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찬교수 < 요한계시록 강의 1 >=

06/13/2014 금요일

LA 동부지역 연합 세미나

강의내용을 정리함 / 그림 인터넷 갈무리함














(계1:1-3, 새번역)

1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이 계시는 곧 일어나야 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천사를 보내셔서, 자기의 종 요한에게 이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습니다.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사람과 듣는 사람들과 그 안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 때가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 종말과 요한계시록 ]=




1. 종말이란 무엇인가?




- 올바른 종말론을 교회에 나누려고 연구소를 만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 방법론이 중요하다. 어떻게 접근하느냐?가 중요하다. 어떤 방법이 중요한가?를 생각하기 위해서는 요한계시록의 주제를 생각해야합니다.




- 요한계시록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교회입니다. 교회가 처한 최악의 상황을 말하고 그속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 최악의 상황은 로마의 황제숭배와 같은 통치속에서 이러한 통치이념속에 있는 교회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교회가 될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이다.














- 요한계시록의 또하나의 축약된 주제는 < 종말 >이라는 주제이다. 이 종말이라는 주제는 민감하기도 하고 왜곡되어 있기도 하다.




- 요한계시록은 핍박받는 교회들에 대한 목회적 당부이며 요청이다.

이 메시지는 상황은 다르지만 영적인 도전은 같은 오늘의 시대를 향한 메시지와 연결되어 있다.












- 종말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금방 떠오르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 미국 책중에 < the last myth >라는 책에서

미국에서 모든 사람은 종말이 온다고 믿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먼저오느냐 아니면

먼저 지구온난화로 멸망할것인가의 문제이다.
















- 종말의 문제는 바로 지구 멸망과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지구멸망의 시나리오를 여러가지 데이타를 가지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 2002년 타임지에 < 요한계시록 >의 종말이 올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다수의 세계관이 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 시대에 종말을 성경적으로 올바른 이해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문제는 잘못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상당히 많은 이단에 의해 유린되어기도 하고 세속적인 가치에 의해서 흔들리도 한다. 이럴때 일수로고 성경적으로 이해하는 것.. 좀더 성실하고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종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어야 하는 요한계시록이 종말에 대해서 오해하게 만드는 것이 문제이다.




불신자들 : 종말에 대해서 끝이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끝날것인데 대안이 없는데.. 쾌락주의 에 빠진다..




전통적인 교회들 : 끝이라고 생각한다. 종말을 심판으로 생각한다.




@ 성경의 구속의 역사 :

성경의 종말은 성경의 구속의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창조-타락-회복의 성취&구속-회복의 완성으로 간략하게 요약할수 있다.

하나님은 이세상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끝까지 책임지신다. 하나님은 완전하신분이기에 속성그것을 완전하게 하셔야합니다.




@ 구속의 역사의 목표 : 바로 창조의 회복이다.

바로 에덴의 회복의 메시지이다. 그것을 위해서 아브라함을 부르신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 약속이 바로 아담에게 주신 약속과 연결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것은 아담에게 주신 에덴을 회복하시려는 하나님의 거대한 발걸음을 볼수 있다.




성경에서 종말이란 창조의 회복이 성취되고 완성되는 순간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에 성경적인 회복은 타락한 이세상을 회복하는 순간을 한다.

바로 그날이 그때가 바로 <에덴의 회복>을 의미한다.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초림은 에덴의 회복의 성취이고 재림은 에덴의 회복의 완성이다.




이것이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우주적인 프레임의 변화이다. 중성복수이다. 우주적인 변화이다. 새로운 아담 마지막 아담으로 오셔서 그것을 이루셨다. 이것이 바로 종말의 사건이다.




세속적인 종말은 바로 <끝>을 말합니다.

성경적인 종말은 바로 <회복>을 말합니다.

이미 종말이 시작되었고 예수님의 재림에 완성된다.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었고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는 은혜를 누리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실존이다. 그리고 완성될 소망을 갖는 것는 것이다.




1. 요한계시록에서 종말 ?




1) 여자가 아들을 낳다.: 예수님의 탄생은 종말적 사건이다.

- 구약에서 여자의 의미 :

계 12:1 큰이적 - 해/달/열두별 의 여자의 모습

창 37: 9-10 : 요셉의 꿈속에 등장한 < 해와 달과 열한 별>

해(아버지) 달(어머니) 열한 별(형들)을 의미한다.

구약역사에서 12명의 아들이 갖는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한다.




- 구약에서 아이의 의미 : 이 여자가 아들을 낳는다. 계 12: 5

바로 이 아들이 바로 예수님을 의미한다.

