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퍼스펙티브스의 구약적관점

 


. 하나님의 마음(요한복음 17: 1-5)

 

하나님은 창조하신 사람들에게 너무나 실망하시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십니다. 멸망 받을 가운데 은혜입은 한 가족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실망하셨어도 남겨놓으신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보면 인간의 역사를 계속 이루어 나가시는 하나님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인간의 역사를 계속 이루도록 하셨을까요?

그 이유가 바로 선교역사입니다. 선교 역사는 이런 하나님의 마음이 전달되고 회복되는 과정을 역사적으로 밝혀 놓은 것입니다. 이러한 선교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시는 하나님의 선교를 이해하려면 창조로 거슬려 올라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가지셨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조상은 이 창조주의 마음을 져버렸습니다. 하지만 창조주 하나님은 인류의 조상들이 버린 자신의 뜻을 회복시키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재림 때 까지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자신의 뜻 즉 창조 때 사람을 만드신 그 마음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계속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선교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7: 18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날 밤에 하나님과 기도하셨던 말씀입니다. 17장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표현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는 아들인 예수님이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왜 그의 아들을 이 세상으로 보내셨고 또 그 아들은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신다는 것입니까?


17: 4을 보면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땅으로 보냄을 받은 아들은 아버지가 주신 사명을 다함으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했다는 것입니다. 즉 아버지가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는 어떠한 일을 함으로 자신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창세전부터 삼위하나님이 하셨던 것입니다. 17:5절에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영화는 영어성경에는 영광이라고 되어있습니다. 17: 22을 보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영광을 그 아들이 우리에게 주셨다고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로 아들과 하나 되게 하여서 아버지에게 영광을 돌려드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하나님이 왜 우리를 창조하셨는지를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창세 전부터 서로를 영화롭게 하신 분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이 영화롭게 하는 일들을 계속 일어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골로새서 1: 26-27을 보면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법이 성경에 여러 가지로 나와있습니다


첫째는 마태복음 5:16에 나타납니다

아버지에게 영광을 돌리려면 착한행실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한행실을 우리의 삶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에베소서 2:10에 잘 나타납니다. 둘째는 시편 50:21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셋째는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세 번째의 것은 선교의 관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즉 선교는 예배하지 않는 민족과 족속과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예배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선교를 주관하신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자신이 창조한 인간이 자신을 예배하지 않는 것을 참으시기 어려워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는 예배하는 찾고계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예배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선교의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창세기를 통해서 그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4장에 타락한 아담 이후 그의 아들들이 제사를 드리는 장면을 발견하게 됩니다. 비록 이것으로 말미암아 인류최초의 살인이 있었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명확히 지시하신 내용이 성경에 나와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제사 드렸다는 것은, 말 안해도 제사를 드려야만 하는 당위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나마 유지되었던 제사가 사라지자 하나님은 만드신 세상을 보시고 한탄하십다. 그리고는 물로 심판하십니다. 그렇지만 창6: 8을 보면 유독 그 시대에 노아만은 은혜를 입고 그 죽음의 대열에 끼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은혜를 주셨습니까? 8: 20-21을 보면 알 수 있다. 노아는 하나님을 예배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창12장으로 가면 하나님은 한 사람을 선택하시어 자신의 나라를 건설하십니다.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힘들이지 않고 그냥 가나안에 있는 사람 중 한 사람이나 아니면 그 근처의 한사람을 선택하셨다면 쉽게 일을 할 수 있을 텐데. 왜 먼 곳에 있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습니까? 아브라함 역시 예배드리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 중심에 예배를 보십니다. 12: 7-8을 보면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든지 예배를 드렸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요4: 23에 진정으로 예배하는 찾으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말하였습니다. 선교는 예배를 통해서 아직도 하나님께 영광드리지 못하는 자들에게 영광돌려 드리게 하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나에게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땅 끝까지 이 일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 때까지 하나님의 선교역사는 이 세상에서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24: 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라 시96:2-3

