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계시록 17: 9 -18>
  • 이기실 터이요 이기리로다. 
  • # 설교문에 그림은 인터넷 갈무리  


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 요한계시록 17:9 18 >


제목 : <요한계시록 17 : 9-18> 이기실터이요 이기리로다.




[ 계 17:9-18]

(17:9)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17:10)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하나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시 동안 머무르리라

(17:11) 전에 있었다가 지금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그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17:12)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과 더불어 임금처럼 한동안 권세를 받으리라

(17:13) 그들이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더라

(17:14)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17:15) 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 바 음녀가 앉아 있는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

(17:16) 네가 본 바 이 열 뿔과 짐승은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의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17:17) 이는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그들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그들의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라

(17:18) 또 네가 본 그 여자는 땅의 왕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하더라

 

 


 




제목 : 이기실 터 이요  이기시리로다.


우리가 계시록을 읽을 때 중요한 태도는 < 분위기를 파악 하는 것 / 이야기를 흐름이 누구에게 향하고 있는가 ? >하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등장하는 대목에서 이 심판이 누구를 겨냥하고 있고 누구를 집중하고 있는지?를 생각해야합니다.

 

계시록 1718장에서는 바벨론의 멸망에 대해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요한사도가 살아있 을때의 삶의 정황이었던 로마제국의 멸망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17장과 182장에 걸쳐서 도대체 바벨론으로 묘사되었는 세력의 힘과 능력은 어떠한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바벨론의 강력해보였던 권세와 능력도 다 망하고 만다고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바벨론의 모습과 멸망을 설명할 때 크게는 2가지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종교적인 바벨론의 멸망입니다


흔히 성경은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의 거짓된 신과 우상을 섬기는 행위를 음행이라고 말하고, 그러한 자들을 창기와 같이 음녀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17장에서 한 음녀, 그 여자를 봅니다. 그 여자는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것들의 어미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여자는 짐승을 타고 나타납니다.


이 상징적인 그림은 로마시대의 문화적인 심볼리즘(symbolism)입니다


요한 사도도 로마시대의 음란하고 패역한 영적인 현실을 그당시의 로마의 종교적인 여신으로 비유합니다. 그 여자가 제공하는 것은 향락과 타락한 문화와 죄악의 즐거움을 제공해는 것이었고 그 여자가 내벹는 말은 다 달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치와 경제를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고 있는 존재이면서 성도들의 믿음을 흔들고 성도들을 망하게 하는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 요한사도가 힘있는 < 그 여자 >라고 묘사하는데 그 당시 배경과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연구하고 이해라때 왜? 요한이 이런 비유와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는가? 생각해야합니다. 그가 보고 받은 환상속에는 그가 일상속에서 듣고 보고 있었던 어떤 이미지를 대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요한사도가 살던 당시인 로마시대의 상황(context), 구약의 그림, 당시에 그들이 알고 있는 신화적, 정치적 사건들 3가지고 고려될 때 정확한 해석을 할수 있습니다. 많이 우리가 이것을 잘 알지 못한다면 요한계시록은 <이 말씀을 원하는 핵심이 무엇인지? 분위기를 파악하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둘째는 정치적인 바벨론의 멸망입니다


특히 그 당시의 가장큰 정치적인 능력자인 로마의 황제의 멸망을 의미합니다. 요한 사도가 계시록을 기록할 당시에 교회들의 상황은 황제를 숭배를 강요받고 있고 그것 때문에 심각한 핍박과 순교를 당하고 있었을 때입니다.


그당시 교회들은 종교적인 로마의 여신이 우상을 섬기는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정치적으로 황제를 섬기도록 강요받는 상황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바벨론을 종말론적 적대세력으로 그리고 짐승과 악의 총체로 묘사하기 위하여 로마의 종교적 특징과 정치적 특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7-18장을 쓰고 있는 요한 의 목적은 그 음녀 바벨론이 어떻게 멸망할것인지를 밝히는 것입니다. 음녀와 짐승으로 대변되는 이들은 같이 망하게 될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 179-15절에는 < 그 여자 >는 어떤 능력의 소유자이며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어떻게 그 여자를 대해야 하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결국 궁극적으로 < 그 음녀, 그 여자 그리고 짐승>은 망하게 될것입니다.

결국 궁극적으로 < 아무리 머리가 많고 뿔이 많고 이상한 짐승을 타고 나타나도 >

만주의 주시오 만왕의 왕이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기실 터이요.

결국 궁극적으로 < 그 어린양과 함께하는 진실한 자들은 > 반드시 이기리로다

 

이것이 오늘 메시지의 가장 중요한 주제이면 분위기입니다.

오늘 본문에 묘사되었는 몇가지 상식적인 이해만 집어 보겠습니다.


여자에 대한 묘사나 짐승에 대한 묘사에서 < 일곱 머리 / 일곱산 >가 나옵니다.

(17:9)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 일곱머리는 일곱왕을 의미합니다. 7일라는 숫자는 완전성을 의미하고 어떤 한 세트를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계시록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숫자가 일곱입니다.

 

  • 3이라는 숫자는 < 하늘의 숫자 > 4라는 숫자< 세상의 나타내는 숫자 >입니다. 그래서 7이라는 숙자는 신적인 세계를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 하늘과 세상 >을 합친수라고 할수 있지요.

 

오늘 본문에는 일곱머리는 일곱왕이요 열뿔은 열왕의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일곱왕이 누구이며 열왕이 누구인지를 구체적으로 아는 것을 쉽지 않습니다.

  • 열뿔에서 10이라는 숫자는 4라는 숫자와 함께 < 세상과 온 우주를 포괄하는 숫자 >입니다. 그리고 뿔은 통상적으로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 그리고 9절에 보면 <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라고 합니다.

여기서 < >이라는 공간은 < 강력한 힘과 통치 >를 의미합니다.

 

계시록에서 등장하는 숫자를 가지고 어떤 이미지를 묘사하는 것을 < 수비학 /Numerology >라고 합니다. 숫자를 가지고 그당시의 어떤 상황과 대상을 비유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12라는 숫자가 12지파, 12제자, 12재앙을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오늘 본문 17장에서 일곱왕은 역사상 차례로 등장하는 로마의 왕들의 목록으로 보기도하고 또 어떤 이들은 계속해서 등장한 제국의 모든 통치자들의 대표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17:10-11]

(17:10)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하나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시 동안 머무르리라

(17:11) 전에 있었다가 지금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그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그당시의 어떤 왕을 의미하는 것인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10절에 나오는 지금 있는 여섯 번째 왕은 < 네로 >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11절에 < 전에 있다가 지금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 >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그당시에 < 네로가 8째 왕으로 부활 >했다고 생각하는 것을 반영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 8이라는 숫자가 바로 < 부활 . 재생 >의 숫자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렇게 상식적으로 이러한 수비학의 내용을 설명하지만 너무 이러한 숫자의 집착하다보면 가장 중요한 요한계시록의 핵심메시지를 놓치는 게 될 경우가 많습니다. 그냥 상식 수준에서만 알아주어야지 이것을 숫자로 파고 들려고 이 숫자가 무엇이냐? 누구냐 ?하면 그 본질을 놓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옛날 건빵안에는 < 별사탕 >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릴 때 건빵을 먹을 때 < 별사탕 > ? 들어 있는지 몰랐습니다. 자라고 알았죠. 그 별사탕인 건빵을 먹을 때 먹에 걸리지 않고 침이 생기도록 하는 보조 식품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건빵을 먹는데 건빵의 본연의 맛은 잃은채 < 별사탕 >만 빼먹습니다.

