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선교적 본질

 

선교란 파송을 말합니다. 복음을 증거할 목적으로 모든 민족에게로 파송하는 것입니다.이 파송은 그리스도인들의 존재 근거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사명의 기초이기도합니다.


선교 속에서 교회는 일어나 제 길을 갈 수 있고 교회의 가장 깊은 본질이 요구하는 걸음을걸을 수 있다고 칼 바르트는 지적했습니다


이 파송은 세상의 필요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요, 종교심의 충동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위압적인 재촉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어느 선교학자는 밝혔습니다.


따라서 세상에 파송된 교회가 아니면 참 교회가 아니요 교회의 본질은 선교라는 그 말이 바로 정곡을 찌르고 있습니다. 이 교회의 선교적 본질을 가장 착실하게 나타내 주는 말씀이 베드로 전서 29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와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가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 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에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을 네 가지 이름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모두 옛날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이름들로서 이제는 기독교회가 이스라엘의 이름에 참여하여 참 이스라엘로서 하나님의 의도를 실천해 나가는 공동체가 되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제 이 네 가지 칭호를 선교적인 차원에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하신 표현은 이사야 4321절에서 차용한 말씀으로 하나님의 찬양을 위하여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온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역사를 선포하도록부름을 받았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로서의 특이한 위치와 사명과 특성을 지닐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찬양 받을 수 있도록 그분의 위대하심과 긍휼히 여기심과 살아 계심을 세상에 선포하도록 보냄을 받는데 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섬기는 교회로 인하여 세상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이름을 존경하게 되는 것이 곧 선교요 교회의 사명인 것입니다.

 

이어서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96절에서 제사장직의 중요성은 제사 드리는 직무보다는 모든 백성들의 생활을지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전달하는데 있었습니다. 따라서 제사장은 백성들 위에있고 제사장은 하나님 면전에서 백성들을 대신하여 서있는 것입니다.

 

세계에 대한 증거 사명의 관점에서 볼 때, 전체 기독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세상에 대한섬김의 책임을 맡고 있고, 교회가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이 곧 세상에 대한 봉사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제사장 적 봉사를 통해 하나님께 속할 때에 교회는 왕 같은이라는 형용을 받게 됩니다.이는 무엇보다도 이 백성들이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다는 뜻이요, 하나님의 왕 적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요, 이로 말미암아 왕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변화되어 갈 것이기 때문에 왕 같은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너희는 거룩한 나라요하셨습니다.

나라라는 단어는 이방인을 나타내는 민족이라는 뜻이며, “거룩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이구별하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만 쓰여지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거룩한 것과 불결한 것이 합하여서 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는 거룩하지 못한 이방인들이 그리스도께 나아감을 통하여 죄 씻음을 받고 이제는 불순종 의 아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에 들어섰음을 나타냅니다.

이 거룩이라는 표현에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성별된 예배 공동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있습니다. 거룩하게 된 이방민족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선민으로 구별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만방에 증거 하는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하셨습니다. 교회는 오로지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재하여 하나님 자신이 교회를 자신의 소유로 삼으셨습니다.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나니”(10:28.29). 희랍어 본문에는 하나님 자신의 적극적 개입이 강하게 표현되어 있어서 하나님의 소유된 자들을 주장하시며 보유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된 교회, 이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온 세상에 펼쳐나가는 하나님의 선교가 이 세상 끝날 까지 계속되어질 것입니다.

흑암 중에 처한 인간이 세상에 있는 한, 하나님과 하나님의 긍휼밖에 사는 사람이 있는 한,교회의 선교사명은 계속되어야 하며,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바로 자신이 이런 어두움과죄 속에 있다가 구속받았음을 기억해야할 것이요 이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역사와 능력과 긍휼을 선포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소명에 대한 확고한 의식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막론하고 한가지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우리가 존재합니다

예수를 전하기 위해서

주님은 우리의 생명을 거두어 가시지 않고

오늘  자리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단기선교를 위한 5가지 비타민

 

1. “마음가짐이라는 비타민을 먹어야 한다.

단기선교 성공 여부의 50%이상은 개개인의 마음가짐에 달려있다. 가서 일부러 고생할 각오를 하라. 놀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말고 가라. 쉴 생각은 아예 집에 묶어두고 가라. 평소 건강에 문제가 없다면 뼈가 부서지도록 일할 각오를 하고 가라. 그리고 자기 것을 챙기기 전에남의 것을 먼저 챙겨주는 결심을 하고 가는 것이 좋다. 그러면 많이 배운다.

 

2. “팀웍(Team work)이 제일이라는 비타민을 챙겨라.

단기선교는 결코 개인 사역이 아니다. 각 개인의 재능이 드러나는 사역이 있을 수 있으나궁극적으로는 팀이 움직이는 것이다. 팀 리더의 결정에 절대 순복하라. 자기 사역이나 자기주장을 하기보다는 팀의 연합과 일치에 초점을 맞추라. 사공이 많아 배가 산으로 가는 것보, 다투고 길을 돌아가는 것보다, 자기를 없애고 섬기는 것이 빠른 길이다. 사탄은 전도여행팀이 구성된 즉시 팀의 동료나 리더의 단점이 보이는 최고급 안경을 여러분에게 선물할것이다. 절대로 쓰지 말고 단호하게 사탄에게 반납하라.

