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임재와 큰 기쁨(눅2:9-14) 예수님의 탄생은 “위대한 탄생”이라기 보다는 “소박한 탄생”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지극히 높은 자리의 탄생”이 아니라 “지극히 낮고 낮은 자리의 탄생”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우리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요. 하나님께 영광이요. 우리에게 평화입니다. “기쁨과 영광 그리고 평화”가 바로 예수님의 오심 속에 담겨있는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기쁨과 영광, 평화를 경험한 사람이어야 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증언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3가지 메시지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우리의 유일한 기쁨이 되십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자신의 영광을 위함도 아니요. 자신의 자랑을 위함도 아닙니다. 오직 자신을 주셔서 우리를 살리셔서 우리의 기쁨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오신 이유이며, 우리가 살아갈 이유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하나님께 지극히 높은 영광이 되십니다. 세상은 여전히 자기의 영광을 구하려 하지만 주님은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영광스러운 자리를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을 위한 그 높은 영광”을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우리의 참다운 평화가 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화평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가 죄로 깨어져 서로 다가 갈수 없기 때문에 우리를 화해시키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이 되시며 우리를 화해시키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정말 잘 믿었다면 화평이 서로에게 나타나고 화해와 평화가 교회와 세상에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 몇 주 동안 < 예수 내 맘에 담기 예수 내 삶에 닮기 (Jesus in my heart, Jesus in my life)>에 대한 말씀통해 어떻게 예수님을 닮아가야 하는지와 어떻게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하는지 말씀을 받았습니다. 찬송가 96장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 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 되고 우리 기쁨 되시네”를 지은 민로아 선교사님의 고백처럼 자신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며 누구신지 알고 정말 예수님을 잘 믿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시18:1-10) 사랑하는 여러분 2017년 한해 어떠셨나요? 1월1일 첫 설교의 제목처럼 한해 동안 저의 길과 저의 생각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발견한 것은 모든 것이 내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사실입니다. 제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이었고 하나님이 올 한해 우리의 삶과 가정 그리고 교회를 그분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한 해 동안 여러분의 삶은 어떤 힘으로 사셨습니까? 어떤 힘이 여러분의 삶을 이끄셨습니까? 세상에서 주는 잠깐의 만족감으로 힘을 얻는 것은 그것이 사라지면 금방 그 힘이 빠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무엇에서 누구에게 변하지 않는 힘을 얻고 살아야 할까요?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 다니는 도망자였습니다. 사울과 다윗의 추격전속에서 다윗은 도망을 다니면 다닐수록 힘이 생기고 사울은 추격을 하면 할수록 힘이 빠지고 있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힘을 자신의 군대, 자신의 권력, 자신의 왕권에서 찾고 있지만, 다윗은 자신을 보호해줄 어떤 권력도 자신을 보호해줄 세상적인 어떤 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다윗은 자신이 갖고 있는 힘 < 헤제크 / 점점 나를 강하게 하는 힘> 이 있고, 힘이 생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힘이 되시는 분이 누구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바로 그가 믿는 여호와 라고 고백합니다. 시편 18편 1절에”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에 사용된 히브리어 단어는 조금 특별 합니다. < 라함 racham >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구약성경에 12번 사용되는데 이 단어는 젖먹이가 어미를 사랑하는 것처럼 깊이 친밀해져서 사랑하여 긍휼을 입는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도망다니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얻고 있습니다. 힘이 빠져야 당연하고 힘을 낼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여호와가 나의 힘이고 내 힘은 여호와 밖에 없다고 고백합니다 지난 한해 동안 우리가 겪어 왔던 <역경>은 뒤집으면 < 경력 >이 되고 자주 푸념처럼 말했던 < 네 힘들다 >라는 말도 뒤집어 보면 < 다들 힘네 >가 됩니다. <자살>도 뒤집으면 <살자>가 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뒤집어 놓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힘이 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라고 고백하면서 어제를 살았고 오늘을 살며 내일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축복합니다.

