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문제와 하나님의 정의


- 선한청지기교회 김명구 목사 요약정리-


□ 저자: 톰 라이트

영국 성공회의 주교로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맥길 대학교에서 신학학을 가르침. 웨스트민스턴의 참사회원 신학자로 활동함.

연구 프로젝트 : 기독교의 기원과 하나님의 물음

저서: 톰 라이트와 함께하는 기독교 여행, 신약성서와 하나님의 백성,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 하나님의 아들의 부활, Jesus 코드, 예수 나를 따르라 등

 

 

    악의 문제를 특정짓는 구체적인 결과들

 

악이 우리를 정면으로 공격하지 않을 때 악을 무시한다.  

가난한 나라가 장기적 채무에 시달리는 것이 세계의 양심을 괴롭히는 중대한 문제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그 문제를 별로 심각하게 바라보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세상은 대체로 잘 굴러가고, 그런대로 잘 나가는 경제를 흔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악이 우리를 정면으로 공격해 오면 우리는 깜짝 놀란다.

살기 좋고 안전한 곳이라 생각되는 곳에서 아이들이 잘 알고 믿었을 사람에게 살해 당했을 때 심각한 충격을 받는다.   충격을 받는 이유는 이 세상이 기본적으로 괜찮은 곳이라 생각하며 많은 이익을 내고, 많은 것을 알게 해 준다고 믿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또한 해변을 덮쳐오는 해일을 보면서 충격을 받을 뿐 아니라 크게 당황하고 만다.  과거 돌림병으로 많은 사람이 죽은 이야기도 우리의 생각 속에서 완전히 추방되었다.  이런 일들은 고통을 생각나게 하는 것들에 이미 감각이 무뎌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악이 우리를 정면으로 공격하지 않으면 악을 무시하고, 악의 공격을 받으면 충격을 받고 당황한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악에 대해 미숙하고 위험한 방식으로 반응한다.  

다른 행위의 영역에 고르고 사려깊게 배분되어야 할 도덕적 분노가 한가지 죄악에 집중된다.  9/11 사건에 대해 미국에서 일아난 반응도 그 한가지 예이다.  9/11은 총을 소유한 모든 사람을 감옥에 보내야 한다거나, 모든 사람이 총을 지님으로써 착한 사람이 나쁜 사람의 술수에 걸려들기 전에 그들을 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 역시 사태의 깊이를 읽지 못한 잘못된 사고의 결과이다의회의 입법이나 철학적 논쟁을 통해 악을 제거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성능 폭약 역시 악을 제거할 수 없다.

 

악에 대한 2가지 반응

하나는, 남을 탓하는 문화를 만들어 악을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항상 다른 사람의 잘못이고, 사회의 잘못이고, 정부의 잘못이며, 자신은 무고한 희생자라고 여기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악을 자신에게 투사하여 모든 일에 대해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다른 모든 사람을 탓하는 문화와 자신을 탓하는 문화는 둘 다 악의 문제에 대해 미숙하고 부적절한 반응이며 이것이 현재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악의 문제이다.

 

 

    하나님은 무엇을 하실 수 있는가?

악은 단순히 철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인 문제이다.  서구민주주의 자체를 지구적인 악의 문제에 대한 자동적인 해결책으로 간주해서는 안되며, 초인간적인 악의 권세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선과 악의 경계선이 '우리' '그들' 사이를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개인과 모든 사회를 관통한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서구철학의 전통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악에 대해 무엇을 말씀하실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기대하고 요구하도록 부추긴다.  우리는 악이 정말 무엇인지, 왜 악이 처음부터 존재하고 있었는지, 왜 악이 지속되는 것이 허용되는지, 그리고 얼마 동안이나 지속될 것인지 등을 알고 싶어 한다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말하지 않는 것 처럼 느껴진다.  대신 구약성경은 하나님이 악에 대해 무엇을 말씀하신는지 보다, 악에 대해 무엇을 행하실 수 있고, 행하고 계시며, 또 장차 행하려고 하시는지를 말해준다.  

구약성경은 족장들의 이야기로부터 출애굽, 모세, 다윗, 이스라엘의 바벨론 유수의 과정에서 반역한 인류와 이스라엘을 포함한 모든 인간 개개인이 자신이 죄악되고 우상숭배적이며 마음이 완고하다는 것을 보여준다아직도 불평불만이 가득하고 반항적인 백성인 것을 보여준다.

 

    악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하나님

'예수님이 왜 죽으셨는가?' 라는 질문을, '하나님의 목적 속에서 예수님이 왜 죽으셔야만 했는가? 라는 더 심층적인 문제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사건과 동기에 대한 역사적 분석으로 부터 하나님이 악에 대해 행하기로 결단하신 일에 대한 신학적 설명으로 옮겨가게 된다.

악은 강력한 실제이다.  개인들의 죄의 총합을 넘어서는 것이며, 이원론적 관점으로는 적절하게 이해될 수 없다구약성경은 전체가 다양한 각도에서 하나님이 악에 대해 무엇을 행하시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복음서는 교만이 극에 달한 세상의 정치적 권세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스라엘 자체의 부패에 대해 이야기한다인간의 수준을 초월하는 더 깊고 어두운 힘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선과 악을 나누는 선이 예수님과 그의 친구들을 한편으로, 나머지를 다른 편으로 갈라 놓으며 지나가지 않는다.  그 선은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한 가운데로 지나가고 있다.  선과 악을 가르는 선이 나와 우리 각 사람 모두를 지나간다는 인식과 예수님의 죽음이 '나를 위한 '것이며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나를 대신하는 것이라는 복음의 선포가 교차한다.

하나님이 은혜의 사역을 완성하시면서, 죄인 조차도 죄 없게 되는 때가 올 것이다.  이 미래의 사실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 '들리고' '영화롭게' 되심으로써 현재 우리가 누릴 수 있게 된 용서와 성령 안에서의 새로운 삶을 이미 맛보고 있다.  그리고 성찬식과 십자가가 성례전적으로 확고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성찬식은 용서를 구체화하는 표현이고, 성령 안에서의 새로운 삶을 가능하게 한다.

 

    악이 없어진 세상

악이 완전히 제거된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기 어려운 이유는 바로 악에 대한 우리 생각 자체가 매우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존재론적 이원론의 관점에서 보면, 악이 없는 세상이란 몸을 벗어난 영혼들이 무시간, 무공간의 구름 위에 앉아서 비물질적인 하프를 켜는 곳이다.