그리고 팀웍을 효과적으로 하려면 역할 분담을 잘 나누어야 한다. 서로의 역할이 혼돈스럽지 않게 하고 자기의 역할에 최선을 다해 집중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그리고 모든 멤버들이 역할을 하나 이상씩 다 맡도록 분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역할에소외된 자가 없게 하라.

 

3. “타문화 적응이라는 비타민을 꼭 먹어라.

대부분의 태국인들은 머리에 손을 대는 것을 싫어한다. 태국으로 가는 사람들을 아이들이예쁘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네팔이나 힌두권지역의 많은 종족들아니오라는 대답을 할 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우리의 문화와는 사뭇 다르다.그들은 동의할 때 고개를 가로 젓는다. 그리고 반대할 때 고개를 끄덕인다. 이것을 몰라 고생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지역의 문화를 미리 충분히 숙지하고 가는 것이 선교여행을 망치지 않는 지름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4.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비타민은 중보기도.

단기선교는 사역이다. 그러나 사역이 기도보다, 예배보다 앞서지 않도록 하라. 하나님이 항상 앞서시도록 자리를 만들어 드려라. 필자는 단기선교여행의 많은 경험으로 이 비타민을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것을 절실히 체험했다. 가기 전 적어도 두 달 전부터 선교여행을 위한 릴레이 금식기도를 팀에서 시작하라. 가서도 중보기도와 매일의 팀 예배를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기도로 주님에게 세 가지를 들어라. 첫째는 하나님, 이번 여행으로내게 말씀하시려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둘째는 하나님, 이번 여행으로 이 사역 팀에게 말씀하려고 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지막으로 하나님, 이번 일로 선교지에서 어떤일을 하려고 하십니까?”이다.

 

5. 마지막 비타민은 동원자료 작성이다.

선교여행은 여행만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 다녀온 감격을 자기만 가지고 있어서도 안 된다.여러 가지 비싼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하나님이 이번 여행을 보내신 이유는 가지 못한 남은 자를 깨우기 위해서이다. 교회에 돌아와서 아직 이런 경험이 없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보이는 자료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팀에는 반드시 카메라맨, 촬영 담당자, 역 일지 기록자 등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여행 자료를 다녀온 후 한달 이내로 만들어라.

간단해도 좋다. 조금은 서툴러도 좋다. 오히려 그것이 보는 사람들에게 더 큰 은혜로 다가갈 수 있다. 그래서 교회와 공동체의 잠자는 자들을 깨워라.

 

복음으로 열방을 축복하라.       -신용환목사-        

[19:5-6]

(19:5)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19:6)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한국을 관통하는 중요한 강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강이 바로 한강과 낙동강입니다. 그런데 한강이나 낙동강도 처음 시작이 있습니다. 한강의 발원지는 강원도 태백시 창죽동에 있는지 [ 검룡소 ]라는 곳입니다. 514킬로미터. 1500만명에 이르는 사람의 생명줄을 이어주는 소중한 샘근원입니다.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에 가면 하루섭시 9도의 지하수가 2천여톤 가량 샘솟습니다. 솟아른 물은 12개의 하천과 북한강등 2개의 강,38개의 크고 작은 도시를 지나 서해로 흘러 들어갑니다. 바로 검룡소가 한강의 물근원입니다





한국의 낙동강도 물근원이 있습니다. 오래전에 강원도 태백에 예수원을 지나가다가 버스 터미널옆에 있는 [ 황지연 ]이라는 연못을 가보았는데 그곳에 표지석에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낙동강 천삼백리 예서부터 시작되다 하루 5천톤의 물이 솟아나와 태백에서 부산까지 525킬로미터 1300만 사람들의 생명줄을 이어주는 물근원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바로 세상 가운데 바로 이런 검룡소와 황지연과 같은 축복의 물근원이 되어야합니다. 교회는 세상을 축복하고 세상에 생명을 전하고 세상을 복음으로 이어주는 역할을 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속에서 검룡소와 같은 그리고 황지연과 같은 축복의 샘 근원, 물근원이 되길 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4가지 관계속에서 그 정체성이 드러나야 합니다.

1) 하나님의 관계속에서

2) 자신과의 관계속에서

3) 이웃과의 관계속에서

4) 세상과의 관계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고 할 때 그 형상은 바로 이 네 개의 관계성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네 개의 영역에서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 때 하나님은 영광을 거두십니다.

 

이러한 4개의 관계속에서는 우리가 해야 할 4가지의 삶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의 관계속에서 온 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해야합니다.

2) 자신과의 관계속에서 하나님을 더 많이 닮아가야 합니다.

3) 이웃과의 관계속에서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가야합니다.

4) 세상과의 관계속에서 복음으로 세상을 축복해야합니다.

