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계시록 9:13-21>
  • 심판에 관하여 



@ 설교문중에 그림 인터넷 갈무리함 

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요한계시록 9:13-21>

제목 : <요한계시록 9:13-21> 심판에 관하여








[9:13-21]

(9:13)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들으니 하나님 앞 금 제단 네 뿔에서 한 음성이 나서

(9:14)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 하매

(9:15)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준비된 자들이더라

(9:16) 마병대의 수는 이만 만이니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

(9:17) 이같은 환상 가운데 그 말들과 그 위에 탄 자들을 보니 불빛과 자줏빛과 유황빛 호심경이 있고 또 말들의 머리는 사자 머리 같고 그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더라

(9:18) 이 세 재앙 곧 자기들의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말미암아 사람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니라

(9:19) 이 말들의 힘은 입과 꼬리에 있으니 꼬리는 뱀 같고 또 꼬리에 머리가 있어 이것으로 해하더라

(9:20)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9:21)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제목 : 심판에 대하여

요한계시록은 마치 77장의 드라마 같습니다. 7번이라고 완전한 수에 어울리는 교회의 그림, 종말의 그림, 심판의 그림, 회복의 그림들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환상과 그림들속에서 헛된 우상과 세상은 철저한 심판을 경험하고 마지막까지 남은 교회와 성도는 기필코 승리하게 되는 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에서 나오는 < 77장의 드라마 >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지금 요한계시록의 본론이라고 할수 있는 종말의 때에 일어날 심판의 이야기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한번 집고 넘어가야할 오해하기 쉬운 생각이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7가지 인, 나팔, 대접의 환상과 메시지를 대하는데 가장 주요한 관점이 있습니다.

 

1/ 종말은 마지막, 끝만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종말은 회복을 의미합니다.

종말은 < the end > <ending>을 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종말은 에덴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창조 때의 모습으로 회복하는

그 순간 이 바로 종말입니다. 요한계시록의 77장의 환상과 메시지의 마지막 목표는 < 회복될 새하늘과 새땅 > 바로 에덴의 회복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2/ 심판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화풀이가 아니라 완악한 인간의 자충수입니다.

자충수가 뭡니까? 스스로 한 행동이 결국에 가서는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관점입니다. 심판은 하나님이 강압적인 힘과 능력으로 하나님이 불쾌함을 표현하는 일이 아닙니다. 이 심판은 인간이 스스로 자초한 자멸의 결과입니다. 완악한 인간이 스스로 자초한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심판은 < 자업자득이며 자승자박이고 지리 멸렬 >하는 일이다.

# 자승자박 : 제 줄로 제 몸을 옭아 묶는다는 뜻으로, 자신이 한 말과 행동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구속되어 괴로움을 당하게 됨을 이르는 말입니다.

# 지리멸렬 : 이리저리 찢기고 마구 흩어져 갈피를 잡을 수 없다. .

 

3/ 7번씩 3번 등장한 심판의 이야기는 횟수나 순서를 말하지 않습니다.

심판의 확실성과 완전성을 의미합니다. 7번은 완전성을 의미합니다.

3번은 확실성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들 특유의 강조의 방법입니다.

 

4/ 심판과 종말의 그림은 구약의 출애굽때의 10가지 재앙의 그림을 그대로 가져오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환상과 상징들은 유대인들이라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를 이미 잘하고 있는 그림언어들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특히 심판에 대한 그림은 구약의 출애굽 당시에 애굽의 바로와 헛된 우상을 심판하는 방식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출애굽 당시에 10가지 재앙은 하나님을 알지못하고 마음이 완악하고 강팍한 바로와 애굽백성에게는 철저한 심판이었지만 하나님이 구별하시고 남기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의 백성이 모세와 이스라엘백성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며 보호이며 은혜였습니다.


바로 이 관점에서 우리는 더 이상 요한계시록을 두려움의 시선과 겁먹는 마음을 보지 말아야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서 겁에 질려야하고 깜짝놀라고 긴장해야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과 보호속에 있는 우리가 아니라 헛된 우상과 여전히 완악한 마음에 속에 있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주도하고 있는 원수 마귀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에서는 심판의 메시지 만큼이나 찬송이 많이 나오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놀라운 사실을 깨달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심판속에서 할 일은 자신을 이 두려움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작년에 했던 <송목사님의 요한계시록 강해>를 다시듣고 참고서들을 읽으면서 몇가지로 정리를 해보았습니다. 조금더 자세한 이야기는 < 송목사님의 요한계시록 강해 >을 들어 보시면 더 잘 아실수가 있으실 겁니다. 이번기회에 다시금 정리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제 그렇다면 오늘 주어진 본문 9장에 등장하고 있는 < 여섯째 나팔을 부는 환상 >을 어떠한 관점에서 묵상해야 할까요?

 

오늘 여섯 번째 나팔은 유브라데에 결박된 네 천사가 풀려나서 이만만 즉 이억명이나 되는 마병대를 끌고 다니면서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사람들의 1/3을 죽이는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앞에 첫 번째부터 네 번째 나팔의 심판은 자연재해를 통한 심판이었다면 5번째 6째번째 심판은 사람을 직접적으로 타격하는 심판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5번째 나팔 재앙에서 나타난 황충의 심판에서 우리가 인상적으로 볼수 있었던 것은 고통당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9:6)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로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고 흉측한 황충들에게 무려 다섯달 동안이나 괴롭힘을 당하게 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6째번째 나팔을 울리고 < 네천사 >가 유브라데강가에서 풀려 납니다.