 악이 사라진 세계, 미래 세계를 상상하는 것이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천국에 대한 잘못된 인상을 지녀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중적인 이미지의 '천국'이 아니라, 이사야서와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상한다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을 한편에,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다른 한편에 두고 살아야 한다십자가는 성취를 믿으며, 부활은 어떻게 상상할지를 배우며, 기도와 거룩함과 더 넓은 세상 속에서의 행동을 통해 그 둘을 하나로 결합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부활의 약속이 실현된 모습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모두 죽음, 질병, 소멸 같은 것들의 지배를 벗어나게 되리 것이므로, 그들이 받은 새로운 부활의 몸도 그런 것을 경험할 수 없을 것이며, 그들의 도덕적, 사색적, 인지적, 감정적 자아 또한 새롭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갱신 속에서 그들은 완전히, 최종적으로, 자신들에게 행해진 모든 악을 용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지신들도 다시는 악에 의해 영향을 받거나 오염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약속이 실현된 모습이다


악에서 구하옵소서가 어떻게 성취될 것인가?

이 질문에 들어가기 위해 '용서의 본질'을 묵상해야 한다먼저 우리는 악에 대해 이름을 붙이고 직면해야 한다.  악을 비켜갈 수 있는 길은 다른 길은 없다.  악이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라는 가장을 해서도 안된다.  악에 이름을 붙이고 직면할 때, 즉 악과 악을 행한 자의 정체가 규명되었을 때 두번째 조치가 가능하다.  그것은 바로 '포용'이다.  

포용은 나에게 깊은 상처를 입힌 사람을 껴안는 것이다.  물론 그런 후에도 악을 행한 자가 자신의 행위를 그런 빛 가운데서 보기를 거절한다면 이러한 포용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악에 이름을 붙였다면, 그들이 반응을 보이려 하지 않더라도 그들을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다.

누군가를 용서할 때, 그들을 우리의 분노와 그에 따른 결과들로부터 풀어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우리에게 행한 것의 무게와, 우리가 그들을 용서하지 않고 우리의 분노와 괴로움에 집착함으로써 경험하게 된 감정적인 불구 상태로 부터 우리 자신을 해방한다.  그러므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용서이든, 우리가 서로 용서하는 것이든 아니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용서하는 것 까지도 악으로 부터 구원받는 것이다.

 

    현재 삶에서의 용서

악의 문제에 대한 긍정적인 대답은,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새로운 세계, 즉 구속받고 새로움을 입은 사람들이 다스리며 하나님의 지혜와 치유의 질서를 실현하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발견된다.  현 세계에서 존속하는 악의 존재와 권세는 그 새로운 세계를 위협할 수도 없고 거부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용서의 힘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의 악이 낳은 결과들을 피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가 가져오는 기쁨에 동참해야만 실현되는 일은 아니다.  물론 신약성경 전체는 우리가 현재의 삶에서 내리는 선택이,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와 관련된 선택들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실재적이고 영원한 결과를 낳는다고 반복해서 경고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잔치가 우리 없이 진행되는 것을 막을 자격이 없다.  우리는 탕자 이야기의 큰 형처럼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을 권리가 있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이유를 물으실 권리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참석하든 참석하지 않든 살진 송아지는 잔치상에 차려질 것이다.  하나님이 제시하는 대로 잔치 초대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악으로 부터 구원이라는 잔치를 즐기게 된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진정한 용서를 베풀 때, 그들이 그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적대감을 품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더는 그들이 행한 악에 의해 제약을 받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죄를 범한 피조물들을 향해 진정한 용서를 베푸실 때, 그들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더는 그들이 행한 악에 의해 제약을 받지 않으신다.


그리스도인이 현재 이루어야 하는 과업

그것은 종말론을 앞당겨 실현하는 것이다이것은 현재의 삶을 변화시킬 자원을 하나님의 미래로 부터 빌려오는 것이며, 현재 우리를 얽어맨 악의 사슬을 어떻게 느슨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배움으로써, 궁극적으로 누리게 될 악으로부터의 구원을 지금 미리 맛보는 것이다.  

악은 단순히 철학자들의 수수께끼가 아니라, 우리의 거리를 활보하며 사람들의 삶과 가정과 재산을 상해하는 실제이다. 그 문제에 대해 해결잭을 구하는 것은 '왜 악이 처음부터 존재했는가?'라는 질문에 지적으로 만족스러운 대답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 원하시는 치유와, 회복하는 정의가 힘을 발하게 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우리는 궁극적인 실재를 현재의 물질적 시공간 안에서 그리고 인간의 삶과 사회의 혼런스러운 실재들 안에서 앞당겨 실현해야 한다.


우리가 반드시 붙잡아야 하는 통찰

용서가 관용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용서는 결코 관용이 아니다.  용서는 포용성과도 같지 않다.  용서는 개인적인 혹은 도덕적인 무관심과도 다르다.  용서는 우리가 악을 이중으로 진지하게 다루는 것이다.  

용서는 단호한 태도로 악에 이름을 붙이고 악을 치욕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 과정 없이는 용서할 일 자체가 없다.  그 다음으로 용서는, 똑같이 단호한 태도로 악이 처리된 후에 죄를 범한 사람과 적절한 관계를 재개할 수 있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행하는 것이다.  

용서는 우리가 이후에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악으로 하여금 결정하도록 허락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이다.  용서는 그 일어난 사실을 직시하고, 그 일이 우리 사이를 가로막지 못하도록 치워 버리려는 도덕적 의지를 가지고 의식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다.  즉 용서는 벌어진 일이 악하며 단순히 개의치 않을 일로 치부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용서는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를 현재의 삶에서 실현하라는 명령

서로 용서하라는 명령은 우리가 미래에 받기로 약속된 것, 즉 모두가 잘되고 무든 일이 잘되는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를 현재의 삶에서 실현하라는 명령이다.  이미 시작된 종말론적인 삶, 곧 미래의 빛에 비추어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삶을 새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모든 기독교 종말론이 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럼, 우리가 악으로부터의 구원을 맛보려고 미래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살려면 우리는 어려운 문제들에 봉착하게 된다.  

이런 문제들이 진짜 문제들이며, 철학적인 문제들은 단순히 이런 진짜 문제들을 회피할 수 있도록도와주는 연막일 뿐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용서의 의미를 배우면 배울수록 모두가 잘되고 모든 일이 잘될 것이라는 심오한 신학적 진리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될 것이며 그 실재를 우리의 고통받는 세상 한 가운데서 미리 실현하는 과업을 더 잘 수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후기

악은 우리의 삶과 친숙하다악은 세상에 당연히 존재한다그러나 나는 악하지 않고 악의 영향을 피해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그런데 악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악을 피해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악을 악으로 느끼지 못하기도 하고, 악으로 느끼면서도 악을 행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 속에서 책을 읽기 전의 기대한 것 중 하나는 세상은 악하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세상의 악들을 어떻게 하실 것인가?  하나님의 정의의 칼을 어떻게 드실 것인가?” 하는 것들이었다.  행동의 악 뿐만 아니라 생각과 마음의 악을 어떻게 하실 것인가? 에 대한 기대로 출발했다.

