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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일 말씀의 도전... 


함께 웃었던 사람의 기억은 잠깐 지나간다.

함께 울었던 사람의 기억은 오래간다.


나를 위해 울어줄사람

내가 울어줄수 있는 사람


동역은 같이 일할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같이 울수 있는 사람이다.


위선적인 삶은 복잡하다.

큰믿음 뜨거운 믿음이 아니라

위선적이지 않은 믿음이다.



[ 09/07/2014 주일 말씀을 듣고 덧붙인 묵상 나눔 ]


나는 어떤 사람인가? 

그들은 나에게 어떤 사람인가? 


같이 산다고 사는 것으로 울어줄 준비가 된것이 아니다. 

같이 안살아도 울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있다.


많이 만나고 많이 말해도 울어줄 준비가 없다면 

공갈빵같은 만남이다,




자주 못 난나고 많이 말하지 않아도 울어줄 준비가 있다면

 막쪄진 찐빵같은 만남이다.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 많은가? 힘들게 하는 사람이 많은가?

힘이 되어 주겠다고 다짐하고 약속하고도 오히려 그 사람이 더 힘들게 한다. 

힘이 되어 주겠다고 다짐하고 약속하지 않아도 조용히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 있다. 


매일 같이 아주 가까이 있는 것은 관계의 거리를 말해준다. 

순간 애틋함의 감정이 생기는 것은 마음의 거리를 말해준다.


우리가 울수 있는 것은 우리가 신뢰할수 있는 준비가 된것이다. 

우리가 울수 있는 것은 우리가 사랑할수 있는 준비가 된것이다. 


울고 싶어라. 왜 나는 ? 왜 너는 ?


동역은 일심동체(一心同體: 한마음 한몸)가 되면 잘된다. 

그러나 동체(同涕)가 더 중요하다. 

일심동체( 一心同涕)는 한마음으로 같이 우는 것(涕:눈물체)이다.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딤후1:4)

행복의 수준도 비교과 만족의 수준이 결정한다. 
행복은 역시 비교심리이다. 행복은 만족의 수준이다.



세상적인 행복은 비교를 통해서 평가되는 가치이다. 그러나 신앙적 행복은 비교할수 없는 은혜에 대한 가치평가이다. 

세상적인 행복은 더 많은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적 행복은 더 많은 만족보다 주님만을 만족하는 것이다.

행복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고
감사할수 있을때 거기에 행복있다.

행복 = 비교 + 만족


감사 = 주님 + 만








다이어트는 숨은 그림 찾기다.
다이어트를 통해 살들에 감추어 져있던 숨은 턱선. 잊쳐진 얼굴. 감춰진 인상이 찾아진다.

나도 이렇게 바뀔것이 라곤 알지 못하고 나도 이런 낯선 모습에 놀라고 있다.

사람들은 목사님 보기 좋다고 그리고 아프신건 아니냐?고 안부를 묻는다. 더 빼 실거냐고 ... 고만하세요 !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

어릴때 조금더 나이들어 보이고 싶었다. 나이가 들면서 나이들어보이는것 싫어한다. 

요즘 젊어보인다 어려보인다는 말을 듣는다. 못들어본 말들에 웃음이난다.
아직 나는 충분히 젊은데..




우리교회 교우의 어머니의 장례를 다녀와서..

한 사람의 죽음은 그 사람의 가치를 보여준다.

사람의 생애는 항상 마지막 순간에 그 가치가 결정된다. 
살면서 만들어내는 가치평가는 미완전한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완성되어가는 가치평가를 볼수 있다. 주님앞에 서서 비로서 최종평가를 들을수 있다.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

그 사람의 마지막 생애를 추억하고 기억하고 남긴 발자취를 들여다보면 이 사람의 생이 얼마나 가치가 있었나를 알수 있다. 

오늘 그 가치 있는 장례식을 보았다.

고 박윤선 박사님의 아내 이화주 사모님의 장례이다.

사람의 생애는 추억과 기억을 남긴다.
사람의 생애는 역사와 스토리를 남긴다.

탁월한 신학자. 선명한 설교자
하나님의 기뻐신 종 고 박윤선 박사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러한 명성만큼이나 소박한 신학자. 진실한 삶의 설교자로 사셨던 사모님.
하나님이 고마워하시는 종 박윤선박사의 아내 이화주 사모

박윤선 박사님의 위대한 역작 신구약 주석 만큼이나 기억해야 할것은 소박한 삶의 주석을 남김 이화주 사모님의 삶을 듣습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좋은 목회자 뒤편에는 좋은 사모가 있다. 좋은 사모와 함께 좋은 가족이 있다.

성도의 죽음은 아름다운 죽음이어야 한다. 
성도의 죽음은 기억되는 기리고 싶은 죽음이어야 한다.

2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3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시16:2-3)

장례에 참석하며 죽음을 기억하며
삶의 내용을 들여다 보는 오래된 사진속에서
삶의 내용과 열매가 보인다.
그리고 역사와 스토리가 읽혀지고 있다.



 



여러분은 주님을 원해요?


여자성도들은 주님과의 친밀감을 원한다.

자신의 삶에서 거절감과 굶주림이 친밀함으로 회복된다. 

친밀함이 상처를 덮는다.


남자성도들은 주님앞에서 진실함을 원한다.

자신의 삶에서 열등감과 죄책감이 진실함으로 회복된다. 

