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교회되게 하소서(행9:26-31) 1 월에는 “이런 교회되게 하소서. 교회여 일어나라”는 주제로 교회란 무엇인가를 함께 나누길 원합니다. 필립얀시는 [하나님의 교회란 한없이 크고 한없이 작다. 그토록 크므로 겸손한자들이 와서 높임 받는 곳이 되어야 하고 그토록 작으므로 높은 자들이 낮고 낮아져야 들어올 수 있는 곳, 바로 그곳이 교회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는 두 가지의 놀라운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려고 다메섹으로 갔던 살기 등등했던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는 회심사건과 그가 초대교회에 어떤 놀라운 일을 감당하기 시작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회심의 사건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에서 시작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진리와 사랑에 반응하는 변화된 행동입니다. 나는 참으로 회심했는가?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사울의 변화를 보면 회심한 사람이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를 담대히 전하는 자들을 막으려 했던 사울 자신이 도리어 예수를 담대히 전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울의 회심과 부르심의 사건이 자신에게 있었다면 지금 어떤 모습이 나타나야 할까요? 사울의 다메섹 회심 사건은 그의 삶의 획기적인 변화를 위한 터닝 포인트 일뿐 아니라, 사도행전 전체 이야기의 터닝 포인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회심 이후의 변화들을 사도행전 9장31절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탄생과 교회의 부흥이었습니다 첫째, 교회들은 평안하였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들이 있고 고난이 있었지만 고난 중에 평안했습니다. 둘째, 교회들은 든든히 서 가고 있었습니다. 셋째, 교회들은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가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함과 고난과 고통 중에 주시는 성령의 위로가 넘쳤습니다. 넷째, 교회들의 수는 더 많아졌습니다. 교인들의 수와 교회의 수가 점점 많아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인도 캘커타의 반얀 나무는 혼자는 숲을 이루지만 주변에 어떤 것도 자랄 수 없게 하는 나무입니다. 반면, 바나나 나무는 6개월마다 새로운 싹을 내어 계속 생명력을 이어가게 하는 나무입니다. 우리 교회는 반얀 나무가 아닌 바나나 나무처럼 또 다른 새로운 싹이 나게 하는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주님을 만나 변화된 성도들을 통해 우리 교회가 평안하고 복음으로만 든든히 서서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부흥하는 교회되길 축복합니다.

성령에 감동되어 담대히 살아낸 사람(행6:1-15) 올해 우리교회 표어처럼 < 성령에 감동하고 성령을 감동시킨 사람>을 말씀에서 찾길 원하는데 ,첫 번째 사람은 다메섹에서 회심한 사울이고 스데반과 베드로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 다음으로 그 사람의 죽음이 귀하고 가치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오늘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스데반 집사입니다. 집사의 직분은 헬라파와 히브리파 유대인 사이에 일어난 갈등으로 인해 사도행전 6장에 7명을 세우게 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교회 안에 일어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세운 직분이 집사라는 것입니다. 좋은 교회, 건강한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문제가 없는 교회가 아닙니다. 문제가 있는데 문제가 안 되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본문에는 교회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집사로 세워진 스데반집사가 어떤 사람인가 세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첫째,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고 둘째, 믿음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며 셋째,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모습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을 성경에서 찾는다면 스데반 집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닮아서 예수님처럼 죽음을 선택하였습니다. 회당의 지도자들이 거짓 증인을 세워 스데반을 공격하고 변론하고 있는 그때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합니다. 절대 억울한 얼굴이거나, 화가 난 얼굴이거나, 짜증난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너무나도 평온했고 너무도 당당했으며 기쁨의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이 될 수 있었을까요? 사도행전 6장에 스데반 집사가 어떤 사람인지를 설명하는 구절 속에서 반복되고 있는 한 단어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 성령 >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성령에 감동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 스데반의 놀라운 설교가 이어지고 그 후에 돌에 맞아 죽습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였다고 그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에 감동된 사람은 자신의 시선이 세상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향하는 사람입니다. 