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6/12/2014 GSC새벽묵상설교 
  • 사무엘하 20:1-13
  • 제목 : 치세의 능신(能臣) 난세의 간웅(奸雄)
  • @ 설교본문의 그림 인터넷에서 갈무리함


[ 삼하 20:1-13 ]

(삼하 20:1) 마침 거기에 불량배 하나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세바인데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이었더라 그가 나팔을 불며 이르되 우리는 다윗과 나눌 분깃이 없으며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우리에게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매

(삼하 20:2) 이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따르기를 그치고 올라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따르나 유다 사람들은 그들의 왕과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따르니라

(삼하 20:3) 다윗이 예루살렘 본궁에 이르러 전에 머물러 왕궁을 지키게 한 후궁 열 명을 잡아 별실에 가두고 먹을 것만 주고 그들에게 관계하지 아니하니 그들이 죽는 날까지 갇혀서 생과부로 지내니라

(삼하 20:4) 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위하여 삼 일 내로 유다 사람을 큰 소리로 불러 모으고 너도 여기 있으라 하니라

(삼하 20:5) 아마사가 유다 사람을 모으러 가더니 왕이 정한 기일에 지체된지라

(삼하 20:6) 다윗이 이에 아비새에게 이르되 이제 비그리의 아들 세바가 압살롬보다 우리를 더 해하리니 너는 네 주의 부하들을 데리고 그의 뒤를 쫓아가라 그가 견고한 성읍에 들어가 우리들을 피할까 염려하노라 하매

(삼하 20:7) 요압을 따르는 자들과 그렛 사람들과 블렛 사람들과 모든 용사들이 다 아비새를 따라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뒤쫓으려고 예루살렘에서 나와

(삼하 20:8) 기브온 큰 바위 곁에 이르매 아마사가 맞으러 오니 그 때에 요압이 군복을 입고 띠를 띠고 칼집에 꽂은 칼을 허리에 맸는데 그가 나아갈 때에 칼이 빠져 떨어졌더라

(삼하 20:9) 요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내 형은 평안하냐 하며 오른손으로 아마사의 수염을 잡고 그와 입을 맞추려는 체하매

(삼하 20:10) 아마사가 요압의 손에 있는 칼은 주의하지 아니한지라 요압이 칼로 그의 배를 찌르매 그의 창자가 땅에 쏟아지니 그를 다시 치지 아니하여도 죽으니라 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뒤쫓을새

(삼하 20:11) 요압의 청년 중 하나가 아마사 곁에 서서 이르되 요압을 좋아하는 자가 누구이며 요압을 따라 다윗을 위하는 자는 누구냐 하니

(삼하 20:12) 아마사가 길 가운데 피 속에 놓여 있는지라 그 청년이 모든 백성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아마사를 큰길에서부터 밭으로 옮겼으나 거기에 이르는 자도 다 멈추어 서는 것을 보고 옷을 그 위에 덮으니라

(삼하 20:13) 아마사를 큰길에서 옮겨가매 사람들이 다 요압을 따라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뒤쫓아가니라

 

제목 : 치세의 능신(能臣) 난세의 간웅(奸雄)

 

중국의 소설 삼국지에 보면 < 조조(曹操) >라는 인물을 가르켜 <허자장>이라는 사람으로부터 < 그대는 치세의 능신(能臣)이고, 난세의 간웅(奸雄)이다. >는 평을 듣습니다. 여기서 < 치세의 능신 >이란 나라가 < 잘 다스려질 때는 유능한 신하라는 뜻 >이고, < 난세의 간웅 >이란 < 세상이 어지러울 때는 권모술수에 능한 영웅 >이란 뜻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무엘하에 보여지고 있는 다윗의 시대가 바로 이러한 < 치세와 난세 >사이에 있는 시대 라로 할수 있을 것입니다


압살롬의 반란과 반역이후에 계속 다윗의 시대는 < 난세 >와 같이 어수선하고 어지러운 반목과 갈등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피의 복수와 숙청과 같은 계속 되는 피의 역사가 계속되어가고 있습니다


그 한 중심에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사람이 바로 < 요압 >입니다.

 

<요압>은 다윗을 대신해서 다윗의 정적들이 될 만한 인물들을 제거하고 그리고 다윗을 대신해서 일어나고 있는 < 다윗에게 대항하는 반란의 세력들을 > 제거합니다. 다윗에게는 충신중에 충신입니다. 다윗을 위해서 알아서 그 난세를 잠재우기 위해서 손에 피를 붙이는 것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요압>은 다윗의 편의 서서 이미 <압살롬의 반역>을 압장서서 제압을 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도 보면 공공연하게 다윗을 비난하고 다윗에 대해서 불만과 반대입장을 갖고 있는 < 세바의 난 >을 처리하는 일이나, 다윗을 따르는 일에 미혼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 아마사 >를 자신의 손으로 처리하는 일을 보면 무자비할 정도로 다윗을 위해 그 일들을 해나갑니다.

 

여기서 <요압>같은 사람이 다윗에게 있어서 참 고마운 것 같지만 <요압>은 다윗을 위한다는 명분하에 자신의 야심과 자신의 숨은 동기를 갖고 그일들을 해나갑니다. 결국 나중에 보면 이 충성스러운 요압도 다윗을 반역하는 것을 보면 <요압>이 이런 과격한 충성뒷편에는 또다른 얼굴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해볼수 있습니다.

 

사무엘하에서 보여지고 있는 다윗의 시대는 그다지 샬롬의 시대는 아니었습니다. 난세중에 난세였습니다. 압살롬의 반란이후로 이스라엘 안에는 많은 후휴증에 남았습니다. 바로 그것은 < 다윗에 대한 불신과 불만 >이었습니다. 압살롬을 따랐던 무리들을 다윗은 아직 통합하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이스라엘 안에는 지역적인 갈등과 뜻이 다른 마음들이 존재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무리들인 오늘 본문 201장에 < 불량배 >라고 표현되어있는 베냐민 지파사람들인 <불량배같은 세바>와 같은자들이었습니다.

 

(삼하 20:1) 마침 거기에 불량배 하나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세바인데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이었더라 그가 나팔을 불며 이르되 우리는 다윗과 나눌 분깃이 없으며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우리에게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단어 있습니다.

