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무엘상 30:21-31
  • 은혜를 아는자가 은혜를 베푼다.  
  •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중심으로 사람을 향한 배려와 배풂이 흘러나왔기에 그가 이스라엘에서 가장 오래 기억되는 왕이 될수 있었습니다. 


새벽 큐티 설교 <사무엘상 30:21-31>



[삼상 30:21-31]

(삼상 30:21) 다윗이 전에 피곤하여 능히 자기를 따르지 못하므로 브솔 시내에 머물게 한 이백 명에게 오매 그들이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을 영접하러 나오는지라 다윗이 그 백성에게 이르러 문안하매

(삼상 30:22) 다윗과 함께 갔던 자들 가운데 악한 자와 불량배들이 다 이르되 그들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은즉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은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주지 말고 각자의 처자만 데리고 떠나가게 하라 하는지라

(삼상 30:23) 다윗이 이르되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넘기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삼상 30:24) 이 일에 누가 너희에게 듣겠느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동일할지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 하고



(삼상 30:25) 그 날부터 다윗이 이것으로 이스라엘의 율례와 규례를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

(삼상 30:26) 다윗이 시글락에 이르러 전리품을 그의 친구 유다 장로들에게 보내어 이르되 보라 여호와의 원수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에게 선사하노라 하고

(삼상 30:27) 벧엘에 있는 자와 남방 라못에 있는 자와 얏딜에 있는 자와

(삼상 30:28) 아로엘에 있는 자와 십못에 있는 자와 에스드모아에 있는 자와

(삼상 30:29) 라갈에 있는 자와 여라므엘 사람의 성읍들에 있는 자와 겐 사람의 성읍들에 있는 자와

(삼상 30:30) 홀마에 있는 자와 고라산에 있는 자와 아닥에 있는 자와

(삼상 30:31) 헤브론에 있는 자에게와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왕래하던 모든 곳에 보내었더라


제목 : 은혜를 아는 자가 은혜를 베푼다.


사무엘상 마지막 대목에서는 ? 다윗이 하나님과 백성이 마음에 합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록 사울 왕을 피해서 블레셋 아기스 왕을 돕고 그의 보호를 받고 있지만 그의 선택과 결정은 항상 자신의 민족인 연약한 히브리 사람에 대한 마음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블레셋 아기스왕의 신하들의 모함과 비난에도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하심으로 자신이 자신의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과 전쟁을 행해야하는 애매한 어려움을 피하게 됩니다.

우리가 살펴보는 이 사무엘상에의 다윗의 삶의 여정과 사울의 삶의 여정은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초기 이스라엘 나라의 왕으로 세워진 이 두 인물이 왜? 다른 선택과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사무엘상 기자는 이 사무엘서를 1차 독자인 히브리사람들에게 쓰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합하여 세운 사울왕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여 세워지 다윗왕이 얼마나 다른 선택과 결과 그리고 중심을 가지고 있는지를 대비시키는 목적이 있습니다. 또한 이들의 삶의 여정 속에서 보여진 모습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그리고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것인지?를 보여주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참다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왕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 이 시대에 사무엘서를 읽고 있는 2차 독자인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람의 삶의 내용과 선택은 어떠해야하는지?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에게 무엇을 보기를 원하시는지? ”에 대해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사무엘서 기자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왜? 사울을 버리고 다윗을 선택해야만 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사울은 하나님께 다시금 쓰임받을 기회를 계속 놓치고 있고, 다윗은 하나님께 쓰임받을 기회를 계속 붙잡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다윗이 아말렉과의 전쟁에 함께 가지 못했던 사람들을 돌아본고 배려하고 베푸는 장면입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블레셋과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긍휼로 제외되어 그들이 거처했던 시글락으로 돌아왔다. 그들이 제 3일에 시글락에 이르렀을 때에 아말렉 사람들은 이미 남방과 시글락을 침노하였는데 그들이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거기 있는 사람들을, 어른이나 아이나 여자나 다 사로잡아 끌고 그들의 길을 갔습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성에 이르렀을 때 성은 이미 불탔고 그들의 아내와 자녀들은 사로잡혀간 후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아말렉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치라 말씀하시죠.


가던 중에 애굽사람 한 소년의 인도를 받습니다. 그 소년은 다윗의 일행을 아말렉 사람들의 진영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들이 내려가 보니 아말렉 사람들은 온 땅에 가득하여 블레셋 사람의 땅과 유다 땅에서 크게 탈취하였음을 인해 먹고 마시며 기뻐 춤추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새벽부터 혹은 저녁부터 이튿날 저물 때까지 그들을 쳤고 약대 타고 도망한 소년 사백 명 외에는 피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윗은 아말렉 사람이 취했던 모든 것을 도로 찾았고 그 두 아내를 구원하였고 그들의 탈취하였던 것 곧 무리의 자녀들이나 빼앗겼던 것의 크고 작은 모든 것을,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이 도로 찾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도로 찾게 해주셨습니다. 그들은 또 아말렉 사람들의 양떼와 소떼를 다 취하였습니다.

다윗이 이왕에 피곤하여 능히 자기를 따르지 못하므로 브솔 시내에 머물게 한 이백 인에게 오자 그들은 다윗과 그와 함께한 백성을 영접하러 나왔습니다.