사 66:7-8

요한계시록에서 여자가 낳은 아들은 바로 예수님을 의미한다.




@ 예수님이 12명의 제자를 뽑을까요?

왜? 12명이어야만 할까요? 12사도를 통해서 교회가 세워졌다. 12지파의 이스라엘의 성취가 바로 교회이다.




@ 마태복음 1장 1절은 구약전체의 역사를 요약하였다.




@ 신화는 히스토리가 없지만 예수님의 탄생에는 히스토리가 있다.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속에 예수님의 탄생이 이루어졌다. 이것인 바로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다. 하나님의 역사의 결과로 간섭하고 운행하시는 손길이다.




바로 이것이 구약의 배경을 갖고 있다.

사 66:7-8

남자를 낳았으니... 그 자민(아들들)을 순산하였도다..




이것이 구약의 배경과 성취이다.

여기의 주제가 민족과 나라입니다.

고통없이 시온이 남자를 낳았다... 라고 말하면서

<남자 :단수 = 예수님>을 말한다.




ESV에 보면 < 왜냐하면 시온은 구로하는 즉시에 그 자민들을 순산하였도다 > 라고 말한다. 그런데 <아들들:복수=메시아왕국의 백성들>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의 존재는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의 이유가 된다.




의문형식으로 말했지만.... 긍정적인 확신의 형태로 대답하고 있다.




- 하나님의 약속 :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시겠다. 하나님은 시아를 통해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시겠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모아주시겠다.




예수님의 탄생의 사건을 통해서 이사야가 기대하고 대망했던 종말의 사건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해준다. 메시아오심. 하나님 나라의 도래,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종말의 사건이다.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종말을 예수님의 탄생에서 시작하고 있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집중하지만 요한계시록은 달리 보고 있다.




우리의 생각의 전환 :

바로 예수님의 탄생이 종말의 사건의 시작이다. 바로 종말의 성취를 말하고 있다.




이런것은 교회에서 시험을 봐야한다.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외우는 것이 중요하다.




요즘 세대가 아날로그 적이죠.. 그런데 인터넷나오는 것이 다 정확하지 않다. 때로는 아날로그적인 삶을 살 필요가 있다.




2) 반드시 속히 되어져야만 하는 것들 (1:1)




- 구약배경 : 단2:28 느부갓네살의 꿈이야기




- 우리가 종말의 말과 함께 잘못된 부분이 바로 잡아져야합니다. 종말에 대한 오해를 바로 잡아야한다.




예언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는 것이 중요하다.

- 에언은 < 미래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 그런 내용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서 예언은 <나비>라는 단어는 대언하다는 뜻이다.

누구 앞에서 말하다 뜻이다. <프로페튜어> BEFORE는 <미리/앞에서>라는 말도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 중요하다.




- 선지자들의 예언의 출발점은 < 바로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 하나님은 구속주 하나님이시다. /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스라엘백성되게 하신 사건이 출애굽이다 / 하나님의 대한 인식이 출발점이다.




그리고 선지자들의 예언의 내용은 < 너희가 하나님을 떠났다. 그래서 심판이 필연적으로 있을 것이다. 그리고 회복이다. 돌아오라 >




여기에 미래적인 것도 있고 과거도 있다.




과거의 내용이 미래에 대한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과 관계의 지속성을 위해서 심판을 통해서 정화가 이루어져야한다. 이것이 이방인들의 심판과 다른다.




미래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밀접하게 상관관계를 이루고 있다. 바로 이것이 예언의 말씀이다.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는 예언은 협소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부족한 이해이다.

예언은 하나님의 뜻과 계속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단순히 미래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다.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그것만 말하지 않는다.




요한계시록은 창조에 대한 이야기가 풍부하게 나온다. 왜냐하면 종말은 창조의 회복이기때문이다.




창조의 모티브는 <생명>이고 <땅과 물>의 의미한다. 에덴적 모티브이다. 요한계시록은 창조의 모티브를 풍성히 다루고 있다.




요한계시록의 왜곡은 미래에 대한 이야기로만 하기에 상당한 왜곡이다.

너무 재림중심적으로 요한 계시록을 읽는 것은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서 종말이 왔다는 사실을 놓치기 쉽니다.




요한계시록을 균형있게 읽는 것이 중요하다.




3) 때가 가깝다.(계1:3)




- 읽은자(단수) 듣는자들/지키는자들(복수)

복이 있나니... 왜냐하면 때가 가까움이라.