저는 계시록을 묵상하고 연구하는 방식이 잘못되는 이유중에 하는바로 이 < 별사탕 > 신앙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본연의 맛과 풍미 그리고 분위기는 파악하지 못한채 숫자와 상징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무엇인가?에 집중합니다. 이것이 계시록을 잘못 읽고 묵상하는 우리의 태도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이러한 그당시 로마로 대표되는 큰 음녀 바벨론의 묘사를 통해서 어떤 핵심 분위기를 파악할수 있을까요?


1/ 큰 음녀 바벨론은 짝통이요 모조품이라는 사실입니다.

놀랍게도 오늘 본문을 보면 큰 음녀 바벨론은 대단한 파워과 권세를 가진 존재로 묘사됩니다. 일곱머리고 열뿔을 가지고 일곱머리와 열뿔을 가진 짐승을 타고 나타납니다. 사실 여자의 묘사나 짐승의 묘사는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17장에 나오는 이 짐승의 묘사가 재미있습니다.

(17:8)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사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놀랍게 여기리라

(17:11) 전에 있었다가 지금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그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여기서 나오는 묘사 < 이전 있었다가 지금은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 >

이 표현 어디서 많이 본 표현 같지 않습니까?

(1: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시며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바로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오실분이신 하나님에 대한 패러디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웃어야합니다. 하 하 하


짐승은 짝퉁이구나 ! 하나님 흉내를 내고 있지만 하나님처럼 권세를 부리고 있지만 이건 가짜구나 ! 하는 것입니다.

 

2/ 큰 음녀 바벨론은 일회용입니다.

왜 이 표현을 쓰고 있느냐 하면 오늘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말 때문입니다.

(17:10)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하나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시 동안 머무르리라

(17:12)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과 더불어 임금처럼 한동안 권세를 받으리라

 

여기서 큰 음녀 바벨론이 활동하는 기간이 언제라고 나옵니까?

< 잠시 동안 / 한동안 >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엄마가 밖에 나가면 집에 큰 아이들이 엄마 노릇을 하고 엄마의 권세를 부립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권세는 잠깐동안입니다. 엄마가 돌아오면 그 권세를 소용없어집니다.

바로 여기서 사도요한이 강조하고 싶은 강조점이 여기 있습니다. 바로 우리를 핍박하고 고난을 주는 세력의 힘과 권세는 잠시동안 주어진 것입니다.


결국에는 그 권세와 능력을 다 빼앗기고 멸명하고 말것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가장 중요한 분위기입니다. 이것이 이세상에 주눅들거나 겁먹지 말아야할 우리의 담대함입니다.

 

3/ 큰 음녀 바벨론은 어린양과 싸워 철저하게 패배한다.

(17:14)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바로 이 구절이 요한 사도가 힘주어 말하고 싶어하는 메시지입니다.

< 이기실 터이요 이기리로다 >라는 말씀입니다.

 

만주의 주시오 만왕의 왕이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더불어 싸워주시고 우리는 그와 함께 머물고 있으면 이길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우수운 것은 이러한 큰 음녀 바벨론과 짐승들이 스스로 서로 자멸하는 길을 택한다는 것입니다.

(17:16) 네가 본 바 이 열 뿔과 짐승은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의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이것이 요한계시록이 우리에게 주시는 현실입니다. 지금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고 받아들여야하는 우리의 삶의 내용입니다













  • < 요한계시록 10장 1-11절 > 
  • 복음의 상승효과 
  • # 설교문중 그림 인터넷 갈무리함 

[10:1-11]

(1) 내가 또 보니 힘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 오는데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

(2) 그 손에 펴 놓인 작은 책을 들고 그 오른발은 바다를 밟고 왼발은 땅을 밟고

(3) 사자의 부르짖는 것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외칠 때에 일곱 우뢰가 그 소리를         발하더라

(4) 일곱 우뢰가 발할 때에 내가 기록하려고 하다가 곧 들으니

     하늘에서 소리나서 말하기를 일곱 우뢰가 발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       하더라

(5) 내가 본바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가 하늘을 향하여 오른손을 들고

(6) 세세토록 살아계신 자 곧 하늘과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이며 땅과 그 가운데 있       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7)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8)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책을 가지라 하기로

(9)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10)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           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11)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         여야 하리라 하더라






< 요한계시록 10:1-11> 복음의 상승효과 


우리에게 미스터리 하게만 느껴졌던 계시록이 조금이 그리고 명확히 열려 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계시록은 시트릿(secret)이 아닙니다.

 

계시록은 미스터리같이 보이지만 계시록은 우리의 믿음과 영적이 안목으로 밝히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도한 상상이나 자의적인 해석을 배제하고 성경 속에서 성경을 이해하는 아주 기본적인 해석이 원리를 사용한다면 계시록은 쉽게 이해할수 있게 됩니다.

 

계시록이 어려운 이유는 우리에게 성경적인 background 과 사도요한이 살고 있던 1세기의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스키마(배경지식 background knowledge / schema )가 없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힘든 것입니다.

 

계시록은 철저하게 그리스도중심적이다

그리고 구약에 근거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의 404구절중에 278구절은 구약에 관련 구절을 포함합니다


계시록에는 구약에 대한 관련 구절이나 암시가 500개도 넘는다고 집계되고 있다. 그 중에 시편, 다니엘, 스가랴, 이사야, 에스겔. 요엘, 예레미야 , 출애굽기 와 같은 성경들과 연결되어 있다.

 

 ! 이제 계시록에 자신감을 회복하자. !

 

몇주동안 계시록이란 무엇인가? 왜 우리에게 계시록을 주었을까?를 생각하고 묵상하면서 한가지 이미지가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 4 stop sign / 4 stop signal intersection > 이라는 생각했습니다.

 

계시록은 < 4 STOP SIGNAL >이다.

 


미국에서 운전을 하면서 한국에는 없는 특별한 운전 SIGNAL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4STOP-SIGNAL 이었습니다


4거리.. 2길이 만나는 지점에 STOP 사인이 4개가 있어서 그 지점에 먼저 도착한 차부터 순서대로 진행을 하는 사인입니다

미국에서 운전하면서 가장 긴장하고 조심하고 주의하는 장소입니다.

  

우리가 함께 살펴보고 있는 계시록은 4개의 STOP-SIGNAL이 나옵니다.

 

첫째는 7교회의 STOP 시그날 


두 번째는 7인봉의 스탑 시그널


세번째는 7나팔의 스탑 시그날 


네 번째는 7대접의 스탑 시그널입니다.

 

계시록과 4스탑 시그날이 비슷한 공통점이 있는데

 

1) 서로 다른 두 길이 만나는 CROSS ROAD 라는 점이다.

 

계시록 속에 흐르는 2길은 < 세상과 교회 > 라는 중요한 2길이다

 그 길을 지나는 것이 바로 < 그리스도인 >이라는 것입니다.

 

2) 4스탑 시그날을 지날 때 해야 할 4가지 모습은

 

  • TENSTION (긴장이 있다, 위험할 수 있다)
  • CAUTION(주의가 있다.-고개 돌림)
  • REMEMBER(기억을 해야 한다, 순서를 기억해야 한다)
  • FAITH (믿음이 필요하다)
  • PATIENCE(때를 기다려야 한다. 인내가 )

 

3) 계시록의 등장하는 종말의 때에 중요한 사건은

< 7교회-7인봉-7나팔-7-대접> 이다.


이것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 무시무시한 협박처럼 들리지만.. 

우리가 잊지 말야 할 것은

 

1) 교회와 세상 속에 있는 당연한 긴장이다.