다윗이 그들에게 이르러 문안하였습니다.


그때 다윗과 함께 갔던 자 중에 악한 자와 불량한자들이 다 말했습니다.

여기서 < 불량배 >들은 < 비류한자. ‘벨리알의 아들들,' 무가치한 자들 >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은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주지 말고 각 사람의 처자만 주어 데리고 떠나가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말합니다.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붙이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이 일에 누가 너희를 듣겠느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일반일지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


다윗은 그들이 취한 노획물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이며 또 백성의 다수가 똑같이 나누는 것을 원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그 악한 자들의 주장을 눌렀다. 그 날부터 다윗은 이것으로 이스라엘의 율례와 규례를 삼았고 그것이 훗날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또 다윗은 시글락에 이르러 그 탈취물을 그 친구 유다 장로들에게 보내며 "보라 여호와의 원수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에게 선사하노라" 하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이 전쟁을 어떤 중심으로 치루고 있는지?를 옅볼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 전쟁의 시작은 자신의 전쟁인 아닌 여호와의 전쟁으로 치루고 있었습니다. 그것의 첫 번째 증거는 전쟁을 치루기 전에 여호와께 묻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다윗은 이 전쟁의 결과는 자신의 능력이 아닌 여호와의 능력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고백합니다. <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저들을 우리손에 붙이셨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이 전쟁의 기쁨을 자신의 능력을 과시거나 자기 자랑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전쟁에서 이긴 전리품을 즐거이 나눠줌으로 하나님이 함께하신일임을 함께 기뻐하길 원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손으로 이루어진 이들을 나의 손으로 만들어낸 것으로 바꾸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셔야할 영광을 내가 가로채고 내가 그 영광과 자랑을 누리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받으셔야할 합당한 영광을 드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은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음을 합당하게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말, , 그리고 걸음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요즈음 성도님들이 카카오톡으로 좋은 글을 보내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 글들중에 참 좋은 글들이 많습니다. 그런 좋은 글들은 따로 메모를 해놓고 있습니다.

최근에 받은 글 중에서 참 좋은 글 내용이 있었습니다.



< 사람이 선물이다 >

스물에는 세상을 바꾸겠다며 돌을 들었고,

서른에는 아내를 바꾸어 놓겠다며 눈초리를 들었고,

마흔에는 아이들 바꾸고 말겠다며 매를 들었고

쉰에야바뀌어야 할 사람이 바로 나임을 깨닫고 들었던 것 다 내려놓았습니다.

어디서 태어날지는 선택할 수 없지만, 어디서 죽을지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어떤 얼굴로 태어날지는 선택할 수 없지만, 어떤 얼굴로 죽을지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선택이 삶의 선택입니다.

사람은 실수하는 것이 정상이고,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것이 정상입니다.

사랑이란, 실수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정상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사랑은.. 사람과 하늘이 나눠 가진 성품입니다.....

우리가 일을 하지만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사람이지요.

사람과의 관계가 참 중요합니다.

자신을 내려놓기 전에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닙니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일은 실패하면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사람과 관계는 한번 깨지면 회복하기가 힘들어요.....

관계가 고통스러운 까닭은.. 하나님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을 인간에게서 찾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실수가 전공이고, 부족함이 특징입니다 ..



 

오늘 본문의 다윗은 하나님과의 좋은 관계가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를 만드는 <배려와 배픎>으로 이어집니다. 사람에게서 < 배려와 베풂 >많은 좋은 관계를 만드는 것이 없지요. 다윗은 자신이 나눠 주어야할 것을 기꺼이 나눠줍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왔다는 인정과 확신 때문입니다.


아침편지로 잘 알려진 고도원씨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라는 책에 세 가지 방문이라는 글이 나옵니다.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대체로 <세가지 방문>을 잘 한다는 말을 듣는다. <입의 방문>, <손의 방문>, <발의 방문>이 그것이다. <입의 방문>은 부드러운 말로 주위 사람을 칭찬하고 용기를 주는 방문이고, <손의 방문>은 편지를 써서 사랑하는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고, <발의 방문>은 상대가 힘들 때 망설이지 않고 찾아가는 것이다. 모두 신체를 이용한 마음의 전달법들이다. ”





미국의 카네기 공대 졸업생을 추적 조사한 결과, 그들은 한결같이 이구 동성으로

"성공하는데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은 15%밖에 영향을 주지 않았으며 나머지 85%가 인간관계였다." 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의 합당한 중심으로 사람을 향한 배려와 배풂이 흘러 나왔기에 

그가 이스라엘에서 가장 오래 기억될 왕이 될수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26:1-15>   선으로 악을 이기라

다시 사울과 다윗 이야기의 배경과 무대는 십 광야 십 황무지 >로 돌아옵니다너무도 놀랍게도 앞에서 사무엘상 24장의 배경과 상황이 그대도 재현되고 있는 장면이 바로 오늘 사무엘상 26장 십 광야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사무엘상 26:1-15>  선으로 악을 이기라


[삼상 26:1-12]

(삼상 26:1) 십 사람이 기브아에 와서 사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다윗이 광야 앞 하길라 산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매

(삼상 26:2) 사울이 일어나 십 광야에서 다윗을 찾으려고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과 함께 십 광야로 내려가서