 < 마침 거기에 >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장소적으로는 < 길갈 >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시간적으로 < 그후에. 그일로부터 >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바로 앞장에 어떤 일이 있습니까? 1940-43절에 이스라엘 안에서 분열이 일어납니다. 서로 뜻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일들이 일어납니다. < 다윗왕이 환궁을 하는데 이 문제를 이스라엘 공동체전체와 지파와 의논을 하지 않고 유대지파가 주도권을 갖고 이일을 추진했다고 나머지 10지파에서 날리가 납니다. >

 

항상 갈등과 분열은 < 뜻이 다를 때 > 일어납니다. 




혹시 중국의 난세의 역사와 영웅을 다루고 있는 삼국지(三國志)와 수호지(水滸志)에서 <()>라는 글자는 땅지()가 아니라 뜻지()라는 것을 알고 있으십니까

삼국지가 세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 세나라  뜻 >에 대한 이야기인것입니다.








 

바로 분열과 갈등은 바로 뜻을 다르게 품을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이러한 지파들이 같은 뜻을 품지 못하고 서로 오해하고 서로 용납하지 못해서 생긴 일들입니다. 이러한 10지파 이스라엘과 1지파 유다와의 갈등은 나중에 솔로몬 시대에 나라가 분열이되는 계기가 됩니다. 이때부터 시작된 오래된 앙금과 반목은 압살롬의 반역이후에 일어나는 심각한 후휴증이요 상처의 결과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가 생각해볼수 있는 것은 한 가정의 갈등이 나중에 어떻게 민족의 갈등으로 확대 재생산될수 있는지를 우리가 단적으로 볼수 있는 예라고 할수 있습니다.

다윗왕이 지금 지나고 있는 이 난세에는 여전히 남은 갈등과 반목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된 반역의 멈추지 않은 갈등이 나오고 있습니다.

 

< 마침 거기에 불량배 하나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세바인데... > 라고 오늘 본문은 그러한 난세의 배경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세바를 말하길 <불량배>라고 말합니다. 이말은 개역한글성경에는 <난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원어로는 <이쉬 벨리야알>입니다. 그 뜻은 < 약한 사람. 무가치한 사람 >이라는 뜻입니다. 얼마나 이 세바가 다윗에 대한 불만과 비난을 노골적으로 하느냐하면 오늘의 본문에서 2가지 행동에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가 < 나팔을 불었다 >는 것입니다. 나팔 곧 쇼파르를 부는 행위는 임박한 재앙과 전쟁을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바로 왕과의 전쟁을 선포하는 행위였습니다.




둘째는 세바가 다윗을 < 이새의 아들 >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을 < 이스라엘의 왕 >이라고 부르지 않고 < 이새의 아들 >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다윗을 진정한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다윗왕을 <폄하>하는 언사입니다

막말파문의 당사자가 바로 <세바>입니다.



세바는 다윗과 전쟁을 선포하고 다윗을 비난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러한 세바를 따르는 무리들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삼하 20:2) 이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따르기를 그치고 올라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따르나 유다 사람들은 그들의 왕과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따르니라


세바를 중심으로한 < 이스라엘파 >와 다윗을 중심으로한 <유다파>가 나뉘는 지역감정과 갈등을 부추기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왕궁으로 돌아 가장 먼저한 일은 < 압살롬과 대낮에 백성들이 보는데서 동침한 10명의 후궁들 >을 처리하는 일이었습니다


. 우리가 흔히 후궁들이 무슨 죄가 있나? 싶겠지만 다윗이 처리한 이 일은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압살롬의 잘못과 후궁들의 합의하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짐작해볼수 있수 있습니다. 다윗은 율법의 처리 규정에 따라 더 이상 다른 남자와 관계를 한 아내를 받아들지 않는 율법대로 10명의 후궁들을 처리합니다.

 

그리고 요압에게 자신과 사촌지간이 < 아마사 >의 군대와 함께 이 패역부도한 <세바 일당>들을 처리하고 오도록 명령합니다. 그러나 < 아마사 >는 이 왕의 명력에 미혼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삼하 20:4) 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위하여 삼 일 내로 유다 사람을 큰 소리로 불러 모으고 너도 여기 있으라 하니라

(삼하 20:5) 아마사가 유다 사람을 모으러 가더니 왕이 정한 기일에 지체된지라

 

그도 그럴것이...원래 <아마사>는 어떤 사람입니다

어느 편에 있던 사람이었습니까? 바로 압살롬의 편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요압의 사촌이었지만 아사마는 원래부터 다윗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압살롬의 편이었습니다.


(삼하 17:25) 압살롬이 아마사로 요압을 대신하여 군지휘관으로 삼으니라


다윗이 요압과 함께 아마사를 부른 것은 다윗이 더 이상 < 니편 내편 가리지 말고 우리 함께 화평을 이루자> 라고 하는 화해의 제스츄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사>는 다윗이 내민손을 미혼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제가 참 오래전에 재미있는 글을 보았습니다.

< 아부도 일관성이 있으면 충성이 되고

충성도 일관성이 없으면 아부만도 못하다 > 일리가 있는 글입니다.

 

<요압><아마사>는 서로가 집안이었고 사촌지간이었습니다


자신이 따르는 사람이 달라고 자신의 명분이 달라고 자신의 품은 뜻이 달랐습니다. < 니편 내편 >이 달랐습니다

다윗의 탁월한 치세가 바로 < 통합의 정치 >를 할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항상 분쟁과 갈등의 출발은 < 니편과 내편 >의 편가르기를 시작할 때 일어납니다.


그러한 가운데 <화해와 통합>은 없지요. 서로 반목하고 비난하고 폄하합니다.


오늘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문화 기독교가 바로 그러한 반목을 계속 보는 이유가 뭡니까? 자꾸 편가르기를 하는 것입니다. 지난 한국의 선거를 보십시오. 여전히 네가티브 선거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이번 선거에 재미있었던 결과중에 하나는 < 네거티브 전략 >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던 후보들이 당선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한국 사회의 골깊은 갈등은 바로 <사회통합과 화해>가 없는 < 니편과 내편 >을 나누는 반복된는 반목과 갈등에서 일어납니다.

