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PE DEIM (까르페 디엠) 현재를 즐겨라 






우울증… 목사님도?






이런 가운데 순전한 기독교를 향한 목회자들의 몸부림은 ‘둘 사이에 끼어’(빌 1:23) 고뇌하는 사도바울처럼 보인다. 목회자들은 모든 문제를 온몸으로 떠받치며 달려간다. 이들은 몸을 사리지 않는다. 흔히 종교인(성직자) 수명이 가장 길다고 알려져 있지만 목사들에겐 예외인 것 같다. 목사에게 집중된 과중한 사역은 중압감과 탈진, 우울증이라는 벼랑으로 내몰고 있다.

박현수(가명·49) 목사는 신자 150여명 규모의 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그는 교우들과 허물없이 지내는 편이지만 속마음을 털어놓지는 못한다. 괜히 말했다가 성도들에게 오해를 받은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속 깊은 이야기는 주로 동료 목사들과 하는데 그런 목사들조차 많지 않다. 미국에서 신학공부를 한 탓에 국내 신학교 출신 목사들과 친분이 없다. 그러다가 3년 전부터 갑자기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의욕이 생기지 않았고 몸도 나른했다. 왜 사는가 싶었다. 문득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내에겐 얘기도 꺼내지 못했다.

상담 전문가들에 따르면 목회자들이 우울해지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영적인 고갈과 과도한 목회사역이다. 
영적 고갈에는 목회의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에 대한 정죄, 
사역에 대한 지나친 기대감, 부족한 지적인 능력 등이 작용한다. 

너무 바쁜 활동은 스트레스나 우울증을 일으키는 가장 큰 요인이 된다. 
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 목회자 75%가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목회생활을 그만둘 생각을 한 일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엔 교인들의 끝없는 요구와 많은 설교 횟수, 가정 문제 등이 작용한다.

경기도 일산에서 목회하고 있는 임모(46) 목사는 “요즘은 전도를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것 같다”며 “전도하러 나가면 한국교회에 대한 불신이 너무 팽배해 절망감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목회자가 갑자기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도 했다.

지난해 미국 듀크신학대 목회자건강연구소는 감리교 목회자 1726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우울증 유병률이 8.7∼11.1%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일반인 기준인 5.5%에 비해 두 배가량 높은 수치였다. 
조사에서는 목회자들 중 불안증세를 호소하는 사람이 13.5%에 달했으며 불안과 우울증을 함께 겪는 목회자 비율도 7%가 넘었다.

미국의 사례이긴 하지만 국내 목회자 가운데서도 우울증을 앓고 있거나 우울한 성향을 가진 경우가 많다. 죄에 대한 자기검열이 강한 성격일수록 더욱 그렇다는 분석도 나온다. 설교자로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압박감과 강단에서 내려온 뒤 고독감이 이를 부추기는 것이다.

교회 역사에서는 우울증으로 고통 받았던 대가들이 있었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1483∼1546)는 일생동안 우울증과 씨름했다. 



그는 1527년 일기에서 “일주일 이상 죽음과 지옥의 문턱에 서 있었다”고 기록했다. 루터 연구가 롤랜드 베이튼에 따르면 루터는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심한 양극성 장애(우울증과 조증이 반복되는 기분장애)로 고통을 호소했다고 한다.

19세기 부흥운동에 불을 지폈던 영국의 명설교가 찰스 스펄전(1834∼1892) 목사도 중증우울증을 앓았다. 그는 일년에 2∼3개월은 아예 강단에 서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기독교 영성가 헨리 나우웬은 성장과정에서는 기분 장애로, 성인이 되어서는 우울증으로 평생 고통을 받았다.