이런 교회되게 하소서(행9:26-31) 1 월에는 “이런 교회되게 하소서. 교회여 일어나라”는 주제로 교회란 무엇인가를 함께 나누길 원합니다. 필립얀시는 [하나님의 교회란 한없이 크고 한없이 작다. 그토록 크므로 겸손한자들이 와서 높임 받는 곳이 되어야 하고 그토록 작으므로 높은 자들이 낮고 낮아져야 들어올 수 있는 곳, 바로 그곳이 교회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는 두 가지의 놀라운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려고 다메섹으로 갔던 살기 등등했던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는 회심사건과 그가 초대교회에 어떤 놀라운 일을 감당하기 시작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회심의 사건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에서 시작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진리와 사랑에 반응하는 변화된 행동입니다. 나는 참으로 회심했는가?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사울의 변화를 보면 회심한 사람이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를 담대히 전하는 자들을 막으려 했던 사울 자신이 도리어 예수를 담대히 전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울의 회심과 부르심의 사건이 자신에게 있었다면 지금 어떤 모습이 나타나야 할까요? 사울의 다메섹 회심 사건은 그의 삶의 획기적인 변화를 위한 터닝 포인트 일뿐 아니라, 사도행전 전체 이야기의 터닝 포인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회심 이후의 변화들을 사도행전 9장31절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탄생과 교회의 부흥이었습니다 첫째, 교회들은 평안하였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들이 있고 고난이 있었지만 고난 중에 평안했습니다. 둘째, 교회들은 든든히 서 가고 있었습니다. 셋째, 교회들은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가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함과 고난과 고통 중에 주시는 성령의 위로가 넘쳤습니다. 넷째, 교회들의 수는 더 많아졌습니다. 교인들의 수와 교회의 수가 점점 많아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인도 캘커타의 반얀 나무는 혼자는 숲을 이루지만 주변에 어떤 것도 자랄 수 없게 하는 나무입니다. 반면, 바나나 나무는 6개월마다 새로운 싹을 내어 계속 생명력을 이어가게 하는 나무입니다. 우리 교회는 반얀 나무가 아닌 바나나 나무처럼 또 다른 새로운 싹이 나게 하는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주님을 만나 변화된 성도들을 통해 우리 교회가 평안하고 복음으로만 든든히 서서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부흥하는 교회되길 축복합니다.

성령에 감동되어 담대히 살아낸 사람(행6:1-15) 올해 우리교회 표어처럼 < 성령에 감동하고 성령을 감동시킨 사람>을 말씀에서 찾길 원하는데 ,첫 번째 사람은 다메섹에서 회심한 사울이고 스데반과 베드로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 다음으로 그 사람의 죽음이 귀하고 가치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오늘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스데반 집사입니다. 집사의 직분은 헬라파와 히브리파 유대인 사이에 일어난 갈등으로 인해 사도행전 6장에 7명을 세우게 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교회 안에 일어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세운 직분이 집사라는 것입니다. 좋은 교회, 건강한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문제가 없는 교회가 아닙니다. 문제가 있는데 문제가 안 되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본문에는 교회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집사로 세워진 스데반집사가 어떤 사람인가 세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첫째,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고 둘째, 믿음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며 셋째,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모습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을 성경에서 찾는다면 스데반 집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닮아서 예수님처럼 죽음을 선택하였습니다. 회당의 지도자들이 거짓 증인을 세워 스데반을 공격하고 변론하고 있는 그때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합니다. 절대 억울한 얼굴이거나, 화가 난 얼굴이거나, 짜증난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너무나도 평온했고 너무도 당당했으며 기쁨의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이 될 수 있었을까요? 사도행전 6장에 스데반 집사가 어떤 사람인지를 설명하는 구절 속에서 반복되고 있는 한 단어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 성령 >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성령에 감동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 스데반의 놀라운 설교가 이어지고 그 후에 돌에 맞아 죽습니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였다고 그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에 감동된 사람은 자신의 시선이 세상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향하는 사람입니다. 