 

다윗왕은 이스라엘 왕국에 계속되는 이러한 <갈등과 반목>을 해결하고자하는 시도로 바로 자신의 상대편에 속해있었던 <아마사>를 품고 그와 함께 나라를 안정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다윗의 뜻대로 되지 못합니다. < 아마사 >의 품은 뜻이 달라고 그리고 다윗을 따라고 있는 <요압>의 품은 뜻이 달랐습니다.

 

결국 이러한 아마사의 미혼적인 태도 때문에 <요압>에게 칼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요압의 칼에 죽임을 당하는 아마사의 죽음 장면을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상상하나는 아마도 <아마사>가 요압에게 칼을 맞으면서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 고마해라 ! 마이 묵었다 아이가 ... > 마치 영화 친구 한 장면이 생각과 같아 보입니다.




(삼하 20:11) 요압의 청년 중 하나가 아마사 곁에 서서 이르되 요압을 좋아하는 자가 누구이며 요압을 따라 다윗을 위하는 자는 누구냐 하니


(삼하 20:12) 아마사가 길 가운데 피 속에 놓여 있는지라 그 청년이 모든 백성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아마사를 큰길에서부터 밭으로 옮겼으나 거기에 이르는 자도 다 멈추어 서는 것을 보고 옷을 그 위에 덮으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치세를 원하는 다윗과 여전히 난세를 만들고 있는 다윗의 주변사람들을 모습을 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오늘 우리의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를 봅니다.

여전히 반목과 갈등 그리고 편가르기가 넘쳐나고 있는 이 시대를 봅니다

권위도 없고 책임도 없고 화해나 통합도 없는 어수선한 오늘의 현실을 봅니다.


그리고 여전히 <니편 내편>으로 서로에게 상처와 아품을 주고 있는 교회들의 갈등을 봅니다

그리고 여전히 사람에게 실망하고 사람에게 상처받고 있는 우리 자신을 봅니다.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바르실래>와 같은 사람보다는 <세바>와 같이 나를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고 비난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모습을 통해서 희망을 봅니다

그리고 그릇된 요압의 모습에서 절망도 봅니다

다윗의 다시 내민 손도 보지만 아마사와 같이 내민손을 뿌리치는 손도 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계의 착각은 < 내가 착하게 대하면 모두 다 나를 착하게 대할 것이다. >

라는 것입니다우리는 이러한 착각을 버려야 좋은 관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좋은 관계의 시작은 무슨 관계이든지 오해하지 않고 

이해하기를 작정하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좋은 관계의 법칙은 손해보기를 각오하는 일이며

 거절될 것을 각오하는 일입니다

좋은 관계의 완성은 상처받아도 또 다시 손을 내밀고 

다가가는 일을 멈추지 않는 일것입니다.

것이 진정한 <화해>이며그것이 진정한 <통합>의 길입니다.










  •   <갈라디아서 3:10-18>  법보다 약속입니다.
  • 율법은 인간적 성취를 요구한다. 그러나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일에 대한 믿음을 요구한다. 율법은 요구사항을 만들고 우리에게 복종을 요구한다. 하지만 복음은 약속을 제시하고 우리에게 믿음을 요청한다. - 존스토트 -


[3:10-18]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3: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3:15)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3: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3: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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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간에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로 잠간 쉬었던 < 갈라디아서 >를 다시 묵상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서신중에서 가장 앞선 기록인 갈라디아서는 초기 사도바울의 복음의 열정과 그의 뜨거움을 옅 볼수 있는 서신입니다.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복음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이상 어리석게 너희가 유대의 전통이나 할례나 율법에 매여 있지 말고 복음이 주는 참된 자유를 맛보고 그렇게 담대하게 살아가기를 도전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전체의 6장을 3부분으로 나누어서 복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1-2장은 < 은혜의 복음을 변호함

3-4장은 < 은혜의 복음을 설명함 >

 5-6장은 < 은혜의 복음을 적용함 >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3장은 사도바울이 < 은혜의 복음을 설명함에 있어서 모세의 율법보다 먼저 있었던 아브라함의 믿음, 아브라함의 의롭게 여김을 가지고 복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방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그 이방에서 복음을 받아들고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계속 고민스럽게 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우선인가? 아니면 유대인이 되는 것이 먼저인가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중요 한가 ? 아니면 유대인으로 사는 것이 중요한가 ? 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도 율법을 버릴 수가 없었고 그 율법을 버리는 것이 그들에게 상당히 위험한 결정이었습니다. 심지어 유대에서 가만히 들어온 거짓 교사들이 그들의 마음을 충동질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면서 율법을 지켜야한다고 율법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그들에게 찾아오는 것이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은혜의 복음을 설명하면서 모세의 율법보다 먼저 있었던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가지고 옵니.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게 여겨진바 된 것은 그에게 율법의 행위로 있어서 되어진 것이 아니라 < 그가 믿는 믿음 때문이라 >라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 율법은 죄를 다루기 위한 것이지 의를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아브라함보다 훨씬 후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훨씬 뒤에 만들어진 율법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보다 먼저일수가 없다는 것이 바울의 핵심적인 논리입니다. 그래서 율법보다 우선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기능은 죄를 드러내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세상에서 구별된 의식과 질서를 따르도록 돕기 위한 것입니다


율법의 궁극적인 기능은 죄를 지으면 초래하게 되는 심각한 저주가 무엇인지?를 알리고 경고하는 데 있습니다. 결코 율법을 행함으로 의를 이루거나 믿음을 갖지는 못합니다. 그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율법입니다


오로지 율법의 기능은 < 믿음을 돕기 위한 것 >입니다.


율법은 인간적 성취를 요구한다. 그러나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일에 대한 믿음을 요구한다. 율법은 요구사항을 만들고 우리에게 복종을 요구한다. 하지만 복음은 약속을 제시하고 우리에게 믿음을 요청한다. - 존스토트 -



율법은 정의의 법정이지만 복음은 은혜의 보좌이다. - 조지 스윈녹 -

 

오늘 본문에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그 율법의 저주를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대신 담당하심으로 우리에게 주어져야할 율법의 저주를 속량하셨습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감당해할 율법의 저주가 없어진 샘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길를 따르지 않고 우리를 위해서 율법을 완성하시고 율법의 저주에게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이 열렸음을 알아야합니다.

 

우리에게 놓여있는 2가지 루트(ROUTE)가 있습니다.