정답을 기대하며 책을 읽었는데, 책은 정답 대신 여러가지 중 한가지의 해답을 주었다그것은 하나님의 정의를 나와 우리를 통해 나타내시고자 하신다는 것이다악의 경계선이 나와 그들 사이로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관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악은 궁극적으로 세상과 함께 한다삶 속에 그대로 둔체 살아간다그리고 그것이 계속 되면 하나님의 정의를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나님의 정의를 나타내시는 것은, 경험하게 하시는 것은 을 구별하고, “의 제약을 받지 않는 삶을 통해서이다그것이 이미 존재하는 악에 대해 하나님의 정의를 나타내는 방법이다

악을 구별하고 악의 제약을 받지 않는 삶을 용서와 포용이라는 단어로 설명한다.   현재의 삶에서 용서와 포용을 통해 악이 존재하지만 악의 제약을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고, 악이 없는 천국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우리의 과제를 던진다.  “악이 왜 존재하는가?”가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 용서와 포용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정의를 경험할 때 실제적인 어려움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의 과제라는 것이다우리의 과제는 삶 속의 실제적인 문제들이다이 문제를 어떻게…,





[ 악의 문제와 하나님의 정의 ] 이슈 & 고민 -신용환목사-


1장/ 악에 대한 2가지 반응 

-하나님을 탓하고 .. 자신을 탓하는 문화이다. 악을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는 것이다. 악에 대한 자세들을 어떻게 다른가? 

- 악은 현실적인 문제이며 악이 오늘의 현실을 관통하고 있다. 


2장/ 하나님은 무엇을 할수 있는가?

- 악은 철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인 문제이다. 

- 현실적인 삶에서 악을 구별하고 악을 처리하는 것이다. 


3장/ 악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하나님

- 내가 있어야할 자리에 예수님이 대신하시는 것의 삶 

- 용서와 성령안에서 새로운 삶을 이미 맛봄 

- 성찬식으로 용서를 구체화하는 표현하고, 성령안에서의 새로운 삶을 가능하게 한다. 


4강/ 악이 없는 세상 

- 천국에 대한 잘못된 인상 / 새하늘과 새땅 

- 악이 세상안에서 여전히 지배하고 있는것 … 

- 포용은 나에게 깊은 상처를 입힌 사람을 껴안는 것이다. 

   용서하는 마음은 우리의 분노와 괴로움에 집착함으로써 경험하게 된 

   감정적인 불구상태로 부터 우리 자신을 해방한다. 


5강/ 현재 삶에서의 용서 

- 새하늘과 새땅 

-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가 가져오는 기쁨에 동참해야만 실현되는 일은 아니다.

- 잔치는 진행할것이다. 잔치초대를 받아들이는 문제는 내게 있다. 

- 하나님은 악에 제약을 받지 않으십니다 

- 그리스도인이 현재 이루어야하는 과업 : 악으로부터의 구원을 미리맛보는것. 종말론 


@ 우리가 반드시 붙잡아야하는 통찰


* 우리의 종말의 삶 경험하는 삶은 바로 용서와 포용이다. 

용서는 관용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용서는 단호한 태도로 악에 이름을 붙이고 치욕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용서는 우리가 이후에 어떤 사람이 될것인가를 악으로 하여금 결정하도록 허락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이다. 용서는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를 현재의 삶에서 실현하라는 명령이다. - 악의 문제와 하나님의 정의(톰라이트)-



<질문과 고민>==============================


The Devil's Advocate (1997)


* 선악과의 문제.. 뱀은 어디어 왔는가?

* 하나님 나라의 이해 ; 회개의 요청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 

   회개를 악의 동기와 이유를 처리하는 삶의 태도 

* 신앙의 출발 죄와 악을 아는 것이고 

  신앙의 성장은 죄와 악을 처리하는 것이다. 

* 구조적인 악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다룰것인가?

* 이미 우리에게 있는 하나님의 나라 아직 우리에게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긴장의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이룰것인가?

* 천국에 대해서 … 천국 한 모퉁이를 맛보는 삶 


   “ 천국은  죄와 악을 한꺼번에 처리하는 하수종말 처리장이 아니다. 

     우리안에서 있는 분리수거를 잘하는 일에서부터 천국을 경험해야한다. “


* 악에 대한 처리와 태도 그리고 선택을 어떻게 할것인가? 

하나님은 세상의 악들을 어떻게 하실 것인가? 

하나님의 정의의 칼을 어떻게 드실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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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방에 똥을 싸고 똥냄새가 나는데. 

우리는 똥 치울 생각은 하지 않고 

똥을 누가 쌌나 ?만 고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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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실체를 고민할때… 흔히 존재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래디컬 Radical

 데이비드 플랫 지음(최종훈 옮김)



복음을 통한 철저한 돌이킴

래디컬 Radical

(Talking Back your faith from the American Dream)

 

                                                   -선한청지기교회 김석훈 목사 요약/정리 -


데이비드 플랫 지음(최종훈 옮김두란노 출판

 

 

  

작가 : 앨라바마 주 버밍엄에 소재한 브룩힐즈 교회의 담임목사로 조지아 대학을 졸업후 뉴올리언스 침례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2006년부터 담임하고 있는 브룩힐즈 교회는 매주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열방을 뒤흔드는 공동체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4천여명의 성도들이 모여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다. 자세한 교회 비전은 홈페이지를 참조하라.


www.fadicalexperiment.org

 

 

Chapter 01

모든 걸 다 포기하고 따를 만한 분

 

도입질문 : 예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최연소 대형교회 담임목사란 꼬리표를 달고 부임 첫날부터 나는 교회를 더 크고 멋지게 만드는 갖가지 전략에 매달렸다. “어느 규모로 키울지 일단 정해 놓고, 과감하게 도전하라모든 사람들이 속삭이는 듯했고, 미국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교회들의 이름이 거론될 때 마다 내 이름이 거론되는 것을 보았다. 내가 사실 개인적으로 모델을 삼았던 분은 열두 명의 교인들과 하루 스물네 시간을 다 쏟아 부었던 목회자였다. 그분이 떠날 때 그 가르침을 따랐던 교인은 고작 120명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모델로 삼고 싶은 그분.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상 최연소 초소형 교회 담임목사였던 셈이다.