- 듣고 지키는 것은 동일한 것이다. 말씀을 순종하는데 목적있다. 들음은 순종을 의미한다. 이러한 통합적인 작용이 일어나야 한다.




- 들음은 순종을 가져와야한다.

- 귀가 있는 것은 <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줄알고 순종하는 것>이다.




- 요한계시록은 호기심의 대상이다.




- 스코틀랜드 <센엔드류스 >에서 공부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순종의 말씀이다. 교회 공동체가 처할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말하고 있다. 사회적인 정황을 배경하고 있다. 황제를 숭배하는 사회적인 정황속에서 목숨을 걸고 말씀을 순종하길 교회들에게 요청한다.




요한계시록은 목회서신과 같이 목회적인 심정으로 교회들에게 순종을 요청하고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황제숭배를 하면 시민들을 책임졌다. 신으로써 황제를 숭배했다. 일종의 계약관계이며 사회적인 안전망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거부하면 이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교회들은 이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을 복이라고 말한다. 이런점에서 계시록은 오늘의 현대에 필요하다.




오늘 이 시대는 더 많은 숭배를 요구하는 시대가 되어가고있다. 계시록은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권면하고 하나님을 섬기도록 요청하고 있다.




666이냐? 베리칩? 휴거?는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지 못하고 그의 통치를 경험하지 못하도록하는 방해이다. 계시록의 말씀의 본질을 흐리는 사탄의 전략이다.




계시록은 생명의 말씀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하며 하나님 만을 섬기도록 순종의 반응을 보이도록 요청한다.




요한계시록의 복은 바로 < 듣고 지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때가 가깝기 때문이다.




때가 온겁니까? 안온겁니까?

때가 가깝다는 것은 < 아직 안오것이 아니라 때가 왔다는 것 >을 의미한다.






문맥을 잘 따지지 않으면 성경적인 의미를 이해하기 힘들다. 문맥을 잘 따져서 어감을 잘 따져서 들어야한다.




현대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문제이다.

아직 때가 가깝다는 것은 < 때가 왔다. >는 것을 의미한다.






서양적인 사고는 <감각적>이고 동양적인 사고는 <직관적>이다.

서양사고는 합리적이고 동양사고는 정서적이다.




때가 가깝다 : 히브리적 사고는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가복은 1장 15절 <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 > 성경은 같은 말을 표현을 달리해서 반복한다. 평행법이다. <때가 왔다, 하나님 나라가 왔다 >는 것을 의미한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 성경에서 복음은 원래 이사야에서 사용되었다. < 복음들과 산을 넘는자 > 바로 바벨론의 해방의 컨셉니다. 바로 이것이 < 죄와 사탄의 해방 >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다.




때 = 하나님 나라의 = 복음






역사적 출애굽사건 과 영적 출애굽 사건과 연결되어 진다.




복음이란 ? 예수믿고 구원받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다.

그 밑에는 거대한 사상적, 역사적 배경이 이다. 구약의 배경을 갖고 있다.






다니엘서에서 < 종말에 반드시 되어져야만 하는 것들 >이란 하나님의 나라이다.




요한계시록의 저자가 마가복음의 복음메시지를 들었을 가능성있다.




때가 가까운 것은 < 종말의 때가 온것을 의미한다. >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통해서 이땅에 온것이다.






황제를 숭배하지 말고 하나님 만을 섬기라는 이 메시지를 듣고 지키는 것은 복이 있다. 왜냐하면 바로 하나님의 때가 왔고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가 이땅에 도래했다고 했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 그 나라의 맛을 보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다스림을 경험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경험하는 통로가 된다.




하나님의 통치의 원조는 바로 에덴이다.

에덴이야 말로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임했다.






하나님의 형상 : 하나님의 아이콘을 의미한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우리가 있는 곳 마다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나도록 하신다. 아담과 하와에게 < 땅에 충만하라 > 바로 통치가 실행되는 방법이다.




스바여왕이 솔로몬에게 찾아온것 : 그 당시에 땅끝은 바로 에디오피라고 생각했다. 솔로몬이 이스라엘 시대의 역사의 절정을 의미한다. 그러한 가운데 스바여왕이 찾아오는 것을 의미한다. 종말적인 컨셉이 들어가 있다.




때가 가깝다는 것에 대한 오해 : 아직 때가 오지 않았고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왔다. 그래서 상주시기에 그때를 기다리라 생각한다.




황제숭배를 거부하고 예수님을 따라가는데 : 예수님의 오심으로 종말이 임했고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그 나라를 경험하는 것이다.




<결론>

종말은 바로 예수님의 오심으로 시작되었다.

