종 여부가 복음을 “값싼 은혜(cheap grace)”로, 또는 “값비싼 은혜(costly grace)”로 만들 수 있다고 하였다. 값싼 은혜와 값비싼 은혜를 본훼퍼는 개혁자 마틴 루터(M. Luther)의 신학에서부터 출발한다. 루터가 말하는 “오직 은혜로(Sola Gratia)”라는 주장은 전제가 아니라 결론이라는 것이다.

  • 값싼 은혜는 싸구려 상품 같은 은혜이며, 싸구려 죄의 용서, 싸구려 위로, 싸구려 성만찬입니다. 교회의 무진장한 창고에서 생각도 없이, 끝도 없이 경박한 손으로 털어내는 은혜입니다. 가격도, 경비도 없는 은혜입니다. … 값싼 은혜는 교리, 원리, 체제로서의 은혜입니다. 일반적인 진리로서 죄의 용서이며, 기독교적인 신론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값싼 은혜는 회개 없이도 죄를 용서하는 설교요, 공동체 훈련도 없이 베푸는 세례요, 죄의 고백도 없이 참여하는 성만찬이요, 인격적인 참회 없는 면죄의 확인입니다. 순종 없는 은혜, 십자가 없는 은혜, 살아 계시고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은혜, 이것이 값싼 은혜입니다. 값비싼 은혜는 끊임없이 찾아야 할 복음이며, 기도해야 할 은사이며, 두드려야 할 문입니다. 은혜가 값비싼 까닭은 은혜가 우리를 제자의 길로 부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은혜인 까닭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값비싼 까닭은 인간에게 생명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은혜인 까닭은 인간에게 생명을 선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값비싼 까닭은 죄를 저주하기 때문이요, 그것이 은혜인 까닭은 죄인을 의롭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값비싼 까닭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하나님에게도 값비쌌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의 생명을 희생했기 때문입니다.

    -Nachfolge, 29-31(『나를 따르라』, 24-26)

  • 루터의 십자가 신학 :
    이것은 루터자신이 말한 것으로서 “십자가 신학”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는 말이다. 이것은 사변적인 것이 아니고 실존적인 것이며, 루터가 죽는 순간까지도 붙잡았던 좌우명이다.
    그럼 왜 루터는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라고 말한 것일까? 당시 중세는 한 마디로 영광의 신학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영광의 신학은 중세 교회를 대표하는 신학이다. 영광의 신학은 스콜라주의적 사색과 신비주의적 경건을 가지고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 신학이다. 그러므로 인간 의지를 신앙보다 더 소중히 여기며, 공적을 앞세운다. 또 존재의 유비를 일삼아 신학을 논한다. 하나님을 직접 만나려고 하지만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다.
    루터도 사실은 영광의 신학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려고 한 사람이다. 루터 전기에 있어서 여러 가지 이론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루터가 로마에서 빌라도의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갈 때마다, ‘Pater Noster`을 암송하면서 계단마다 입을 맞추었다고 한다. 이것은 그가 연옥에서 영혼이 구출되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계속하였다고 한다. 드디어 마지막 계단을 올라 선 루터는 더 큰 실망감을 가졌다는 일설이 있다. 지원용, 「말틴 루터」(서울: 컨콜디아사, 1987), pp. 61-64.
    고행을 통해서, 업적을 통해서, 성자들의 공로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한 루터는 더 큰 좌절감만을 가지고 온 것이다.
    그러나 영광의 신학 아래서 고민하던 루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의롭게 하시는 은총을 발견하였으며, 그 십자가에서 역설 가운데 숨어계신 하나님을 별견하였다. 그러므로 루터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바로 십자가이다.
    따라서 루터에 표현에 따르면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며, 십자가가 모든 것을 시험하는 것이다.” 바로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간접적으로, 다시 말해 인성과 고난과 연약함의 역설 가운데 계시하셨다. 즉 고난과 연약함 가운데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셨다.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Crux sola est nostra theologia)



















































수치스럽게 살것인가? 아니면 명예롭게 죽을 것인가? 

