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가복음 10 : 17 - 31> 
  •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 07/29/2014 새벽묵상설교 

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마가복음 10:17 - 31>


제목 : <마가복음 10: 17 - 31>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 마가복음 10:17-31 ]

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쌔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0.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22.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23.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24.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25.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26.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27.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28. 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31.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제목 : 오히려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오늘 말씀은 < 한 부자 청년과 예수님의 대화 >와 이어지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대화 >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두 대화는 질문과 답변의 형태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특별이 두 대화의 주제는 서로 묘한 연결을 갖고 있습니다.



한 부자 청년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수 있습니까 ? >라고 하는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수 있습니까 ? >라고 하는 질문입니다.


이 핵심적인 질문에서부터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하시는 핵심 메시지가 결정됩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께 갑자기 찾아온 부자 청년과 예수님을 줄곳 따라온 제자들에게 < 영생, 하나님 나라가 어떤 사람에게 주어지는지? 그리고 영생,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질문에 대답해주신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갑자가 찾아온 부자 청년은 <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갔고 >, 줄고 따라온 제자들은 < 심히 놀라고 두려운 마음으로 > 예수님을 쫓고 있습니다.





먼저 왜? 그들이 했던 질문에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그렇게 만족스럽지 못한 조금은 당황스러운 반응을 보였을까?를 먼저 생각해보아야합니다.


바로 그것은 < 그들이 질문을 했을때는 그들이 기대했던 대답이 있었을 것이다 >는 사실입니다. 부자 청년과 예수님의 대화속에서 부자청년은 아주 자신감 있게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합니다. 그러나 결국 부자청년은 예수님의 대답에 아주 자신감없이 돌아갑니다. 무언가? 예수님에게서 내가 기대하고 만족할만한 대답을 얻지 못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의 대화속에서 부자 청년과의 대화의 장면을 옆에서 보면서 자신들은 부자청년과 달리 <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르고 있다 >이 놀라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지 없이 예수님께서 제시한 대답을 듣고는 < 이해할수 없다, 동의가 되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부자청년은 예수님께 질문하고 대답하는 과정에서 그는 신앙적이고 종교적인 자신감에 가득찬 찬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자심감이 예수님께서 <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하게 했습니.


제자들은 예수님께 질문하고 대답하는 과정에서 다른 이들과 다를 자신들은 예수님의 제자로써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르고 있다는 제자로써의 자부심으로 <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하게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이들의 < 숨은 동기와 의도 그리고 기대 >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 부자청년과 예수님의 대화 ><제자들과 예수님의 대화>속에서 숨은 동기와 의도 그리고 기대를 찾는 것이 아주 재미있는 묵상포인트 , 관전 포인트가 될것입니다.

 

보통 우리가 재미있는 영화들을 볼때면 감독이 의도적으로 다음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복선>이라는 것을 깔아 놓습니다. 그래서 감독이 주고자 하는 숨은 동기와 의도 그리고 기대가 드러나도로 합니다. 그러나 쉽게 그 복선을 찾기가 힘듭니다. 대체로 무대 소품이나 등장인물을 대사를 통해서 작가가 심어 놓은 복선을 찾아 낼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대화의 내용을 보면서 구체적인 숨은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먼저 부자청년과 예수님과의 대화입니다.


오늘 본문의 부자청년과 예수님과의 대화는 마태복음 19장 누가복음 18장에도 기록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다른 복음서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이 사람은 부자이고 청년이었으며 관원이었습니다. 그는 부유한 젊은 관원이었습니다.