올 한해 동안 어떤 모습으로 어떤 시선으로 무엇을 주목하며 살길 원하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는 올 한해동안 성령의 충만을 구합시다. 성령에 감동된 사람은 세상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다른 사람입니다. 성령에 감동된 사람이 모여 성령을 감동시키는 우리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성령이여 우리가 어찌할꼬(행2:37-42) 사도행전은 성령의 감동된 사람들과 교회들에 대한 성령행전이며 또한 교회행전입니다. 사도 바울과 스데반 집사가 어떻게 성령에 감동되었는지 말씀을 통해 나누었는데, 지금 성령에 감동되어 나타난 나의 행동, 나의 모습, 나의 얼굴은 어떻습니까? 성령에 감동된 사람은 성령을 통해서 변화를 받은 사람이고 성령에 감동된 모습과 얼굴이 있으며 성령을 통해 지시 받아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렸고 그들의 마음에 강한 불과 바람과 같이 성령께서 임하셔서 마치 새 술에 취해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술에 취한 것이 아니고, 이 일은 하나님께서 선지자 요엘의 말씀을 이루신 것이며, 약속이 성취된 것이라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 설교를 듣고 3000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돌아오는 일이 일어납니다. 베드로는 성령에 감동되었고, 사람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19세기 미국 부흥운동의 주역이었던 D.L 무디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회심한 이후 복음전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학식은 없었지만, 무디의 쉬운 설교를 통해 19C 많은 영혼들이 복음을 들었고, 교회로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베드로 역시 학식은 없었지만, 예수님을 따라갔고 부인하며 실패했어도 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베드로의 설교를 “ 베드로의 기독론적 설교”라고 합니다. 구약의 요엘서와 시편을 인용하여 예수님의 사역, 죽음, 부활, 승천을 자신이 목격한 사실 그대로 전하였습니다. 이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죽인 자들, 예수님의 죽음을 방조한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못박는 일에 직접 가담했거나 동조했던 자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자신들에게 임한 성령이 놀라서 <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 >라고 물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 형제들이여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마음과 양심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일으키고 깨닫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입니다. 1907년 평양 대부흥은 말씀을 들은 길선주 장로의 회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교회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때 자주 마음에 찔림을 받아 회개가 일어나길 원하고, 성령님 우리가 어찌 할꼬 물을 수 있는 은혜가 있길 원합니다.

성령 안에 함께 지어져 가는 공동체(엡2:13-22) 이찬수 목사님은 분당 우리교회가 부흥하게 된 이유는 예배시간에 찬양이 뜨거워지고 성도들이 반응이 좋고 밝아진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교회의 찬양은 어떻습니까? 반응이 좋고 분위기는 밝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길 원하실까요? 올해 우리교회와 성도들이 성령에 감동된 초대교회의 세 사람, 오순절의 설교자 베드로와 성령 충만한 스데반 집사 그리고 복음 선포자로 회심한 사울처럼 성령에 감동된 사람들이 되길 원합니다. 많은 학자들이 교회의 미래는 밝지 않다고 전망하지만, 우리교회는 기필코 승리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누가 내 교회를 훔쳤는가? “의 저자는 오늘날 교회는 세상에 도둑 맞은 것을 모르고 있으며, 성령이 떠나고 말씀과 은혜가 사라졌으며 성도를 도둑맞고 건물만 남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교회는 성령을 사모하고, 말씀과 은혜가 점점 더 회복되고 있어 감사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1세기 교회 중에 놀라운 구원의 역사와 교회의 부흥, 성령의 사역이 일어난 교회였습니다. 에베소 교회를 통해 우리가 꿈꾸는 교회는 첫째, 구원의 감격이 있는 공동체 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져서 화평, 화목, 평안케 되었습니다. 개인의 신앙이나 교회생활에서 구원의 감격이 빠지면 습관적인 신앙이 되고 무미건조하고 형식화 됩니다 둘째, 서로 연결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우리는 지체가 되어서 움직이고 성장하는 유기체입니다. 지체의 생명력은 연결됨에 있습니다. 셋째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성령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성전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성전이 되려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성령 안에서 함께 지어져야 합니다. 군산에 < 군산 드림교회 >는 아이들이 몰려오고 청년들이 부흥한 교회입니다. 드림교회 유목사님은 교회는 더 이상 안 된다는 말은 하나님의 주권과 복음의 능력을 부인하는 변명이고, 생명의 역사는 복음에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더 이상 교회의 부흥은 어렵다고 말하는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감동된 사람을 통해 여전히 역사가 일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모두가 성령에 감동된 한 사람이 되고, 성령을 감동시키는 교회가 되어, 올 한해 놀라운 역사가 우리 나성한미교회에 시작되길 축원합니다

