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길을 걸으라 <유진 피터슨>


흙(dirt)은 그것이 제자리에 있지 않을 때에만

더럽힘의 형용사인 더러움(dirty)이 된다.




우리가 더러운(dirty)이라는 단어를 부정적인 형용사로 사용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더러운 옷, 더러운 얼굴, 더러운 손, 더러운 그릇, 더러운 술수, 더러운 생각, 더러운 책 그러나 흙(dirt)이라고 하는 것은 제자리에 있기만 하면 아무런 부정적인 함의 가없다.


예를 들어 정원이나 화분이나 채소밭에 있는 흙처럼 말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흙으로 지으셨다고 하는 창세기의 진술에는 아무런 부정적인 의미도 들어 있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다. 우리가 만들어진 흙, 그리고 우리가 돌아갈 흙은 우리의 발 아래에 있는 것과 동일한 흙이다. 이것은 우리가 창조계 전체와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며, 인간을 제외한 나머지 세상에도 존엄성을 부여해 준다.


‘흙(dirt)은 그것이 제자리에 있지 않을 때에만 

더럽힘의 형용사인 ’더러운(dirty)이 된다.


길을 나선 사람에게 기다리는 일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다. 길을 간다는 것은 목적지를 향해 간다는 뜻이다. 열심에 차 있고 결의가 굳은 여행자에게 기다리는 일이란 오로지 방해로만, 갈 길을 지연시키는 것으로만 여겨질 뿐이다. 뛰건, 산책하건, 차를 몰건, 개를 산책시키건, 길을 갈 때는 길을 가는 것이 우리가 하는 일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길을 나서겠는가?


하지만 길을 가다가 더 이상 길을 가지 못하게 되는 때가 있다. 다리가 부러진다거나, 사고 때문에 도랑에 주저앉게 된다거나, 지름길인 줄 알고 갔다가 수렁에 빠져 무력하게 갇히거나 할 수 있다


그럴 때 우리는 기다린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쾌활한 행인들이 지나가면서 우리에게 아무리 많은 격려의 말을 해준다 해도, 천국 길을 가는 우리들을 아무리 열심히 응원하면서 충고를 해주고 성경을 인용해 준다 해도(“허리띠를 띠고”, “네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인내로써...경주를 하며”), 달라지는 것은 없다. 우리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아무런 대책이 없다.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한다.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다른 사람도 우리를 위해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한다. 우리는 “깊은 곳에서”기도한다.


우리가 더러운(dirty)이라는 단어를 부정적인 형용사로 사용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더러운 옷, 더러운 얼굴, 더러운 손, 더러운 그릇, 더러운 술수, 더러운 생각, 더러운 책 그러나 흙(dirt)이라고 하는 것은 제자리에 있기만 하면 아무런 부정적인 함의 가없다.


예를 들어 정원이나 화분이나 채소밭에 있는 흙처럼 말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흙으로 지으셨다고 하는 창세기의 진술에는 아무런 부정적인 의미도 들어 있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다. 우리가 만들어진 흙, 그리고 우리가 돌아갈 흙은 우리의 발 아래에 있는 것과 동일한 흙이다. 이것은 우리가 창조계 전체와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며, 인간을 제외한 나머지 세상에도 존엄성을 부여해 준다. ‘흙(dirt)은 그것이 제자리에 있지 않을 때에만 더럽힘의 형용사인 ’더러운(dirty)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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