율법을 다 지키며 의롭게 되고 그렇게 사는 루트가 있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 그렇게 사는 루트가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율법을 통해 의롭 되는 사람이 없으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사람은 있습니다. 바로 그것을 아브라함의 믿음과 의롭게 여김이 보여주었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를 뒤집어 쓰시고 죽으신 예수님이 그 새롭고 산길을 여셨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저주아래 묶어 놓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덕분으로 예수님의 덕택에 그 율법에서 빠져나와서 그 은혜와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놀라운 주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묵상하며 도전 받는 것은

우리의 믿음은 율법보다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의롭게 됨은 율법의 행위보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참된 복은 율법안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3가지 사실이 우리의 복음의 참다운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덕분에게 우리에게 주어져야할 율법의 저주가 치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이 우리도 약속을 유업을 받은 아브라함의 자녀와 복을 누리는 자들로 우리를 끼워주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십자가 사건은 율법아래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감당하는 사건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저주를 받으신 것이다. 이 방법으로 우리를 되찾아 왔습니다. 율법의 저주를 끊기 위해서 그분이 스스로 저주를 받는바가 되고 저주를 받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다는 것은 그렇게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저주를 담당하고 뒤집어쓰시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를 진다고 말할 때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박힌다고 말할 때 그 의 의미는 율법의 저주를 다 담당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죄를 뒤집어 쓰고 많은 이들의 유익을 위해서 살아야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저주받으심이 오늘 우리에게 복받음으로 이어집니다. 구약성경에서 < 저주와 복 >은 항상 대조를 이루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됩니다. 오늘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예수님안에서 이루어진 < 저주와 복 >에대한 분명한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각각 하나님의 약속과 계명에 대한 순종이 복을 위한 필요조건이었습니다.


하지만 갈라디아 교회에게는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나무에 달려 저주가 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구원(이신칭의)의 차원의 복을 위한 필요조건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9-10절의 복과 저주의 현재적 특성은 구원의 차원이라기보다는 현재적인 삶과 관련된 복과 저주의 차원을 말한다.

 

우리에게 <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게 되는 > 놀라운 일들이 주어졌습니다.


(3: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율법의 저주가 아브라함으로 복으로 바뀌는 그 과정속에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을 누리고 있음을 확증해주시는 것이 바로 <성령의 약속>입니다.

 

성령께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을 개런티<guarantee>해주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약속의 복을 워런티<Warrantee>해주십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 그리스도을 믿고 성령님을 받아들이는 우리에게 주어진 복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율법보다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의롭게 됨은 율법의 행위보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참된 복은 율법안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 사무엘상 30:21-31
  • 은혜를 아는자가 은혜를 베푼다.  
  •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중심으로 사람을 향한 배려와 배풂이 흘러나왔기에 그가 이스라엘에서 가장 오래 기억되는 왕이 될수 있었습니다. 


새벽 큐티 설교 <사무엘상 30:21-31>



[삼상 30:21-31]

(삼상 30:21) 다윗이 전에 피곤하여 능히 자기를 따르지 못하므로 브솔 시내에 머물게 한 이백 명에게 오매 그들이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을 영접하러 나오는지라 다윗이 그 백성에게 이르러 문안하매

(삼상 30:22) 다윗과 함께 갔던 자들 가운데 악한 자와 불량배들이 다 이르되 그들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은즉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은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주지 말고 각자의 처자만 데리고 떠나가게 하라 하는지라

(삼상 30:23) 다윗이 이르되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넘기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삼상 30:24) 이 일에 누가 너희에게 듣겠느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동일할지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 하고



(삼상 30:25) 그 날부터 다윗이 이것으로 이스라엘의 율례와 규례를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

(삼상 30:26) 다윗이 시글락에 이르러 전리품을 그의 친구 유다 장로들에게 보내어 이르되 보라 여호와의 원수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에게 선사하노라 하고

(삼상 30:27) 벧엘에 있는 자와 남방 라못에 있는 자와 얏딜에 있는 자와

(삼상 30:28) 아로엘에 있는 자와 십못에 있는 자와 에스드모아에 있는 자와

(삼상 30:29) 라갈에 있는 자와 여라므엘 사람의 성읍들에 있는 자와 겐 사람의 성읍들에 있는 자와

(삼상 30:30) 홀마에 있는 자와 고라산에 있는 자와 아닥에 있는 자와

(삼상 30:31) 헤브론에 있는 자에게와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왕래하던 모든 곳에 보내었더라


제목 : 은혜를 아는 자가 은혜를 베푼다.


사무엘상 마지막 대목에서는 ? 다윗이 하나님과 백성이 마음에 합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록 사울 왕을 피해서 블레셋 아기스 왕을 돕고 그의 보호를 받고 있지만 그의 선택과 결정은 항상 자신의 민족인 연약한 히브리 사람에 대한 마음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블레셋 아기스왕의 신하들의 모함과 비난에도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하심으로 자신이 자신의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과 전쟁을 행해야하는 애매한 어려움을 피하게 됩니다.

우리가 살펴보는 이 사무엘상에의 다윗의 삶의 여정과 사울의 삶의 여정은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초기 이스라엘 나라의 왕으로 세워진 이 두 인물이 왜? 다른 선택과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사무엘상 기자는 이 사무엘서를 1차 독자인 히브리사람들에게 쓰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합하여 세운 사울왕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여 세워지 다윗왕이 얼마나 다른 선택과 결과 그리고 중심을 가지고 있는지를 대비시키는 목적이 있습니다. 또한 이들의 삶의 여정 속에서 보여진 모습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그리고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것인지?를 보여주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참다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왕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 이 시대에 사무엘서를 읽고 있는 2차 독자인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람의 삶의 내용과 선택은 어떠해야하는지?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에게 무엇을 보기를 원하시는지? ”에 대해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사무엘서 기자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왜? 사울을 버리고 다윗을 선택해야만 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사울은 하나님께 다시금 쓰임받을 기회를 계속 놓치고 있고, 다윗은 하나님께 쓰임받을 기회를 계속 붙잡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다윗이 아말렉과의 전쟁에 함께 가지 못했던 사람들을 돌아본고 배려하고 베푸는 장면입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블레셋과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긍휼로 제외되어 그들이 거처했던 시글락으로 돌아왔다. 그들이 제 3일에 시글락에 이르렀을 때에 아말렉 사람들은 이미 남방과 시글락을 침노하였는데 그들이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거기 있는 사람들을, 어른이나 아이나 여자나 다 사로잡아 끌고 그들의 길을 갔습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성에 이르렀을 때 성은 이미 불탔고 그들의 아내와 자녀들은 사로잡혀간 후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아말렉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치라 말씀하시죠.