하나님께 영화를 돌리라 시86:9

예수님을 영광돌리고 빌3:3(자랑-glory)

 

. 아브라함(12:1-3)

 

아브라함은 예배드릴 줄 아는 자라고 전 시간에 이야기했습니다. 예배 드리는 자에게 하나님은 특별히 부탁하신 것이 있습니다. 예배드리는 자들의 무리를 만들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주면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것이 이루어졌음하는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서 오직 하나님을 예배하는 나라가 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예배하는 아버지 밑에 예배하는 자녀가 있기때문이지요. 갈라디아서 3: 29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어서 아브라함이 드렸던 예배를 계속 이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100여년 전에 목숨을 버리면서 이곳에 찾아 온 선교사들이 있었습니다. 죤헤론, 아펜젤러, 언더우드, 레베카, 루빅 켄드릭 등.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통해서 예배가 계속되기를 바라셨던 하나님은 그 외의 민족들은 버리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통한 예배는 지속되고, 그렇지 못한 민족과 방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의 예배를 배우고 익히기를 바라셨습니다.


그것이 창12: 2에 잘 나타납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는 것은 예배하는 민족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이름을 창대케 한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복의 근원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복의 근원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복의 근원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음 도표를 보면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의 근원자

복의 대상

복의 대상

θ

아브라함

모든 족속

복의 근원(θ이함께하심)

복의 근원(아브라함의 자손들)

 

12:3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모든 족속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은 그 분에게 경배 드리는 것입니다. 그 분의 존재는 예배의 대상입니다. 모세에게 성막을 만들어라고 명령하신 이유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가까이 있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레위기 1: - 7:에 제사의 룰을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이 계시면 예배가 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과 같이 아브라함에게 거하시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 되도록 하여서 모든 족속이 복을 받아 하나님이 거하시도록 하여 예배를 받으시려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은 뜬금없이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을 등장시킨 것은 아닙니다. 12:1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여호와갈대아 우르의 신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가야 할 곳인 가나안의 신도 아닙니다. 이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말하면 창12장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장이 아니라 창세기 1장으로 시작된 연속의 말씀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인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이 창4-11장까지 나타난 사람의 세상은 도덕적 타락과 어두움과 분열뿐인 사회요, 나라였습니다. 다시금 노아의 시대로 돌아간 것을 보신 하나님은 인간의 세상에는 희망이 없음을 보시고, 유일한 희망인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다시 사람들을 하나님에게로 부르시는 작업을 하시겠다는 의지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선교의 의지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어떻게 드러났습니까? 첫째는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는 것에서 나타납니다. 사실 아브라함에게는 이삭이라는 한명의 자식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한명을 두고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피를 이은 자손이 소멸되지 않는 이상 뒤를 이른 자녀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7을 보면 애굽에서 모세의 뒤를 따라 나오는 백성들의 모습은 애굽 온땅에 가득한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솔로몬 시대에 왕상3:8을 보면 큰 백성의 수효가 많아서 셀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다고 합니다


오늘날 갈라디아서 3: 7을 보면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찌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오늘 우리가 모두 아브라함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어 예배받으시려합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무조건 구원얻는 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에게 충격의 메시지를 던집니다


세례요한은 마3:9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는 것이고, 예수님은 마8:11-12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쫒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하나님은 혈육으로 난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서 온 나라와 백성을 주께로 오게 기회를 주셨지만, 그들은 이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통해서 이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시고 계십니다.


둘째의 하나님의 의지는 입니다. 


