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스라 3:1-13>
  • 감격의 시대 : 다시 세우는 예배 




  • @ 설교문 그림은 인터넷 갈무리함  




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에스라 3:1-13>


제목 : <에스라 3:1-13> 감격의 시대 : 다시 세우시는 예배



[에스라31-13]

1. 이스라엘 자손이 각자의 성읍에 살았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일제히예루살렘에 모인지라

2.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그의 형제제사장들과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그의 형제들이 다 일어나 이스라엘 하나님의제단을 만들고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번제를 그 위에서 드리려 할새

3.무리가 모든 나라백성을 두려워하여 제단을 그 터에 세우고 그 위에서 아침 저녁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며

4. 기록된 규례대로 초막절을 지켜 번제를 매일 정수대로 날마다 드리고

5. 그 후에는 항상 드리는 번제와 초하루와 여호와의 모든 거룩한 절기의 번제와 사람이 여호와께 기쁘게 드리는 예물을 드리되

6. 일곱째 달 초하루부터 비로소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으나 그 때에 여호와의 성전 지대는 미처 놓지 못한지라

7. 이에 석수와 목수에게 돈을 주고 또 시돈 사람과 두로 사람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기름을 주고 바사왕 고레스의 명령대로 백향목을 레바논에서 욥바해변까지 운송하게 하였더라

8.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이른 지 이 년 둘째 달에 스알디엘의 아들스룹바벨과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다른 형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무릇 사로잡혔다가 예루살렘에 돌아온 자들이 공사를 시작하고 이십 세 이상의 레위 사람들을 세워 여호와의 성전 공사를 감독하게 하매

9. 이에 예수아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형제들과 갓미엘과 그의 아들들과 유다 자손과 헤나닷 자손과 그의 형제 레위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하나님의 성전 일꾼들을 감독하니라

10. 건축자가 여호와의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자손 레위 사람들은 제금을 들고 서서 이스라엘 왕다윗의 규례대로 여호와를 찬송하되

 11. 찬양으로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이르되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 기초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

12.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

13. 백성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간하지 못하였더라


 

제목 : 감격의 시대 : 다시 세우는 예배

 

오늘 본문은 이제 본격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온 본연의 목적인 <성전 재건의 준비>가 시작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 에스라서의 기록과 말씀의 내용을 후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어떻게 유대인들이 이 에스라서를 읽었을까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은 이 에스라서를 읽고 이방나라 페르시아로부터 돌아온 유대민족과 그들이 이루어낸 대 역사 성전재건의 사건이 그들에게는 < 감격 >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에스라서에 성전재건의 기록들과 역사들은 유대인들에게는 < 감격의 시대 >을 알게하는 그런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오늘의 에스라 3장의 장면을 보아도 얼마나 감격적인 일인지 옅볼수 있습니다.


이방나라에 잡혀가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민족이 모두다 없어질 위기에 처했었습니다. 흔적도 없이 나라가 사라졌고 그들이 살던 땅도 빼앗겼습니다. 그들의 영적인 자존심이요 핵심가치였던 성전마처 처참하게 느부갓네살의 손에 의해서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에게 성전이 무너졌다는 것은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게임오버, 디엔드 >를 알리는 신호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마지막희망마져 사라지고 그들의 눈앞에 무너진 성전은 < 자신들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듯한 절망감 >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하나님이 그들에게 약속하여 주신 약속에 땅에 살수 없도록 포로로 잡혀갑니다. 심지어 그들이 이름조차도 바벨론식 이름으로 바꿔야만했습니다


어제 2장의 본문에 보면 그들의 족보도 모른 사람들이 많았고 심지어 제사장들의 가문조차도 그들의 이름이나 뿌리를 밝히지 못하고 불분명해서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는데 제외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그들이 포로로 잡혀간 70년의 세월은 < 잊혀진 세월 잃어버린 시간 >이었습니다. 페르시아의 식민지의 백성으로 살아야 했고 그들의 정체성을 상실했던 < 정체성의 위기요, 상실의 시대 >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 감격의 시대 >가 도래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도움과 선한 손길로 그들은 이방땅 페르시아에서 기적같이 돌아오고 됩니다. 그러고 7월이 되었습니다.


최근의 국제 뉴스중에서 가장 뜨거운 뉴스가 < 스코틀랜드 >의 독립투표에 관한 뉴스일것입니다. 아마도 오늘 오전이면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 연방에서 독립하느냐? 마느냐?가 투표로 결정됩니다. 실제로 잉글랜드는 < 엥글로 색슨족 >입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는 < 캘트족 >입니다. 같은 나라이지만 실제로는 민족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스코틀랜드는 영국으로 독립을 원했습니다. 서로 다른 민족이기 때문이죠. 아마도 스코틀랜드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으로 결정하게 되면 정말 < 감격적인 환희 >가 거리에 넘쳐 날것입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 에스라 3장에서 돌아온 이스라엘백성들은 드디어 7월을 맞이합니다. 7월은 <일곱째달><다스리월>로써 유대인들이 1년중에 종교적으로 가장 거룩한 날로 여기고 있습니다. 71일은 나팔절, 710일은 속죄일, 722일은 초막절입니다. 아마도 제사장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이러한 거룩한 달을 맞아서 먼저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리도록 결심을 한 것 같습니다.

 

실제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정착한 기간은 3개월동안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인 바벨론에서 팔레스틴까지 돌아오는 거리가 1.440킬로( 마일)미터 정도인데 그당시로는 걸어서와야 하기에 약 4개월 정도가 걸립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제 제사를 드리는 때가 9-10월 정도라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겨울철이 지난 봄경에 바벨론을 출발해서 4개월 정도 여행을 한 끝에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일제히 모여서 제사를 드리고 초막절을 지킨 것은 그들이 돌아온진 얼마되지 않아서 일것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본토로 돌아온 뒤 약 3개월 후일것입니다.


 

그 기간을 보내는 동안 어쩌면 조심스러운 시간을 보냅니다. 새롭게 삶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집도 짓고 밭도 일구고 일단 먹고 살 일들을 했겠죠.. 그러다가 3개월이라는 시간이 흐릅니다.

 

에스라 31- 2절에

1. 이스라엘 자손이 각자의 성읍에 살았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일제히예루살렘에 모인지라

2.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그의 형제제사장들과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그의 형제들이 다 일어나 이스라엘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고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번제를 그 위에서 드리려 할새

 

3개월이 지난후에 각자의 성읍에서 살던 이들이 일제히 예루살렘으로 모입니다. 그 중심에는 < 제사장들인 예수아와 스룹바벨, 그의 형제들 > 있습니다.

어느 정도 먹고 살수 있을 말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여 단을 쌓고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고 모세의 율법대로 초막절을 지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와 3개월이 흐른 시점이 초막절을 지키는 시점과 맞았습니다. 오늘의 달력으로 말하면 9-10월즘이 되겠죠.


조금 재미있게 표현하면 < 바벨론에서 돌아온 후 3개월, 10월의 어느 멋진날에 제사를 드리고 단을 쌓습니다. >


다윗 집안의 출신인 스룹바벨은 앞쪽으로 나서게 됩니다. 대제사장 예수아(여호수아)와 함께 그는 제단을 그 본래 있던 자리에 다시 세울 책임을 맡습니다. 놀랍게도 솔로몬의 시대에 솔로몬의 성전이 완성되고 봉헌될때가 때가 바로 10월의 어느날 초막절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우리교회 설립주년도 10월 이네요..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 감격의 시대 >를 보내고 있습니다

다시금 회복되고는 제단을 바라보면서

다시 드려지는 제사의 향기를 맡으면서

다시 지켜지는 은혜의 절기를 지키면서

그리고 다신 기초가 놓아지고 있는 임재의 성전을 바라보면서

예배가 회복되어지는 감격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는 감격만은 있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 자신의 땅을 돌와왔지만 그땅을 차지하고 있는 < 사마리아 사람들 >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에스라 33-4

3.무리가 모든 나라백성을 두려워하여 제단을 그 터에 세우고 그 위에서 아침 저녁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며

4. 기록된 규례대로 초막절을 지켜 번제를 매일 정수대로 날마다 드리고

5. 그 후에는 항상 드리는 번제와 초하루와 여호와의 모든 거룩한 절기의 번제와 사람이 여호와께 기쁘게 드리는 예물을 드리되

6. 일곱째 달 초하루부터 비로소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으나 그 때에 여호와의 성전 지대는 미처 놓지 못한지라

 

그러나 그 두려움도 내려놓고 하나님께 제단을 세우고 번제를 드리며 규례대로 초막절을 지키면 여호와께 드리는 예물을 드리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감격과 환희는 우리의 삶에서 드리는 예배의 현장에서 결정됩니다

예배의 퀄리티가 우리의 삶의 퀄리티이면 우리의 감격의 퀄리티입니다.


오늘 본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행위를 4가지 동사로 요약할수 있습니다. < 세우고 - 드리고 - 지키고 - 드리는 >것을 요약됩니다.


먼저 우리의 삶에 무너진 잊혀진 제단을 세우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합니다. 그것이 개인적인 예배의 제단일수도 있고 공동체의 성전이 될수 있습니다. 예배하는 행위는 우리안에 무져있던 예배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 여호와의 유월절 >이라는 찬양에 보면 마지막 가사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 내안에 무너졌던 모든 예배 다 살아나리라. >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안에 무너졌던 모든 예배가 다 살아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냥 무너진 상태로 내버려두고 있습니까

아님 죽었고 무너졌던 예배를 다시 살리도록 몸부림 치고 있습니까?

 

두 번째 하나님께 온전한 헌신과 사랑과 감사를 표현하는 번제를 드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4-5절에 < 번재를 매일 정수대로 날마다 드리고 그후에는 항상 드리는 번제와 ...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마음에 와닿는 메시지는 번제를 드리는 자세입니다. < 매일... 날마다.. 항상 .. > 실제로 이스라엘백성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모세의 율법대로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번제는 <매일 항상 날마다 드리는 우리의 예배>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경험을 매일 같이 날마다 그리고 항상 경험하는 것이 참다운 예배자의 삶입니다. 우리의 삶의 매일 항상 날마다 감격의 시대를 만들어 내는 방법은 우리의 일상속에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을 위한 < 매일의 예배의 감격 >을 경험하게 될것입니다.


이런말이 있죠 < 에브리데이 해피데이 > 우리의 삶의 에브리데이 해피데이가 되는 것은 바로 < 내 삶에서 매일 예배가 드려지고 있고 예배를 경험하고 있을 때 > 가능합니다.

 

세 번째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때를 지켜서 하나님을 기쁘게해 드리는 것이 있어야합니다. 이스라엘의 절기와 그들이 드리는 예물의 중심에는 < 하나님의 기쁨 위하여 >라는 의미가 항상 따라 다닙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때, 하나님의 기쁨이 드리는 예물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자주 이렇게 노래 부르죠

<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내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



바꾸어서 말하면서 <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지지 못하면 하나님의 기쁨이 되지 못합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의 절기와 예물은 자신이 < 하나님 만을 기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되기 원합니다 >라고 하는 표현이었습니다.


항상 예배의 중심에는 < 나의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에 주목>행합니다. 내가 받을 은혜보다는 하나님께서 주실 은혜에 대한 기대가 먼저입니다. 내가 받고 싶은 말씀보다 하나님께서 주실 말씀에 대한 기쁨이 먼저입니다.

항상 우리의 신앙에 감격이 상실될때는 예배가 나중심을 바뀌어 있을때입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70년의 바벨론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와서 그들안에 가장 먼저 회복되기 원하셨던 마음은 < 예배의 감격>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예배의 감격을 회복하는 시대가 바로 에스라의 시대였으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적에 바로 그러한 감격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어떻게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찬양하면 소리치면 울면 웃으면 즐거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지가 나옵니다.

에스라 311-13

 11. 찬양으로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이르되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 기초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

12.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

13. 백성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간하지 못하였더라

 

얼마나 기쁘고 감격적이었는지? 큰소리로 노래하고 큰소리로 통곡하고 큰소리로 함성을 지르고 큰소리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가 그 도시를 가득채웠습니다. 바로 < 감동과 감격의 도가니 deep emotion>가 된것이죠.


다 표현할수 없고 다 주체할수 없는 기쁨이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아네 있음을 봅니다.

 

그 사랑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사랑 얼마나 날 부요케하는지

그 사랑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그 사랑 얼마나 나를 감격하게 하는지

 

우리는 이것을 주목해서 보아합니다.


1/ 무엇이 나를 감격하게 하고 기쁨게 하는가?

 


2/ 나는 매일 날마다 항상 예배에 성공하고 있는가?

 


3/ 나를 주체할수 없게 만드는 예배는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 <에스라 1:1-5 ; 2:1-2>
  • 100년동안 다시 세우는 예배공동체 
  • 09/16/2014

@ 설교문 그림은 인터넷 갈무리함 


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에스라 1:1-5, 2:1-2>


제목 : <에스라1:1-5, 2:1-2> 다시 세우시는 예배공동체




 

[에스라11-5]

1.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2.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3.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4.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머물러 살든지 그 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그 밖의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 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에 세울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예물을 기쁘게 드릴지니라 하였더라

5.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나니




[ 에스라 21-2]

1. 옛적에 바벨론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바벨론으로 갔던 자들의 자손들 중에서 놓임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 도로 돌아와 각기 각자의 성읍으로 돌아간 자

2. 곧 스룹바벨 예수아 느헤미야 스라야 르엘라야와 모르드개와 빌산 미스발 비그왜 르훔 바아나 등과 함께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명수가 이러하니





제목 : 100년동안 다시 세우시는 예배 공동체

 

지난주간까지 <에스더서>가 끝나고 이번주부터 <에스라서>본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은 에스라서의 전체적인 개관적인 흐름을 이해하는 1장과 2장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흔히 <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는 동시대의 상황을 배경으로 각기 다른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살펴볼수 있는 말씀입니다. 


< 에스더 느헤미야 에스더 >를 연대기적으로 배열한다면 < 에스라 - 에스더 - 느혜미야 >로 재배열할수 있을 것입니다.


주로 이 세가지 말씀은 이스라엘의 1,2,3차 포로귀환이 진행되었던 5세기에 일어난 사건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원래 히브리 원문 성경에는 < 에스라와 느헤미야 >가 한 권으로 책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bc 538-433년까지 약 100년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바사왕 고레스왕부터 캄비아스, 다리오, 아하수에로, 아닥사스다왕까지의 여러대의 걸친 페르시아 제국의 세속의 역사와 함께 쓰여지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주된 이야기와 사건들의 배경은 <3번에 걸친 바벨론 포로 귀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다 시피 이스라엘과 유다백성들이 이방나라 <앗수르와 바벨론>에 멸망합니다.


이 멸망은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앗수르 마져도 바벨론 대제국앞에 무릎을 꿇고  그 사이에서 이스라엘과 유다백성들은 3번에 걸쳐서 포로로 잡혀갑니다.

그리고 바벨론은 바사나라 곧 페르시아 대 제국에 의해서 멸망하게 됩니다. 


바벨론에서 70년의 포로생활을 한후에 3번에 걸쳐서 포로귀환이 이루어집니다. 1차귀환은 < 스룹바벨 >과 함께, 2차 귀환은 < 에스라 >와 함께, 3차 귀환은 <느헤미야>와 함께 돌아오게 됩니다.


우리는 3번에 걸쳐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간것은 < 바벨로 유수 >라고 

말합니다.



 3번에 걸쳐서 바벨론에서 돌아온것을 < 바벨론 포로 귀환 >이라고 말합니다. 공교롭게도 3번에 걸쳐서 잡혀가고 3번에 걸쳐서 돌아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과 유다백성이 구사일생으로 70년의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올수 있는 것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손길과 구원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역대기서를 보면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의 예루살렘의 파괴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는 장면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끝맺고 있습니다.

 

역대하 36:21-23

21. 이에 토지가 황폐하여 땅이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더라

22.바사의 고레스 왕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여호와께서 바사의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23. 바사 왕 고레스가 이같이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을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그의 백성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이 역대하 마지막장 마지막절은 고스란히 에스라 11-3절에 다시 반복하고 있습니다.