(삼상 26:3) 사울이 광야 앞 하길라 산 길 가에 진 치니라 다윗이 광야에 있더니 사울이 자기를 따라 광야로 들어옴을 알고

(삼상 26:4) 이에 다윗이 정탐꾼을 보내어 사울이 과연 이른 줄 알고

(삼상 26:5) 다윗이 일어나 사울이 진 친 곳에 이르러 사울과 넬의 아들 군사령관 아브넬이 머무는 곳을 본즉 사울이 진영 가운데에 누웠고 백성은 그를 둘러 진 쳤더라

(삼상 26:6) 이에 다윗이 헷 사람 아히멜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에게 물어 이르되 누가 나와 더불어 진영에 내려가서 사울에게 이르겠느냐 하니 아비새가 이르되 내가 함께 가겠나이다

(삼상 26:7) 다윗과 아비새가 밤에 그 백성에게 나아가 본즉 사울이 진영 가운데 누워 자고 창은 머리 곁 땅에 꽂혀 있고 아브넬과 백성들은 그를 둘러 누웠는지라

(삼상 26:8)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하니

(삼상 26:9)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

(삼상 26:10) 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삼상 26:11)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삼상 26:12) 다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아무도 보거나 눈치 채지 못하고 깨어 있는 사람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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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나발과 아비가엘의 이야기가 나온후에 다시 사울과 다윗의 추격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다시 사울과 다윗 이야기의 배경과 무대는 < 십 광야 / 십 황무지 >로 돌아옵니다. 너무도 놀랍게도 앞에서 사무엘상 24장의 배경과 상황이 그대도 재현되고 있는 장면이 바로 오늘 사무엘상 26장 십 광야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사울이 3천명과 함께 다윗을 찾으러 십 광야로 내려가 진을 칩니다. 다윗이 도움을 주었던 십 사람들이 다윗의 있는 곳을 알려줌으로 다시 사울과 다윗의 추격전으로 이어집니다.


사무엘상의 마지막 대목은 두사람의 대조적인 행동인 두드러지게 드러납니다.

어떻 해서든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이 받은 은혜를 잊은 채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의 모습과 어떻해서든지 사울의 자리를 지켜주려고 은혜를 베풀면서 도망을 치고 있는 다윗의 모습을 봅니다.

 

사울과 다윗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다루는 방식이 달랐습니다.

사울은 은혜를 잊어 버렸고 다윗은 은혜를 기억했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감정과 원함에 매여 있었고 다윗은 자신의 감정과 원함에 매여 있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주변의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오직 자신의 마음에 민감하게 행동했고, 다윗은 자신의 주변의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마음에 민감하게 행동했습니다.


사무엘상 24장에 사울은 십 황무지 동굴속에서 다윗에서 죽을 뻔한 일을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예치못한 곳에서 자신이 미명하게 죽을 뻔 일을 불행중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것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시는 또 한번의 회개의 기회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다윗에서 어떤 은혜를 입었는지? 그리고 그 배후에 하나님이 자신에게 어떤 회복의 기회를 주고 계시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당한 굴욕감과 모욕감 그리고 주변사람에게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보여지는지에 대한 수치심에 쌓여서 다윗을 죽이려는 그 추격전에 다시금 나서게 된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자신의 감정과 마음이 거기에 매이는 것을 주의해야합니다. 


종종 사람과 사람사이에 원수 맺는 일을 보면 그렇게 큰 문제에서 일어나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사소하고 작은 일들 속에서 서운함을 만들어내고 그 속에서 사탄마귀가 틈을 타고 계속 그 마음에 매여서 사람에 대한 원수 맺는 것이 생깁니다.

그래서 오해하고 원망하고 미워하고 욕합니다. 정작 어떤 큰 사건이 서로에게 원수 맺게하는 일보다는 사소한 감정들이 사소한 상황들이 관계 속에서 원수 맺는 일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의 상태와 상황을 민감하게 다시보게 하십니다.

내 마음안에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

내 마음에 숨어있는 잘못된 동기는 무엇인지?

내 마음에 무엇이 나를 거기에 메이게 하는지?를 살피도록 하십니다.

 

사울과 다윗의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이러한 민감함의 차이였습니다.

성령님은 오늘 우리로 하여금 각각의 처한 상황과 관계속에서 일어나는 감정과 마음을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우리의 마음안에 말씀하십니다.

니가 지금 어떤 마음으로 어떤 중심으로 무엇하려 하느냐

성령님에 민감한 사람은 사람의 소리에 치우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관심과 관점에 집중합니다.

 

사울과 다윗 둘다 위기가 있었습니다.

위기라는 말은 < 위험한 기회 >라는 말입니다. 사울은 다윗에게 죽을 뻔한 위험한 기회를 계속적으로 <복수와 원수맺음>으로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에게 죽을 뻔한 위험한 기회를 계속적으로 <은혜와 긍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은혜 받은 기회를 은혜 베풀기회로 바꿔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울의 선택입니다

그러나 은혜 받은 기회를 은혜 베풀 기회로 바꿔놓고 있는 것이 다윗의 선택입니다.

 

다윗이 자신을 따르는 아비새와 함께 밤에 사울에게도 나아갑니다

그때 사울은 진 가운데에 누어서 자고 창은 머리 곁 땅에 꽂혀 있었습니다.