2) 그리스도와 교회는 반드시 승리한다. 인맞은 자는 반드시 승리한다

3) 이러한 때에 우리에게 믿음을 지키고 인내하기를 도전하고 있다.

4) 우리의 신앙은 < 충성과 필승 > 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영적인 4스탑 사인과 같은 7;7;7;7로 대변되는 이 영적인 상황들은 믿는 우리에게 삶에 대한 진지한 긴장감을 유지시키며 동시에 특별한 위로를 경험케 합니다.

 

 종말의 때에 하나님이 이 시대의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 지키는자, 이기는자 가 되라 > 도전하는 것이 계시록입니다


래서 계시록은 전투적입니다. 계시록은 교회 공동체적이며 그리스도 중심적입니다. 계시록은 < 믿음의 승부수 이며 세상을 향한 도전장 >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 제가 4 STOP 시그널 이라고 명명한 7가지 인봉, 나팔, 대접은 이중적인 의미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에 실패하고 복음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대적한 자들에게 심판과 재앙의 사건이지만 믿음에 성공하고 복음을 붙들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소망과 위로의 사건이다.

  

[고후 2:14-16]

 (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5)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로마군인들의 개선행진에서 사용되는 바로 < >입니다. 

이 향이 피워지는 것은 로마군인들에게 승리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적들에게는 패배의 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 로마군인들의 개선행진에 향과 함께 사용되었던 것이

 바로 < 나팔 >입니다. 



나팔소리는 전쟁에 승리한 당당한 군인들에게는 축제의 소리이지만 전쟁에 패한 패장과 포로들에게는 치욕과 절망의 소리입니다.

 

나팔소리는 유대인들에게 몇가지 의미가 있다

나팔소리는 < 신선한 출발과 승리 >이며 < 심판과 회개 >를 부르는 소리이다.

 


1) 백성들이 앞으로 진행할 때 사용된 소리

 

[ 10:2] 은나팔 둘을 만들되 쳐서 만들어서 그것으로 회중을 소집하며 진을 진행케 할 것이라

 

2) 백성들을 전쟁에 소집할때에 사용된 소리

 

(10: 9) 또 너희 땅에서 너희가 자기를 압박하는 대적을 치러 나갈 때에는 나팔을 울려 불지니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를 기억하고 너희를 너희 대적에게서 구원하리라

 

3) 연중가장 거룩한 속죄일, 완전히 새롭게 출발하고 정결의식에 사용된 소리

 

(10:10) 또 너희 희락의 날과 너희 정한 절기와 월삭에는 번제물의 위에와 화목제물의 위에 나팔을 불라 그로 말미암아 너희 하나님이 너희를 기억하리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4) 자유와 희년을 알기 위해 사용된 소리

 

[25:8-9] (8)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년이 일곱번인즉 안식년 일곱번 동안 곧 사십 구년이라(9)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지며

 

5) 매일드리는 제사에 어린양이 제단 불속에 던져지는 순간 나는 소리

 

(대상 16:6) 제사장 브나야와 야하시엘은 항상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나팔을 부니라

 

6) 그리스도의 오심과 연결된 소리

 

(살전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오늘 살펴보게 될 본문은 6째 나팔과 7째 나팔 사이에 끼어든 특별한 메시지입니다. 간주와 같은 10-11장이 등장합니다.. 간지와 같고 .. 막간과 같은 것


 10장은 <두루마리 작은 책을 가진 힘센 천사가 요한과 나누었던 이야기>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복음 배척한 세상의 심판이다. 복음이 이 세상에 어떻게 역사하는가?보여분다.

 

11장은 두증인이 나오는 이 두 증인이 세상에 엄청난 저항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시고 세상에 장차 큰 심판이 온다. 7천사가 7나팔을 불 때 하나님을 찬양한다.

 

1) 힘센천사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천사일 뿐이다.

 

힘센천사 52절에의 보좌가 있는 방에 서 있던 강한 천사와 같은 존재


(5:2) 또 보매 힘 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이 천사는 <가브리엘> 이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타난 그 천사

 

(8:16) 내가 들은즉 을래강 두 언덕 사이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있어 외쳐 이르되 가브리엘아 이 이상을 이 사람에게 깨닫게 하라 하더니

 

(12:7) 내가 들은즉 그 세마포 옷을 입고 강물 위에 있는 자가 그 좌우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하여 영생하시는 자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반드시 한때 두때 반때를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어지기 까지니 그렇게 되면 이 모든 일이 다 끝나리라 하더라

 

< 힘센천사의 모습 >

  • 구름을 입고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 임재
  •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 그 얼굴은 해같고 /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 / 그 오른발은 바다를 밝고 외발은 땅을 밟고 / 그 손에 펴 놓이 작은 책을 들고

 

< 힘세 천사의 위치 >

  •  바다와 땅을 밟고 섰다 ( 3, 3.5.8) : 온세상을 지배함
  •  하늘을 향해 오른손을 들고 하나님에게 맹세했다.
  •  지체하지 아니하리라

 

2) 일곱 우레가 발할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

(복음의 비밀 )

 

- 시편29편 여호와의 소리를 천둥소리로 묘사

- 변화산 사건 때에 3제자에게 < 본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

- 특별한 사건과 계시에 대해서 다 기록하지 말라.

- 하나님의 계시를 신비함과 비밀속에 남겨두는 것이다.

 

3) 지체하지 아니하리라 고 맹세한다

 ( 복음의 종말 )

( 언제 종말이 올것인가? 어느때까지 하시려나이까? 대답 )


(12: 7) 내가 들은즉 그 세마포 옷을 입고 강물 위에 있는 자가 그 좌우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하여 영생하시는 자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반드시 한때 두때 반때를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어지기 까지니 그렇게 되면 이 모든 일이 다 끝나리라 하더라


4) 일곱째 나팔을 불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마치리라 Will be finished) ( 복음의 완성 )

- 일곱째 나팔이 모든 것을 끝낼것이다.

 

(11: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 구약와 신약에 예언된 계시된 하나님의 비밀이 성취된다.

- 복음으로 하나님은 악을 완전히 패배시키고 죄에 대해서 심판하신다.

  

5) 책을 가지라. 작은책을 갖다 먹어 버리라

  ( 복음을 누림 )

 

- 이 책은 펼쳐져 있으며 봉인되지 않았다.

- 책을 먹는 행위는 계시를 받아들고 그것을 수용하는 상징적인 행위이다.

- 이 책은 계시입니다. 먹는 다는 것은 < 흡수시킨다 >는 의미입니다.

- 이것은 에스겔선지자에게 주신 소명의 장면과 비슷하다 ( 에스겔 23)

 

(3:3)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15:16)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34: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6) 내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배에서는 쓰게 되리라.

 ( 복음에 대한 이중성 )

 

- 네배에 쓰게 된다 ( 그것이 너에게 가슴앓이를 가져다 줄것이다 )

- 믿어서 증인된 우리에게는 꿀같이 단 말씀이지만. 믿지 않은 자들에게 쓴 말씀이다.

- 믿어서 증인된 우리에게는 위로와 축복이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 심판과 재앙이다.

- 믿어서 증인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때는 달콤하지만 믿지 않은 자들에게는 배척을 당하는 말씀이다.

- 믿어서 증인된 우리에게는 축복이지만 이로서 받게될 쓰디슨 고난을 의미합니다.


[딤후 1:8] (8)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7)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 복음에 대한 사명)

 

- 이것은 요한에게 주시는 사명을 재확인 시켜주고 있다.

-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나누어야할 책임이 있다.







