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와 선교 >                           신용환목사

선교적 교회에 대한 고민 .

 


기독교 신앙의 가장 가치 있는 진수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바로 십자가 복음 일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존재하는 정체성이기도 하다. 복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교회의 존재를 이해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다.


수직적인 신앙 고백은 수평적인 관계들을 형성하는 기초가 된다. 수평적인 관계를 만들어감에 있어서 중요한 매개와 촉매는 바로 십자가와 복음이어야 한다.


오늘날 교회와 세상에서 가장 필요하고 가장 가치 있는 신앙의 핵심인 이 복음을 어떻게 교회 공동체 안에 담을 수 있는가? 그리고 그 복음의 가치가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시키고 구비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교회 공동체가 안고 있는 중요한 고민이다.  


이 복음은‘기쁜 소식’이라는 제한적 이해와 의미부여에서 벗어나서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전달받은 진정한 복음을 이해하고 그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김세윤 박사가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 복음에 대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한 복음의 내용과 사도들이 예수를 통해서 전수받은 복음에 대한 성경적이고 포괄적인 이해가 필요하다.[1]


우리가 복음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정확하게 아는 것은 우리가 믿는 근본과 핵심을 아는 작업이다. 우리는 주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고 그분의 신적인 삶에 참여한 그 순간부터 복음을 알게 되었고, 복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느끼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가 복음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갖는 것은 지금 우리가 어떤 존재이며 사랑 속에 있는지를 이해하는 신앙의 정체성과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과 어떤 방식으로 소통하며 접근해야 하는지? 세상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복음에 합당하게 구비되어야 하는지? 자각하게 해준다.


폴 스티븐스 교수가 말하고 있는 생활 속의 영성들의 예들처럼 우리가 힘들여 노동을 할 때나 그 노동의 의미를 발견하고 그 노동의 가치를 극대화 시키기 위해서는 복음에 대한 더 분명하하고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2]


가정, 이성, 형제, 이웃 관계에서나 홀로 있을 때나 언제든지 우리 삶의 중요한 촉매제는 바로 복음이어야 한다. 복음이라는 보배로운 황금물이 사람이라는 질그릇의 갈리진 틈을 따라 흘러내리는 것이다(고후4:17).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은 연약함(하나님의 강하심을 아는 연약함)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강하심이 교차하는 곳에서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사역을 하는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3]


사도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을 옥중에서 구비시키기 위해서 쓴 빌립보서를 보면 그의 강조점은 바로 한가지였다. 빌립보서 1 26절에서 17절을 보면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라고 말하면서 복음을 생활(행동. Conduct)이라는 단어와 연결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삶은 복음으로 잘 구비된 존재이며 그것에 걸 맞는 행동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contending as one man for the faith of the gospel)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주어진 복음이 우리의 삶에 믿음의 원동력으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언급해주시고 있다.


우리는 복음의 동기가 모든 교회사역과 삶의 원동력이 되도록 하는 것에 집중해야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다양한 문화, 인종, 언어, 생활습관을 갖고 있는 열방이라는 자리에서 복음에 분명한 외침(Proclamation)과 축복(Blessing)이 바로 선교적인 도구와 방식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필자의 교회는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공동체를 지향하고 총체적 선교(Holistic Mission)에 합당한 평신도 사역자를 구비시키고자 한다소위의 헌신된 사람들의 전유물로 전락한 선교가 아닌 삶의 소박한 자리에서 위대한 꿈을 이루는, 삶의 작은 자리에서 열방의 큰 유업으로 이어지는 그런 교회공동체와 평신도들로 구비시키는 그림을 갖고 있다.


교회공동체는 선교적인 사명과 부르심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선교의 근원과 출발점은 하나님이시다. , 선교란 사람의 능력이나 교회의 형편과 무관하게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개념이다. 선교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근거한다. 하나님의 속성(attribute)상 그분은 필연적으로‘선교의 하나님’(Missionary God)이시다. 그래서 선교는 하나님을 하나님 되시게 하는 일이다. 선교 역시 처음 언급한 예배의 목적과 동일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광과 연관된 개념이다. [4]


 모든 평신도 사역자들은 복음에 대한 반응인 구원의 감격과 누림 속에 있다. 구원의 궁극적 의미는 사람들이 무엇으로부터(from what)구원받았는지 보다 무엇을 위해(for what 목적)구원받았는지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구원받았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43:21). 찬송 의 의미 속에는 예전적인 활동을 통한 영광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삶에서 울려 퍼지도록 하는 영광과도 관련이 있다.


