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 GSC새벽 큐티설교 <딤후 1:3-10> ==


제목 : 부끄러워하지 말라( 3:17-21 )



[딤후 1:3-10]

(딤후 1:3)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딤후 1:4)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딤후 1:5)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딤후 1:6)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딤후 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딤후 1:8)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딤후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딤후 1: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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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부끄러워 하지 말라(딤후 1:3-10)

 

사도바울을 디모데후서의 서신을 통해서 에베소에서 자신의 후임으로 목회를 하고 있는 아들 같은 디모데에게 목회적 권면과 당부 그리고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디모데후서 115절에 의하면

(딤후 1:15)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느니라

네로 황제의 박해시기에 많은 변절자들. 복음과 믿음을 저버리는 이들이 교회안에 생겨 났습니다. 쉽게 말해서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사도 바울을 부끄러워하고 복음에 이탈자들이 생겨났습니다. 바로 그 대표적인 이름이 < 부겔로와 허모게네 >입니다.

 

디모데후서 말씀을 보면서 유독 제 마음에 다가왔던 문구 하나는 

<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 >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디모데 후서 1장에만도 3번이나 등장합니다.

(딤후 1:8)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딤후 1:12)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딤후 1:16) 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이 전한 복음이나 복음을 전한 바울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여기서 쓰여지 <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 에파이스퀴노마이 >는 말은 < 부끄러움 당하다 >는 부정적인 의미을 갖고 있는 동시에 < 부끄러워하지 말고 고백하라 >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냥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은 소극적인 자세를 넘어서 조금 더 적극적인 자세를 포함합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복음을 자랑하며 고백하는 일에 당당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디모데후서 1장에 사도바울의 당부와 권면 사도바울의 분명한 고백과 확신이 뭍어납니다. 사도바울의 디모데의 가슴에 다시금 부어주고 싶었던 강한 확신은 바로 < 복음 >이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는 4번에 걸친 복음에 대한 부탁이 등장합니다.

1장에 < 복음을 지키라 > 2장에 <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으라 >

3장에 <복음안에 계속 거하라 > 4장에 < 복음을 전파하라 >

 

사도바울이 아들같은 디모데를 생각하면 늘 기도와 눈물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기도가운데 항상 디모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디모데를 생각하면 감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늘 기도와 감사는 눈물을 드러났습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를 기억합니다.

오늘 본문 3-5절은 새번역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나는 밤낮으로 기도를 할 때에 끊임없이 그대를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나는 조상들을 본받아 깨끗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나는 그대의 눈물을 기억하면서, 그대를 보기를 원합니다. 그대를 만나봄으로 나는 기쁨이 충만해지고 싶습니다. 나는 그대 속에 있는 거짓 없는 믿음을 기억합니다.“

 

구절에서 사도바울은 < 생각 : 모나오마이>이라는 단어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3-5절에 <생각하다>는 동사를 각구절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정확한 표현은 <생각나게 하는 것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바로 기억하고 회상해보는 것입니다. 자신의 아들 디모데를 생각하고 기억해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의 기억속에 있는 디모데안에 중요한 3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청결한 양심입니다. 둘째는 사랑의 눈물이니다.

셋째는 거짓없는 믿음입니다.


이것은 디모데전서에서 사도바울이 언급했습니다.

(딤전 1:5)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청결한 양심은 이기적이지 않은 마음의 중심을 의미합니다. 양심은 아우런 편견도 없는 공평한 판단력이 아니라 뜻과 행위에 있어서의 <자아인식>입니다. 특별히 <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자유롭게 된 양심 >을 말합니다

.

사랑의 눈물은 사도바울은 디모데와 마지막 작별할 때 흘렸던 눈물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거짓없는 믿음은 <위선적이지 않은 믿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위선적이지 않은 디모데의 부모의 신앙을 잘 전수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누군가의 기억속에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되지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아야합니다.

나는 정말 청결한 양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기억되고 있는지?

나는 정말 사랑의 눈물을 흘릴수 있느 사람이라고 기억되고 있는지?

나는 정말 위선적이지 않는 거짓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는지?

