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요한계시록 1:1-9 > 
  • 계시록 그 이해와 오해 



  • @ 설교문중 그림은 인터넷 갈무리함  

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요한계시록 1:1-8>

제목 : <요한계시록 1:1-9> 계시록 그 이해와 오해





[1:1-9]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1: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1: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시며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1: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1:7)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1: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제목 : 요한계시록 그 이해와 오해


오늘부터 이제 요한계시록을 묵상하게 됩니다.

요한계시록을 묵상하게 되는데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제가 기록을 보니 201011/12월 본문이 바로 요한 계시록이었습니다

이제 4년이 지나고 올해 10/11월에 다시 요한계시록의 본문이 큐티 본문으로 등장했습니다..  한동안 < 계시록과 깊은 사귐을 가지고 묵상하는 시간>을 갖게 될것입니다.


송목사님께서 금요기도회를 통해서 <요한계시록>의 흐름과 방향을 강해해주셨고 그리고 한국에서 이필찬 교수님이 오셔서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을 것인지?>을 설명하는 세미나도 있었습니다. 많은 도전과 배움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기회가 되시면 송목사님의 <요한계시록 강해>CD를 구입하셔서 이번 새벽 묵상말씀에 도움을 받으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제 블러그에 <이필찬 교수님의 요한계시록 세미나의 내용>을 정리해서 올려 놓은 것이 있습니다.


http://ever-flowingstream.tistory.com/181


매일 큐티말씀을 묵상하면서 큰 맥과 방향을 잡는데 도움이 되실 겁니다.

 

우리가 흔히 요한계시록을 읽고 묵상하면 왠지 모를 긴장감과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 본문을 대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리고 때로는 요한 계시록을 오해하기도 합니다.


먼저 요한계시록을 읽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 요한계시록의 그 이해와 오해 >을 먼저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한계시록을 어떤 관점과 이해를 가지고 읽어 내려가는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것이 요한계시록의 중심사상과 핵심을 붙잡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난해한 상징이나 숫자나 종말의 징조들에 너무 집착하보면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고자하는 핵심과 중심사상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기 보다는 그러한 난해한 상징이나 숫자에 치우친 나머지 요한계시록을 오해하고 오용하는 잘못된 모습을 나아가기도 합니다


바로 거기서 < 이단 ,,, 삼단 >이 나오는 것이죠.

 

저는 오늘 아침에 요한계시록 1장의 문을 열면서 우리가 가져야하는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 큰 방향을 나누고자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그리고 요한계시록 전체에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할 중요한 것들을 집고 요한계시록의 첫장의 문을 열어보고자 합니다.

 

< 요한 계시록을 어떻게 읽어야하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


어떤 성경의 본문의 말씀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계시>로 주셨습니다. 

오늘 요한계시록 1장에서도 그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1:1-3]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1: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여기서 <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고 할 때 헬라어< 아포칼룹시스 >< 숨은 것을 드러냄 >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현현 특히 역사의 종말에 있을 사건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 를 가리키는 낱말입니다.


요한계시록은 <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계시 >입니다. 자신을 우리게 밝히 드려내시는 메시지요, 약속이요, 복음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라는 질문은 요한계시록은 어떤 책인가? 라는 질문으로 바꾸어 볼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어떠한 성격의 책인지를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느 책을 읽든지 그 책의 종류에 따라 읽는 자세와 감정상태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은 요한계시록이 어떤 책인지? 분명히 밝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1/7<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말합니다. 볼지어다 구름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리라고 약속하는 묵시입니다>

3<요한계시록은 예언의 말씀말하고 축복의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4<요한계시록은 요한이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는 서신서입니다.>

5<요한계시록은 죽은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송영입니다.>

 

이처럼 요한계시록의 장르는 < 묵시문학 이며 서신서이며 축복과 송영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

 

요한계시록은 서신의 형식으로 기록된 묵시적 예언입니다

그래서 이 책에 대해서 3가지로 정의하고 있다


.첫째는 계시(1:1)이고 둘째는 예언(1:3)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신의 형태를 띠고 있다. 발신자는 요한이고 수신자는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이다. 그러므로 계시록은 묵시적 예언으로서 로마 제국의 아시아 지방의 일곱 교회들에 보내진 순회서신의 형태로 기록된 책이다.

 

이모든 배경에는 가장 핵심적인 2가지 배경이 있습니다.


첫째는 구약의 상징과 그림언어의 배경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구약의 구속사적 흐름고 구약에 기록된 다니엘서과 스가랴에 나오는 상징의 그림들과 병행해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과정이 필요하기에 요한계시록을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는 그당시 1세기 교회가 직면하고 있었던 로마의 정치적 상황을 이해해야만 왜? 요한이 그 당시교회들에 이러한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었는가?를 이해할수 있습니다