1.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2.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역대기 기자는 유대인들이 바벨론을 떠나 귀환하는 문제를 미결상태로 남겨놓은 반면에 에스라는 그 귀환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과정속에는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손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예레미야를 통해서 자신의 백성이 돌아올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예레미야 25:11-13

11. 이 모든 땅이 폐허가 되어 놀랄 일이 될 것이며 이 민족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의 왕을 섬기리라

12.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칠십 년이 끝나면 내가 바벨론의 왕과 그의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악으로 말미암아 벌하여 영원히 폐허가 되게 하되

13. 내가 그 땅을 향하여 선언한 바 곧 예레미야가 모든 민족을 향하여 예언하고 이 책에 기록한 나의 모든 말을 그 땅에 임하게 하리라

 

예레미야 29:10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그리고 이사야 451절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돌아오는 일에 <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종 >의 역할을 바사 나라 < 고레스왕(Cyrus) >이 감당할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45:1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그의 오른손을 붙들고 그 앞에 열국을 항복하게 하며 내가 왕들의 허리를 풀어 그 앞에 문들을 열고 성문들이 닫히지 못하게 하리라

 



오늘 에스라서에 기록되어 있는 바벨론 포로 귀환의 사건은 갑자기 일어나는 행운같은 일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고 그것을 이루어가시는 구속의 역사와 성취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속의 시간표가 구속의 시간표로 바뀌는 장면입니다.


실패의 시간표가 은혜의 시간표로 바뀌는 역사입니다. 


우리는 에스라서속에 담겨있는 <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와 성취 >를 주목해서 보아야 합니.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속의 역사속에서 자기 백성을 끝까지 보호하시고 끝까지 자신이 하신 약속을 지키시는지를 우리는 주목해서 보아야 합니다.

 

에스라서 11절을 읽으면서

1.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


< 바사왕 고레스 원년에 >에는 대목은 세속의 역사적인 배경을 설명해줍니다. 그러나 <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라는 대목에서 이 세속의 역사를 도구삼아 자신의 구속의 역사를 써내려 가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손길과 계획을 주목해서 보아야합니다.

바로 이 대목이 세속사가 구속사가 바뀌는 대목입니다. 세속의 주인공이 하나님의 선한 일에 주인공이 되는 대목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상적인 시간과 일어나는 사건들 그리고 상황들>은 그냥 세상적인 시간과 사건들이 아님을 명심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우리에게 <일상처럼 주어진 시간과 일어나는 사건들 그리고 상황들>을 구속의 은혜와 고백으로 바꿔내는 능력이 있어야합니다.


우리의 일상을 구속의 묵상으로 바꾸는 능력

우리의 시간을 구원의 시간으로 바꾸는 능력

우리의 상황을 구원의 감격으로 바꾸는 능력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을 구속사로 다시 써내려가는 능력입니다.

 

에스라서는 바로 그냥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일어나는 포로 귀환의 사건들만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포로 귀환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바벨론의 포로 유수의 70년의 시간, 그리고 그들이 자신에게 약속했던 그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기까지 100년의 시간을 어떻게 우리는 바라보아야 할까요?

 

먼저 우리는 왜 ?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고 심판을 당했나를 생각해보아야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철저하게 하나님께 버림 받는 심판의 고통을 당했던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그것은 < 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실패한 예배공동체였습니다. 실패한 예배자들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이 자부했던 예배의 처소인 성전도 철저하게 파괴되고 맙니다.

그들이 범죄와 가증한 태도로 하나님만을 예배하지 않았습니다. 이방나라를 의지하고 이방신을 섬기고 이방사람들과 교제하는 이들이 하나님이 참을수 없는 심판을 만들게 된것입니다. 스스로 웅덩이를 판격이 되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는 바로 < 예배의 실패 >였습니다. 제사장들이 타락하고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우상을 섬겼고 가증한 일을 행했습니다. 실제로 포로로 잡혀갈때보면 대부분이 < 제사장들과 지도자들, 귀족들이었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이들을 심판하십니다.


그러한 70년의 고통과 고난의 시간이 지나고 그들이 돌아오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그들 다시 돌아오게 하셔야 했을까요?


바로 그 이유는 < 그들이 다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보기 원

하셨기 때문입니다. >


나님께서는 바사왕 고레스의 호의와 조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이 오래전부터 약속하고 주었던 땅으로 돌아가게하십니다


그 주된 이유는 < 다시 예배공동체를 세우셔서 다시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예배자들로 세우기 위함 >이었습니다.


스룹바벨과 에스라, 느헤미야가 돌아와서 가장 먼저한 일은 바로 < 성전을 재건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예배 공동체를 다시는 세우는 일입니다.


실제로 에스라1장에 보면 바사왕 고레스(키루스)< 성전 재건을 허락하고 지원하고 있습니다. > 이것은 있을수 없는 일입니다. 이방신 말둑을 섬기고 있는 바사왕이 자신의 신도 아닌 다른 나라 신을 섬기도록 허락하는 일은 가히 상상할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바사왕 고레스의 유화적인 정책과 태도를 사용하십니다. 고레스의 자비로운 통치의 이면에는 < 하나님의 감동 >이 있었습니다





오늘 에스라 1장은 분명히 그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사왕 고레스왕의 이면에 일아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성전이 재건되고 제사가 재확립됩니다.


그리고 에스라 1장 마지막 절을 보면 놀랍겠도 빼앗겼던 성전기물들을 가지고 가게하고 성전을 건축하는 자금을 지원받게 됩니다. 어찌 이런일이 ... 세상에 이런일이... 믿거나 말거나 ...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이것 역사 하나님이 이루시는 구원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에스라 2장에 언급되어 있는 포로귀환자 명단을 면밀히 보면 < 제사장들, 제사에 수종드는 자들, 그리고 성전에 허드렛일을 하는 이방족속 느디니사람들 >이 주된 사람들 42,350명이 돌아오게 됩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성전건축과 제사를 회복하시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할 사람들 입니다.





그러한 사람중에 < 아론의 16대손, 스라야의 아들, 학사겸 제사장인 에스라 >를 통해서 그 일들을 주도하게 하십니다. 바로 에스라를 통해서 예루살렘의 성전을 재건할 뿐아니라 이스라엘 다시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공동체로 재건하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다.

이스라엡 백성의 실패는 < 예배의 실패 >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은 < 예배의 재건>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에스라서를 통해서 주목해서 묵상해야할 것은

1/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이 기뻐하는 새성전을 다시 세우고 계시는가?

2/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이 원하는 예배를 받기 위해 남은 예배자들를 구원하시는가?

3/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이 원하시는 예배공동체를 세우시는가?

 

이것을 주목해서 보아합니다.

다시 세우는 성전 재건 


다시 모으시는 예배자들 


다시 일으키시는 예배공동체

이것이 에스라서를 묵상하는 핵심방향입니다.

우리는 반대로 우리는 이렇게 적용질문을 만들어 볼수 있습니다.


1/ 나에게 무너져있고 실패하고 있는 성전은 없는가?


2/ 나는 마지막까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자인가?


3/ 나의 가정과 교회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공동체가 되고 있는가?










  • <에스더 5:1-9>
  • 왕이 반한 그녀 왕에게 반전을 요구하다.
  • 09/09/2014 


@ 설교문 그림 인터넷 갈무리함 

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에스더 5: 1 - 9>


제목 : <에스더 5: 1 - 9> 왕이 반한 그녀 왕에게 반전을 요구하다




1. 제삼일에 에스더가 왕후의 예복을 입고 왕궁 안 뜰 곧 어전 맞은편에 서니 왕이 어전에서 전 문을 대하여 왕좌에 앉았다가

2.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매우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 규를 그에게 내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 규 끝을 만진지라

3. 왕이 이르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냐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 하니

4. 에스더가 이르되 오늘 내가 왕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사오니 왕이 좋게 여기시거든 하만과 함께 오소서 하니

5. 왕이 이르되 에스더가 말한 대로 하도록 하만을 급히 부르라 하고 이에 왕이 하만과 함께 에스더가 베푼 잔치에 가니라

6. 잔치의 술을 마실 때에 왕이 에스더에게 이르되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뇨 곧 허락하겠노라 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뇨 나라의 절반이라 할지라도 시행하겠노라 하니

7. 에스더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소청, 나의 요구가 이러하니이다

8. 내가 만일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었고 왕이 내 소청을 허락하시며 내 요구를 시행하시기를 좋게 여기시면 내가 왕과 하만을 위하여 베푸는 잔치에 또 오소서내일은 왕의 말씀대로 하리이다 하니라

9. 그 날 하만이 마음이 기뻐 즐거이 나오더니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있어 일어나지도 아니하고 몸을 움직이지도 아니하는 것을 보고 매우 노하나




제목 : 왕이 반한 그녀가 왕에게 반전을 요구하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5장부터는 3번의 잔치를 중심으로 벌어진 에피소드를 그리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부분부터는 <에스더서의 이야기중에서> 아주 극적인 장면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보통 TV 드라마에 어떤 극적인 장면이 나 올 때면 시청률이 몇 퍼센트 나왔다고 할 만큼 어느 한 장면이 빼 놓을 수 없는 클라이막스를 말해줍니다


오늘 에스더서 5장에 왕의 잔치에 나아가 소위 왕의 성은을 입게 되는 이러한 에스더서의 장명은 에스더서의 가장 흥미롭고 가장 시청률이 많이 나올만한 명장면이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에스더서를 드라마로 빗대어 말하면 에스더서는 흥행할만한 드라마의 3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가족 드라마>입니다. 한 유대의 소녀가 성장기와 성공기가 그려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 아픈 가족사와 민족사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방나라 페르시아에서 이름을 바꾸면서 현실에 한번 잘 살아보려고 서바이벌 해왔던 아픈 가족사가 있습니다.


둘째는 <막장 드라마>입니다. 좋은 아내와 며느리에게 나쁜 시어머니가 등장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갈등구조가 막장 같은 치열한 증오와 복수를 만들어냅니다. 에스더서에는 좋은 이야기나 교훈적인 이야기만 등장하지 않습니다. 시대의 악역을 담당하고 있는 하만의 등장과 역할은 에스더서가 막장드라마의 특징을 갖기에 충분합니다. 하만은 유대인들에게 아말렉의 후손으로 오래 원한과 미움을 갖고 있는 그런 인물입니다. 하만과 모르드개의 갈등은 서로 깊은 원한이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셋째는 <반전드라마>입니다. 에스더서에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각 장마다 각 장면마다 나타나고 있는 반전의 사건들입니다. 반전은 상황이 바뀌는 것입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해서 그 드라마의 분위기와 흘러가는 이야기를 바꿔 놓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이 에스더가 우리에게 주는 재미입니다.

 

이러한 에스더서는 <가족드라마/막장드라마/반전드라마>3가지 특징을 갖고 이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드라마를 손수 쓰고 계신 작가가 있습니다. 바로 < 여호와 하나님 >이십니다. 제가 지난번에게도 강조했지만 에스더서는 흥미로운 이야기로만 보지 말아야합니다. 에스더서를 우리에게 드라마와 같이 이야기와 같이 주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파악하는 일, 그리고 에스더를 통해서 만들어내는 에피소드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손과 섭리를 발견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손이 어떻게 에스더의 이야기를 새로운 이야기로 바꿔놓고 계시는지를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생명의 삶의 책에서 오늘 본문의 제목을 <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용기가 만날 때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름 괜찮은 제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조금 덧붙여서 < 하나님의 손과 사람의 손이 마주칠 때...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행동이 함께 일할 때 >라고 덧붙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에피소드의 타이틀을 이렇게 요약하고 싶습니다.

< 왕이 반한 그녀가 왕에게 반전을 요구하다 >


오늘 본문에 에피스도에게하나님이 일하시는 놀라운 일은 바로 <아하수에로 왕이 에스더에게 반했다는 것입니다. > 그리고 < 아하수에로 왕에게 에스더가 드라마의 반전을 일으키는 요구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바로 이 < 반함이 반전이 되는 >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로 바뀌고 있는 소위 터닝포인트와 같은 에피소드가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된 흐름은 하만이 에스더와 모르드개 그리고 유다백성들을 멸절시키려는 <막장드라마>로 짜져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막장 드라마가 반전드라마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더의 지혜와 용기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하만의 계략과 의도를 뒤집어 놓는 반전드라마의 시작이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에 51-2절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1. 제삼일에 에스더가 왕후의 예복을 입고 왕궁 안 뜰 곧 어전 맞은편에 서니 왕이 어전에서 전 문을 대하여 왕좌에 앉았다가

2.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매우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 규를 그에게 내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 규 끝을 만진지라


바로 어떻게 에스더가 어떻게 왕이 눈에 들고 어떻게 왕의 성은을 입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후궁중에서 수많은 궁중의 여인중에서 그렇게 눈여겨보지 않았던 에스더가 왕의 눈안에 드는 대목입니다. 왕이 에스더에게 반하는 장면입니다.

 

바로 이 잔치가 있기전에 < 유대인들은 3일동안 에스더와 함께 금식을 했습니다. > 그리고 에스더 용기를 내어 죽으면 죽으리다는 고백을 실행하는 행동을 감행합니다. 왕의 부름을 입지 않았는데오 왕궁안뜰에 들어가서 왕을 보려하는 것입니다. 그전까지 에스더는 왕의 부름을 입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4장에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전한 말속에서 에스더의 상황과 중심을 알수 있습니다.

411. 왕의 신하들과 왕의 각 지방 백성이 다 알거니와 남녀를 막론하고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뜰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가면 오직 죽이는 법이요 왕이 그 자에게 금규를 내밀어야 살 것이라 이제 내가 부름을 입어 왕에게 나가지 못한 지가 이미 삼십 일이라 하라 하니라

 

416.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에스더가 부름을 받지 않고 왕에게 나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죽음 각오하는 < 죽으면 죽으리라 >는 소위 < 일사각오 >의 용기를 갖기까지 쉽지 않은 고뇌와 결정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에스더의 고백과 결정은 < 하나님의 손에 자신의 생명을 거는 일이며 하나님의 손에 자신의 인생을 거는 일입니다. >

 

잠언 211절에 보면 < 왕의 마음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 > 라는 말씀있습니다. 에스더는 이러한 믿음이 있었던 것이죠..

 

용기를 내어 에스더는 왕의 부름을 입지 않았는데 왕앞에서 옷을 차려있고 왕의 안뜰로 들어 갔습니다. 이때 왕이 <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보았습니다 >




그리고 아하수에로 왕의 마음에 < 본즉 매우 사랑스러우므로 >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의 원문을 보면 < 그 여자는 그의 눈에 은혜를 얻었다 > 라고 말합니다. 사극으로 말하면 < 성은이 망극한 상황 / 성은을 입는 상황 >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왕이 한눈에 반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실제로 오늘 이스라엘에 유대인들이 부림절을 지킬때면 마치 에스더가 예복을 입고 왕을 기다린것처럼 사람들이 화려한옷을 입고 길거리로 나와서 부림절을 축제를 합니다. 오늘날 커스텀을 입고 하베스트 페스티발을 하는 것처럼 유대인들은 부림절을 그렇게 자신이 에스더가 된 듯이 화려한 옷을 입고 잔치를 보냅니다.

 





최근에 만들어진 영화중에 300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오늘 성경의 배경의 되는 페르시아제국과 그리스 스파르타와 전쟁을 다룬 전쟁영화입니다





그런데 이 <300>이라는 영화에 주된 등장인물에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인 바로 아하수에로 >입니다. 그영화에서 묘사하고 있는 <아하수에로왕>은 아주 신적이고 신비한 존재로 묘사가 됩니다. 신적 권위를 갖고 부소불위의 권력으로 전쟁터로 나아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영화를 보면 이러한 거대제국 페르시아와 맞써서 싸우는 스파르타의 300용사를 그리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전쟁영화다 보닌 피튀기는 전쟁씬이 많아서 이 영화감독은 그 장면마다 흑백으로 처리합니다. 아주 인상적인 영화죠.. 이 영화에서 아하수에로왕이 하는 대사중에 아주 인상적인 대사 한마디가 있습니다. < 나는 관대하다 But I am kind , But I am a generous god >입니다. 이 대사는 자신과 맞서 싸우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오늘 에스더 5장에 나오는 아하수에로 왕의 모습도 < 지극히 관대한 모습을 봅니다. > 그래서 페르시아의 살아있는 신적인 존재인 아하수에로왕의 <금규> <왕의 홀>을 내밀며 에스더에게 성은을 베풉니다.