 











  • <요한계시록 13장 1-10절>
  • 그 이름과 하늘에 거하는 자들 
  • # 설교문의 그림 인터넷 갈무리함 

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요한계시록 13:1-10>

제목 : <요한계시록 13:1-10> 그의 이름과 하늘에 거하는 자들




[13:1-10]

(13:1)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 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더라

(13:2)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13:3)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따르고

(13:4)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이르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13:5) 또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 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13:6)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더라

(13:7)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13:9)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13:10)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제목 : 그  이름과  하늘에서 거하는 자들

요한계시록은 읽을 때면 우리는 계속 < 종말에 대한 묘사와 의미 >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종말에 대한 묘사와 의미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 우리의 태도와 자세 >입니다.

요한계시록 1213장에서는 < 용과 두짐승 >이 등장합니다




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이 < 용과 두짐승 >이 이땅와 이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을 하느냐에 겁먹고 두려움을 갖는 것보다 이 < 용과 두짐슴 >의 권세와 활력이 극에 달할 때 우리 교회들과 믿는 자들은 < 무엇을 해야 하는가 ? >에 우리의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겁먹고 겁쟁이가 될것인가 ? 아니면 그 두려움과 맞서 싸우면 견디고 지키고 이길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요한 사도는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은 우리에게 4가지의 종말적인 태도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 싸우고 견디고 지키고 이기는 것 > 이 요구는 그당시 로마의 압제속에서 고통받고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이 모습이었습니다. 또한 오늘을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동일하게 요청되는 모습입니다.

< 세상 권세잡은 자들과 싸우고 그들이 주는 고난과 고통을 견디고 믿음을 지키고 세상을 이기는 것 > 바로 전투적 교회와 승리하는 교회의 그림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12장과 13장은 일곱 번째 나팔에 대한 부연설명입니다. 

13장의 환상속에 드리마는 < 바다와 땅을 무대로 하고 있습니다. > 그러나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그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 아닙니다. 바로 믿음을 지키고 인내한 성도들입니다.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알아두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1/ 바다는 어떤 곳인가

요한계시록 1715절에 의하면 열국을 가르칩니다

전통적으로 바다는 무질서와 혼돈을 상징합니다. 그시대의 역사적으로 요한이 내다보고 있었던 바다는 바로 그 당신 열국을 다스리고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었던 로마제국이면 그 우두머리 네로 황제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사도요한이 바다에서 나오는 짐승은 인류를 지배하는 세상의 권세와 나라를 의미합니다. 그 짐승의 우두머리가 정치지도자들이면 또한 그당시 그리스도인들이 핍박했던 네로황제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가장 염두해 두어야할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역사적인 정황은 로마시대이며 황제숭배를 강요받고 있는 핍박과 환란중에 있는 그 당시 성도들에게 쓰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1차 독자에게서 쓰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의도적으로 황제를 예배하고 로마를 섬기기를 강요하고 있는 이러한 심각한 위협과 도전 그리고 긴장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싸우고 견디고 지키고 이길것인가?를 도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13장 전체를 보면 우리가 볼수 있는 것은 <바다에서 나온 짐승><땅에서 올라온 짐승>이 강력한 두세력이 서로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교회를 대항하여 싸움을 걸어옵니다. 놀랍게도 11장에 하나님의 두증인이 나타나서 활동했듯이 13장에선 두 짐승이 등장합니다.

 2/ 이 바다 짐승의 모습은 어떠하면 어떤 일들을 하는가?

123절의 붉은 용처럼 일곱 머리와 열뿔을 가지고 있습니다.

(12:3)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

(17:3)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여기서 알수 있는 것은 계시록에 등장하고 있는 용들은 새로운 형태의 용들이 다양한게 등장하고 있는 것이니라 같은 용들이요 짐승인데 그 강조점이 조금씩 다를 뿐이지 모두 같은 모습입니다.

이것은 다니엘 7:2-6절에 나오는 4마리의 악한 생물이 바다에서 나오는 환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7:2-6]

(7:2) 다니엘이 진술하여 이르되 내가 밤에 환상을 보았는데 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불더니

(7:3)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르더라

(7:4) 첫째는 사자와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더니 내가 보는 중에 그 날개가 뽑혔고 또 땅에서 들려서 사람처럼 두 발로 서게 함을 받았으며 또 사람의 마음을 받았더라 또 보니

(7:5) 다른 짐승 곧 둘째는 곰과 같은데 그것이 몸 한쪽을 들었고 그 입의 잇사이에는 세 갈빗대가 물렸는데 그것에게 말하는 자들이 있어 이르기를 일어나서 많은 고기를 먹으라 하였더라

(7:6) 그 후에 내가 또 본즉 다른 짐승 곧 표범과 같은 것이 있는데 그 등에는 새의 날개 넷이 있고 그 짐승에게 또 머리 넷이 있으며 권세를 받았더라

 불은 용은 사단을 상징합니다. 바다 짐승은 그당시의 로마제국을 상징합니다.

이들을 음녀 바벨론과 상생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역할을 모두 동일합니다. 이세상의 권세로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이 바다 짐슴의 모습은 마치 먹이를 덮치는데 빠른 표범과 비슷하고 발은 마치 강한 집착력을 가지 곰이 발 같고 , 입은 마치 마구 삼치는 사자의 입과 같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만큼 이 바다 짐승으로 묘사되어 있는 세상의 권세들이 신속하고 강력하고 잔인하다는 것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강력한 통치와 영향력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니엘의 7장에 보면 < 바벨론/ 페르시아 / 헬라 / 로마 >4제국이 묘사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은 이 제국들의 모습을 짜깁기 해놓은듯하게 보입니다. 이러한 4제국중에서 그중에서 의뜸이 되고 다른 나라의 권세를 다 갖고 있는 듯이 보이는 나라가 바로 < 로마 제국 >입니다.

바로 요한사도가 밧모섬에서 바라보고 있는 현실의 상황이 바로 < 로마 제국 >입니다. 

그것을 아마도 염두해두고 모든 것을 합체한 것은 강력한 권력을 바로 이러한 형태로 묘사했을 것입니다로마는 이 전의 3제국의 모든 악함을 포함할 뿐아니라 그것을 능가하는 포학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로마에서 < 짐승같은 네로 황제 >가 있었습니다.




혹자들은 오늘 본문의 3절을 두고

(13:3)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 으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따르고

 <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라는 말을 갖고 요한 사도가 아마도 그당시에 < 네로황제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서 정권을 다시 잡는다 >는 네로황제 부활설, 네로황제 재생신화에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네로황제는 자신의 권력에서 내려와서 실제로 자살을 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속에는 < 네로가 죽지 않고 어딘가 숨어 있다가 파르티안 군대와 함께 돌아와서 로마를 격퇴하고 자신의 권력을 되찾을 것이다 >라고 하는 소문이 있었고 그렇게 사람들이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러한 소문을 밧모섬에 있는 요한 사도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요한은 < 세상의 권력이 죽을 것 같은데 놀랍게도 다시 살아서 다시 권세를 실행하는 것 >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한데 놀라운 것은 사도 요한이 왜 ? 바다의 짐슴이 상처를 입었다고 말하고 있을 까요? 그리고 계시록 13장에 보면 상처을 입었다는 표현이 3번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13:3)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따르고

(13:12) 그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사는 자들을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13:14)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그것은 그 상태가 완전한 것이 아니라 임시적인 것이다라는 것을 말해주기 위함입니다. 비록 지금은 상처가 나아 활동하고 있지만 머지않아 그 상처가 문제를 일으키고 죽게 될것임을 망하게 될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상처는 치명적인 상처입니다. 바로 원수의 머리를 치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이 오늘 활동하고 있는 사단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준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머리가 상한 짐승들이 사람들이 어떻게 합니까?