예수님은 대중들의 시선을 끄는 일 따위에는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으셨다. 많은 이들이 떠나갔지만 주님은 숫자에 연연하시기는커녕 급진적인 메시지를 믿고 따른 몇몇에게 집중하셨다. 그리고 철저하게 순종하는 그 소수를 사용하셔서 역사의 물줄기를 새로운 방향으로 바꾸셨다.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교회든 기독교인들이든 세상적인 기준을 토대로 성공을 추구하고 삶을 향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담임목사로 부임하기 전 3주 동안을 아시아의 지하교회들을 돌아보았다. 그곳과 부임한 교회의 모습은 사뭇달랐다. 생생하게 마음에 각인되었던 위태롭고 절박한 분위기에서도 신앙을 지키려던 지하교회들의 모습은 우리 교회에는 없었다. 그저 주일이면 습관적으로 교회에 발걸음을 옮기고, 아이들은 교회에 오자마자 에어바운스로 달려들었으며, 예배당과 인접한 공터에 최신식 놀이터와 각종 행사를 치를 수 있는 이벤트 홀을 짓자는 계획이 논의되고 있었다. 나는 예수님 당시의 모습처럼 교회가 신앙의 급진적인 요소들을 잃어버리고 그 빈자리를 안락한 내용들로 채워 버린 것은 아닌지, 오늘의 교회는 자신을 부인하기 보다는 자신의 안위에만 연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믿음은 절대적인 헌신을 요구한다

누가복음 9장 후반부에는 제자가 되겠다며 예수님을 찾아온 세사람이 등장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애써 만류하시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셨다. 그들을 만류하시면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노숙자가 되어라, 아버지의 장례는 죽은 이들에게 맡겨라. 가족과 작별 인사조차 나누지 마라.” 이 본문을 주제로 처음 메시지를 들은 것은 신학교에서 설교학을 가르쳤던 짐 섀딕스(Jim Shaddix)교수를 통해서였다. 그분이 어느 집회의 설교에서 이 본문으로 설교하면서 오늘 밤, 저는 여러분을 뜯어말려서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게 만들려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라고 외쳤다. 그는 누가복음 9장의 말씀을 정확하게 옮겨 가며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어려움을 달게 받는 자리임을 설명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좇고 싶은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고 초청했는데 수많은 이들이 강단 앞으로 나왔다. 좋은 걸 배웠으니 써먹어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어느 청소년 모임에서 수많은 학생들 앞에서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고 초청했다. 섀딕스 교수님보다 훨씬 깔끔하고 훌륭하게 전했다고 자부하지만 강단 근처엔 개미 새끼 하나 볼 수 없었고, 보다 못한 집회 관계자가 그만하면 됐으니 어서 끝내라고 신호를 보냈다. 기이한 경험이었다.

 

주님을 따르려면

예수님의 삶 곳곳에서 누가복음 9장과 비슷한 사건들을 찾아 볼 수 있다. (14:26, 27, 14:33, 10:17)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겉보기에는 짤막하고 단순한 말씀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삶을 뒤흔드는 급진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다. 주님은 안락한 환경과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상황을 완전히 포기할 것을 요구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제자의 길을 중심으로 삶의 판을 완전히 새로 짜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제자들은 저마다 세워놓았던 계획과 꿈을 접고 그 자리에 그리스도의 계획과 비전을 새로 깔아야 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본문을 대하면서 이 가르침은 다른 뜻이 있을 거야. 이 말씀의 속뜻은...”라고 어떤 식으로든 합리화시킬 방도를 찾아 헤매게 된다. 우리가 생각하는 예수는 잘사는 국가, 중산층의 기호에 딱 들어맞는 멋진 예수, 물질주의에 대해 거부감이 없고 돈을 포기해야 한다는 요구따위는 죽었다 깨어나도 하지 않는 예수다. 수지타산을 정확하게 맞추며 위태로운 극단을 다 피하기를 바라는 예수다. 세속적인 욕망과 야심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안락한 삶과 번영을 가져다 주는 예수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당면한 가장 큰 위험은 예배당에 모여 두 손을 높이 들고 찬양하지만 실제로는 성경속의 예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경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문화는 하면 된다고 가르친다. 제임스 애덤스가 1931년 처음 사용한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이란 말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 듯 보인다. 큰 목표를 추구할 자유는 오히려 높이 평가되고 확실하게 보장해 주어야 할 덕목이다. 그러나 아메리칸 드림의 이면에는 인간의 가장 큰 자산은 재능이라는 위험한 추정이 깔려있다. 이는 복음의 우선순위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복음은 자신을 죽이고 하나님을 믿으며 그분의 권능에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곧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독자적으로 의미있는 일을 할 능력이 전혀 없는 존재임을 복음을 통해 직면하게 하시기 때문이다.(15:5)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메리칸 드림을 좇는 과정에서 빠지기 십상인 교묘하고도 치명적인 함정이다. 제힘으로 목표를 달성하게 되면 누구든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기 쉽기 때문이다. 아메리칸 드림은 인간의 존재와 능력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바로 그 지점에서 복음과 아메리칸 드림은 명확하고도 결정적으로 충돌한다. 아메리칸 드림과는 정반대로, 하나님은 실제로 자신의 무능력함을 자랑하는 자들을 기뻐하신다. 일부러 그분은 하나님의 도우심 외에는 기댈 것이 없는 막다른 상황으로 이끌어 가시기도 한다. 그러면서 결과적으로 그분의 거룩한 이름이 높이 드러나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에게 매달리고 있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능력을 거의 필요로 하지 않는 교회 운영계획과 전략, 수단과 방법들을 생산하는 시스템은 걱정이다. 이는 인간의 능력을 강조하고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대한 맹목적인 우리의 반응이기 때문이다. 창의적인 목회자, 열심히 일하는 참모들, 상황 판단이 빠른 원로들과 이상적인 사고를 하는 성도들이 힘을 합쳐 이끌고 있는 오늘날의 교회를 보라. 멋진 퍼포먼스와 군중을 사로잡을 만한 스타같은 설교자, 기량이 뛰어난 찬양팀과 밴드, 찾아오는 군중들을 수용할 만한 공간, 어느 각도에서 봐도 매력적이고 환상적인 예배당, 한번 오면 떠나지 않게 붙잡아 두는 최상급, 최고급 프로그램들을 마련하는데 우리는 몰두하고 있다. 오늘날 성장하고 역동적이며 성공적인 교회들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요소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나는 개인적으로 지금 이끌고 있는 교회가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그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카맣게 모른 채 여러활동들을 매끄럽게, 효과적으로, 더 나아가 아주 성공적으로 전개할까봐 겁이 난다. 하나님의 권능을 간절히 기다리는 자세가 빠진, 주님의 권세는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사은품정도인 교회가 될까봐 겁이 난다. 우리는 쉽게 우리 자신을 속일 수 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들로 말이다. 그것이 두렵다.