 

바로 이 대목이 < 왕이 반한 그녀가 왕에게 반전을 요구하는 > 중요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왕은 에스더에게 < 소원을 말해봐. 이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리라 >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왕이 에스더에게 반했으면 이렇게 까지 말했을 싶은 생각이들 정도 입니다. 그때 에스더는 자신이 이 자리에 나와서 이러한 놀라운 성은을 입게 되는 이유를 잊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는 자신의 민족을 살리려는 간절한 요청이 있었고 그 일을 위해 자신을 위해 금식하며 기도하는 유다민족이 있을 잊지 않았습니다.

 

바로 지혜롭게 왕의 잔치에 하만을 초대할 것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다음 계획을 진행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오늘 이 반전 드라마의 서막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묵상할수 있을까요? 소위 이 성은이 망극한 이러한 에피소드속에서 무엇을 보아야 할까요


우리에게 이러한 적용질문들을 던져볼수 있어야합니다.


1/ 이 세상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이루시는 반전의 역사를 어떻게 기대하면 살것인가? 내 삶의 수많은 에피소드속에서 어떤 반전이 있었는가?

 

2/ 내 삶에 일어나는 소위 잘됨과 잘 풀림과 같은 하나님의 성은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어떻게 하나님의 눈으로 이해하면서 살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잊지 않고 발견하면서 살 것인가 ?

 

3/ 나는 기도하고 기대하고 기다리며 시도하는 일들이 무엇이 있는가? 하나님의 응답과 역사는 기도하는 손과 시도하는 발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어떻게 경험하고 살고 있는가?

 

4/ 오늘 우리에게 세상이 반할만한 모습이 있는가? 세상은 우리가 그들처럼 비겁할 때보다 오히려 그들에게 없는 용기와 믿음으로 반응할 때 더 매력을 느낀다










  • <에스더 1:13-22>
  • 별이 빛나는 밤에 
  • 09/02/2014 새벽묵상설교 

  • @설교문 그림 인터넷 갈무리함  






[ 에스더 1장 13절 - 22절 ]

13 왕이 사례를 아는 현자들에게 묻되 (왕이 규례와 법률을 아는 자에게 묻는 전례가 있는데

14 그 때에 왕에게 가까이 하여 왕의 기색을 살피며 나라 첫 자리 앉은 자는 바사와 메대의 일곱 지방관 곧 가르스나와 세달과 아드마다와 다시스와 메레스와 마르스나와 므무간이라)

15 왕후 와스디가 내시가 전하는 아하수에로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아니하니 규례대로 하면 어떻게 처치할까

16 므무간이 왕과 지방관 앞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왕후 와스디가 왕에게만 잘못했을 뿐 아니라 아하수에로 왕의 각 지방의 관리들과 뭇 백성에게도 잘못하였나이다

17 아하수에로 왕이 명령하여 왕후 와스디를 청하여도 오지 아니하였다 하는 왕후의 행위의 소문이 모든 여인들에게 전파되면 그들도 그들의 남편을 멸시할 것인즉

18 오늘이라도 바사와 메대의 귀부인들이 왕후의 행위를 듣고 왕의 모든 지방관들에게 그렇게 말하리니 멸시와 분노가 많이 일어나리이다

19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실진대 와스디가 다시는 왕 앞에 오지 못하게 하는 조서를 내리되 바사와 메대의 법률에 기록하여 변개함이 없게 하고 그 왕후의 자리를 그보다 나은 사람에게 주소서

20 왕의 조서가 이 광대한 전국에 반포되면 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여인들이 그들의 남편을 존경하리이다 하니라

21 왕과 지방관들이 그 말을 옳게 여긴지라 왕이 므무간의 말대로 행하여

22 각 지방 각 백성의 문자와 언어로 모든 지방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남편이 자기의 집을 주관하게 하고 자기 민족의 언어로 말하게 하라 하였더라







제목 : 별이 빛나는 밤에 


이제 9월 한달 동안 함께 묵상하게 될 말씀 본문이 < 에스더 / 에스라 > 이 두 성경을 살펴보게 됩니다. 조금은 다른 스토리와 갖고 있는 두 말씀이지만 이 두 성경은 같은 시대적 배경과 상황속에서 주신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오늘 에스더서에 기록된 사건들은 에스라 6장과 7장 사이에 발생한 것입니다. 

바사나라인 “아하수에로 3년“이란 주전 483년입니다. 





오늘은 이제 9월에 살펴보게될 < 에스더서 >에 담겨 있는 

큰 그림, 빅아이디어. 메인 아이디어 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고자 합니다. 


 왜? 에스더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어 졌는가? 

어떻게 ? 에스더서를 묵상하고 그속에서 핵심 메시지를 찾아야 하는가? 

우리는 이 에스더서를 통해서 무엇을 붙들어야 하는가?를 생각해보려합니다 


 우리는 < 에스더서 >를 읽을 때면 아주 흥미진한 < 동화 이야기 > 같은 느낌으로 읽게됩니다.



 디즈니의 이야기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가 있다면 < 신데렐라 / 백설공주 > 이야기가 있듯이 성경에서 가장 흥미롭고 재미있는 스토리가 있다면 바로 < 페르시야 나라의 왕궁의 에스더 >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 에스더 >라는 인물을 생각하면 두가지의 흥미로운 이미지를 생각합니다. 

< 하나는 신데렐라와 같은 이미지와 하나는 유관순 언니와 같은 이미지 >입니다. 


   


신데렐라와 같은 의미를 떠올리는 이유는 < 이방나라의 포로로 잡혀가서 모르드개의 손에 자란 에스더가 왕후가 되는 과정이 참으로 극적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유관순 언니와 같은 이미지를 떠올리는 이유는 < 하만의 음모와 계략으로 죽을 당할뻔한 자신의 민족을 구원하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함과 동시에 “ 죽으면 죽으리라 ”는 아주 멋진 말로 에스더의 삶이 기억되기 때문이다. >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동화적인 이미지와 영웅적인 이미지 이면 담겨 있는 하나님이 에스더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고자했던 본연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에스더서에 대한 평가는 다양합니다. 많은 이들은 에스더서에 기록된 이야기들인 너무도 극적인 반전 드라마 같아서 실제로 일어난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에스더를 소설같은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BC5세기 고대 문헌에 보면 바사나라에 대한 기록을 통해서 보면 < 그당시 궁중의 관례나 특사파견, 애곡 금지 >와 같은 역사적인 사실을 아주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 에스더서는 < 교훈과 역사>입니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에스더서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고 그속에 담겨 있는 < 하나님의 음성 >에 귀기울여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에스더의 극적인 반전 드라마와 같은 이야기속에서 어떤 하나님의 음성을 귀담아 들을수 있을까요? 


어제와 오늘의 말씀의 본문인 에스더 1장은 에스더가 왕후과 되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더서에 등장하는 인물로는 바사 나라 곧 페르시아 제국의 왕인 < 아하수에로 >가 등장합니다. 


 “아하수에로“란 바사(Pe-rsia)의 통치자를 가리키는 명칭입니다. 아하수로에는 본래 이름이 아닙니다.  애굽의 통치자를 가리키는 명칭으로서 애굽의 통치자를 “바로/파라오“(Pharaoh)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사 나라의 통치자를 < 아하수에로 >라로 불렀습니다. 그래서 원래 헬라식 이름은 < 크셀크세스 >입니다. 이 왕은 < 인도로부터 아프리까 수단까지 이르는 제국을 > 다스렸습니다. 그는 다리오 1세의 아들로서 거대한 부와 수산에 새로 세운 호화로운 궁전을 물려 받았습니다. 





영화중에 300이라는 영화에 인물이 바로 < 아하수에로 > 바로 < 크세르크세스 >가 등장합니다. 





에스더 1장을 보면 아하수에로가 큰 잔치를 벌린 곳이 < 수산궁 >입니다. 

원래 < 수산 >이라는 왕궁은 < 겨울에 지내는 수도 > 였습니다. 이 수산궁은 페르시아 제국의 3대 수도중 하나였습니다. 왕들이 겨울에는 바벨론에 봄에는 수산궁에 여름에 악메다에서 보냈습니다. 오늘 이 수산궁이 어디 있느냐 하면 < 이란 > 남쪽에 < 수사 >라는 지명 있는 그곳입니다. 


 오늘날 고고학자들이 그당시 < 수산궁 > 있었던 자리를 발굴해보았더니  그 규모가 어머 어마 했다고 합니다. 황제의 알현실과 후궁들의 규방 그리고 정원의 규모가 대단했다고 합니다. 






 에스더가 왕후가 될 당시에 바사나라와 아하수에로 왕은 대한 권세와 통치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속에서 < 아하수에로 왕은 대단한 잔치를 베풉니다. 그러난 그 잔치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 집니다. 왕후 와스디가 왕의 잔치의 초대를 거절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 결과 예상치 못했던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 에스더 >입니다. 


바로 여기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계획속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반전드라마가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 에스더 1장은 바로 그러한 배경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에스더서를 시작하면서 에스더서의 제목을 < 별이 빛나는 밤에 >라고 지어 봤습니다. 마치 저녁 라디오 프로같은 이름이죠.. 

그런데 에스더를 < 별이 빛나는 밤에 >라고 지은데는 그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원래 에스더라는 이름은 바벨론식 이름입니다. 그 뜻은 < 별 >이라는 뜻입니다. 원래 발음은 <이스터>입니다. < 페르시아의 별 >이라는 뜻입니다. 재미있는 것이다. <스더>와 <스타>가 같은 어원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원래 에스더는 유대이름은 < 하닷사 >입니다. 그 뜻은 < 상록수 / 아름다운 나무 >라는 뜻입니다. 


에스더는 그녀는 B.C. 597년 느브갓네살 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로 잡아갈시 베냐민 지파의 포로중 3대 증손인 '아비하일'의 딸로서 부모가 일찍 죽었음으로 사촌오빠인 모르드개의 양녀로 양육을 받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보잘 것 없는 포로였던 에스더가 < 페르시아의 별 > 되는 순간이 바로 오늘 본문의 순간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오늘 원래 왕후인 < 와스디 >의 이름은 뜻은 < 아름다운 여인 >이라는 뜻입니다. 


페르시아의 가장 아름다운 여인 와스디를 폐위시키고 예상치 못한 인물 <아름다운 나무 >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유대의 포로의 자녀가 왕후가 되는 일은 참으로 획기적이고 극적인 반전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에스더서를 서브타이틀을 < 별이 빛나는 밤에 > 라고 붙였습니다. 페르시아의 어두운 포로시절의 밤에 별처럼 빛나는 하나님의 사람 에스더를 우리가 주목해보는 것입니다. 조금더 부연하면 < 별이 빛나는 밤에 홀로 서있는 상록수 >라고 말할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에스더를 묘사하는 이미지입니다. 


그러한 에스더에 대한 인물에 대한 묵상이난 영웅적인 삶과 동시에 우리가 살펴보아야 하는 중요한 < 빅 아이디아 >가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빠지기 쉬운 실수는 교훈적이고 감동적인 < 스토리만 >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속에 담겨 있는 < 핵심 메시지, 메인 아이디어 >를 놓칠때가 많습니다. 


이러한 에스더의 극적인 반전 드라마 이면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는 사랑 그리고 변함없인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볼수 있습니다. 


우리는 에스더서를 묵상하면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3가지있습니다. 


1/ 에스더서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계획입니다. 

에스더를 흔히 소설같은 이야기로 생각했던 이유는 이 에스더 속에는 구체적인 하나님의 계시나 여호와의 대한 언급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왕의 이름이 28번이나 언급되는 반면 하나님의 이름이 언급된 일은 없다는 것이 특징적입니다.  

 비록 에스더서에서 여호와의 이름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이 이야기들속에는 < 하나님의 보이지 않은 손길 > < 하나님의 보이지 않은 생각 > < 하나님의 보이지 않은 계획 >이 있습니다. 이 < 하나님의 손길 / 생각 / 계획 >을 우리는 < 하나님의 섭리 > 라고 말합니다.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서를 일을때면 우리가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할 메시지는 

< 하나님이 이야기들의 배후에 어떻게 일하고 계신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스토리 이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비하인드 생각을 찾아내야합니다. 


2/ 에스더서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를 보호사는 사랑입니다.

에스더서는 가장 주요 이야기구조는 < 아하수에로 왕과 왕후 에스더 > < 하만과 모르드게 > <이방나라 페르시야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대조적인 갈등구조로 등장합니다. 이것은 서로간에 긴장과 갈등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에스더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부여주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포로생활중에 떻게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책임지시는지?를 말해줍니다. 


에스더서에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임을 면하게 되는 < 부림절 >에 대한 배경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간사한 신하들에게 둘려 싸여서 정치를 하고 있는 < 아하수에로 왕>와 왕을 통해서 자신의 음흉한 의도를 드러내고 있는 < 모략꾼 하만 >이 등장합니다. 이에 대응하여 하만의 계략을 간파하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고자하는 열망을 가진 < 모르드개 >와 그의 동기부여를 받은 < 죽으면 죽으리라의 고백을 하는 에스더 >가 등장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등장인물을 흥미진한 이야기속에서 극적인 반전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그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이 자기백성을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사랑하시는지?를 보야합니다. 


 에스더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 에스더 >가 처음부터 그렇게 왕앞에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만큼 < 신앙과 믿음에 당당한 여인 >이 아니었습니다. 그냥은 어쩌다 왕후가 되어서 인생이 잘 풀린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이 에스더를 들어 쓰십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쓸만한 도구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를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식으로 쓰실만한 도구가 되게 그녀의 마음을 붙잡아 놓으십니다. 


바로 이것인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모든 것을 다 하실수 있으시지만 하나님은 연약하고 부족하고 늘 주저하고 늘 자신없는 우리를 자신의 일에 끼워 놓으십니다. 


우리는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에 사역에 끼워놓고 계시는 하나님의 캐스팅을 보아야합니다. 연기력도 실력도 없는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드라마에 캐스팅하셨다는 사실이 바로 우리가 경험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3/ 에스더서속에서 우리는 변함없이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봅니다. 


하나님의 비록 포로로 잡혀가 살지는 유다백성이지만 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고 계십니다. 이스라엘백성이 포로로 잡혀간 것은 하나님 때문이 아닙니다. 


자기들이 스스로 웅덩이를 판것입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서 구원의 음성을 드려주었고 살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러나 목이 곧고 귀가 박혀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돌이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사람을 일으키시고 하나님의 방식을 그일을 행하십니다. 이방나라에 살면서도 그들이 변함없는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의 신실함을 보게 하십니다. 


바로 에스더서는 유대인들에게 그러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우리가 절망할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향한 변함없은 약속이 있기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 부림절 >은 가장 큰 절기입니다. 이 부림절이 주는 의미는 어떠한 상황과 고난에도 하나님은 우리의 편이 되어 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에게서 구원의 절기는 < 유월절 >과 < 부림절 >입니다. 


 이날 유대인들은 구원의 노래를 부르고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을 찬양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최근에 < 명량 >이라는 영화 1600만 관객을 동원하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영웅적인 이야기를 명량해전이란 배경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 영화를 보신분들은 아시겠지만 영화의 여러분에서 < 극적인 반전 >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 영화속에있는 하나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바로 그것은 <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는 방법이 무엇인가 ? >라는 것입니다. 이순신은 <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는 탁월한 영웅 >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처음 에스더스를 읽으면 < 극적인 반전 드라마 >를 봅니다. 그리고 < 에스더가 두려움을 죽으면 죽으리라는 용기를 바꾸는 믿음을 봅니다. >


그러나 < 반전드라마나 에스더의 용기 >만큼이나 중요하게 주목해야할 것은 바로 < 드러내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그리고 여인의 용기를 하나님의 구원의 일로 바꾸어 놓으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약속 >을 볼수 있어야합니다. 바로 그것이 오늘 우리손에 < 에스더서>가 있는 이유일 것입니다. 