 

뉴질랜드에 가면 [ 키위새 ] 가 있습니다. 이 키위새는 날개는 있지만 날지 못하는 새입니다. 마치 생김새도 키위를 닮았다고 해서 키위새입니다. 이 새는 원래는 잘 나는 새였습니다. 그런데 뉴질랜드에 과일과 열매, 벌레들이 너무 많으니까? 구지 날지 않아도 먹이를 구할 수 있으니까? 이 새는 날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새는 날개가 퇴화되었고 날지 못하는 새가 되었습니다. 또 이새의 특징은 비옥한 토양에서 벌레를 잡아 먹다보니 새의 가장 중요한 두 특징인 날개와 눈이 다 퇴화되고 부리와 다리가 발달되고 말았습니다. 키위새는 무늬만 새고 모양만 새이지, 땅만 후비며 사는 새입니다. 새의 정체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새의 매력도 능력도 잃어 버린 불쌍한 새입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이 바로 이런 키위새와 같은 모습으로 전락할 위험에 처해있습니다. 바로 복음을 통해서 축복된 삶을 살고 있고 예배의 은혜를 경험하고 살지만 정작 교회 본연의 임무를 잊어버리고 있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잊어버리고 상실한 채 그냥 현실에 축복받고 그 축복을 누리는 것에만 안주한 삶을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5:13)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바로 [ 함량 미달의 소금 ] 이 되는 것입니다

햠량 미달의 소금은 그냥 쓸모없이 밟힐 뿐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이 마태복음 513절에 나오는 소금의 비유를 말하실 때 소금의 본연의 짠맛을 내지 못하는 소금이 어떻게 되는지?를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소금은 주로 사해 근처에 암염에서 생산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암염중에서 소금과 색깔이 비슷한 석회가 많이 함유된 품질 미달의 소금들이 이었습니다. 그 소금은 식용으로 쓸수 없고 도로 포장이나 건물의 지붕을 딱딱하게 만들기 위해 흙과 섞어서 사용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소금 섞인 흙을 바른 뒤 그것을 발로 밟아 단단하게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문제는 그 본연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 

그리고 잊어 버린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세상이 영적으로 갈급함과 목마름이 없는 이유는 교회가 세상을 향해

목마름을 일으키는 소금이 되기 못하기 때문이다. ” -토미테니 -

 

런던 바이블 칼리지의 학장이면서 

선교적인 열정을 가진 마이클 그리피스는


그리스도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집단적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는 듯하다. 상당수의 '교인'들은 교회가 무엇인지를 잊어버렸다. 매 주일마다 그들은 독특한 건물에서 거행되는 예배에 참석하며 예로부터 지켜 오던 익숙한 예배 의식을 행하지만, 그들이 무슨 목적으로 그것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부르고 있지만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잿더미 속에서 누더기를 걸치고 있는 꼴불견의 신데렐라처럼 보인다. 신데렐라는 장차 자신이 아름다운 신부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했다! 교회는 저 하늘나라에 있는 특급 숙소를 기다리는 동안 지루하게 시간만 낭비하는 삼등 대합실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영원한 의미를 갖고 있는 역동적이면서도 매력적인 새로운 공동체가 되어야한다. “


교회의 사명은 바로 세상을 섬기고 세상을 향해 복음을 들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이미지가 좋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심지어 기독교를 [ 개독교 ] 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불리우는 데는 2가지이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미워하는 강팍한 마음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일 3:13)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가면 갈수록 교회는 더 힘들어질 것입니다. 세상이 교회를 가만히 놓아 두지 않을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 믿는 이들의 태도와 관련된 부분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의 비윤리적, 비상식적, 비합리적, 비인격적인 태도 때문에 받는 비판이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바뀌어 줄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교회를 부정적으로 바라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할 것은 우리를 향한 세상의 기대가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가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기대와 하나님의 기대를 채울 수 있는 사람이 되어합니다.

 

[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이 말씀은 모세가 애굽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로 나와서 시내광야에서 시내산에서 받은 하나님의 언약인 동시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대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바로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안에 있음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선교란 모든 민족에게 만유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민족인 참 주인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자들이 되도록하는 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선교를 왜 해야 하는가? 에 대한 가장 간단하면서도 명백한 대답은 예배가 없는 곳에 예배가 있게 하기 위해서 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선교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은 십자가에 관심이 없는 것이다. ” 라고 존파이퍼 목사는 말했습니다.


매년 여름 마다 단기 선교여행 을 떠나는 이유도 바로 예배가 없는 곳에서 예배하는 경험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깊은 선교에 관심을 갖게 만들고 열방을 바라보는 안목을 길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 세계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의 삶이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 한분만을 예배하는 제사장 나라가 무엇인지? 그리고 거룩한 백성으로의 삶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벧전 2:9)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바로 우리가 해야할 일은 택한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선포하는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됨을 선포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통해서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결과 그 땅과 열방과 민족가운데 참된 축복을 경험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세상을 복음으로 축복해야 하는 사명있습니다.

 

1.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열방을 축복하라.

마치 돌아오는 탕자를 문 앞에서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모든 이해심의 총화요 사랑의 정수입니다 세상을 복음으로 축복하기 위해서 우리가 가져야하는 마음은 [ 아버지의 마음 ]입니다.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과 그리스도에 대한 열정은 하나다

만일 죽어가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그리스도를 높이려는

열정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세계선교에 관심을 가져합니다 ” - 존파이퍼 -

 

마치 아버지를 떠나 탕자처럼 우리는 하나님과 멀어져있고 하나님과 단절되어있는 열방을 바라보는 눈이 있어야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선교적인 삶을 살고 선교적인 사명을 실천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가져야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2. 이웃사랑의 마음으로 열방을 축복하라.