 

Chapter 02

당신의 삶을 완전히 바꿀 래디컬 실험

 

부르심1 (전 세계를 품으라)

로마서 114-15절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빚진 자로 규정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나 모두 빚을 졌다고 고백했다. 곧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하나님의 잃어버린 양에게 갚아야 할 채무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소유된 나는 그분을 세상에 전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 모든 민족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채무를 생각해보라. 갚아야 할 빚이 이렇게 많은데 허다한 그리스도인들이 인간적인 선교관에 사로잡혀 살고 있지 않은가? 수많은 이들이 내 나라부터 먼저 돌보자라고 변명한다. 그러나 이 구호는 그분 마음의 1퍼센트도 알지 못한다는 자백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대략 6,783,421,727.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세계인구다. 67억을 넘어가고 있는 이들 중 약 33퍼센트의 그리스도인을 제외하면 무려 45억에 육박하는 인구가 예수를 모르는 상태로 남아 있다. 당연히 세상을 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안팎을 따질 것이 아니라 안팎 모두를 아우르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어디에서 살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뭇 민족들에게 알리는데 온 힘을 다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기억하라. 예수님의 행동방식을 살펴보면 그분은 거대한 혁명을 주도하셨지만 대형이나 다수를 추구하지는 않으셨음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성공신화에 집착하는 한, 세상의 손아귀에 잡혀 박제된 그리스도인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르친 후 다시 다른 이들의 삶에도 똑같은 역사가 일어나게 만드는 일이야말로 하나님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세워 두신 전략의 핵심이다. 이는 인간의 사고방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이다. 무엇이든 크면 클수록 좋고, 더욱 빛날수록 효과적이라고 믿는 문화속에서 예수님은 한결같이 겸손하게, 그리고 묵묵히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셨다.

 

부르심2 (재정을 의미있는 곳에 사용하라)

배부른 몇 나라, 그리고 굶주린 나머지 세계를 그리스도인들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전 세계에 오늘도 무려 10억명이 넘는 이들이 극심한 빈곤상태에서 근근이 목숨을 이어가고 있다. 2달러 미만으로 하루를 버티는 이들까지 합하면 그 수가 20억명에 육박한다. 그리고 오늘 하루에도 26천명의 아이들이 굶주림과 얼마든지 예방 가능한 질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사회로 치자면, 이 지역에 거주하는 18세 이하 어린이들이 이틀 안에 모조리 죽음을 맞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거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일 등의 영적으로 시급한 과제를 이야기하려면 그들의 육신적인 필요에 대해서도 깨어있어야 한다. 아무 힘이 없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벼랑 끝에 몰린 이들을 기억하라.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마땅한 책임이다. 물론 성경은 그 어디서도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죄에서 구원해 주신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믿음은 우리 내면의 변화를 불러오고 그것은 다시 외적인 열매로 드러나지 않겠는가.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그들에게 연민을 갖는 행동들은 성도들의 신앙을 점검하는 중요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이른바 잘사는 나라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사각지대는 물질주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르심3 (나를 필요로 하는 낯선 곳에 가서 섬기라)

내가 사는 미국은 인간은 모두 평등하게 지음 받았다는 개념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 인간평등이 사상평등으로 변질된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즉 서로의 사상의 다양성을 인정해주자며 믿음도 서로의 다른 것을 인정해 주자는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대로라면 신앙은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취향의 문제가 되고 만다. 각자가 조용히 믿으면서 다른 이의 신앙은 건드리지 말자는 이런 사조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이들 가운데 얼마나 만연해 있는가? 하나님의 계획은 일꾼을 보내시고, 그들이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이 듣는 구조임을 명심하자.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라고 묻는 이들에게 희소식이 있다. 복음을 모르는 이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미 성경에서 밝혀진 하나님의 뜻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라고 물을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을까?”라고 질문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과연 편안함, 재물, 안정, 안전, 심지어 목숨까지도 다 걸고 미전도 종족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겠는가? 잊지말자. 가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부르심4 (복음적인 지역교회에 헌신하라)

그리스도의 광대한 몸 가운데 일부를 이루는 것은 지극히 영광스러운 일이다. 지역의 형제자매들이 한데 모여 하늘나라 공동체의 식구를 이루고 서로에게 헌신하는 것을 생각해보라. 얼마나 영광스런 일인가! 내가 만약 헌신적이고 활동적이며 열성적으로 지역교회를 섬기고 있지 않다면, 기본적으로 신앙 공동체에 삶을 드리는 데서부터 래디컬 실험을 시작해야 한다. 사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께 전폭적으로 순종하는 마음가짐이 지역 교회의 움직임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저마다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주님을 좇아가도록 돕는 것이 이 책의 목표다. 마가복음 10장에서 부자 청년이 재물을 지키러 돌아간 뒤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주와 복음을 위하여 가족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곧바로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형제자매와 어머니들을 얻게 되며 영생을 얻지 못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덧붙이셨다. 이처럼 놀라운 영적 가족이야말로 신약성경이 제시하는 공동체의 아름다운 초상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철저하게 좇으려면 반드시 공동체에 속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안에서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급진적이고 단순한 삶을 목격하라. 그러면 한결 심플한 삶을 살기가 쉬워질 것이며 앞선 래디컬들을 따르기 수월해질 것이다.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는 일은 본래부터 개인에게 맡겨진 과제가 아니었다. 늘 교회와 더불어 움직이며 서로에게 필요한 공동체를 위해 삶을 바치라. 교회는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주님이 설계하신 특별한 도구다.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에 삶을 바치라.

 

 

 

참고도서

 

1. 디트리히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나를 따르라 (The Cost of Discipleship) New York : Simon and Schuster, 1995


2. James Truslow Adams, The Epic of America(Boston : Little, Brown, 1933)


3. George Muller, Answers to Prayer, comp. A.E.C. Brooks(Chicago : Moody, n.d.)


4. Charles Edward White, "Four Lessons on Money from One of the World's Richest," Christian history 7, no. 19(1988)


5. John Calvin, Commentary on the Epistles of Paul the Apostle to the Corinthians, trans. John Pringle(Grand Rapids : Baker Book, 2003)

 


 도서명 교회다움 (Total Church) 

 출판사(페이지) : IVP (p295)

 저 자 팀체스터 (Tim Chester)

       스티브 티미스(Steve Timmis)


-신용환목사 요약정리-

팀 체스터 : 영국 웨일즈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Ph.D.), 기독구호단체인 Tearfund에서 연구원과 정책 디렉터로 일했다. 그 후 Northern Training InstitutePorterbrook Network에서 교회 개척과 선교적 교회에 대한 강의를 했고, 15년째 교회 개척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십여 권의 책을 저술했으며, 국내에 번역된 책으로는 나도 변화될 수 있다(IVP)가 있다.