[ 에스더서를 묵상하면서 생각해보아야할  주제와 질문들 ]

  •  밤에 홀러 서있는 상록수 같은 여인 에스더 
  • 에스더서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지 않고도 믿음의 이야기를 남길수 있다. 
  • 드러나지 않으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 드러내야 할때 행동으로 보여주며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는 한 여인의 정절과 의리 
  •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는 능력 에스더 : 에스더는 처음부터 용감한 여인이 아니었다. 현실주의자였다. 이기적이면 중도적이었다. 모르드개는 혁명적이고 변혁적이었다. 
  • 눈에 보이는대로 믿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고 믿고 순종하는 믿음 
  • 수많은 음모와 모략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은 분명히 서리라. 하나님의 역사는 승리하리라. 
  • 세상의 역사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반전 드라마 
  • 이 세상에서 우리의 믿음은 어떻게 충돌을 일으키는가? 
  • 이 세상의 역사속에서 하나님의 역사의 반전을 어떻게 기대하면 살것인가?
  • 이 세상의 역사속에서 궁극적으로 무엇이 승리하는가? 

Pastor Mark Driscoll
Sep 04, 2012


5 reasons why Esther may be the toughest Bible book I’ve ever preached

1. Esther is a stunning story.

Esther and Ruth (which was one of the favorite Bible books I’ve ever preached) are the only two books of the Bible in which the human hero is in fact a heroine—and a single childless one at that. This book of the Bible has some of the most amazingly complex and intriguing characters—from the god-like Xerxes who appears to this day in the video game Assassins Creed II and Frank Miller’s film 300 , to Esther the orphan girl raised by her cousin Mordecai, and the scoundrel Haman—you simply cannot beat the cast of characters in this story. Those wanting to watch a movie based upon the book might enjoy One Night with the King .

2. Esther is painfully normal.

She grows up in a very lukewarm religious home as an orphan raised by her cousin. Beautiful, she allows men to tend to her needs and make her decisions. Her behavior is sinful and she spends around a year in the spa getting dolled up to lose her virginity with the pagan king like hundreds of other women. She performs so well that he chooses her as his favorite. Today, her story would be, a beautiful young woman living in a major city allows men to cater to her needs, undergoes lots of beauty treatment to look her best, and lands a really rich guy whom she meets on The Bachelor and wows with an amazing night in bed. She’s simply a person without any character until her own neck is on the line, and then we see her rise up to save the life of her people when she is converted to a real faith in God.

3. Esther has been widely avoided.

Zero commentaries on the book were published in the first seven centuries of the Christian church. As far as we can tell, John Calvin never preached from Esther, and Martin Luther despised it, saying, “I am so great an enemy to the second book of Maccabees, and to Esther, that I wish they had not come to us at all, for they have too many heathen unnaturalities.” Very few preachers in the history of the church and more recent years have touched the book. Occasionally a preacher will do a handful of messages from the book, but rarely if ever has a well-known preacher preached through the entire book. So, that’s exactly what I’m going to do. We will walk through Esther verse by verse.

4. Esther has been grossly misinterpreted.

Feminists have tried to cast Esther’s life as a tragic tale of male domination and female liberation. Many evangelicals have ignored her sexual sin and godless behavior to make her into a Daniel-like figure, which is inaccurate. Some have even tried to tie her story in with modern-day, sex-slave trafficking as she was brought before the powerful king as part of his harem. What’s the truth? We will see, as I’m still studying and praying. At the very least, the Community Group and Women’s Bible Study discussions around Esther will be interesting.

5. Esther is a godless book.

God is never mentioned in the book. Esther is not mentioned anywhere else in the Bible. Except for explaining the origins of the Jewish feast of Purim, the book seems entirely secular and without any remote reference to God. No one prays, no miracles happen, and God never shows up in any way. But, as we will see, God is throughout the book like a silhouette. He works throughout the book, not through his visible hand of miracle, but rather his invisible hand of providence. For those who wonder if God is in their life because they have not seen or heard him, Esther’s life is like yours and God’s work in her life will reveal to you God’s work in your own.

Join us on September 16 at a Mars Hill church near you for the beginning of the Esther sermon series Watch the series trailer and download the wallpapers.




  • < 마가복음 14 : 12-21 >
  • 끝까지 함께 할수 없는 사람 
  • 08/13/2014 새벽묵상 설교 


@ 설교문 그림 인터넷 갈무리함 

 

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마가복음 14: 12 - 21> 

제목 : <마가복음 14: 12 - 21> 끝까지 함께 할수 없는 사람 





[ 마가복음 14장 12절 - 21절 ]

12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짜오되 우리가 어디로 가서 선생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게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13 예수께서 제자 중의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14 어디든지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15 그리하면 자리를 펴고 준비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라 하시니 

16 제자들이 나가 성내로 들어가서 예수께서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니라

17 저물매 그 열둘을 데리시고 가서 

18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하신대 

19 그들이 근심하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아니지요 하고 말하기 시작하니 

20그들에게 이르시되 열둘 중의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21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제목 : 끝까지 함께 먹었지만 끝까지 함께할수 없는 사람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시러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시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사복음서중에서 가장 짧은 복음서입니다. 총 16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짧은 복음서의 기록중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시는 장면이며 그 고난을 준비하시는 마지막 유월절, 마지막 예루살렘에서의 모습입니다. 




마가는 마치 숨가쁘게 예수님의 마지막 유월절과 예루살렘에서의 십자가의 고난으로 달려 오고 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을 < 고난의 종 >으로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세하는 예수님의 생애의 부분을 간략 간략하게 요약하고 이제 그가 강조하고 싶었던 고난받으시는 예수님, 고난받으시는 종으로 오신 예수님을 포커싱하고 주목하고 있는 것이지요.



오늘 말씀은 바로 예수님의 고난당하심에 앞서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마지막 유월절을 준비하고 그 유월절에서 어떻게 제자들과 보내셨는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어떤 방을 미리 예약하셨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리고 마치 첩보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조금은 수상하게 조금은 의심스럽게 조금은 조심스럽게 유월절에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를 나누시기 위한 장소를 섭외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별명을 이렇게 붙어보았습니다. 

< 수상하지만 이상하지는 않는 본문 > 

< 조심스러웠지만 의심스럽지는 않는 본문 > 


어떤 학자들은 오늘 본문을 <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이 함께 드러나는 본문 >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과 유사한 본문이 < 예수님꼐서 예루살렘 입성때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면서 빌려온 나귀를 구하는 장면 >과 아주 흡사합니다. 


먼저 시간적인 배경을 보면 < 무교절의 첫날 즉 유월절의 양을 잡는 날에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적인 배경에 대해서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합니다. 

유월절은 니산월 14일입니다. 보통 그날 늦은 오후나 이른 저녁, 즉 두 저녁사이에 양을 잡습니다. 그리고 양을 먹는 것은 그 다음날 먹습니다. 그날을 < 무교절 첫날 >이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의 관습으로는 < 그 전날 잡고 그 날에는 약을 먹습니다. > 그래서 < 양을 잡을 날인가? 양을 다음날인가 ? > 의문을 갖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양잡는 날에 먹기 위해서 그 전날에 양을 미리 잡아 놓고 유대인들이 양잡는 날에 드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이스라엘의 구원의 절기인 유월절에 맞쳐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은 어떤 날입니까?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이집트의 장자들을 죽이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양의 피를 문에 바르고 그 안에 들어가서 죽음을 면했던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무교절은 유월절 이후 6일 동안을 그날을 기억하면서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을 먹는 절기이지요. 부풀리지 않고 딱딱한 그 떡을 먹으면서 급하게 이집트를 탈출했던 그 구원의 날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하나인 이 절기를 기념하면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이집트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을 기억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이 유월절에 맞춰져 있다는 것은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무교절의 첫날 즉 유월절 양을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 어디서 유월절 식사를 할것인지?> 묻습니다. 유월절 식사는 예루살렘 성안에서 해야 했습니다. 제자들은 무교병, 쓴 나물, 포도주와 양고기등을 준비하고 먹어야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 두명인 누가복음 22장에 언급하고 있는 베드로와 요한을 베다니에서 예루살렘 성안으로 보내시며 < 물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따라가서 그 남자가 들어가는 집의 주인에게 객실이 어디있는지 물어보라>고 말씀합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추측할수 있는 것은 < 예수님께서 은밀하게 비밀스럽게 제자들과의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은밀하게 마련하고 예약해 두었던 식사 장소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 

이것이 예수님께서 신적인 능력으로 행하신 일인지? 아니면 미리 미리 이 일을 위해서 섭외를 해두신것인지 ? 알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 은밀하게 준비하고 계십니다. > 



그것을 알수 있는 것은 <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고 있다는 것과 가룟유대가 예수님을 배신할 음모가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월적 식사인 성만찬을 통해서 주고자하셨던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혹이나 그 일이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 은밀하게 장소를 섭외하고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셨습니다. >


또 하나 우리가 알아두야할 오늘 본문의 유대적인 문화을 바로 알고 이해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에 다락방은 그냥 작은 다락방이 아닙니다. 큰 사랑채입니다. 왜냐하면 유월적 식사는 온 가족이 함께 먹는 식사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12명의 제자들과 식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유대적인 문화의 배경을 생각해보면 유월절 식사는 12명만 있었던 식사가 아니라 제자들과 그들의 가족이 다 같이 먹을수 있는 장소였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몇 명이 예수님과 식사를 하셨는지 알수 없습니다다. 그러나 유대적인 배경을 생각하면 마지막 유월절 식사는 12명 이상의 식사이면 다락이 아닌 큰 사랑채에 있었던 일입니다. 



보통 유월절 식사는 목요일 저녁에서 시작하여 자정 이전에 마쳤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식탁에 앉아서 식사를 나눈 것이 아니라 비스듬이 누어서 떡을 나눠 먹었스니다. 


그래서 레오날드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의 그림은 성경적이지 않은 그림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테이블을 위해서 앉아서 먹는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그 당시의 식사 장면이 아니라 헬라식으로 바꿔놓은 일종의 왜곡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의 손과 가룟유다의 손이 어느 한 그릇에 동시에 머물렀습니다. 흔히 떡 그릇이락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20그들에게 이르시되 열둘 중의 하나 곧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니라

21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이 본문에 나오는 < 그릇 >은 일종의 빵을 찍어 먹는 생과일 식초가 담겨 있는 소스 그릇입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 식사때 이 식초 물이 담긴 그릇은 2-3인에 하나씩 식탁에 배치해 놓습니다. 유대인들은 식사 때 빵을 포크로 찍어 먹기도 보다는 손으로 떼서 그 그릇의 식초에 빵을 찍어 먹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빵을 < 발사미 식초와 올리브 기름 > 담긴 그릇에 찍어 먹는 것처럼...바로 가룟유다와 예수님이 함께 손이 간 그릇은 바로 < 소스 그릇 >입니다. 


이런 유대적인 문화배경을 알고 성경을 읽으면 더 구체적이고 더 선명하게 본문을 이해할수 있습니다.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묵상하고 깨달아야할 것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합니다. 

1/ 예수님의 마지막 유월절 식사는 수상하지만 이상하지 않은 예견된 식사입니다.

예수님의 고난받으시는 그 유월절은 구약의 유월절의 사건의 재현입니다. 자신이 유월절 어린양이 되셔서 피를 뿌림이 되셔서 우리에게 구원을 전해주시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이 마지막 장면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고난이 우리에게 어떤 놀라운 의미이며 가치인지?을 알려주는 일입니다. 


2/ 예수님과 끝까지 함께 먹었지만 끝까지 함께 할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와 함께 먹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오늘 본문 14절에.. 

14 어디든지 그가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제 마음에 묵상이 되었던 말씀은 < 네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냐 > 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과 함께 먹기를 원하십니다. 그 음식은 바로 예수님안에 있는 생명의 떡과 잔이 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나눠 먹은 것은 바로 < 생명 >입니다. 생명의 양식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명의 양식을 먹는 순간에 마음에 다른 마음을 품은 가룟유다가 있었습니다. 바로 < 끝까지 함께 먹기는 먹었지만 끝까지 함께할수 없는 사람 >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룟유다에게 생명을 얻을 음식을 나눠주었지만..

가룟유다는 예수님에게 생명을 뺏을 음모을 꾸미고 있었습니다. 


가룟유다에 대해서 신학적인 논쟁과 의구심이 많습니다..

최근에 <유다복음>이라는 영지주의 문서가 발견되면서 가룟유다에 대해서 제조명하고 부정적인 시각보다는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 < 유다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잡하시기 전에 <가룟유다와 일주일동안 대화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금 신비적이고 수상한 이야기로 가득차 있지요... 


어떤 이들을 가룟유다를 동정합니다. 

그래서 < 유다의 배신을 어떻게 볼것인가 ? 유다의 행동이 정당하지 않은가 ? >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 구원의 도구로 사용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유다의 배신은 하나님의 예정인가? 자유의지인가? >에 대해서 말합니다. 많은 신학적인 논쟁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 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 >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 나지 않았게 했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왜 나게 해서 그렇게 불행한 일을 하게 하는가? 이건 처음부터 정해진 각본대로 움직인것이지? 가룟유다의 잘못이 아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흔히 < 가룟유다의 딜레마 >라고 합니다. 오늘 다 설명할수 없기에..

가룟유다에 대해서 성경적인 이해를 돕는 책이 있습니다. 

< 가룟유다의 딜레마 / 김기현 목사 >책이 있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수 있는 것은 가룟유다의 중심에는 

< 탐심이 있었고 그것을 사탄이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 >입니다. 

성경은 그 중심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아담의 범죄가 자유의지의 틈사이에 사탄의 유혹이 들어 온 것처럼 

가룟유다의 자유의지의 틈사이에 사탄의 탐심이 들어 온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실패를 알수 있었지만 알려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가룟유다의 배신을 알고 계셔지만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3/ 예수님께 < 나는 아니지요 >하는 사람는 있었지만 <나 입니다>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실패속에서도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룟유다의 배신속에서도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말씀은 저는 < 가룟유다의 회개의 기회 >라고 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가룟유다나 어떤 제자도 < 나는 아니지요 >라고 말해지... < 예수님 접니다 >라고 말하는 제자는 없었습니다. 


이점에서 사도바울의 고백과 차이가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는 계속 고백합니다. 

< 저는 죄인중에 괴수입니다. > 


우리는 우리의 신앙에서 모순을 찾고 싶어합니다. 

신앙의 딜레마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중심에는 < 주님을 부인하고 싶어하는 인간적인 욕망 >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딜레마에 집중하기보다는 

신앙의 카스리마에 압도되어야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딜레마를 찾기보다는 내 마음의 숨은 딜레마를 찾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볼 때 신앙은 모순입니다. 

그러나 믿음에서 볼 때 신앙은 순종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끝까지 음식을 나누고 내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숨은 음모를 찾아내야합니다. 그리고 주님 ! 제가 주님을 죽일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사람입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배신했습니다. 

그렇게 고백할수 있는 것이 축복이며 은혜입니다. 

그것이 주님과 생명의 떡을 나눠먹을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 <마가복음 13:1-13>
  • 무너질 성전을 마주하고 앉았을때 
  • 08/09/2014 새벽묵상 설교  


  • 설교문의 본문 그림은 인터넷 갈무리함 

 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마가복음 13: 1 - 13> 

제목 : <마가복음 13: 1 - 13> 무너질 성전을 마주하고 앉았을때






[ 마가복음 13장 1절 - 13절 ]

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3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조용히 묻되 

4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6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7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8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

9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로 말미암아 너희가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그들에게 증거가 되려 함이라 

10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11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12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13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제목 : 무너질 성전을 마주하고 앉았을 때  


오늘 말씀의 제목을 < 무너질 성전을 마주하고 앉았을 때 >라고 서정적으로 정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을 그렇게 서정적이거나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마가복음 13장은 소위 < 소묵시 >라고 불리울 만큼 마지막때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 배경이 바로 < 예루살렘이며 성전 >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 예언 >이라기 보다는 < 선언 >입니다. 그리고 계속적으로 명령형으로 이러한 상황과 일들이 일어날 때 우리가 어떻게 주의해야하고 두려워하지 않고 조심해야 하는지 경고하고 권면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마가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의 당부는 3가지입니다. 