< 용과 짐슴을 경배하고 누가 이 짐승과 같으리요. 누가 이 짐승과 싸우리요 >하면서 그들을 경배하고 섬깁니다

그리고 계속 짐승들은 < 하나님과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고 대적합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살후 2:4)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3/ 이 짐승이 활동하는 기간 <만흔두달/42개월>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요?

(13:5) 또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 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마흔두달은 <3년 반>입니다. 이시간은 세상의 권력이 본격적으로 박해와 고난을 주시는 기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잠시 허용한 시간이기도합니다.

여기서 < 받으니라 >는 표현은 < 신적 수동태 >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허락하는 범위안에서 이루어짐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42개월 일할 권세를 받았기에 교회의 대적의 활동은 제한적이고 임시적이고 짧습니다.

흔히 이 42개월 해석을 마태복은 11-17절에 등장하고는 예수님의 족보의 <42세대>는 구약의 성도를 상징합니다. 또한 역사적으로는 42개월은 AD 64-68년 초반가지 약 42개월동안 있었던 네로의 박해기간을 의미합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알수 없지만 .. 이 기간을 제한적이고 임시적인 시간입니다

< 한마디로 지나가는 시간 >입니다.

 우리가 군대갈때도 그 복무 기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뭐할수 있습니까? < 견디고 지나갈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국방부 시계는 오늘 가고 있기 때문에 .. >

 일종에 42개월은 시간은 세상의 권력들이 마지막을 발악을 하는 시간이면 성도들이 지나길 시간을 인내하면서 믿음을 지키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마지막절에

[13:9-10]

(13:9)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13:10)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마지막 경고의 알람을 울리듯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

 (43:11) 그가 와서 애굽 땅을 치고 죽일 자는 죽이고 사로잡을 자는 사로잡고 칼로 칠 자는 칼로 칠 것이라

(24: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오늘도 바다의 짐승과 같은 세상 권력은 하나님의 다스림으로부터 우리의 행위와 믿음을 떼어 놓으려고 획책합니다. 그리고 정치권력으로 세상의 지배하며 그것을 바꿔 놓습니다. 이세상의 지배에 순응하며 이세상의 지배를 따르도록 요청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할 성도들을 향한 표현이 있습니다.

(13:6)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더라

 <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 >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과 하늘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디디고 땅을 벗하면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속한 하늘에 장막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원치 않은 핍박과 고난을 견디고 이기는 힘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인애와 믿음이 있습니다

그렇게 오늘도 계시록적 종말의 삶을 인내와 믿음을 증명하며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요한계시록 9:13-21>
  • 심판에 관하여 



@ 설교문중에 그림 인터넷 갈무리함 

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요한계시록 9:13-21>

제목 : <요한계시록 9:13-21> 심판에 관하여








[9:13-21]

(9:13)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들으니 하나님 앞 금 제단 네 뿔에서 한 음성이 나서

(9:14)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 하매

(9:15)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준비된 자들이더라

(9:16) 마병대의 수는 이만 만이니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

(9:17) 이같은 환상 가운데 그 말들과 그 위에 탄 자들을 보니 불빛과 자줏빛과 유황빛 호심경이 있고 또 말들의 머리는 사자 머리 같고 그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더라

(9:18) 이 세 재앙 곧 자기들의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말미암아 사람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니라

(9:19) 이 말들의 힘은 입과 꼬리에 있으니 꼬리는 뱀 같고 또 꼬리에 머리가 있어 이것으로 해하더라

(9:20)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9:21)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제목 : 심판에 대하여

요한계시록은 마치 77장의 드라마 같습니다. 7번이라고 완전한 수에 어울리는 교회의 그림, 종말의 그림, 심판의 그림, 회복의 그림들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환상과 그림들속에서 헛된 우상과 세상은 철저한 심판을 경험하고 마지막까지 남은 교회와 성도는 기필코 승리하게 되는 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에서 나오는 < 77장의 드라마 >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지금 요한계시록의 본론이라고 할수 있는 종말의 때에 일어날 심판의 이야기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한번 집고 넘어가야할 오해하기 쉬운 생각이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7가지 인, 나팔, 대접의 환상과 메시지를 대하는데 가장 주요한 관점이 있습니다.

 

1/ 종말은 마지막, 끝만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종말은 회복을 의미합니다.

종말은 < the end > <ending>을 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종말은 에덴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창조 때의 모습으로 회복하는

그 순간 이 바로 종말입니다. 요한계시록의 77장의 환상과 메시지의 마지막 목표는 < 회복될 새하늘과 새땅 > 바로 에덴의 회복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2/ 심판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화풀이가 아니라 완악한 인간의 자충수입니다.

자충수가 뭡니까? 스스로 한 행동이 결국에 가서는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관점입니다. 심판은 하나님이 강압적인 힘과 능력으로 하나님이 불쾌함을 표현하는 일이 아닙니다. 이 심판은 인간이 스스로 자초한 자멸의 결과입니다. 완악한 인간이 스스로 자초한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심판은 < 자업자득이며 자승자박이고 지리 멸렬 >하는 일이다.

# 자승자박 : 제 줄로 제 몸을 옭아 묶는다는 뜻으로, 자신이 한 말과 행동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구속되어 괴로움을 당하게 됨을 이르는 말입니다.

# 지리멸렬 : 이리저리 찢기고 마구 흩어져 갈피를 잡을 수 없다. .

 

3/ 7번씩 3번 등장한 심판의 이야기는 횟수나 순서를 말하지 않습니다.

심판의 확실성과 완전성을 의미합니다. 7번은 완전성을 의미합니다.

3번은 확실성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들 특유의 강조의 방법입니다.

 

4/ 심판과 종말의 그림은 구약의 출애굽때의 10가지 재앙의 그림을 그대로 가져오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환상과 상징들은 유대인들이라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를 이미 잘하고 있는 그림언어들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특히 심판에 대한 그림은 구약의 출애굽 당시에 애굽의 바로와 헛된 우상을 심판하는 방식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출애굽 당시에 10가지 재앙은 하나님을 알지못하고 마음이 완악하고 강팍한 바로와 애굽백성에게는 철저한 심판이었지만 하나님이 구별하시고 남기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의 백성이 모세와 이스라엘백성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며 보호이며 은혜였습니다.


바로 이 관점에서 우리는 더 이상 요한계시록을 두려움의 시선과 겁먹는 마음을 보지 말아야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서 겁에 질려야하고 깜짝놀라고 긴장해야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과 보호속에 있는 우리가 아니라 헛된 우상과 여전히 완악한 마음에 속에 있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주도하고 있는 원수 마귀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에서는 심판의 메시지 만큼이나 찬송이 많이 나오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놀라운 사실을 깨달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심판속에서 할 일은 자신을 이 두려움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작년에 했던 <송목사님의 요한계시록 강해>를 다시듣고 참고서들을 읽으면서 몇가지로 정리를 해보았습니다. 조금더 자세한 이야기는 < 송목사님의 요한계시록 강해 >을 들어 보시면 더 잘 아실수가 있으실 겁니다. 이번기회에 다시금 정리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제 그렇다면 오늘 주어진 본문 9장에 등장하고 있는 < 여섯째 나팔을 부는 환상 >을 어떠한 관점에서 묵상해야 할까요?