올 한해 동안 어떤 모습으로 어떤 시선으로 무엇을 주목하며 살길 원하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 우리는 올 한해동안 성령의 충만을 구합시다. 성령에 감동된 사람은 세상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다른 사람입니다. 성령에 감동된 사람이 모여 성령을 감동시키는 우리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성령이여 우리가 어찌할꼬(행2:37-42) 사도행전은 성령의 감동된 사람들과 교회들에 대한 성령행전이며 또한 교회행전입니다. 사도 바울과 스데반 집사가 어떻게 성령에 감동되었는지 말씀을 통해 나누었는데, 지금 성령에 감동되어 나타난 나의 행동, 나의 모습, 나의 얼굴은 어떻습니까? 성령에 감동된 사람은 성령을 통해서 변화를 받은 사람이고 성령에 감동된 모습과 얼굴이 있으며 성령을 통해 지시 받아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렸고 그들의 마음에 강한 불과 바람과 같이 성령께서 임하셔서 마치 새 술에 취해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술에 취한 것이 아니고, 이 일은 하나님께서 선지자 요엘의 말씀을 이루신 것이며, 약속이 성취된 것이라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 설교를 듣고 3000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돌아오는 일이 일어납니다. 베드로는 성령에 감동되었고, 사람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19세기 미국 부흥운동의 주역이었던 D.L 무디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회심한 이후 복음전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학식은 없었지만, 무디의 쉬운 설교를 통해 19C 많은 영혼들이 복음을 들었고, 교회로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베드로 역시 학식은 없었지만, 예수님을 따라갔고 부인하며 실패했어도 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베드로의 설교를 “ 베드로의 기독론적 설교”라고 합니다. 구약의 요엘서와 시편을 인용하여 예수님의 사역, 죽음, 부활, 승천을 자신이 목격한 사실 그대로 전하였습니다. 이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죽인 자들, 예수님의 죽음을 방조한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못박는 일에 직접 가담했거나 동조했던 자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자신들에게 임한 성령이 놀라서 <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 >라고 물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 형제들이여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마음과 양심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일으키고 깨닫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입니다. 1907년 평양 대부흥은 말씀을 들은 길선주 장로의 회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교회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때 자주 마음에 찔림을 받아 회개가 일어나길 원하고, 성령님 우리가 어찌 할꼬 물을 수 있는 은혜가 있길 원합니다.

성령 안에 함께 지어져 가는 공동체(엡2:13-22) 이찬수 목사님은 분당 우리교회가 부흥하게 된 이유는 예배시간에 찬양이 뜨거워지고 성도들이 반응이 좋고 밝아진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교회의 찬양은 어떻습니까? 반응이 좋고 분위기는 밝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길 원하실까요? 올해 우리교회와 성도들이 성령에 감동된 초대교회의 세 사람, 오순절의 설교자 베드로와 성령 충만한 스데반 집사 그리고 복음 선포자로 회심한 사울처럼 성령에 감동된 사람들이 되길 원합니다. 많은 학자들이 교회의 미래는 밝지 않다고 전망하지만, 우리교회는 기필코 승리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누가 내 교회를 훔쳤는가? “의 저자는 오늘날 교회는 세상에 도둑 맞은 것을 모르고 있으며, 성령이 떠나고 말씀과 은혜가 사라졌으며 성도를 도둑맞고 건물만 남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교회는 성령을 사모하고, 말씀과 은혜가 점점 더 회복되고 있어 감사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1세기 교회 중에 놀라운 구원의 역사와 교회의 부흥, 성령의 사역이 일어난 교회였습니다. 에베소 교회를 통해 우리가 꿈꾸는 교회는 첫째, 구원의 감격이 있는 공동체 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져서 화평, 화목, 평안케 되었습니다. 개인의 신앙이나 교회생활에서 구원의 감격이 빠지면 습관적인 신앙이 되고 무미건조하고 형식화 됩니다 둘째, 서로 연결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우리는 지체가 되어서 움직이고 성장하는 유기체입니다. 지체의 생명력은 연결됨에 있습니다. 셋째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성령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성전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성전이 되려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성령 안에서 함께 지어져야 합니다. 군산에 < 군산 드림교회 >는 아이들이 몰려오고 청년들이 부흥한 교회입니다. 드림교회 유목사님은 교회는 더 이상 안 된다는 말은 하나님의 주권과 복음의 능력을 부인하는 변명이고, 생명의 역사는 복음에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더 이상 교회의 부흥은 어렵다고 말하는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감동된 사람을 통해 여전히 역사가 일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모두가 성령에 감동된 한 사람이 되고, 성령을 감동시키는 교회가 되어, 올 한해 놀라운 역사가 우리 나성한미교회에 시작되길 축원합니다