약속의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약속의 땅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으셨습니다. 셋째는 축복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뜻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이것은 하나님이 한 민족을 만드시고, 그들에게 이름을 주시며, 그들이 열방의 빛이 되고, 열방에게 축복이 되게 하기 위해서 그들을 축복하신 내용입니다. 이것은 첫 부분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결론으로 보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12장은 열방에게 복 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선포하는 것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 출애굽하는 히브리민족에게(19:5-6) - 축복의 중개자

 

본문의 배경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한 때가 왔습니다. 이제는 숫자 상으로 한 국가를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세에게 이 무리들을 이끌고 조상에게 약속한 땅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가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조상들과의 약속때문이었습니까? 그렇다면 왜 그 약속을 하셨습니까


그것은 출9:13-16(섬김-worship)에 보면 예배하기 위해서 내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에 예배가 잘못된 그들을 처단하시고 바른 예배가 있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출애굽한 백성들이 한 달쯤 광야를 지나다가 시내산에 머물게 됩니다. 이곳에서 하나님의 또 다른 계획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법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법을 주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은 이들에게 자신의 의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확고하게 선포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의 본문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열방에 복 주시려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았다면, 이 축복의 중개자로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제사장직에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입증되는 것은 시편67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보면 확실히 하나님은 전 인류의 선교를 원하고 계신다는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한 히브리민족에게 첫째는 하나님의 소유가 될 것을 원하셨고, 둘째는 제사장 나라가 되기를 원하셨고 셋째는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제사장 나라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대신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열방들에게 전달해야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거룩한 나라로서 두 가지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는 그들의 왕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이며, 다른 하나는 열방과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기들만의 경건한 무리로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해야 할 것은 사라져버립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출19장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베드로전서 2:9을 보면 당시 이방인 신자들을 향해서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부르면서 계속해서 2:9을 보면 이는 그들을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을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 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우리로 복음을 전하고 선포하는 하나님의 선교사와 증인이 되게 하려함입니다.

 

. 시편 67

 

시편 67편을 통해서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려는 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은 전 세계인들이 드리는 예배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하나님은 모든 민족으로부터 온 당신의 백성을 구속하시고자 하며, 모든 나라 위에 뛰어난 한 나라를 다스리려 하십니다.


67편은 모든 민족을 복 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입증하도록 우리 모두를 부르셨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2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론과 제사장들을 통해 주신 것(6:24-26)을 모든 민족들에게 적용시키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주의 도를 땅위에 주의 구원을 만방중에 알리소서이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복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창12장의 내용과 같은 것입니다.


이 시편은 세 번에 걸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복을 말하는데, 그것은 1, 6, 7절입니다. 그 구조는 창12:2-3을 거의 똑같이 복사해 놓은 것입니다. 우리에게 복을 주소서, 복을 주소서, 복을 주소서... 그리하여 모든 민족이 여호와를 알게하소서.


결론적인 것은 7절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복을 누리어 이방인들도 복을 받아(구속의 복) 누려서 땅의 모든 끝까지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경외는 두려워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도 있지만 또 다른 뜻은 영광돌린다는 것도 있습니다. 결국 시편기자는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나님이 땅의 모든 족속들에게 주님과 구주로 인정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 솔로몬의 성전 봉헌식(왕상8:41-44) - 스바여왕(왕상10:9)

 

하나님은 모세에게 성막을 만들라고 하십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거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12:5) 다윗은 예루살렘에 하나님이 거하시기 원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손에 피가 많아서 성전을 짓지 못합니다


아들 솔로몬이 아버지의 소망을 이룹니다. 성전을 짓고 난 후 성전 봉헌식에서 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것이 왕상 8장의 내용입니다


기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성전이 있어야 되는 두가지 이유가 나타납니다.


첫째는 자기 이름으로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시는 장소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전은 예배자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높이고 하나님이 역사를 이야기 하는 곳이길 바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만남의 장소 관계의 장소 임재의 장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 중에 41-44을 보면 이방인들이 이 성전으로 와서 주를 경외케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솔로몬은 성전에 거하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하나님임을 알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성전을 세우신 하나님의 목적은 예배하러 온 모든 열방을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기도대로 하나님은 응답하셨습니다. 스바의 여왕이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열방이 자신에게 나아오게 하려는 계획이 이루어지는 데 있어서 늦추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스바여왕을 보내신 것입니다. 물론 스바여왕이 온 것은 솔로몬의 지혜를 시험하고자 왔습니다. 시험 후 스바여왕은 솔로몬의 지혜에 대해서 감탄합니다. 그리고는 그 지혜의 근본인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그는 왕상 10:9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찌로다라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입니다.