초대교회의 지도자 터툴리안의 글을 보면 초대교인들은 불신자들을 전도할 때 이런 질문으로 말을 했다고 합니다


당신들은 그리스도인들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을 본 일이 있습니까? ”


인도의 복음전도자인 선다이 싱은 마하트마 간디에게 어떻게 하면 기독교가 인도를 정복할수 있을까요 ?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간디는 당신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처럼 살아야합니다. 당신은 무엇보다 사랑을 강조해야합니다. 사랑이야말로 기독교의 핵심이자 생명이 아닙니까 ?”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우리의 위대한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다 강도만난 이웃을 돕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어두움가운데 마귀의 묶임 가운데 있는 우리의 모든 이웃은 바로 강도만난 사람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사람을 바라 볼 때 우리가 가져야 하는 태도는 바로 강도만난 이웃과 같이 대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나아가는 선교지역의 사람들은 강도만난 이웃입니다. 그들에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나아가야합니다. 이웃사람의 마음으로 열방을 축복해야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샬롬의 축복을 빌어야합니다.


[10:12-13]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먹기만 하고 배출하지 않으면 영양이 쌓여 비만에 이르고 몸은 오히려 심각한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전도와 선교 없이 우리는 건강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랄 수 없습니다.

 

3.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열방을 축복하라.

사도바울은 전 세계에 복음이 필요한 모든 영혼들을 향해 복음을 전하겠다는 끊임없는 열망과 비젼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19:21)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사도행전을 살펴보면 사도바울은 예수의 복음과 부활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안목이 바뀌어야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합니다. 우리가 선교하는 것은 그리고 선교지로 가야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직접선교지를 방문함으로 물질의 후원으로, 중보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어릴때 아이들이 하는 놀이 중에 [ 땅따먹기 ]라는 놀이가 있습니다. 각각의 큰원을 그려놓고 돌맹이로 다른 사람의 원안의 땅을 따먹는 것입니다. 돌맹이를 팅겨서 3번만에 다시 자기 원으로 돌아오면 그만큼은 내 땅이 되는 것입니다.


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는 자신의 돌맹이로 삼으셔서 사탄이 주도하는 열방을 다시금 하나님을 예배하는 땅으로 되찾아 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용하기 좋은 돌맹이들이 되는 것입니다.


교 운동의 최고봉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갈망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의 나라, 곧 그리스도의 나라 즉..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나라와 그 왕국의 영광을 생각하는 것이다.

 [ 열방을 향해 가라 - 존파이퍼 - ]


사도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마치면서 예루살렘을 돌아가면 결박당할것을 예상했습니다. 그는 많은 성도들에게 그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20:24)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세상나라에서 하나님 나라로 초첨을 옮겨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올라가시기전에 제자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1:6)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제자들은 세상 나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나라가 아니라 영적인 나라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맞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7-8]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제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의 나라에게 더 큰 관심이 있어야합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사명은 바로 선교적인 사명입니다. 세계와 열방을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이웃사랑의 마음으로 다가가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온전해지고 완성되는 것을 꿈꾸면 우리는 살아가야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져야할 자세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맛보는 선교와 교회

 

1. 하나님 나라란 무엇인가? 

 이세상은 좋기도 한 반면 두려움과 여려움의 장소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질문들을 던집니다. 왜 이런 나쁜 일들은 끊임없이 일어나는가? 이러한 인간사는 끊임없이 계속되기만 하는 것인가? 이 세상에 종말은 있는 것인가? 있다면 그 양상은 어떠할까? 사람들은 오늘날 자신이 누구이며 왜 살아야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질문들과 아울러 인간 역사의 의미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합니다. 인류의 종착역은 있는 것인가? 우리는 그저 시간이라는 무대에선 꼭두각시들처럼 극장이 문 닫는 마지막 날까지 의미없이 자신의 역할만을 담당하다 사라질 뿐인가? 여러분은 오늘 세상속에 존재하는 삶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 예수님의 첫 선포인 하나님 나라

예수님은 자신을 첫 선포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4:17)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이 천국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분의 삼년 공생애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인간들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분이 선포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는 그분의 축사와 치유의 사역을 통해 입증되었습니다. 그분의 치유와 축사 사역은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에게 이미 임했다는 것을 증거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비유는 예수님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삼년간 많은 비유들을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셨는데 그 비유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비유들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관한 다음과 같은 말씀도 하셨습니다.

 

(6: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것은 주님이 가르쳐주신 중요한 기도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밤에 자신이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장차 누릴 하나님 나라에서의 친밀한 교제애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22:28-30]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또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영광 가운데 이 땅에 재림하셔서 예비된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25:31-34)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2)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실체이며 경험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현재 각자가 경험할 수 있는 영적 실체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의와 평강과 희락은 성령의 열매이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을 성령의 지배하에 놓은 사람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를 살펴보면 하나님 나라는 현재성이 있어서 현재 세상에 역사하는 나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마치 작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고 말하실 때에 가루 서말을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다고 말씀하실 때 현재형 동사를 쓰셨습니다.

 

(18: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포함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이 실제로 들어갈 수 있는 현재적 이면서 또한 나중에 들어 갈수 있는 미래적 영역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현재적 실체이면서 또한 미래적 축복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다시 태어난 자들만 경험할 수 있는 영적인 내적 축복이면서 또한 이 세상 나라의 통치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믿는 자에게 상속되는 미래적 축복의 나라이면서 또한 현재에 믿는 자들이 누릴 수 있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다양성과 풍요로움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대해 명쾌한 해석을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4)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이 시행되는 모든 영역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라 쓰일때는 < 하나님의 통치, 다스림, 주권, 지배 >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더 먼저 하나님의 나라는 왕이 다스리는 주권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분의 왕되심이요, 통치요, 권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 다음 6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1) 하나님 나라는 통치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율법보다 은혜의 나라입니다.