과도한 목회 사역과 영적 침체 속에서 오는 우울증이 있는가 하면 경쟁적 개교회 시스템이 초래하는 우울증도 존재한다. 김일준(가명·54) 목사는 최근 자신이 졸업한 신학교 모임에 나가지 않는다. 이들 회합에는 대부분 자신보다 큰 교회를 맡은 목사들이 많았고 이들 앞에서 왠지 모를 소외감을 느꼈다. 나름대로는 바른 목회를 지향했고 교인수와 상관없이 목회하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모임에만 가면 늘 초라해 보였다. 놀라운 것은 모임에 나오는 목사들은 이웃 교회를 경쟁상대로 여기는 게 보통이었다. 어떤 선배 목사는 ‘좋은 시절 다 갔다’며 자신의 재정 씀씀이를 지적하는 교회 장로를 흉봤다. 김 목사는 자신이 마치 전쟁터에서 발가벗고 서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총신대 라영환 교수는 “본질에 입각한 목회를 추구하려고 발버둥치지만 경쟁적인 한국교회 풍토 때문에 되레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도 있다”며 “목회의 목표는 교회 성장이 아니라 복음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것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남성 목회자들의 우울 증상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분석한다. 내부 감정을 행동으로 나타내면서 공격적으로 변한다거나 스포츠나 일, 알코올, 포르노물로 관심을 돌린다. 강박적으로 철두철미하게 되거나 자신의 나약함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비슷한 특징이다.

성경에서는 사사 삼손을 비롯해 이스라엘의 첫 임금 사울, 선지자 엘리야 등이 ‘우울’ 인물로 등장한다. 이들은 블레셋의 지배와 지속적인 승리, 갈멜산 기적 이후 각각 우울증을 경험했다. 삼손은 기분 변화가 심했다. 사울왕은 두려움과 분노를 반복했고 자신감을 잃었다. 엘리야는 좌절과 대인기피, 자포자기 속에서 로뎀나무 밑으로 피신했다.

남성사역연구소 이의수 소장은 “남자들의 경우 방향을 잃을 때 우울해지기 쉽다”며 “목회자들은 수시로 자신의 사명과 소명을 점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 길을 걸으라 <유진 피터슨>


흙(dirt)은 그것이 제자리에 있지 않을 때에만

더럽힘의 형용사인 더러움(dirty)이 된다.




우리가 더러운(dirty)이라는 단어를 부정적인 형용사로 사용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더러운 옷, 더러운 얼굴, 더러운 손, 더러운 그릇, 더러운 술수, 더러운 생각, 더러운 책 그러나 흙(dirt)이라고 하는 것은 제자리에 있기만 하면 아무런 부정적인 함의 가없다.


예를 들어 정원이나 화분이나 채소밭에 있는 흙처럼 말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흙으로 지으셨다고 하는 창세기의 진술에는 아무런 부정적인 의미도 들어 있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다. 우리가 만들어진 흙, 그리고 우리가 돌아갈 흙은 우리의 발 아래에 있는 것과 동일한 흙이다. 이것은 우리가 창조계 전체와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며, 인간을 제외한 나머지 세상에도 존엄성을 부여해 준다.


‘흙(dirt)은 그것이 제자리에 있지 않을 때에만 

더럽힘의 형용사인 ’더러운(dirty)이 된다.


길을 나선 사람에게 기다리는 일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다. 길을 간다는 것은 목적지를 향해 간다는 뜻이다. 열심에 차 있고 결의가 굳은 여행자에게 기다리는 일이란 오로지 방해로만, 갈 길을 지연시키는 것으로만 여겨질 뿐이다. 뛰건, 산책하건, 차를 몰건, 개를 산책시키건, 길을 갈 때는 길을 가는 것이 우리가 하는 일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길을 나서겠는가?


하지만 길을 가다가 더 이상 길을 가지 못하게 되는 때가 있다. 다리가 부러진다거나, 사고 때문에 도랑에 주저앉게 된다거나, 지름길인 줄 알고 갔다가 수렁에 빠져 무력하게 갇히거나 할 수 있다


그럴 때 우리는 기다린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쾌활한 행인들이 지나가면서 우리에게 아무리 많은 격려의 말을 해준다 해도, 천국 길을 가는 우리들을 아무리 열심히 응원하면서 충고를 해주고 성경을 인용해 준다 해도(“허리띠를 띠고”, “네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인내로써...경주를 하며”), 달라지는 것은 없다. 우리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아무런 대책이 없다.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한다.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다른 사람도 우리를 위해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한다. 우리는 “깊은 곳에서”기도한다.