< 주의해야 하라. 두려워하지 마라. 조심하라 >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과 제자들의 질문과 대답이 있었던 공간적 배경은 바로 < 성전이 바라보이는 감람산 >이었습니다. 이 감람산이라는 곳은 <성전으로 지나가는 일종의 톨게이트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특히 감람산은 성전을 훤히 다 보이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가복음 11장-12장에 <예루살렘>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유월절을 지키기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in & out>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그토록 사모하고 존중하는 < 성전 >을 보았습니다. 화려한 장식과 웅장한 돌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이 주는 영적인 상징들을 느꼈습니다. 이스라엘에 그리고 예루살렘 여전히 건재해 있는 성전을 바라보는 것 만으로 그들의 신앙심을 깊어져갔습니다. 


유대인의 신앙의 중심에는 < 성전 > 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흔히 유대인의 신앙을 < 성전 신앙 >이라고 말합니다. 


오늘도 예루살렘에 방문해보면 여전히 무너지 성전의 한 벽면인 통곡의 벽앞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고 그 벽돌 사이에 자신에 기도의 소원을 적어서 꼿아 놓고 있는 유대인들을 봅니다. 그만큼 유대인들에게 성전이 주는 상징성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토록 숭상하고 바라보았던 <예루살렘 성전> 무너질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고대 문헌인 < 유대전쟁사 >나 <요세푸스>의 기록을 보면 성전의 기초돌 하나의 길이가 무려 45규빗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 만큼 성전의 웅장함 그 자체였습니다. 성전의 존재 자체만으로 유대인들의 마음을 압도할만한 경외감을 주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대단하고 큰 건물에 대해 관심이 있었습니다. 

< 이 돌들이 어떠하면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


그러나 예수님은 <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라고 되묻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역사적으로 AD70년에 있을 <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을 선언하셨습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 성전의 돌들의 웅장함에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오직 성전을 사모하고 바라보는 신앙을 가진것이죠 >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 성전의 돌들은 무너질것이면 새로운 성전이 세워진것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으로 휘장이 찢어지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새롭고 산길이 열리는 것. 모두다 제사장이 되고 모두다 성전이 되는 그일을 꿈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옛성전을 무너져야하고 새성전이 우리의 마음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되시고 산돌이 되십니다. > 


성경은 분명히 이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로이 지어질 성전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몸이 곧 성전인 것도 말씀하시며 손으로 지은 성전을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의 이 예수님의 성전파괴의 선언은 < 옛 성전의 유효기간이 만료 되었음, Expire >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예수님의 선언을 들었던 제자들은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종종 제자들이 그들의 예상과 기대를 깨뜨려버리시는 예수님의 말씀의 놀라고 당황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나와서 감람산에 도착하여 앉아서 멀리보이는 성전을 바라보고 앉았을 것입니다. 그때 다시 제자들은 2가지 질문을 합니다. 


< 그렇다면... 예수님... 그럼 말씀하신 그 일이 언제 일어나며 어떤 징조가 있습니까 ? >라고 묻습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여전히 종말적인 징조에 관심이 있습니다. 일종의 < 종말에 대한 호기심 >입니다


사실 누구나 < 종말에 대한 호기심 > 있습니다. 종말이 언제인지? 종말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 사인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 종말에 대한 호기심이 아니라 종말에 대한 각성 > 이었습니다. 제자들의 관심과 질문은 종말이 언제인지? 그 징조가 무엇인지? 관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과 대답은 < 우리가 종말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 >에 대한 요청이며 경고 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강조점은 종말의 일어날 난리와 재난과 지진과 핍박에 대한 것들에 대해서 말씀하셨지만 그것 보다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러한 당연히 오게될 종말의 일에 대해서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행동할것인가? 어떻게 살것인가?가가 더 중요한 것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저는 오늘 말씀에 대해서 종말에 대한 우리의 각성이 무엇인가?

 종말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에 대해서 3가지로 주목해보았습니다. 


1/ 우리 앞에 놓여있는 세상의 미래는 어떻게 될것인가?

2/ 우리가 당하게 될 세상의 미혹은 무엇인가?

3/ 우리가 마주하고 서야할 세상의 미움에 대해 무엇을 할수 있수 있는가?


<세상의 미래 / 세상의 미혹 / 세상의 미움 >이라는 이 3가지의 도전앞에 우리는 서있습니다. 


1/ 우리 앞에 놓여있는 세상의 미래는 어떻게 될것인가?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이 세상의 살아오면서 세상의 뉴스를 보면서 이 세상이 안전하다고 느끼십니까?아니면 여전히 불안하다고 느끼십니까? 네 이 세상의 미래는 여전히 불안합니다. 세상에서 들려오는 뉴스의 대부분은 분쟁과 갈등 그리고 전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제 뉴스에도 미국이 이라크 반군의 거점을 공격했다는 뉴스입니다. 사실 최근에 이라크에선 반군들이 일어나서 자신의 종교를 강요하고 다른 것에 대해 무자비한 공격과 살상을 가합니다. 


어제 CNN 뉴스에 이슬람극단주의자들이 이라크 최대의 기독교도시인 카라코쉬를 점령하여 도망가지못한 모든 기독교인들을 죽이고 있다고 전했습니다.산으로 도망간  가족은 물과 음식이 없어 죽어가고...이들은 심지어 기독교가정의 아이들까지 목베어 죽이는 등의 잔혹 행위를 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긴장관계를 예의 주시하고 있습니다. 그냥 평안히 날라가던 비행기가 미사일에 격추됩니다. 





여전히 이스라엘과 하마스는 치열한 미사일공격과 서로 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상자들이 나고 서로에 대한 복수가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에는 에볼라 바이러스가 심각하게 퍼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을 우리가 어떻게 대할까요? 

우리는 이세상의 미래는 단 한번도 조용하고 평안하고 안전했던적이 없습니다. 계속 갈등과 반목이 계속되고 전쟁과 난리가 일어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이 세상의 미래 역시 그렇게 안전하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이 선언은 실제로 유대의 고대 역사를 보면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난리와 난리의 소문이 일어나고 재난이 계속되었습니다. 


로마의 네로황제가 죽은 이후에 일년 사이에 세왕이 서로 죽이고 죽고 하는 일드리 일어났습니다. 


AD 36년에 파르티아 전쟁, 헤롯 안디바와 나바테아의 왕 아레타ㅡ 전쟁과 같은 극심한 혼란의 정국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AD61년에 소아시아의 지진, 폼페이 지진, 예루살렘의 지진과 같은 실제로 있었던 대형 재난들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 이런 일들이 반드시 일어나야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다, 복음이 모든 민족들에게 먼저 반드시 전파되어야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앞에 놓여있는 세상의 미래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불안한 세상의 미래는 우리는 < 주의하고 두려워하지 말고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은 멈추지 않고 계속 전해져야합니다 > 이것이 예수님의 요청입니다. 


2/ 우리가 당하게 될 세상의 미혹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놓여 있는 쉽지 않는 세상의 미래는 우리의 신앙과 믿음을 미혹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믿음을 송두리째 흔들리게 만듭니다. 세상의 불안과 공포는 우리의 믿음 견고하게도 하지만 우리의 믿음을 흔들리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이 세상의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교사들이 우리의 마음을 미혹합니다. 

 이 세상의 쾌락과 즐거움이 우리의 마음을 미혹합니다.  

 이 세상의 불안과 두려움이 우리의 마음을 미혹합니다. 


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6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이 세상의 미래는 우리를 미혹합니다. 우리는 가만 두지 않습니다. 


우리가 교회 다닌다고 해서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우리가 교회 만 다닌다고 해서 우리의 믿음의 안전이 확보되지 않습니다. 

불안한 세상의 미래는 절대 우리의 믿음의 안전을 확보해 주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안전은 진리의 복음과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미혹되지 않으는 방법은 < 서서 진리의 띠를 띠는 것입니다. > 

그리고 < 주의하고 두려워하지 말고 조심하면서 당당히 우리앞에 놓여 있는 

신앙의 도전들앞에서 서서 말할수 있어야합니다. >


3/ 우리가 마주하고 서야할 세상의 미움에 대해 무엇을 할수 있수 있는가?


마지막날 우리가 당할 일들은 세상의 공회앞에서 잡혀서 세상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믿음이 거짓된 것이 아님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세상의 불안한 미래는 우리의 믿음을 미혹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미혹은 우리를 미워합니다. 세상의 미움이 남아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장차 공회에 잡혀서 심문을 받을 것을 선언하십니다다. 세상의 미움을 사서 애매히 고난받는 일들이 일어 납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상의 미움을 사는 일은 바로 복음을 다시 전할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주님의 제자들이 잡혀서 고난당할 때 바로 그떄가 믿음과 복음을 증거하고 증언하는 기회가 됩니다. 


최근에 한국에 위안부 할머니 두분이 미 국방부에 고위 관료들앞에서 일제의 만행을 증언했다고 하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대단한 일이죠. 그 할머니들의 증언이 얼마나 미국방부의 정책을 바꾸지는 모르지만 그 할머니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놓여있는 사명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의 복음과 능력을 증언하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증인이며 증언자가 되어야합니다. 더 나아가 < 증거자 >가 되어야합니다. 


예수님의 이 종말이 언제인지? 종말의 징조가 무엇인지? 관심을 갖는 제자들이 < 종말에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지? >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바로 복음의 증인으로 복음의 증언자로 그리고 증거자로 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앞에 놓여있는 세상의 미래와 세상의 미혹과 세상의 미움에 대한 우리의 대책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것은 우리의 힘을 할수 없고 오직 성령으로 가능합니다. 

11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12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13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우리게 주어지 놀라운 은혜는 < 우리가 세상의 미움앞에 당당하게 서기만 하면 성령의 말이 말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끝까지 견디면 우리에게 구원이 주어집니다. > 


한국에 지금 교황이 방문하다고 날리입니다. 

프란시스코 교황이 그동안 좋은 이미지와 소박한 삶의 모습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도전이 되었습니다. 그의 행동과 말이 그의 삶의 내용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의 미움이 아니라 사랑을 받고 있음을 봅니다. 


왜 사람들이 교황을 숭배할까요? 

바로 교황에게서 자신들에게 없는 신적인 권위와 사랑을 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왜? 기독교안에 이런 사람이 없을까? 생각해 봅니다. 

세상이 미워하기는 커녕 할수 있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봅니다. 

바로 그것은 세상의 앞에 자신의 믿음과 신앙을 당당하게 보여줄 삶의 인격과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과 신앙은 알고 믿었지만 삶의 내용물이 없는 것이죠. 그냥 형식적이 종교적인 모양만 가진채 사람들의 감동시킬 그 어떤 것도 없는 이죠..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최소한 세상이 우리의 삶의 내용과 예수님 닮은 인격을 부러워하게는 만들어야합니다. 그것 때문에 어떤 이들은 더 미워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어떤 이들은 그것 때문에 우리를 향한 영적인 호기심과 애정를 갖게 될것입니다. 


  • <마가복음 12:28-34>
  • 사랑의 이중계명 
  • 08/07/2014

  • 설교문의 그림은 갈무리함  


 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마가복음 12:28 - 34> 

제목 : <마가복음 12:28 - 34> 사랑의 이중계명  




[ 마가복음 12장 28절-34절 ]

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저희의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대답 잘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2.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제목 : 사랑의 이중계명 

오늘 말씀은 마가복음 11장과 12장에서 이어지고 있는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몇가지 논쟁중에 하나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에 의구심을 품고 있던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이 예수님과 논쟁을 함으로 예수님이 틀렸다것을 나타내고자 하는 숨은 의도가 있는 논쟁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서 어떤 모순을 찾고자하는 숨은 동기가 있는 논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가시돋힌 질문 공세를 하고 예수님에게서 그릇된 답변을 찾기 위해 논쟁을 벌립니다. 




어제는 그 당시의 친로마의 성향을 띄고 있는 현실주의자들인 사두개인들과의 < 부활에 관한 논쟁 >에 대해서 예수님의 지혜로운 답변과 의표를 찌르는 듯한 대답을 들어습니다. 


오늘 말씀은 율법과 계명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 한 서기관 >의 대화를 토해서 < 큰 계명 논쟁 >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두개인들과 예수님 사이에 논쟁을 듣고 있던 서기관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서기관은 예수님께 첫째 계명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의 답변의 내용은 어떻습니까? 


마치 신명기에 모세가 < 쉐마 이스라엘 >이라고 말하고 신명기를 전하듯이 예수님도 < 쉐마 이스라엘, 이스라엘 들으라 >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 첫째는 유일하신 여호와를 마음, 목숨, 뜻, 힘을 다해서 사랑하는 것이다. 둘째 계명은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라고 하는 오랜 율법에서 강조되어 왔던 것을 한번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 >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강조는 각각의 계명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서 유기적으로 서로의 원인이 되고 서로의 결과가 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이러한 예수님의 계명에 대한 강조점을 지혜롭게 알아 들은 서기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 34.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


소위 <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 >이라고 하는 < 사랑의 이중계명 >이 <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고 연결되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한번더 연결시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2가지 포인트가 있다면 


1/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고 말하는 < 사랑의 이중율법, 이중계명 > 어떻게 서로의 원인과 결과가 되고 연결되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2/ 이러한 사랑의 이중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멀지 않음을 느끼는 것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율법에 충실한 유대인들은 자주 이런 질문을 하곤 했습니다. 

< 율법중에서 큰 것, 작은 것, 가벼운 것, 무거운 것이 무엇입니까?>


그래서 그러한 율법의 크기와 경중을 따지면서 율법 613개의 계명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서기관들과 유대인들은 율법의 중요성을 따지기는 잘했지만 < 율법의 본연의 의도나 정신과 원리들 >을 놓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을 때 그속에서 담겨있는 하나님의 의도와 원리들을 놓친채 그냥 형식적으로 율법의 순위를 매겨서 그것을 형식적으로 지키려고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맛있는 찐빵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앙금/앙꼬는 확인해보지 않은채 찐빵의 크기만 보고 < 우와 이 찐빵은 정말 맛있는 찐빵이야 >라고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과 같은것입니다. 실제로 찐빵의 본연의 맡은 찐빵속에 있는 팥앙꼬에 달려 있습니다



율법이나 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당시 서기관들과 유대인들은 율법의 크기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계명속에 담겨 있는 본연의 핵심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보고 겉만 그럴싸한 < 회칠한 무덥 같다고 > 하셨습니다. 바로 형식주의 외식주의 였던 것입니다. 


요즘 한국에 조금 안좋은 유행어가 있습니다. < 관피아, 철피아, >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치 마피아서처럼 어떤 자기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서 관행. 은폐, 왜곡, 거짓을 행하는 조직사회를 비꼬는 말이죠. 최근에 군대도 역시 < 군피아 >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새인들 사두개인 서기관들이 마치 < 바피아, 사피아, 서피아 >들이 이었습니다. 자신의 기득권과 관행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의 등장과 가르침이 못마땅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것이 오늘의 본문의 논쟁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이러한 공격적인 질문과 논쟁속에서 자신의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하고 계십니다. 


앞에서 우리가 오늘 말씀에서 주목해야할 첫째번째는 

1/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고 말하는 < 사랑의 이중율법, 이중계명 > 어떻게 서로의 원인과 결과가 되고 연결되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에 신명기 6장 4절-5절을 인용하시면서 < 하나님 사랑 >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시면서 < 이웃 사랑 >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가지 사랑의 계명이 바로 최고의 율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이웃사랑의 동기가 됩니다.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척도이며 표현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수 있어야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할수 있는 힘과 능력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할수 있어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사랑의 이중계명은 서로가 영향를 주고 받습니다. 

서로에게 원인이 되고 서로에게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여기서 < 마음/목숨/뜻/힘을 다한다 >는 의미는 < 자신의 전존재와 정체성의 모든 것을 을 다하여 > 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의 존재를 쏟아 붇는 일입니다. 




놀랍게도.. 이러한 사랑의 이중계명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눈으로 이 사랑의 이중계명이 실현되어 짐을 보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바로 이 사랑의 < 이중계명 > 실현되고 구현되는 현장입니다. 



처음의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이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는 완성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출발이 우리를 향한 사람으로 완성된것이죠. 거꾸로 말하면 우리를 사랑하심을 보여주심으로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증명하셨습니다. 