 

저는 종종 제가 사역했던 교회들의 교우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생각해보곤 합니다. 지나온 사역의 현장들을 돌아볼때면 그들은 나를 누구라고 기억하고 있었을까?

 

제가 지난주 달라스에서 한국에서 제가 가르쳤던 제자를 5년만에 만났습니다. 지금 그 친구와 하루를 보내는 특별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들의 학교친구를 함께 만났는데 그 친구들이 저를 알고 있었습니다. 제자 저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했다는 겁니다. < 아 그분이 그분이야 !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

 

문뜩 궁금했습니다. 제자에게 물었죠 < 너 친구들에게 나에게 대해서 뭐라고 말했니? > 라고 물었습니다. 그대 제 제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 제 평생의 맨토라고 내가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고.. >

제 이런 사람입니다. ㅎㅎ

누군가에게 어떻게 이 기억되느냐?는 우리의 삶의 내용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를 생각할 때 < 양심/ 눈물 / 믿음 >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신의 기억속에 있는 디모데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6-7절을 새번역을 읽으면 이런 이유로 나는 그대를 일깨워서, 그대가, 나의 안수로 말미암아, 그대 속에 간직하고 있는 하나님의 은사에 다시 불을 붙이게 하려고 합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

 

다시 바울은 디모데의 가슴을 뜨겁게 하고자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강한 어조를 도전하고 있습니다.

(딤후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바슬레이 슐링크 < 예수님과 멀어지게 된 45가지 이유 >

우리 안에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 두 가지가 공존한다. 하나는 온 세상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즉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십자가를 거부하는 것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10:38).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2:3)

 


<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는 말씀이 < 복음과 함께 복을 받으라 >가 되면서 기독교 신앙은 변질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 고난을 받으라 >는 도전은 < 나와 함께 고난에 동참하라 >는 초청과 같은 것입니다. 바울의 복음을 향한 초청은 바로 고난의 자리로 한걸음더 나아가는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사는 것

복음을 위해서 살아내는 것

그것은 고난을 경험하는 일입니다.

 

(딤후 2:11)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복음을 위해서 살겠다고 작정하는 일은 주와 함께 죽으러 가는 것을 작정하는 일입니다. 동시에 복음을 위해서 살아내는 것은 주와 함께 살아나는 입니다.

 

주님을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땅에서 청결한 양심과 사랑의 눈물 그리고 거짓없는 믿음을 기억할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복음 때문에 복음을 위해서 당한 고난을 기억할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 가장 즐겁게 우리와 함께할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을 위한 우리의 당부이며 요청입니다.

 

== 2015 GSC새벽 큐티설교 <3:17-21> ==


제목 : 나를 본 받으라 ( 3:17-21 )





[3:17-21]

(3: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3: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3: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3: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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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나를 본 받으라 ( 3:17-21 )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나를 본 받으라 고 말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의미는 잘 연단되고 만들어지 틀을 수요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서서 < > 이라고 말하는 말은 <튀포스>인데 <튑토>라는 단어에서 나온말입니다. 튑토라는 말은 < 무언가를 때리고 쳐서 만들어진 틀 / 흔적 / 자취 / 모형 >을 말합니다.

< >은 사도바울의 말씀대로 살려고하는 온전한 경건, 복음대로 살아내려는 삶의 내용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자주 사도바울은 이 < 본받는 것 >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뿐이 아니고 고전 11:1절 에서도 똑 같은 말을 했습니다.

(고전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살후 3:9)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살전 1:9)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살전 1: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살전 1: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살전 1: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사랑하는 여러분. 누군가에게 < 나를 본 받으라 / 나 만큼 해 / 나처럼 해 >라고 말하기는 것이 쉬운 일까요? 어려운 일일까요?


성도들의 본이 되어야하는 목자인 저 자신부터 이러한 권면과 요청은 쉽지 않습니다.

< 집사님 저를 보시고 아시고.. 제가 어떻게 살고 있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제발 저처럼만 해보세요. 저를 본받아 보세요 > 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제 딸 엘림이도 자주 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 아빠 목사님이잖아 목사님 왜그래 이런 말을 들으때면 마음이 찔립니다.