스티브 티미스(Steve Timmis)Radstock Ministries의 디렉터로 활동했으며, 세계 선교를 위한 지역교회 발전을 돕는 선교 에이전시를 총괄하고 있다. 두 사람은 영국 셰필드에 있는 교회개척네트워크 크라우디드 하우스(The Crowded House)의 공동 설립자이며, 일상생활 속에서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자라는 표어로, 복음과 공동체적 삶을 강조하는 대안적인 교회를 실험 중이다. 이 책은 두 사람이 함께 쓴 세 번째 책이며, 출간 후 매년 Total Church Conference가 열리고 있다.


크라우디드 하우스 이야기 1996년 스티브 티미스와 아내 자넷이 가정 교회를 세우는 프로젝트를 처음 시작했고, 1999년 말 팀 체스터와 아내 헬렌이 합류함으로써 20028월 총 여덟 명의 멤버가 공식적으로 크라우디드 하우스의 문을 열게 되었다. 이들은 복음과 관계를 기반으로 하여 지역 생활 공동체를 꾸준히 세워 나갔고, 개척할 필요가 있는 지역 혹은 계층에 따라 끊임없이 분할하여 모임을 만들었다. 때로 핵심 인력을 잃으면서 자체 해산을 하기도 하고 다시 연합하기도 하면서, 크라우디드 하우스 네트워크를 확장해 갔다. 누구나 크라우디드 하우스의 구성원이 될 수 있으며, 외부 단체나 교회들과도 지속적으로 관계를 쌓아 교회 개척 운동을 위해 동역하고 있다.

현재 영국, 호주, 남아프리카 등지에 여러 그룹이 존재하고 있으며, 지역에 따라 특징은 조금씩 달라도 복음의 말씀과 복음의 공동체라는 같은 비전으로 연합하여 선교적 교회를 개척해 나가고 있다.(thecrowdedhouse.org)

 

1/ 이 책을 선택한 동기 & 특징


교회 2.0운동와 선교적 교회운동의 기본 교과서와 같은 책

선교적 교회에 대한 방향과 교회본질에 대해서 고민하게 하는 책

2013GSC의 이음과 사귐의 선교의 방향에 이론적 배경을 제공해주는 책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하나님의 선교>에 대해 이해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책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교회 변혁과 갱신에 이슈들을 반영해주고 있고 교회 본질과 대안적 교회공동체의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는 책

복음, 제자.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인해주고 도전해주는 책

최근에 신선한 충격과 도전을 주고 있는 주목할 만 한 두 책중에 하나, 실험적 교회운동을 하고 있는 도전과 모험이 담겨있는 교회모델을 제시해 주고 있다.

미국 레디컬(Radical) 운동 : David Platt (The Church at Brook Hills / 알라바마 버밍햄)

영국 Total Church 운동 : Tim Chester&Steve Timmis (The Crowded House)


* 공통점

  • 두운동의 핵심은 변질되지 않은 복음에 충실한 교회공동체의 본질 회복세상으로 나아가는 영향력있는 제자도와 선교적 교회의 실현방법 제시
  • 실험적 교회운동, 대안적 교회운동 제시
  • 차이점 : 래디컬 운동은 대형교회의 급진적 교회 변혁
  • 토털처치운동은 건강한 중형교회 및 가정교회 모델 제시
  • 나의 목회적 고민 : 우리는 어떤 교회를 세워갈 것이며 나는 어떤 교회를 섬기기 위해 구비되어야 하는가? 이 시대 교회공동체안에서 어떻게 성도들을 구비 시킬것인가?
  • 목회의 방향은 목회자의 복음의 정체성과 교회론에서 시작된다.



2/ 이 책의 내용과 핵심요약(좋은글)

이 책은 매우 도발적이며 현실적이며 솔직하다. 지역회중으로 복음을 해석할수 있다. 당신이 만약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싶다면 교회를 보라. 교회를 다르게 해보려는 용감한 시도가 돋보인다. 유행에 민감한 교회공동체가 아니라 복음에 민감한 교회공동체를 제시한다.


1부 교회의 핵심 원리: 복음과 공동체

교회를 다르게 할 수는 없을까? 교회를 하는 방식에 두가지 핵심은 <복음의 말씀과 복음의 공동체>이다.

우리는 진리와 선교에 열심을 내야 하며 동시에 관계와 공동체에 열중해야한다.

복음 중심과 공동체 중심이 된다는 의미는

- 정체성 : 교회를 여타의 의무들처럼 잘 감당해야 하는 책임으로 보지 않고 정체성으로 본다.

- 일상성 :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모든 대화 속에서 평범한 형태로 선포됨을 인정하며 일상을 소중히 여긴다.

- 관계맺기 : 각종 행사와 모임을 줄이고, 비신자들과 삶을 나누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 교회개척 : 기존 교회의 규모를 늘리는 대신 새로운 교회를 개척한다.

- 삶을 나눔 : 책상 앞에 앉아 혼자서만 성경을 공부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준비한다.

- 24시간 7: 별도의 사역 프로그램을 시작하기보다 선교와 목회적 돌봄에 대한 24시간-7일 접근법을 채택한다.

- 실천의 중요성 : 성경을 가르치는 것에서 성경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으로 강조점을 바꾼다.

- 세상속에서 : 사회의 주변인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 일상의 제자도 : 날마다 서로 제자 삼고 제자가 되는 것을 배운다.

- 솔직한 교회 : 위장하지 말고 흐트러진 모습 그대로를 보여 주는 솔직한 교회가 된다.

Total church (온전한교회) : 교회는 예배의 공간이 아니라 삶과 선교를 연결시켜주는 공동체이다.

 

1장 왜 복음인가?

  •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시키는 말씀의 선포, 말씀 중심의 기독교의 회복, 하나님의 통치는 말씀으로 확장된다.
  • 기독교는 말씀중심이고 선교중심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복음의 말씀을 통해 확장된다. 복음은 선교적인 말씀으로 교회는 선교 중심이어야한다. 교회는 복음을 통하여 그리고 복음을 위하여 존재한다.
  • 교회지도들에게 필요한 유일한 자질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다루고 적용하며 가르치는 능력이다.
  • 교회는 신앙이 이해될뿐 아니라 느껴지는정서적인 공동체여야 한다. 진정한 신학은 사랑,선교 그리고 송영으로 이어진다. 말씀중심 vs 성령중심이 균형
  • 우리의 당면과제는 복음이 일요일 아침만이 아니라 월요일 아침에 우리의 삶에 중심이 되게 하는 것이다. 세속사회에 복음을 살아내는 것을 축하하고 반복적인 일상속 통해 어떻게 복음을 전할것이지 논의하는 교회문화를 창조해야한다.