오늘날 흔히 선교를 예배라고 말하고, 때로는 하나님의 영광이 선교의 최우선동기라고들 말한다. 따라서 선교는 예배행위,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존귀하게 하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선교가 예배인 까닭은 정확히 말해서 선교가 바로 하나님이 자신을 벗어나서 하는 일이요 삶이요 사랑이기 때문이다. 선교가 예배인 이유는 하나님이 자신을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선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일인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마음과 교회 전체를 움직이는 긍극적인 선교 구비자는 하나님이시다. 교회 리더십을 맡은 우리의 역할은 하나님께서 하고 계시는 일을 분별하고 그분의 공동 구비자가 되는 것이다.[5]

선교의 하나님이 선교적 계시를 하시고, 교회를 그 도구로 부르신다. 교회(Ekklesia)는 ‘소명’이란 의미로, 하나님의 선교적 목적을 위해 부름 받은 공동체이다.[6]


교회의 선교는 삼위 하나님의 선교(Trinitarian mission)에 근거하고 거기서 파생된다.[7]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0:21)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을 보내시고, 성부와 성자 하나님께서 성령 하나님을 보내시면서 교회를 보내신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르시고 신적인 일에 참여시키시는 사실에 교회의 영광이 있다. 선교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완성이다. 따라서 선교는 교회의 행위(activity)라기보다 교회의 정체성(identity)에 해당하는 본질적 개념이다. 하나님의 교회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는 형용사는‘선교적’(missional)이란 단어이다.


 오늘 교회는 우리의 신앙의 도약과 성숙을 위한 중요한 촉매제와 같은 복음 으로 모든 성도들이 머물고 있는 열방이라는 삶의 현장 속에서 살아가도록 구비시키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제자양육을 통해 그 복음의 가치를 더 풍성케 하며 열방 속에 선교라는 방식으로 축복하는 사역을 하도록 구비시킬 것이다교회 안에서 잘 구비된 사람들은 교회 밖의 사람들 중에서 특히 가난한 사람들, 낯선 사람들[8]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보여야 한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요구하신 것처럼 교회안과 밖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갖고 계신다. 성경이 있는 그리스도인이나 성경이 없는 이교도에게나 똑 같은 관심을 기울이신다. 요나의 실수는 자신의 의로움, 자신의 신학이론, 자신의 사역,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서 살았다. 그러나 그는 금방 이런 모든 소유물을 빼앗겼다. 성경에서 필요가 곧 소명을 불러 일으키는 것 은 아니라는 원칙을 요나서 만큼 뚜렷하게 보여주는 책은 없다. 선교의 원천은 세상의 필요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며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긍휼이다.


잘 구비된 평신도는 보내어지는 일 사역에 익숙해야 한다. 그 보내어지는 사역을 우리는 선교라고 말한다. 교회공동체는 잘 구비된 평신도 사역자들을 그냥 교회에 유익한 구성원으로 불러모으는 사역을 해서는 안된다. 교회공동체는 잘 구비된 평신도 사역자들을 세상과 열방이라는 현상으로 흘려 보내는 물 근원의 역할 해야 한다. 하나님의 선교는 부르심과 보내심이라는 두 가지 주요한 작업이 진행되는 과정이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는 복음으로 열방에 있는 교회를 불러 모아야 하지만 동시에 그들을 잘 구비시켜 세상 속으로 보내야 한다.


 선교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과 회중을 모으는 일에 헌신하는 것일 뿐 아니라 구속된 전체 창조세계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확립할 목적으로 하나님의 선교(mission Dei)안에서 성자의 보내심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참여하는 선교운동의 근원은 삼위하나님 자체에 있다.[9] 따라서 선교는 창조세계, 보살핌, 구속, 최종적 완성과 관련된, 하나님으로부터 세계로의 움직임으로 간주된다. 그것은 그분이 보냄 받은 상태에서 세상 가운데서 행하시는 모든 것이다. 성부가 성자를, 그리고 성부와 성자가 성령을 보내실 뿐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이 교회를 세상 속으로 보내신다. 선교는 시종일관 하나님의 보내심인 것이다.


 선교는 하나님의 백성가운데 선교에 관심 있는 자들의 간헐적으로 하는 그런 활동이 아니다. 교회가 선교를 하나의 사역으로 보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자체가 선교다

 

 옛 언약과 새 언약 하에서 선교는 하나님의 백성 전체가 깊이 관여하도록 의도된 과업이지, 다만 선택된 소수의 대표자나 지명된 선교사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간단히 말해서 평범한 그리스도인이 모두 선교사인 것이다. 그리고 그 선교는 사회의 직장과 개인적인 삶의 영역(가정), 교회 내의 공동체 생활에서 이루어진다.


