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 예레미야 애가 2:1822 >


제목 : <예레미야애가 2:18-22>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2:18-22]

(2:18) 그들의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딸 시온의 성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를 쉬게 하지 말지어다

(2:19) 초저녁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각 길 어귀에서 주려 기진한 네 어린 자녀들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 하였도다

(2:20)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주께서 누구에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 여인들이 어찌 자기 열매 곧 그들이 낳은 아이들을 먹으오며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어찌 주의 성소에서 죽임을 당하오리이까

(2:21) 늙은이와 젊은이가 다 길바닥에 엎드러졌사오며 내 처녀들과 내 청년들이 칼에 쓰러졌나이다 주께서 주의 진노의 날에 죽이시되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도륙하셨나이다

(2:22) 주께서 내 두려운 일들을 사방에서 부르시기를 절기 때 무리를 부름 같이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시는 날에는 피하거나 남은 자가 없나이다 내가 낳아 기르는 아이들을 내 원수가 다 멸하였나이다

 


오늘 본문 예례미야 애가 2장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날 >에 대한 예레미야의 심정과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 어찌하여 >라는 애가의 원제목을 가지고 있는 예레미야 애가는 처참하고 비참하고 절박하게 여호와의 진노의 손아래 놓여있는 유다백성과 예루살렘의 형편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21절 처음에 < 슬프다 여호와의 진노가 > 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2:1) 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딸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가 이스라엘의 아름다움을 하늘에서 땅에 던지셨음이여 그의 진노의 날에 그의 발판을 기억하지 아니하셨도다

이제 2장 마지막절에 <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날 >에 대한 노래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2:22) 주께서 내 두려운 일들을 사방에서 부르시기를 절기 때 무리를 부름 같이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시는 날에는 피하거나 남은 자가 없나이다 내가 낳아 기르는 아이들을 내 원수가 다 멸하였나이다

 

한 마디로 예레미야 애가 2장의 전체의 분위기는 < 여호와가 화가 나셨다. 그래서 슬프다 >입니다. 이러한 현실에 놓여 있는 유다백성들의 상황들을 예레미야는 보았고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당하지 말았어야 할 ... 당하지 않을수 있는 고통을 당하는 유다백성들을 보면서 처음에는 슬픔마음으로 애곡합니다.

 

보통 어떤 심각한 고통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몇가지 심리적 단계를 거칩니다. 처음에는 이 고통의 원인을 찾습니다. 그래서 왜? 라는 의문을 던지고 질문을 합니다. 그 다음에는 이 고통의 원인에 대해서 원망하고 불평하고 후회하고 탄식합니다. 때로는 화를 내고 분노합니다. 그 다음에는 이 고통속에서 슬퍼하고 애곡하고 절망하고 절규합니다. 그 다음에야 비로서 고통의 해결을 찾습니다.

 

이러한 심리적인 단계가 이 예레미야애가의 5장의 전체의 흐름속에 담겨 있습니다.

오늘 2장에 보여지고 있는 예레미야 애가의 노래속에는 이러한 심리적인 흐름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2장에는 예레미야가 갖고 있는 애끊는 마음, 애간장이 타는 마음이 고스란이 담겨 있습니다. 어제 읽은 본문 11절에

(2:11)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보통 한국 말에서 < 애끓는다 애간장이 탄다 > 할 때 이 < >는 사람의 창자를 말합니다. < 속이 상하고 속이 끊어질 듯 고통스럽다 >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예레미야의 마음은 1장에서는 3인칭으로 표현하던 것을 2장에 들어서면서 1인칭으로 분위기를 바꿔 버립니다. 이러한 인칭의 변화는 자신이 2장에서 묘사하고 있는 유다백성과 예루살렘의 상황과 마음 그리고 고통을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다백성들이 여호와의 진노의 날에 여호와의 진노의 채찍을 받는 것인 마치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통으로 여기고 감정이입을 하고 고백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있는 유다의 현실들을 예레미야는 어제와 오늘의 본문에서 처참하게 현장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성속에서 죽임을 당하고 예루살렘은 바벨론의 나라에 포위되어서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주고 가고 있습니다. 더 이상 저장되어 있는 포도주와 곡식은 없습니다. 심지어 먹을 것이 없어 아이들의 인육을 먹는 이 처참한 현실...

아이들은 엄마의 품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사람은 길거리에서 기절한 상태로 놓여 있습니다. 이방나라는 처녀와 청년들을 처참하게 죽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에도 여전히 거짓선지자들은 헛된 위로 거짓된 희망만 말하고 있습니다.

이방나라의 비웃음소리와 박수소리가 들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예레미야는 애끓는 마음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울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절박한 심정으로 울부짖는 마음으로 절규하듯이 탄원하고 있습니다.

(2:20)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주께서 누구에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 여인들이 어찌 자기 열매 곧 그들이 낳은 아이들을 먹으오며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어찌 주의 성소에서 죽임을 당하오리이까

"주님, 살펴 주십시오. 주님께서 예전에 사람을 이렇게 다루신 적이 있으십니까?

어떤 여자가 사랑스럽게 기른 자식을 잡아먹는단 말입니까?

어찌 주님의 성전에서, 제사장과 예언자가 맞아 죽을 수 있습니까?

예레미야 애가는 <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백성들에게 >

너희가 어찌 주의 음성을 듣지 않았단 말인가? 어찌하여 이러한 일들을 자초했는가 ? 하는 책망의 노래입니다.

그리고 <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는 > 주여 ! 어찌 이러한 일을 허락하셨습니까? 어찌 이런 일을 당할수 있단 말입니까? 라고 탄식하는 노래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모든 처참한 일들의 원인이 <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임을 압니다. > 그리고 이것이 < 여호와께서 이미 정하신일을 행하시고 옛날에 명령하신 예언이 성취 >되는 일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될줄 알지만 그렇게 되고 있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래도 주님 미워도 다시한번 ... 이라는 심정으로 예레미야는 1인칭으로 자신의 감정과 심정을 담아 자기백성들을 향해 노래하고 탄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예레미야의 탄식이면 탄원이며 절규입니다. 상황의 처절함과 심각함 그리고 절박함을 담은 예레미야의 기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레미야의 기도는 혼자 하는 기도원하고 있지 않습니다. 1인칭인 자신과 3인칭인 유다백성들과 같이 기도하길 요청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예레미야는 18-22절에 걸쳐서 7번의 명령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5번의 명령과 2번의 금지의 명령을 외치고 있습니다.

먼저 5번의 명령을 찾아봅시다. < 흘릴지어다. 얼어나, 부르짖을 지어다. 쏟듯 할지어다. 손을 들지어다> 2번의 금지 명령 < 쉬지 말고, 쉬게하지 말지어다>입니다.

7번의 명령형이 반복되었다는 것은 완전한 회개, 혼신을 당한 회개를 요청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7이라는 수가 완전함과 확실함을 의미하듯이 <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리고 쉬지 말고 흘리며 눈동자로 쉬게 하지 말고 마음을 물같이 쏟고 손을 들고 부르짖으라 >고 요청하고 있는 것이죠.

[2:18-19]

(2:18) 그들의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딸 시온의 성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를 쉬게 하지 말지어다

(2:19) 초저녁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각 길 어귀에서 주려 기진한 네 어린 자녀들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 하였도다

여기서 < 딸 시온의 성벽 >은 무너지 성벽의 돌들 조차도 이러한 부르짖고 기도하는 일에 동참하라는 의미입니다.


< 초저녁에 일어나 >라는 의미는 보통 유대인은 밤을 3경으로 나누는데 그 처음 시간을 말합니다. 모두가 쉬고 잠잘 준비를 하는 시간에도 일어나 부르짖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이 시간대만 기도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거듭 거듭 반복해서 여호와께 나아가라는 의미입니다.

이 구절을 새번역에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 온 밤 내내 시간을 알릴 때마다 일어나 부르짖어라. 물을 쏟아 놓듯, 주님 앞에 네 마음을 쏟아 놓아라. >

참 멋지 표현이 나옵니다. < 마음을 주의 얼굴앞에서 물쏟듯하라 > 이것은 마음속에 있는 감정을 숨기지 말고 내어 놓으라는 뜻입니다.

(62:8)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 손을 들지어다 >는 의미는 하나님께 항복을 선언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절박한 기도와 탄원의 기도를 예레미야가 요청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예레미야의 슬픔의 애원을 들으면서 이렇게 예레미야 애가를 정리해보았습니다.


예레미야는 고통의 이유를 말했다. 그리고 슬픔을 노래했다.

그러나 고통과 슬픔을 소망의 기도로 바꾸고 있다.

예레미야는 고통받는 이들을 향해 마음에 애가 쓰이고 있다.

그리고 슬픔을 당한 이들을 때문에 애가 탄다.

그래서 어떻게 할수 없어서 애끓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다.

예레미야는 우리의 죄악으로 인한 끓어 오르는

여호와의 분노를 자신의 눈물과 기도로 식히고 있다.








  • <예레미야 애가 2: 11-17>
  • 누가 너를 고쳐줄소냐 


# 설교문중 그림 인터넷 갈무리함 

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 예레미야 애가 2:1117 >

제목 : <예레미야애가 2:11-17> 누가 너를 고쳐줄소냐




 

[2:11-17]

(2:11)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딸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 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기절함이로다

(2:12) 그들이 성읍 길거리에서 상한 자처럼 기절하여 그의 어머니들의 품에서 혼이 떠날 때에 어머니들에게 이르기를 곡식과 포도주가 어디 있느냐 하도다

(2:13) 딸 예루살렘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증거하며 무엇으로 네게 비유할까 처녀 딸 시온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비교하여 너를 위로할까 너의 파괴됨이 바다 같이 크니 누가 너를 고쳐 줄소냐

(2:14) 네 선지자들이 네게 대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보았으므로 네 죄악을 드러내어서 네가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지 못하였도다 그들이 거짓 경고와 미혹하게 할 것만 보았도다

(2:15) 모든 지나가는 자들이 다 너를 향하여 박수치며 딸 예루살렘을 향하여 비웃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온전한 영광이라, 모든 세상 사람들의 기쁨이라 일컫던 성이 이 성이냐 하며

(2:16) 네 모든 원수들은 너를 향하여 그들의 입을 벌리며 비웃고 이를 갈며 말하기를 우리가 그를 삼켰도다 우리가 바라던 날이 과연 이 날이라 우리가 얻기도 하고 보기도 하였다 하도다

(2:17) 여호와께서 이미 정하신 일을 행하시고 옛날에 명령하신 말씀을 다 이루셨음이여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무너뜨리사 원수가 너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게 하며 네 대적자들의 뿔로 높이 들리게 하셨도다

 

 


 우리가 묵상하고 있는 있는 예레미야 애가는 

  이스라엘백성들이 상가집에서 불려지는 노래입니.

  이 예레미야 애가는 알파벳 22글자에 맞춘 5편의 노래입니다.


그래서 모든 1-5장까지 22절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3장은 각 문자바다 3개의 절을 만들어서 22X366절로 되어 있습니다. 일종의 운율에 맞는 노래입니다. 흔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외우기 쉽게 기억하기 쉽게 하기 이해서 일부러 히브리어 알파벳에 맞춘것입니다.


이 애가의 노래의 원래 제목은 < 어찌하여 >라는 뜻을 갖고 있지요. 원래 예레미야 애가의 히브리식 제목은 < 어찌하여 >라는 뜻을 같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패망해가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 진노를 경험하고 있는 예루살렘을 의인화 하여 마치 시온의 딸의 죽음을 노래하듯 < 슬픈 애가 >를 부르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계속 하나님께로 돌아오길 그리고 하나님 반대편으로 가던 길을 멈추어서기를 요청하였지만 유다왕과 유다백성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선택하고 결정하는 대로 행했고 그 결과 < 올것이 오고 말하고 말하것이 이루어지고 말았습니다. >

 

패망하는 유대백성들이 이방나라의 손에 넘어가는 가는 것보다 더 예레미야의 마음을 안타깝게 만들었던 것은 < 충분히 이 일들이 일어나지 않게 할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 기회를 놓쳐버렸다>는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 이면에 하나님의 진노의 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2:17) 여호와께서 이미 정하신 일을 행하시고 옛날에 명령하신 말씀을 다 이루셨음이여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무너뜨리사 원수가 너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게 하며 네 대적자들의 뿔로 높이 들리게 하셨도다

 

우리가 삶의 살면서 가장 안타까운 때는 < 경고를 받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 것과 버러질 같은 일이 일어날 때 >입니다. 그 일의 결과와 결론이 뻔히 보일 때 아직 그 일을 멈추지 못하고 돌아서지 못하는 때가 가장 안타깝습니다.