이 부유한 젊은 관원은 상당한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열심과 신념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서 < 달려와 꿇고 앉았습니다. > 이것은 그가 갖고 있는 < 신앙적인 열심과 종교적인 인격 >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 선한 선생님 ! 선한 랍비여 ! >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우리가 볼수 있는 것은 < 예수님을 선하다고 말하고 예수님을 랍비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달리 볼수 있는 것은 <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지 않고 있다 >는 점입니다. 바로 이점이 이 부유한 젊은 관원이 예수님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를 알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원을 주시는 주로 보지 않고 한수 가르쳐주시는 종교적인 선생으로 유대적인 훌륭한 선생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 그가 아직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구원과 영생을 이해하기 쉽지 않은 자신의 종교적인 신앙으로 구원에 다가서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인상적인 것은 < 내가 무엇을 하여야 >라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말하고 부자청년은 < 영생을 무엇을 하여야 얻을수 있는 것 >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질문을 예수님께서서 원하시는 질문으로 바꿔 본다면 < 선하신 주님이시여, 내가 당신을 믿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 >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부자 청년은 < 예수님은 누구이신지 보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하는지 >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부자 청년이 이해하고 있는 영생. 자신이 기대하고 있는 영생이 있었습니다


< 자신이 무엇을 해야만 얻을수 있는 영생, 자신이 예수 선생처럼 선함을 이루어야만 영생의 길을 알수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여전히 < 율법적인 의과 율법적인 선 >을 알고 지키고 행해야만 그것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유대적인 영생관에 매여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유대교적 영생은 선을 알고 선을 행하는 것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합니다. < 은혜의 구원이 아니라 행위의 구원입니다. > 


그래서 부자 청년은 예수님에게서 구원이 주어진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예수님에게서 구원을 얻는 선함을 한수 배우고자 한수 터득하고자 나아온것입니다.


그러한 의도를 하셨던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 ? 나를 선하다 하느냐 ? 선하신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 > 이것은 예수님의 유도 질문과 같은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선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부자청년의 고백을 이끌어내기 위한 유도질문입니다. < 네가 계명을 아나니 > 라고 말씀하시면 < 십계명 >을 이야기하십니다. < 영생을 얻기 위해서 선하신 하나님이 주신 계명들 알고 지키는 것이 있지 않느냐 ? >라고 하는 일반적인 유대적 구원관에서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도된 대답, 부자 청년의 반응을 보려고 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된 대답입니다.

 

그 대답에 부자청년은 < 내가 다 지켰다 > 라고 대답합니다. 부자청년의 대답을 숨은 의도와 동기를 파악하면 다음 같이 바꿔서 말할수 있습니다.



< 제가 어려서부터 선함을 알고 선함을 지키기 위해서 십계명도 알고 지켰습니다. 그래서 이정도면 영생을 얻기에 어떻습니까? 선생님이 생각하시기에 제가 영생을 받기에 충분한가요? 이 정도면 영생을 얻기에 부족한것이 없지 않습니까? 또 제가 부자로써서 복을 받고 있는 것을 보면 아시잖습니까? >


그당시에 랍비들은 < 부자가 되면 하나님의 선함과 복이 임했다 >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부자가 되었다면> 충분히 하나님의 인정과 복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인정하는 부자로써 겉으로 보기에도 영생을 얻기에도 충분해보이고 자신 스스로도 계명을 다 지켰다고 자심감 있게 말하는 이 부자 젊은 관원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 오히려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 하시면서 예상밖의 21-22절의 말씀을 주십니다.


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22.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주셨을까요?


부자 청년이 하나님의 계명이 선한줄 알고 지키고 복은 받았지만 진정으로 영생은 이것만으로 충분치 않다고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이땅에서 물질적인 복받음이나 이땅에서 율법행함이 영생의 조건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고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 나눠주어도 하늘의 복의 기대와 만족으로 > 살수 있는 사람이 영생을 얻을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땅의 소유권을 하나님께 이전시킬수 있는 그 사람이 바로 영생을 얻을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땅의 소유에 매이지 않을수 있어야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오늘 이 본문에서 오해한다. < 예수님은 부자를 싫어하시는가? 예수님은 우리가 부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는가? 그렇다면 예수 믿는 사람은 항상 가난하게 살아야하는가 ? >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당시 유대인들이 부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오해가 생깁니다.