진실함이 상처를 드러낸다. 

◐ 삶에 귀감이 되는 글 ◑




♣ 소와 기회.

소는 뒤에서 붙잡아야 하고

기회는 앞에서 붙잡아야 한다.

소를 뒤에서 잡아야 하는 이유는

소머리에 날카로운 뿔이 있기 때문이고

기회를 앞에서 잡아야 하는 이유는

기회의 뒤에는 잡을 꼬리가 없기 때문이다

 

♣ 시간.

괴로운 시간을 갖지 않으려면

즐거운 시간을 버려야 한다.

쫓기는 시간을 갖지 않으려면

느긋한 시간을 버려야 한다.

후회의 시간을 갖지 않으려면

쾌락의 시간을 버려야 한다.

 

 아름다운 웃음.

아름다운 웃음은 키 작은 아가씨의

짤막한 다리를 보고 웃는 웃음이 아니다.

대머리 아저씨의 비뚤어진 가발을 보고 웃는

웃음이 아니다.

아름다운 웃음은

낯선 얼굴을 만나도 반갑게 웃는 환한 웃음이다.

 


 아이와 노인.

아이는 빨리 자라 노인이 되고 싶다.

왜?

못된 유괴범 때문에

노인은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가고 싶다.

왜?

못난 자식들의 무관심 때문에

 

 앞과 뒤.

거울은 앞에 두어야 하고

 등받이는 뒤에 두어야 한다.

  잘못은 앞에서 말해야 하고

칭찬은 뒤에서 해야 한다.

 

앞세우면.

주먹을 앞세우면 친구가 사라지고

미소를 앞세우면 원수가 사라진다.

미움을 앞세우면

상대편의 장점이 사라지고

사랑을 앞세우면

상대편의 단점이 사라진다.

 

 애인과 친구.

애인을 만드는 것과 친구를 만드는 것은

물을 얼음으로 만드는 것과 같다.

그것은 만들기도 힘이 들지만

녹지 않게 지키는 것은 더 어렵다.

 

 애정과 신호등.

빨간 불이 꺼지면 녹색 불이 들어오고

녹색 불이 꺼지면 빨간 불이 들어오는 신호등.

애정은 이런 신호등과 같아야 한다.

한쪽 불을 끄지 않고 또 다른 불을 켜면 사고가

생기듯

한쪽 정을 끊지 않고 또 다른 쪽에 정을 주면

사고가 난다.

 

 어떤 철학가.

어떤 철학가가 있었다.

그는 사람들을 마나면 늘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서 진심으로

자신의 슬픔을 알아주는 이는 없소.

또 아픔을 알아주는 이도 없소.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구해야 하오.”

 

어느 날 그 철학가는 명상에 잠겨 강둑을 거닐다가 그만 강물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강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면서

그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위로 잡아당기며 혼자 중얼거렸다.

“나 자신은 내가 구해야 돼.

나 자신은 내가 구해야 돼.”

 

 어렵네.

바스락거리는 베개를 베고 잠들기 어렵네.

깔끄러운 옷을 입고 가만히 앉아 있기 어렵네.

시끄러운 마음으로 편히 지내기 어렵네.

마음 맞지 않는 사람과 오래 사귀기 어렵네.

사랑 없는 사람과 함께 살기 어렵네.

 

 어렵다.

돈을 오래 간직하는 것도 어렵지만

신용을 오래 간직하는 것은 더 어렵고

희망을 오래 간직하는 것이 더 어렵지만

용기를 오래 간직하는 것은 더 어렵다.

 

사랑을 오래 간직하는 것도 어렵지만

인내를 오래 간직하는 것은 더 어렵고

아름다운 얼굴을 오래 간직하는 것도 어렵지만

아름다운 마을을 오래 간직하는 것은 더 어렵다. 

 

 없다.

거지에게 생일날 없고 도둑에게 양심 없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 밤과 낮이 없고

참되게 사는 사람에게 두려움이 없다.

그리고 실직자에게 봉급날 없듯

게으른 사람에게 돌아오는 것 없다.

 

 어리석음과 똑똑함.

어리석은 개미는 자신의 몸이 작아

사슴처럼 빨리 달릴 수 없음을 한탄하고

똑똑한 개미는 자신의 몸이 작아

사슴의 몸에 붙어 달릴 수 있음을 자랑으로

생각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단점을 들여다보며 슬퍼하고 똑똑한 사람은 자신의 장점을 찾아내어

 자랑한다.

 

 얼굴.

화내는 얼굴은 아는 얼굴이라도 낯설고

웃는 얼굴은 모르는 얼굴이라도 낯설지 않다.

찡그린 얼굴은 예쁜 얼굴이라도 보기 싫고

웃는 얼굴은 미운 얼굴이라도 예쁘다.

 

 연장.

고운 모래를 얻기 위해선 고운 체가 필요하듯

고운 얼굴을 만들기 위해선 고운 마음이

필요하네.

매끄러운 나무를 얻기 위해서 잘 드는 대패가 필요하듯 멋진 미래를 얻기 위해선

현재의 노력이 필요하네.

 

 연장과 힘.

욕심 많은 사람은

자기 연장을 두고 남의 연장을 빌려 쓴다.

그러다 그만 자기 연장을 녹슬게 하고 만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혼자 힘으로 서지 않고 남에게 기대선다.

그러다 그만 자기 혼자 설 힘을 잃고 만다.