 

2장 왜 공동체인가?

  • 남아프리카 호사족 속담 사람은 사람들을 통해서만 사람이 된다. ” 관계적 정체성& 관계적 하나님
  • 교회의 존재론 : 저글링 모델(필요에 무책임하게 선택하는). 바퀴 모델(필요를 책임있게 돕는)
  •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정체성의 핵심. 선교의 핵심이다. 언약의 백성으로 공동체.
  • 공동체는 전세계를 가로지르면서(원심적 움직임) 그들의 공동체적인 삶을 통해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끈다.(구심적움직임)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운 전초기지이며 천국의 대사관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공동체를 세우시고 그들에게 이스라엘을 향한 부르심의 핵심이었던 구심력을 지닌 선교의 사명을 주신다.

 

2부 복음과 공동체의 실천 영역

 

3장 복음 전도

  • 말씀의 선포가 없는 전도방식, 사람을 중심에 두는 전도방식
  • 사람들은 자신의 스케줄안에 집어 넣을수 있는 전도를 원하고 그것이 끝나며 관심을 끄고 싶어한다.
  •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복음 이해하는 방편이다. (레슬리 뉴비긴 / 복음해석학)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의 삶은 복음이 전해지는 통로가 된다.
  • 전도는 관계망을 만드는 것이다.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관계망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맺는 관계가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켜 그들로 하여금 질문을 하게 하라.
  • 전도 삼겹줄 : 관계맺기 복음은 나누기 사람들을 공동체에 소개하기
  • 전도가 공동체 프로젝트가 되게 하라. 일상과 복음지향성(gospel intentionality), 관계안에서 자연스럽게 믿음의 본을 보이고 자연스럽게 복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라. 복음을 말하고 복음을 사는 삶
  • 복음은 자신을 덜 사랑하게 하고 하나님과 타인을 더 사랑하게 만든다.

 

4장 사회 참여

  • 당신은 자신의 배경에 걸맞는 교회를 원하는가? 우리는 교회가 세련된 형태로 잘 운영된 조직이 되길 바란다.
  • 성공적인 교회란 무엇인가?
  • 예수님은 부족함이 없이 잘 사는 자들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마음이 상한자들(심령이 가난한자들)과 낙심하여 혼란가운데 있는 자들을 위해 오셨다. 그분은 죄인들을 부르기 위해서 오셨고 그들이 집에 오는 것을 환영하셨다. 하나님은 그분의 원수들과 함께 먹는 하나님이시다.
  • 에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먹는 모습은 하나님의 은혜의 부요함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준다. 예수님은 이러한 가난한자를 위해 찾아나선다. 상류계급은 자신감을 갖지만 항상 하류계급은 열등감을 갖는다.
  • 그리도인의 사회참여로 진정으로 기독교적으로 만드는 것은 복음의 선포를 통하여 가난한 자들을 하나님과 화목케하는데 있다. 전도와 사회적 행동은 분리할수 없다. 빈곤에 대응하는 교회의 행동이 있어야한다. 우리가 사회참여를 함에 있어서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소외된 사람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되는 것이다.

 

5장 교회 개척

  • 선교와 공동체는 적용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개척은 선교와 공동체를 수행하는 일이며 선교와 공동체가 만나는 지점이다.
  • 불이 타오름으로 불이 존재하는 것처럼 교회는 선교함으로 존재한다. 역사속에서 교회는 하나님을 세상에 알림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역사속에서 선교는 모든 지역교회의 핵심이 된다.
  • 교회개척은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고 교회를 필연적이고도 자연스럽게 선교적 양식으로 바뀌게 한다.
  • 지역교회는 선교의 주체이자 사람들이 제자화되는 배경이다.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지속적으로 존재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인의 선교가 지속될수 없다. 선교를 생각할 때 우리는 반드시 교회를 생각해야한다. 그리고 교회와 선교를 잇는 가장 좋은 방법은 교회 개척이다. 사도적 교회는 재생산하는 교회이다. 바울은 도시에 침투하는 가교로서 교회를 개척했다. 교회들은 더 많은 가족공동체를 늘여감으로써 그도시에 영향을 끼쳤다.
  • 사람들은 교회가 이룬 성공을 내려놓고 싶어 하지 않는다. 교회개척은 성공적인 모델을 내려놓고 성공적이지 않은 모델로 옮겨가는 것처럼 느낀다.
  • 교회개척은 보내는 교회를 약하게 만들지 않고 교회의 삶을 복음에 다시 집중하게 하는 중요한 기회이다. 교회가 교회를 이 사회와 문화속에 이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6장 세계 선교

  • 복음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선교의 핵심이 되어야한다. 제자들은 모든 권위를 부여받아 복음의 말씀을 선포를 위해 보내져서 그분의 통치를 확장시키는 도구이다. 선교는 교회의 DNA이다.
  • 교회의 선교 VS 하나님의 선교의 균형
  • 교회는 하나님의 보좌로 끊임없이 보여드는 하늘의 회중이다. 교회는 그 하늘의 회중을 실재적을 보여주는 지역회중이다. 67편의 말씀처럼 교회는 열방을 위한 공동체가 되어야한다.

 

7장 제자도와 훈련

  •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복음의 공동체로 이끌기 그리고 사람들에게 복음의 말씀을 가르치기.
  • 말씀중심 VS 설교중심
  • 교회의 삶이 사람들에게 말씀의 지배를 받게 하고 말씀으로 자신을 점검하고 우리가 당면한 사안과 문제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가르치는지를 묻고 또는 묻는 것이 중요하다.
  • 제자훈련은 전인성숙과 길을 가르쳐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함께 그 길을 가면서 훈련하는 것이다.
  • 우리의 목표는 복음으로 삶이 변화되는 것이며 복음의 사역을 위해 내 삶이 준비되는 것이다.
  •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제가갇 되는데 이것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정체성이다. 우리는 영원히 제자이며 복음의 공동체에서 복음의 말씀으로 제자훈련을 받지 않아도 되는 순간은 결코 없다.