요한계시록은 이미 종말이 시작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의 탄생의 사건으로 부터.....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종말적인 성취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한다.

물질과 명예와 같은 것들이 황제숭배와 같이 우리가 숭배하도록 유혹하고 있지만 ...

그것속에서 승리하도록..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하도록...

이미 종말이 왔음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칡나무와 등나무가 싸워 ‘갈등(葛藤)’이랍니다!



우리는 흔히 일이 까다롭게 뒤얽혀 풀기 어렵거나 서로 마음이 맞지 않을 때 `갈등葛藤이 생겼다`라고 말하는데 ‘갈등’은 바로 이 칡나무와 등나무에서 비롯된 말이다. 즉, 갈(葛)은 칡을, 등(藤)은 등나무를 일컫는다. <허철희의 자연에 살어리랏다> 생존위한 칡넝쿨의 몸짓


칡 나무는 한자로 ‘갈’이요, 등나무는 ‘등’이어서 둘을 합치면 ‘갈등’이라는 것을 알았다. 원래 ‘갈등’하면 일이나 인간관계가 까다롭게 뒤얽혀 풀기 어려운 상태, 혹은 상반되는 생각의 충돌로 생각했었다. 


칡은 오른쪽 방향 = 시계 반대 방향으로 감구요

등나무는 왼쪽방향 -=시계방향으로 감아 올라 갑니다  



그런데 전혀 다른 두 나무가 서로 얽혀, 혼자서는 올라갈 수 없는 높이를 같이 올라가 햇빛을 받고 잘 살수 있다는 사실이 새롭게 다가왔다. 


등나무는 유서 깊은 사랑의 상징이기도 하단다.

 옛날 어느 동네에서 한 총각 과 처녀가 서로 사랑을 했단다. 그때 전쟁이 일어나 총각은 전쟁터에 나가야 했고, 얼마 후 총각이 죽었다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그 소식에 처녀는 절망하여 연못에 몸을 던졌다. 


그러나 ‘전사’는 잘못 전달된 소식이었다. 총각은 살아 돌아왔고, 먼저 간 처녀의 죽음을 비통해 하면서 뒤따라 연못으로 들어갔다.


 훗날 연못가엔 팽나무 한 그루와 등나무 한 그루가 자라났고, 등나무는 팽나무를 온 몸으로 감싸 안고 자랐다고 한다. 


모든 만남은 갈등의 관계도 될 수 있고 동반자의 관계도 될 수 있다. (김홍식내과의사)


그림은 인터넷에서 갈무리함 





가재는 게편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가재는 게편이 아니다... 될수 없다.

가재는 원래부터 게와는 움직임이 틀리다.
형편, 입장, 상황 그리고 보는 눈이 다르다.
집게의 크기도 다르다. 값도 틀리다. 

얇은종이도 양면이 있다. 


양면을 생각하지 못하는게 아쉽다.

개가 고양이와 자라면 고양이처럼된다.
개는 스스로 개처럼 자라게 되어있지만.,,


고양이처럼 길들여지면
개의 본성을 잊어버린다. 

익숙해지는 것은 편해서 좋다. 
그러나 길들여지는 것은 
내가 없어지는 일이라 싫다.






세상에는 그것이 알고 싶은 일이 있다.
세상에는 그것을 모르고 싶은 일이 있다.


다 알고 싶을때도 있고 
다 모르고 싶을때도 있다.

어떤일은 몰라도 될일을 다 알려주는 이도 있고 

다 알아야할일을 모른 척하는 이도 있다.

놀라운것은 내가 알아야 할일은 잘 들리지 않고 

내가 몰라도 될일만 잘 들린다.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한다.
춤추지 못하는 고래에게 칭찬이 필요하다.
그러나 춤을 잘 추고 있는 고래도 칭찬을 해주어야 한다.



알아서 못하는 아이에게 칭찬은 자극제가 된다.
알아서 잘하는 아이에게 칭찬은 안정제가 된다.

칭찬의 역습 ...,
칭찬받기위해 눈치껏 춤을 잘추는 고래는 길들여진 고래다.
칭찬받지않아도 춤을 잘추는 고래는 자유로운 고래다.

나는 길들여진 고래보다 자유로운 고래가 되고 싶다.
나는 자극제보다 안정제가 필요하다. 칭찬으로...
나는 충분히 춤을 알아서 잘 추고 있다. 누구보다....

사람들은 일을 대하고 일을 처리하고 

일을 완성하는 방법에는 2가지 유형이 있다. 


" 미리미리 "가 편한 사람과 그때그때 "가 편한 사람이 있다.