 

 오래 두면.

잘 드는 칼도 오래 두면 녹이 슬어 날이 무디어지듯 날카로운 도끼도 오래 두면 녹이 슬어

날이 무디어지듯

그리움도 오래 두면 저절로 녹이 슨다.

고민과 고통도 오래 두면 녹이 슬어

저절로 무디어진다.

 

♣ 옷과 모습

새 옷을 입었다고 자랑하지 말고

그 옷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남보다 잘 났다고 자랑하지 말고

그 모습이 추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옷과 옷걸이.

앞집엔 옷이 많은데 옷걸이가 하나도 없고

뒷집엔 옷걸이가 많은데 옷이 하나도 없다.

나누어 쓰면 좋겠는데 그러지를 않아

앞집 사람은 늘 구겨진 옷을 입고 다니고

뒷집 사람은 늘 벌거벗고 다닌다.

 

 옷과 욕심.

옷은 입을수록 몸이 따뜻하고

욕심은 벗을수록 마음이 따뜻하다.

옷은 오래 입을수록 그 두께가 얇아지고

욕심은 오래 걸칠수록 그 두께가 두꺼워진다.

 

 외면.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설움은

가진 사람들의 외면에서 생기고

못난 사람들의 설움은

잘난 사람들의 외면에서 생긴다.

혼자 사는 사람들의 설움은

여럿이 사는 사람들의 외면에서 생기고

아픈 사람들의 설움은

건강한 사람들의 외면에서 생긴다.

 

 우리 그렇게.

나무가 자라는 것 좀 봐.

뿌리 없이 자라지 않잖아.

하루아침에 자라지 않잖아.

꽃이 피는 것 좀 봐.

피다가 멈추지 않잖아.

때 없이 피지 않잖아.

서두르지 않고 욕심내지 않는 나무처럼

멈추지 않고 때를 기다리는 꽃처럼

우리 그렇게 살자.

참고 기다리며 살자.

 

 이름.

귤나무엔 가시가 있는데

사람들이 그 나무를 가시나무라 부르지 않고

귤나무라 부르는 건

그 나무에 향기로운 귤이 열리기 때문.

장미나무엔 가시가 있는데

사람들이 그 나무를 가시나무라 부르지 않고

장미나무라 부르는 건

그 나무에 아름다운 장미꽃이 피기 때문.

마치 구두쇠가 남을 도우면

그 사람을 구두쇠라 부르지 않고

자선 사업가라 부르는 것처럼.

 

 인생과 자연.

인생은 생각보다 괴로움이 많으며

인생은 생각보다 허무하다.

자연은 생각보다 너그러움이 많으며

자연은 생각보다 무섭다.

 

 잃은 것과 버린 것.

잃은 것은 아깝지만 버린 것은 아깝지 않다.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잃고 나면 아깝고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내가 싫어 버리면 아깝지 않다.

가진 것을 잃었다고 슬퍼하는 사람들

잃었다고 슬퍼하지 말고

내가 싫어 버렸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입.

쓴 것을 잘 먹는 입이라면

단것도 잘 먹을 수 있겠지.

 질긴 것을 잘 먹는 입이라면

   연한 것도 잘 먹을 수 있겠지.

  그래. 험담을 잘 하는 입이라면

칭찬도 잘 할 수 있겠지.

절망을 말하는 입이라면

희망도 말할 수 있겠지.

 

 자랑.

공작새는 꽁지를 자랑해야 한다.

그러나 어리석은 공작새는

꽁지를 자랑하지 않고 다리를 자랑한다.

사람은 인격을 자랑해야 한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인격을 자랑하지 않고 재물을 자랑한다.[펌]





말씀이 나를 붙잡아요!(코스타 저녁설교 -1)

2014년 7월 2일 오전 6:06

우리는 그리스도의 능력이다!. 

고린도 후서4;7절. 2014/07/02. 시카고 코스타.


고통스러운 삶이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읽게 하셨어요. 삶이 힘들때 하나님 말씀이 얼마나 순전지를 깨달았어요. 이전에는 제가 원하는 것들을 많이 넣었지요. 그 래서 순도가 낮았어요. 그냥 어떻게 보면 내 말이어요. 내 말을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서 했어요. 그러나 고통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했어요. 


1. 말씀이 나를 붙잡아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립보2;13절). 여기에 소원이 나오면 사람들은 다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삽입해요. 저에게는 아내가 일어나는 것이죠. 

그러나 이 구절 앞 구절에서 그 소원이 뭔지 알려줘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시는 기쁜 뜻, 우리 마음에 주시는 소원은 구원의 완성을 향한 갈망이죠. 구원의 완성!.

제가 얼마나 소원 소망이라는 단어를 집착하며 살폈는지 보셔요.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니라"(로마서5;3-4). 

여기에 환란을 다 견디고 이루어지는 소망이 뭘까요. 로마서는 우리에게 원수였던 우리가 십자가로 말미암아 화목함을 얻은 것처럼 하나님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구약성경도 마찬가지여요. 믿음의 명문가문이라고 하면 아브라함을 들어요. 저는 아무리 봐도 아브라함이 믿음의 명문가문으로 형통이라는 것을 찾지 못하겠어요. 아브라함은 불임의 아내를 만나서 자식 얻는데 몇년 걸렸어요. 25년!. 너무 길지 않아요. 이삭은 결혼해서 몇년 20년. 이런 불임의 명문 가문이네요. 손자얻는데 25년 20년 걸리면 며느리 쫓아낼 시어머니들 많아요. "너 때문에 우리집 대가 끊어졌다"며. 