 

우리의 풍습으로 보면 이 같은 말은 좀 교만한 말 같이도 들리고 좀 지나친 과신 같기도 한 느낌이 드는 그런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풍습으로는 나를 본 받으라는 식의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말을 하게 된 사도바울의 심정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사도바울이 자신을 본받으라고 했을까요?

어떤 의도에서 자신을 본받으라고 했을까요?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은

< 바울 자신이 얼마라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자신을 쳐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며 몸부림 치고 있는가? 그리고 그리스도를 본 받으려고 할 때 세상의 헛된것들에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죽고 있는가?

바울 자신이 얼마나 복음을 위해서 살기로 결단하고 그 복음을 살아내고 있는가 ? >

 

나를 변화시키지 못한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 복음으로 내가 변화된 것이 없다면 나는 다시 복음을 들어야한다. < 나를 향한 복음이 먼저이다. 나의 변화가 먼저이다. >

 

# 목회 그 위험한 부르심


자기를 향한 복음이 없다. 세상은 향한 복음은 외치지만 매일 같이 자신을 향한 복음을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복음이 외침에 불과 하고 복음이 아무 변화도 일으키지 못한다.

 

이것에서 바울의 < 나를 본받으라 >라고 말하는 이러한 자신감? 용기 ?가 나오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이 말씀을 옥중에서 밖에 있는 성도들에게 들려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옥중에 앉아 있는 바울은 지금 밖에 있는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걱정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는 사회적으로 굉장한 무질서가 있었고 신앙적으로는 이단들이 침투해 들어오고 있는 때 였습니다. 또한 세속적인 풍조가 교회까지 파고 들어 오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생활의 기본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옥중에 앉아 있는 바울은 밖에 있는 성도들이 걱정이 됩니다.

 

미셔널 처치 세미나 < 나침판의 정북 방향을 행하기 위해서 계속 떨림을 갖고 있다 > 교회가 본질적 교회에 대한 떨림. 복음에 대한 떨림, 선교적 교회에 대한 떨림이 있어야한다. 성도는 선교적 삶과 여정에 대한 떨림을 갖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바울은 두고 오는 성도들이 미덥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밖에 있는 성도들이 흔들림이 없이 신앙생활을 하게 하기 위하여 무엇인가 지침을 내려 줄 필요를 느낀 것입니다. 이같은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로서 어떤 권위 있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을 제시 해 줄 필요를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하게 된 말이 나를 본 받으라 는 말입니다. 뿐만아니라 17절에서 나와 함께 행하는 자들을 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나와 함께 행하는 자는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서서 < 보라 >는 의미는 < 주시하고 주목하고 보라 >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세상이 혼탁한데도 불구하고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혼신을 다해서 십자가의 삶을 살고 있으니 그들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8절에서 말하기를 내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노니 너희는 십자가의 원수가 되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너희만은 그렇게 살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삶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19절에서 세 가지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배로 하나님을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번영신학. 기복신앙. 자기중심

탐욕의 복음의 교회를 망치고 있습니다.

저희의 신은 배요”(19) 이 말의 뜻은 지금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 살아가고 있는 목적이 배를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즉 배를 위해서 온 신경을 다 쏟고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본질을 놓치는 것입니다. 선교가 어느 순간 교회의 부수적 사역이 되어버린..

 

사람들이 즐기며 살아가기 위해서 예수도 다음이고, 하나님도 다음이고, 오직 관심은 먹고 즐기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염려하고 있는 그 당시의 세상풍조 입니다.

어느 시대나 이 배가 문제 입니다. 배를 채우는 문제, 이 세상에서 가장 기본급의 문제가 이 배의 문제입니다. 지금도 하루에 순전히 배를 채우지 못해서 죽어가고 있는 인구가 1만명씩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굶어서 얻은 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인구가 10만명씩이나 된다고 합니다. 배고파 보지 않은 사람은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가를 모릅니다. 배가 고프게 되면 나머지 문제는 모두 다음 입니다.