우리가 더러운(dirty)이라는 단어를 부정적인 형용사로 사용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더러운 옷, 더러운 얼굴, 더러운 손, 더러운 그릇, 더러운 술수, 더러운 생각, 더러운 책 그러나 흙(dirt)이라고 하는 것은 제자리에 있기만 하면 아무런 부정적인 함의 가없다.


예를 들어 정원이나 화분이나 채소밭에 있는 흙처럼 말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흙으로 지으셨다고 하는 창세기의 진술에는 아무런 부정적인 의미도 들어 있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다. 우리가 만들어진 흙, 그리고 우리가 돌아갈 흙은 우리의 발 아래에 있는 것과 동일한 흙이다. 이것은 우리가 창조계 전체와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며, 인간을 제외한 나머지 세상에도 존엄성을 부여해 준다. ‘흙(dirt)은 그것이 제자리에 있지 않을 때에만 더럽힘의 형용사인 ’더러운(dirty)이 된다.




사람마다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과 싸우는 방식은 다르다. 

사랑하는 사람은 허그(hug)원한다. 

허그로 사람은 그 사람의 품에 을 얻는다.

그러나 싸우는 사람은 클린치(clinch)를 원한다. 

클린치로 사람은 그 사람의 품에서 을 얻는다









TistoryM에서 작성됨




내가 죽는 날


한신대에 구약학을 가르치시던 김정준 교수님이 계셨다. 이분이 폐결핵으로 소천하기 전에 지었던 “내가 죽는 날”이라는 제목의 시는 신앙인들에게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내가 죽는 날 


그대들은 "저 좋은 낙원에 이르니" 찬송을 불러주오 

요한계시록 20장 이하를 끝까지 읽어주오

그리고 나의 묘비에는 이것을 새겨주오 

 ‘임마누엘’ 단 한 마디만을...
내가 죽는 날은 비가 와도 좋다 

그것은 나의 죽음을 상징하는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예수의 보혈로 내 죄 씻음을 받은 감격의 눈물이기 까닭에. 
내가 죽는 날은 바람이 불어도 좋다 

그것은 내 모든 이 세상 시름을 없이 하고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내 길을 준비함이기 때문에. 
내가 죽는 날은 눈이 부시도록 햇빛이 비치어도 좋다 

그것은 영광의 주님 품안에 안긴 그 얼굴의 광채를 보여줌이라. 
내가 죽는 시간은 밤이 되어도 좋다 

캄캄한 하늘이 내 죽음이라면 

 저기 빛나는 별의 광채는 새 하늘에 옮겨진 내 눈동자이어라. 
오! 내가 죽는 날 

나를 완전히 주님의 것으로 부르시는 날 

나는 이 날이 오기를 기다리노라. 
다만 주님의 뜻이라면 

이 순간에라도 닥쳐오기를 

번개와 같이 닥쳐와 번개와 함께 사라지기를. 
그 다음은 내게 묻지 말아다오 

내가 옮겨진 그 나라에서만 

내 소식 알 수 있을 터이니 

내 얼굴 볼 수 있을 터이니.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죽음은 절망의 구렁텅이가 아니라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포근한 귀향이다. 당신은 언제든 그 나라에 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아포리즘 aphorism.

짧고 단순하면서도 진리를 드러내는 말. 격언, 잠언, 경구.












얼굴은 내 것이나 표정은 내 것이 아니라

분명히 얼굴은 내 것입니다.

그러나 표정은 확실히 내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얼굴의 표정은 나는 볼 수 없지만 다른 사람은 볼 수 있습니다. 보는 것뿐만 아니라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우리 몸에는 모두 10개의 굴이 있습니다. 