 

오늘 이 < 애가 >를 쓰고 있는 예레미야는 바로 그런 안타까운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수없이 경고하고 권면하고 전했던 그 경고가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그 안타까운 현실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께 기름부은 왕은 도망하려고 시도했으나 체포되었습니다. 제사장과 선지자들은 모두 성소에서 살해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맹렬한 진노로 이스라엘의 모든 군대와 병력을 무력화 시켰습니다. 그토록 유다백성들이 사랑했던 예루살렘 성은 철저하고 무너지고 파괴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 어찌하여 > 이런 일이.. 라고 할 만하는 그 일들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 예레미야 애가 2장에는 < 예루살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징벌 >이 어떠한 수준인지? 분명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관심의 초점은 의인화된 예루살렘으로부터 하나님께서 행하고 계신 하나님께서 주도하고 계신 이 진노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 눈으로 보고 있는 안타까운 유다의 현실을 슬퍼하며 울부짖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5가지의 현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패망의 풍경과 같은 모습입니다.

 

1) 예루살렘이 이방나라의 군대에 의해서 포위되어서 당해서 굶주림과 배고품

[2:11-12]

(2:11)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딸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 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기절함이로다

(2:12) 그들이 성읍 길거리에서 상한 자처럼 기절하여 그의 어머니들의 품에서 혼이 떠날 때에 어머니들에게 이르기를 곡식과 포도주가 어디 있느냐 하도다

 

먹을 것을 구하며 어미의 품에서 목숨을 잃어가는 아이들을 묘사하며 예레미야는 울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어찌하여 이런 참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단 말인가 !

 

2) 그러한 현실속에서 헛된 위로를 슬퍼하는 친구들을 필사적으로 위로하는 사람들의 모습

    이미 절망이 가득한 현실들 

(2:13) 딸 예루살렘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증거하며 무엇으로 네게 비유할까 처녀 딸 시온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비교하여 너를 위로할까 너의 파괴됨이 바다 같이 크니 누가 너를 고쳐 줄소냐

 

어찌하여 이 현실을 비유하며 비교할까? 그리고 어찌하여 누가 이 현실속에서 위로하며 고쳐줄수 있으랴 !

 

3) 자신들의 거짓말을 믿도록 백성들을 격려하며 예루살렘의 멸명을 서둘러 불러오고 있는 거짓선지자들의 모습

(2:14) 네 선지자들이 네게 대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보았으므로 네 죄악을 드러내어서 네가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지 못하였도다 그들이 거짓 경고와 미혹하게 할 것만 보았도다

 

어찌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에 사로잡혀 있고 어찌하여 거짓 경고와 미혹을 보고 있는가?

 

4) 세상의 조롱거리고 비웃음 거리가 되어 버린 현실

(2:15) 모든 지나가는 자들이 다 너를 향하여 박수치며 딸 예루살렘을 향하여 비웃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온전한 영광이라, 모든 세상 사람들의 기쁨이라 일컫던 성이 이 성이냐 하며

(2:16) 네 모든 원수들은 너를 향하여 그들의 입을 벌리며 비웃고 이를 갈며 말하기를 우리가 그를 삼켰도다 우리가 바라던 날이 과연 이 날이라 우리가 얻기도 하고 보기도 하였다 하도다

 

어찌하여 우리가 저들의 비웃음 거리고 되고 저들의 삼킨바 되었는가 ?

 

5) 재앙을 당한 남은자들이 낙망하여 하나님께 끊임없이 울부짖고 있는 모습

[2:18-19]

(2:18) 그들의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딸 시온의 성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를 쉬게 하지 말지어다

(2:19) 초저녁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각 길 어귀에서 주려 기진한 네 어린 자녀들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 하였도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유다의 멸망의 현실을 지켜보고 그것을 < 어찌하여 > 라는 노래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예레미야의 심정으로 바꿔서 리메이크 해서 불러 보면 이런 노래가 될것입니다.

어찌하여 이런 참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단 말인가 !

어찌하여 이 현실을 비유하며 비교할까?

그리고 어찌하여 누가 이 현실속에서 위로하며 고쳐줄수 있으랴

어찌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에 사로잡혀 있고

어찌하여 거짓 경고와 미혹을 보고 있는가

어찌하여 우리가 저들의 비웃음 거리가 되고 저들의 삼킨바 되었는가 ?

어찌하여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려야 되지 않겠는가?

어찌하여 너는 네 마음을 주의 얼굴앞에 물쏟듯 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오호라.. 나는 보았네, 나는 보고 있네 이러한 우리네 현실을

 

사랑하는 여러분

이러한 예레미야의 울부짖음과 슬픈노래가 그 당시 유다만의 현실입니까?

 

구속사적 성경해석의 고전인 반더발 성경연구라는 책을 쓴 < 반더발 >은 이 유다의 현실을 유다 나라의 타락과 패망을 보기보다는 < 교회의 타락과 패망 >을 묵상해야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은 구약의 교회입니다. 유다의 백성과 지도자들은 구약의 교회의 성도이며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예레미야의 애가는 < 타락한 교회의 이야기이며 애곡하는 교회 >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점에서 이 예례미야가 슬퍼하고 안타까워하고 있는 구약의 유다의 상황과 오늘의 교회들의 상황과 그리고 우리의 영적인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묘사하고 있는 유다의 패망의 풍경이 그래로 오늘 한국교회와 이민교회안에서 부여지는 풍경들입니다.

그리 낯설지 않은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들에 대해 예레미야의 심정으로 울고 기도하는 이들이 많이 않다는 것이 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한국교회안에 일어나는 뉴스들을 들을 때면 < 어찌 이런일이 ... >라고 생각할 만한 기상천회한 뉴스들이 많습니다. 교회안에서 그리고 교회밖에서..

 

이미 교회가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비웃음 거리가 된지 오래입니다.

이미 사람들은 교회지도자들과 목회자들을 신뢰할수 없는 사람으로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배부른 비만의 상태인 한국교회는 물이 있으나 먹을 물이 없는 먹을 것이 있으나 배고픈 영적인 현실속에 놓여있습니다.

 

세상의 문화와 세계관에 포로가 되어서 영적인 아사 직전에 놓여있습니다.

교회안에서 서로를 위로하고 서로를 치유하지만 세상을 위로하고 세상을 치유하는 일에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주의 복음과 진리의 말씀을 전해야하는 교회와 목회자들은 거짓된것들이 미혹되어 거짓된 것들만 전달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더 이상 교회를 신뢰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냥 비웃음거리가 되어 버린 것이 오래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현실속에서 우리가 정작해야할 < 하나님앞에 울어야할 참 다운 회개와 돌이킴 >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 어찌하여 ... > 라고 바라보고 만 있습니다.

저 역시도 이러한 판단과 진단을 말하고 있지만 < 당신은 이 일을 위해 뭐하고 있냐 ? > 물으면 자신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제안에 이러한 예례미야의 심정을 회복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먼저 저 자신부터... 오늘의 현실을 바로 보고 예례미야의 시선과 중심을 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예레미야의 혼자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수 없었지만 그는 최소한 그의 마음안에는 하나님의 시선과 중심으로 서 있었습니다.

그래고 계속 선포했고 계속 기도했고 계속 울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제마음에 이런 기도가 있었습니다. 너는 한해동안 우리 교회와 성도들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예례미야의 심정과 마음으로 선포했으면 기도했으면 울부짖어 보았는가? 물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회개했습니다. 예레미야는 < 계속 선포했고 계속 기도했고 계속 울었는데.. 너는 뭐했냐.. 올해도 그렇게 시간만 보내고... 매일의 현실에 집착하면 매일 헛된 감정과 마음에 주목하며 살지 않았느냐 ? > 이렇게 하나님이 저에게 물어 오시는 것 같았습니다.

 

회개했습니다. 죄송했습니다. 더 할말이 없었습니다.

제가 잘할께요 ! 하고 싶었지만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해야죠.. 다시 회복해야죠.

그것이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시닌깐요.

예레미야의 심정으로 계속 선포하고 계속 기도하고 계속 울부짖고 싶습니다.

할수만 있다면 ...

 



 

  • <요한계시록 17: 9 -18>
  • 이기실 터이요 이기리로다. 
  • # 설교문에 그림은 인터넷 갈무리  


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 요한계시록 17:9 18 >


제목 : <요한계시록 17 : 9-18> 이기실터이요 이기리로다.




[ 계 17:9-18]

(17:9)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17:10)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하나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시 동안 머무르리라

(17:11) 전에 있었다가 지금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그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17:12)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과 더불어 임금처럼 한동안 권세를 받으리라

(17:13) 그들이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더라

(17:14)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17:15) 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 바 음녀가 앉아 있는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

(17:16) 네가 본 바 이 열 뿔과 짐승은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의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17:17) 이는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그들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그들의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라

(17:18) 또 네가 본 그 여자는 땅의 왕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하더라

 

 


 




제목 : 이기실 터 이요  이기시리로다.


우리가 계시록을 읽을 때 중요한 태도는 < 분위기를 파악 하는 것 / 이야기를 흐름이 누구에게 향하고 있는가 ? >하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등장하는 대목에서 이 심판이 누구를 겨냥하고 있고 누구를 집중하고 있는지?를 생각해야합니다.

 

계시록 1718장에서는 바벨론의 멸망에 대해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요한사도가 살아있 을때의 삶의 정황이었던 로마제국의 멸망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17장과 182장에 걸쳐서 도대체 바벨론으로 묘사되었는 세력의 힘과 능력은 어떠한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바벨론의 강력해보였던 권세와 능력도 다 망하고 만다고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바벨론의 모습과 멸망을 설명할 때 크게는 2가지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종교적인 바벨론의 멸망입니다


흔히 성경은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의 거짓된 신과 우상을 섬기는 행위를 음행이라고 말하고, 그러한 자들을 창기와 같이 음녀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17장에서 한 음녀, 그 여자를 봅니다. 그 여자는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것들의 어미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여자는 짐승을 타고 나타납니다.


이 상징적인 그림은 로마시대의 문화적인 심볼리즘(symbolism)입니다


요한 사도도 로마시대의 음란하고 패역한 영적인 현실을 그당시의 로마의 종교적인 여신으로 비유합니다. 그 여자가 제공하는 것은 향락과 타락한 문화와 죄악의 즐거움을 제공해는 것이었고 그 여자가 내벹는 말은 다 달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치와 경제를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고 있는 존재이면서 성도들의 믿음을 흔들고 성도들을 망하게 하는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 요한사도가 힘있는 < 그 여자 >라고 묘사하는데 그 당시 배경과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연구하고 이해라때 왜? 요한이 이런 비유와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는가? 생각해야합니다. 그가 보고 받은 환상속에는 그가 일상속에서 듣고 보고 있었던 어떤 이미지를 대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요한사도가 살던 당시인 로마시대의 상황(context), 구약의 그림, 당시에 그들이 알고 있는 신화적, 정치적 사건들 3가지고 고려될 때 정확한 해석을 할수 있습니다. 많이 우리가 이것을 잘 알지 못한다면 요한계시록은 <이 말씀을 원하는 핵심이 무엇인지? 분위기를 파악하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둘째는 정치적인 바벨론의 멸망입니다


특히 그 당시의 가장큰 정치적인 능력자인 로마의 황제의 멸망을 의미합니다. 요한 사도가 계시록을 기록할 당시에 교회들의 상황은 황제를 숭배를 강요받고 있고 그것 때문에 심각한 핍박과 순교를 당하고 있었을 때입니다.


그당시 교회들은 종교적인 로마의 여신이 우상을 섬기는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정치적으로 황제를 섬기도록 강요받는 상황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바벨론을 종말론적 적대세력으로 그리고 짐승과 악의 총체로 묘사하기 위하여 로마의 종교적 특징과 정치적 특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7-18장을 쓰고 있는 요한 의 목적은 그 음녀 바벨론이 어떻게 멸망할것인지를 밝히는 것입니다. 음녀와 짐승으로 대변되는 이들은 같이 망하게 될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 179-15절에는 < 그 여자 >는 어떤 능력의 소유자이며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어떻게 그 여자를 대해야 하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결국 궁극적으로 < 그 음녀, 그 여자 그리고 짐승>은 망하게 될것입니다.

결국 궁극적으로 < 아무리 머리가 많고 뿔이 많고 이상한 짐승을 타고 나타나도 >

만주의 주시오 만왕의 왕이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기실 터이요.

결국 궁극적으로 < 그 어린양과 함께하는 진실한 자들은 > 반드시 이기리로다

 

이것이 오늘 메시지의 가장 중요한 주제이면 분위기입니다.

오늘 본문에 묘사되었는 몇가지 상식적인 이해만 집어 보겠습니다.


여자에 대한 묘사나 짐승에 대한 묘사에서 < 일곱 머리 / 일곱산 >가 나옵니다.