사람은 사는 것도 잘 살아야 하지만 죽는 것도 더 중요하다


내가 죽는 날








한신대에 구약학을 가르치시던 김정준 교수님이 계셨다. 
이분이 폐결핵으로 소천하기 전에 지었던 

“내가 죽는 날”이라는 제목의 시는 
신앙인들에게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내가 죽는 날 
그대들은 "저 좋은 낙원에 이르니" 찬송을 불러주오 
요한계시록 20장 이하를 끝까지 읽어주오
그리고 나의 묘비에는 이것을 새겨주오 
‘임마누엘’ 단 한 마디만을...

내가 죽는 날은 비가 와도 좋다 
그것은 나의 죽음을 상징하는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예수의 보혈로 내 죄 씻음을 받은 감격의 눈물이기 까닭에. 

내가 죽는 날은 바람이 불어도 좋다 
그것은 내 모든 이 세상 시름을 없이 하고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내 길을 준비함이기 때문에. 

내가 죽는 날은 눈이 부시도록 햇빛이 비치어도 좋다 
그것은 영광의 주님 품안에 안긴 
그 얼굴의 광채를 보여줌이라. 

내가 죽는 시간은 밤이 되어도 좋다 
캄캄한 하늘이 내 죽음이라면 
저기 빛나는 별의 광채는 새 하늘에 옮겨진 내 눈동자이어라. 

오! 내가 죽는 날 
나를 완전히 주님의 것으로 부르시는 날 
나는 이 날이 오기를 기다리노라. 

다만 주님의 뜻이라면 
이 순간에라도 닥쳐오기를 
번개와 같이 닥쳐와 번개와 함께 사라지기를. 

그 다음은 내게 묻지 말아다오 
내가 옮겨진 그 나라에서만 
내 소식 알 수 있을 터이니 
내 얼굴 볼 수 있을 터이니.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죽음은 절망의 구렁텅이가 아니라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포근한 귀향이다. 

당신은 언제든 그 나라에 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선장은 배를 바른 항로로 인도해야 한다.
그리고 선장은 배가 문제있어 항로를 이탈했을때 
그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한다. 
또한 선장은 배에서 가장 마지막에 내려야 한다. 

그럼에도 침몰한 세월호에선 선장이 뭐했나 싶다.
세월만 보내고 .... 아무것도 안했다 ....
그리고 한 일이라곤 ... 자기만 살았고 문제에서 도망쳤다.

기가 막히다. 오늘 뉴스가 ...


슬픔의 바다 분노의 파도 선박의 침몰 ....
세월호 사고 재난 침몰 사망 실종 구조 구조선 대처 신고 뉴스 속보 특보 상황 시간 가족 아이들 자식 희망 절망 기적 기대 기도 ......

황당 황망 당황 또다시 비극 비명 울부짖음 안타까움 애도 상처 슬픔 분노 원망 절규 오열 인내 호소 울분 ...

초동대응 혼선 의문 에어포켓 생존사건 조타실 산소주입 진입...

부주의 부조리 무책임 어처구니 선장 실수 도망 자기중심 구속 추궁 조사 ....

안일함 무성의 거짓말 사과 죄책감 자책감 후회 생존자 증후군 외상후스트레스 장애 정신적 충격 ...

먹먹한 슬픔 터지는 분노 
또 일어난 부끄러움 ... 
황망함 어찌 .....
지금 일어나고 있는 슬픈 뉴스들이다.

주님! 어찌 우리에게 이러한 어려움을 주시는지... 주님! 저들을 돌아보사! 속히 구원하시고 저들의 마음에 상처와 아픔을 살펴주소서.

이해된 믿음이 은혜이고

고백된 믿음이 견고하며

선포된 믿음이 능력이다.




[ 4:13-15]

(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 4: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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