오늘 본문에도 마치 예수님께서 부자를 아주 부정적으로 보는 것처럼 보입니다. < 재물이 있는자나 부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 마치 약대가 바늘귀에 나가는 것이 더쉬울만큼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어렵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23.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24.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25.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바로 이 본문은 마치 < 부자들을 당황스러게 하거나 부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을 하시게 되는 예수님 당시의 유대적인 배경을 이해해야합니다. 그당시 유대인들은 재물이 많고 부자가되는 것을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자가 되고 관원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영생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의 부자들은 악착같이 부를 모아야서 사람들에게 자신이 부자인 것을 자랑했습니다. 그것으로 자신의 종교적인 신앙이 이정도 된다고 생각하는 교만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 부자가 되는 것은 자신이 더 율법적인 구원에 가까워진다고 생각하는 사회적인 통념 종교적인 관념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시대적인 상황을 알고 있는 예수님께서 그 시대를 일종에 풍자한것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일종의 과정법으로 그 시대의 부자들에게 충격요법으로 < 약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만큼 어렵다 >라고 말한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예수님의 이 충격적인 선언이 조금 과하다 생각해서 <약대>라는 히브리어 단어 < 카멜론>을 다른 비슷한 발음인 < 카밀론 >으로 바꾸어 발음했습니다. < 카밀론 >이라는 뜻은 < 밧줄 >이라는 뜻입니다. < 밧줄이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 >이라고 바꾸어서 읽었습니다.

 

실제로 부자의 의미는 < 가진자, 잘사는 사람 >의 의미보다는 < 하나님 나라보다는 이땅의 소유에 집착하는 자 >라고 볼수 있습니다. 여전히 이땅에 소유의 집착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소유나 복을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게 들어갈수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 찾아온 부자 청년이 바로 그런한 사람의 대표적인 모습니다.

 

이러한 부자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에 대해서 충격적인 선언을 들은 제자들은 두가지 마음이었습니다. < 아니 이럴수가? 그렇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르는 우리는 해당사항이 있는 것 아닌가? 아니야 더 많은 보상이 있을 거야 ? >하는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숨은 동기와 의도 그리고 기대로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말합니다. <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수 있습니까?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는데 ... >라고 말합니다.


그러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27.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바로 하나님의 구원을 우리가 무언가 해야 얻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얻을수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부자 청년과 제자들의 공통점은 < 영생과 구원을 위해서 무언가 해야... 무언가 보여주야 얻는다고 하는 유대교적 이해>를 벗어나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구원의 조건은 인간의 조건이나 가치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다 하시는 놀라운 은혜이면 놀라운 능력입니.

 

그래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삶은 <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31.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무언가를 해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전적인 능력에 달려 있는 일입니다.

 

그 당시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가족 중심의 유대교 공동체를 포기하고 그들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위해 가족을 뒤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육체적인 자족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가족의 일원으로 영접될것입니다. 그 결과 핍박과 박해가 주어지지만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복도 주어집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놓여있는 기대이며 보상입니다. 현세에서 하나님의 나라 백성과 가족이 되는 보상이며 내세에서는 영적인 부요함에 참여하는 영생을 보상받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것이 있다면..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그러나 많은 첫째들이 말째들이 되고 말째들이 첫째들이 될 것이다. 그릇된 보상의 기대에 대한 경고입니다. 또한 자동적으로 첫 번째 자리를 확보하지 못한다고 하는 분명한 선언입니다. 

 

오늘 말씀을 4가지로 정리해보면 ...

 

1/ 영생과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조건과 가치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 영생과 하나님 나라는 인간 스스로의 선함, 부요함, 완전함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2/ 영생과 하나님 나라는 소유권을 이전하는 것이며 소유권 포기를 의미한다.

- 재물에 매이지 않고 재물에 대한 관점을 전환을 요구하신다. 

-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얻는 자는 내것을 내것으로 주장하지 않으려 한다.


3/ 영생과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세상적 기대를 거부하고 거절한다.

- 무엇을 하여야 .. 무엇을 얻을수 있습니까? 라고 말하지 않는다. 