(17:9)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 일곱머리는 일곱왕을 의미합니다. 7일라는 숫자는 완전성을 의미하고 어떤 한 세트를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계시록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숫자가 일곱입니다.

 

  • 3이라는 숫자는 < 하늘의 숫자 > 4라는 숫자< 세상의 나타내는 숫자 >입니다. 그래서 7이라는 숙자는 신적인 세계를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 하늘과 세상 >을 합친수라고 할수 있지요.

 

오늘 본문에는 일곱머리는 일곱왕이요 열뿔은 열왕의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일곱왕이 누구이며 열왕이 누구인지를 구체적으로 아는 것을 쉽지 않습니다.

  • 열뿔에서 10이라는 숫자는 4라는 숫자와 함께 < 세상과 온 우주를 포괄하는 숫자 >입니다. 그리고 뿔은 통상적으로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 그리고 9절에 보면 <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라고 합니다.

여기서 < >이라는 공간은 < 강력한 힘과 통치 >를 의미합니다.

 

계시록에서 등장하는 숫자를 가지고 어떤 이미지를 묘사하는 것을 < 수비학 /Numerology >라고 합니다. 숫자를 가지고 그당시의 어떤 상황과 대상을 비유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12라는 숫자가 12지파, 12제자, 12재앙을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오늘 본문 17장에서 일곱왕은 역사상 차례로 등장하는 로마의 왕들의 목록으로 보기도하고 또 어떤 이들은 계속해서 등장한 제국의 모든 통치자들의 대표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17:10-11]

(17:10)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하나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시 동안 머무르리라

(17:11) 전에 있었다가 지금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그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그당시의 어떤 왕을 의미하는 것인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10절에 나오는 지금 있는 여섯 번째 왕은 < 네로 >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11절에 < 전에 있다가 지금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 >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그당시에 < 네로가 8째 왕으로 부활 >했다고 생각하는 것을 반영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 8이라는 숫자가 바로 < 부활 . 재생 >의 숫자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렇게 상식적으로 이러한 수비학의 내용을 설명하지만 너무 이러한 숫자의 집착하다보면 가장 중요한 요한계시록의 핵심메시지를 놓치는 게 될 경우가 많습니다. 그냥 상식 수준에서만 알아주어야지 이것을 숫자로 파고 들려고 이 숫자가 무엇이냐? 누구냐 ?하면 그 본질을 놓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옛날 건빵안에는 < 별사탕 >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릴 때 건빵을 먹을 때 < 별사탕 > ? 들어 있는지 몰랐습니다. 자라고 알았죠. 그 별사탕인 건빵을 먹을 때 먹에 걸리지 않고 침이 생기도록 하는 보조 식품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건빵을 먹는데 건빵의 본연의 맛은 잃은채 < 별사탕 >만 빼먹습니다.

저는 계시록을 묵상하고 연구하는 방식이 잘못되는 이유중에 하는바로 이 < 별사탕 > 신앙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본연의 맛과 풍미 그리고 분위기는 파악하지 못한채 숫자와 상징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무엇인가?에 집중합니다. 이것이 계시록을 잘못 읽고 묵상하는 우리의 태도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이러한 그당시 로마로 대표되는 큰 음녀 바벨론의 묘사를 통해서 어떤 핵심 분위기를 파악할수 있을까요?


1/ 큰 음녀 바벨론은 짝통이요 모조품이라는 사실입니다.

놀랍게도 오늘 본문을 보면 큰 음녀 바벨론은 대단한 파워과 권세를 가진 존재로 묘사됩니다. 일곱머리고 열뿔을 가지고 일곱머리와 열뿔을 가진 짐승을 타고 나타납니다. 사실 여자의 묘사나 짐승의 묘사는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17장에 나오는 이 짐승의 묘사가 재미있습니다.

(17:8)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사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놀랍게 여기리라

(17:11) 전에 있었다가 지금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그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여기서 나오는 묘사 < 이전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 >

이 표현 어디서 많이 본 표현 같지 않습니까?

(1: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시며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바로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오실분이신 하나님에 대한 패러디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웃어야합니다. 하 하 하


짐승은 짝퉁이구나 ! 하나님 흉내를 내고 있지만 하나님처럼 권세를 부리고 있지만 이건 가짜구나 ! 하는 것입니다.

 

2/ 큰 음녀 바벨론은 일회용입니다.

왜 이 표현을 쓰고 있느냐 하면 오늘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말 때문입니다.

(17:10)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하나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시 동안 머무르리라

(17:12)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과 더불어 임금처럼 한동안 권세를 받으리라

 

여기서 큰 음녀 바벨론이 활동하는 기간이 언제라고 나옵니까?

< 잠시 동안 / 한동안 >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엄마가 밖에 나가면 집에 큰 아이들이 엄마 노릇을 하고 엄마의 권세를 부립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권세는 잠깐동안입니다. 엄마가 돌아오면 그 권세를 소용없어집니다.

바로 여기서 사도요한이 강조하고 싶은 강조점이 여기 있습니다. 바로 우리를 핍박하고 고난을 주는 세력의 힘과 권세는 잠시동안 주어진 것입니다.


결국에는 그 권세와 능력을 다 빼앗기고 멸명하고 말것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가장 중요한 분위기입니다. 이것이 이세상에 주눅들거나 겁먹지 말아야할 우리의 담대함입니다.

 

3/ 큰 음녀 바벨론은 어린양과 싸워 철저하게 패배한다.

(17:14)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바로 이 구절이 요한 사도가 힘주어 말하고 싶어하는 메시지입니다.

< 이기실 터이요 이기리로다 >라는 말씀입니다.

 

만주의 주시오 만왕의 왕이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더불어 싸워주시고 우리는 그와 함께 머물고 있으면 이길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우수운 것은 이러한 큰 음녀 바벨론과 짐승들이 스스로 서로 자멸하는 길을 택한다는 것입니다.

(17:16) 네가 본 바 이 열 뿔과 짐승은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의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이것이 요한계시록이 우리에게 주시는 현실입니다. 지금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고 받아들여야하는 우리의 삶의 내용입니다













  • < 요한계시록 10장 1-11절 > 
  • 복음의 상승효과 
  • # 설교문중 그림 인터넷 갈무리함 

[10:1-11]

(1) 내가 또 보니 힘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 오는데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

(2) 그 손에 펴 놓인 작은 책을 들고 그 오른발은 바다를 밟고 왼발은 땅을 밟고

(3) 사자의 부르짖는 것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외칠 때에 일곱 우뢰가 그 소리를         발하더라

(4) 일곱 우뢰가 발할 때에 내가 기록하려고 하다가 곧 들으니

     하늘에서 소리나서 말하기를 일곱 우뢰가 발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       하더라

(5) 내가 본바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가 하늘을 향하여 오른손을 들고

(6) 세세토록 살아계신 자 곧 하늘과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이며 땅과 그 가운데 있       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7)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8)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책을 가지라 하기로

(9)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10)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           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11)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         여야 하리라 하더라






< 요한계시록 10:1-11> 복음의 상승효과 


우리에게 미스터리 하게만 느껴졌던 계시록이 조금이 그리고 명확히 열려 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계시록은 시트릿(secret)이 아닙니다.

 

계시록은 미스터리같이 보이지만 계시록은 우리의 믿음과 영적이 안목으로 밝히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도한 상상이나 자의적인 해석을 배제하고 성경 속에서 성경을 이해하는 아주 기본적인 해석이 원리를 사용한다면 계시록은 쉽게 이해할수 있게 됩니다.

 

계시록이 어려운 이유는 우리에게 성경적인 background 과 사도요한이 살고 있던 1세기의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스키마(배경지식 background knowledge / schema )가 없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힘든 것입니다.

 

계시록은 철저하게 그리스도중심적이다

그리고 구약에 근거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의 404구절중에 278구절은 구약에 관련 구절을 포함합니다


계시록에는 구약에 대한 관련 구절이나 암시가 500개도 넘는다고 집계되고 있다. 그 중에 시편, 다니엘, 스가랴, 이사야, 에스겔. 요엘, 예레미야 , 출애굽기 와 같은 성경들과 연결되어 있다.

 

 ! 이제 계시록에 자신감을 회복하자. !

 

몇주동안 계시록이란 무엇인가? 왜 우리에게 계시록을 주었을까?를 생각하고 묵상하면서 한가지 이미지가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 4 stop sign / 4 stop signal intersection > 이라는 생각했습니다.

 

계시록은 < 4 STOP SIGNAL >이다.

 


미국에서 운전을 하면서 한국에는 없는 특별한 운전 SIGNAL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4STOP-SIGNAL 이었습니다


4거리.. 2길이 만나는 지점에 STOP 사인이 4개가 있어서 그 지점에 먼저 도착한 차부터 순서대로 진행을 하는 사인입니다

미국에서 운전하면서 가장 긴장하고 조심하고 주의하는 장소입니다.

  

우리가 함께 살펴보고 있는 계시록은 4개의 STOP-SIGNAL이 나옵니다.

 

첫째는 7교회의 STOP 시그날 


두 번째는 7인봉의 스탑 시그널


세번째는 7나팔의 스탑 시그날 


네 번째는 7대접의 스탑 시그널입니다.

 

계시록과 4스탑 시그날이 비슷한 공통점이 있는데

 

1) 서로 다른 두 길이 만나는 CROSS ROAD 라는 점이다.

 

계시록 속에 흐르는 2길은 < 세상과 교회 > 라는 중요한 2길이다

 그 길을 지나는 것이 바로 < 그리스도인 >이라는 것입니다.

 

2) 4스탑 시그날을 지날 때 해야 할 4가지 모습은

 

  • TENSTION (긴장이 있다, 위험할 수 있다)
  • CAUTION(주의가 있다.-고개 돌림)
  • REMEMBER(기억을 해야 한다, 순서를 기억해야 한다)
  • FAITH (믿음이 필요하다)
  • PATIENCE(때를 기다려야 한다. 인내가 )

 

3) 계시록의 등장하는 종말의 때에 중요한 사건은

< 7교회-7인봉-7나팔-7-대접> 이다.


이것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 무시무시한 협박처럼 들리지만.. 

우리가 잊지 말야 할 것은

 

1) 교회와 세상 속에 있는 당연한 긴장이다.

2) 그리스도와 교회는 반드시 승리한다. 인맞은 자는 반드시 승리한다

3) 이러한 때에 우리에게 믿음을 지키고 인내하기를 도전하고 있다.

4) 우리의 신앙은 < 충성과 필승 > 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영적인 4스탑 사인과 같은 7;7;7;7로 대변되는 이 영적인 상황들은 믿는 우리에게 삶에 대한 진지한 긴장감을 유지시키며 동시에 특별한 위로를 경험케 합니다.

 

 종말의 때에 하나님이 이 시대의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 지키는자, 이기는자 가 되라 > 도전하는 것이 계시록입니다


래서 계시록은 전투적입니다. 계시록은 교회 공동체적이며 그리스도 중심적입니다. 계시록은 < 믿음의 승부수 이며 세상을 향한 도전장 >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 제가 4 STOP 시그널 이라고 명명한 7가지 인봉, 나팔, 대접은 이중적인 의미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에 실패하고 복음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대적한 자들에게 심판과 재앙의 사건이지만 믿음에 성공하고 복음을 붙들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소망과 위로의 사건이다.

  

[고후 2:14-16]

 (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5)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로마군인들의 개선행진에서 사용되는 바로 < >입니다. 

이 향이 피워지는 것은 로마군인들에게 승리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적들에게는 패배의 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 로마군인들의 개선행진에 향과 함께 사용되었던 것이

 바로 < 나팔 >입니다. 



나팔소리는 전쟁에 승리한 당당한 군인들에게는 축제의 소리이지만 전쟁에 패한 패장과 포로들에게는 치욕과 절망의 소리입니다.

 

나팔소리는 유대인들에게 몇가지 의미가 있다

나팔소리는 < 신선한 출발과 승리 >이며 < 심판과 회개 >를 부르는 소리이다.