가던 중에 애굽사람 한 소년의 인도를 받습니다. 그 소년은 다윗의 일행을 아말렉 사람들의 진영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들이 내려가 보니 아말렉 사람들은 온 땅에 가득하여 블레셋 사람의 땅과 유다 땅에서 크게 탈취하였음을 인해 먹고 마시며 기뻐 춤추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새벽부터 혹은 저녁부터 이튿날 저물 때까지 그들을 쳤고 약대 타고 도망한 소년 사백 명 외에는 피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윗은 아말렉 사람이 취했던 모든 것을 도로 찾았고 그 두 아내를 구원하였고 그들의 탈취하였던 것 곧 무리의 자녀들이나 빼앗겼던 것의 크고 작은 모든 것을,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이 도로 찾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도로 찾게 해주셨습니다. 그들은 또 아말렉 사람들의 양떼와 소떼를 다 취하였습니다.

다윗이 이왕에 피곤하여 능히 자기를 따르지 못하므로 브솔 시내에 머물게 한 이백 인에게 오자 그들은 다윗과 그와 함께한 백성을 영접하러 나왔습니다.

다윗이 그들에게 이르러 문안하였습니다.


그때 다윗과 함께 갔던 자 중에 악한 자와 불량한자들이 다 말했습니다.

여기서 < 불량배 >들은 < 비류한자. ‘벨리알의 아들들,' 무가치한 자들 >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은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주지 말고 각 사람의 처자만 주어 데리고 떠나가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말합니다.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붙이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이 일에 누가 너희를 듣겠느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일반일지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


다윗은 그들이 취한 노획물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이며 또 백성의 다수가 똑같이 나누는 것을 원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그 악한 자들의 주장을 눌렀다. 그 날부터 다윗은 이것으로 이스라엘의 율례와 규례를 삼았고 그것이 훗날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또 다윗은 시글락에 이르러 그 탈취물을 그 친구 유다 장로들에게 보내며 "보라 여호와의 원수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에게 선사하노라" 하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이 전쟁을 어떤 중심으로 치루고 있는지?를 옅볼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 전쟁의 시작은 자신의 전쟁인 아닌 여호와의 전쟁으로 치루고 있었습니다. 그것의 첫 번째 증거는 전쟁을 치루기 전에 여호와께 묻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다윗은 이 전쟁의 결과는 자신의 능력이 아닌 여호와의 능력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고백합니다. <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저들을 우리손에 붙이셨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이 전쟁의 기쁨을 자신의 능력을 과시거나 자기 자랑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전쟁에서 이긴 전리품을 즐거이 나눠줌으로 하나님이 함께하신일임을 함께 기뻐하길 원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손으로 이루어진 이들을 나의 손으로 만들어낸 것으로 바꾸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셔야할 영광을 내가 가로채고 내가 그 영광과 자랑을 누리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받으셔야할 합당한 영광을 드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음을 합당하게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말, , 그리고 걸음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요즈음 성도님들이 카카오톡으로 좋은 글을 보내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 글들중에 참 좋은 글들이 많습니다. 그런 좋은 글들은 따로 메모를 해놓고 있습니다.

최근에 받은 글 중에서 참 좋은 글 내용이 있었습니다.



< 사람이 선물이다 >

스물에는 세상을 바꾸겠다며 돌을 들었고,

서른에는 아내를 바꾸어 놓겠다며 눈초리를 들었고,

마흔에는 아이들 바꾸고 말겠다며 매를 들었고

쉰에야바뀌어야 할 사람이 바로 나임을 깨닫고 들었던 것 다 내려놓았습니다.

어디서 태어날지는 선택할 수 없지만, 어디서 죽을지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어떤 얼굴로 태어날지는 선택할 수 없지만, 어떤 얼굴로 죽을지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선택이 삶의 선택입니다.

사람은 실수하는 것이 정상이고,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것이 정상입니다.

사랑이란, 실수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정상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사랑은.. 사람과 하늘이 나눠 가진 성품입니다.....

우리가 일을 하지만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람이지요.

사람과의 관계가 참 중요합니다.

자신을 내려놓기 전에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닙니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일은 실패하면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사람과 관계는 한번 깨지면 회복하기가 힘들어요.....

관계가 고통스러운 까닭은.. 하나님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을 인간에게서 찾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실수가 전공이고, 부족함이 특징입니다 ..



 

오늘 본문의 다윗은 하나님과의 좋은 관계가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를 만드는 <배려와 배픎>으로 이어집니다. 사람에게서 < 배려와 베풂 >많은 좋은 관계를 만드는 것이 없지요. 다윗은 자신이 나눠 주어야할 것을 기꺼이 나눠줍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왔다는 인정과 확신 때문입니다.


아침편지로 잘 알려진 고도원씨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라는 책에 세 가지 방문이라는 글이 나옵니다.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대체로 <세가지 방문>을 잘 한다는 말을 듣는다. <입의 방문>, <손의 방문>, <발의 방문>이 그것이다. <입의 방문>은 부드러운 말로 주위 사람을 칭찬하고 용기를 주는 방문이고, <손의 방문>은 편지를 써서 사랑하는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고, <발의 방문>은 상대가 힘들 때 망설이지 않고 찾아가는 것이다. 모두 신체를 이용한 마음의 전달법들이다. ”





미국의 카네기 공대 졸업생을 추적 조사한 결과, 그들은 한결같이 이구 동성으로

"성공하는데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은 15%밖에 영향을 주지 않았으며 나머지 85%가 인간관계였다." 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의 합당한 중심으로 사람을 향한 배려와 배풂이 흘러 나왔기에 

그가 이스라엘에서 가장 오래 기억될 왕이 될수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26:1-15>   선으로 악을 이기라

다시 사울과 다윗 이야기의 배경과 무대는 십 광야 십 황무지 >로 돌아옵니다너무도 놀랍게도 앞에서 사무엘상 24장의 배경과 상황이 그대도 재현되고 있는 장면이 바로 오늘 사무엘상 26장 십 광야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사무엘상 26:1-15>  선으로 악을 이기라


[삼상 26:1-12]