- 누구를 믿어야 됩니까? 말한다. 


4/ 영생과 하나님 나라는 세상적인 우열의 순위와 관련하지 않는다.

- 율법의 완벽함 / 부자의 축복 / 순서상의 먼저

 



오늘 본문과 관련한 찬양 이야기 

찬 94장 주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주예수 보다더 귀한것은 없네 / 영어 가사 / 해설


I’d Rather Have Jesus.(주 예수 보다 더 귀한 분은 없네) 영어가사해설

이 찬송의 가사는 1922년도에 Rhea F. Miller(밀러) 부인에 의해 쓰여졌지만, 1946년 이후 줄곧 빌리 그레이엄 전도팀과 함께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미국의 사랑받는 복음 가수’(‘America’s beloved gospel singer’)로 유명한 George Beverly Shea(쉬어)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답니다.

 

Shea가 주일아침 예배를 위해 준비하던 중, 어머니의 피아노 앞에서 우연히 발견된 이 가사에 멜로디가 붙여져, Shea의 나이 21세 때, 처음으로 공중 앞에서 불러진 후부터, 이 곡은 인생에서 자신의 신앙적인 결심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찬송(Signature Song)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답니다.

이제 그 내용을 통해 정말 고귀한 신앙간증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I’d Rather Have Jesus.(난 차라리 예수님을 가지고 싶다오.)


1. I’d rather have Jesus than silver or gold;

 I’d rather be His than have riches untold;

I’d rather have Jesus than houses or lands;

 I’d rather be led by His nail-pierced hand

  금이나 은보다 난 차라리 예수님을 가지고 싶다네. 

엄청난 부를 가지는 것보다 오히려 주님의  것이 되고 싶다네. 

큰 집들과 넓은 땅을 가지는 것보다 난 주님을 가지고 싶다네. 

오히려 주님의 못자국 난 손으로 이끌림을 받으려네.


<Refrain>Than to be the king of a vast domain,  

Or be held in sin’s dread sway;

I’d rather have Jesus than anything  This world affords today.   

<후렴> 넓은 영토를 지닌 왕이 되는 것보다, 

끔직한 죄악의 힘에 사로잡히는 것보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난 예수님을 가지고 싶다네. 

이 세상은 오늘만 지나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라네.

 

2. I’d rather have Jesus than men’s applause; 

 I’d rather be faithful to His dear cause;

I’d rather have Jesus than worldwide fame; 

 I’d rather be true to His holy name    

   사람들의 칭송을 받기보다 차라리 예수님을 가지고 싶다네. 그 분의 소중한 큰 목적에 충실하고 싶다네. 나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유명한 명성보다 오히려 주님과 함께 하고 싶다네. 그 분의 거룩한 이름 앞에서 진실되기를 원한다네.

 

3. He’s fairer than lilies of rarest bloom; 

 He’s sweeter than honey from out the comb;

He’s all that my hungering spirit needs;  

 I’d rather have Jesus and let Him lead   

   그 분은 진귀하게 피어나는 백합보다 더 순결하시다네. 벌집에서 따온 꿀보다 더 달콤하시다네. 주님은 내 갈급한 심령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라네. 나는 차라리 주님과 함께 하려네, 그 분이 날 인도하시도록 하려네.




낙타냐 밧줄이냐, 바늘귀냐 '침공문'이냐?


     "내가 다시 자네들한테 말하네만, 낙타가 바늘귀(원문: 바늘구멍)로 통과하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왕국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쉬우이!" (마 19:24 사역)    



예수님이 부자의 구원/영생 문제에 관해 말씀하신 마태복음서 19:25, 마르쿠스복음 10:25, 루카복음 18:25 등은 모두 거의 같은 문장입니다.


그런데 교계 일각에서 낙타는 본래 '밧줄'이라야 더 걸맞고, 바늘귀는 '침공문'(針孔門)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어 왔습니다. 