 


1) 백성들이 앞으로 진행할 때 사용된 소리

 

[ 10:2] 은나팔 둘을 만들되 쳐서 만들어서 그것으로 회중을 소집하며 진을 진행케 할 것이라

 

2) 백성들을 전쟁에 소집할때에 사용된 소리

 

(10: 9) 또 너희 땅에서 너희가 자기를 압박하는 대적을 치러 나갈 때에는 나팔을 울려 불지니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를 기억하고 너희를 너희 대적에게서 구원하리라

 

3) 연중가장 거룩한 속죄일, 완전히 새롭게 출발하고 정결의식에 사용된 소리

 

(10:10) 또 너희 희락의 날과 너희 정한 절기와 월삭에는 번제물의 위에와 화목제물의 위에 나팔을 불라 그로 말미암아 너희 하나님이 너희를 기억하리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4) 자유와 희년을 알기 위해 사용된 소리

 

[25:8-9] (8)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년이 일곱번인즉 안식년 일곱번 동안 곧 사십 구년이라(9)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지며

 

5) 매일드리는 제사에 어린양이 제단 불속에 던져지는 순간 나는 소리

 

(대상 16:6) 제사장 브나야와 야하시엘은 항상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나팔을 부니라

 

6) 그리스도의 오심과 연결된 소리

 

(살전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오늘 살펴보게 될 본문은 6째 나팔과 7째 나팔 사이에 끼어든 특별한 메시지입니다. 간주와 같은 10-11장이 등장합니다.. 간지와 같고 .. 막간과 같은 것


 10장은 <두루마리 작은 책을 가진 힘센 천사가 요한과 나누었던 이야기>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복음 배척한 세상의 심판이다. 복음이 이 세상에 어떻게 역사하는가?보여분다.

 

11장은 두증인이 나오는 이 두 증인이 세상에 엄청난 저항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시고 세상에 장차 큰 심판이 온다. 7천사가 7나팔을 불 때 하나님을 찬양한다.

 

1) 힘센천사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천사일 뿐이다.

 

힘센천사 52절에의 보좌가 있는 방에 서 있던 강한 천사와 같은 존재


(5:2) 또 보매 힘 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이 천사는 <가브리엘> 이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타난 그 천사

 

(8:16) 내가 들은즉 을래강 두 언덕 사이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있어 외쳐 이르되 가브리엘아 이 이상을 이 사람에게 깨닫게 하라 하더니

 

(12:7) 내가 들은즉 그 세마포 옷을 입고 강물 위에 있는 자가 그 좌우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하여 영생하시는 자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반드시 한때 두때 반때를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어지기 까지니 그렇게 되면 이 모든 일이 다 끝나리라 하더라

 

< 힘센천사의 모습 >

  • 구름을 입고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 임재
  •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 그 얼굴은 해같고 /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 / 그 오른발은 바다를 밝고 외발은 땅을 밟고 / 그 손에 펴 놓이 작은 책을 들고

 

< 힘세 천사의 위치 >

  •  바다와 땅을 밟고 섰다 ( 3, 3.5.8) : 온세상을 지배함
  •  하늘을 향해 오른손을 들고 하나님에게 맹세했다.
  •  지체하지 아니하리라

 

2) 일곱 우레가 발할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

(복음의 비밀 )

 

- 시편29편 여호와의 소리를 천둥소리로 묘사

- 변화산 사건 때에 3제자에게 < 본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

- 특별한 사건과 계시에 대해서 다 기록하지 말라.

- 하나님의 계시를 신비함과 비밀속에 남겨두는 것이다.

 

3) 지체하지 아니하리라 고 맹세한다

 ( 복음의 종말 )

( 언제 종말이 올것인가? 어느때까지 하시려나이까? 대답 )


(12: 7) 내가 들은즉 그 세마포 옷을 입고 강물 위에 있는 자가 그 좌우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하여 영생하시는 자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반드시 한때 두때 반때를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어지기 까지니 그렇게 되면 이 모든 일이 다 끝나리라 하더라


4) 일곱째 나팔을 불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마치리라 Will be finished) ( 복음의 완성 )

- 일곱째 나팔이 모든 것을 끝낼것이다.

 

(11: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 구약와 신약에 예언된 계시된 하나님의 비밀이 성취된다.

- 복음으로 하나님은 악을 완전히 패배시키고 죄에 대해서 심판하신다.

  

5) 책을 가지라. 작은책을 갖다 먹어 버리라

  ( 복음을 누림 )

 

- 이 책은 펼쳐져 있으며 봉인되지 않았다.

- 책을 먹는 행위는 계시를 받아들고 그것을 수용하는 상징적인 행위이다.

- 이 책은 계시입니다. 먹는 다는 것은 < 흡수시킨다 >는 의미입니다.

- 이것은 에스겔선지자에게 주신 소명의 장면과 비슷하다 ( 에스겔 23)

 

(3:3)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15:16)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34: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6) 내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배에서는 쓰게 되리라.

 ( 복음에 대한 이중성 )

 

- 네배에 쓰게 된다 ( 그것이 너에게 가슴앓이를 가져다 줄것이다 )

- 믿어서 증인된 우리에게는 꿀같이 단 말씀이지만. 믿지 않은 자들에게 쓴 말씀이다.

- 믿어서 증인된 우리에게는 위로와 축복이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 심판과 재앙이다.

- 믿어서 증인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때는 달콤하지만 믿지 않은 자들에게는 배척을 당하는 말씀이다.

- 믿어서 증인된 우리에게는 축복이지만 이로서 받게될 쓰디슨 고난을 의미합니다.


[딤후 1:8] (8)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7)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 복음에 대한 사명)

 

- 이것은 요한에게 주시는 사명을 재확인 시켜주고 있다.

-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나누어야할 책임이 있다.







 











  • <요한계시록 13장 1-10절>
  • 그 이름과 하늘에 거하는 자들 
  • # 설교문의 그림 인터넷 갈무리함 

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요한계시록 13:1-10>

제목 : <요한계시록 13:1-10> 그의 이름과 하늘에 거하는 자들




[13:1-10]

(13:1)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 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더라

(13:2)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13:3)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따르고

(13:4)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이르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13:5) 또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 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13:6)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더라

(13:7)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13:9)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13:10)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제목 : 그  이름과  하늘에서 거하는 자들

요한계시록은 읽을 때면 우리는 계속 < 종말에 대한 묘사와 의미 >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종말에 대한 묘사와 의미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 우리의 태도와 자세 >입니다.

요한계시록 1213장에서는 < 용과 두짐승 >이 등장합니다




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이 < 용과 두짐승 >이 이땅와 이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을 하느냐에 겁먹고 두려움을 갖는 것보다 이 < 용과 두짐슴 >의 권세와 활력이 극에 달할 때 우리 교회들과 믿는 자들은 < 무엇을 해야 하는가 ? >에 우리의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겁먹고 겁쟁이가 될것인가 ? 아니면 그 두려움과 맞서 싸우면 견디고 지키고 이길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요한 사도는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은 우리에게 4가지의 종말적인 태도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 싸우고 견디고 지키고 이기는 것 > 이 요구는 그당시 로마의 압제속에서 고통받고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이 모습이었습니다. 또한 오늘을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동일하게 요청되는 모습입니다.

< 세상 권세잡은 자들과 싸우고 그들이 주는 고난과 고통을 견디고 믿음을 지키고 세상을 이기는 것 > 바로 전투적 교회와 승리하는 교회의 그림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12장과 13장은 일곱 번째 나팔에 대한 부연설명입니다. 

13장의 환상속에 드리마는 < 바다와 땅을 무대로 하고 있습니다. > 그러나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그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 아닙니다. 바로 믿음을 지키고 인내한 성도들입니다.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알아두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1/ 바다는 어떤 곳인가

요한계시록 1715절에 의하면 열국을 가르칩니다

전통적으로 바다는 무질서와 혼돈을 상징합니다. 그시대의 역사적으로 요한이 내다보고 있었던 바다는 바로 그 당신 열국을 다스리고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었던 로마제국이면 그 우두머리 네로 황제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사도요한이 바다에서 나오는 짐승은 인류를 지배하는 세상의 권세와 나라를 의미합니다. 그 짐승의 우두머리가 정치지도자들이면 또한 그당시 그리스도인들이 핍박했던 네로황제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가장 염두해 두어야할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역사적인 정황은 로마시대이며 황제숭배를 강요받고 있는 핍박과 환란중에 있는 그 당시 성도들에게 쓰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1차 독자에게서 쓰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의도적으로 황제를 예배하고 로마를 섬기기를 강요하고 있는 이러한 심각한 위협과 도전 그리고 긴장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싸우고 견디고 지키고 이길것인가?를 도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13장 전체를 보면 우리가 볼수 있는 것은 <바다에서 나온 짐승><땅에서 올라온 짐승>이 강력한 두세력이 서로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교회를 대항하여 싸움을 걸어옵니다. 놀랍게도 11장에 하나님의 두증인이 나타나서 활동했듯이 13장에선 두 짐승이 등장합니다.

 2/ 이 바다 짐승의 모습은 어떠하면 어떤 일들을 하는가?

123절의 붉은 용처럼 일곱 머리와 열뿔을 가지고 있습니다.

(12:3)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

(17:3)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여기서 알수 있는 것은 계시록에 등장하고 있는 용들은 새로운 형태의 용들이 다양한게 등장하고 있는 것이니라 같은 용들이요 짐승인데 그 강조점이 조금씩 다를 뿐이지 모두 같은 모습입니다.

이것은 다니엘 7:2-6절에 나오는 4마리의 악한 생물이 바다에서 나오는 환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7:2-6]

(7:2) 다니엘이 진술하여 이르되 내가 밤에 환상을 보았는데 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불더니

(7:3)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르더라

(7:4) 첫째는 사자와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더니 내가 보는 중에 그 날개가 뽑혔고 또 땅에서 들려서 사람처럼 두 발로 서게 함을 받았으며 또 사람의 마음을 받았더라 또 보니

(7:5) 다른 짐승 곧 둘째는 곰과 같은데 그것이 몸 한쪽을 들었고 그 입의 잇사이에는 세 갈빗대가 물렸는데 그것에게 말하는 자들이 있어 이르기를 일어나서 많은 고기를 먹으라 하였더라

(7:6) 그 후에 내가 또 본즉 다른 짐승 곧 표범과 같은 것이 있는데 그 등에는 새의 날개 넷이 있고 그 짐승에게 또 머리 넷이 있으며 권세를 받았더라

 불은 용은 사단을 상징합니다. 바다 짐승은 그당시의 로마제국을 상징합니다.

이들을 음녀 바벨론과 상생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역할을 모두 동일합니다. 이세상의 권세로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이 바다 짐슴의 모습은 마치 먹이를 덮치는데 빠른 표범과 비슷하고 발은 마치 강한 집착력을 가지 곰이 발 같고 , 입은 마치 마구 삼치는 사자의 입과 같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만큼 이 바다 짐승으로 묘사되어 있는 세상의 권세들이 신속하고 강력하고 잔인하다는 것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강력한 통치와 영향력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니엘의 7장에 보면 < 바벨론/ 페르시아 / 헬라 / 로마 >4제국이 묘사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은 이 제국들의 모습을 짜깁기 해놓은듯하게 보입니다. 이러한 4제국중에서 그중에서 의뜸이 되고 다른 나라의 권세를 다 갖고 있는 듯이 보이는 나라가 바로 < 로마 제국 >입니다.

바로 요한사도가 밧모섬에서 바라보고 있는 현실의 상황이 바로 < 로마 제국 >입니다. 

그것을 아마도 염두해두고 모든 것을 합체한 것은 강력한 권력을 바로 이러한 형태로 묘사했을 것입니다로마는 이 전의 3제국의 모든 악함을 포함할 뿐아니라 그것을 능가하는 포학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로마에서 < 짐승같은 네로 황제 >가 있었습니다.




혹자들은 오늘 본문의 3절을 두고

(13:3)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 으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따르고

 <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라는 말을 갖고 요한 사도가 아마도 그당시에 < 네로황제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서 정권을 다시 잡는다 >는 네로황제 부활설, 네로황제 재생신화에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네로황제는 자신의 권력에서 내려와서 실제로 자살을 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속에는 < 네로가 죽지 않고 어딘가 숨어 있다가 파르티안 군대와 함께 돌아와서 로마를 격퇴하고 자신의 권력을 되찾을 것이다 >라고 하는 소문이 있었고 그렇게 사람들이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러한 소문을 밧모섬에 있는 요한 사도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요한은 < 세상의 권력이 죽을 것 같은데 놀랍게도 다시 살아서 다시 권세를 실행하는 것 >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한데 놀라운 것은 사도 요한이 왜 ? 바다의 짐슴이 상처를 입었다고 말하고 있을 까요? 그리고 계시록 13장에 보면 상처을 입었다는 표현이 3번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13:3)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따르고

(13:12) 그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사는 자들을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13:14)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그것은 그 상태가 완전한 것이 아니라 임시적인 것이다라는 것을 말해주기 위함입니다. 비록 지금은 상처가 나아 활동하고 있지만 머지않아 그 상처가 문제를 일으키고 죽게 될것임을 망하게 될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상처는 치명적인 상처입니다. 바로 원수의 머리를 치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이 오늘 활동하고 있는 사단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준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머리가 상한 짐승들이 사람들이 어떻게 합니까?