미리 미리를 생각하는사람은 실수없이 일을 잘처리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그것을 치밀하며 꼼꼼함이라고 말한다. 모든 일을 미리 미리해야만 여유를 갖는 사람이다. 


그때 그때를 생각하는 사람은 실수할수 있어도 대수롭지 않게 느끼고 싶어한다. 그래서 그것을 느긋하며 넉넉함이라고 말한다. 어떤 일을 하기전에 여유를 충분히 갖는 사람이다. 


미리 미리 움직이는 사람은 동작이 빠르고 순발력이 있다. 그러나 사람보다는 일에 집중한다. 그래서 원칙과 목표를 따르기에 사람의 마음을 놓칠수 있다. 그때 그때 마다 달라지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 한다. 실수, 시행착오, 예상되지 않은 상황등을 원하지 않는다.  


그때 그때 움직이는 사람은 동작이 느리다 느긋하다. 그러나 일보다 사람에 집착한다. 그래서 관계와 느낌을 따르기에 일의 방향을 놓칠수 있다. 미리 미리 하는 일은 피곤하게 느껴서 힘들다. 계획,규칙,바쁨등과 같은 상황등을 원하지 않는다. 


이 두사람이 만나면 서로가 편치 않다.

그러나 이 두사람다 필요하다.


당신은 미리 미리가 익숙합니까?

당신은 그때 그때가 익숙합니까?


당신의 주변에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미리 미리하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그때 그때 하는 사람들입니까? 




영화 플랜맨을 보면..

항상 계획한데로 미리미리 살아가는 한 남자와 항상 그때 그때 느낌대로 살아가는 한 여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두사람의 삶의 방식은 다른다. 

나름 만족하면서 익숙함이란 이름로 살아왔다.... 

그러나.. 인생은 항상 미리 미리와 그때 그때 둘다 요구한다. 

그래서.. 인생이 복잡하다. 


미리 미리 계획하지만 계획데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요.

그때 그때 선택하지만 선택하는것이 좋은것만은 아닌것이 인생이다. 



그래서 인생은 힘들다. 

그러나 인생은 미리 미리 맛볼수 없는 요리의 기다림이요 

그때 그때  달라지는 일기예보의 날씨이다. 









고난에 대해 가장 정확한 대답은 십자가이다. 


그러나 고난당한 사람에게 십자가만 말하기에는 너무 부담스럽다. 


하지만.. 내 경험상... 결국에는... 


사람의 위로도. 사람의 울음도.. 사람의 말도.. 사람의 배풂과 배려도...


 십자가만 못하다.. 

그래서 다시 십자가만 우리에게 유일한 위로다. 



이러한 정답을 바로 말하기보다는 그것을 고난당한 사람이 시간속에서.. 

고난을 해석하는 은혜로 ... 십자가를 이해하길 바랄 뿐이다. 


그것이 설교자가 할일이다. 

설교자는 고난중에 있는 성도에게 십자가를 강요하지 말고

 십자가를 곁에 놓아두고 가면 된다. 


눈물과 원망의 시간이 지나야 십자가가 보일수 있다.



 눈물의 시간에는 십자가는 짜증스런 트라우마다. 

그러나 눈물이 다 흐르고 나면 십자가는 다행스러운 카리스(은혜)가 된다.

래디컬리즘 radicalism

이 말은 라틴어의 radix(뿌리, 根)에서 유래한 것으로 '뿌리를 내렸다'라든가, '근본으로부터'라고 하는 것이 래디컬(radical)의 의미이다. 보통 급진주의라고 해석되고 있다. 사회의 현상에 만족하지 않고, 이것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고 하는 의향이나 운동을 나타내는데, 이 경우 래디컬이 '급진'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조건이 어떻게 되고 있는가, 변화의 조건이 성숙되고 있는가에 대하여 고찰하지 않고 단번에 변화의 방향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이른바 '저돌적'이다. 따라서 래디컬리즘=급진주의는 보기에는 매우 혁명적이지만, 실제로는 혁명적 변혁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주관주의적인 의향이나 운동이 된다. 현재 자본주의 사회의 제 모순이 심화되고, 그것이 중압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몸으로 느끼고 있는 쁘띠 부르조아 계급은 이 주관주의에 빠져서 진정한 혁명세력인 노동자 계급과 밀접하지 않은 래디컬리즘에 매달리기 쉽다. 또한 래디컬리즘은 이같이 사회에 대한 의향이나 운동으로서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사상, 분야에 있어서도 조건을 무시한 반항이나, 혁신을 기도하는 것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 철학사전(중원문화)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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