전자의 주장은 아람어에서 낙타 즉 '가믈라'(그리스어의 '카밀로스'에 해당)라는 낱말이 밧줄이라는 뜻도 있으니까 문장의 어감 상 밧줄이 더 어울린다는 관점에서죠. 


또 후자는 본래 예루샬렘에 침공문이라는 이름의 좁은 문이 있었다든지 광야에 낙타 한 마리도 어렵사리 통과하는 골짜기의 협곡이 있다는 의미에섭니다.  

그런 견해들을 한 번 따져 보기로 하지요.


중요한 것은..성경학자들이나 독자들의 느낌이 아니라 과연 예수님이 본래 어떤 의도로 말씀하셨나 입니다. 


우선, '밧줄'이라는 견해는 상당히 일리는 있어 보이지요.

    1. 위 세 구절 모두 낙타(약대/camel)가 그리스어 원문에 '카멜로스'로 돼 있습니다. 그런데 후기의 그리스 사본 몇 가지는 카멜론(대격/목적형) 대신 '카밀론'(밧줄/거룻줄: 배를 나루에 잡아 매어놓은)으로 돼 있습니다.

    2. 공교롭게도 아람어 성경 역본인 신약 '페쉬타'는 아람어 '가믈라'(굵은 밧줄)로 돼 있어 이 역시 은근히 '밧줄' 쪽 손을 줍니다. 그래서 아람어에서 번역한 성경인 '람사' 역을 비롯한 일부 소수의 번역들이 '밧줄' 설을 따르고 있습니다.

    3. 바늘 가는 데 실 간다는 말도 있듯, 상식적으로 낙타보다는 밧줄이 덜 우스꽝스럽고 더 조화되고 하모니를 이룬다는 느낌입니다. 게다가 낙타의 털실로 짠 밧줄이라는 주장까지도 있습니다. ..

그러나(이 '그러나'가 문제지요)..


'밧줄' 쪽을 지지하는 가장 초기 사본들은 5세기 경의 아르메니아/그루지야 사본(둘 다 번역판)들입니다. 대문자 사본(949년)도 있고, 비잔틴 전승의 소문자 사본들(13,59,124,130,437,472,543)도 있습니다. 대부분 서기 1000년으로 꺾힌 뒤 형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설의 특징을 좀 살펴 보면..


첫째로, '밧줄'로 번역된 번역판은 매우 희귀합니다. 무수한 원어학자들/성경학자들이 연구해 옮긴 대부분의 성경 번역들이 '낙타'로 돼 있습니다. 

  

둘째로, 수많은 성경원문 사본들 중 극소수 사본만이 이 설을 뒷받침합니다.


셋째로, 그 사본들조차 퍽 후기의 것들입니다.


넷째로, 신약사본들이 희귀하던 중세 교회사 초기에 몇몇 '교부'들의 빈약한 추정들이 그런 설을 북돋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리게네스의 '카테나' 단편(마태 19:24), 알렉산드리아의 퀴릴로스(마 19:24 주석 '파트릴로기아 그레카'(=그리스 교부 문서) 72.429D), 테오퓔 투스(마 19장. '파트릴로기아 그레카' 123.356D) 등이 그것이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서 윗 구절에서 '더 쉽다'는 의미의 그리스어 낱말 '유코포테로스'의 원형 '유코포스'는 우선적으로 "가벼운 수고로도"라는 뜻입니다. 분명히 어떤 산 존재를 뜻합니다. 즉 밧줄 같은 무생물엔 영 걸맞지 않는 뉘앙스의 낱말이지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침공문?


이제 크게 두 번 째로..윗 구절 후반부의 바늘귀 대신 주장돼 온 '침공문'설을 생각해 보렵니다.


이것은 고대 예루샬렘에 '바늘귀'(=바늘구멍)란 이름의 작은 문이 있었다는 주장입니다. 그 문으로는 낙타가 지나가려면 짐을 다 내리고도 구부정하게 구부려야, 심지어 무릎을 꿇어야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통과하기 어려운 문이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광야의 협곡에 낙타 한 마리도 통행하기에도 비좁은 지점이 있었다는 말과도 통합니다. 