 

오늘 여섯 번째 나팔은 유브라데에 결박된 네 천사가 풀려나서 이만만 즉 이억명이나 되는 마병대를 끌고 다니면서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사람들의 1/3을 죽이는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앞에 첫 번째부터 네 번째 나팔의 심판은 자연재해를 통한 심판이었다면 5번째 6째번째 심판은 사람을 직접적으로 타격하는 심판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5번째 나팔 재앙에서 나타난 황충의 심판에서 우리가 인상적으로 볼수 있었던 것은 고통당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9:6)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로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고 흉측한 황충들에게 무려 다섯달 동안이나 괴롭힘을 당하게 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6째번째 나팔을 울리고 < 네천사 >가 유브라데강가에서 풀려 납니다.

여기서 < 네 천사 >< 하나님의 천군 천사가 아닙니다. 바로 세상의 악한 사자들이며 악의 세력을 의미합니다. > 이 천가 풀려난 곳이 바로 < 유브라데 강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 유브라데 강 >을 건넌다는 것은 < 이방나라들의 침략 >을 의미합니다. 주로 앗수르, 바벨론과 페르시야는 바로 이 <유브라데강>을 건너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침략해왔습니다. 그래서 < 유브라데에서 풀려 났다 >는 의미는 바로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적인 경험을 배경으로하고 있습니다.

 

유브라데에서 풀려난 네 천사는 <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준비 된자들 >었습니다. 그 마병대의 수가 < 이만 만 >이라고 말합니다. < 2억명>인데 주로 유대인들이 < 셀수 없는 수를 강조할 때 만만 이요 천천 이라고 하는 것처럼 이 숫자의 의도 실제의 수라기 보다는 엄청나게 많은 수 >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본문의 16-19절의 이 사람들을 죽이려고 준비된 마병대의 모습이 7-10절에 나오는 황충의 묘사와 아주 비슷합니다. 이것은 같은 그림이 반복 강조되고 있음을 말합니다.


[9:16-19]

(9:16) 마병대의 수는 이만 만이니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

(9:17) 이같은 환상 가운데 그 말들과 그 위에 탄 자들을 보니 불빛과 자줏빛과 유황빛 호심경이 있고 또 말들의 머리는 사자 머리 같고 그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오더라

(9:18) 이 세 재앙 곧 자기들의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말미암아 사람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니라

(9:19) 이 말들의 힘은 입과 꼬리에 있으니 꼬리는 뱀 같고 또 꼬리에 머리가 있어 이것으로 해하더라

 

[9:7-10]

(9:7) 황충들의 모양은 전쟁을 위하여 준비한 말들 같고 그 머리에 금 같은 관 비슷한 것을 썼으며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 같고

(9:8) 또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 있고 그 이빨은 사자의 이빨 같으며

(9:9) 또 철 호심경 같은 호심경이 있고 그 날개들의 소리는 병거와 많은 말들이 전쟁터로 달려 들어가는 소리 같으며

(9:10) 또 전갈과 같은 꼬리와 쏘는 살이 있어 그 꼬리에는 다섯 달 동안 사람들을 해하는 권세가 있더라

 

바로 이것은 < 헛된 우상과 옛뱀 곧 사단 >의 모습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헛된 우상과 원수 마귀의 모습니다. 이러한 것이 마치 떼로 몰려다니면서 인간들을 공격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점이 생깁니다. ? 하나님은 유브라데에서 악한 사자들이 활기를 치도록 내버려두십니까? 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잘 생각해보아야 할것이 있습니다.

< 하나님이 사람들을 그렇게 심판하도록 내버려두셨다고 보기 보다는 너무 세상의 우상과 악의 세력이 마치 황충의 때와 이만만의 보병대처럼 셀수없이 하나님이 붙잡고 있던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고 이해해야합니다.

 

다시말씀드리면 < 이 심판은 하나님이 일부러 이러한 사자들을 보내어서 심판하려 한 일이 이나 하나님이 일으키신 심판이 아니라 세상에 죄악이 너무도 관영해져서 더 이상 통제할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통제할수 있으시지면 그 손을 놓아 버리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도 하나님이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이 순간에도 <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오길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들은 없었음을 오늘 본문은 분명히 2번이나 강조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9:20-21]

(9:20)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9:21)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제가 오늘 본문과 관련한 송목사님 요한계시록의 설교를 다시들으면서 설교 결론 부분에서 하나 인상적이 었던 것은 이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 주님의 재림이 하나님의 손에서 일어나는 일이 쉬울까요? 아니면 인간의 손에서 일어나는 일이 쉬울까요 ?

다시말해서 이시대의 무서운 것은 예수님의 재림보다 인간이 완악함으로 잘못 누르는 버튼 하나로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인간이 스스로 일으키는 전쟁과 싸움이 더 심각한 심판의 결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은 하나님의 의해서가 일어나는 일보다 인간의 욕망의 결과로 더쉽게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은 우리의 욕망에 대한 응답입니다. 심판은 하나님이 한분의 결정이라기보다는 우리안에 도사리고 있는 욕망의 결과물입니다.

 

세상의 심판이 시작되었다면 하나님의 소원되로 되는 일이 아니라 세상의 소원대로 되는 일입니다. 심판은 하나님이 우리의 욕망대로 살도록 손놓아 버릴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

 

오늘 본문은 6번째 나팔재앙으로 사람들의 1/3이죽임을 당하면서도 사람들은 <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 > 뭐하고 있는지? 그들이 뭐하고 있지 않는지?를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뭐하고 있죠 ? 여기 귀신과 우상에 절하고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합니다. 이것이 여전히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뭐하고 있지 않았나요? 회개하지 아니라하더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이 완악한 헛된 욕망과 우상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하길 원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무자비하게 맘에 안다고 자신의 힘을 인간을 억압하거나 부당한 폭력을 행사하는 분이 아닙니다. 끝까지 참고 끝까지 기다리고 우리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전히 스스로 자초한 심판을 당하면서도 회개치도 않은 <자충수>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리멸렬>의 길을 서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요한계시록의 심판의 메시지를 통해서 분명히 보아야할 우리의 모습입니다. 요한 사도는 바로 이러한 준엄한 음성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 < 요한계시록 1:1-9 > 
  • 계시록 그 이해와 오해 



  • @ 설교문중 그림은 인터넷 갈무리함  

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요한계시록 1:1-8>

제목 : <요한계시록 1:1-9> 계시록 그 이해와 오해





[1:1-9]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1: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1: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시며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과

(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1:6)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1:7)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1: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제목 : 요한계시록 그 이해와 오해


오늘부터 이제 요한계시록을 묵상하게 됩니다.

요한계시록을 묵상하게 되는데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제가 기록을 보니 201011/12월 본문이 바로 요한 계시록이었습니다

이제 4년이 지나고 올해 10/11월에 다시 요한계시록의 본문이 큐티 본문으로 등장했습니다..  한동안 < 계시록과 깊은 사귐을 가지고 묵상하는 시간>을 갖게 될것입니다.


송목사님께서 금요기도회를 통해서 <요한계시록>의 흐름과 방향을 강해해주셨고 그리고 한국에서 이필찬 교수님이 오셔서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을 것인지?>을 설명하는 세미나도 있었습니다. 많은 도전과 배움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기회가 되시면 송목사님의 <요한계시록 강해>CD를 구입하셔서 이번 새벽 묵상말씀에 도움을 받으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제 블러그에 <이필찬 교수님의 요한계시록 세미나의 내용>을 정리해서 올려 놓은 것이 있습니다.


http://ever-flowingstream.tistory.com/181


매일 큐티말씀을 묵상하면서 큰 맥과 방향을 잡는데 도움이 되실 겁니다.