 

(2) 하나님 나라는 현재들어감으로 축복을 받을수 있는 영역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탄의 나라와 적대적입니다.

 

(3)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재림후에 들어갈수 있는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영역입니다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 역사속에 결정적으로 침투한 것입니다하나님 나라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과 가르침 속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4) 하나님 나라는 지금여기에 있습니다. (now&here)

그리고 장차 거기에 있습니다.(future&there)

 

(5)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성령의 신비로운 사역을 통해서 올뿐만 아니라인간의 믿음과 순종을 통해서도 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회개와 믿음, 순종이 요구됩니다.

 

(6)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지만,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가 되라는 부르심을 받습니다.

 

2.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맛보는 선교

     선교의 사명(mission) & 동기(motive)

 

우리는 이 하나님 나라를 맛보며 살아야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가장큰 위로이며 힘입니다.


(6: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마가복음 426-19절에 기록된 비밀리에 자라는 씨의 비유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는 씨는 한알에 다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4:26-29]

(4:26)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4:27)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4: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4: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작은 씨 안에 생명에 필요한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농부가 하는 일은 그전 밭에 씨를 심는 일뿐입니다. 농부가 생명의 씨에 싹이 나게 하고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힘은 씨 안에 다 들어 있고 스스로 열매 맺을 힘까지 다 들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는 기적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작업입니다. 초자연적인 역사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세울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 하나님께서 세우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하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그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하나님이 하십니다. 추수전에 이 세상의 마지막 심판이 있기 전에 이 땅에 이미 하나님 나라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들 가운데 임하기 시작하였으며 이 나라를 심령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 땅에서 이미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되 겸손하게 오셨으며 갈릴리 출신의 목수로 사시다가 팔레스타인 지방에 복음을 전하시며 다니셨는데, 이때 귀신들린 사람들이 자유케 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갈릴리 지역의 각촌을 돌아다니면서 같은 사역을 행하였습니다. 오늘날도 그분의 제자들이 전 세계로 나가서 같은 복음을 전하고 같은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 조용히 왔으며 조용히 역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늘에서 불과 번개를 대동하고 소리 내면서 큰 권능과 영광 가운데 임하는 것이 아니고 소리 없이 조용히 그리고 작게 이 천년 전에 임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거부당해도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 내면의 삶을 변화시켜 영적인 삶, 축복된 삶을 가져다 줍니다. 이것이 바로 씨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씨가 자라듯 영적인 생명이 우리 마음속에서 자랍니다. 그리하여 마지막 날 각자의 심령 속에 임하였던 동일한 하나님 나라가 이번에는 사람의 심령 속에서가 아니라 전 세계에 능력과 영광으로 악과 죄를 일시에 쓸어 내면서 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3:3-5]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3: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통치입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와 사탄과 죽음의 정복을 뜻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분의 나라는 영광과 권능으로 이땅에 임할 것입니다


그러난 하나님 나라는 비록 영광스런 모습으로는 아닐지라도 이미 인간의 역사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미래적 사건이 현재라는 시간 안에 침투하였다는 말입니다. 미래에 영광과 권능으로 도래할 하나님 나라는 인간들의 심령 속에 은밀하고 조용하게 이미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의 삶을 이 세상에서 즐길 수 있습니다. 내일의 축복이 오늘의 축복이 되었습니다. 내일의 삶이 지금 여기서 누릴 수 있습니다. 천국이 이땅에 이미 도래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것은 무엇입니까? 단 한가지입니다. 회개하십시오, 돌아서십시오, 그리고 복음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분의 통치에 나 자신을 포기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가 요구하는 바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를 통하여 오늘날 전 세계에 확장되고 있습니다. 심령 속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진 사람들에 의해 교회가 세워지며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인 사람 자체가 또한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수행하였기에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수행하기로 헌신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여서 교제하는 곳입니다.

 

(8:12)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28:23)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28:31)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하나님이 하신일과 앞으로 하실 일을 선포합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대적들을 이미 멸하셨음을 선포합니다. 복음은 또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하여 대적들을 영원히 멸하실 것을 선포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이 복음은 바로 인류에게 빛을 주는 희망의 복음입니다. 바로 이러한 복음이 세상 끝까지 전해져야 끝이 오는 것입니다. 세상에 전해져야 할 메시지가 바로 이러한 복음인 것입니다.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21: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교회의 사명은 사람들을 어두운 곳에서 불러내어 하나님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즉 교회의 사명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 들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인류구속의 거대한 계획이 지금도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어김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고 나서 재림하시기까지의 기간 동안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어야합니다. 이 목적을 향해 인간 역사가 흐르고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인류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인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지는 일이 교회를 통하여 계속되고 있습니다.


(1)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를 최종 승리를 확신하면서 살고 일해야 한다.

 

(2) 교회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경계선이 지워졌음을 알아야 한다.