야곱은 속이는 사람이어요, 속은 사람이어요. 뭘 그렇게 속였어요. 팥죽은 거래를 잘하거지요. 형이 멍청한 것이죠. 아버지에게 축복받을 때 형의 이름을 받았지요. 그리고 라반을 속였어요, 속았어요. 속았지요. 11명의 자식들에게 속았어요, 속였어요. 속았어요. 그러면 야곱은 속은 사람이어요, 속인 사람이어요. 속이고 속은 사람이죠. 속은 것이 더 많지요. 

다윗이 고백하지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편119;72). 


하나님의 말씀이 저를 붙잡아 주었어요.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혼잡게 하지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하게 읽어세요. 그러면 하나님은 말씀으로 날 붙잡아 주셨어요. 삶을 붙잡으려고 하지마세요. 말씀을 붙잡아요.




네가 주라!(코스타저녁설교-2)....나머지는 나중에 올려요

2014년 7월 2일 오전 6:08

2. "네가 주라"


저의 삶을 보면 아내가 건강할 때보다 아내가 아플 때 가장 풍성한 삶을 살고 있어요.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얼마나 많은지. 넘쳐나요. 그러나 동시에 주라고도 하셔요. 나도 어려운데. 


저는 이사를 해야했어요. 8천만원에 40만원 월세 아파트로요. 돈 5천이 모자랐어요. 어느 형제가 오더니만 "간사님, 뭘 도와드릴까요?"라요 말해요. 

저도 물었지요. "너는 누군데 나를 도우려고 하냐". 형제가 자기 아버지 소개를 해요 . 한해 매출이 천억대에 이르는 제약회사를 운영하다고.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응, 가게가 좀 되나보네". 

"간사님, 그것은 가게라고 하지 않고 기업이라고 해요. 아 기업!.

이사를 하려는데 돈이 3천 모자란다. 그때 저는 5천이 모자랐습니다. 형제가 그자리에서 3천만원 수표 세장을 주는 거여요. 제가 필요한 돈은 5천이어요. 3천만원을 받았을 때 감사가 먼저 나왔을 까요, 아쉬움이 먼저였을까요?. 


이사를 하고 2년을 살았어요. 주인이 전화를 했어요. "목사님, 시세가로 받아야겠습니다". 두려웠습니다. 아내가 한방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사를 가면 안되요. 아이들 친구도 지금 사는 곳에 다 있어서요.

"얼만데요". 2억5천이요. 

제가 준비는 해보겠지만 2억5천은 안됩니다 라고 정직하게 대답을 드렸어요. 열심히 빚을 내고 준비했습니다. 1억6천을 마련했습니다. 

"저 주인어른, 1억6천밖에 안됩니다". 

"그래요, 목사님. 그냥 1억6천에 계약해요" 

"나머지는요". 없는데 어떡해요. 


2년전에 제가 결심을 했습니다. 이 사랑의 빚을 갚기로. 오래된 아파트를 리모델링해줘야겠다. 우리 성도들이 저를 바보라고 했습니다. "세입자가 왜 리모델링을 하냐"고. 제가 웃으면 말했습니다. 그분이 나에게 10년동안 후원한 액수가 얼마냐. 

작년 크리스마스 때 집을 다 수리했습니다. 싱크대만 남겨두고, 주인을 초청해서 크리스마스 축하파티를 열었습니다. 불신자들과 신자들서 몇몇 불러서.

지난달 실직자가 된 청년이 한명왔어요. 뭐 준비하려고 하니?. 10월에 취직시험이요. 그동안 뭘 먹고 사냐?. .... 

한달 생활비가 얼마니. 30만원이요. 그러면 내가 그때까지 30만원을 주마. 넌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거두길 바란다. 이 청년은 매주 이틀을 우리 자녀들을 돌봐줘요. 참 감사하지요. 

힘들 때 하나님은 저보다 더 힘든 사람들을 붙여주셨어요. 그게 사랑이지요.





십자가 능력, 보배(코스타강의 -2)

2014년 7월 3일 오전 6:49

2. 말씀이 나를 붙잡아요!


고통스러운 삶이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읽게 하셨어요. 삶이 힘들때 하나님 말씀이 얼마나 순전지를 깨달았어요. 이전에는 제가 원하는 것들을 많이 넣었지요. 그 래서 순도가 낮았어요. 그냥 어떻게 보면 내 말이어요. 내 말을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서 했어요. 그러나 고통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했어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립보2;13절). 여기에 소원이 나오면 사람들은 다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삽입해요. 저에게는 아내가 일어나는 것이죠. 

그러나 이 구절 앞 구절에서 그 소원이 뭔지 알려줘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시는 기쁜 뜻, 우리 마음에 주시는 소원은 구원의 완성을 향한 갈망이죠. 구원의 완성!.

제가 얼마나 소원 소망이라는 단어를 집착하며 살폈는지 보셔요.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니라"(로마서5;3-4). 

여기에 환란을 다 견디고 이루어지는 소망이 뭘까요. 로마서는 우리에게 원수였던 우리가 십자가로 말미암아 화목함을 얻은 것처럼 하나님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도 그중에 하나여요.