바로 이점에 오늘 사랑의 이중계명의 강조점입니다. 


2/ 이러한 사랑의 이중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멀지 않음을 느끼는 것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서기관이 지혜로운 대답을 합니다. 


32.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서기관을 지혜가 있었습니다. < 마음/지혜/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제물의 예배보다 더 나은 예배 >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로 사랑하는 행위를 바로 예배하는 행위로 연결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사랑의 이중계명을 <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이미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는 것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클라이 막스는 < 네가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라고 말하는 예수님의 칭찬에서 볼수 있습니다. 




과연 이 사랑의 이중계명과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연결되어 질수 있을까? 

어떻게 연관이 될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에 의해서 증명되며 마침내 그 정체를 드러냅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의 원리에 의해서 운영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의 이중계명을 요청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이 완성되고 실현되고 있는 것을 경험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것을 지켜보고 아는 자가 경험하는 나라가 아니라 

사랑의 이중계명을 실천할 용기가 있는 사람에게 가까이 와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실체가 드러나는 현장이 바로 예수님의 치유의 현장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실 때 등장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 저들을 불쌍히 여기서 저들을 민망히 여기서 >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치유가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거나 자신의 실력을 쇼업 하는 것이 아니라 < 사랑의 동기 >바로 <치유의 역사>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치유의 사건을 보면서 

하나님 나라가 이렇게 임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 치유와 회복 >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중심에는 바로 < 사랑의 이중계명 :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 >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 치유와 회복 > 일어납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바로 이 것이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입니다. 


우리가 이 사랑의 이중계명을 실천하기 시작할 때 그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랄싸한 예배 분위기와 임재의 어울리는 데코레이션을 해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소소한 일상에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 >을 다해서 사랑하기 시작할 때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우리의 사소한 관계에서 서로를 진심으로 네 몸과 같이 사랑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납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디 먼곳 외딴곳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머무는 곳이 있습니다. 

사랑이 드러나면 사랑이 보여지면 하나님 나라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랑할 마음이 생기는 순간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기에 가장 좋은 타이밍입니다.


오늘 우리안에 하나님 사랑할 마음이 생겨나고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 나라가 멀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안에 이웃을 사랑할 마음이 생겨났습니까?

바로 하나님 나라가 이미 당신안에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와 사랑의 이중계명의 관계입니다.  




  •  <마가복음 10 : 17 - 31> 
  •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 07/29/2014 새벽묵상설교 

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마가복음 10:17 - 31>


제목 : <마가복음 10: 17 - 31>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 마가복음 10:17-31 ]

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쌔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0.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22.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23.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24.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25.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26.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27.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28. 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31.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제목 : 오히려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오늘 말씀은 < 한 부자 청년과 예수님의 대화 >와 이어지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대화 >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두 대화는 질문과 답변의 형태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특별이 두 대화의 주제는 서로 묘한 연결을 갖고 있습니다.



한 부자 청년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수 있습니까 ? >라고 하는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수 있습니까 ? >라고 하는 질문입니다.


이 핵심적인 질문에서부터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하시는 핵심 메시지가 결정됩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께 갑자기 찾아온 부자 청년과 예수님을 줄곳 따라온 제자들에게 < 영생, 하나님 나라가 어떤 사람에게 주어지는지? 그리고 영생,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질문에 대답해주신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갑자가 찾아온 부자 청년은 <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갔고 >, 줄고 따라온 제자들은 < 심히 놀라고 두려운 마음으로 > 예수님을 쫓고 있습니다.





먼저 왜? 그들이 했던 질문에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그렇게 만족스럽지 못한 조금은 당황스러운 반응을 보였을까?를 먼저 생각해보아야합니다.


바로 그것은 < 그들이 질문을 했을때는 그들이 기대했던 대답이 있었을 것이다 >는 사실입니다. 부자 청년과 예수님의 대화속에서 부자청년은 아주 자신감 있게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합니다. 그러나 결국 부자청년은 예수님의 대답에 아주 자신감없이 돌아갑니다. 무언가? 예수님에게서 내가 기대하고 만족할만한 대답을 얻지 못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의 대화속에서 부자 청년과의 대화의 장면을 옆에서 보면서 자신들은 부자청년과 달리 <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르고 있다 >이 놀라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지 없이 예수님께서 제시한 대답을 듣고는 < 이해할수 없다, 동의가 되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부자청년은 예수님께 질문하고 대답하는 과정에서 그는 신앙적이고 종교적인 자신감에 가득찬 찬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자심감이 예수님께서 <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하게 했습니.


제자들은 예수님께 질문하고 대답하는 과정에서 다른 이들과 다를 자신들은 예수님의 제자로써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르고 있다는 제자로써의 자부심으로 <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하게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이들의 < 숨은 동기와 의도 그리고 기대 >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 부자청년과 예수님의 대화 ><제자들과 예수님의 대화>속에서 숨은 동기와 의도 그리고 기대를 찾는 것이 아주 재미있는 묵상포인트 , 관전 포인트가 될것입니다.

 

보통 우리가 재미있는 영화들을 볼때면 감독이 의도적으로 다음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복선>이라는 것을 깔아 놓습니다. 그래서 감독이 주고자 하는 숨은 동기와 의도 그리고 기대가 드러나도로 합니다. 그러나 쉽게 그 복선을 찾기가 힘듭니다. 대체로 무대 소품이나 등장인물을 대사를 통해서 작가가 심어 놓은 복선을 찾아 낼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대화의 내용을 보면서 구체적인 숨은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먼저 부자청년과 예수님과의 대화입니다.


오늘 본문의 부자청년과 예수님과의 대화는 마태복음 19장 누가복음 18장에도 기록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다른 복음서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이 사람은 부자이고 청년이었으며 관원이었습니다. 그는 부유한 젊은 관원이었습니다.


이 부유한 젊은 관원은 상당한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열심과 신념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서 < 달려와 꿇고 앉았습니다. > 이것은 그가 갖고 있는 < 신앙적인 열심과 종교적인 인격 >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 선한 선생님 ! 선한 랍비여 ! >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우리가 볼수 있는 것은 < 예수님을 선하다고 말하고 예수님을 랍비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달리 볼수 있는 것은 <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지 않고 있다 >는 점입니다. 바로 이점이 이 부유한 젊은 관원이 예수님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를 알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원을 주시는 주로 보지 않고 한수 가르쳐주시는 종교적인 선생으로 유대적인 훌륭한 선생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 그가 아직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구원과 영생을 이해하기 쉽지 않은 자신의 종교적인 신앙으로 구원에 다가서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인상적인 것은 < 내가 무엇을 하여야 >라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말하고 부자청년은 < 영생을 무엇을 하여야 얻을수 있는 것 >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질문을 예수님께서서 원하시는 질문으로 바꿔 본다면 < 선하신 주님이시여, 내가 당신을 믿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 >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부자 청년은 < 예수님은 누구이신지 보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하는지 >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부자 청년이 이해하고 있는 영생. 자신이 기대하고 있는 영생이 있었습니다


< 자신이 무엇을 해야만 얻을수 있는 영생, 자신이 예수 선생처럼 선함을 이루어야만 영생의 길을 알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여전히 < 율법적인 의과 율법적인 선 >을 알고 지키고 행해야만 그것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유대적인 영생관에 매여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유대교적 영생은 선을 알고 선을 행하는 것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합니다. < 은혜의 구원이 아니라 행위의 구원입니다. > 


그래서 부자 청년은 예수님에게서 구원이 주어진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예수님에게서 구원을 얻는 선함을 한수 배우고자 한수 터득하고자 나아온것입니다.


그러한 의도를 하셨던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 ? 나를 선하다 하느냐 ? 선하신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 > 이것은 예수님의 유도 질문과 같은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선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부자청년의 고백을 이끌어내기 위한 유도질문입니다. < 네가 계명을 아나니 > 라고 말씀하시면 < 십계명 >을 이야기하십니다. < 영생을 얻기 위해서 선하신 하나님이 주신 계명들 알고 지키는 것이 있지 않느냐 ? >라고 하는 일반적인 유대적 구원관에서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도된 대답, 부자 청년의 반응을 보려고 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된 대답입니다.

 

그 대답에 부자청년은 < 내가 다 지켰다 > 라고 대답합니다. 부자청년의 대답을 숨은 의도와 동기를 파악하면 다음 같이 바꿔서 말할수 있습니다.



< 제가 어려서부터 선함을 알고 선함을 지키기 위해서 십계명도 알고 지켰습니다. 그래서 이정도면 영생을 얻기에 어떻습니까? 선생님이 생각하시기에 제가 영생을 받기에 충분한가요? 이 정도면 영생을 얻기에 부족한것이 없지 않습니까? 또 제가 부자로써서 복을 받고 있는 것을 보면 아시잖습니까? >


그당시에 랍비들은 < 부자가 되면 하나님의 선함과 복이 임했다 >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부자가 되었다면> 충분히 하나님의 인정과 복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인정하는 부자로써 겉으로 보기에도 영생을 얻기에도 충분해보이고 자신 스스로도 계명을 다 지켰다고 자심감 있게 말하는 이 부자 젊은 관원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 오히려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 하시면서 예상밖의 21-22절의 말씀을 주십니다.


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22.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주셨을까요?


부자 청년이 하나님의 계명이 선한줄 알고 지키고 복은 받았지만 진정으로 영생은 이것만으로 충분치 않다고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이땅에서 물질적인 복받음이나 이땅에서 율법행함이 영생의 조건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고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 나눠주어도 하늘의 복의 기대와 만족으로 > 살수 있는 사람이 영생을 얻을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땅의 소유권을 하나님께 이전시킬수 있는 그 사람이 바로 영생을 얻을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땅의 소유에 매이지 않을수 있어야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오늘 이 본문에서 오해한다. < 예수님은 부자를 싫어하시는가? 예수님은 우리가 부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는가? 그렇다면 예수 믿는 사람은 항상 가난하게 살아야하는가 ? >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당시 유대인들이 부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오해가 생깁니다.


오늘 본문에도 마치 예수님께서 부자를 아주 부정적으로 보는 것처럼 보입니다. < 재물이 있는자나 부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 마치 약대가 바늘귀에 나가는 것이 더쉬울만큼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어렵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23.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24.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25.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바로 이 본문은 마치 < 부자들을 당황스러게 하거나 부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을 하시게 되는 예수님 당시의 유대적인 배경을 이해해야합니다. 그당시 유대인들은 재물이 많고 부자가되는 것을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자가 되고 관원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영생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의 부자들은 악착같이 부를 모아야서 사람들에게 자신이 부자인 것을 자랑했습니다. 그것으로 자신의 종교적인 신앙이 이정도 된다고 생각하는 교만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 부자가 되는 것은 자신이 더 율법적인 구원에 가까워진다고 생각하는 사회적인 통념 종교적인 관념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시대적인 상황을 알고 있는 예수님께서 그 시대를 일종에 풍자한것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일종의 과정법으로 그 시대의 부자들에게 충격요법으로 < 약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만큼 어렵다 >라고 말한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예수님의 이 충격적인 선언이 조금 과하다 생각해서 <약대>라는 히브리어 단어 < 카멜론>을 다른 비슷한 발음인 < 카밀론 >으로 바꾸어 발음했습니다. < 카밀론 >이라는 뜻은 < 밧줄 >이라는 뜻입니다. < 밧줄이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 >이라고 바꾸어서 읽었습니다.

 

실제로 부자의 의미는 < 가진자, 잘사는 사람 >의 의미보다는 < 하나님 나라보다는 이땅의 소유에 집착하는 자 >라고 볼수 있습니다. 여전히 이땅에 소유의 집착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소유나 복을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게 들어갈수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 찾아온 부자 청년이 바로 그런한 사람의 대표적인 모습니다.

 

이러한 부자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에 대해서 충격적인 선언을 들은 제자들은 두가지 마음이었습니다. < 아니 이럴수가? 그렇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르는 우리는 해당사항이 있는 것 아닌가? 아니야 더 많은 보상이 있을 거야 ? >하는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숨은 동기와 의도 그리고 기대로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말합니다. <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수 있습니까?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는데 ... >라고 말합니다.


그러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27.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바로 하나님의 구원을 우리가 무언가 해야 얻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얻을수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부자 청년과 제자들의 공통점은 < 영생과 구원을 위해서 무언가 해야... 무언가 보여주야 얻는다고 하는 유대교적 이해>를 벗어나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구원의 조건은 인간의 조건이나 가치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다 하시는 놀라운 은혜이면 놀라운 능력입니.

 

그래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삶은 <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31.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무언가를 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전적인 능력에 달려 있는 일입니다.

 

그 당시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가족 중심의 유대교 공동체를 포기하고 그들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위해 가족을 뒤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육체적인 자족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가족의 일원으로 영접될것입니다. 그 결과 핍박과 박해가 주어지지만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복도 주어집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놓여있는 기대이며 보상입니다. 현세에서 하나님의 나라 백성과 가족이 되는 보상이며 내세에서는 영적인 부요함에 참여하는 영생을 보상받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것이 있다면..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그러나 많은 첫째들이 말째들이 되고 말째들이 첫째들이 될 것이다. 그릇된 보상의 기대에 대한 경고입니다. 또한 자동적으로 첫 번째 자리를 확보하지 못한다고 하는 분명한 선언입니다. 

 

오늘 말씀을 4가지로 정리해보면 ...

 

1/ 영생과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조건과 가치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 영생과 하나님 나라는 인간 스스로의 선함, 부요함, 완전함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2/ 영생과 하나님 나라는 소유권을 이전하는 것이며 소유권 포기를 의미한다.

- 재물에 매이지 않고 재물에 대한 관점을 전환을 요구하신다. 

-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얻는 자는 내것을 내것으로 주장하지 않으려 한다.


3/ 영생과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세상적 기대를 거부하고 거절한다.

- 무엇을 하여야 .. 무엇을 얻을수 있습니까? 라고 말하지 않는다. 

- 누구를 믿어야 됩니까? 말한다. 


4/ 영생과 하나님 나라는 세상적인 우열의 순위와 관련하지 않는다.

- 율법의 완벽함 / 부자의 축복 / 순서상의 먼저

 



오늘 본문과 관련한 찬양 이야기 

찬 94장 주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주예수 보다더 귀한것은 없네 / 영어 가사 / 해설


I’d Rather Have Jesus.(주 예수 보다 더 귀한 분은 없네) 영어가사해설

이 찬송의 가사는 1922년도에 Rhea F. Miller(밀러) 부인에 의해 쓰여졌지만, 1946년 이후 줄곧 빌리 그레이엄 전도팀과 함께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미국의 사랑받는 복음 가수’(‘America’s beloved gospel singer’)로 유명한 George Beverly Shea(쉬어)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답니다.

 

Shea가 주일아침 예배를 위해 준비하던 중, 어머니의 피아노 앞에서 우연히 발견된 이 가사에 멜로디가 붙여져, Shea의 나이 21세 때, 처음으로 공중 앞에서 불러진 후부터, 이 곡은 인생에서 자신의 신앙적인 결심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찬송(Signature Song)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답니다.

이제 그 내용을 통해 정말 고귀한 신앙간증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I’d Rather Have Jesus.(난 차라리 예수님을 가지고 싶다오.)


1. I’d rather have Jesus than silver or gold;

 I’d rather be His than have riches untold;

I’d rather have Jesus than houses or lands;

 I’d rather be led by His nail-pierced hand

  금이나 은보다 난 차라리 예수님을 가지고 싶다네. 

엄청난 부를 가지는 것보다 오히려 주님의  것이 되고 싶다네. 

큰 집들과 넓은 땅을 가지는 것보다 난 주님을 가지고 싶다네. 

오히려 주님의 못자국 난 손으로 이끌림을 받으려네.


<Refrain>Than to be the king of a vast domain,  

Or be held in sin’s dread sway;

I’d rather have Jesus than anything  This world affords today.   

<후렴> 넓은 영토를 지닌 왕이 되는 것보다, 

끔직한 죄악의 힘에 사로잡히는 것보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난 예수님을 가지고 싶다네. 

이 세상은 오늘만 지나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라네.