 

로마제국에서 가장 큰 문제가 이 문제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매일 같이 먹는 일로 소일했습니다. 매일 같이 연회를 베풀고 먹고 마시는 일로 즐기고 살았습니다. 나중에는 이 일이 더 심해져서 싫토록 먹고 약을 먹고 토해 내고 또 싫 토록 먹고 마시고 약을 먹고는 토해 냅니다. 그래서 하수구에 흐르는 물이 파란색으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나라가 온전하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역사가는 로마의 멸망은 저 하수구의 파색깔에서 비롯되었다고 까지 말했습니다. 물론 사람은 먹고 배가 불러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삶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는 말입니다. 그것이 생활의 전부가 되면 그것이 곧 신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배의 신앙 입니다. 하나님 보다 배를 더 중시하고, 신앙 보다 먹는 문제에 더 우선하고, 예수 보다 세상을 더 좋아하면 그것은 모두 배를 신으로 삼고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배의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눈물로서 당부한 첫번째 당부 입니다.

 

두번째는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여지기 말라는 당부입니다.

위대한 교회가 위험한 교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세상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오래입니다.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다”(19)

어거스틴은 그의 참회록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젊었을 때는 죄를 짓는 일이 장쾌한 일로 인식되었었다. 그래서 큰 죄를 지을수록 남자 답게 인식되었었고 자랑스러웠다. 그래서 동료들은 그것을 부러워 하기 까지 했었다. 그런데 새 사람이 되고 보니 그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었는지 모른다고 술회 했습니다.

 

교회와 성도는 세상이 부러워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에 부끄러운 공동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을 가만히 살펴 보십시요. 오늘은 마땅히 부끄러워 해야 할 것들이 자랑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아무런 변화가 없는 성장은 자랑일까요? 부끄러움 일까요?

사도 바울은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여기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마땅히 부끄러워 해야 할 것들이 영광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여기지 말라는 말을 할 그 당시에 가장 큰 이단이 있었습니다. 것이 에피큐리안이즘이라고 하는 정신적 쾌락주의입니다. 영지주의입니다.

 

이 사람들은 영만 깨끗하면 되지 육신은 마구 둥굴려도 죄가 않된다고 우기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습게 살았습니다.

 

디오게네스 같은 사람은 통 속에서 쪼구리고 살았습니다. 사람이 마음만 평안하면 됐지 생활은 어떻게 해도 괜찮다고 하며 무질서 하게 살았습니다. 그들은 개 같이 사는 것을 영광으로 알고 개 같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이것을 부끄러운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질서도 없고, 정돈되지 않은 삶은 무질서한 삶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질서 있는 삶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것이 영광인 줄 알고 살았습니다. 그것이 또 진리인양 성도들이 자꾸만 유혹되어 따라 갑니다. 그래서 경고하게 된 것 입니다. “너희는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삼지 말라이것이 눈물로서 당부한 두번째 부탁입니다.

 

세번째 당부는 땅의 일만 생각하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저희는 땅의 일만 생각하는 자라”(19)

 

신앙생활은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 보는 생활입니다. 뜻을 하나님의 나라에 두고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내 육신은 비록 이 땅에서 살고 있지만 내 정신과 마음과 뜻은 하늘에 두고 살아가는 생활, 이것을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몸은 하나님 앞에 나와 있는데 정신과 마음이 모두 이 세상에 깊이 빠져 있기 때문에 문제 입니다.

우리의 정신이나 뜻, 그리고 관심이 이 땅 위에만 집중되어 있으면 영적인 생활은 소멸되고 맙니다. 뜻을 잃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관심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완전히 땅의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속물이 되는 것입니다.

 





@ 어떤 어린아이 하나가 길을 가다가 동전 하나를 줏었습니다. 이 아이는 그때부터 동전 줏는 재미로 땅만 쳐다 보고 살았습니다. 덕분에 땅에 떨어진 물건들을 많이 줏었다고 합니다. 일평생 줏어 모은 것이 단추 29,519, 머리핀 54,172, 동전 수천개를 줏었습니다. 그런 것을 줍느라고 그는 일생 동안 하늘의 푸르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저 아름다운 태양도 보지를 못했습니다.