조나단 루이스는 선교에 두가지 메카니즘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이 맡은 임무를 수행할 때 두 가지 힘이 작용했습니다. 그 중 첫 번째는 흡인력으로 처음에는 성막이, 후에는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이 건물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하는 장소였습니다. 그곳은 거룩한 곳으로 이스라엘의 종교 의식들과 관행들의 중심지였습니다


하지만 성막과 성전이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솔로몬을 통해서 우리는 보았습니다. 두 번째 힘은 적극적인 팽창력입니다. 팽창력은 이스라엘 경계 밖으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보내기 위한 힘입니다. 다른 나라에 하나님이 메시지를 선포하기 위해서 사용된 사람들로. 요셉, 다니엘 에스더, 요나 등등입니다.


이것은 랄프 윈터가 더 세분화 시켜 놓았습니다. 그의 선교의 네가지 메카니즘은 우선은 팽창적인 원심력이 있는 데, 첫째로 자발적으로 가는 것이 있습니다. 둘째는 비자발적으로 가는 것입니다. 원심력 다음은 구심력인데 흡인적 요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자발적으로 오는 것이 있고, 둘째는 비자발적으로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스바여왕의 경우는 자발적으로 온 것입니다. 성전이 세워진 목적을 이룬 것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자기 때가 지나가기도 전에 왕상 11:1-8을 보면 하나님의 성산 바로 앞에 우상을 세웁니다. 그래서 행7장에 스데반은 공회 앞에서 성전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다고 선포해버립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선지자들

 

에스겔 36: 22-23

하박국 2: 14

스바냐 3: 9-10

말라기 1:11

이사야 56: 6-7, 66:18-21

 

. 요나

 

요나는 비자발적으로 간 선지자입니다


요나서는 선교의 성경적 기초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책입니다. 요나서는 하나님이 이방인들에 관해 자기백성에게 내리신 명령을 다루고 있으며 신약에 나오는 선교 명령의 예비 단계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요나서는 전세계적인 하나님의 일을 해하도록 하나님께 택함을 받는 종이 하나님의 선교 명령에 완강이 저항하는 것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도 중요합니다


요나는 여로보암 2세가 집권하던 때의 선지자입니다

BC8세기 경입니다. 요나와 그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 일에 골몰한다고 열방에 대해서 더 이상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억지로 보내십니다. 즉 억지로 열방에 대한 눈을 열게 만드십니다. 그러나 거부합니다. 이것이 요나서입니다.


사실 구약의 요나는 오늘의 나입니다. 하나님은 악한 니느웨를 향해서 굽히지 않으시고 도망가는 요나를 보내십니다. 요나에게 주는 마지막 메시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요나서 4:10-11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요나에게 그대로 전달되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요나의 반응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습니다. 구약의 요나가 신약에 사도바울로 나타납니다. 아시아로 가겠다는 바울을 억지로 돌리시어 마게도냐로 보내십니다. 그리고는 유대인이 하지 않으니 로마를 들어서 세계복음화를 사용하십니다. 가야 할 곳이 아직 있는데 갈 곳을 고르고 있는 자들과 이곳에 할 일이 많다고 거절하는 이들, 또 왠 준비가 그리 많은지 준비하다가 세월다보낸 이들이 있는 이곳의 우리가 혹 요나가 아닌지 생각해 봅시다.


내가 안 가면 누군가는 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로 하여금 3일의 물고기 뱃속 훈련을 시키시든지, 아니면 지금의 유대인처럼 되든지 할 것입니다. 요나가 많으면 모든 니느웨는 멸망받을 것입니다.


. 결론

 

선교는 교회 생활의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교회는 오직 한 분의 주님 그 안에 하나님의 모든 충만이 거하시고 만물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는 한 분만을 모셔야 합니다. (1: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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