그때 같이 간 아비새가 말합니다. < 하나님께서 오늘날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나로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가 또 다시 다윗에게 왔습니다. 사울왕을 죽이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 할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때 다윗의 반응과 말을 보십시오.

(삼상 26:9)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

(삼상 26:10) 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삼상 26:11)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이 다윗의 고백 속에 담겨있는 중심은 무엇일까요? 3가지 중심이 있습니다.

1) 원수는 내가 갚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갚는 것이다.


2) 왕는 내가 스스로 그 자리를 차지는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시는 것이다.


3) 내가 원하는 것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있을 때 

     항상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 선택해야한다.


여기서 다윗의 탁월함을 나오는 것이죠.. 오늘 상황과 관련된 로마서 말씀에

[12:18-21]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12: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바로 다윗의 모습이 바로 < 선으로 악을 이기는 장면 >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서 가져나온 물건중에 < >이 있습니다. 이 창은 사울이 다윗을 수없이 죽이려했던 그 무기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사울이 다윗을 해하려 할때는 이 <>이 등장합니다.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온 다윗은 그를 위하여 수금을 타고 있을 때 사울은 그를 창으로 죽이려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이기고 돌아와 사울을 위하여 수금을 탈 때에도 그를 창으로 찔러 죽이려 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의 억울함을 호소하자 사울이 화가 나서 요나단을 죽이려고 던진것도 창이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했던 그 창으로 사울을 죽일수 있었습니다. 보란 듯이 세상에 웃음이 될수 있도록 자신을 죽이려고 겨누었던 그 창으로 사울을 죽일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창을 그렇게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사울에게서 그 창을 가져오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사울에게서 그 창을 치워버립니다. 다윗의 이 행동은 사울에게서 악한 동기와 행동을 가져가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사울에게서 그 창은 <악한 마음>을 상징하는 물건입니다. 그러난 다윗은 사울에게서 그 창을 가져 나옴으로 사울의 <악한 마음>을 가져 오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놀랍게도 성경에 보면 그 사건 이후로 사울의 모습은 다윗을 더 이상 위협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에서 우리의 감정속에 있는 그릇된 에너지가 내 삶의 에너지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분노와 원망과 미움을 나의 삶의 에너지로 삼지 말아야합니다. 사울하면 어떻하면 내가 받은 이 수모와 원한을 되갚아줄까? 하지 않으면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악을 선으로 이기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지난주 심각한 지진이 났습니다


한 며칠 동안은 잠을 잘 때면 지진이 또 날까 겁이 났습니다. 조금만 흔들려도 잠기 깨곤했습니다. 지진으로 물건들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고 얼마나 지진이 위력적인지도 경험했습니다.


그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 ! 저 물건이 언제 저기 올라가 있었지? ! 내가 깨질 물건을 저기에 올려 놓았네 ... 이제 저걸 내려놓아야지 ! >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진으로 물건이 떨어지고 깨지고 상한 경험을 하고서는 우리 집안에서 넘어지고 깨지고 흔들릴 만한 것들을 찾아 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내려놓게 되었지요. 참다운 내려놓음을 준비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마음 안에도 지진같이 조금만 흔들어도 깨어질 것들이 많습니다. 계속 내 마음을 무너지게 하고 나를 넘어지게 하고 나를 상하게 하는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어느 순간에 나도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올려놓은 그런 분노, 원망, 상처, 미움, 원수맺음과 같은 마음들이 있지는 않습니까?


언젠 가는 그것들이 내 마음을 안에서 떨어져 내 마음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습니다. 내 마음이 엉망이 되기(mess up) 전에 그것을 바로 잡는 것이 필요합니다.

 

< 사랑을 베푸는 자에게 있어서 사랑이 실패로 끝난다 하더라도

 사랑은 역시 최선의 길이다. > 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다윗의 행동은 우리에게 끝까지 놓지 말아야할 마음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은 은혜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그 선한 마음을 부여잡고 그대로 행동하고 그대로 선택하면 사는 것입니다. 나의 인간적인 욕심과 감정을 부여잡지 않고 원수를 원수 갚음으로 매듭짓지 않고 조용히 사울의 창을 가져옴으로 선으로 악을 이기는 모습을 부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이 원수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은혜 베풀기회로 삼는

그런 탁월한 삶의 내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원수는 내가 갚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갚으신다. 그리고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대로 행동하면 하나님의 뜻은 만드신 이룬다는 이 하나님께 대한 강력한 신뢰가 다윗을 이스라엘의 두 번째왕으로 세우고 계십니다.

 

리차드 램브란트의 이야기입니다. 

이집트에 주둔한 적이 있었던 한 영국 상사가 자신에 관한 이런 이야기입니다.


내가 있던 부대에 예수를 믿는 민간인이 하나 있었는데, 우리들이 그 사람을 되게 못살게 굴었습니다. 비가 몹시 내리던 어느 날 밤 그는 지쳐서 들어와서는 잠자리에 들기 전 기도를 하려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나는 진흙이 잔뜩 묻은 내 장화를 그 사람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지만, 그는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 장화가 깨끗이 닦여져서 내 침대 옆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것이 나에 대한 그의 보답이었고, 그 대답이 내 마음을 녹였습니다.나는 그 날 구원받았습니다.