그당신 교회들은 로마황제에 의해서 < 황제 숭배 >를 강요받고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시대적인 배경은 주후 90년대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대의 황제 숭배 강요와 핍박의 상황에서 전해진 복음이었습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자신을 주와 하나님으로 부를 것을 강요하였고, 그것으로 자신에 대한 충성심을 확인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사역하던 아시아 여러 곳에서도 황제 숭배를 위해 신전이 세워졌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거부하여 죽거나 하는 절대절명의 핍박과 고난의 시대를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핍박과 고난속에서 절망하지 않고 소망을 붙잡도록 이러한 놀라운 이상과 상징으로 소위 그당시 그리스도인이라면 알아들을수 있는 상징언어, 그림언어로 그들이 당하고 있는 고난속에서 포기할수 없는 소망이 있음을 알도록 전하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요한은 로마 권력에 대해 철저한 선지자적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가 밤모섬에서 보았던 그리고 하나님 그이게 보여주었던 그러한 신비하고 놀라운 환상으로 계시록을 쓰고 그것을 두려움없이 전할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당시 핍박받고 고난받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어진 <요한계시록>은 그들의 두려움을 이겨내는 말씀, 두려움을 떨져 버리고 참된 진리와 소망을 부여잡는 복음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요한계시록을 읽고 있는 우리는 여전히 잘못된 종말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 그러한 성경으로 읽혀지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읽는 것조차 두려워하고 있는 이 아이러니 한 현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 두려움을 떨쳐버리는 계시가 두려움을 갖게 만드는 계시가 되어버린 꼴 >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바르게 이해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먼저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나오는 모든 상징과 그림언어들을 다 이해할수 있다는 욕심을 버려야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상징과 그림언어들이 명쾌하게 말해주는 부분도 있고 여전히 명쾌하지 않는 상징으로 남아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분명히 우리가 부여잡고 묵상해야하는 중심사상과 핵심메시지를 붙들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르게 이해해야할 요한계시록의 중심사항, 핵심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첫째, 요한계시록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교회입니다.


현재 교회가 처한 최악의 상황을 말하고 그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 최악의 상황은 로마의 황제숭배와 같은 통치속에서 이러한 통치 이념속에 있는 교회에 대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교회가 될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이다.

 

요한계시록은 교회에 대하여 두가지 그림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승리하는 교회고 다른 하나는 전투하는 교회이다.

이 두 그림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고 본래는 하나다.

그속에서 교회공동체의 성도들은 믿음과 인내를 배웁니다.

 

둘째, 요한계시록의 또 하나의 축약된 주제는 < 종말 >이라는 주제입니다. 


이 종말이라는 주제는 민감하기도 하고 왜곡되어 있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핍박받는 교회들에 대한 목회적 당부이며 요청입니다. 이 메시지는 상황은 다르지만 영적인 도전은 같은 오늘의 시대를 향한 메시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종말>< >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흔히 <종말>하면 말세. , 심판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종말이란 창조의 회복이 성취되고 완성되는 순간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 성경적인 회복은 타락한 이세상을 회복하는 순간을 의미합니다. 바로 그날이 그때가 바로 <에덴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초림은 에덴의 회복의 성취이고 재림은 에덴의 회복의 완성입니다.

세속적인 종말은 바로 <>을 말합니다. 성경적인 종말은 바로 <회복>을 말합니다. 이미 종말이 시작되었고 예수님의 재림에 완성됩니다. 우리의 생각의 전환 : 바로 예수님의 탄생이 종말의 사건의 시작입니다. 바로 종말의 성취를 말하고 있습니다.

 

셋째. 요한 계시록의 <예언>은 과거/현재/미래를 다 포함합니다.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성경에서 <예언>은 우리가 흔히 아는 미래 시점만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먼저 <예언은 미래다> 라고 하는 잘못된 오해를 바로잡아야합니다


에언은 < 미래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 그런 내용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서 예언은 <나비>라는 단어는 대언하다는 뜻입니다. <누구 앞에서 말하다> 뜻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을 바르게 알고 있는 사람이 그분에서 말하는 것이 바로 예언입니다. 이 예언은 과거/현재/미래를 다 포함합니다.


선지자들의 예언의 내용은 < 너희가 하나님을 떠났다. 그래서 심판이 필연적으로 있을 것이다. 그리고 회복이다. 돌아오라 >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요한계시록의 예언은 < 과거.현재,미래>를 다 포함합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뜻과 계속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단순히 미래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다.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그것만 말하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왜곡과 오해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로만 하기에 상당한 왜곡입니다.

 

넷째. 요한 계시록은 < 순종 >을 요구합니다. 요한계시록은 <호기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여기서 <읽은자(단수) > <듣는자들/지키는자들(복수)>입니다.  

한사람이 읽고 듣고 지키는자는 다수입니다

< 복이 있나니... 왜냐하면 때가 가까움이라. > 라고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의 복은 바로 < 듣고 지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때가 가깝기 때문입니다. >


< 때가 가깝다 >는 것은 <아직 안온 것이 아니라 때가 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가 가까운 것은 < 종말의 때가 온것을 의미합니다. >.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통해서 이 땅에 온 것입니다.


황제를 숭배하지 말고 하나님 만을 섬기라는 이 메시지를 듣고 지키는 것은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하나님의 때가 왔고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땅에 도래했다고 했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 그 나라의 맛을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다스림을 경험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경험하는 통로가 됩니다.


요한계시록은 <호기심>이 아니라 < 듣고 지키는 것>에 대해서 집중해있다.

우리는 예수님이 언제 재림하느냐?에 대해서 관심이 크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오늘 현재의 삶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에 집중한다.


종말은 바로 예수님의 오심으로 시작되었다.

요한계시록은 이미 종말이 시작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의 탄생의 사건으로 부터.....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