여기서 < 네 천사 >< 하나님의 천군 천사가 아닙니다. 바로 세상의 악한 사자들이며 악의 세력을 의미합니다. > 이 천가 풀려난 곳이 바로 < 유브라데 강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 유브라데 강 >을 건넌다는 것은 < 이방나라들의 침략 >을 의미합니다. 주로 앗수르, 바벨론과 페르시야는 바로 이 <유브라데강>을 건너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침략해왔습니다. 그래서 < 유브라데에서 풀려 났다 >는 의미는 바로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적인 경험을 배경으로하고 있습니다.

 

유브라데에서 풀려난 네 천사는 <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준비 된자들 >었습니다. 그 마병대의 수가 < 이만 만 >이라고 말합니다. < 2억명>인데 주로 유대인들이 < 셀수 없는 수를 강조할 때 만만 이요 천천 이라고 하는 것처럼 이 숫자의 의도 실제의 수라기 보다는 엄청나게 많은 수 >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본문의 16-19절의 이 사람들을 죽이려고 준비된 마병대의 모습이 7-10절에 나오는 황충의 묘사와 아주 비슷합니다. 이것은 같은 그림이 반복 강조되고 있음을 말합니다.


[9:16-19]

(9:16) 마병대의 수는 이만 만이니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

(9:17) 이같은 환상 가운데 그 말들과 그 위에 탄 자들을 보니 불빛과 자줏빛과 유황빛 호심경이 있고 또 말들의 머리는 사자 머리 같고 그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더라

(9:18) 이 세 재앙 곧 자기들의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말미암아 사람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니라

(9:19) 이 말들의 힘은 입과 꼬리에 있으니 꼬리는 뱀 같고 또 꼬리에 머리가 있어 이것으로 해하더라

 

[9:7-10]

(9:7) 황충들의 모양은 전쟁을 위하여 준비한 말들 같고 그 머리에 금 같은 관 비슷한 것을 썼으며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고

(9:8) 또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있고 그 이빨은 사자의 이빨 같으며

(9:9) 또 철 호심경 같은 호심경이 있고 그 날개들의 소리는 병거와 많은 말들이 전쟁터로 달려 들어가는 소리 같으며

(9:10) 또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이 있어 그 꼬리에는 다섯 달 동안 사람들을 해하는 권세가 있더라

 

바로 이것은 < 헛된 우상과 옛뱀 곧 사단 >의 모습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헛된 우상과 원수 마귀의 모습니다. 이러한 것이 마치 떼로 몰려다니면서 인간들을 공격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점이 생깁니다. ? 하나님은 유브라데에서 악한 사자들이 활기를 치도록 내버려두십니까? 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잘 생각해보아야 할것이 있습니다.

< 하나님이 사람들을 그렇게 심판하도록 내버려두셨다고 보기 보다는 너무 세상의 우상과 악의 세력이 마치 황충의 때와 이만만의 보병대처럼 셀수없이 하나님이 붙잡고 있던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고 이해해야합니다.

 

다시말씀드리면 < 이 심판은 하나님이 일부러 이러한 사자들을 보내어서 심판하려 한 일이 이나 하나님이 일으키신 심판이 아니라 세상에 죄악이 너무도 관영해져서 더 이상 통제할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통제할수 있으시지면 그 손을 놓아 버리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도 하나님이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이 순간에도 <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길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들은 없었음을 오늘 본문은 분명히 2번이나 강조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9:20-21]

(9:20)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9:21)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제가 오늘 본문과 관련한 송목사님 요한계시록의 설교를 다시들으면서 설교 결론 부분에서 하나 인상적이 었던 것은 이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 주님의 재림이 하나님의 손에서 일어나는 일이 쉬울까요? 아니면 인간의 손에서 일어나는 일이 쉬울까요 ?

다시말해서 이시대의 무서운 것은 예수님의 재림보다 인간이 완악함으로 잘못 누르는 버튼 하나로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인간이 스스로 일으키는 전쟁과 싸움이 더 심각한 심판의 결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은 하나님의 의해서가 일어나는 일보다 인간의 욕망의 결과로 더쉽게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은 우리의 욕망에 대한 응답입니다. 심판은 하나님이 한분의 결정이라기보다는 우리안에 도사리고 있는 욕망의 결과물입니다.

 

세상의 심판이 시작되었다면 하나님의 소원되로 되는 일이 아니라 세상의 소원대로 되는 일입니다. 심판은 하나님이 우리의 욕망대로 살도록 손놓아 버릴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

 

오늘 본문은 6번째 나팔재앙으로 사람들의 1/3이죽임을 당하면서도 사람들은 <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 > 뭐하고 있는지? 그들이 뭐하고 있지 않는지?를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뭐하고 있죠 ? 여기 귀신과 우상에 절하고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합니다. 이것이 여전히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뭐하고 있지 않았나요? 회개하지 아니라하더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이 완악한 헛된 욕망과 우상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하길 원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무자비하게 맘에 안다고 자신의 힘을 인간을 억압하거나 부당한 폭력을 행사하는 분이 아닙니다. 끝까지 참고 끝까지 기다리고 우리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전히 스스로 자초한 심판을 당하면서도 회개치도 않은 <자충수>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리멸렬>의 길을 서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요한계시록의 심판의 메시지를 통해서 분명히 보아야할 우리의 모습입니다. 요한 사도는 바로 이러한 준엄한 음성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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