 




더구나 세상의 자연과 꽃들의 아름다움 조차 보지를 못하고 오직 땅만을 쳐다 보고 살아 온 것입니다. 이것을 넝마주이 인생이라고 합니다. 넝마주이 인생에게는 꿈이 없습니다. 저 하늘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있다면 오직 땅에 널려 있는 쓰레기 뿐입니다. 그래서 땅에만 관심을 갖고 살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3:7-11]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3: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관심을 두고 사십니까.

여러분을 지금 움직이고 있는 제일의 관심이 무엇 입니까.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다 뜻을 두고 살아가십니까. 사도바울은 지금 옥중에 앉아서 밖에 있는 성도들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눈물로서 서너가지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1) 배로 신을 삼지 말라.

2) 부끄러운 것을 영광인줄로 착각하지 말라.

3) 땅의 일에만 너무 골몰하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멧시지 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깊은 깨달음과 하나님의 새로운 격려가 여러분에게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 2015 GSC 새벽 큐티 설교 <고전 6:1-13> ==



제목 : <고전6:1-13> 알지 못하느냐




 

바이블타임 본문 < 고전 5-8> 본문 중에서

 

[고전 6:1-11]

(고전 6:1)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고전 6: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고전 6: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고전 6:4)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고전 6: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고전 6:6)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고전 6:7)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고전 6:8)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

(고전 6: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고전 6:10)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고전 6: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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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함께 묵상하고 있는 고린도 교회는 많은 이슈들과 문제들을 앉고 있는 교회 였습니다. 바울을 고린도교회를 바라보면서 그리고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고린도 교회에 대한 소문을 들으면서 고린도교회가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떤 것을 바로 잡아야 하는지? 분명하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아주 영적이면서 아주 세속화된 교회 였습니다.

고린도교회는 경제적으로 부유하였지만 영적으로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아주 지적이면서 아주 율법적인 교회였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아주 신앙적이면서 아주 비도덕적인 교회였습니다.

고린도교회는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였지만

속으로 심각하게 병든 교회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고린도교회에 대해서 분명한 어조로 그리고 단호한 말로 교회의 문제들에 대해서 편지하고 있습니다




리가 함께 읽고 있는 고린도전서의 각 장마다 고린도교회가 갖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사도바울의 진단과 처방이 나오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의 각 장을 넘길때면 오늘은 어떤 문제를 고린도교회가 꾸지람과 책망을 듣게 되나는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고린도전서를 설교하는 것이 설교자에 부담이 되는 본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책망을 전해야한다는 부담이지요. 그리고 또한 이 책망이 곧 저와 오늘의 교회를 향한 책망이기에 더 뜨끔하고 마음 한컨이 아려옵니다.


다른 여러 서신서들에서 사도바울은 성도들을 격려하고 위로하면서 교회안에 있는 교리적인 논쟁들 그리고 거짓교사들에 대한 주의를 당부하는 조금은 조심스럽고 걱정스러운 어조로 서신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를 향한 편지해서 사도바울을 안타까움과 선한 분노가 담겨 있음을 보게 되지요.

 

이것 역시 세속에 물들지 않고 복음과 믿음을 지키기를 바라는 목회자의 애정. 목자의 심정 그리고 그리스도의 마음에서 나오는 동기에서 출발한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의 진리에 견고하게 서서 어떠한 헛된 것들.. 어떠한 불의한 것들이...어떤한 죄악된 것들이 주님의 교회에 침투하지 못하도록 강하게 경계하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불의한 것에 병들고 오염되는 것에 대한 심한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는 것 지요...

 

그래서 고린도 전서의 각장에는 사도바울의 < 성도들과 교회에 대한 책망과 죄의 대한 지적, 잘못되어가는 일에 대한 교정, 자신과 복음에 대한 오해에 대한 해명 >이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강하고 센 어조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6장에 사도바울의 안타까움을 한마디로 표현하고 있는 문구가 있다면 그것은 < 알지 못하느냐 > 라는 말입니다. 말은 고린도전서에 6번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3/9/15/16/19/ 에 등장합니다.