< 용과 짐슴을 경배하고 누가 이 짐승과 같으리요. 누가 이 짐승과 싸우리요 >하면서 그들을 경배하고 섬깁니다

그리고 계속 짐승들은 < 하나님과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고 대적합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살후 2:4)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3/ 이 짐승이 활동하는 기간 <만흔두달/42개월>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요?

(13:5) 또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 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마흔두달은 <3년 반>입니다. 이시간은 세상의 권력이 본격적으로 박해와 고난을 주시는 기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잠시 허용한 시간이기도합니다.

여기서 < 받으니라 >는 표현은 < 신적 수동태 >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허락하는 범위안에서 이루어짐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42개월 일할 권세를 받았기에 교회의 대적의 활동은 제한적이고 임시적이고 짧습니다.

흔히 이 42개월 해석을 마태복은 11-17절에 등장하고는 예수님의 족보의 <42세대>는 구약의 성도를 상징합니다. 또한 역사적으로는 42개월은 AD 64-68년 초반가지 약 42개월동안 있었던 네로의 박해기간을 의미합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알수 없지만 .. 이 기간을 제한적이고 임시적인 시간입니다

< 한마디로 지나가는 시간 >입니다.

 우리가 군대갈때도 그 복무 기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뭐할수 있습니까? < 견디고 지나갈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국방부 시계는 오늘 가고 있기 때문에 .. >

 일종에 42개월은 시간은 세상의 권력들이 마지막을 발악을 하는 시간이면 성도들이 지나길 시간을 인내하면서 믿음을 지키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마지막절에

[13:9-10]

(13:9)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13:10)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마지막 경고의 알람을 울리듯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

 (43:11) 그가 와서 애굽 땅을 치고 죽일 자는 죽이고 사로잡을 자는 사로잡고 칼로 칠 자는 칼로 칠 것이라

(24: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오늘도 바다의 짐승과 같은 세상 권력은 하나님의 다스림으로부터 우리의 행위와 믿음을 떼어 놓으려고 획책합니다. 그리고 정치권력으로 세상의 지배하며 그것을 바꿔 놓습니다. 이세상의 지배에 순응하며 이세상의 지배를 따르도록 요청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할 성도들을 향한 표현이 있습니다.

(13:6)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더라

 <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 >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과 하늘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디디고 땅을 벗하면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속한 하늘에 장막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원치 않은 핍박과 고난을 견디고 이기는 힘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인애와 믿음이 있습니다

그렇게 오늘도 계시록적 종말의 삶을 인내와 믿음을 증명하며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요한계시록 9:13-21>
  • 심판에 관하여 



@ 설교문중에 그림 인터넷 갈무리함 

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요한계시록 9:13-21>

제목 : <요한계시록 9:13-21> 심판에 관하여








[9:13-21]

(9:13)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들으니 하나님 앞 금 제단 네 뿔에서 한 음성이 나서

(9:14)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 하매

(9:15)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준비된 자들이더라

(9:16) 마병대의 수는 이만 만이니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

(9:17) 이같은 환상 가운데 그 말들과 그 위에 탄 자들을 보니 불빛과 자줏빛과 유황빛 호심경이 있고 또 말들의 머리는 사자 머리 같고 그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더라

(9:18) 이 세 재앙 곧 자기들의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말미암아 사람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니라

(9:19) 이 말들의 힘은 입과 꼬리에 있으니 꼬리는 뱀 같고 또 꼬리에 머리가 있어 이것으로 해하더라

(9:20)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9:21)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제목 : 심판에 대하여

요한계시록은 마치 77장의 드라마 같습니다. 7번이라고 완전한 수에 어울리는 교회의 그림, 종말의 그림, 심판의 그림, 회복의 그림들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환상과 그림들속에서 헛된 우상과 세상은 철저한 심판을 경험하고 마지막까지 남은 교회와 성도는 기필코 승리하게 되는 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에서 나오는 < 77장의 드라마 >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지금 요한계시록의 본론이라고 할수 있는 종말의 때에 일어날 심판의 이야기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한번 집고 넘어가야할 오해하기 쉬운 생각이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7가지 인, 나팔, 대접의 환상과 메시지를 대하는데 가장 주요한 관점이 있습니다.

 

1/ 종말은 마지막, 끝만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종말은 회복을 의미합니다.

종말은 < the end > <ending>을 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종말은 에덴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창조 때의 모습으로 회복하는

그 순간 이 바로 종말입니다. 요한계시록의 77장의 환상과 메시지의 마지막 목표는 < 회복될 새하늘과 새땅 > 바로 에덴의 회복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2/ 심판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화풀이가 아니라 완악한 인간의 자충수입니다.

자충수가 뭡니까? 스스로 한 행동이 결국에 가서는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관점입니다. 심판은 하나님이 강압적인 힘과 능력으로 하나님이 불쾌함을 표현하는 일이 아닙니다. 이 심판은 인간이 스스로 자초한 자멸의 결과입니다. 완악한 인간이 스스로 자초한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심판은 < 자업자득이며 자승자박이고 지리 멸렬 >하는 일이다.

# 자승자박 : 제 줄로 제 몸을 옭아 묶는다는 뜻으로, 자신이 한 말과 행동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구속되어 괴로움을 당하게 됨을 이르는 말입니다.

# 지리멸렬 : 이리저리 찢기고 마구 흩어져 갈피를 잡을 수 없다. .

 

3/ 7번씩 3번 등장한 심판의 이야기는 횟수나 순서를 말하지 않습니다.

심판의 확실성과 완전성을 의미합니다. 7번은 완전성을 의미합니다.

3번은 확실성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들 특유의 강조의 방법입니다.

 

4/ 심판과 종말의 그림은 구약의 출애굽때의 10가지 재앙의 그림을 그대로 가져오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환상과 상징들은 유대인들이라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를 이미 잘하고 있는 그림언어들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특히 심판에 대한 그림은 구약의 출애굽 당시에 애굽의 바로와 헛된 우상을 심판하는 방식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출애굽 당시에 10가지 재앙은 하나님을 알지못하고 마음이 완악하고 강팍한 바로와 애굽백성에게는 철저한 심판이었지만 하나님이 구별하시고 남기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의 백성이 모세와 이스라엘백성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며 보호이며 은혜였습니다.


바로 이 관점에서 우리는 더 이상 요한계시록을 두려움의 시선과 겁먹는 마음을 보지 말아야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서 겁에 질려야하고 깜짝놀라고 긴장해야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과 보호속에 있는 우리가 아니라 헛된 우상과 여전히 완악한 마음에 속에 있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주도하고 있는 원수 마귀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에서는 심판의 메시지 만큼이나 찬송이 많이 나오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놀라운 사실을 깨달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심판속에서 할 일은 자신을 이 두려움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작년에 했던 <송목사님의 요한계시록 강해>를 다시듣고 참고서들을 읽으면서 몇가지로 정리를 해보았습니다. 조금더 자세한 이야기는 < 송목사님의 요한계시록 강해 >을 들어 보시면 더 잘 아실수가 있으실 겁니다. 이번기회에 다시금 정리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제 그렇다면 오늘 주어진 본문 9장에 등장하고 있는 < 여섯째 나팔을 부는 환상 >을 어떠한 관점에서 묵상해야 할까요?

 

오늘 여섯 번째 나팔은 유브라데에 결박된 네 천사가 풀려나서 이만만 즉 이억명이나 되는 마병대를 끌고 다니면서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사람들의 1/3을 죽이는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앞에 첫 번째부터 네 번째 나팔의 심판은 자연재해를 통한 심판이었다면 5번째 6째번째 심판은 사람을 직접적으로 타격하는 심판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5번째 나팔 재앙에서 나타난 황충의 심판에서 우리가 인상적으로 볼수 있었던 것은 고통당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9:6)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로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고 흉측한 황충들에게 무려 다섯달 동안이나 괴롭힘을 당하게 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6째번째 나팔을 울리고 < 네천사 >가 유브라데강가에서 풀려 납니다.

여기서 < 네 천사 >< 하나님의 천군 천사가 아닙니다. 바로 세상의 악한 사자들이며 악의 세력을 의미합니다. > 이 천가 풀려난 곳이 바로 < 유브라데 강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 유브라데 강 >을 건넌다는 것은 < 이방나라들의 침략 >을 의미합니다. 주로 앗수르, 바벨론과 페르시야는 바로 이 <유브라데강>을 건너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침략해왔습니다. 그래서 < 유브라데에서 풀려 났다 >는 의미는 바로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적인 경험을 배경으로하고 있습니다.

 

유브라데에서 풀려난 네 천사는 <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준비 된자들 >었습니다. 그 마병대의 수가 < 이만 만 >이라고 말합니다. < 2억명>인데 주로 유대인들이 < 셀수 없는 수를 강조할 때 만만 이요 천천 이라고 하는 것처럼 이 숫자의 의도 실제의 수라기 보다는 엄청나게 많은 수 >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본문의 16-19절의 이 사람들을 죽이려고 준비된 마병대의 모습이 7-10절에 나오는 황충의 묘사와 아주 비슷합니다. 이것은 같은 그림이 반복 강조되고 있음을 말합니다.


[9:16-19]

(9:16) 마병대의 수는 이만 만이니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

(9:17) 이같은 환상 가운데 그 말들과 그 위에 탄 자들을 보니 불빛과 자줏빛과 유황빛 호심경이 있고 또 말들의 머리는 사자 머리 같고 그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더라

(9:18) 이 세 재앙 곧 자기들의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말미암아 사람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니라

(9:19) 이 말들의 힘은 입과 꼬리에 있으니 꼬리는 뱀 같고 또 꼬리에 머리가 있어 이것으로 해하더라

 

[9:7-10]

(9:7) 황충들의 모양은 전쟁을 위하여 준비한 말들 같고 그 머리에 금 같은 관 비슷한 것을 썼으며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고

(9:8) 또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있고 그 이빨은 사자의 이빨 같으며

(9:9) 또 철 호심경 같은 호심경이 있고 그 날개들의 소리는 병거와 많은 말들이 전쟁터로 달려 들어가는 소리 같으며

(9:10) 또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이 있어 그 꼬리에는 다섯 달 동안 사람들을 해하는 권세가 있더라

 

바로 이것은 < 헛된 우상과 옛뱀 곧 사단 >의 모습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헛된 우상과 원수 마귀의 모습니다. 이러한 것이 마치 떼로 몰려다니면서 인간들을 공격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점이 생깁니다. ? 하나님은 유브라데에서 악한 사자들이 활기를 치도록 내버려두십니까? 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잘 생각해보아야 할것이 있습니다.

< 하나님이 사람들을 그렇게 심판하도록 내버려두셨다고 보기 보다는 너무 세상의 우상과 악의 세력이 마치 황충의 때와 이만만의 보병대처럼 셀수없이 하나님이 붙잡고 있던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고 이해해야합니다.

 

다시말씀드리면 < 이 심판은 하나님이 일부러 이러한 사자들을 보내어서 심판하려 한 일이 이나 하나님이 일으키신 심판이 아니라 세상에 죄악이 너무도 관영해져서 더 이상 통제할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통제할수 있으시지면 그 손을 놓아 버리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도 하나님이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이 순간에도 <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길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들은 없었음을 오늘 본문은 분명히 2번이나 강조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9:20-21]

(9:20)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9:21)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제가 오늘 본문과 관련한 송목사님 요한계시록의 설교를 다시들으면서 설교 결론 부분에서 하나 인상적이 었던 것은 이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 주님의 재림이 하나님의 손에서 일어나는 일이 쉬울까요? 아니면 인간의 손에서 일어나는 일이 쉬울까요 ?

다시말해서 이시대의 무서운 것은 예수님의 재림보다 인간이 완악함으로 잘못 누르는 버튼 하나로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인간이 스스로 일으키는 전쟁과 싸움이 더 심각한 심판의 결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은 하나님의 의해서가 일어나는 일보다 인간의 욕망의 결과로 더쉽게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은 우리의 욕망에 대한 응답입니다. 심판은 하나님이 한분의 결정이라기보다는 우리안에 도사리고 있는 욕망의 결과물입니다.