 

우리가 흔히 요한계시록을 읽고 묵상하면 왠지 모를 긴장감과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 본문을 대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리고 때로는 요한 계시록을 오해하기도 합니다.


먼저 요한계시록을 읽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 요한계시록의 그 이해와 오해 >을 먼저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한계시록을 어떤 관점과 이해를 가지고 읽어 내려가는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것이 요한계시록의 중심사상과 핵심을 붙잡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난해한 상징이나 숫자나 종말의 징조들에 너무 집착하보면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고자하는 핵심과 중심사상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기 보다는 그러한 난해한 상징이나 숫자에 치우친 나머지 요한계시록을 오해하고 오용하는 잘못된 모습을 나아가기도 합니다


바로 거기서 < 이단 ,,, 삼단 >이 나오는 것이죠.

 

저는 오늘 아침에 요한계시록 1장의 문을 열면서 우리가 가져야하는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 큰 방향을 나누고자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그리고 요한계시록 전체에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할 중요한 것들을 집고 요한계시록의 첫장의 문을 열어보고자 합니다.

 

< 요한 계시록을 어떻게 읽어야하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


어떤 성경의 본문의 말씀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계시>로 주셨습니다. 

오늘 요한계시록 1장에서도 그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1:1-3]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1: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여기서 <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고 할 때 헬라어< 아포칼룹시스 >< 숨은 것을 드러냄 >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현현 특히 역사의 종말에 있을 사건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 를 가리키는 낱말입니다.


요한계시록은 <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계시 >입니다. 자신을 우리게 밝히 드려내시는 메시지요, 약속이요, 복음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라는 질문은 요한계시록은 어떤 책인가? 라는 질문으로 바꾸어 볼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어떠한 성격의 책인지를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느 책을 읽든지 그 책의 종류에 따라 읽는 자세와 감정상태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은 요한계시록이 어떤 책인지? 분명히 밝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1/7<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말합니다. 볼지어다 구름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리라고 약속하는 묵시입니다>

3<요한계시록은 예언의 말씀말하고 축복의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4<요한계시록은 요한이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는 서신서입니다.>

5<요한계시록은 죽은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송영입니다.>

 

이처럼 요한계시록의 장르는 < 묵시문학 이며 서신서이며 축복과 송영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

 

요한계시록은 서신의 형식으로 기록된 묵시적 예언입니다

그래서 이 책에 대해서 3가지로 정의하고 있다


.첫째는 계시(1:1)이고 둘째는 예언(1:3)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신의 형태를 띠고 있다. 발신자는 요한이고 수신자는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이다. 그러므로 계시록은 묵시적 예언으로서 로마 제국의 아시아 지방의 일곱 교회들에 보내진 순회서신의 형태로 기록된 책이다.

 

이모든 배경에는 가장 핵심적인 2가지 배경이 있습니다.


첫째는 구약의 상징과 그림언어의 배경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구약의 구속사적 흐름고 구약에 기록된 다니엘서과 스가랴에 나오는 상징의 그림들과 병행해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과정이 필요하기에 요한계시록을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는 그당시 1세기 교회가 직면하고 있었던 로마의 정치적 상황을 이해해야만 왜? 요한이 그 당시교회들에 이러한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었는가?를 이해할수 있습니다


그당신 교회들은 로마황제에 의해서 < 황제 숭배 >를 강요받고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시대적인 배경은 주후 90년대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대의 황제 숭배 강요와 핍박의 상황에서 전해진 복음이었습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자신을 주와 하나님으로 부를 것을 강요하였고, 그것으로 자신에 대한 충성심을 확인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사역하던 아시아 여러 곳에서도 황제 숭배를 위해 신전이 세워졌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거부하여 죽거나 하는 절대절명의 핍박과 고난의 시대를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핍박과 고난속에서 절망하지 않고 소망을 붙잡도록 이러한 놀라운 이상과 상징으로 소위 그당시 그리스도인이라면 알아들을수 있는 상징언어, 그림언어로 그들이 당하고 있는 고난속에서 포기할수 없는 소망이 있음을 알도록 전하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요한은 로마 권력에 대해 철저한 선지자적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가 밤모섬에서 보았던 그리고 하나님 그이게 보여주었던 그러한 신비하고 놀라운 환상으로 계시록을 쓰고 그것을 두려움없이 전할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당시 핍박받고 고난받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어진 <요한계시록>은 그들의 두려움을 이겨내는 말씀, 두려움을 떨져 버리고 참된 진리와 소망을 부여잡는 복음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요한계시록을 읽고 있는 우리는 여전히 잘못된 종말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 그러한 성경으로 읽혀지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읽는 것조차 두려워하고 있는 이 아이러니 한 현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 두려움을 떨쳐버리는 계시가 두려움을 갖게 만드는 계시가 되어버린 꼴 >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바르게 이해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먼저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나오는 모든 상징과 그림언어들을 다 이해할수 있다는 욕심을 버려야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상징과 그림언어들이 명쾌하게 말해주는 부분도 있고 여전히 명쾌하지 않는 상징으로 남아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분명히 우리가 부여잡고 묵상해야하는 중심사상과 핵심메시지를 붙들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르게 이해해야할 요한계시록의 중심사항, 핵심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첫째, 요한계시록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교회입니다.


현재 교회가 처한 최악의 상황을 말하고 그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 최악의 상황은 로마의 황제숭배와 같은 통치속에서 이러한 통치 이념속에 있는 교회에 대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교회가 될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이다.

 

요한계시록은 교회에 대하여 두가지 그림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승리하는 교회고 다른 하나는 전투하는 교회이다.

이 두 그림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고 본래는 하나다.

그속에서 교회공동체의 성도들은 믿음과 인내를 배웁니다.

 

둘째, 요한계시록의 또 하나의 축약된 주제는 < 종말 >이라는 주제입니다. 


이 종말이라는 주제는 민감하기도 하고 왜곡되어 있기도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핍박받는 교회들에 대한 목회적 당부이며 요청입니다. 이 메시지는 상황은 다르지만 영적인 도전은 같은 오늘의 시대를 향한 메시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종말>< >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흔히 <종말>하면 말세. , 심판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종말이란 창조의 회복이 성취되고 완성되는 순간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 성경적인 회복은 타락한 이세상을 회복하는 순간을 의미합니다. 바로 그날이 그때가 바로 <에덴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초림은 에덴의 회복의 성취이고 재림은 에덴의 회복의 완성입니다.

세속적인 종말은 바로 <>을 말합니다. 성경적인 종말은 바로 <회복>을 말합니다. 이미 종말이 시작되었고 예수님의 재림에 완성됩니다. 우리의 생각의 전환 : 바로 예수님의 탄생이 종말의 사건의 시작입니다. 바로 종말의 성취를 말하고 있습니다.

 

셋째. 요한 계시록의 <예언>은 과거/현재/미래를 다 포함합니다.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성경에서 <예언>은 우리가 흔히 아는 미래 시점만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먼저 <예언은 미래다> 라고 하는 잘못된 오해를 바로잡아야합니다


에언은 < 미래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 그런 내용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서 예언은 <나비>라는 단어는 대언하다는 뜻입니다. <누구 앞에서 말하다> 뜻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을 바르게 알고 있는 사람이 그분에서 말하는 것이 바로 예언입니다. 이 예언은 과거/현재/미래를 다 포함합니다.