Hello 성령이 계시네(행19:1-10) 달라스 성서 아트 센터에 있었던 큰 그림 “오순절의 기적(Miracle at Pentecost) “ 에는 성령강림을 잘 표현하고 있는데, 그림 아래에 신약에 나온 119명의 명단을 기록하고, 마지막 한 명의 이름은 You and I 라고 적혀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임하셨던 성령님이 우리에게도 오셨음을 믿으십니까? 성령님은 과거에만 오신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고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체험위주의 극단적인 성령운동과 보수적이고 교리중심의 성령론의 양극단에서 삼위 하나님 중 성령님을 소외시키고 외면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만난 어떤 제자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었습니다. 세례요한을 따르는 제자들로 회개의 세례는 들었지만, 성령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신앙생활 하면서 성령님에 대해 전혀 모르고 지내고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성령을 받는다, 성령이 단비처럼 내린다”고 표현한다고 해서 성령님은 물질이 아니고 인격이십니다. 사도행전에는 “빌립에게 이르시되, 베드로에게 성령이 명하사, 안디옥 교회에게 성령이 이르시되”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지금도 살아계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영으로 보혜사로서 보호하시고 은혜를 주시는 스승이시고, 파라 클레이토스 즉 옆에 계시도록 부름 받은 분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성령님은 인격이셔서 우리가 성령님께 Hello 하면 반드시 Hello 하시고 인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셔서, 성령님이 제자들에게 오셨고, 오늘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 행 19:6-7 바울이 에베소 제자들에게 안수하니 성령이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였다고 합니다. 성령님께서 임하셨다는 것은 성령님이 그들에게 오시는 경험을 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의 예루살렘의 오순절의 사건이 20년 후인 사도행전 19장에 이방 땅 에베소에서 그대로 재현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교회 성도님들의 마음에도 성령님께서 매일같이 헬로하고 들어오시는 역사가 있길 바랍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 는 < 믿을 때 >와 < 성령을 받을 때 >가 동시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었다면 성령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성령님을 경험하고 인격적으로 교제하는 은혜가 날마다 넘쳐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Welcome 성령이 오셨네(요16:7-15) 우리는“ 성령은 무엇인가”라고 묻지만 “ 성령님은 어떤 분이신가”라고 묻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저는 성령님은 우리의 "Welcome ! 환영"을 받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령님을 단순히 영적인 기운이나 영적 파워로 생각 하는 것이 아니라 , 인격으로 환영하고 대하느냐가 우리가 받고 누리게 될 성령님의 역사를 결정합니다. 요한복음 16장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앞두시고 제자들에게 그들을 도우실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고난과 핍박 그리고 환난을 받게될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심은 가장 큰 위로와 선물이었습니다. 성령님께서 오심이 가장 큰 위로이고 힘이며 선물이라는 것을 믿으십니까? 박영돈 교수님의 책 “일그러진 성령님의 얼굴”에는 한국교회가 성령님을 이용하여 인간을 높이는 것으로 바꾸어 성령님의 얼굴이 일그러져있다고 말합니다. 성령님은 오직 예수님을 드러내는 수줍은 사역을 하시는데, 성령님의 얼굴이 여러분을 향해서는 어떤 얼굴을 하고 계십니까? 본문 말씀에는 성령님의 사역을 죄에 대해, 의에 대해, 심판에 대해 책망하신다고 합니다. 첫째, 죄에 대해 다루시는데, 우리 마음에 오셔서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다루고 깨닫게 하십니다. 죄에 대해 무지하고 무감각하고 심지어 죄를 무시하고 있다면 성령님께서 오시지 않았거나 성령님이 떠나신 것입니다. 둘째 성령님은 오셔서 의에 대해서 깨우기 시작하시고, 우리의 의로움을 보증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우리의 의에 대해서 변호하시고 억울함을 풀어주십니다. 셋째 성령님은 오셔서 심판에 대해서 증거하십니다. 성령님은 이 세상 임금인 사단이 심판을 받을 것을 증거하시고 하나님나라 자녀들의 고통과 연약함을 신원하십니다. 거짓은 진리를 이길 수 없고, 기필코 진리는 승리하게 됩니다. 3살 때 3도화상으로 얼굴이 일그러진 이효진 자매는 성령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통해 “미스헤븐”으로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성령님을 늘 환영하며 동행함을 통해 죽고 싶던 절망에서 천국을 맛보는 삶으로 바뀌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찾아오시는 성령님을 환영하며 진리의 성령님과 함께 변화된 삶을 사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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