(삼상 26:1) 십 사람이 기브아에 와서 사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다윗이 광야 앞 하길라 산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매

(삼상 26:2) 사울이 일어나 십 광야에서 다윗을 찾으려고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과 함께 십 광야로 내려가서

(삼상 26:3) 사울이 광야 앞 하길라 산 길 가에 진 치니라 다윗이 광야에 있더니 사울이 자기를 따라 광야로 들어옴을 알고

(삼상 26:4) 이에 다윗이 정탐꾼을 보내어 사울이 과연 이른 줄 알고

(삼상 26:5) 다윗이 일어나 사울이 진 친 곳에 이르러 사울과 넬의 아들 군사령관 아브넬이 머무는 곳을 본즉 사울이 진영 가운데에 누웠고 백성은 그를 둘러 진 쳤더라

(삼상 26:6) 이에 다윗이 헷 사람 아히멜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에게 물어 이르되 누가 나와 더불어 진영에 내려가서 사울에게 이르겠느냐 하니 아비새가 이르되 내가 함께 가겠나이다

(삼상 26:7) 다윗과 아비새가 밤에 그 백성에게 나아가 본즉 사울이 진영 가운데 누워 자고 창은 머리 곁 땅에 꽂혀 있고 아브넬과 백성들은 그를 둘러 누웠는지라

(삼상 26:8)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하니

(삼상 26:9)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

(삼상 26:10) 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삼상 26:11)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삼상 26:12) 다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아무도 보거나 눈치 채지 못하고 깨어 있는 사람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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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나발과 아비가엘의 이야기가 나온후에 다시 사울과 다윗의 추격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다시 사울과 다윗 이야기의 배경과 무대는 < 십 광야 / 십 황무지 >로 돌아옵니다. 너무도 놀랍게도 앞에서 사무엘상 24장의 배경과 상황이 그대도 재현되고 있는 장면이 바로 오늘 사무엘상 26장 십 광야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사울이 3천명과 함께 다윗을 찾으러 십 광야로 내려가 진을 칩니다. 다윗이 도움을 주었던 십 사람들이 다윗의 있는 곳을 알려줌으로 다시 사울과 다윗의 추격전으로 이어집니다.


사무엘상의 마지막 대목은 두사람의 대조적인 행동인 두드러지게 드러납니다.

어떻 해서든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이 받은 은혜를 잊은 채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의 모습과 어떻해서든지 사울의 자리를 지켜주려고 은혜를 베풀면서 도망을 치고 있는 다윗의 모습을 봅니다.

 

사울과 다윗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다루는 방식이 달랐습니다.

사울은 은혜를 잊어 버렸고 다윗은 은혜를 기억했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감정과 원함에 매여 있었고 다윗은 자신의 감정과 원함에 매여 있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주변의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오직 자신의 마음에 민감하게 행동했고, 다윗은 자신의 주변의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마음에 민감하게 행동했습니다.


사무엘상 24장에 사울은 십 황무지 동굴속에서 다윗에서 죽을 뻔한 일을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예치못한 곳에서 자신이 미명하게 죽을 뻔 일을 불행중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것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시는 또 한번의 회개의 기회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다윗에서 어떤 은혜를 입었는지? 그리고 그 배후에 하나님이 자신에게 어떤 회복의 기회를 주고 계시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당한 굴욕감과 모욕감 그리고 주변사람에게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보여지는지에 대한 수치심에 쌓여서 다윗을 죽이려는 그 추격전에 다시금 나서게 된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자신의 감정과 마음이 거기에 매이는 것을 주의해야합니다. 


종종 사람과 사람사이에 원수 맺는 일을 보면 그렇게 큰 문제에서 일어나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사소하고 작은 일들 속에서 서운함을 만들어내고 그 속에서 사탄마귀가 틈을 타고 계속 그 마음에 매여서 사람에 대한 원수 맺는 것이 생깁니다.

그래서 오해하고 원망하고 미워하고 욕합니다. 정작 어떤 큰 사건이 서로에게 원수 맺게하는 일보다는 사소한 감정들이 사소한 상황들이 관계 속에서 원수 맺는 일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의 상태와 상황을 민감하게 다시보게 하십니다.

내 마음안에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

내 마음에 숨어있는 잘못된 동기는 무엇인지?

내 마음에 무엇이 나를 거기에 메이게 하는지?를 살피도록 하십니다.

 

사울과 다윗의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이러한 민감함의 차이였습니다.

성령님은 오늘 우리로 하여금 각각의 처한 상황과 관계속에서 일어나는 감정과 마음을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우리의 마음안에 말씀하십니다.

니가 지금 어떤 마음으로 어떤 중심으로 무엇하려 하느냐

성령님에 민감한 사람은 사람의 소리에 치우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관심과 관점에 집중합니다.

 

사울과 다윗 둘다 위기가 있었습니다.

위기라는 말은 < 위험한 기회 >라는 말입니다. 사울은 다윗에게 죽을 뻔한 위험한 기회를 계속적으로 <복수와 원수맺음>으로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에게 죽을 뻔한 위험한 기회를 계속적으로 <은혜와 긍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은혜 받은 기회를 은혜 베풀기회로 바꿔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울의 선택입니다

그러나 은혜 받은 기회를 은혜 베풀 기회로 바꿔놓고 있는 것이 다윗의 선택입니다.

 

다윗이 자신을 따르는 아비새와 함께 밤에 사울에게도 나아갑니다

그때 사울은 진 가운데에 누어서 자고 창은 머리 곁 땅에 꽂혀 있었습니다.


그때 같이 간 아비새가 말합니다. < 하나님께서 오늘날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나로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가 또 다시 다윗에게 왔습니다. 사울왕을 죽이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 할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때 다윗의 반응과 말을 보십시오.

(삼상 26:9)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

(삼상 26:10) 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삼상 26:11)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이 다윗의 고백 속에 담겨있는 중심은 무엇일까요? 3가지 중심이 있습니다.

1) 원수는 내가 갚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갚는 것이다.


2) 왕는 내가 스스로 그 자리를 차지는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시는 것이다.


3) 내가 원하는 것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있을 때 

     항상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 선택해야한다.