  • [사무엘상 23:15-39] 좋은 친구가 있나요
  • Main Idea : 다들 나에게서 나갈때 내게로 들어오는 사람이다. 요나단은 바로 다윗에게 그런 친구이다. 우리에게 그런 좋은 친구가 있는가?


[설교음성 파일 ]

https://soundcloud.com/yonghwan-shin/2014-03-25-1


[삼상 23:15-29]

(삼상 23:15) 다윗이 사울이 자기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나온 것을 보았으므로 그가 십 광야 수풀에 있었더니

(삼상 23:16)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삼상 23:17)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니라

(삼상 23:18) 두 사람이 여호와 앞에서 언약하고 다윗은 수풀에 머물고 요나단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삼상 23:19) 그 때에 십 사람들이 기브아에 이르러 사울에게 나아와 이르되 다윗이 우리와 함께 광야 남쪽 하길라 산 수풀 요새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삼상 23:20) 그러하온즉 왕은 내려오시기를 원하시는 대로 내려오소서 그를 왕의 손에 넘길 것이 우리의 의무니이다 하니

(삼상 23:21) 사울이 이르되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삼상 23:22) 어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그는 심히 지혜롭게 행동한다 하나니 너희는 가서 더 자세히 살펴서 그가 어디에 숨었으며 누가 거기서 그를 보았는지 알아보고

(삼상 23:23) 그가 숨어 있는 모든 곳을 정탐하고 실상을 내게 보고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가리니 그가 이 땅에 있으면 유다 몇 천 명 중에서라도 그를 찾아내리라 하더라

(삼상 23:24) 그들이 일어나 사울보다 먼저 십으로 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광야 남쪽 마온 광야 아라바에 있더니

(삼상 23:25)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찾으러 온 것을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아뢰매 이에 다윗이 바위로 내려가 마온 황무지에 있더니 사울이 듣고 마온 황무지로 다윗을 따라가서는

(삼상 23:26) 사울이 산 이쪽으로 가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산 저쪽으로 가며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급히 피하려 하였으니 이는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고 잡으려 함이었더라

(삼상 23:27) 전령이 사울에게 와서 이르되 급히 오소서 블레셋 사람들이 땅을 침노하나이다

(삼상 23:28) 이에 사울이 다윗 뒤쫓기를 그치고 돌아와 블레셋 사람들을 치러 갔으므로 그 곳을 셀라하마느곳이라 칭하니라

(삼상 23:29) 다윗이 거기서 올라가서 엔게디 요새에 머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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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속된 다윗의 도망과 사울의 추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찾기 위해서 매일같이 그를 찾아 나섭니다. 오늘 본문 앞절인 14절에 보면 


(삼상 23:14) 다윗이 광야의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


 사울이 다윗을 찾는 일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도움속에서 다윗은 여러번의 위기와 고비를 넘기고 있습니다. 처음의 도망칠때만해도 사람을 의지했던 다윗은 이제는 여러 위기를 경험하면서 하나님께 순간 순간 물으면 그의 걸음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비로 사울에게 쫓기는 신세이지만 오히려 자신을 따르는 600명의 사람들을 붙여주며 심지어 블레셋에 곤경에 처한 그일라 사람을 도와주게 됩니다. 


 자기 코가 석자인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서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네 손에 붙이리라 ” 

다윗은 그일라를 구원해주는 놀라운 사건을 경험한 후에 다시 사울을 피해 도망을 칩니다. < 십 황무지 수풀에 머물게 됩니다. > 


 다윗에서 십 황무지 수풀은 < 자신의 몸을 피할 은신처 >였습니다. 그때 다윗은 자신의 친구인 요나단과 마지막 조우를 하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이 본문에서 다윗에게 찾아온 요나단이 어떤 친구인가?에 주목하고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좋은 친구가 있으신가요? 여러분이 생각할 때 좋은 친구는 어떤 사람인가? 좋은 친구의 조건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려합니다. 


 젊은 남자와 여자가 나이가 들면 꼭 필요한 것 순위를 매겼는데 

 여자는 <재산/친구/건강/애견/남편> 남자는 <건강/아내/재산/취미/친구> 

 더 나이가 들면 여자는 <딸/돈/건강/친구/찜질방> 

 남자는<마무라/아내/애들엄마/집사람/와이프>  라고 합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중에 하나가 < 친구 관계 >입니다. 


친구란 어떤 사람인가? 정의를 내려보면.. 어떤 사람은 이런 인상적인 정의를 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 사람들이 나에게서 다 나갈 때 나에게로 들어오는 사람이다 ”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참으로 인상적인 말이지요


오늘 본문에 요나단은 다윗에게 그런 친구였습니다. 사람들이 다 다윗에게서 멀어질 때 다윗을 향해서 걸어 들어오는 그런 친구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숨기기위해서 < 십 황무지 수풀 >에 숨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고 있었던 요나단은 다윗에게 찾아들어옵니다. 자신의 아버지가 다윗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다윗이 자신이 아버지를 이어 왕이 되는 자리에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를 아는 그가 어떻게 그렇게 다윗에게 걸어들어 올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다윗와 요나단의 깊은 우정과 친구관계에서 설명할수 있었습니다. 이 친구관계는 그저 사이좋은 그런 좋은 친구관계를 벗어나 그 두사람 사이에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실하게 이해하고자하는 순종과 신실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오직 그들안에 있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의 동기만이 있었습니다. 