Hello 성령이 계시네(행19:1-10) 달라스 성서 아트 센터에 있었던 큰 그림 “오순절의 기적(Miracle at Pentecost) “ 에는 성령강림을 잘 표현하고 있는데, 그림 아래에 신약에 나온 119명의 명단을 기록하고, 마지막 한 명의 이름은 You and I 라고 적혀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임하셨던 성령님이 우리에게도 오셨음을 믿으십니까? 성령님은 과거에만 오신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고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체험위주의 극단적인 성령운동과 보수적이고 교리중심의 성령론의 양극단에서 삼위 하나님 중 성령님을 소외시키고 외면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만난 어떤 제자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었습니다. 세례요한을 따르는 제자들로 회개의 세례는 들었지만, 성령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신앙생활 하면서 성령님에 대해 전혀 모르고 지내고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성령을 받는다, 성령이 단비처럼 내린다”고 표현한다고 해서 성령님은 물질이 아니고 인격이십니다. 사도행전에는 “빌립에게 이르시되, 베드로에게 성령이 명하사, 안디옥 교회에게 성령이 이르시되”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지금도 살아계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영으로 보혜사로서 보호하시고 은혜를 주시는 스승이시고, 파라 클레이토스 즉 옆에 계시도록 부름 받은 분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성령님은 인격이셔서 우리가 성령님께 Hello 하면 반드시 Hello 하시고 인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셔서, 성령님이 제자들에게 오셨고, 오늘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 행 19:6-7 바울이 에베소 제자들에게 안수하니 성령이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였다고 합니다. 성령님께서 임하셨다는 것은 성령님이 그들에게 오시는 경험을 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의 예루살렘의 오순절의 사건이 20년 후인 사도행전 19장에 이방 땅 에베소에서 그대로 재현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교회 성도님들의 마음에도 성령님께서 매일같이 헬로하고 들어오시는 역사가 있길 바랍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 는 < 믿을 때 >와 < 성령을 받을 때 >가 동시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었다면 성령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성령님을 경험하고 인격적으로 교제하는 은혜가 날마다 넘쳐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Welcome 성령이 오셨네(요16:7-15) 우리는“ 성령은 무엇인가”라고 묻지만 “ 성령님은 어떤 분이신가”라고 묻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저는 성령님은 우리의 "Welcome ! 환영"을 받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령님을 단순히 영적인 기운이나 영적 파워로 생각 하는 것이 아니라 , 인격으로 환영하고 대하느냐가 우리가 받고 누리게 될 성령님의 역사를 결정합니다. 요한복음 16장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앞두시고 제자들에게 그들을 도우실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고난과 핍박 그리고 환난을 받게될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심은 가장 큰 위로와 선물이었습니다. 성령님께서 오심이 가장 큰 위로이고 힘이며 선물이라는 것을 믿으십니까? 박영돈 교수님의 책 “일그러진 성령님의 얼굴”에는 한국교회가 성령님을 이용하여 인간을 높이는 것으로 바꾸어 성령님의 얼굴이 일그러져있다고 말합니다. 성령님은 오직 예수님을 드러내는 수줍은 사역을 하시는데, 성령님의 얼굴이 여러분을 향해서는 어떤 얼굴을 하고 계십니까? 본문 말씀에는 성령님의 사역을 죄에 대해, 의에 대해, 심판에 대해 책망하신다고 합니다. 첫째, 죄에 대해 다루시는데, 우리 마음에 오셔서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다루고 깨닫게 하십니다. 죄에 대해 무지하고 무감각하고 심지어 죄를 무시하고 있다면 성령님께서 오시지 않았거나 성령님이 떠나신 것입니다. 둘째 성령님은 오셔서 의에 대해서 깨우기 시작하시고, 우리의 의로움을 보증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우리의 의에 대해서 변호하시고 억울함을 풀어주십니다. 셋째 성령님은 오셔서 심판에 대해서 증거하십니다. 성령님은 이 세상 임금인 사단이 심판을 받을 것을 증거하시고 하나님나라 자녀들의 고통과 연약함을 신원하십니다. 거짓은 진리를 이길 수 없고, 기필코 진리는 승리하게 됩니다. 3살 때 3도화상으로 얼굴이 일그러진 이효진 자매는 성령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 “미스헤븐”으로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성령님을 늘 환영하며 동행함을 통해 죽고 싶던 절망에서 천국을 맛보는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찾아오시는 성령님을 환영하며 진리의 성령님과 함께 변화된 삶을 사시길 축복합니다.