그 중에 7개의 굴이 얼굴에 있습니다. 두 눈, 두 귀, 두 콧구멍 그리고 입입니다. 그러나 그런 굴들에는 얼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얼이 들어 있는 굴이라고 하여서 얼굴이라고 부릅니다. 얼굴의 겉모습을 표정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얼굴을 보는 것이 아니라 표정을 보고 있습니다.


나는 목사이기에 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볼 때가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 얼굴 표정을 보면서 특별하게 눈에 뜨이는 표정이 있습니다. 


웃음을 머금고 항상 목사를 주시하면서 무엇인가 위로부터 내리는 은혜를 사모하는 표정의 얼굴이 있습니다. 


한번 볼 것을 두 번 보게 됩니다. 반대 표정도 있습니다.

바라보면 소름이 끼치는 아주 무서운 얼굴 표정이 있습니다. 

특별히 공산국가 사람들 표정은 시멘트처럼 굳어 있습니다. 


쏘련에 갔을 때, 이북에 갔을 때, 동독에 갔을 때 사람들의 표정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싸늘했었음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70대 할머니가 여자의 본능으로 예뻐지고 싶은 욕망이 강렬하였습니다. 

흰 머리를 염색한 것이 아니라 아예 모두 뽑아 버렸습니다. 그리고 검은 머리칼로 바꾸어 심었습니다. 

그리고 얼굴의 주름살을 다림질하였습니다. 얼굴이 피부가 팽팽하여졌습니다. 


30대 여자가 되었습니다. 70대 친구들이 같이 놀아 주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30대 여자들과 어울리며 등산을 다녔습니다. 골프를 쳤습니다. 수영을 하였습니다. 얼마 후 지쳐서 죽었습니다. 얼굴 표정은 억지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허드슨 테일러의 아버지 제임스 테일러는 남다른 신앙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약제사로 일하면서 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성경을 부지런히 읽었습니다. 항상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소외된 자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늘진 곳에 있는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전도했습니다.

 

손님들로부터 약값을 정당한 가격 이상 받는 일도 없었습니다. 

정직을 사업의 신조로 삼았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약값을 절반만 받거나 아예 받지 않았습니다. 

"지난번에도 거저 약을 지어 주셨는데요." 

"우선 병이 나아야 하니까 그냥 가져가시고 빨리 건강을 회복하세요." "그래도 죄송해서..." 

"조금도 염려하지 마세요. 청구서는 제가 벌써 천국에 보내 놓았으니까요. 


그러니 거기 가서 갚으시면 됩니다. 약이 다 떨어지면 또 오십시오. 그런데 한 가지 꼭 부탁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절대로 잊지 않는 것이 당신이 갚아야 할 약값이라는 사실을 늘 기억해 주십시오." 

항상 복음으로 사는 테일러 아버지는 천사의 얼굴로 살았습니다.


소금 장수 김수웅 장로님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한국 교포 중에 세탁소를 경영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며 정직한 분이었습니다. 

어느 날 한 분이 옷을 세탁하여 달라고 가지고 왔습니다. 

주머니에 돈이 들어 있어서 세어 보니 2,700불이었습니다. 

잘 간직하여 두었습니다. 옷을 찾으러 왔을 때 그 돈을 주었습니다. 옷 임자가 말했습니다.

“나는 생각지도 않은 돈입니다. 가지세요.”

“아닙니다. 제 돈이 아닙니다.”

그리고 기어코 주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분은 미국 항공회사 부사장이었습니다. 

직원회에서 말할 기회에 그가 말했습니다. 

“한국 사람들 참 정직합니다.”

그리고 2,700 불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세탁소에 옷을 맡기라고 하였습니다.  세탁소가 시온의 대로를 달렸습니다. 후에 그는 700명이 일하는 회사 사장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그를 칭찬합니다. 그의 얼굴은 항상 천사의 얼굴입니다.


얼굴은 내 것이나 표정은 내 것이 아닙니다.

- 갈보리 교회 강문호목사 -





삶에서 가장 파괴적인 단어는 "나중"이고,

인생에서 가장 생산적인 단어는 "지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후6:2) 보라지금은은혜받을만한때요보라지금은구원의날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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