 다윗와 요나단은 서로 그렇게 신실한 관계를 만들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중심을 이어주고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순수한 마음의 작용이 그들을 친구로 묶어 주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분노와 질투로 억울한 도망자 신세가 되었지만 자신을 붙들고 계신 하나님의 손길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요나단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마음에 쌓아두지 않았습니다. 요나단의 애매한 어려움을 이해하고 오히려 요나단과 사울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의 진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이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떠나 다윗에게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더 이상의 이해관계나 욕심을 갖기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드렸습니다. 오히려 애매히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쫓기고 있는 다윗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흔히 아무리 좋은 관계라도 <이해관계>가 얽히면 그 관계가 지속되기가 쉽지않습니다. <이해관계란 이익과 손해, 이득과 손실을 따지는 관계입니다.> 그렇게 좋던 관계도 그렇게 잘 지내던 관계도 자신이 손해보거나 억울한 일이 생기면 쉽게 그 관계가 흐트러집니다. 그래서 서로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서로에게 분노의 마음을 품지고... 어쩔수 없는 어려움입니다. 


 모든 사람은 예외없이 이러한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손해보지 않으려하고 자신이 억울하게 사람들에게 당하는 것이 싫습니다. 그래서 어떻해서든지 자신이 손해보는 쪽보다는 이득을 얻는 쪽으로 머리를 굴리고 계산을 합니다. 


 그러한 좋은 인간관계은 < 이득과 손해를 따지는 이해관계 >가 아니라 < 서로의 입장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또다른 이해해주는 관계 >를 만들어야 합니다. 상대방의 그 입장이 되어지고 그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헤아리고 살피는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 바보는 적이 없다. 그리고  친구가 많다. > 왜 그럴까요? 바보는 <이해관계>를 만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보는 모든 사람을 수용하고 인정하게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나보다 훨씬 똑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종종 친구가 많은 사람들이 부럽습니다. 그래서 친구가 많은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을 보면 어떤 사람인가를 보았습니다. 딱 2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 첫째는 먼저가 많이 말하기보다는 듣는 사람이다. 둘째는 상대방을 인정해주고 격려하는 사람이다. >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친구가 있습니까? 이해관계를 따지는 친구가 있습니까? 아니면 진정으로 이해해주는 친구가 있습니까? 


부부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관계는 영혼의 친구입니다. 서로의 사랑과 이해가 필요한 관계입니다. 너무 따지지 않는 것입니다. 종종 부부싸움을 할때는 남편은 아내의 감정에 집중하지 않고 문제가 일어난 사실에 집중합니다. 그래서 < 범인 찾기 >를 합니다. 한사람은 도망자가 되고 한사람은 추격자가 됩니다. 사생결단하면서 도망치고 추격하고 그런 관계를 만듧니다. 

사울과 다윗의 관계는 도망치고 추격하는 그런 관계였다면 다윗와 요나단의 관계는 숨어있지만 조용히 다가오는 관계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다윗와 요나단의 이 관계속에서 좋은 친구의 조건을 3가지로 묵상해보았습니다. 


1/ 좋은 친구는 아무도 찾는이 없을 내게 찾아오는 친구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나단은 자신의 아버지 사울의 눈을 피해서 다윗을 찾아갑니다. 

(삼상 23:16)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요나단이 다윗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며 용기입니다. 좋은 관계는 먼저 다가서는 그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자신은 가만히 있고 좋은 사람이 나에게 다가오길 기다립니다. 그러면 결코 좋은 관계를 만들 수 없습니다. 좋은 관계는 먼저 내가 좋은 사람으로 다가가는 일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에게 내가 찾아가는 그일이 바로 가장 좋은 관계를 만듭니다. 


2/ 좋은 친구는 힘을 잃었을 때 나를 격려해주시는 친구입니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찾아와 한일은 무엇입니까? 바로 도망자로 숨어있는 다윗에게 용기를 잃지 않기를.. 그리고 글에게 힘과 격려를 불러 넣습니다. 

(삼상 23:16)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이 말은 < 그가 하나님 안에서 그의 손을 강하게 했다 >는 뜻입니다. 

(삼상 23:17)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니라


요나단은 다윗의 손을 붙잡고 말했을 것입니다. < 친구가 하나님손의 너를 붙잡고 있다 두려워말라. 결코 내 아버지가 너를 해하지 못할 것이다 > 

 좋은 친구의 조건은 < 격려 >입니다. 우리는 우리자신에게 물어야합니다. <나는 어떤 격려의 사람인가? 나는 격려하고 있는가? 격려받고 있는가? > 


항상 문제만 지적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항상 격려하는 사람인가?
최근에 제가 즐겨하는 말중에 < 이게 문제야.. 이번 문제는.. .. 문제는 문제는... > 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회의를 하거나 말을 할 때 < 문제야 ... 문제는 >이라는 말을 빼보고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해보았더니.. 훨씬 말이 부드러워졌고 제 입에서 오히려 격려하는 말들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격려는 문제를 지적하는 일을 멈추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구나하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맘에 들지 않으면 격려할수 없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을 바꿔놓으면 격려할수 있는 것입니다. 