 

2. I’d rather have Jesus than men’s applause; 

 I’d rather be faithful to His dear cause;

I’d rather have Jesus than worldwide fame; 

 I’d rather be true to His holy name    

   사람들의 칭송을 받기보다 차라리 예수님을 가지고 싶다네. 그 분의 소중한 큰 목적에 충실하고 싶다네. 나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유명한 명성보다 오히려 주님과 함께 하고 싶다네. 그 분의 거룩한 이름 앞에서 진실되기를 원한다네.

 

3. He’s fairer than lilies of rarest bloom; 

 He’s sweeter than honey from out the comb;

He’s all that my hungering spirit needs;  

 I’d rather have Jesus and let Him lead   

   그 분은 진귀하게 피어나는 백합보다 더 순결하시다네. 벌집에서 따온 꿀보다 더 달콤하시다네. 주님은 내 갈급한 심령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라네. 나는 차라리 주님과 함께 하려네, 그 분이 날 인도하시도록 하려네.




낙타냐 밧줄이냐, 바늘귀냐 '침공문'이냐?


     "내가 다시 자네들한테 말하네만, 낙타가 바늘귀(원문: 바늘구멍)로 통과하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왕국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쉬우이!" (마 19:24 사역)    



예수님이 부자의 구원/영생 문제에 관해 말씀하신 마태복음서 19:25, 마르쿠스복음 10:25, 루카복음 18:25 등은 모두 거의 같은 문장입니다.


그런데 교계 일각에서 낙타는 본래 '밧줄'이라야 더 걸맞고, 바늘귀는 '침공문'(針孔門)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어 왔습니다. 


전자의 주장은 아람어에서 낙타 즉 '가믈라'(그리스어의 '카밀로스'에 해당)라는 낱말이 밧줄이라는 뜻도 있으니까 문장의 어감 상 밧줄이 더 어울린다는 관점에서죠. 


또 후자는 본래 예루샬렘에 침공문이라는 이름의 좁은 문이 있었다든지 광야에 낙타 한 마리도 어렵사리 통과하는 골짜기의 협곡이 있다는 의미에섭니다.  

그런 견해들을 한 번 따져 보기로 하지요.


중요한 것은..성경학자들이나 독자들의 느낌이 아니라 과연 예수님이 본래 어떤 의도로 말씀하셨나 입니다. 


우선, '밧줄'이라는 견해는 상당히 일리는 있어 보이지요.

    1. 위 세 구절 모두 낙타(약대/camel)가 그리스어 원문에 '카멜로스'로 돼 있습니다. 그런데 후기의 그리스 사본 몇 가지는 카멜론(대격/목적형) 대신 '카밀론'(밧줄/거룻줄: 배를 나루에 잡아 매어놓은)으로 돼 있습니다.

    2. 공교롭게도 아람어 성경 역본인 신약 '페쉬타'는 아람어 '가믈라'(굵은 밧줄)로 돼 있어 이 역시 은근히 '밧줄' 쪽 손을 줍니다. 그래서 아람어에서 번역한 성경인 '람사' 역을 비롯한 일부 소수의 번역들이 '밧줄' 설을 따르고 있습니다.

    3. 바늘 가는 데 실 간다는 말도 있듯, 상식적으로 낙타보다는 밧줄이 덜 우스꽝스럽고 더 조화되고 하모니를 이룬다는 느낌입니다. 게다가 낙타의 털실로 짠 밧줄이라는 주장까지도 있습니다. ..

그러나(이 '그러나'가 문제지요)..


'밧줄' 쪽을 지지하는 가장 초기 사본들은 5세기 경의 아르메니아/그루지야 사본(둘 다 번역판)들입니다. 대문자 사본(949년)도 있고, 비잔틴 전승의 소문자 사본들(13,59,124,130,437,472,543)도 있습니다. 대부분 서기 1000년으로 꺾힌 뒤 형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설의 특징을 좀 살펴 보면..


첫째로, '밧줄'로 번역된 번역판은 매우 희귀합니다. 무수한 원어학자들/성경학자들이 연구해 옮긴 대부분의 성경 번역들이 '낙타'로 돼 있습니다. 

  

둘째로, 수많은 성경원문 사본들 중 극소수 사본만이 이 설을 뒷받침합니다.


셋째로, 그 사본들조차 퍽 후기의 것들입니다.


넷째로, 신약사본들이 희귀하던 중세 교회사 초기에 몇몇 '교부'들의 빈약한 추정들이 그런 설을 북돋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리게네스의 '카테나' 단편(마태 19:24), 알렉산드리아의 퀴릴로스(마 19:24 주석 '파트릴로기아 그레카'(=그리스 교부 문서) 72.429D), 테오퓔 투스(마 19장. '파트릴로기아 그레카' 123.356D) 등이 그것이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서 윗 구절에서 '더 쉽다'는 의미의 그리스어 낱말 '유코포테로스'의 원형 '유코포스'는 우선적으로 "가벼운 수고로도"라는 뜻입니다. 분명히 어떤 산 존재를 뜻합니다. 즉 밧줄 같은 무생물엔 영 걸맞지 않는 뉘앙스의 낱말이지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침공문?


이제 크게 두 번 째로..윗 구절 후반부의 바늘귀 대신 주장돼 온 '침공문'설을 생각해 보렵니다.


이것은 고대 예루샬렘에 '바늘귀'(=바늘구멍)란 이름의 작은 문이 있었다는 주장입니다. 그 문으로는 낙타가 지나가려면 짐을 다 내리고도 구부정하게 구부려야, 심지어 무릎을 꿇어야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통과하기 어려운 문이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광야의 협곡에 낙타 한 마리도 통행하기에도 비좁은 지점이 있었다는 말과도 통합니다. 


역시 그럴 듯한 주장이지요. 이 학설은 안셀무스, 토마스 아퀴나스 등이 주장합니다. 또한 외경의 하나인 소위 '페트로 복음서'에 따르면 페트로가 하나님께 그런 권능이 있으심을 보여 주려고 어떤 '대문'을 초자연적으로 확장시켰다는 다소 황당한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문이나 그 정도의 협곡이 있었는지, 또 예수님이 특별히 그 곳을 집어 말씀하셨는지는 역사적으로 전혀 입증되지 않고 있습니다!  

위 두 가지 설에 대한, 매우 중요한 반증이 하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원 의도와도 간접 연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대 유대의 라삐 문서(rabbinics)에 이와 유사한 전통적인 과장법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바빌론 포로기 때 형성된 것으로 알려진 유대 외전의 하나-바빌론 탈무드 '바바 메찌아'(중간대문이란 뜻)에 다음 구절이 나오지요.


    라삐 쉐 이 라삐 아므람에게 말합니다: "아마도 님은 '폼베디타'(현 이라크에 있던 고대 바빌론의 도시. 한 유대인 학파의 본거지)파의 한 분이신가 봅니다. 코끼리를 이끌어 바늘귀로 통과시킬 수 있다는." 

불가능을 뜻하지요!


그밖에도 같은 문서의 38b에도 "코끼리를 바늘귀로 통과시킬 수 있는 사람"이란 말이 있습니다. 같은 문서 '베라코트' 55b에도 "그들은 한 사람에게도 황금 종려나무, 바늘귀로 통과하는 코끼리를 보여 주지 않는다"란 구절도 있습니다.

비슷한 과장법이 폭 넓게 유포돼 있다는 얘기지요.



그리스에는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다섯 마리 코끼리를 한 쪽 팔 아래 숨기는 게 더 쉬울 것이다."


로마 시대엔 이런 속담이 있었습니다. 

"한 마리 메뚜기가 코끼리를 낳는 게 더 쉬울 것이다."


그러므로 정말 얼토당토 않은 코끼리 비유보다는 예수님의 낙타 비유가 오히려 훨씬 덜 과장돼 있다고 할 수 있지요!


단지 문맥 상의 조화를 위해 '밧줄' 설을 끝내 고집한다면, 예수님은 우스꽝스런 과장이나 유머 감각이 전혀 없으셔야 한다는 강압적인 의도도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다양한 말씀에서, 분명히 그분에게도 과장법도 유머 감각도 있으셨음을 우리는 느낍니다. 


다음을 보십시오.

    "눈먼 이끔이들, 그대들은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구나!" (마태 23:24)

사람이 낙타를 통째로 삼키다(!)니..이것은 과장법이 아니던가요? 또 은근히 신랄하고도 유머스럽지 않나요? 따라서 맨 처음 전술한 낙타-바늘 은유와 이 낙타 은유와는 거의 전혀 모순된다거나 불균형을 이루지 않습니다.


    주님의 원 의도


이제 끝으로..우리는 다시 한 번 위 말씀에서 예수님의 본디 의도를 짚을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선, 부자의 자기노력으로 천국 입국이 불가능함을 이 과장법으로써 극단적으로 표현하십니다. 좀 더 보편적으로..사람으로서는-사람의 행위로서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마 19:26A). 


따라서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뤄짐을 반증하고 계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으로서는 불가능도 가능해짐을 곁들여 강조하십니다(마 19:26b, 창 18:14 참조).


전자마술사들은 낙타를 '액화'해 바늘귀로 통과시키는 것을 보여 준다고 합니다. 저 유명한 동화/영화-'윌리 원카의 초컬  공장'은 통통한 말썽꾸러기 어린이를 전자 원심분리기 비슷한 기계에다 넣고 초컬  재료처럼 순식간에 '분해'시켰다가 재생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불필요한 우화적 기적보다는.. 

실제로, 예리코의 자캐우스(  19:1-10), 아리마테의 요 (마 27:57)과 같은 거부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음을 입증하셨습니다. 또 행전에 나타난 초기교회 시대에도 그런 부자들이 있었습니다(행 4:34, ).


하지만..젊은 관원/율법사/부자는 슬기에 있어 영생의 비결에 근접했고 예수님이 제자의 한 명으로 초청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넘치는 가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 주고 따르라는 한 마디에 낙담해 슬피 돌아갔습니다. 

즉..그는 그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간곡한 권고로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불가능한 '낙타'였던 셈입니다! 


고기잡이 배와 부친까지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던 일부 제자들과는 무척 대조적인 모습이지요. 

그 젊은 관원/재벌은 왜 영성을 얻는 데 실패했을까요? 


재물의 신 맘몬을 숭상한 탓이지요. 맘몬 신을 끝까지 놓치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보다는 맘몬 신을 선택한 것입니다. 역시 선택이 극히 중요해지는 대목입니다. 


주님이 이 점에 대해 참으로 적절한 경구를 주셨습니다.

    "아무라도 두 주인을 섬길 순 없소. 한 쪽을 미워하고 다른 한 쪽을 사랑하든지 한 쪽을 소중히 여기고 다른 한 쪽을 무시하게 되오. 그대들은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가 없소!" (마 6:24 참고:   16:13)


미련한 부자는 자신을 위해선 축재(蓄財)를 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는 풍요롭지 못한 사람이었지요(  12:21). 

 

성경은 거듭거듭 부자가 구원받기 어렵다는 말씀들을 합니다. 또 부자가 되려는 탐욕을 품지 말라고 합니다(팀A=딤전 6:9). 

그런 한편,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을 잘 섬기는 (졸부 아닌) 거부도 있었음을 밝혀 줍니다.


그럼 도대체 우리더러 어떡하라는 말일까요..?

우리는 먼저 가난이 모든 성도를 위한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라는 생각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 모두가 모자람과 결핍이 아닌 풍요를 누리길 바라시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영광 가운데 풍요를 따라 우리의 모든 것을 채우시는 야웨 이레-늘 마련해 주시고 예비해 주시는 위대한 공급자이십니다. 아브라함의 모든 복이 예수 크리스토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 모두가 거부가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 중 남달리 큰 재물을 일종의 은사로서 누릴 수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거듭나기도 했으려니와 맘의 폭도 넓어 복음을 위해 성도와 함께 늘 나눠 주길 즐기고 좋아 하는 사람들을 가리키지요. 드물지만 우리 주변에 그런 선한 부자들이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선 목적을 내세우면서 속으로는 지구촌 정복을 뀌하는 세상 비밀집단에 연계됐기에 자선가 생색이나 내고 나라의 면세혜택이나 누리고 이름과 '자선기금'을 내 놓는 거부 명사들을 의로운 크리스천 부호들과 혼동하면 안됩니다.  


그리고 베스트셀러나 '줄줄이 집회'로 졸지에 돈방석에 앉은 교계 명사들, 헌금을 받아 챙겨 수백만불 짜리 호화주택에 살면서 호화 자동차를 굴리는 텔리밴젤리스트들은 정말 천국에 갈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그렇게 사는 걸 알면서도 계속 헌금을 퍼 부어 주는 교인들도 문제고)!    


우리는 다  시대의 바르질래(슈무엘B=삼하 17:27-29, 19:31,32, 왕들B=왕하 2:7, 에즈라 2:61, 네헤미야 7:3) 같은 슬기로운 부자가 될지언정, 다 을 냉대한 (아비가일의 전남편) 나발(슘B 25:2, 5-13, 18-34), 어리석은 졸부의 비유(  12:16-21)처럼, 또는 맨날 잔치하면서 라자로에겐 찌꺼기나 먹이던 부자(  16:19-31)처럼 미련한 거부는 되지 말아야 합니다.

 

(출처: http://truthnlove.tistory.com/entry/낙타와-바늘귀 )








 


  • <마가복음 9:1-13>
  •  저희가 이해하지 못했던 영광스러운 고난
  • 07/24/2014 새벽묵상 설교 


@ 설교문중에 그림은 인터넷 갈무리함 


제목 : <마가복음 9: 1 - 13> 저희가 이해하지 못했던 영광스러운 고난



[마가복음 9:1-13]

1.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3.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만큼 심히 희어졌더라

4.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나타나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거늘

5.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6.이는 저희가 심히 무서워하므로 저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함이더라

7.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8.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 뿐이었더라

9.저희가 산에서 내려 올 때에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10.저희가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11.이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2.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13.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임의로 대우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제목 : 저희가 이해하지 못했던 영광스러운 고난

 

오늘 말씀 마가 복음 9장은 우리 잘 아는 < 변화산에 예수님의 제자 3인방 >과 함께 올라가서 거기서 주님이 받으실 고난과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여전히 제자들은 그 놀라운 관경을 목격하면서도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흔히 오늘 본문을 <변화산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먼저 주목해야할 사실은 이 변화산 사건이 언제 어디서 있었느냐 ?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마가복음 91절에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자들도 있느니라 >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조금더 정확히 번역하면 < 여기 서 있는 자들 중의 몇사람은 죽기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음을 또는 임하여 있음을 볼자들도 있느니라 >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강조하게 위해서 쓰여진 시제는 < 목적격의 완료 능동 분사 3인칭 단수>가 쓰여졌습니다. 


실제로 오늘 마가복음 91절은 변화산 사건이전에 주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앞절에 마가복음 827절에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있었던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함께 연결해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 주는 그리스도 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하는 이 놀라운 복음 선언, 복음적 고백에 대해서 예수님도 자신이 숨겨두었던 고백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 여기 있는 자들중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했음을 느끼는 자들.. 아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 이것은 예수님의 선지자적 선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의미 >와 제자들이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의미 >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을 본다 >는 개념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공생애의 사역을 통해서 병자들을 치유하고 죄인들에게 죄사함을 주는 것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하나님 나라의 실현과 도래를 의미합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가장 결정적인 방식은 바로 < 예수님의 고난 받으심과 죽음 그리고 부활 >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생각하는 <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의미 >는 다분히 정치적인 것이었습니다. 로마의 지배에서 해방을 의미하며 그들의 해방자로써의 메시아의 역할을 기대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이 이땅에오심으로 이미 실현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왕적 통치가 이미 예수님을 통해서 실현되고 있으며 사탄의 왕국을 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하나님 나라의 완벽한 다스림이 시작되었고 승리가 선언되는 그런 놀라운 사건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나라가 겨자씨처럼 볼품없이 눈에 금방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 계속 자라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식해야합니다.

 

참 재미 있는 것은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제자들은 모습속에서 오늘 그들처럼 예수님을 따르고 믿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많이 봅니다. 솔직히 제자들의 모습들은 황당하기 보다는 어쩌면 우리의 신앙과 너무도 닮아 있어서 정겹기도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보여주신 놀라운 기적이 보았음에도 여전히 믿음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대해서 정확히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보여주신 놀라운 일들에 대해서 자기식으로 믿고 이해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들은대로 살지 못하고 자기가 아는대로 살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놀라운 신앙고백은 있었지만 그 고백에 어울리는 삶의 결단은 없었습니다.