"우리가 이 보배를 질 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힌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4;7)


하나님의 말씀이 저를 붙잡아 주었어요. 질그릇이 보배를 담아요, 보배가 질그릇을 담아요. 보배를 담은 것은 질그릇이지만 우리가 보배를 지키는 것이 아니어요. 보배가 중심이어요. 

하나님은 말씀으로 날 붙잡아 주셨어요. 삶을 붙잡으려고 하지마세요. 말씀을 붙잡아요.





십자가 능력, 보배(-3. 코스타 강의)

2014년 7월 3일 오전 6:50

난 너에게 아들줬다!.(Did not spare my son)


2013년 사순절 때, 십자가를 묵상하다가 이렇게 탄식을 했다. "나 너무 힘들어요. 좀 상황을 바꾸어줘요. 낫게 하시든지, 아니면 데려가든지". 

이런 곤란한 질문을 하면 하나님을 대답을 안하시더라. 우리가 어려운 질문을 하면 하나님은 침묵하는 경향이 있으시더라구요. 그러나 그날은 제가 말씀좀 해봐요 이렇게 소리쳤어요. 정말 말씀하시더라구요. 말씀을 생각나게 해요. 


그런데 느닷없이 마음속에서 로마서 8;31-39절 본문이 떠올랐어요. 특히 롬8;32절에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느냐". 이본문이 떠올랐어요. 속으로 참 하나님 싱겁다는 생각을 했어요. 힘들다는데 아들줬다 이게 답이 되요. 나 힘들다고 말하는데 나는 아들 줬다는 대화가 뜽금없잖아요. 

셋째날 아침이었어요. 출근해서 어제의 기도를 계속하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어요. "너 아들까지 준 사람에게 뭘 더 달라는 거냐"라는 내적인 음성이 들리더라구요. 내가 너를 사랑해서 내 아들까지 줬는데 너 나에게 또 달라고. 

그래서 그 본문을 읽었어요. 그리고는 놀랐어요. 아들과 함께 받을 것이 환란과, 곤고와 핍박과 기근과 박해와 적신이나 위험까지도 들어 있어요. 이런 것이 찾아와도 그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데요. 좋은 상황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 아주 나쁜 상황을 언급하고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야기 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가장 귀한 선물을 첫번째로 주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첫번째 선물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이것보다 더 귀한 선물은 없습니다. 그제서야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져요. 제게 힘없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어요. "아들 줬는데 뭘 더 달라는거야".


아들이 귀해요. 아들이!. 그러나 삶에서 아들보다 더 귀한 것을 찾는 우리들이어요. 십자가 보다 더 귀한 것이 우상이지요. 여러분의 꿈보다 아들이 귀해요.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잘 드러냈습니다. 확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너무 자주 하나님의 사랑을 기도응답으로 확정합니다. 이런 잘못된 기준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합니다. 

기도응답은 될수 도 있고 안될 수도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정하는 기준은 아닙니다. 그것은 가변적인 사랑이지요. 


불변의 사랑은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전, 저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아들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4. 너, 나만 사랑해라(You shoud only love me)


아내를 돌보던 어느날 "하나님, 내 꿈의 끝이 여기여요. 아내만 돌보다가 끝나는 인생인가요". 엉엉 울었어요. 하염없이 울었어요. 아빠는 절대 아이들 앞에서 안울어요. 몰래 울지요. 그러니 제가 묻는 "내 꿈이 여기가 끝이냐"는 질문은 피를 토하는 격문이지요. 며칠 뒤에 차를 몰고 아내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하나님이 물었어요. 


"너, 나보다 더 사랑하는 꿈이 뭐냐?".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꿈이 있냐?". 하나님이 가끔 하시는 질문은 너무도 당혹스러워서 대답을 못해요. 저게에 큰 충격을 주었어요. 


"없는데요". 이제는 내가 침묵할 차례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셨어요. 한참을 울고 있는데 하나님이 말씀하셨어요. 

"너 나만 사랑해". 

나는 인생이 얽울해서 꿈 이야기 하는데 하나님은 나에게 사랑만 해라! 고 하셨어요. 

"병년아, 너만 너의 인생에 대하여 꿈을 꾸는 것이 아니란다. 나도 너에게 꿈을 꾼단다. 단, 내 꿈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준단다".


그제서야 이 말씀이 열렸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자의 특징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어요. 사랑하는 자에게 그렇다는 것이죠. 


사랑이 고난을 이기게 하고 고난속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지요. 고난은 이해할 수 업슨 불합리함이지만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있어요. 우리의 삶은 그분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는 날입니다. 

사랑의 고백으로 일상을 바라보세요. 너무 멀리 보려고 하지 마셔요. 보이지도 않아요. 너무 큰 꿈을 꾸려고 하지마셔요. 큰 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셔요. 그러면 하나님이 꿈을 주셔요. 


아이들에게 꿈을 가르치세요. 하나님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세요?. 저희 가정과 교회는 매일 성경으로 묵상을 해요. 그날의 매일성경 묵상적용점이 가정, 교회, 나라의 지도자 이름을 적고 기도제목을 적으시요 였어요. 

우리 아들이 가정-우리아빠-잘하고 있다, 교회-김병년목사-잘하고 있다, 우리나라-박근혜대통령-기도가 많이 필요하다. 얼마나 경건합니까?.


어느 토요일 아침이어요. 일어나라고 하니가. 아들만 일어나요. 