 

세상의 심판이 시작되었다면 하나님의 소원되로 되는 일이 아니라 세상의 소원대로 되는 일입니다. 심판은 하나님이 우리의 욕망대로 살도록 손놓아 버릴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

 

오늘 본문은 6번째 나팔재앙으로 사람들의 1/3이죽임을 당하면서도 사람들은 <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 > 뭐하고 있는지? 그들이 뭐하고 있지 않는지?를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뭐하고 있죠 ? 여기 귀신과 우상에 절하고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합니다. 이것이 여전히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뭐하고 있지 않았나요? 회개하지 아니라하더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이 완악한 헛된 욕망과 우상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하길 원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무자비하게 맘에 안다고 자신의 힘을 인간을 억압하거나 부당한 폭력을 행사하는 분이 아닙니다. 끝까지 참고 끝까지 기다리고 우리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전히 스스로 자초한 심판을 당하면서도 회개치도 않은 <자충수>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리멸렬>의 길을 서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요한계시록의 심판의 메시지를 통해서 분명히 보아야할 우리의 모습입니다. 요한 사도는 바로 이러한 준엄한 음성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 < 요한계시록 1:1-9 > 
  • 계시록 그 이해와 오해 



  • @ 설교문중 그림은 인터넷 갈무리함  

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요한계시록 1:1-8>

제목 : <요한계시록 1:1-9> 계시록 그 이해와 오해





[1:1-9]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1: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1: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시며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1: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1:7)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1: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제목 : 요한계시록 그 이해와 오해


오늘부터 이제 요한계시록을 묵상하게 됩니다.

요한계시록을 묵상하게 되는데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제가 기록을 보니 201011/12월 본문이 바로 요한 계시록이었습니다

이제 4년이 지나고 올해 10/11월에 다시 요한계시록의 본문이 큐티 본문으로 등장했습니다..  한동안 < 계시록과 깊은 사귐을 가지고 묵상하는 시간>을 갖게 될것입니다.


송목사님께서 금요기도회를 통해서 <요한계시록>의 흐름과 방향을 강해해주셨고 그리고 한국에서 이필찬 교수님이 오셔서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을 것인지?>을 설명하는 세미나도 있었습니다. 많은 도전과 배움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기회가 되시면 송목사님의 <요한계시록 강해>CD를 구입하셔서 이번 새벽 묵상말씀에 도움을 받으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제 블러그에 <이필찬 교수님의 요한계시록 세미나의 내용>을 정리해서 올려 놓은 것이 있습니다.


http://ever-flowingstream.tistory.com/181


매일 큐티말씀을 묵상하면서 큰 맥과 방향을 잡는데 도움이 되실 겁니다.

 

우리가 흔히 요한계시록을 읽고 묵상하면 왠지 모를 긴장감과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 본문을 대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리고 때로는 요한 계시록을 오해하기도 합니다.


먼저 요한계시록을 읽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 요한계시록의 그 이해와 오해 >을 먼저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한계시록을 어떤 관점과 이해를 가지고 읽어 내려가는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것이 요한계시록의 중심사상과 핵심을 붙잡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난해한 상징이나 숫자나 종말의 징조들에 너무 집착하보면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고자하는 핵심과 중심사상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기 보다는 그러한 난해한 상징이나 숫자에 치우친 나머지 요한계시록을 오해하고 오용하는 잘못된 모습을 나아가기도 합니다


바로 거기서 < 이단 ,,, 삼단 >이 나오는 것이죠.

 

저는 오늘 아침에 요한계시록 1장의 문을 열면서 우리가 가져야하는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 큰 방향을 나누고자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그리고 요한계시록 전체에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할 중요한 것들을 집고 요한계시록의 첫장의 문을 열어보고자 합니다.

 

< 요한 계시록을 어떻게 읽어야하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


어떤 성경의 본문의 말씀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계시>로 주셨습니다. 

오늘 요한계시록 1장에서도 그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1:1-3]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1: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여기서 <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고 할 때 헬라어< 아포칼룹시스 >< 숨은 것을 드러냄 >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현현 특히 역사의 종말에 있을 사건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 를 가리키는 낱말입니다.


요한계시록은 <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계시 >입니다. 자신을 우리게 밝히 드려내시는 메시지요, 약속이요, 복음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라는 질문은 요한계시록은 어떤 책인가? 라는 질문으로 바꾸어 볼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어떠한 성격의 책인지를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느 책을 읽든지 그 책의 종류에 따라 읽는 자세와 감정상태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은 요한계시록이 어떤 책인지? 분명히 밝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1/7<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말합니다. 볼지어다 구름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리라고 약속하는 묵시입니다>

3<요한계시록은 예언의 말씀말하고 축복의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4<요한계시록은 요한이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는 서신서입니다.>

5<요한계시록은 죽은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송영입니다.>

 

이처럼 요한계시록의 장르는 < 묵시문학 이며 서신서이며 축복과 송영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

 

요한계시록은 서신의 형식으로 기록된 묵시적 예언입니다

그래서 이 책에 대해서 3가지로 정의하고 있다


.첫째는 계시(1:1)이고 둘째는 예언(1:3)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신의 형태를 띠고 있다. 발신자는 요한이고 수신자는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이다. 그러므로 계시록은 묵시적 예언으로서 로마 제국의 아시아 지방의 일곱 교회들에 보내진 순회서신의 형태로 기록된 책이다.

 

이모든 배경에는 가장 핵심적인 2가지 배경이 있습니다.


첫째는 구약의 상징과 그림언어의 배경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구약의 구속사적 흐름고 구약에 기록된 다니엘서과 스가랴에 나오는 상징의 그림들과 병행해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과정이 필요하기에 요한계시록을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는 그당시 1세기 교회가 직면하고 있었던 로마의 정치적 상황을 이해해야만 왜? 요한이 그 당시교회들에 이러한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었는가?를 이해할수 있습니다


그당신 교회들은 로마황제에 의해서 < 황제 숭배 >를 강요받고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시대적인 배경은 주후 90년대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대의 황제 숭배 강요와 핍박의 상황에서 전해진 복음이었습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자신을 주와 하나님으로 부를 것을 강요하였고, 그것으로 자신에 대한 충성심을 확인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사역하던 아시아 여러 곳에서도 황제 숭배를 위해 신전이 세워졌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거부하여 죽거나 하는 절대절명의 핍박과 고난의 시대를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핍박과 고난속에서 절망하지 않고 소망을 붙잡도록 이러한 놀라운 이상과 상징으로 소위 그당시 그리스도인이라면 알아들을수 있는 상징언어, 그림언어로 그들이 당하고 있는 고난속에서 포기할수 없는 소망이 있음을 알도록 전하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요한은 로마 권력에 대해 철저한 선지자적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가 밤모섬에서 보았던 그리고 하나님 그이게 보여주었던 그러한 신비하고 놀라운 환상으로 계시록을 쓰고 그것을 두려움없이 전할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당시 핍박받고 고난받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어진 <요한계시록>은 그들의 두려움을 이겨내는 말씀, 두려움을 떨져 버리고 참된 진리와 소망을 부여잡는 복음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요한계시록을 읽고 있는 우리는 여전히 잘못된 종말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 그러한 성경으로 읽혀지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읽는 것조차 두려워하고 있는 이 아이러니 한 현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 두려움을 떨쳐버리는 계시가 두려움을 갖게 만드는 계시가 되어버린 꼴 >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바르게 이해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먼저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나오는 모든 상징과 그림언어들을 다 이해할수 있다는 욕심을 버려야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상징과 그림언어들이 명쾌하게 말해주는 부분도 있고 여전히 명쾌하지 않는 상징으로 남아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분명히 우리가 부여잡고 묵상해야하는 중심사상과 핵심메시지를 붙들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르게 이해해야할 요한계시록의 중심사항, 핵심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첫째, 요한계시록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교회입니다.


현재 교회가 처한 최악의 상황을 말하고 그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 최악의 상황은 로마의 황제숭배와 같은 통치속에서 이러한 통치 이념속에 있는 교회에 대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교회가 될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이다.

 

요한계시록은 교회에 대하여 두가지 그림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승리하는 교회고 다른 하나는 전투하는 교회이다.

이 두 그림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고 본래는 하나다.

그속에서 교회공동체의 성도들은 믿음과 인내를 배웁니다.

 

둘째, 요한계시록의 또 하나의 축약된 주제는 < 종말 >이라는 주제입니다. 


이 종말이라는 주제는 민감하기도 하고 왜곡되어 있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핍박받는 교회들에 대한 목회적 당부이며 요청입니다. 이 메시지는 상황은 다르지만 영적인 도전은 같은 오늘의 시대를 향한 메시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종말>< >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흔히 <종말>하면 말세. , 심판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종말이란 창조의 회복이 성취되고 완성되는 순간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 성경적인 회복은 타락한 이세상을 회복하는 순간을 의미합니다. 바로 그날이 그때가 바로 <에덴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초림은 에덴의 회복의 성취이고 재림은 에덴의 회복의 완성입니다.

세속적인 종말은 바로 <>을 말합니다. 성경적인 종말은 바로 <회복>을 말합니다. 이미 종말이 시작되었고 예수님의 재림에 완성됩니다. 우리의 생각의 전환 : 바로 예수님의 탄생이 종말의 사건의 시작입니다. 바로 종말의 성취를 말하고 있습니다.

 

셋째. 요한 계시록의 <예언>은 과거/현재/미래를 다 포함합니다.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성경에서 <예언>은 우리가 흔히 아는 미래 시점만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먼저 <예언은 미래다> 라고 하는 잘못된 오해를 바로잡아야합니다


에언은 < 미래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 그런 내용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서 예언은 <나비>라는 단어는 대언하다는 뜻입니다. <누구 앞에서 말하다> 뜻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을 바르게 알고 있는 사람이 그분에서 말하는 것이 바로 예언입니다. 이 예언은 과거/현재/미래를 다 포함합니다.


선지자들의 예언의 내용은 < 너희가 하나님을 떠났다. 그래서 심판이 필연적으로 있을 것이다. 그리고 회복이다. 돌아오라 >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요한계시록의 예언은 < 과거.현재,미래>를 다 포함합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뜻과 계속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단순히 미래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다.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그것만 말하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왜곡과 오해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로만 하기에 상당한 왜곡입니다.

 

넷째. 요한 계시록은 < 순종 >을 요구합니다. 요한계시록은 <호기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여기서 <읽은자(단수) > <듣는자들/지키는자들(복수)>입니다.  

한사람이 읽고 듣고 지키는자는 다수입니다

< 복이 있나니... 왜냐하면 때가 가까움이라. > 라고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의 복은 바로 < 듣고 지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때가 가깝기 때문입니다. >


< 때가 가깝다 >는 것은 <아직 안온 것이 아니라 때가 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가 가까운 것은 < 종말의 때가 온것을 의미합니다. >.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통해서 이 땅에 온 것입니다.


황제를 숭배하지 말고 하나님 만을 섬기라는 이 메시지를 듣고 지키는 것은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하나님의 때가 왔고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땅에 도래했다고 했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 그 나라의 맛을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다스림을 경험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경험하는 통로가 됩니다.


요한계시록은 <호기심>이 아니라 < 듣고 지키는 것>에 대해서 집중해있다.

우리는 예수님이 언제 재림하느냐?에 대해서 관심이 크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오늘 현재의 삶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에 집중한다.


종말은 바로 예수님의 오심으로 시작되었다.

요한계시록은 이미 종말이 시작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의 탄생의 사건으로 부터.....













  • < 전도서 9:1-10>
  • 사는 동안 그대 살아 있음에 


@ 설교문중 그림 인터넷 갈무리함 

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전도서 9:1-10>


제목 : <전도사 9:1-10> 사는 동안, 그대 살아 있음에 




[ 전도서 91-10]

1. 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 본즉 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들의 미래의 일들임이니라

2.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 선한 자와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아니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3.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 이것은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4.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

5. 산 자들은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며 그들이 다시는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니라

6. 그들의 사랑과 미움과 시기도 없어진 지 오래이니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 중에서 그들에게 돌아갈 몫은 영원히 없느니라

7.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8.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아니하도록 할지니라

9.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

10.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제목 : 사는 동안 < 그대 살아있음에>


우리가 전도서를 묵상을 할때면 반드시 고민하게 되는 주제는 < 인생, , 죽음 >이라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의 갖는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많은 이들은 < 인생과 삶 그리고 죽음의 문제 >에 대한 진정한 해답을 찾고자 노력하고 자신의 지식과 지혜를 동원해서 < 인생과 삶 그리고 죽음의 본질적인 의미 >을 이해하려는 시도들을 해왔습니다.


어떤 이들은 철학으로 어떤이들은 문학으로 어떤 이들 예술로 인간이 같고있는 필연적인 현실세계인 < 인생과 삶 그리고 죽음 >의 고민들을 표현했습니다.

 

인생에 대한 시중에 이러한 시가 있습니다.


< 그대! 살아있음에! > - 노산 이은상 -

차창을 내다보니 산도 나도 다 가더니,

내려서 들러보니 산은 없고 나만 왔네

다 두고 저만 가는 게 인생인가 하노라.

 

제가 좋아하는 노래인 < 김광석씨의 서른살 즈음에 >라는 대중 가요에 보면 이런 대목의 가사가 있습니다.