3/ 좋은 친구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 알아주는 친구입니다. 

요나단은 알고 있었습니다. 

(삼상 23:17)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니라

쉽지 않은 요나단의 고백입니다.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을 때 요나단은 분명한 확신을 갖고 다윗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나단의 그냥 대세를 읽은 처세가 아니없습니다. 요나단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약속과 경외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쉽지않은 고백과 인정을 하게 한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의 인정하는 것에 인색할 때가 많습니다. 나보다 나은것이나 나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우월의식이나 때로는 열등감에서 쌓여서 좋은 관계를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서로 알아가주는 것이 좋은 관계의 원리입니다. 인정할 때 기쁨으로 인정해주는 것 그것이 좋은 관계의 출발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오늘 어떤 관계를 맺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주변에 어떤 사람과 친하게 지내고 있습니까?


좋은 친구는 아무도 찾는이 없을 때 내가 다가오는 사람이며 내가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좋은 친구는 내가 힘을 잃었을 때 내게 격려해주는 사람이면 내가 격려해야할 사람입니다. 그리고 좋은 친구는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을 때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면 나도 그러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는 이해관계를 뛰어넘은 영적인 은혜관계. 서로 이해하는 관계였습니다. 이 둘의 관계의 중심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신실한 하나님의 약속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면서 나는 어떤 관계를 맺고 살고 있는지 돌아보는 하루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사무엘상 23:1-15] 은혜로운 추격전  
  • Main Idea : 다윗을 도망과 사울의 추격은 은혜롭지 않은 추격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과 함께하십니다. 다윗에게는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지만 하나님은 그 추격전을 은혜로운 시간으로 바꿔 놓으십니다.  


[설교음성파일]

https://soundcloud.com/yonghwan-shin/2014-03-26/s-5pnCD


[삼상 24:1-15]

(삼상 24:1)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쫓다가 돌아오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더이다 하니

(삼상 24:2)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새

(삼상 24:3)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삼상 24:4)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삼상 24:5)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삼상 24: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삼상 24:7)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

(삼상 24:8) 그 후에 다윗도 일어나 굴에서 나가 사울의 뒤에서 외쳐 이르되 내 주 왕이여 하매 사울이 돌아보는지라 다윗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삼상 24:9)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

(삼상 24:10) 오늘 여호와께서 굴에서 왕을 내 손에 넘기신 것을 왕이 아셨을 것이니이다 어떤 사람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하지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 하였나이다

(삼상 24:11) 내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 자락만 베었은즉 내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오늘 아실지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삼상 24:12)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삼상 24:13) 옛 속담에 말하기를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하였으니 내 손이 왕을 해하지 아니하리이다

(삼상 24:14)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의 뒤를 쫓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음이니이다

(삼상 24:15) 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심판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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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울과 다윗의 추격전은 계속이어지고 있습니다. 어제 읽은 본문 사무엘상 23장의 마지막절에 다윗이 도움의 주었던 십 사람들의 배신과 사울의 그릇된 확신속에서 다윗은 사면초과에 몰리게 됩니다. 절대 절명의 위기의 몰리게 된 다윗은 더 이상의 갈곳도 없는 막다른 곳에 몰리게 됩니다. 그리고 사울의 군사들에게 애워싸이게 되죠. 그때 마다 하나님이 일을 행하십니다.


 바로 블레셋이 침노했다는 소식에 급히 사울은 자신의 걸음을 바꿔야만 했던 참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사울은 다시 다윗을 쫓게 됩니다. 

(삼상 24:1)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쫓다가 돌아오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더이다 하니

(삼상 24:2)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새


다시 잠시 멈추었던 사울의 추격전을 시작됩니다. 엔게디 광야에서 그리고 엔게디동굴에서 있는 다윗을 찾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바로 오늘 말씀의 장면입니다. 


오늘 본문의 장면부터 상황의 뒤바뀌게 됩니다. 사울이 다윗의 목숨을 살려준 것이 아니라 다윗의 사울의 목숨을 살려주는 예상치 못한 반전이 일어납니다. 


 사무엘상을 통해서 사울과 다윗의 추격전을 살며보면 예상치 못한 반전의 연속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가장 긴장감있게 만들고 가장 통쾌한 순간은 바로 예상치 못한 반전의 시나리오를 볼 때 아주 흥미진진함을 느낍니다. 


 오늘 사울과 다윗의 추격전 이야기가 우리에게 많은 드라마틱한 감동을 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예상치 못한 반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반전이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함께하심의 차이에서 일어납니다. 


 사울도 처음에는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완악하고 거짓된 마음을 하나님의 함께하심과는 점점 멀어지는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말로는 < 하나님이 다윗을 나의 손에 붙이셨다. 여호와의 복인 너희에게 있기를 원한다 >라고 그럴듯하게 꾸미고 있지만 정작 사울에게서 하나님의 함께하심은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가 사울에게 쫓기면서 도망자신세를 지나는 동안 그의 마음에 더큰 확신이로 찾아온 것이 바로 < 하나님의 함께하심 >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안에 있는 하나님의 함께하심에 확신이 있었기에 그 순간순간의 위기를 넘길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경험할때마다 하나님의 공급하심, 하나님의 보호하심,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래서 비록 도망자의 삶이었지만 하나님의 손을 경험하는 은혜도 더해갔습니다. 