여기서 다윗의 탁월함을 나오는 것이죠.. 오늘 상황과 관련된 로마서 말씀에

[12:18-21]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12: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바로 다윗의 모습이 바로 < 선으로 악을 이기는 장면 >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서 가져나온 물건중에 < >이 있습니다. 이 창은 사울이 다윗을 수없이 죽이려했던 그 무기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사울이 다윗을 해하려 할때는 이 <>이 등장합니다.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온 다윗은 그를 위하여 수금을 타고 있을 때 사울은 그를 창으로 죽이려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이기고 돌아와 사울을 위하여 수금을 탈 때에도 그를 창으로 찔러 죽이려 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의 억울함을 호소하자 사울이 화가 나서 요나단을 죽이려고 던진것도 창이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했던 그 창으로 사울을 죽일수 있었습니다. 보란 듯이 세상에 웃음이 될수 있도록 자신을 죽이려고 겨누었던 그 창으로 사울을 죽일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창을 그렇게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사울에게서 그 창을 가져오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사울에게서 그 창을 치워버립니다. 다윗의 이 행동은 사울에게서 악한 동기와 행동을 가져가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사울에게서 그 창은 <악한 마음>을 상징하는 물건입니다. 그러난 다윗은 사울에게서 그 창을 가져 나옴으로 사울의 <악한 마음>을 가져 오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놀랍게도 성경에 보면 그 사건 이후로 사울의 모습은 다윗을 더 이상 위협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에서 우리의 감정속에 있는 그릇된 에너지가 내 삶의 에너지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분노와 원망과 미움을 나의 삶의 에너지로 삼지 말아야합니다. 사울하면 어떻하면 내가 받은 이 수모와 원한을 되갚아줄까? 하지 않으면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악을 선으로 이기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지난주 심각한 지진이 났습니다


한 며칠 동안은 잠을 잘 때면 지진이 또 날까 겁이 났습니다. 조금만 흔들려도 잠기 깨곤했습니다. 지진으로 물건들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고 얼마나 지진이 위력적인지도 경험했습니다.


그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 ! 저 물건이 언제 저기 올라가 있었지? ! 내가 깨질 물건을 저기에 올려 놓았네 ... 이제 저걸 내려놓아야지 ! >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진으로 물건이 떨어지고 깨지고 상한 경험을 하고서는 우리 집안에서 넘어지고 깨지고 흔들릴 만한 것들을 찾아 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내려놓게 되었지요. 참다운 내려놓음을 준비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마음 안에도 지진같이 조금만 흔들어도 깨어질 것들이 많습니다. 계속 내 마음을 무너지게 하고 나를 넘어지게 하고 나를 상하게 하는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어느 순간에 나도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올려놓은 그런 분노, 원망, 상처, 미움, 원수맺음과 같은 마음들이 있지는 않습니까?


언젠 가는 그것들이 내 마음을 안에서 떨어져 내 마음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습니다. 내 마음이 엉망이 되기(mess up) 전에 그것을 바로 잡는 것이 필요합니다.

 

< 사랑을 베푸는 자에게 있어서 사랑이 실패로 끝난다 하더라도

 사랑은 역시 최선의 길이다. > 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다윗의 행동은 우리에게 끝까지 놓지 말아야할 마음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은 은혜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그 선한 마음을 부여잡고 그대로 행동하고 그대로 선택하면 사는 것입니다. 나의 인간적인 욕심과 감정을 부여잡지 않고 원수를 원수 갚음으로 매듭짓지 않고 조용히 사울의 창을 가져옴으로 선으로 악을 이기는 모습을 부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이 원수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은혜 베풀기회로 삼는

그런 탁월한 삶의 내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원수는 내가 갚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갚으신다. 그리고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대로 행동하면 하나님의 뜻은 만드신 이룬다는 이 하나님께 대한 강력한 신뢰가 다윗을 이스라엘의 두 번째왕으로 세우고 계십니다.

 

리차드 램브란트의 이야기입니다. 

이집트에 주둔한 적이 있었던 한 영국 상사가 자신에 관한 이런 이야기입니다.


내가 있던 부대에 예수를 믿는 민간인이 하나 있었는데, 우리들이 그 사람을 되게 못살게 굴었습니다. 비가 몹시 내리던 어느 날 밤 그는 지쳐서 들어와서는 잠자리에 들기 전 기도를 하려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나는 진흙이 잔뜩 묻은 내 장화를 그 사람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지만, 그는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 장화가 깨끗이 닦여져서 내 침대 옆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것이 나에 대한 그의 보답이었고, 그 대답이 내 마음을 녹였습니다.나는 그 날 구원받았습니다.









  • [사무엘상 21:10-15] 두려움에서 도망치기
  •  Main Idea : 다윗은 사울을 두려워 도망쳤다. 그러나 더 중요한것은 다윗은 그 마음의 두려움에서 도망쳐야 했다. 사람이 두려워 사람을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의 진정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께로 내 마음이 도망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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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 21:10-15]

(삼상 21:10)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삼상 21:11)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말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

(삼상 21:12) 다윗이 이 말을 그의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삼상 21:13) 그들 앞에서 그의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삼상 21:14) 아기스가 그의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삼상 21:15)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 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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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두려움으로부터 도망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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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사울의 위협을 피해서 도망하고 있는 다윗으로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억울한 누명, 정처없는 도망자의 삶, 끊임없는 추격, 아슬아슬한 위기탈출... 고달픈 도망자의 신세가 되고 만 다윗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있은 본문 사무엘상 21장에 등장하고 있는 다윗의 모습을 통해서 가장 많이 등장하고 있는 다윗의 심정은 바로 < 두려움 >입니다. 사람과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그를 애워싸고 그를 심각한 위기속에 몰아놓습니다. 


 다윗은 라마나욧에서 놉땅으로 그리고 이제는 이방 블레셋의 도시인 가드로 도망을 칩니다.  다윗에 대한 갖는 두려움의 대상은 바로 < 사람 > 이었습니다. 