또 하루 멀어져간다 ... 점점 더 멀어져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속에 

더 아무것도 찾을수 없네. ..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

 



참 오늘의 우리의 인생과 삶 그리고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하는 노래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과 삶 그리고 죽음의 의미를 전도서의 전도자의 고백속에서 찾아 볼수 있습니다.

 

오늘 전도서 9장의 시작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1. 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 본즉 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들의 미래의 일들임이니라

 

이 구절은 앞 8장 전체의 결론부분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 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본즉 ,,, > 

바로 8장에서 말하고 있는 < 지혜자와 우매자 > < 악인들과 의인들 >의 삶의 내용을 들여다보니 해아래서 행하는 모든 것이 허무하며 해아래서 능히 삶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다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미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92절부터 전도자는 이러한 절망가운데 있는 인간들에게 놀라운 가능성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무의미한 절망의 연속입니다.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인생이 직면한 이 <실존적 허무>를 해결해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전도사는 절망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절망의 연속의 인생속에서 그래도 나은 삶이 있음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 우리가 사는 동안에 살아 있음의 유익 >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주제가 되는 명언이 있습니다.

 < 산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 >

 

오래전에 한국영화 신세계라는 영화에서 하정우라는 배우가 걸죽한 부산사투리로 썼던 대사가 생각납니다


< 살아 있네 > 영화상에는 조금 선정적인 용어로 쓰였지만.. 

한동안 이 < 살아 있네 >는 말이 유행이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 살아 있네 >라는 의미를 해석해보면 < 존재감과 생동감이 느껴질정도로 멋지다 >라는 의미가 될것입니다.

 

세상의 모든것은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영원불변의 법칙이 있습니다

이 법칙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뭡니까? <바로 모든 인간과 인생은 죽는다>는 것입니다.

<죽음>이라고 하는것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불변의 법칙입니다. 부자였던 사람,가난했던 사람, 많이 배운 사람, 배우지 못한 사람, 건강하던 사람, 병들었던 사람, 그 누구도 이 법칙을 피해갈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 히9:27절에 < 한 번 죽는것은 사람에게 정하신것이요,그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전도자 솔로몬은 또다시 이 죽음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것입니다.

2-3절에

2.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 선한 자와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아니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3.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 이것은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무슨 말입니까

세상의 모든 사람의 결국은 죽음을 향해 간다는 말입니다



착한자나 악한자나 결국에는 만나게되는 죽음, 평생을 무엇인가?에 미쳐살아보지만 결국 만나는것이 바로 <죽음>이라는 것을 피부깊숙히 느낀 솔로몬은 오늘 우리에게 아주 귀한 교훈을 남겨주고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같습니까?.


살아있어서 어쨌다고요? 좋다고요?나쁘다고요? 한번 봅시다.


@ 4-6절에

4절에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개보다는 분명 사자가 좋겠지만 사자가 죽었다면 오히려 개가 낫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5절에 산 자는 자신의 앞길에 대해 생각할수 있지만 죽은자는 그럴수없으며 사람들에게서 잊어진다고 하고 있습니다.

6절에 죽은자는 다시는 복받을 기회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때 인기를 끌었던 연예인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이 바로 < 잊혀져 가는 것 >이라고 합니다. 


돈을 많이 못버는것도 일이 없는것도 아니라 사람들에게 잊혀져 가는 것 그것이 가장 두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연예인들이 이러한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서 젊망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3가지 주어집니다.

< 기회 chance / 선택 choice / 도전 Challenge >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을 인생으로 ABCDEFG로 이해합니다.

A : Almight (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길 )

B : Birth ( 인생의 출생 ) C : Choice ( 인생의 선택 )

D : Death ( 인생의 죽음 ) E : Eternity ( 영원한 인생 )

F : Failure / Future ( 인생의 미래 )

G : GOOD / GOD ( 하나님의 품 )

참 재미있는 표현이 아닐수 없습니다.



여기서 한번 생각해봅시다. 도대체 솔로몬은 이 말을 왜 하고 있을까요? 죽음이 두려워서, 삶에 집착하고 있기때문에 그럴까요?


솔로몬은 더 살고싶다는 호소를 하는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아주 귀한 인생의 교훈을 주고 있는것입니다.

 

<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죽음의 문제를 철저하게 준비하라는 말입니다. 지금 주어진 현실을 비관하지만 말고, 그 어려움가운데서도 길을 찾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 


아무리 어려워도 그래도 살아있으니까 소망이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것입니다.

기억하십시요!.살아있다는 것은 기회를 의미 합니다.

오늘 솔로몬도 이제 나이들어보니까 그래도 살아있는것이 죽은것보다는 낫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이 솔로몬을 통해 주시는 말씀, 정말 보람된 인생을 사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사는동안.. 살아있는 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두가지입니다.

 

1/ 사는 동안 즐거운 마음으로 살라는것입니다.

7- 9

7.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8.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아니하도록 할지니라

9.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

사실 산다는 것도 쉬운일은 아닙니다. 여러분 사는 것이 즐거우세요.


오래된 드라마 엄마가 뿔랐다라는 드라마를 보면 김혜자가 나오는데 김혜자가 혼자 하는 독백의 대사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 누군들 자기 인생이 즐겁겠어.. 누군들 자기 인생이 마음에 들까.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알면서도 나는 내 인생이 정말 마음에 안든다


혼잣말로 하는 대사가 아직도 인상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인생에서 사는동안 즐거움을 찾지 못하면 그것만큼 절망스러운 인생은 없습니다. 오늘 하나님은 전도자의 입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7절에 먹고 마실때마다 즐거운 마음으로 하라고 하십니다.

8절에 자신을 아름답게 가꾸라고 하십니다.

9절에 가족들에게 잘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자기자신의 복이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얼마나 인생을 즐겁게 살고계십니까? 자기 자신에 대해 얼마나 자신을 가지고 사십니까? 가정의 화목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계십니까? 혹시 힘든일 많다고, 속썩이는 사람 많다고 인상파로 살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기억하십시요. 웃는 얼굴에는 복이 깃들지만, 찡그리고 화내는 얼굴에는 근심이 깃들게 되어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우리안에 세상이 줄수 없는 기쁨을 경험하고 그것을 누리고 사는 에너지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 기쁨과 즐거움으로 사는 것입니다.

 

2/ 사는 동안에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 10절에

10.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나아가 하나님믿는 일에도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 일이 재미있고 쉬운일이든, 아니면 힘들고 어려운 일이든 오늘 하나님은 네 손이 일을 당하는대로 최선을 다하라고 하십니다.

 

? 최선을 다하는곳에 아름다운 열매가 있기때문입니다.

최근에 제가 젊은 나이에 < 대상포진 >으로 조금 힘든 어려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지금 아직 얼굴에 상처가 남아있습니다

오장로님께서는 이것을 < 스티그마 >라고 표현해주셨습니다.


조금 아프면서 깨달았던 것은 < 내가 아무리 내 삶을 열심히 달려 가도 하나님이 건강을 허락하지 않으면 멈추어 설수 있구나! 운동하고 살도빼고 몸을 아끼지 않고 바쁘게 스케줄이며 잠도 덜자고 부지런히 살아도 나에게 주어진 삶은 하나님의 손에서 허락된 삶이구나 !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삶을 최선을 다해서 살지만 때로는 멈추어서 서서 쉼과 휴식이 필요하구나 !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

 

우리에게 놓여있는 삶은 최선으로 살아내야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최선도 하나님의 허락하신 은혜를 경험하면서 최선을 살아내야합니다.


오늘 말씀 8절에 깨끗한 생활을 하고 9절에 하나님이 주시것에 만족하고 10절에 할수 있는 일 열심히 하는것에서부터 우리의 삶의 최선의 준비가 시작됩니다.

 

사실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불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부족을 발견하여 더욱 노력하게됩니다


사람을 보지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적인 명예,부귀영화를 보지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행복을 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사는것이 정말 보람되고 기쁜인생인가!를 고민해보시기 바랍니다. 땀 흘리는 수고가 있는곳에 열매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먼저 살아있음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최악의 아픔이 있을지라도 그 아픔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Ezra2:43-70> There are consequences for disobeying God


2014.9.17

Morning Prayer (네이든 곽전도사)

Ezra 2:43-70




<Ezra 2:43-70> There are consequences for disobeying God

하나님을 순종함에 대한 결과가 있습니다. 



Todays passage was is a little difficult on its own, 

and yet there are still some principles we can get out of it.

오늘 말씀은 그 말씀 자체로는 조금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얻을수 있는 원리가 있습니다.  


There are consequences for disobeying God

하나님을 순종함에 대한 결과 있습니다. 



       Even after forgiveness and faithfulness (믿음), 

        the consequences (결과) remain as scars (아픔.상처).

        용서와 신실함이후에 상처가 남는 결과가 있습니다. 


       I want to highlight one passage here. They lost their identity (정체성). Some literally lost their identity in the all important genealogy 족보 (v.62).

저는 이 말씀에 하일라이트를 하기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정체성을 잃었습니다. 


       v.58 The following were those who came up from Tel-melah, Tel-harsha, Cherub, Addan, and Immer, though they could not prove their fathershouses or their descent, whether they belonged to Israel.

       v.62 These sought their registration among those enrolled in the genealogies, but they were not found there, and so they were excluded from the priesthood as unclean.

       사람들이 보계 중에서 자기 이름을 찾아도 얻지 못한고로 저희를 부정하게 여겨 제사장의 직분을 행치 못하게 하고

       Hebrews 12:6, For the Lord disciplines (훈련) the one he loves, and chastises (매질) every son whom he receives.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These days youre not supposed to hit, but in the past when you did, sometimes scars (상처) would remain. And the pain and the scars (상처) would remind you, and be a part of reminding you of the seriousness (심각함) of your mistake.


       For these people, there was a lasting scar that reminded them of the seriousness (심각함) of their sin.


       If you sin, though Gods grace is there, and forgiveness is real, consequences (결과) are also real. It is possible, if you continue in your sin, that you will build up Gods discipline (훈련). And when it unleashes, it will hurt. And it will be unpleasant.


       EX/ Jacob

       Did not have good character. 

        ( 야곱은 좋은 인물이 아닙니다. )

       He cheated  his brother. ( 그의 형제를 속였습니다.)

       He lied to his dad. ( 그의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




       And this became a normal thing for him. And God dealt with him. He brought him into the presence of his uncle Laban. Laban began to cheat and lie to him for 20 years. This, I believe, was all a part of Gods disciplining of him. That is extreme consequence. He had to work 7 years for his Rachel, and ended up getting Leah. Then another 7 years for a total of 14 years. On his return home, Rachel got sick and died. Later, his sons lied to him about his favorite son Joseph. At one point, he cried out to God, All these things are against (저항한다) me.


       But by the end, he had learned through circumstance and the discipline (훈련/매질) of the Lord. He was humble (겸손), gentle (부드러운), and mature (성숙). Even Pharaoh saw him as a man of God, and received a blessing (축복) from him.


       But the consequences (결과) remained with him.

       This is a warning (경고). Let it be a warning (경고) to us.

       There are consequences for disobeying God

       And at the end of the day, for our sin, for our disobedience, the biggest consequence is what? That Jesus had to die on the cross for it. He suffered and bled and died, and took the weight and punishment of Gods wrath for our sin. That is an enormous consequence.


       What, just so we can be justified in our anger? Just so we can revel in our laziness? Just so we can gossip and be jealous? Just so we can be greedy? Just so we can sin?

Even when we are disobedient, God is faithful (신실함) to His own people. He will not forsake them.

비록 우리가 불순종할때에도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에게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We must remember this in the hard times. We must remember this in our guilt (죄책감), and suffering 고통, and despair 절망.

       He can move huge groups of people

       50,000 people

       10,000 animals

       moved in the heart of King Darius of Persia to do this

       EX/ No matter what, Gods faithfulness will never fail. Even when we are faithless, He is faithful. There is no sin too big to stop Him from loving us and restoring us. In this world, we will see a glimpse, but in the world to come, we will see it in its entirety as God makes all things new.

What is our response to Gods faithfulness? 

하나님의 신실함에 대한 반응은 무엇입니까?


       They gave freewill offerings ( 예물) (v.68)

       Notice that it was some, not all

       They valued the temple of God


       Do we value the freedom we find in being His people forever? 

         For being the temple of God?


       When we are thankful to Gods for His faithfulness, we give freewill offerings. It is freely given, and it is given lavishly. We give our lives to God. We give all that we have to God.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함에 대해 감사할때 우리는 즐거운 예물을 드립니다. 그것은 자원하는 드림입니다. 그리고 아낌없이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 삶을 드립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할수는 모든 것을 드립니다. 