(고전 6: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고전 6: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이미 알고 있고 이미 배운 바대로 살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책망하고 있는 것죠.

 

<알지못하느냐?>라는 말속에 바울의 답답하고 안타까움 심경이 담겨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주 자신의 마음을 < 알지못하느냐 ? > 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고린도전서의 전체의 분위기와 바울을 심정을 알수 있는 물음과 외침이 바로 <알지못하느냐>라는 말 한마디속에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고전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 5:6)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 9:13)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오늘 고린도전서 6장에 사도 바울이 다루고 있는 교회의 이슈는 무엇입니까 ?

바로 <송사>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송사는 세상법정에 교회안에서 일어나는 문제들. 교인들끼리 일어난 사소한 문제들을 세상법정에 가져가서 판단 받는 일에 대한 사도바울의 책망과 권면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고린도 교회안에서 일어난 교인들끼리 일어난 사소한 문제들을 교회안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그것을 세상법정까지 가져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사도바울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일어나고 있는 이 이슈가 오늘 현대교회.. 오늘날 지금 여기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 교회들에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문제라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최근에 교계뉴스나 기독신문을 펼치면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기사역시 <교회안에 분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랑의교회 차압/두레교회 김진홍목사/삼일교회>


들 교회들의 세상법정 소송이야기는 교인의 가십거리가 될 뿐아니라 세상속에서 교회의 부끄러움이 되고 있는 것이 참으로 통탄하고 안타까운 이야기입니다.

 

한마디로 세상에 이런일이...”라고 말할만한 일이 고린도교회안에서도 있었고 지금 오늘 이민교회... 한국교회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이것이 현실이며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의 고린도교회 당신의 문화적인 배경을 생각해보면... 아마도 고린도 교회안에서 일어난 소송의 문제는 아마도 교인들끼리 <금전거래에서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많은 학자들의 이 소송의 원인이 < 형사상의 문제라기보다는 민사상의 문제에서 >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교인들끼리 버러진 억울한 금전적 손해에 대해서 세상법정으로 가져 간 것입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소송을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교회안에 지휘가 높고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영향력이있는 이들이 그러한 소송의 주도적인 역할 했을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그 당시 로마법제도에 의하면 법정은 빈민들이나 심지어는 평민들도 쉽게 갈만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사회적으로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사실상 세상법정에서 판결을 받는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로마 통치하에 고린도에서 보통 법정은 < 아고라 >라고 불리는 시장의 중심부에 있었습니다. 그기에 판사가 앉아서 재판을 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제국의 사회 규범에 따르면 오직 부자와 권력자들만이 상대방을 법정에 세울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추측해본다면.. 고린도교회에 일어난 소송의 문제는 교회안에서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고 경제적으로 부요한 사람이 교회안에 약하고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 어떤 금전적인 것을 빌려주었는데 그것을 받지 못하니까


지위가 높은 교인이 자신에게 손해를 끼친 지위가 낮은 교인을 <시장 한가운데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세워서 재판을 받게 한 것>이라는 추측을 할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일에 대해서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일은 불의한 일이며 이것은 세상에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누가 누구를 판단할수 있느냐 ? 라고 말합니다.

사랑과 용서의 복음을 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리고 누가 누구를 판단할수 있느냐

그리고 교회안에서 이 문제를 판단하고 해결할 수 없느냐

라고 하는 요청을 합니다.


교회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세상법정에.. 세상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판단 받게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 사도바울이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아마다 이런 심정으로 고린도전서 6장을 기록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교회안에 사랑과 용납이 어디 있으며... 도대체 교회안에서 용서와 화해가 어디있느냐.. 정말 부끄러워서 눈을 들 수가 없도다.. 도대체 세상이 이런일이 어디 있으며.. 세상에 이러한 어처구니 없는 일이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다니.. 기가차서 말이 안나온다... 정말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수가 없다.


