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도와 약함 3 (김도현교수)
약함의 신학 (고후 12:1-10)



[고후 12:1-10]
(고후 12: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고후 12: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고후 12: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고후 12: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고후 12: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고후 12:6)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고후 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12: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고후 12: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 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그 십자의 도에 드러나는 약함에 대해서 나누고자합니다. 

사도바울의 영적 경험에 대해서 부득불 드러낸다..  

특별히 < 자랑한다 > 는 단어를 사용하는 바울 
11장 -12장에 15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 자랑함에 대한 문화적인 배경 > 

- 고린도 교회인들의 문제들 때문에 < 자랑한다 >는 용어를 일부러 사용하는 것 같다. 그 당시에 로마시대에 자랑할것을 자랑하는 것은 일반적인 문화였다. 지식인들 고위 관리들은 전부다 이룬것에 대해서 <레이스게스타이> 자신이 자랑할것들을 적어서 가져 다닌다.


- 아이구스도의 업적을 자랑하는 대표적인 <레이스 게스타이>를 가지고 있었다. 로마시대의 고관들은 자신의 자랑할것을 기록하고 있다. 일종의 이력서이다. 


- 고린도 전후의 기록당시에 이 교회를 시작했던 바울에 대한 의심이 있었다.  이사람이 진정한 사도인가? 이 사람의 이력서가 형편이 없다.

 왜 도데체 이사람은 자랑할것인 없는 사람이 아닌가? 


바울은 자랑할것이 많은데 안하고 있을 뿐이다. 


고린도 후서 11장 18절 


바울의 레이스 게스타이가 나온다.  새번역으로 읽으면 더 의미가 살아난다.  


많은 사람이 육신의 일을 가지고 자랑하니, 나도 자랑해 보겠습니다. (고후11:18, 새번역)


바울은 자랑한다면 나의 고난과 약점들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이상한 자랑을 하고 있다. 


바울이 자랑하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절대로 자랑할수 없는 것을 자랑하고 있다.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능력의 사도라면 

하는 일마다 잘되어야한다. 그리고 가는 길마다 형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일이 잘될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고린도 교회였으나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이 잘 안되었다. 


위험. 고생, 고난, 핍박, 희생, 아픔, 파산 


무엇을 자랑하느냐 ? 나의 약점들을 자랑한다. 

사람들이 자랑할수 없는 것들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32-33절은 그 당시에 문화로는 충격적인 이야기이며 치욕적인 이야기이다. 


성안에서 광주리를 타고 탈출했다. 


그 당시 고린도 교인들의 원하는 상이 있다. 가장 명예로운 것은 <코로나 무랄리스>라는 관을 받게 된다. 전쟁을 할때 적군의 성에 가장 먼저올라간 사람이 이 관을 받게 되어 있다. 



거꾸로 내려가는 삶이란? 어이가 없는 것이다. 

너무나 창피하게 수치스러운 일이다. 


코로나 모랄레스의 정반대를 말하고 있다. 

자기의 약점을 자랑하고 있다고. 

영웅이 아닌 약하디 약한 삶을 도전하고 있다. 


오늘 한국에 스펙 / 논문 표절 / 학위 위조 / 가짜 논문 / 자신의 체면 / 명예를 높이려하는 것이 현실이다. 


자신의 실패를 이력서에 적어두는 사람이 없다. 


다 양반이고 왕족이었다. 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조선시대에 양반계급은 5-10%이다. 대부부은 상민, 중인. 노비 백성이다. 그러나 오늘은 모두다 양반이다. 확실한 신분 세탁이 된것이다. 


옛날의 조상이 뭐했는지 조용히 말하지 않고  다 양반이라고 말한다. 


바울의 정말로 이상한 이력서를 자랑하는 것이다. 

자신의 약점을 기록하고 있다. 

자신의 연약한 능력을 자랑하고 있다. 그 자신의 잘못된것을 기록하고 있다. 



바울은 그당시의 문화와 정반대로 갔다. 


12장 1절에 가면 고린도 교인들이 그렇게 듣고 싶은 자기 자랑이 나오는줄 알았을 것이다. 


14년전에 일어난 일에 대한 것...

바울은 그 경험 자체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다.


6절에 말할길.. 그것을 제 3자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다. 

그 사람을 자랑하려고 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약점만을 자랑하고 있다. 


사도로써의 자격을 있지만 자신의 환상으로 자기를 자랑을 삼지 않겠다..


바울이 그리스도인으로 삶과 행동에 십자가가 보이는가? 

그것으로 사도임으로 증명하고 싶다. 