사울에게서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떠나는 것은 더 이상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는 그의 삶에 반전을 일으킵니다.  

다윗에게서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머무는 것은 그의 삶의 상황을 뒤집어 놓는 반전을 일으킵니다. 


 추격자 사울은 삼천명을 병사를 거리고 다윗을 찾으러 엔게디 광야에 이릅니다. 그 엔게디 광야에는 석회굴들이 많은 산이며 거기있는 어떤 굴들은 수백명 혹은 수천명 들어갈수 있는 큰 굴들도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3절에 재미난 것은 

(삼상 24:3)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사울이 굴에 이들어간 이유를 < 뒤를 보러 들어가니라 > 여기서 이 표현은 < 그 발을 가리운다 >는 의미인데 일종의 < 용변을 보거나 잠을 자려고 >라는 의미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용변을 보러들어갔다니 다윗에 죽음을 맞을번한 변을 당하게 됩니다.> 


용변을 보러갔다 이 변을 당하여 변사로 발견될 뻔한.... 웃지못할 상황이 벌어진것입니다. < 이런 변이 있나 > 


 다윗에게서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기회가 옵니다. 

그렇게 다윗을 추격하던 사울이 이러한 어이없는 상황에서 다윗에게 치욕스러운 일을 당하게 됩니다. 다윗에게 옷자락을 배임으로 < 자신의 목숨이 다윗의 손에 >이었음을 경험하는 것.. < 다윗의 긍휼로 목숨을 연명하게 된 이 어처구니 없는 경험 > 바로 사울의 굴욕사건 그 자체 였을 것입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죽임을 당할번한 위기는 사무엘상 26장에 한번더 나옵니다. 그때에는 사울의 창과 물병만 가져옵니다. 사무엘서 기자는 의도적으로 다윗이 사울의 목숨을 살려주는 비슷한 사건을 2번이나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당혹스러운 이야기들의 반복을 문학적인 용어로 < 더플 플롯 >이라고합니다. 하나의 이야기속에서 두 개의 이야기 줄기가 뒤엉켜있는 기법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어떤이들인 사무엘상 24장과 26장은 같은 이야기라고 말하기도하고 어떤 이들은 다른 이야기를 말합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두배경도 비슷한 지역에서 벌어진 일고 이야기 구조도 아주 흡사합니다. 어찌되었든 사무엘서기자는 사무엘상 24장과 26장이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사울을 죽이지 않은 다윗의 마음과 중심입니다. 

(삼상 24:4)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다윗의 사람들은 다윗에게 말합니다. 이 상황을 완전히 뒤바꿔놓을 기회가 왔음을 말합니다. < 네 생각에 좋은대 그에게 행하라. 바로 오늘 그날입니다. >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들의 말대로 하지 않습니다. <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었습니다. > 사울을 죽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다음 구절입니다. 

(삼상 24:5)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않고 사울의 옷자락을 벤 것은 그에게 긍휼을 베푼 행동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에게 선의를 베푼 증거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왜? 그 일 하나만으로 < 다윗의 마음이 찔렸을까요? > 


많은 해석자들은 다윗의 이 행동에는 그의 숨은 동기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 대목은 단순히 사울의 옷자락을 자름으로 그에게 내가 긍휼을 베풀어주었다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 이 왕권을 사울로부터 빼앗고 싶은 그의 숨은 속마음. 역심을 옅볼 수 있는 장면 >이라는 것입니다. 


왕의 옷은 고대 근동에서 왕권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사울의 옷자락을 벤 것은 그의 인격에 손을 댐과 같았고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왕을 대적하여 손을 드는 일이었습니다. 


왕의 옷자락을 자락을 자리는 행위는 그의 마음에 숨은 < 역심 >이 있음을 들통나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내면의 있는 욕심과 역심을 알게 된것이죠..


그리고 사울왕에서 호소합니다. 

[삼상 24:9-10]

(삼상 24:9)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

(삼상 24:10) 오늘 여호와께서 굴에서 왕을 내 손에 넘기신 것을 왕이 아셨을 것이니이다 어떤 사람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하지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 하였나이다


(삼상 24:12)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삼상 24:15) 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심판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이것은 다윗의 애절한 호소이며 그의 중심의 고백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익숙한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하나님의 마음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울은 익숙한 사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와 함께했지만 하나님과 함께하는 일에서 실패했습니다. 다윗은 편안한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 하나님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고 사소한 판단과 사소한 결정도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차이가 결정적인 반전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의 모든 인간적인 판단은 유보한채 자신의 유리한 상황조차도 내려놓은채 

오직 하나님의 판단과 결정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중심에만 집중하고 있는 다윗의 모습을 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우리는 우리의 삶에 우리가 유익한 상황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하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혹시 우리는 우리가 유익 한쪽으로 결정하고 선택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유익한 쪽으로 결정하고 선택해야하는 사람임이 잊지 말아야합니다. 


우리가 놓치지 말았어야 하는 절호의 찬스가 온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이 아니면 멈출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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