"아빠, 우리집에는 왜 남자만 일을해?. 가슴아픈 질문이지요. 

"그래, 우리 도망갈까". 

엄마는?. 아들이 심각하게 물어요. 

"버릴 수있는거야". 


쓸데없는 소리하지마요. 엄마의 남편은 아빠고, 아빠의 아내는 엄마예요. 죽을 때까지 엄마돌봐요. 

아들이 부부가 무엇인지알고 있어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요.




십자가 능력, 보배(-4. 코스타 강의)

2014년 7월 3일 오전 6:51

'내가 수치를 당하리라' (에스겔24:16).


에스겔이 말씀을 받는 날 하나님이 말씀하셔요. "에스겔아, 너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번 쳐서 빼앗으리리 너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말며 죽은 자를 위하셔 슬퍼하지 말고 조용히 탄식하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발에 신을 신고 입술을 가리지 말고 사람이 초상집에서 먹는 음식물을 먹지 말라".

말씀을 전하고 돌아오니 아내가 죽어요. 하나님이 말씀하셔요. 초상집을 만들지 말라.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설명하십니다. 왜 초상집을 만들지 말라는지. 


저도 물었어요. 왜요. 

병년아 너 아내가 아파서 아프지?. 네라고 저는 대답을 드렸어요. 

그러면 내 아내는 누구냐?. 예, 하나님의 아내요. 교회지요. 

그러면 아내로부터 버림받은 나를 위해서 울어주는 사람은 없냐?. 


"내 성소는 너희 세력의 영광이요 너희 눈의 기쁨이요 너희 마음에 아낌이 되거니와 내가 더럽힐 것이며 너희의 버려둔 자녀를 같에 엎드러지게 할지라".(겔24;21).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더럽히며, 하나님이 자기의 자녀들을 버려둘 것이라고 하셨다. 한마디로 수치를 당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5년째 공영방송 어느 프로그램에서 출연을 요청받고 있어요. 저와 같은 사람을 초청해줘서 고맙지요. "왜 저를 불러요". 담당피디가 교체될 때마다 묻지요. 그러면 동일한 대답을 들어요. "한국교회가 어렵고, 큰 교회들이 어쩌고 저쩌고....". 일단은 큰 교회도 큰교회지만 작은 교회도 마찬가지이지요. 마지막으로 담당피디들이 하는 말이 있어요. "한국교회의 이미지를 조그 바꿀 수 있습니다"고 하셔요. 

그러면 저의 답은 이것입니다. 교회의 이미지로 방송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인의 변화된 삶으로 바뀝니다. 제가 출연하면 저의 이름이 유명해지고, 제가 쓴 책이 조금 더 나가고, 우리교회로 떠돌아다니는 성도들 몇몇이 오겠지요. 그게 끝이랍니다. 

저의 대답은 동일합니다. 왜 제가 거절하는 줄 아셔요. "지금은 수치를 당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부흥을 부르짖을 때가 아니고 자기 눈을 찌르고 자기 자녀들을 더럽히는 하나님의 자기 수치를 견딜 때입니다. 

지금은 능력의 하나님이 아니라 수치의 복음을 들고 서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어느날 하나님이 이 수치를 다 거두어주시는 날, 우리는 웃을 것입니다. 교회의 삶도, 가정의 삶도 거룩함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에게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함이라". 우리가 주인공이 아니어요. 그분, 십자가가 주인공, 능력이어요. 


사랑하세요. 그러나 주인이 되지는 마세요. 

가족을 사랑하세요. 그러나 주인은 되지 마셔요. 

세상을 사랑하셔요. 그러나 주인 노릇하지 마세요.

교회를 사랑하세요. 그러나 주인노릇하진 마셔요.




코스타 강의안(고통) 김병연 목사 강의안 


선택식 강의 - 바람불어도 좋아!.(고통중과 함께 사는 법) 

2014/07/02,03. 시카고 코스타

본문 : 시편78;38-39


"오직 하나님은 긍휼이시므로 죄악을 덮어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쏟아내지 아니하셨으니 그들은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라". 


제가 맡은 강의는 의미가 너무 강렬해서 감당하기 어려워요. 


[고통과 함께 사는 법]. 


너무 주제가 선명해서 강의 들어오고 싶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래도 많이 들어오셨네요. 실제는 저는 제 자신이 병에 걸린 것이 아니고 아내가 병에 걸렸기 때문에 엄격하게 말해서 제가 환자와 살고는 있지만 제 자신의 고통이 아닐 수 있어요. 본인이 겪는 고통과 고통을 겪는 사람을 돌보는 것 사이는 다르지요. 환자를 돌보다 보니 어느새 10년의 시간이 지나갔다. 내가 견딘것이 아니고 시간이 나를 이곳까지 데려왔다. 


그래서 난 고난이 축복이다는 말을 싫어한다. 이런 말들이 고난 받기 전에는 그러려러니 했지만 실상 고통에 들어가니 정말 싫었다. 누가 고통을 축복이라고 할까요? 고통을 위장된 축복이라고 하면 아픔은 사라져요. 축복을 받기 위해서 고통을 참으시겠어요. 다시 말하지만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다. 