유대인들은 하늘이 7층으로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바울은 3째 하늘에서 다녀왔다. 

이 체험이 자기 자랑꺼리로 삼지 않겠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십자가가 보이는가? 

드러나고 있는가를 통해서 자신의 누구인지? 증명하고시자 한다. 



<고린도 교회 당시의 배경 > 


고린도시 : 항구도시, 사창지대, 윤리적 타락, 신전의 창녀들이 많았다. 

고린도 인같이 행동한다는 말은 성적인 표현이다. 

하지만 그러한 육적인 문화속에서 영적인 경험을 추구했다. 

영적이면서 세속적인 모순적인 이원론적인 삶이었다. 

육체적으로 죄를 지었지만 영적인것만 좋으면 된다. 


그래서 십자가를 영혼구원의 방법으로만 사용한다. 

십자가는 행위와 관련된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민목회는 사랑, 위로가 필요하다. 어려운 이야기 하지말고 위로해야한다. 맞는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베이비 시팅하는 것처럼 생각해야한다. 


한국에서 지위와 명예가 있었지만... 미국에서 노동하는 사람이 되었다.

미국에서 양복입고 대접좀 받으려고 한다. 대접해주고 위로해주어한다. 

성숙해져서 다른 사람을 섬기겠지.. 라고 생각한다. 


이민교회가 사랑과 위로는 전했을지 몰라도 십자가의 도를 가르치지 않았다. 


현실을 부정하고 좋은 일만 일어날 거라고 가르쳤다. 


- 이민교회는 어린아이 투정 집합소를 만들어 놓았다.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행위의 열매가 나타나야한다. 


너희는 믿음안에 있는가 너희를 시험하고 확증해보라. .... 


미래의 완성될 구원으로 가고 있는지 테스트 해보라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와 함께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고 있는가?


- 예수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있는 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께 버림 받은 사람이다... 

   여기서 너희는 < 복수 >이다. 


- 가나안 성도 : 안나가 성도 / 200만명은 가나안 성도라고 생각한다. 

                       교회를 나가지 않은 상태로 신앙생활하겠다. 


- 교회 공동체에 속해 있지 않으면 자기의 믿음을 시험해보고 확증할 방법이 없다. 내가 고백하는 믿음이 이 공동체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알수 있다. 


- 나의 삶속에 세상의 기준으로 인정받는 것으로 가득한지? 아니면 하나님의 기준으로 인정받는 것으로 가득한지?


무엇이 자랑되고 있는가?


사도 바울은 약점만을 자랑하고 싶어한다. 

고린도의 오해를 풀어내고 싶어한다.

자신의 영적 경험이 자만하게 만들고 교만하게 만들었다. 


 바울이 어떤 가시를 가지고 있는지? 


- 자신의 가시가 있다. 가시는 고문도구이다. 

   양쪽이 재법긴 도구이다. 사도바울은 <가시:스톨롭스>가 있다고 말한다.

 

- 무엇인지는 알수 없지만..  사도 바울을 계속 고통받게하는 것이다. 

   어떻게 사도가 되어서 저런 가시와 약점을 지닌 사람인가?



우리의 가시는 가장 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것이다. 그것을 컨트롤하고 싶지만 그렇게 되지 못한다. 그래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듯 외면하며 살아간다. 

결혼생활, 단절된 관계. 부서진 관계, 어쩔수 없는 자녀, 육체적인 어려움, 가족중에 겪고 있는것, 자녀들이 겪고 있는것, 깊은 우울증. 패배감, 나혼자 밖에 없다는 깊은 외로움 


우리의 삶의 이러한 가시가 있다. 



크레익 반스 목사님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를 이야기했다. 

자신의 삶의 가시에 대해서 이야기...30여년의 아픔


하나님의 우리 가족의 상처를 통해 

내가 어떤 사역을 해야할지?를 결정하셨다. 


brokenness 드러내는 것...


왜? 바울이 사도이면 고난을 많이 받느냐? 

왜 이렇게 약점이 많고 자랑할것이 없느냐 ? 


가시를 위해 3번 간구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 3번 기도... 오랜기간동아 필사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했다. 바울은 이 가시를 없애다라고 필사적으로 기도했다. 


고린도 교인들이 기대했던것은 < 기도했더니 가시가 없어졌다 >는 그 말을 듣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간증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랜 기간 응답하지 않고 가시는 그대로 남아있고... 

바울을 혼돈스럽고 아쉬울 것이다.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해 보신적인 있나요?

아무 응답도 없으신 하나님의 침묵.... 


마침내 하나님은 바울에 응답하십니다. 