(고전 6:4) 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고전 6: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그리고 사도바울의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너희 장차 주님의 오셔서 재림하는 날에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너희가 세상을 판단하고 천사를 판단할 것이지...

너희 형제를 판단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안에서 한 형제가 서로를 판단하여 세상의 법정까지 가는 그일을 어리석고 불의한 일이며 세상앞에 부끄러운 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스스로 허물을 만드는 일이며 이미 분명한 허물이 되고 있다고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 6: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고전 6:6) 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고전 6:7)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고전 6:8)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이러한 문제 생길 때 가져야할 자세를 말해줍니다.

<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안에서 성도간에 < 판단과 비난 >의 이슈는 항상 도사리고 있습니. 

이것은 어쩔수 없는 연약함이 우리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우리는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이 바르고 옳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느낌과 감정 그리고 판단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항상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자신의 시각으로 그 사람을 바라봅니다.


이러한 마음과 생각은 우리의 거짓되고 부패한 죄성/습성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이것은 범죄한 아담의 본성이며 범죄한 가인의 생각입니다. 아담은 하와를 판단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판단했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판단하고 하나님을 판단했습니다.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는 연약함입니다.


종종 연약한 사람들중에는 자신이 재판관되고 자신이 수사반장이 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잘 잘못을 따지고 반드시 바로잡고 반드시 이기고 말겠다는 세상적인 마음에 휩싸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와 용납.. 용서와 화해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이 없이 여전히 세상적인 거짓된 동기와 불순한 동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도 사도바울도 우리에게는 분명히 권하고 있습니다. 판단하지 말라.. 그리고 오히려 손해보기를 자처하라.. 말씀하십니다.


고린도교회에 일어난 이 소송의 문제는 교회의 하나됨을 깨뜨립니.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분열시킵니다. 바울이 그것을 알기에 다시금 이 문제를 언급하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고전 6: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우리는 주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안에서 새롭게하심을 날마다 경험하는 사람입니다. 내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성령의 씻으심과 거룩케하심과 의롭하심의 우리가 가장 큰 위로입니다. 이것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용납하고 사랑하고 포용하는 에너지가 됩니다. 사람의 판단보다 하나님의 판단이 더 중요합니다.

 


@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은 심판을 생각하고 있다.

원래 로댕은 지옥의 문이라는 작품에 생각하는 사람을 많은 사람들의 모습속에 한 모습으로 만들어 넣었습니다. 생각하는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할까요?


전날밤에 옷을 어디에 두었는지 고민하고 있을리는 없습니다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분리된 영원한 심판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받은 용납만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어떤 사랑과 용납을 다른 사람에게 하는지 알수 있습니다.

 

그 사랑이 식어지고 그 용납받음을 기억하지 못하니까? 교회안에 다툼이 있고 판단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죠..

 

부족한 사람이 있다면 세워서 온전케하고 때로는 기다려주고 배려하고

지적보다는 따뜻한 위로와 격려가 사람을 더 세워갑니다. 이것인 사랑과 용납받은 사람이 해야하는 노력입니다




 

로댕은 프랑스의 인상주의 조각가다. 그의 이름은 몰라도 그의 작품 < 생각하는 사람 >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알지 모르겠지만 원래 < 생가하는 사람 >은 로뎅이 자신의 최고의 걸작 < 지옥의 문 Gates of Hell >상단에 새겨 놓은 전에 만든 습작이다. 




< 생각하는 사람 >이 도대체 뭘 생각하는지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전날 밤에 옷을 어디에 두었는지 고민하고 있을리는 없고 < 생각하는 사람 >은 하나님과 분리된 영원한 심판에 관해 명상하고 있다. 


그는 지옥을 상상하는 단테(Dante)이다. 


지옥의 문은 섬뜩한 느낌을 주는 웅장한 작품이다. 거기 새겨진 수많은 인물은 심판앞에서 고통과 고뇌로 몸부림을 치고, 맨꼭대기에 생각하는 사람이 슬픔과 고민에 잠겨 앉아 있다. 


인물마다 나름의 이야기가 있고 단테의 지옥같은 신화와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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