오죽했으면 인생을 생로병사라고 했을까. 인생자체가 늙고, 병들고, 죽음이라고 했다. 이런 과정 자체를 사람들은 고난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남들이 다 겪는 일들이니까.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걸리지 않은 병에 걸리고, 사고를 당하고, 아픔을 겪는 것을 고난이라고 한다. 인생의 과정 자체가 연약함인데 병들지 않을 수 있을까. 감당할만한 질병은 호들갑을 떨지 않으면서 고칠수 없는 암을 만나면 엄청난 좌절을 겪는다.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이 있을까. 바람은 늘 분다. 공기의 흐름인 바람이 늘불지만 사람들은 이 바람을 인생의 고통, 불현듯 찾아오는 고난을 바람이 분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을 바람이라고 한다. 바람이 늘 불듯이 하나님의 임재가 끊어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바람이 보이지 않듯이 하나님도 보이지 않게 역사하신다. 성경은 하나님의 임재를 바람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래서 인생에 부는 고통의 바람은 싫지만 그 고난의 바람을 타고 오시는 하나님은 좋다고 표현한 말이다. 


A. 흔들리며 피는 꽃

도종환 선생님의 시에서 따온 표현이다. 

흔들리며 피는 꽃이다.

 인생을 꽃을 피우기 위해서 다 바람에 흔들리고 비에 젖어야 한다. 

여러분은 하나의 꽃입니다. 이 꽃은 바람에 흔들리고, 비에 젖고 바람에 꺾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상해도 꽃은 피는 것이죠. 


제가 너무 낭만적으로 아픔에 대하여 접근하고 있지요. 그러나 실상은 아니어요. 저의 삶을 봐도 마찬가지여요. 아내는 두번에 걸쳐서 큰 고통을 겪고 있어요. 한번은 뇌경색으로 쓰러졌고요. 두번째는 화상을 입어서 다리를 잃었어요. 


1) 내일이 닫힐 때 - 다이어리/느림/미래에서 오늘로.


아내가 아프고 난 후에 제 삶의 가장 큰 변화는 다이어리를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정이 필요없었다. 언제나 똑 같은 일들로 가득찼으니까. 일정을 세울 필요가 없다!. 

삶이 느려졌다. 혼자서 빨리가던 길도, 이제는 천천히 아내를 생각하며 가야했다. 환자를 태우고 달릴 수 있는 일상은 없다. 내 삶의 무게중심을 뒤로 당겼다. 

일정도, 속도도 없으니 당연히 삶의 시제가 현재로 옮겨왔다. 이전에는 미래를 위해서 준비하던 것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제는 아내를 돌보는 것이 대부분이다. 오늘을 사는 것이 삶이 되었다. 


2) 가시에 꽃이 핀다 - 사고의 전환/하나님이 가시다


고난은 생각하게 만든다. 환자는 다 신학자가 된다고 했다. 생각하게 된다. 고난은 삶을 보는 눈을 아주 근원부터 따지게 만든다. 왜?라는 질문을 달고 산다. 질병의 원인과 과정을 따진다. 습관적으로 남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생각하며 따진다. 

가시와 장미꽃은 한몸이다. 사람들은 이 둘을 분리하려고 한다. 불가능하다. 삶을 보는 눈이 열렸다. 하나님이 만들었다. 붙여 두셨다. 과정으로 이해를 해야 한다. 

시지어 하나님이 인생을 찌르시는 분이라는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이 꽃만 주시지도 않고 가시도 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삶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3) 상한 갈대처럼 - 약해짐/슬픈 일상/


뇌경색을 입고 4년, 그리고 다시 화상을 입었다. 다리를 잃었다. 존재의 모습은 자꾸 일그러지고 상해서 깨진다. 아내의 체형이 변했다. 도저히 보기 어렵다. 

그러나 살아있다. 숨쉰다. 호습이 생명이다. 몸이 아니다. 약하고 부셔지기 쉬운 몸이 아니라 생명은 호흡을 통하여 수명을 잇는다. 능력을구할 일들이 없다. 환자도, 의사도 약을 먹이라고 권면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보호자들의 판단으로 거부하였다. 


연약함을 수용하면 눈물, 슬픔이 찾아온다. 슬픔은 도저히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일들속에서는 잘 안 나타난다. 약함은 인간이 수용하는 방법이 눈물이다. 아무것고 할 수 없는 적막감이 몰려온다. 


도종환 선생님은 이 시를 다 같이 읽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B. 천천히 함께 걷는 길


아픔이 제게 준 가장 큰 변화는 인간에 대한 이해이다. 고통을 통하여 나의 숨은 인격이 드러났다. 나의 분노, 외로움, ...등 은밀한 것들을 드러나게 하였다. 


4) 나도 인간입니다-성적인 유혹/친밀함에 대한 욕구


목회자에게 금기사항이 있다. 성적인 유혹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사람일거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목사님은 그렇게 해주지 않기를 바란다. 유혹 자체를 인정하지만 그 유혹에 걸려넘어지지 말기를 바란다. 


부부의 그리움은 성적인 연합이다. 성적인 연합은 부부만 누릴 수 있다. 수없이 잦은 자위행위를 하며 지나간다. 이 시간동안 나는 나를 이해하였다. 죄보다 더 무서운 것은 정죄라는 것을. 

그러나 이 욕구가 바로 나를 새롭게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하였다. 친밀함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졌다. 