한 사람을 찾습니다.(눅 18:1-8)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참된 예배자를 찾으시고, 잃어버린 양 그리고 기도자를 찾으신다고 합니다. 성숙한 기도는 퍼주는 기도 즉 나만을 위한 기도를 벗어나는 중보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날 찾으시는 사람은 첫째, 기도의 사람입니다. 둘째,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들으심을 믿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기억하고 계심을 아는 사람입니다. 넷째, 낙심하지 않고 기도의 줄을 놓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보다 더 큰 일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단순한 기도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기도가 되길 원합니다. 성숙한 성도의 모습.(엡 3:7-9) 예수님을 믿으시나요? 예수님을 믿으신다면 예수님 믿고 변하셨는가?를 묻고 싶습니다. 성숙한 성도의 모습은 첫째, 자기 자신을 은혜로 설명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만 고백하는 사람은 무례하지 않고, 소리를 크게 내지 않습니다. 바울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답하였습니다. 둘째, 날마다 예수님 닮아가는 것에 힘쓰는 모습입니다. 존스토트 목사님은 하나님이 부르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집중해야 되는 것은 날마다 예수님 닮아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전히 뾰족하다면 영적 훈련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셋째 현재의 자리에서 충실한 모습입니다. 바울은 감옥에 있었지만 불평하지 않고 그곳에서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다윗이 양을 지키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을 지키는 자로 세우셨습니다. 이처럼 현재의 자리에서 충성하고 하나님 중심인 성숙한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광야에서 만난 하나님(출13:17-14:4) 광야에서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첫째, 언제나 앞서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들 앞에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먼저 아시고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둘째, 돌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의미없이 돌아가게 하지 않으십니다. 셋째 막다른 곳에 서게 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어떤 길로 인도하시든 그것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어떤 길이든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인도에 믿음으로 반응하시길 바랍니다. 이은성 목사

Thanks 성령님 충만하게 임하소서(엡5:15-21,행1:8) 성령으로 충만하십니까? 만약 성령 충만하시다면 어떻게 성령 충만함을 느끼십니까? 20세기 최고의 복음전도자인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위대한 사역을 했지만, 자신의 삶에서 더 많이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지 못했음을 아쉬워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사모하는 성도들에게 성령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에 더 이상 성령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이미 우리에게 오신 성령님을 인정하고 경험하며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서 이미 오신 성령님은 매일 매일 환영 받고 계신가요? 에베소서 5장에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믿었다면 변화된 삶이 있어야 하는데, 무엇을 하고 어떻게 변화되야 하는지를 9개의 명령형 동사로 말한 후에 성령충만을 받으라고 합니다. 성령 충만이란 성령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성령님의 지배를 받고 있느냐 입니다. 즉, 성령님의 지배를 받는 상태, 성령의 통제 속에 있는 상태입니다. 성경에서 성령충만을 2가지 단어로 쓰고 있는데, 첫째는 핌플레미(Pimplemi)입니다. 행2:4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한 임재에서 핌플레미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방언, 병고침, 예언 등 성령의 외적인 역사로서 어떤 사건 속에 일어난 성령님의 임재를 말합니다. 성령의 강력한 능력이나 감동을 체험한 “성령의 비상 충만”이라고 말합니다. 둘째는 플레루 “Pleroo”라는 단어로 사용됩니다. 엡5장 18절에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할 때 쓰인 단어로, 성령의 내적인 역사를 말합니다. 마치 스폰지가 물속에 담겨서 속까지 푹 젖을 때처럼 깊이 충만해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인격과 삶이 내적으로 나타나는 지속적인 성령님을 통해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령님 안으로 들어가서 일상적으로 성령의 지배를 받는 “ 성령의 통상 충만”이라고 말합니다. 초대교회 일곱 집사를 세울 때 자격 조건은 성령 충만 한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과 빌립처럼 성령의 다스림과 통제를 받는 사람을 세운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성령님으로 가득 채워지면 두려움, 걱정, 불안, 분노 미움등 사단이 주는 죄악된 생각들이 담을 넘어 들어올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성령충만을 원하십니까? 우리 교회가 뜨거운 성령님의 능력을 경험하길 원하고, 동시에 따스한 성령님의 다스림 안에서 변화되는 은혜를 날마다 경험하길 원합니다.