삼상 21장 10절에 <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아나 > 

삼상 21장 12절에 < 가드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 


이러한 사람에 대한 두려움은 그를 자신이 머물고 있는 자리에서 < 도망치도록 >만들었고 자신을 < 미친척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래전에 보았던 헤리슨 포드 주연의 영화 < 도망자 >라는 영화가 떠 오릅니다. 어울하게 살인범의 누명을 쓰고 사형선고를 받고 교도소를 향하던 헤리슨 포드는 호송버스안에서 몇몇 죄수들의 탈주를 하는 사고속에서 탈주범의 누명을 쓰고 도망자가 됩니다. 이러한 사실을알게된 킴블형사는 제라드을 잡기위해서 추격을 벌립니다. 살인범에서 탈주범으로 ... 엎친데 덮친 것 같은 상황의 연속입니다. 스릴과 서스펜스의 연속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도망자 다윗의 상황도 같습니다. 사울에서 도망쳤던 다윗은 이제는 블레셋 아기스에게서도 도망쳐야만 했습니다. 다윗이 자기 나라 이스라엘에 더 이상 머물곳이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일종의 정치적인 망명을 계획하고 자신이 죽였던 블레셋 장수 골리앗의 고향인 가드땅으로 발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다윗에게선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도 다윗을 한눈에 알아봅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죠. 


다윗에 대한 소문은 이미 들었던 내용이었습니다. 어찌 자신들의 자랑이었던 골리앗을 물맺돌로 죽였던 그 사건을 모를 리가 있겠습니다. 블레셋에게서 다윗은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신화적이며 입지전적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난 사울에게서 도망치고 있는 다윗의 모습은 더 이상 블레셋 가드땅 아기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나선 사람은 사람들의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나선 사람은 사람들에게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사람들의 익숙한 방식은 인생의 절대절명의 위기고 원치않은 위험을 경험하면 가장 먼저 손을 뻗는 태도는 < 사람을 의지하는 것 >입니다. 이것은 너무도 쉽고 너무도 간편한 방법입니다. 다윗도 자신의 도망자의 삶에서 자신이 의지했던 사람들이 었습니다. < 다윗, 사무엘 그리고 엘리멜렉 그리고 블레셋의 아기스왕 까지 > 


우리는 어려운 일이 생기면 두려움이 일이 생기면 사람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의지하고 도움을 요청했던 그 사람에 대한 기대는 깨어지고 실망하고 때로는 더 큰 위기가 찾아옵니다. 


위기라는 단어는 < 위험 >이라는 단어와 < 기회 >라는 단어가 합쳐진것입니다. 

우리는 위기를 만나면서 위험한 사항을 어떠한 기회로 바꾸어야 할지를 생각해얍합니다. 우리는 위기의 순간에 그 위기를 탈출할 기회를 사람을 의지하고 사람에게 도움을 구할 기회로 삼을지.. 아니면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삼을지를 생각해야합니다. 


다윗에게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 골리앗의 칼 >입니다. 그가 쥐고 있는 골리앗의 칼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신의 이길수 없는 싸움을 이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다윗하고 있는 싸움은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 해야만 이길수 있는 싸움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아무리 다윗에게서 제사장의 떡을 먹고 골리앗을 칼을 쥐고 있어도.. 자신의 마음안에 있는 < 두려움 >과 싸워서 이기지 못하면 계속된 < 두려움 >이 애워싸고 결국에는 그 <두려움>으로 함몰되고 말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도움 < 두려움 >과 맞써 싸워야합니다. 우리에게서 두려운 마음은 우리를 치명적인 결함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에게 찾아온 두려움을 처음에 제압하지 않으면 결국에는 더 큰 두려움에 우리의 마음을 내어 놓게 되고 또 더 큰 두려움에 내 마음이 사로잡히게 됩니다.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은 오직 한가지입니다. 그것은 < 도울힘이 없는 없는 인생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 >입니다. 


다윗이 도망자의 삶에서 철저하게 훈련받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두려움에서 도망치는법 >입니다. 더 이상 두려운 상황에서 두려운 사람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두려운 마음에서 도망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두려운 마음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옮기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작은 두려움이 스며들고 작은 두려움을 허용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더 큰 두려움을 허용하게 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을 방해받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두려움과의 치열한 전쟁을 벌리는 것입니다. 사단마귀는 우리에게 가장 손쉬


운 방법으로 < 두려움 >을 심어 놓습니다. 그 두려움의 싹이 나서 우리의 마음의 밭을 온통 <두려움>으로 가득차도록 만들어 버립니다. 


다윗처럼 미친척한다고 두려움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인도의 설화중에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마술사가 쥐를 관찰하다가 쥐가 고양이 앞에서 벌벌 떨며 두려워하는 쥐가 불쌍해졌습니다. 마술사는 마술을 부려 쥐를 고양이로 변하게 했습니다. 변신한 고양이가 이번에는 개를 몹시 두려워하는 것이 아닌가. 더 불쌍한 마음을 가진 마술사는 다시 한 번 마술을 사용해서 이 고양이를 개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개가 된 고양이는 이번에는 호랑이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닌가. 이 모습도 불쌍히 여긴 마술사는 개를 호랑이로 변신시켜 주었습니다. 동물의 왕 호랑이야 두려울 것이 있겠는가 싶었는데 호랑이는 사냥꾼의 총을 두려워 전전긍긍했습니다. 사냥꾼을 두려워하는 호랑이를 보면서 마술사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어떻게 해도 너의 두려움이 끝나지 않으므로 너는 별 수 없는 쥐새끼다. 다시 쥐로 돌아가라.” 원래 모습인 쥐로 되돌려 놓았다는 인도이야기이다.   





인간의 내면안에 있는 두려움은 절대 다른 대체물이나 사람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직 참 평안과 위로를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에서 해결할수 있습니다. 


(시 146:3)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시 146:5)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오늘 본문에 다윗은 블레셋 가드땅으로 가기로 선택하면서 < 하나님을 묻거나 하나님을 도움을 요청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판단과 선택을 생각합니다. 다윗의 도망자의 삶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 됩니다. 

 다윗의 마음을 애워싸고 있는 그 두려움에서 도망치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때로는 여러분이 당하고 있는 삶의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으신가?

때로는 내가 의지할 사람을 찾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그 결과는 계속 삶의 상황에 도망쳐야하고.. 계속 의지할 사람이 두려운 사람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될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위기의 순간에 가장 먼저해야할 일은.. 

우리 마음 안에 있는 두려움에서 도망치는 것입니다. 



<찬397 주 사랑안에 살면 > 

주 사랑 안에 살면 나 두렴 없으며 

그 사랑 변함 없어 늘 마음 편하다 

저 폭풍 몰아쳐서 내 마음 떨려도 

주 나의 곁에 계셔 겁낼 것 없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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