역시 그럴 듯한 주장이지요. 이 학설은 안셀무스, 토마스 아퀴나스 등이 주장합니다. 또한 외경의 하나인 소위 '페트로 복음서'에 따르면 페트로가 하나님께 그런 권능이 있으심을 보여 주려고 어떤 '대문'을 초자연적으로 확장시켰다는 다소 황당한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문이나 그 정도의 협곡이 있었는지, 또 예수님이 특별히 그 곳을 집어 말씀하셨는지는 역사적으로 전혀 입증되지 않고 있습니다!  

위 두 가지 설에 대한, 매우 중요한 반증이 하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원 의도와도 간접 연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대 유대의 라삐 문서(rabbinics)에 이와 유사한 전통적인 과장법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바빌론 포로기 때 형성된 것으로 알려진 유대 외전의 하나-바빌론 탈무드 '바바 메찌아'(중간대문이란 뜻)에 다음 구절이 나오지요.


    라삐 쉐 이 라삐 아므람에게 말합니다: "아마도 님은 '폼베디타'(현 이라크에 있던 고대 바빌론의 도시. 한 유대인 학파의 본거지)파의 한 분이신가 봅니다. 코끼리를 이끌어 바늘귀로 통과시킬 수 있다는." 

불가능을 뜻하지요!


그밖에도 같은 문서의 38b에도 "코끼리를 바늘귀로 통과시킬 수 있는 사람"이란 말이 있습니다. 같은 문서 '베라코트' 55b에도 "그들은 한 사람에게도 황금 종려나무, 바늘귀로 통과하는 코끼리를 보여 주지 않는다"란 구절도 있습니다.

비슷한 과장법이 폭 넓게 유포돼 있다는 얘기지요.



그리스에는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다섯 마리 코끼리를 한 쪽 팔 아래 숨기는 게 더 쉬울 것이다."


로마 시대엔 이런 속담이 있었습니다. 

"한 마리 메뚜기가 코끼리를 낳는 게 더 쉬울 것이다."


그러므로 정말 얼토당토 않은 코끼리 비유보다는 예수님의 낙타 비유가 오히려 훨씬 덜 과장돼 있다고 할 수 있지요!


단지 문맥 상의 조화를 위해 '밧줄' 설을 끝내 고집한다면, 예수님은 우스꽝스런 과장이나 유머 감각이 전혀 없으셔야 한다는 강압적인 의도도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다양한 말씀에서, 분명히 그분에게도 과장법도 유머 감각도 있으셨음을 우리는 느낍니다. 


다음을 보십시오.

    "눈먼 이끔이들, 그대들은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구나!" (마태 23:24)

사람이 낙타를 통째로 삼키다(!)니..이것은 과장법이 아니던가요? 또 은근히 신랄하고도 유머스럽지 않나요? 따라서 맨 처음 전술한 낙타-바늘 은유와 이 낙타 은유와는 거의 전혀 모순된다거나 불균형을 이루지 않습니다.


    주님의 원 의도


이제 끝으로..우리는 다시 한 번 위 말씀에서 예수님의 본디 의도를 짚을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선, 부자의 자기노력으로 천국 입국이 불가능함을 이 과장법으로써 극단적으로 표현하십니다. 좀 더 보편적으로..사람으로서는-사람의 행위로서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마 19:26A). 


따라서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뤄짐을 반증하고 계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으로서는 불가능도 가능해짐을 곁들여 강조하십니다(마 19:26b, 창 18:14 참조).


전자마술사들은 낙타를 '액화'해 바늘귀로 통과시키는 것을 보여 준다고 합니다. 저 유명한 동화/영화-'윌리 원카의 초컬  공장'은 통통한 말썽꾸러기 어린이를 전자 원심분리기 비슷한 기계에다 넣고 초컬  재료처럼 순식간에 '분해'시켰다가 재생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불필요한 우화적 기적보다는.. 