 

(3)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교회의 일보다 더 광범위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4) 정의와 복음 전도에 대한 관심은 필연적으로 함께 묶여 있다.

 

(5)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란 우리가 지금 이곳에서 성령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첫 열매를 경험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선교의 임무를 믿는 자들에게 맡기셨고 믿는 자들인 우리가 수행하지 않으면 선교에 관한 아무 일도 선교도 일어나지 않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사실이 우리를 흥분케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의 현실을 볼 때 이러한 이 흥분이 식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우리 자신이 선교의 사명을 담당하는 교회의 자체들이 된것에 대해 기쁘게 여기며 자랑스럽게 여겨야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만든 그 어떤 조직도 감당할수 없는 사명을 하나님께서는 교회에게 맡기셨습니다. 교회의 지체된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에 수행할수 있는 삶을 살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감격해야합니다. 인류 구속의 대업이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에 흥분해야합니다.

 

 

 

 


< 교회와 선교 >                           신용환목사

선교적 교회에 대한 고민 .

 


기독교 신앙의 가장 가치 있는 진수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바로 십자가 복음 일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존재하는 정체성이기도 하다. 복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교회의 존재를 이해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다.


수직적인 신앙 고백은 수평적인 관계들을 형성하는 기초가 된다. 수평적인 관계를 만들어감에 있어서 중요한 매개와 촉매는 바로 십자가와 복음이어야 한다.


오늘날 교회와 세상에서 가장 필요하고 가장 가치 있는 신앙의 핵심인 이 복음을 어떻게 교회 공동체 안에 담을 수 있는가? 그리고 그 복음의 가치가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시키고 구비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교회 공동체가 안고 있는 중요한 고민이다.  


이 복음은‘기쁜 소식’이라는 제한적 이해와 의미부여에서 벗어나서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전달받은 진정한 복음을 이해하고 그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김세윤 박사가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 복음에 대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한 복음의 내용과 사도들이 예수를 통해서 전수받은 복음에 대한 성경적이고 포괄적인 이해가 필요하다.[1]


우리가 복음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정확하게 아는 것은 우리가 믿는 근본과 핵심을 아는 작업이다. 우리는 주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고 그분의 신적인 삶에 참여한 그 순간부터 복음을 알게 되었고,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느끼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가 복음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갖는 것은 지금 우리가 어떤 존재이며 사랑 속에 있는지를 이해하는 신앙의 정체성과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과 어떤 방식으로 소통하며 접근해야 하는지? 세상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복음에 합당하게 구비되어야 하는지? 자각하게 해준다.


폴 스티븐스 교수가 말하고 있는 생활 속의 영성들의 예들처럼 우리가 힘들여 노동을 할 때나 그 노동의 의미를 발견하고 그 노동의 가치를 극대화 시키기 위해서는 복음에 대한 더 분명하하고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2]


가정, 이성, 형제, 이웃 관계에서나 홀로 있을 때나 언제든지 우리 삶의 중요한 촉매제는 바로 복음이어야 한다. 복음이라는 보배로운 황금물이 사람이라는 질그릇의 갈리진 틈을 따라 흘러내리는 것이다(고후4:17).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은 연약함(하나님의 강하심을 아는 연약함)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강하심이 교차하는 곳에서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사역을 하는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3]


사도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을 옥중에서 구비시키기 위해서 쓴 빌립보서를 보면 그의 강조점은 바로 한가지였다. 빌립보서 1 26절에서 17절을 보면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라고 말하면서 복음을 생활(행동. Conduct)이라는 단어와 연결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삶은 복음으로 잘 구비된 존재이며 그것에 걸 맞는 행동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contending as one man for the faith of the gospel)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주어진 복음이 우리의 삶에 믿음의 원동력으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언급해주시고 있다.


우리는 복음의 동기가 모든 교회사역과 삶의 원동력이 되도록 하는 것에 집중해야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다양한 문화, 인종, 언어, 생활습관을 갖고 있는 열방이라는 자리에서 복음에 분명한 외침(Proclamation)과 축복(Blessing)이 바로 선교적인 도구와 방식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필자의 교회는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공동체를 지향하고 총체적 선교(Holistic Mission)에 합당한 평신도 사역자를 구비시키고자 한다소위의 헌신된 사람들의 전유물로 전락한 선교가 아닌 삶의 소박한 자리에서 위대한 꿈을 이루는, 삶의 작은 자리에서 열방의 큰 유업으로 이어지는 그런 교회공동체와 평신도들로 구비시키는 그림을 갖고 있다.


교회공동체는 선교적인 사명과 부르심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선교의 근원과 출발점은 하나님이시다. , 선교란 사람의 능력이나 교회의 형편과 무관하게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개념이다. 선교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근거한다. 하나님의 속성(attribute)상 그분은 필연적으로‘선교의 하나님’(Missionary God)이시다. 그래서 선교는 하나님을 하나님 되시게 하는 일이다. 선교 역시 처음 언급한 예배의 목적과 동일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광과 연관된 개념이다. [4]


 모든 평신도 사역자들은 복음에 대한 반응인 구원의 감격과 누림 속에 있다. 구원의 궁극적 의미는 사람들이 무엇으로부터(from what)구원받았는지 보다 무엇을 위해(for what 목적)구원받았는지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구원받았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43:21). 찬송 의 의미 속에는 예전적인 활동을 통한 영광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삶에서 울려 퍼지도록 하는 영광과도 관련이 있다.