5) 좀 울게 내버려다오- 감사라는 폭력/자연스러움/ 


자원하지 않는, 아픔이 끝나지 않은 사람에게 감사는 폭력이다. 감사를 함으로 하나님을 조종하려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다. 그것도 비교해서 감사한다. 비교할 때 나보다 못한 사람하고 비교해서 감사한다. 이런 감사는 다 조건적인 감사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울 수 있는 여유를 준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소연하게 하고, 불평하고, 하소연 할 수 있는 시간을 준다. 이것을 거세하는 신앙은 믿음이 아니라 인간성을 파괴하는 괴물이다. 

난 아직도 사건자체를 감사하지는 못한다. 사건이 주는 의미는 감사한다. 


6) 돈없어도 살아요-간병비/공급하심/나눔


아내를 간병하면서 들어간 돈은 무려 3억 5천만원이 넘었다. 하나님은 매달 채워주셨다. 그러나 최근에 경제사정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10년동안 채워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여기까지 아내를 돌볼 수 있었다. 

간병비를 잘 지혜롭게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환자를 돌보는데 가장 안정되어야 하는 것은 집이다. 그러나 나는 집이 가장 불안정하다. 전세금 이자내기도 바쁘다. 

나에게 필요를 채워주시지만 하나님은 동시에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돕게 하게 하신다. 우리의 인생은 마치 파이프와 같다. 은혜를 흘려보내는 통로이다. 이동침대를 교환하게 하였다. 도서비를 후원하게 하였다.


C. 그날까지 


7) 임마누엘-항상 함께 하심/아내의 언어를 배움


질병속에 가장 어려운 것은 함께 머무는 것이다. 변화지 않는 상황을 견디는 것이다. 사실 아내를 돌보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아내와 함께 있는 것이다. 아내가 움직이지 못하기에 움직이는 남편이 곁에 머물러야 한다. 


그러나 건강한 욕심많은 남편이 그자리에 머무는 것이 어렵다. 그래서 아내를 움직이기로 했다. 아내를 데리고 커피숍에 간다. 아내의 친구를 만나러 간다. 대학교 때 가르쳐준 선생님들을 만나러 간다. 아내와 함께 할 수 있는 장비를 만들고 공간을 만들었다. 이렇게 하자 아내는 환자에서 관계를 맺는 인간이 되었다. 아내의 언어를 배운 것이다. 


8)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언약/죽음에 대한 그리움/신실하게 진실하게


삶은 언약이다. 하나님과 언약이고 배우자와 언약이고 교회와 언약이다. 이 언약을 결혼할 때는 잘 몰랐다. 그러나 여기에 엘리자베스 악트마이어 가 쓴 언약의 의미가 있다. 


나는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당신과 함께할 것입니다. 당신이 내일 소경이 된다고 할찌라도 나는 당신과 함께 하겠습니다. 당신이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당신과 함께 하겠습니다. 서로 싸우며 화낼 때가 있지만 금방화해 하기 위해서 노력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아무러 희망이 없는 것 같을 때, 당신을 이해하고 관계를 정상으로 회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결혼생활이 지루하고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같을 때, 관계를 개선할 수 있음을 믿고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는 말씀이 주는 고달픔이 싫었다. 성적인 면에서도 순결하고 정서적인 면에서 순결하도록 요구하였다. 


9) 하나님의 전능-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전능/십자가의 능력


질병으로 인하여 고통당할 때 사실은 하나님의 성품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 '없는 것도 있게 만드시는 하나님'. 소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믿음 때문에 더 고통을 당한다. 하나님이 고쳐주시면 되는데 안고치신다. 능력있는 분이 치료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고통 가운데로 임하신다는 것이다. 십자가가 그것이다. 내게 있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전능하심은 만물을 만드시는 창조의 순간과 만물을 회복시키는 마지막 부활의 날에 일어나는 일들이다. 


내가 사는 동안의 전능하심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능력의 의미에서 전능하심이 아니고 십자가 사랑의 전능하심이다. 고통당하는 죄인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죽으시는 사랑의 전능이다. 고치지 않아도 이 사랑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다.


D. 끝내는 말(Concluding Remark)


고통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품는 것이 삶이다. 품는다고 고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냥 일상을 살아간다. 이 일상의 삶에 가장 잘 적응하는 사람들은 어른들이 아니고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지금을 살아가는 지혜자들이다. 어른들은 간병을 걱정할 때 아이들은 엄마의 침대로 장난감 놀리듯이 논다. 


고통중에 생명이 있다. 아픔을 느끼는 것도 생명이 있어서다. 고통을 통해서 생명의 질김을, 삶의 고단함을, 그리고 현재의 중요함을 깨닫는다




낯선길에선 익숙한 느낌 (신용환)

사람중에는 가보지 않은 길을 만드는 사람이 있고 

익숙한 길로 가길원하는 사람이 있다.


가보지 않은 길을 만드는 사람은 길이 없는 길을 길이 되게 하는데 필요한 사람이고 익숙한 길을 가는 사람은 만드러진길을 길스럽게?다지는 일에 필요한 사람이다


나는 가보지 않은 길을 가고 만들기를 즐긴다. 

하지만 아내는 익숙한 길을 가는 것을 즐긴다.


나는 오늘 아내와 가보지 않은 낯선 길에 가서 좋았다고... 아낸 익숙한 남편과 가보지 않은 길을 익숙한 느낌으로 갈수 있어서 좋았다고 한다.


함께함이 낯선 길을 익숙하게 만든다.


익숙한 길도 원래는 낯선 길이었고
길을 만드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만든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길에서 익숙함을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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