Yes! 성령님 인정합니다. 그리고 순종합니다. 엡 5:15-엡 5:21 인격적이신 성령님을 한주간 동안 얼마나 경험하셨나요? 성령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엡4:30에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하였고, 롬8:26에는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고 하였습니다. 20C 미국에서 성령의 사람이라고 불렸던 캐더린 쿨만 목사는 성령님을 슬프게 하지 말고 인격적으로 존중해드려야 함을 집회중에 자주 깨달았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성령님을 기쁘시게하고 있나요? 아니면 슬프시게 하고 있나요? 우리는 성령의 능력에 더 관심이 있지만 성령님은 성령님으로 충분하다고 고백하는 우리의 태도를 원하십니다. 성령님을 대하는 태도의 기본은 YES ! 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충만은 성령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말을 잘 듣는 내 마음과 영혼의 상태입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 익숙한 술취하는 태도와 성령충만한 태도를 대비시켜 설명하였습니다. 술에 취하면 술에 지배를 받듯이 성령에 취하면 성령의 지배를 받고 자신을 맡기며 성령님을 의지하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엡5:19-20은 “화답하다, 노래하다 , 찬송하다 감사하다”의 4가지 동사가 “성령충만을 받으라”를 설명하는 분사로 사용되어 성령충만한 사람의 특징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의 첫번째 특징은 예배안에 감격을 누리는 것입니다. 1906년 LA 아주사 대부흥은 가난한 흑인 목사 윌리엄 시모어가 작은 예배처에서 드렸던 예배에서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성령 충만과 부흥은 반드시 주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예배의 부흥에서 시작됩니다. 둘째 성령충만한 사람은 입에 감사가 넘칩니다. 범사에 항상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를 회복하는 것은 곧 성령충만입니다. 셋째 “Yes! 성령님 순종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고 주위의 사람들에게 순종합니다.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할때 "성령론과 성령의 사역"이라는 과목을 가르치신 교수님께서 성령충만은 매일 실패하는 이들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셨습니다. 사역자가 되어 성령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 구하는 것아니라, 늘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성령충만입니다. 우리교회 성도님들이 성령 충만하여 예배에 감격하고 항상 감사하며 순종의 삶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명령1 거듭나라(요3:1-15) 미국 36대 대통령 지미 카터는 대통령 후보 연설 전에 신문기자들에게 “ 나는 거듭난 그리스도입니다. (I am a born-agian Christain)”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거듭남의 확신은 가장 중요합니다. 십자가를 생각하면" 죄사함 – 거듭남 – 구원"이 함께 떠오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우리의 거듭남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믿음을 여는 열쇠가 "십자가"라면 그 문을 여는 손잡이는 "거듭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으로서의 율법의 지식을 갖고 있는 지성인이었습니다.그런데 니고데모가 왜 예수님을 찾아 왔을까요?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가는데 ,사람들이 많이 모인곳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뽕나무로 올라갔던 삭개오의 모습과 비교가 됩니다. 니고데모는 자신이 배웠던 율법과 구약의 말씀을 떠올리며 예수님에 대해서 많은 생각과 고민의 밤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가 전한 하나님 나라는 무엇인가? 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요3장 3절에 예수님께서는 그의 고민과 질문을 미리 아시고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나다”는 헬라어< 아노센 >이라는 단어인데, "위로부터 나오다"는 뜻입니다. 거듭남은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정말 거듭나셨나요? 거듭나셨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계십니까?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분명하게 믿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그 방식대로 살아갑니다. 니고데모의 고민은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볼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가? 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야하고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거듭나는 것은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혹시 아직도 자신의 거듭남에 대해서 의심하고 확신하지 못하는 분이 계시다면 ,스스로 진지하게 고민해보시기 바랍니다. 뉴욕에 있는 리버사이드 교회에는 “그리스도와 부자 관원” 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림에서 부자 청년의 얼굴은 예수님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는데, 혹시 부자 청년과 니고데모처럼 거듭남에 대한 고백이나 인정이 없으시다면, 다시 신앙을 돌아보시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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