실제로, 예리코의 자캐우스(  19:1-10), 아리마테의 요 (마 27:57)과 같은 거부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음을 입증하셨습니다. 또 행전에 나타난 초기교회 시대에도 그런 부자들이 있었습니다(행 4:34, ).


하지만..젊은 관원/율법사/부자는 슬기에 있어 영생의 비결에 근접했고 예수님이 제자의 한 명으로 초청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넘치는 가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 주고 따르라는 한 마디에 낙담해 슬피 돌아갔습니다. 

즉..그는 그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간곡한 권고로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불가능한 '낙타'였던 셈입니다! 


고기잡이 배와 부친까지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던 일부 제자들과는 무척 대조적인 모습이지요. 

그 젊은 관원/재벌은 왜 영성을 얻는 데 실패했을까요? 


재물의 신 맘몬을 숭상한 탓이지요. 맘몬 신을 끝까지 놓치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보다는 맘몬 신을 선택한 것입니다. 역시 선택이 극히 중요해지는 대목입니다. 


주님이 이 점에 대해 참으로 적절한 경구를 주셨습니다.

    "아무라도 두 주인을 섬길 순 없소. 한 쪽을 미워하고 다른 한 쪽을 사랑하든지 한 쪽을 소중히 여기고 다른 한 쪽을 무시하게 되오. 그대들은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가 없소!" (마 6:24 참고:   16:13)


미련한 부자는 자신을 위해선 축재(蓄財)를 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는 풍요롭지 못한 사람이었지요(  12:21). 

 

성경은 거듭거듭 부자가 구원받기 어렵다는 말씀들을 합니다. 또 부자가 되려는 탐욕을 품지 말라고 합니다(팀A=딤전 6:9). 

그런 한편,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을 잘 섬기는 (졸부 아닌) 거부도 있었음을 밝혀 줍니다.


그럼 도대체 우리더러 어떡하라는 말일까요..?

우리는 먼저 가난이 모든 성도를 위한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라는 생각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 모두가 모자람과 결핍이 아닌 풍요를 누리길 바라시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영광 가운데 풍요를 따라 우리의 모든 것을 채우시는 야웨 이레-늘 마련해 주시고 예비해 주시는 위대한 공급자이십니다. 아브라함의 모든 복이 예수 크리스토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 모두가 거부가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 중 남달리 큰 재물을 일종의 은사로서 누릴 수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거듭나기도 했으려니와 맘의 폭도 넓어 복음을 위해 성도와 함께 늘 나눠 주길 즐기고 좋아 하는 사람들을 가리키지요. 드물지만 우리 주변에 그런 선한 부자들이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선 목적을 내세우면서 속으로는 지구촌 정복을 뀌하는 세상 비밀집단에 연계됐기에 자선가 생색이나 내고 나라의 면세혜택이나 누리고 이름과 '자선기금'을 내 놓는 거부 명사들을 의로운 크리스천 부호들과 혼동하면 안됩니다.  


그리고 베스트셀러나 '줄줄이 집회'로 졸지에 돈방석에 앉은 교계 명사들, 헌금을 받아 챙겨 수백만불 짜리 호화주택에 살면서 호화 자동차를 굴리는 텔리밴젤리스트들은 정말 천국에 갈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그렇게 사는 걸 알면서도 계속 헌금을 퍼 부어 주는 교인들도 문제고)!    


우리는 다  시대의 바르질래(슈무엘B=삼하 17:27-29, 19:31,32, 왕들B=왕하 2:7, 에즈라 2:61, 네헤미야 7:3) 같은 슬기로운 부자가 될지언정, 다 을 냉대한 (아비가일의 전남편) 나발(슘B 25:2, 5-13, 18-34), 어리석은 졸부의 비유(  12:16-21)처럼, 또는 맨날 잔치하면서 라자로에겐 찌꺼기나 먹이던 부자(  16:19-31)처럼 미련한 거부는 되지 말아야 합니다.

 

(출처: http://truthnlove.tistory.com/entry/낙타와-바늘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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