 

믿음의 과정은 바른 고백과 정확한 이해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과정은 바른 고백과 정확한 이해위에 믿음의 행동이 있어야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럴싸한 고백은 있었지만 예수님의 복음,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에 대한 이해력이 떨어졌습니다. 그러니 어떠한 믿음의 행동도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변화산에 사건에서 제자들이 한일은 그 관경속에서 여전히 < 두려워하고... 초막셋을 짓겠다... 진짜 엘리야는 언제 오느냐 ?>라고 하는 그런 황당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자기들을 변화산으로 데려가셔서 그 놀라운 관경을 보여주셨는지? 그 변화산에서 예수님은 어떤 분인지?를 눈으로 목격하게 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고 그 변화산 사건이후에 내일 본문이지만 < 악령에 들린 소년을 고치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는 제자들의 믿음의 행동 >이 이어집니다.


믿음은 놀라운 고백만큼이나 정확한 이해와 그때 따르는 행동이 중요합니다.

 

최근에 나오는 책중에 참으로 인상적인 책이 있습니다.

카일 아이드먼 < 제자는 행동한다. aha 법칙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카일 아이들먼 미국 켄터키 주 루이빌에 있는 사우스이스트 크리스천교회의 교육목사이며 [팬인가, 제자인가], [거짓 신들의 전쟁]의 저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입니다.

깨달으라, 정직하라, 행동하라!!

더 이상 믿는다고 말만 하지 말라
진짜 제자에게는 반드시 변화된 삶이 나타난다

이제 그만 읽어라이제 그만 구경하라
이제 그만 말하라이제 그만 놀아라!
행동할 때가 되었다!


많은 이들의 삶에서 아하’ (AHA, 각성 Awakening, 정직 Honesty, 행동 Action의 첫 글자를 조합해서 저자가 만든 단어)가 일어나지 않는 까닭이 바로 그것 때문이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깨닫게 되는 놀라운 사실은

제자는 더 이상 믿는다고 알고 있다고 고백만 하지 말고 그 믿고 고백한데로 살아내는 사람입니다. 제자는 변화산에서 머물러 있는 것으로 도취되어서 그곳에 머물기를 좋아하는 것에 멈추지 말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그 일에 이루는 것이 중요한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에 소위 < 변화산 변형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왜? 예수님께서 이 소위 3인방 베드로 <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을 데리고 산에가셔서 예수님이 어떻게 변화되시는지? 예수님이 누구와 함께 있는지?를 보여주셔야 했을까?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 마가 복음 92절 에 <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고백이 있었던 엿새후에.. 그리고 가이샤랴 빌립보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산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갑니다. 아마다 그때가 초막절이 가까운 때였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라고 급하게 뭔가 그날의 감흥을 말하면서 < 초막 셋을 짓겠다 >고 하는 말을 보면서 아마도 < 초막절 전 >이 였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생각합니다.


그러한 정황을 고려할 때 왜? 예수님은 제자들의 데리고 가셨으면 왜? 예수님은 자신의 변형된 모습을 보여주셨으며 왜? 성경의 많은 인물중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했을까?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바로 그것은 예수님은 그곳에서 제자들에게 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 자신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영광 >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오늘 이 변화산 사건은 마치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로 올라운 < 시내산 > 사건과 아주 비슷합니다. 출애굽기 24장을 보면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엿새후에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시내산에 오를 때 3사람을 데리고 갑니다. < 아론 나답 아비후 >를 데리고 갑니다. 오늘 본문에도 3명의 제자들 대리고 갑니다. 그리고 임재의 구름이 등장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학자들은 < 모세 모형론 >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모세에게 시내산에 십계명을 주시고 그 영광된 하나님의 임재의 현장을 보여주고 모세의 얼굴이 빛이 나는 경험을 하게 해주십니다.

 

오늘 이 변화산 사건은 구속사적 성경해석으로 이해해 볼 때 < 신약의 시내산 사건 >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모세의 출애굽 사건에 중심에 시내산이 있었듣이 신약의 예수님의 구원사건과 연결고리 연할 하고 있는 것이 바로 변화산 사건입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 두 사람의 등장이 주는 의미는 구약의 대표자, 한사람은 구원의 대표자, 한사람은 선지자의 대표자 역할을 한 두사람이 예수님과 어울려 있는 모습을 통해서 구약의 메시야 예언이 이제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고 있으면 동시에 과거의 모세의 역할, 엘리야의 역할을 예수님이 동시에 감당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과 사건을 눈으로 보았던 제자들의 반응은 당황스러움과 두려움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은 뭔가 이 느낌을 말해야 하기에 < 초막셋을 짓겠다는 어이없는 발언 >을 합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대한 고백중의 하나가 아니라 <그의 오해에서 비롯된 발언>입니다. 베드로는 대단한 고백도 잘 하지만 대단한 실언도 잘합니다. 나머지 두 제자는 여전히 심히 두려워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소리가 들립니다.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희 말을 들어라 >는 소리가 들입니다. 이장면은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과 비슷합니다.


그때 아주 인상적인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8절에 <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 뿐이었더라 >

저는 < 오직 예수와 자기들 뿐이었다라 >는 대목이 인상적입니다.

결국에는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 오직 예수와 우리 자신들 >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인 오직 예수와 그 믿음대로 제자의 삶을 살기로 결단하는 우리 자신들...

 

예수님의 보여주신 변화산의 모습을 잠깐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변화산의 장면의 도취될 즈음에 그리고 제자들이 여전히 예수님의 메시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10절 저희가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11절 이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제자들은 < 부활이 무엇인지 ? 엘리야가 누구였는지 ? >모르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엘리야의 역할을 했다는 말라기의 예언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의 가장 큰 의문은 < ? 메시야가 고난받고 죽어야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숨은 욕심은 < 고난없이 영광 >을 취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 고난없이 영광 >을 취하고 싶은 마음은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 고난없이 영광 >을 누리는 것은 우리안에 < 쉽게 무너질 믿음 >만 만들어 냅니다.

 

여실히 제자들의 모습에서 < 고난없이 영광 >을 구하는 모습을 봅니다.

아무런 능력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는 믿음이 참믿음이 아니라 거짓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 저들이 알지못했던 영광스러운 고난 >에 대해서 말씀해고 계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오래했다고 교회 오래 다녔다고 복음의 말씀을 많이 들었다고 다 알고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도 많은 부분에서 우리는 제자들처럼 모르고 있거나 오해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놀라운 고백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있다면 우리가 바르게 이해하고 바르게 믿는 것입니다. 오늘 변화산의 사건은 베드로의 가이사랴 빌립보의 고백이후의 사건입니다. 그 이후에 변화산이 주는 의미는 우리가 어떤 영광스러운 고난에 참여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제자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변화산의 어떤 신기한 해프닝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주님의 고난과 부활에 참여할 때 주어질 영광스러움이 무엇인지?을 알려주고 말씀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말씀을 핵심주제이며 목적입니다







  • <마가복음 6:45 - 56> 
  • 당황스러운 일 당연한 믿음 
  • 07/17/2014 새벽큐티 설교 

@ 설교문의 그림 인터넷 갈무리함

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마가복음 6:45 - 56>


제목 : <마가복음 6: 45 - 56> 당황스러운 일 당연한 믿음


[6:45-56]

(6:45)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6:46)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6:47)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6:48)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6:49)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

(6:50) 그들이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

(6:51)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6:52)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6:53)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6:54)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

(6:55)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 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다는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째로 메고 나아오니

(6:56)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제목 : 당황스러운 일과 당연한 믿음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 오병이어 /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5천명을 먹인 놀라운 사건이후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모습과 제자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일명 < 오병이어 그 이후 >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 오병이어 >라는 놀라운 이적과 사건이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먼저 배를 타고 < 건너편 벳새다 >로 보내십니다. 여기서 < 건너편 벳새다 >라는 표현은 정확한 번역은 아닙니다. <건너편 벳새다>가 아닌 < 벳새다 건너편으로>라고 번역해야합니다.

 

벳새다는 갈릴리 호수의 북동쪽 해안 지역에 있고 그 < 벳새다 건너편으로 >간곳은 오늘 본문은 < 게나사렛 땅 >으로 가셨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갈릴리 호수의 북서쪽에 있는 가버나움을 포함한 넓은 지역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예수님은 너무다도 파격적이고 놀라운 < 오병이어 >의 일이 일어난 훈에 먼저 제자들을 그 자리에서 떠나도록 보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조용히 산으로 올라가 기도하십니다.


(6:46)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볼수 있는 의문이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그렇게 급히 서둘 듯이 제자들을 먼저 보내야했을까

왜 예수님은 오병이어 사건이 있은 이후에 서둘러서 아니면 

마치 사역을 잠시 멈추듯이 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셔야만 했을까?


오늘 이 짧은 2구절속에 담겨있는 의미들을 묵상해봅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해볼수 있는 것은 이 < 오병이어 > 사건은 그것을 눈으로 목격했던 사람들에게나 그리고 그 사건을 실행하는데 사용되었던 제자들에게나 어떤 의미였을까?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 < 오병이어 > 사건은 그것으로 눈으로 목격한 사람들에게나 제자들에게나 가히 상상할수 없는 놀라움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같은 일들이 들이 눈앞에 벌어졌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믿음으로만 상상할수 있고 이해될수 있는 일들이 보았습니다.

믿기지 않을수 있는 파격적이고 획기적인 사건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나 제자들이 한번도 보지 못한 방식으로 그들 오천명을 먹이셨고 심지어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한끼 식사>를 해결해주셨습니다. 


그리고도 12광주리가 남았습니다. 그것을 보았고 그것을 생생하게 목격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이 오병이어 사건은 그 이적을 행하신 예수님이나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사람들의 환호과 관심을 받기에 충분한 사건이었습니다


사건은 순쉽간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퍼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도 보았고 예수님이 무엇을 할수 있는지도 보았습니다.

 

늘 먹을 것에 굶주려 있는 이스라엘 사람에게 값이 빵을 얻을 수 있는 기회는 예수님께 찾아오는 것이었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면 빵한조각 얻어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이 < 오병이어 >의 기적에 도취될수 있는 제자들에게 먼저 배를 태워 보내십니다. 그리고 자신은 <기도의 자리>로 들어가십니다.

 

저는 이 대목을 묵상하면서 <? 예수님은 기도하러 가셔야만 했을까? >을 생각하면서 본문에는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예수님의 탁월하신 중심과 동기를 옅볼수 있습니다.

 

<오병이어>사건이후에 사역의 영광을 자기가 취하지 않으시고 사역의 결과에 도취되어 있지 않고 사람의 인기와 환호를 즐기지 않으시는 예수님. 어떤 놀라운 사역의 결과가 있든지 간에 자신의 개인적인 기도의 자리로 나아감으로 그 본질을 놓치 않으시려는 예수님의 이면의 중심을 한번 옅볼수 있습니다.


항상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도 사역의 마무리도 <기도>있다는 것을 배웁니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어떤 사역적인 전환점을 이루어질 때마다 < 기도하러 가신 예수님. 기도하셔야만 했던 예수님 >에 대해서 간결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배워야하는 예수님의 기도생활의 모범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러한 짤막한 < 오병이어 그후>를 기록한 후에 오늘 본문 2가지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밤사경 곧 새벽 3시즈음에 파도치는 바다 위를 걸어 오시는 사건과 아무데나 예수님께서 들어가시는 마을이나 도시나 촌에서 예수님은 옷가에 손을 대기만 해도 나음을 입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주목하여 묵상할수 있는 대목은 예수님을 유령으로 보고 두려워서 당황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시는 예수님은 음성과 어쩌면 의도적으로 제자들의 심정으로 기록하고 있는 52절의 말씀입니다.

 

(6:52)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배를 타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3가지로 당황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들은 예상치 못한 파도가 일고 있는 상황에... 예상치 못하게 물위를 걸오시는 유령같이 보이는 예수님의 모습에.. 그리고 예수님이 오셔서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파도를 잠잠케 하시는 능력에 당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당황하셨습니다. 무엇에 당황하셨느냐 ?

그 놀라운 오병이어 사건을 경험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 놀라운 일을 잊어 버리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해져 있는 <제자들의 마음과 믿음>에 당황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한국에 게그프로그램에서 유행했던 유행어가 있습니다.

< 당황하지 않고.. 00 하면서 끝 >이라는 용어입니다. 한번 들어 보셨는지요?

개그콘서트라는 프로그램에 < 깐죽거리 잔혹사 >라는 코너에서 <조윤호>라는 신인 게그맨이 나와서 잠깐 나와서 하는 행동과 대사가 흥미롭고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 당황하지 않고... 무엇을 해서.. 모든 상황을 끝낸다 >는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제자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는데 < 놀랐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 당황 >하고 있다는 것이죠..

 




http://www.youtube.com/watch?v=4hl-mmplS0o


제자들은 그들을 위협하는 파도에 그리고 그들에게 유령처럼 보이며 다가오는 예수님의 모습에 그리고 그 일을 한번에 잠재우시는 예수님은 능력에 당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놀라운 오병이어 사건이후에 배를 타고 건너면서도 예수님을 찾지도 예수님을 부르지 않고 있는 믿음없이 무디어 있는 제자들의 마음의 상태에 당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하며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이것 하나는 알기를 원하셨을 것입니다.


< 당황스러운 일이 예수님과 함께하면 당연한 일이 된다

   당황하지 안하고 예수님을 찾으며 기도로 끝 ! >

예수님은 오병이어 사건이후에 사람들의 놀라운 반응에 당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후에 당황하지 않고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로 그일을 끝내고 계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파도에 당황했고 예수님에 당황했고 그들이 예수님 때문에 해결되지만 여전히 어떤 기도도 어떤 예수님을 믿는 믿음도 없었습니다. 그냥 당황하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당황스러운 일이 생길 때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고 그일을 끝내고 계십니까? 너무나도 아쉬운 것은 < 우리의 삶에 당황스러운일이 생길 때 우리가 믿음으로 보고 듣고 깨달은 믿음의 방식대로 살지 않고 우리가 익숙하게 살아왔던 보고 듣고 믿는 자기 방식대로 살게 됩니다. >

 

<도루묵같은 신앙>입니다.

오늘 마가복음 52절에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6:52)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그런데 이러한 제자들의 믿음과는 반대로 게네사렛 동네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그들이 오병이어 사건을 눈으로 보지도 못하고 거기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그냥 예수의 소문만으로도 <예수님의 능력 행하심을 믿었습니다.>

 

봐도 잊어버리고 확신하지 못하고 못 믿는 당황스러운 믿음

보지 않고 기억하고 확신하고 믿는 당연한 믿음

이러한 대조적인 믿음을 봅니다.

[6:53-56]

(6:53)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6:54)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

(6:55)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 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다는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째로 메고 나아오니

(6:56)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건너편 게네사렛 땅에서는 예수신 줄 <알아 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어디 계신 줄을 <찾아 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또한 그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님이 어디계신지도 찾지도 않고 예수님의 도움을 간구하지 않은 제자들의 모습

그동안 그들 곁에 계시고 예수님이 그들 곁에 함께하시는데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리고 마음이 둔해져 있는 제자들의 모습

바로 당황스러움에 머물러 있는 제자들의 믿음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께 놀랐다. 그래서 주님을 따랐다.

제자들은 주님을 잊었다. 그래서 주님을 못 알아봤다.

제자들은 주님을 진정으로 몰랐다. 그래서 주님을 부인했다.

 

우리가 당하는 당황스러운 일을 어떻게 당연한 믿음의 반응으로 바꿔낼 것인가?가 바로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제자임을 증명하는 일입니다. 주님의 제자는 예수님을 알아보고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께 간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모든 일에 예수님 때문에 당황하지 않고 기도하면서 그 당황스러운 일을 끝낼수 있는 당황하지 않는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바로 그것에 주님이 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모잘것없는 < 주님이 내 옷자락만 만져주시기만 하면... >이라는 이 믿음이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 당연한 믿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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