선지자들의 예언의 내용은 < 너희가 하나님을 떠났다. 그래서 심판이 필연적으로 있을 것이다. 그리고 회복이다. 돌아오라 >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요한계시록의 예언은 < 과거.현재,미래>를 다 포함합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뜻과 계속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단순히 미래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다.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그것만 말하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왜곡과 오해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로만 하기에 상당한 왜곡입니다.

 

넷째. 요한 계시록은 < 순종 >을 요구합니다. 요한계시록은 <호기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여기서 <읽은자(단수) > <듣는자들/지키는자들(복수)>입니다.  

한사람이 읽고 듣고 지키는자는 다수입니다

< 복이 있나니... 왜냐하면 때가 가까움이라. > 라고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의 복은 바로 < 듣고 지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때가 가깝기 때문입니다. >


< 때가 가깝다 >는 것은 <아직 안온 것이 아니라 때가 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가 가까운 것은 < 종말의 때가 온것을 의미합니다. >.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통해서 이 땅에 온 것입니다.


황제를 숭배하지 말고 하나님 만을 섬기라는 이 메시지를 듣고 지키는 것은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하나님의 때가 왔고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땅에 도래했다고 했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 그 나라의 맛을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다스림을 경험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경험하는 통로가 됩니다.


요한계시록은 <호기심>이 아니라 < 듣고 지키는 것>에 대해서 집중해있다.

우리는 예수님이 언제 재림하느냐?에 대해서 관심이 크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오늘 현재의 삶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에 집중한다.


종말은 바로 예수님의 오심으로 시작되었다.

요한계시록은 이미 종말이 시작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의 탄생의 사건으로 부터.....













  •   <갈라디아서 3:10-18>  법보다 약속입니다.
  • 율법은 인간적 성취를 요구한다. 그러나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일에 대한 믿음을 요구한다. 율법은 요구사항을 만들고 우리에게 복종을 요구한다. 하지만 복음은 약속을 제시하고 우리에게 믿음을 요청한다. - 존스토트 -


[3:10-18]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3: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3:15)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3: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3: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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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간에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로 잠간 쉬었던 < 갈라디아서 >를 다시 묵상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서신중에서 가장 앞선 기록인 갈라디아서는 초기 사도바울의 복음의 열정과 그의 뜨거움을 옅 볼수 있는 서신입니다.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복음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이상 어리석게 너희가 유대의 전통이나 할례나 율법에 매여 있지 말고 복음이 주는 참된 자유를 맛보고 그렇게 담대하게 살아가기를 도전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전체의 6장을 3부분으로 나누어서 복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1-2장은 < 은혜의 복음을 변호함

3-4장은 < 은혜의 복음을 설명함 >

 5-6장은 < 은혜의 복음을 적용함 >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3장은 사도바울이 < 은혜의 복음을 설명함에 있어서 모세의 율법보다 먼저 있었던 아브라함의 믿음, 아브라함의 의롭게 여김을 가지고 복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방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그 이방에서 복음을 받아들고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계속 고민스럽게 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우선인가? 아니면 유대인이 되는 것이 먼저인가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중요 한가 ? 아니면 유대인으로 사는 것이 중요한가 ? 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도 율법을 버릴 수가 없었고 그 율법을 버리는 것이 그들에게 상당히 위험한 결정이었습니다. 심지어 유대에서 가만히 들어온 거짓 교사들이 그들의 마음을 충동질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면서 율법을 지켜야한다고 율법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그들에게 찾아오는 것이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은혜의 복음을 설명하면서 모세의 율법보다 먼저 있었던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가지고 옵니.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게 여겨진바 된 것은 그에게 율법의 행위로 있어서 되어진 것이 아니라 < 그가 믿는 믿음 때문이라 >라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 율법은 죄를 다루기 위한 것이지 의를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아브라함보다 훨씬 후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훨씬 뒤에 만들어진 율법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보다 먼저일수가 없다는 것이 바울의 핵심적인 논리입니다. 그래서 율법보다 우선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기능은 죄를 드러내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세상에서 구별된 의식과 질서를 따르도록 돕기 위한 것입니다


율법의 궁극적인 기능은 죄를 지으면 초래하게 되는 심각한 저주가 무엇인지?를 알리고 경고하는 데 있습니다. 결코 율법을 행함으로 의를 이루거나 믿음을 갖지는 못합니다. 그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율법입니다


오로지 율법의 기능은 < 믿음을 돕기 위한 것 >입니다.


율법은 인간적 성취를 요구한다. 그러나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일에 대한 믿음을 요구한다. 율법은 요구사항을 만들고 우리에게 복종을 요구한다. 하지만 복음은 약속을 제시하고 우리에게 믿음을 요청한다. - 존스토트 -



율법은 정의의 법정이지만 복음은 은혜의 보좌이다. - 조지 스윈녹 -

 

오늘 본문에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그 율법의 저주를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대신 담당하심으로 우리에게 주어져야할 율법의 저주를 속량하셨습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감당해할 율법의 저주가 없어진 샘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길를 따르지 않고 우리를 위해서 율법을 완성하시고 율법의 저주에게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이 열렸음을 알아야합니다.

 

우리에게 놓여있는 2가지 루트(ROUTE)가 있습니다.

율법을 다 지키며 의롭게 되고 그렇게 사는 루트가 있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 그렇게 사는 루트가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율법을 통해 의롭 되는 사람이 없으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사람은 있습니다. 바로 그것을 아브라함의 믿음과 의롭게 여김이 보여주었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를 뒤집어 쓰시고 죽으신 예수님이 그 새롭고 산길을 여셨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저주아래 묶어 놓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덕분으로 예수님의 덕택에 그 율법에서 빠져나와서 그 은혜와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놀라운 주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묵상하며 도전 받는 것은

우리의 믿음은 율법보다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의롭게 됨은 율법의 행위보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참된 복은 율법안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3가지 사실이 우리의 복음의 참다운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덕분에게 우리에게 주어져야할 율법의 저주가 치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이 우리도 약속을 유업을 받은 아브라함의 자녀와 복을 누리는 자들로 우리를 끼워주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십자가 사건은 율법아래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감당하는 사건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저주를 받으신 것이다. 이 방법으로 우리를 되찾아 왔습니다. 율법의 저주를 끊기 위해서 그분이 스스로 저주를 받는바가 되고 저주를 받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다는 것은 그렇게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저주를 담당하고 뒤집어쓰시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를 진다고 말할 때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박힌다고 말할 때 그 의 의미는 율법의 저주를 다 담당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죄를 뒤집어 쓰고 많은 이들의 유익을 위해서 살아야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저주받으심이 오늘 우리에게 복받음으로 이어집니다. 구약성경에서 < 저주와 복 >은 항상 대조를 이루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됩니다. 오늘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예수님안에서 이루어진 < 저주와 복 >에대한 분명한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각각 하나님의 약속과 계명에 대한 순종이 복을 위한 필요조건이었습니다.


하지만 갈라디아 교회에게는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나무에 달려 저주가 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구원(이신칭의)의 차원의 복을 위한 필요조건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9-10절의 복과 저주의 현재적 특성은 구원의 차원이라기보다는 현재적인 삶과 관련된 복과 저주의 차원을 말한다.

 

우리에게 <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게 되는 > 놀라운 일들이 주어졌습니다.


(3: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율법의 저주가 아브라함으로 복으로 바뀌는 그 과정속에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을 누리고 있음을 확증해주시는 것이 바로 <성령의 약속>입니다.

 

성령께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을 개런티<guarantee>해주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약속의 복을 워런티<Warrantee>해주십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 그리스도을 믿고 성령님을 받아들이는 우리에게 주어진 복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율법보다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의롭게 됨은 율법의 행위보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참된 복은 율법안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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