오늘날 흔히 선교를 예배라고 말하고, 때로는 하나님의 영광이 선교의 최우선동기라고들 말한다. 따라서 선교는 예배행위,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존귀하게 하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선교가 예배인 까닭은 정확히 말해서 선교가 바로 하나님이 자신을 벗어나서 하는 일이요 삶이요 사랑이기 때문이다. 선교가 예배인 이유는 하나님이 자신을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선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일인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마음과 교회 전체를 움직이는 긍극적인 선교 구비자는 하나님이시다. 교회 리더십을 맡은 우리의 역할은 하나님께서 하고 계시는 일을 분별하고 그분의 공동 구비자가 되는 것이다.[5]

선교의 하나님이 선교적 계시를 하시고, 교회를 그 도구로 부르신다. 교회(Ekklesia)는 ‘소명’이란 의미로, 하나님의 선교적 목적을 위해 부름 받은 공동체이다.[6]


교회의 선교는 삼위 하나님의 선교(Trinitarian mission)에 근거하고 거기서 파생된다.[7]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0:21)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을 보내시고, 성부와 성자 하나님께서 성령 하나님을 보내시면서 교회를 보내신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르시고 신적인 일에 참여시키시는 사실에 교회의 영광이 있다. 선교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완성이다. 따라서 선교는 교회의 행위(activity)라기보다 교회의 정체성(identity)에 해당하는 본질적 개념이다. 하나님의 교회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는 형용사는‘선교적’(missional)이란 단어이다.


 오늘 교회는 우리의 신앙의 도약과 성숙을 위한 중요한 촉매제와 같은 복음 으로 모든 성도들이 머물고 있는 열방이라는 삶의 현장 속에서 살아가도록 구비시키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제자양육을 통해 그 복음의 가치를 더 풍성케 하며 열방 속에 선교라는 방식으로 축복하는 사역을 하도록 구비시킬 것이다교회 안에서 잘 구비된 사람들은 교회 밖의 사람들 중에서 특히 가난한 사람들, 낯선 사람들[8]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보여야 한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요구하신 것처럼 교회안과 밖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갖고 계신다. 성경이 있는 그리스도인이나 성경이 없는 이교도에게나 똑 같은 관심을 기울이신다. 요나의 실수는 자신의 의로움, 자신의 신학이론, 자신의 사역,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서 살았다. 그러나 그는 금방 이런 모든 소유물을 빼앗겼다. 성경에서 필요가 곧 소명을 불러 일으키는 것 은 아니라는 원칙을 요나서 만큼 뚜렷하게 보여주는 책은 없다. 선교의 원천은 세상의 필요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며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긍휼이다.


잘 구비된 평신도는 보내어지는 일 사역에 익숙해야 한다. 그 보내어지는 사역을 우리는 선교라고 말한다. 교회공동체는 잘 구비된 평신도 사역자들을 그냥 교회에 유익한 구성원으로 불러모으는 사역을 해서는 안된다. 교회공동체는 잘 구비된 평신도 사역자들을 세상과 열방이라는 현상으로 흘려 보내는 물 근원의 역할 해야 한다. 하나님의 선교는 부르심과 보내심이라는 두 가지 주요한 작업이 진행되는 과정이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는 복음으로 열방에 있는 교회를 불러 모아야 하지만 동시에 그들을 잘 구비시켜 세상 속으로 보내야 한다.


 선교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과 회중을 모으는 일에 헌신하는 것일 뿐 아니라 구속된 전체 창조세계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확립할 목적으로 하나님의 선교(mission Dei)안에서 성자의 보내심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참여하는 선교운동의 근원은 삼위하나님 자체에 있다.[9] 따라서 선교는 창조세계, 보살핌, 구속, 최종적 완성과 관련된, 하나님으로부터 세계로의 움직임으로 간주된다. 그것은 그분이 보냄 받은 상태에서 세상 가운데서 행하시는 모든 것이다. 성부가 성자를, 그리고 성부와 성자가 성령을 보내실 뿐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이 교회를 세상 속으로 보내신다. 선교는 시종일관 하나님의 보내심인 것이다.


 선교는 하나님의 백성가운데 선교에 관심 있는 자들의 간헐적으로 하는 그런 활동이 아니다. 교회가 선교를 하나의 사역으로 보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자체가 선교다

 

 옛 언약과 새 언약 하에서 선교는 하나님의 백성 전체가 깊이 관여하도록 의도된 과업이지, 다만 선택된 소수의 대표자나 지명된 선교사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간단히 말해서 평범한 그리스도인이 모두 선교사인 것이다. 그리고 그 선교는 사회의 직장과 개인적인 삶의 영역(가정), 교회 내의 공동체 생활에서 이루어진다.


 교회공동체가 선교를 감당할 때 선교를 구비시키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교를 구비시킨다. 우리에게 비전과 은사를 주시고,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능력을 부여하며 동기를 유발시키고 앞으로 인도하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교를 위해 구비시키는 것에 중요한 예를 마태복음 10장에 나타나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구비시켜 파송하는 장면에서 알 수 있다.  마태복음 10 1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부르사 의 원 뜻은 '당신의 목적하신 바를 위해 소집하였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선교적인 구비시킴에 첫 번째 과정이다.