       Hebrews 12:7, 11






  • < 에스라 4:1-10>
  • 위기의 시대 : 멈출수 없는 예배 




  @ 설교문중에 그림은 인터넷 갈무리 


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에스라 4:1-10>


제목 : <에스라 4:1-10> 위기의 시대 : 더이상 멈출수 없는 예배




 

[에스라 41-10]

1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한다 함을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듣고

2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도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같이 너희 하나님을 찾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 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하니

3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

4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5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 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계획을 막았으며

6 또 아하수에로가 즉위할 때에 그들이 글을 올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을 고발하니라

7 아닥사스다 때에 비슬람과 미드르닷과 다브엘과 그의 동료들이 바사 왕 아닥사스다에게 글을 올렸으니 그 글은 아람 문자와 아람 방언으로 써서 진술하였더라

8 방백 르훔과 서기관 심새가 아닥사스다 왕에게 올려 예루살렘 백성을 고발한 그 글에

9 방백 르훔과 서기관 심새와 그의 동료 디나 사람과 아바삿 사람과 다블래 사람과 아바새 사람과 아렉 사람과 바벨론 사람과 수산 사람과 데해 사람과 엘람 사람과

10 그 밖에 백성 곧 존귀한 오스납발이 사마리아 성과 유브라데 강 건너편 다른 땅에 옮겨 둔 자들과 함께 고발한다 하였더라

 



제목 : 위기의 시대 < 더 이상 멈출수 없는 예배 >

 

70년동안 포로로 잡혀서 돌아온 유다백성들의 감격의 제사와 환희의 시간이 지나고 이제 본격적인 성전건축의 대역사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페르시아왕 고레스왕의 도움을 힘입어 그리고 돌아온 백성들이 힘을 다해 그들의 믿음과 구원 그리고 신앙의 증표와 같은 < 성전 재건 >의 박차를 다하고 있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백성들에는 < 감격의 시대 >였습니다. < 어찌 우리가.. 이러한 놀라운일에 사용되어진단 말인가? >라고 말할수 있는 감격과 기쁨이 넘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 감격의 시대 > 지나고 < 위기의 시대 >가 도래합니다




바로 그것은 그들이 유다땅에 돌아오기 전에 이미 유다땅에 살고 있는 소위 < 사마리아 사람들 >의 방해였습니다.

 

오늘 본문 에스라 4장에서는 순조롭게 순탄하게 진행될 것 같았던 < 성전 재건 >의 대역사가 심각한 위기와 갈등에 봉착하게 되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의 자손의 성전 재건을 방해하는 세력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 위기의 시대 >가 왔음을 알고 있고 다양한 성전 재건을 중단케하고 방해하는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전재건 뿐만아니라 예루살렘 성의 재건을 방해하는 세력들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에스라 4:1>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한다 함을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듣고

 

성전 건축을 방해하는 세력이 등장한 때는 바로 

<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한다는 소문을 듣고 난후였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이미 < 유다백성들이 포로로 돌아온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이 돌아오는 것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무리들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어제 본문 에스라 3장에도 그러한 <포로로 돌아온 유다백성들>을 못마땅하게 지켜보던 무리가 있었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에스라3:3>

3.무리가 모든 나라백성을 두려워하여 제단을 그 터에 세우고 그 위에서 아 침 저녁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며

여기서 < 무리가 열국 백성을 두려워하여 >라는 말은 < 비록 무리가 열국 백성을 두 려워하였지만 >으로 번역하는 것이 맞습니다.


< 모든 나라 백성 >이라는 말은 < 이미 유다땅에 살고 있는 그땅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 그들은 그 당시 팔레 스틴 땅과 그 주변 지역에 살던 여러 민족들을 가리킵니다. 그들 중 대표적 인 민족은 사마리아인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오늘 본문에도 기록하고 있는 것과 같이 <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 >이 됩니다.

 


오늘 본문 42절이후에 보면 그들의 구체적인 모습과 행동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2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도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같이 너희 하나님을 찾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 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하니

3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

 

여기서 < 소위 사마리아인들 >의 요구와 제안이 무엇입니까?

< 자기들도 하나님을 섬기니 같이 성전을 건축하자 >는 제안입니다.


이러한 소위 < 타협안 >에 대해서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이스라엘 족장들은 <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말하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 하고 대답을 합니다.

 

바로 이것인 가장 큰 위기와 갈등의 시작이 됩니다.


그렇다면 왜? 돌아온 유다사람들은 그곳에 이미 살고 있는 사마리아 사람들과 함께 성전건축을 할수 없었을 까요? 이것은 < 사마리아 사람들 >의 잘못된 신앙과 그릇된 예배의 태도 때문에 함께 할수 없었던 것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 사마리아 사람들과 그들의 신앙 >이 무엇이었는지?부터 알아야합니다.


한마디로 사마리아 신앙은 재미있게 표현하자면 < 짬짜면 신앙 >이었습니다



무언가 < 혼합된 신앙, 정체가 불분명한 신앙 >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중국집에 가면 우리의 고민은 항상 < 짜장면과 짬뽕 >을 선택하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두가지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서 만들어낸것인 바로 < 짬짜면>입니다. 두가지를 다 맛보게하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새롭게 만든 라면중에 < 짜파구리 >라는 라면된 있습니다. < 짜파게티와 너구리 >나면을 합쳐서 새롭게 탄생한 라면입니다.

 

제가 사마리안들의 신앙을 < 짬짜면 신앙 >이라고 말한 것은 < 그들이 신앙이 혼합종교로서 유일한 참신이신 여호와 하나님 만을 섬기는 신앙을 버리고 바벨론과 페르시아 온갖 신들을 함께 섬기는 신앙을 받아 들였습니다. >


사마리아 사람들은 앗수르의 혼합정책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앗수르 나라가 이스라엘을 지배할 때 이방나라는 유다나라의 민족과 신앙을 말살정책을 썼습니다


그래서 앗수르는 이스라엘에 이방사람들을 이주시킵니다. 그리고 이방사람과 유다사람들이 결혼을 하게 만들고 자연스럽게 이방신들을 가져와 섬기게 만듭니다. 바로 이것은 < 민족 혼합정책 >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형성된 민족이 소위 < 사마리아 사람들 >입니다.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앗수르 사람들을 사마리아 땅에 이주시킨 일은 열왕기하 1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왕기하 17:24> 앗수르 왕 이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 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매 저희가 사마리아 를 차지하여 그 여러 성읍에 거하니라

 

그런데 그들은 사마리아 땅에서 여호와 하나님를 섬긴 것이 아니고 그들의 신들과 여호와를 함께 섬기려 했습니다. 그들은 우상숭배자들 이었고 혼합주의자들,종교 다원주의자들이었습니다.


<열왕기하 17:28-34, 41>은 그들에 대해 자세히 기록합니다.

이에 사마리아에서 사로잡혀간 제사장 중 하나가 와서 벧엘에 거하며 백성에게 어떻게 여호와 경외 할 것을 가르쳤더라.그러나 각 민족이 각기 자기의 신상들을 만들어 사마리아 사람의 지은 여러 산당에 두되 각 민족이 자기의 거한 성읍 에서 그렇게 하여 바벨론 사람들은 숙곳브놋을 만들었고 굿 사람들은 네르갈을 만들었고 하맛 사람들은 아시마를 만들었고 아와 사람들은 닙하스와 다르닥을 만들었고 스발와임 사람들은 그 자녀를 불살라 그 신 아드람멜렉과 아남멜렉에게 드렸으며 저희가 또 여호와를 경외하 여 자기 중에서 사람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택하여 그 산당에서 자기 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게 하니라.이와 같이 저희가 여호와도 경외하 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저희가 오늘까지 이전 풍속대로 행하여 여호와를 경외치 아니하며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이라 이름을 주신 야곱의 자손에게 명하신 율례와 법도와 율법과 계명을 준행치 아니하는도다.

 

사마리아를 중심해 거주했던 그들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자들 이 아니었기 때문에 스룹바벨과 유다 지도자들은 그들과 함께 여호와 의 전을 건축할 수 없었습니다.

유다민족안에는 2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 포로로 잡혀갔지만 순수한 혈통과 순수한 신앙을 지키고 순수한 예배를 드렸던 사람들

그러나 

< 포로로 잡혀가지 않았지만 혼합된 혈통과 순수한 신앙을 지키지 못하고 혼합된 예배를 드렸던 사람들 >로 나눕니다


이들이 따로 떨어져 살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 포로로 잡혀갔단 이들이 돌아오면서부터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순수한 예배를 드렸던 사람들이 혼합된 예배를 드렸던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것에서부터 < 위기의 시대 >가 도래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장면의 모습을 어떻게 보십니까? 사마리아 사람들과 돌아온 유다사람들이 함께 성전을 재건해야한다고 생각하십니다. 아니면 오늘 유다사람들이 보여준 모습처럼 분명한 선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에스라서에서 < 사람들이 사마리아 사람들과 함께 성전을 지을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 


이미 우리는 3장에서 유다인들이 자신의 고국땅으로 돌아와 드리는 첫 예배와 제사의 장면을 보았습니다. 감격과 환희의 시대가 열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면에서 빠진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은 < 회개와 자복 >입니다.

 

아마 사마리아사람들이 예배와 제사를 드리는 돌아온 유다사람들과 함께 < 자신이 행한 잘못들과 잘못된 신앙을 돌이키고 회개와 자복 >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면 어쪄면 함께 성전을 건축하는 일을 이룰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사마리아 사람들은 중심에는 < 그들이 혼합된 신앙 소위 짬짜면 신앙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


사마리아 사람들이 함께 성전을 짓자는 동기속에는 < 거짓된 동기와 순수하지 못한 목적 >이 있었습니다. < 유일한 참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들의 수많은 신중에 하나로 여기는 거짓된 동기 > 그리고 < 다른 여러신들의 도움을 받아 복받으면 살았는데 이제 여호와 하나님한테도 복받으면 살아보자 하는 순수하지 못한 목적 >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사마리아인들이 지나온 자신의 잘못된 신앙을 반성하거나 회개하는 대목이 안나오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 이유를 찾을수 있습니다.

 

오래전 한국 기독교 역사에 신앙 순수성을 입증하는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 신사참배>사건입니다






우리나라가 일제식민지에 있을 때 교회도 일제천황 폐하를 섬기고 절하는 것을 요청받습니다. 이 신사참배의 사건은 공교롭게도 <한국 교회 장로교 교파의 태동>과도 아주 밀접한 관계있습니다.


일제 천황을 신으로 섬기는일에 찬동하고 신사참배를한 교회와 목회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제 천황을 신으로 섬기지 않고 거부하고 투옥되고 순교를 당한 교회와 목회자가 있었습니다.





결국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면서 바로 이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부류><신사참배에 참여하는 부류>로 나눕니다

이것이 교회의 분열과 나눔의 시작이 됩니다





해방 후 한국 교회에는 신사 참배 회개 문제가 일제 잔재 청산의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었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 생긴 교단이 제가 속한 < 고신 교단 >입니다


어떤일들은 신사참배문제를 회개하고 돌아온 이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신사참배하는데은 어쩔수 없는 이유가 있다고 회개를 거부하는 부류들이 있었습니다. 


국교회와 교단의 문제는 < 회개가 없이 서로를 향한 정죄가 있었기에 교단이 분열되고 교회가 갈등을 맞았습니다. 신앙의 문제를 정치의 문제로 풀어간 것이 분열의 시작이었습니다. 오늘도 한국교회의 이러한 고질적인 문제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

 

우리 한국교회 역사속에서 < 신앙의 순수성과 예배의 진실성 >을 지켜내는 것에 많은 위기와 갈등이 있었습니다.


오늘 에스라 4장에 등장하고 있는 상황역시 그러한 < 위기의 시대 >의 도전앞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 우리의 시대가 예배의 감격을 경험할수 있는 은혜의 시대, 감격의 시대인 동시에 우리의 예배가 방해받고 예배가 실패할수 있는 위기의 시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우리가 예배하기를 결단하고 예배에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집중하지 않으면

우리의 예배의 집중력은 세상의 수많은 방해와 유혹속에서 실패하고 맙니다.

우리의 예배는 집중력을 잃지 않은 것이 중요합니다.


< 우리의 예배가 무언가에 의해서 방해받을수 있다. >

< 우리의 예배가 누언가에 의해서 계속 공격받고 있다. >

< 우리의 예배가 어디선가 잘못되어 갈수 있다 > 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오늘 우리는 오늘 말씀을 보면서 이런 <적용질문>을 만들 수 있습니다.

1/ 나의 예배를 가장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가?


2/ 나의 예배는 나의 필요에 의해서 드려지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고 싶은가?


3/ 내가 진정으로 예배하고 싶은 동기와 중심은 무엇인가?



4/ 내안에 짬짜면 신앙같은 선명하지 못한 신앙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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