< 내 은혜가 족하다 > 이미 받은 은혜로 충분하다. 라고 말씀하신다.


은혜는 우리의 삶속에 끊임없이 같이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은혜는 우리의 삶속에 있다.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와 좋으심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단순히 죄용서만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삶속에 머물고 계심을 경험하는 것이다. 


바울의 능력이나 강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함이 나타났다. 


< 2세기 바울의 외모 >


 바울은 키가 작고 머리가 벗겨졌고 다리는 휘었고 눈섭이 연결되어 있고 코는 휘었으며.... 그러나 은혜가 충만했더라.... 


그의 삶속에 얼마나 은혜가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능력이 아닌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곳에 있었다. 


가시를 제거함으로 사람의 능력을 나타날수 있어지만 

그러나 가시가 그대로 있음으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났다. 

하나님의 약함 속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게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게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장막을 치게 하려 함이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안에 거하게 ... 

이것은 장막을 치는 것.. 임재와 같이 하심을 의미한다. 


장막중에서 계서서 이스라엘 가운데 계신것처럼... 

약함으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바울의 몸안에 텐트를 치는 것입니다. 


바울의 진리는 이세상의 상식과 벗어나는 것이다. 

이 세상의 파워를 가져야 능력을 행할수 있다고 생각한다. 


< 꼬리가 되지 말게 하시고 머리가 되게 하소서.>

경쟁에서 이겨야한다. 높은 지위에 올라야한다. 그렇게 가르친다. 


병이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사도바울은 오히려 정반대라고 말한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정반대이다. 

세상의 진리가 고린도교회를 사로잡았다. 

세상의 문화와 원리가 < 자랑, 힘, 권력의 문화 >가 지배하고 있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약함속에서 완전해진다. 

우리의 가시를 통해서 그것을 알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다. 



<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도전과 적용 > 


1) 우리가 우리의 가시를 끌어안아야한다. 


 가시를 own 하는 삶이다. 그 약함으로 하나님께 완전히 복종되고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안에 장막치게 하는 것이다. 그 어려운 환경에 벗어나려고만 하지 말고 그것을 끌어 안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해야한다. 


오히려 어려움과 약함가운데 하나님께 드리고 복종하는 것이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의 삶속에 나타난다. 새로운 관점을 받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장막치는 것이다. 


교회는 가시를 안고 가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약하고 부서지고 상한 이들이 모이는 곳이어야한다.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것은 부서진 죄인들이 모인 교회가 되어야한다. 약함을 자랑하는 교회가 되어야한다. 이세상은 자신의 약함을 감추려고 강한척하려합니다. 이 세상은 온갖 허위로 치장합니다. 그뒤에 숨어지냅니다. 


우리의 복음은 예수님께서 거짓없이 드러내셨기에 주님이 발가벗기워 져야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더 솔직해져야한다. 

여러가지 모양으로 치장하지 않고 가식이 없도록 약해져야한다. 

약함을 자랑해야합니다.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납니다. 


상처받은 사람이 치유받으려면 약한사람이 치유할수 있습니다. 


헨리나우웬 / 존베인 / 

상처가 있는 분들이 공동체의 뿌리의 역할을 한다. 

상처가 많은 분들이 공동체의 뿌리 입니다. 


상처와 약한 사람을 돌보아야하는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약함을 드러내는 사람이다. 

Wounded Healer 가 될수 있습니다. 


약함을 드려내고 안심하고 자랑하는 교회가 되어야한다. 

자기의 강함을 자랑하는 교회가 아니다. 



2/하나님의 은혜가 흘러가야한다. 

  은혜가 유통되는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은혜가 넘치는 통로가 되어야한다. 


은혜가 들어가긴 가는데 거기만 가며 꽉막히는 것이 문제이다.
은혜가 흘러넘치는
  통로가 되어야합니다. 


받은 은혜가 다른 사람에 흘러가는 통로인가 ? 막다른 골목인가?


물이 바다 덮은 같이 흘러 넘쳐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가시들에 대해서 너무도 잘 안신다. 예수님은 가시관을 쓰셨기에... 우리의 가시를 하나 하나 뽑아서 이미 그 고통을 겼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족합니다. 

이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를 충분히 받았습 니다. 우리의 고통과 약함속에서 그 고통에서 벗어나느것보다 지금 일어나느 일들이 이 약함이 하나님의 창조한 목적 가운데 한 부분으로 이루고 있다는 확신입니다. 


이 세상은 이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비웃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원리가 가능한지 이미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약함 끌어안고 하나님 찬양하면 나아가십시다. 

진정 강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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