이 부르심이 우리로 하여금 선교적인 삶을 살도록 구비시키는 출발점이다. 그 다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 권능 을 구비시킨다. 여기서 먼저 '권능'이란 '권세와 능력()' 또는 '권위와 통치권'이라는 의미로서 본문에서 특별히 정복자들로서의 능력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지혜로우신 필요에 따라 천국 일꾼을 부르실 뿐 아니라 그들에게 그 일에 합당한 권위와 힘을 부여하신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부여한 권능의 부여가 바로 구비시킴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요한 관점은 제자들을 파송하시는 예수님의 의도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권능을 부여하신 것은 예수님처럼 같은 권능을 사용하라는 강력한 도전이었다. 마치 예수님께서 성부의 보내심을 받아 파송된 것처럼 예수님도 제자들을 구비시켜 파송 코자 하셨다


이 모델은 예수님께서 가지신 성육신적 선교모델과 같은 형태이다. 예수님의 선교사역은 전도와 사회정의라는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성육신적인 선교에 참여하는 참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라는 두가지 여정이 남아있다. 전도와 사회정의는 한가위에 달린 두 날개와 같다. 다른 비유로 바꾸어 본다면, 전도는 선교의 중심인 반면, 사회정의는 선교의 환경이다. 전도와 사회정의는 서로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선교적 교회는 예수님의 성육신적 선교모델과 제자들을 구비시켜서 파송하는 모델을 갖고 복음전도와 사회정의의 선교적 두 날개를 실현하고자 한다. 필자의 교회는 이러한 선교적 교회의 그림을 갖고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총체적인 선교에 동참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비시키고자 한다.



[1] 김세윤 『복음이란 무엇인가? (서울:두란노, 2003)

오늘날의 교회도 신약 성경의 모범을 따라 복음을 다양하게 그리고 포괄적으로 선포하여야 한다. 복음을 다양하게 선포하는 것은 교회가 처한 시대와 장소의 구체적 적합성을 잘 나타낼 수 있다. 복음을 포괄적으로 선포하는 것은 균형 있고 건전한 신앙생활을 유발시키는 것이다.

 

[2] 노동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사랑하고 섬기는 하나의 배경이 된다. 노동은 결코 영적인 생활의 기분전환이 아니며, 창조 가능성과 정화의 힘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께 직접 인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노동의 참 의미이다. 폴스티븐스, 『 현대인을 위한 생활영성 』, 박영민역 (서울:IVP, 1996), p.28.


[3] 폴스티븐스, 『 현대인을 위한 생활영성 』, 박영민역 (서울:IVP, 1996), p.176.


[4] 정민영, 『글로칼선교컨퍼런스2011강의안』 (올랜도:위클리프, 2011), p.18.


[5] 폴스티븐스, 21세기를 위한 평신도 신학 』 홍병룡역 (서울:IVP, 2001). P.252


[6] 핸드릭 크레이머는 선구적인 저서 평신도신학에서 에클레시아의 모든 교인은 원칙적으로 또같은 부르심을 받은 자들 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또한 거룩함으로(살전4:7), 자유로(5:13), 소망으로(1:18;4:4), 화해의 사역으로(고후5:18-19), 그분의 목적을 따라(8:28) 부름을 받았다. 폴스티븐스, 『 하나님의 사업을 꿈꾸는 CEO 』 홍병룡역 (서울:IVP, 2009), p.40


[7] 선교는 하나님이 스스로를 타자화하는(othering)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이른바 mission dei, 즉 하나님의 선교이다. 선교는 하나님과 함께 시작된다. 폴스티븐스, 『 하나님의 사업을 꿈꾸는 CEO 』 홍병룡역 (서울:IVP, 2009), p.116.

[8] 폴스티븐스, 『 현대인을 위한 생활영성 』, 박영민역 (서울:IVP, 1996), pp190

[9] N, Goodall, 『 하나님의 선교: 선교신학입문 』,  (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 1996), p.189





낙관론자의 생각, 비관론자의 생각



낙관론자들은 불쾌한 일을 경험하면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불쾌한 일은

1. 지나간다.
2. 인생의 일부분에만 관계된다.
3. 그냥 운이 없었던 것뿐이다.

유쾌한 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유쾌한 일은 1. 유지되거나 다시 찾아온다.
2.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3. 자신의 능력에 달려있다.


반면, 비관론자들은 불쾌한 일은 
1. 지속된다.
2. 인생 전반을 쥐고 흔든다.
3. 자신의 잘못 때문에 발생한다고 생각하고,

유쾌한 일은 
1. 지나간다.
2. 제한되어있다.
3. 순전히 운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과연 어느 쪽일까요

- 마틴 셀리그만





너의 삶의 좋은 것을 근거로 지나치게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안된다. 


내가 빨간신호등에 건너지 않는 것을 근거로.. 
다른 사람들이 빨간 신호등을 건너는 것을 판단하는 것은 안된다.

누군가의 틀린 모습을 보고 판단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판단의 함정에 빠진다.


자신의 연약함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은혜을 잊지 말아라. 


자신의 삶에 연약함이 큰것 같나요? 
하나님이 그 연약함을 다루시는 손길이 큰 가요?


어려운 시간을 지나고 나면.. 
내안에 다루어진것이 있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다루시는 이유이다.

김길목사 / 요셉의 삶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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