 교회공동체가 선교를 감당할 때 선교를 구비시키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교를 구비시킨다. 우리에게 비전과 은사를 주시고,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능력을 부여하며 동기를 유발시키고 앞으로 인도하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교를 위해 구비시키는 것에 중요한 예를 마태복음 10장에 나타나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구비시켜 파송하는 장면에서 알 수 있다.  마태복음 10 1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부르사 의 원 뜻은 '당신의 목적하신 바를 위해 소집하였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선교적인 구비시킴에 첫 번째 과정이다.


이 부르심이 우리로 하여금 선교적인 삶을 살도록 구비시키는 출발점이다. 그 다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 권능 을 구비시킨다. 여기서 먼저 '권능'이란 '권세와 능력()' 또는 '권위와 통치권'이라는 의미로서 본문에서 특별히 정복자들로서의 능력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지혜로우신 필요에 따라 천국 일꾼을 부르실 뿐 아니라 그들에게 그 일에 합당한 권위와 힘을 부여하신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부여한 권능의 부여가 바로 구비시킴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요한 관점은 제자들을 파송하시는 예수님의 의도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권능을 부여하신 것은 예수님처럼 같은 권능을 사용하라는 강력한 도전이었다. 마치 예수님께서 성부의 보내심을 받아 파송된 것처럼 예수님도 제자들을 구비시켜 파송 코자 하셨다


이 모델은 예수님께서 가지신 성육신적 선교모델과 같은 형태이다. 예수님의 선교사역은 전도와 사회정의라는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성육신적인 선교에 참여하는 참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라는 두가지 여정이 남아있다. 전도와 사회정의는 한가위에 달린 두 날개와 같다. 다른 비유로 바꾸어 본다면, 전도는 선교의 중심인 반면, 사회정의는 선교의 환경이다. 전도와 사회정의는 서로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선교적 교회는 예수님의 성육신적 선교모델과 제자들을 구비시켜서 파송하는 모델을 갖고 복음전도와 사회정의의 선교적 두 날개를 실현하고자 한다. 필자의 교회는 이러한 선교적 교회의 그림을 갖고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총체적인 선교에 동참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비시키고자 한다.



[1] 김세윤 『복음이란 무엇인가? (서울:두란노, 2003)

오늘날의 교회도 신약 성경의 모범을 따라 복음을 다양하게 그리고 포괄적으로 선포하여야 한다. 복음을 다양하게 선포하는 것은 교회가 처한 시대와 장소의 구체적 적합성을 잘 나타낼 수 있다. 복음을 포괄적으로 선포하는 것은 균형 있고 건전한 신앙생활을 유발시키는 것이다.

 

[2] 노동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사랑하고 섬기는 하나의 배경이 된다. 노동은 결코 영적인 생활의 기분전환이 아니며, 창조 가능성과 정화의 힘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께 직접 인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노동의 참 의미이다. 폴스티븐스, 『 현대인을 위한 생활영성 』, 박영민역 (서울:IVP, 1996), p.28.


[3] 폴스티븐스, 『 현대인을 위한 생활영성 』, 박영민역 (서울:IVP, 1996), p.176.


[4] 정민영, 『글로칼선교컨퍼런스2011강의안』 (올랜도:위클리프, 2011), p.18.


[5] 폴스티븐스, 21세기를 위한 평신도 신학 』 홍병룡역 (서울:IVP, 2001). P.252


[6] 핸드릭 크레이머는 선구적인 저서 평신도신학에서 에클레시아의 모든 교인은 원칙적으로 또같은 부르심을 받은 자들 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또한 거룩함으로(살전4:7), 자유로(5:13), 소망으로(1:18;4:4), 화해의 사역으로(고후5:18-19), 그분의 목적을 따라(8:28) 부름을 받았다. 폴스티븐스, 『 하나님의 사업을 꿈꾸는 CEO 』 홍병룡역 (서울:IVP, 2009), p.40


[7] 선교는 하나님이 스스로를 타자화하는(othering)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이른바 mission dei, 즉 하나님의 선교이다. 선교는 하나님과 함께 시작된다. 폴스티븐스, 『 하나님의 사업을 꿈꾸는 CEO 』 홍병룡역 (서울:IVP, 2009), p.116.

[8] 폴스티븐스, 『 현대인을 위한 생활영성 』, 박영민역 (서울:IVP, 1996), pp190

[9] N, Goodall, 『 하나님의 선교: 선교신학입문 』,  (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 1996),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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