 

8장 목회적 돌봄

  • 서구사회에서 목회적 상담의 필요성이 많아지고 있다. 심리적 치료와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보다 우선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충분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목회적 돌봄을 위해서 복음의 말씀의 충분성을 확신해야한다.
  • 우리는 우리의 상황에 대해 직접적으로 또 효과적으로 말씀하는 성경을 신뢰할수 있다. 그러므로 목회적 돌봄은 사람들의 삶의 문제에 대해 가장 우선적으로 복음의 말씀을 제시할줄 아는 능력이다.
  • 아프리카의 격언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마을이 필요하다
  • 목회적 돌봄은 개인적인 접근이 아니라 복음 공동체적 접근이 되어야한다.
  • 복음 지향성을 지닌 일상생활

 

9장 영성

  • 명상? 침묵? 고독? 이 필요한가?
  • 명상이 아닌 묵상(말씀중심의 영성) 침묵이 아닌 간구(선교중심의 영성) 고독이 아닌 공동체(공동체중심의 영성)
  • 성경적 영성은 삶전체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상의 영성이다.
  • 성경적 영성은 침묵속에서가 아니라 십자가를 질 때 일어난다. 후퇴의 영성이 아니라 참여의 영성이다. 그 영성은 외딴 집에서 피정을 하면서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진 삶 한 가운데 걸으면서 행하는 것이다. 성경의 영성은 침묵의 영성이 아니라 열정적인 영성이다.

 

10장 신학

  • 헤르만 바빙크 신학자는 담대하게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 밖에서 하나님을 통해서 말하기 때문입니다. 신학을 가르치는 것은 거룩한 일입니다. 그것은 주님 집의 제사장이 갖는 임무지요 그이름을 명예롭게하는 위해 정신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예배행위입니다. ”
  • 신학은 교회의 예배와 선교속에 있어야 한다. 참된 신학은 우리가 선교적 해석학이라고 부를수 있는 내용이어야한다.
  • 신학은 행동에 대한 고찰을 할 뿐만 아니라 행동까지 이끌어 내야 한다. 궁극적으로 신학의 결과는 선교가 되어야한다.

 

11장 변증

  • 이성과 계시사이의 갈등? 화해
  • 우리가 하나님을 알수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 파스칼의 내기 ( 하나님의 존재에 판돈을 걸든지? 하나님의 존재하지 않는 것에 판돈을 걸든지?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본질적인 적대감을 갖고 자신은 중립적인 자리에 서길 원한다. )
  • 하나님은 그분을 사랑하지 않고 그저 알기만 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숨기신다.
  • 누군가를 알려면 겸손해야한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행동은 겸손함이다.
  • 십자가의 메시지와 포스터 모더니즘의 한계

 

12장 어린이와 청소년

  • 복음의 공동체를 사람들에 노출시키는 것이 복음 전도에 가장 효과적이다. 복음으로 자녀들과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다.
  • 청소년들이 그들이 내일의 교회 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늘날 교회 의 핵심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 가족으로 교회를 강조하는 거이 중요한다. 세대간의 상호책임이 가족생활의 표준이며 가치가 전수되는 방식이자 또한 교회를 위한 표준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어린아가 자라 청소년이 될 때 그런 세대를 넘나드는 관계의 힘은 은혜의 강력한 수단이 될수 있다. 뿐만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안에서 성인기에 이른 청소년들이 매주 교회를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수백명의 사람들 중 하나가 되는 것을 막아 줄수 있다.

 

13장 성공

  • 성공적인 목회? 아무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있지 않는 교회 그냥 사방에서 그리드도인들을 빨아들이는 교회 ?
  • 성장의 두가지 경쟁모델 : 더 큰 교회 VS 더 많은 교회
  • 복음의 실패와 공동체의 실패
  • 리더십의 두가지 경쟁모델 : 공연하는 리더십 VS 사람을 세우는 리더십
  • 성공의 두가지 경재모델 : 영광의 교회 VS 십자가의 교회

 

결론_ 하나님을 향한 열정

  • 그리도인의 실천에는 복음의 말씀과 복음의 공동체가 중심이 되어야한다. 반면에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영광에 고정되어야 한다.
  • 하나님을 사랑하고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라.
  • 그러므로 복음의 말씀과 복음의 공동체는 매우 중요하다. 내 마음이 말할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 으로 채워지면 그 말씀을 들어야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속에서 그 말씀은 자주 예리하게 내 삶에 적절하게 전달될 것이다. 성령은 그분의 말씀을 통해 그리고 그분의 백성 가운데서 이런 죄인의 마음을 깨뜨리고 새롭게 하신다. 그리하여 내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미친 듯이 깊이 사랑하게 하신다.

 

3/ 함께 나눌 고민과 질문

1) <교회다움>의 저서를 통해서 가장 도전이 되는 내용은 무엇인가?

 

 

 

 

 

2) 여러분이 그동안 생각해온 교회의 본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복음적인 교회는 무엇인가?

 여러분이 생각하는 건강한 교회와 성장하는 교회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3) 여러분이 겪고 있는 목회적 성공에 대한 갈등을 나누어 보자.

 

 

  

 

 

4/ 함께 읽으면 좋을 책 소개

  • 레디컬, 래드컬 투게더 / 데이빗플렛/두란노
  • 살아있는 교회 (존스토트/IVP)
  • 깊이 있는 교회(Deep Church) / 짐벨쳐 / 포이에마
  • 교회됨 (스탠리하우워스) 

 

 

 

 

 

 

맥스 루카도의 <예수님처럼>


JUST LIKE JESUS


Max Lucado






(히 6:10)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딱 하루만 예수님이 당신이 된다면?


이렇게 도발적인 질문으로 이 책은 시작한다. 


 

「여기서 한 가지 모험을 하려 한다. 커다란 진리를 몇 마디로 요약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만 그래도 해보려 한다. 우리 각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열망을 한두 문장에 담을 수 있다면 아마도 이런 내용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 


그러나 그대로 두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당신이 예수님처럼 되기 원하신다.

 


“반드시 알아야 한다. 관계가 성공하는 것은 죄 있는 쪽이 벌을 받아서가 아니라 죄 없는 쪽에서 베푸는 긍휼 때문이다.”

 

당신은 이렇게 생각한 적은 없는가? 

하나님은 하나님 나름대로의 사업장?이 있고, 나도 나름대로의 사업장이 있다. 


나는 가끔씩 하나님의 사업을 도와주고 하나님도 나의 도움요청을 듣고 들어 주신다. 차마 입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종종 이러한 생각을 할 때가 있다. 하나님과 나는 전혀 다른 구역을 맡아 일하는 사업자들과 같은 것이다. 우스꽝스러운 이 표현을 신학적으로 말하면 이원론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므로 거룩한 곳에 계시고, 우리는 타락한 사람이므로 타락한 세상 속에 살아간다. 성과 속을 엄격하게 구분했던 중세적 신앙관점은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철저하게 부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안에, 우리는 하나님 안에 살아간다. 칼뱅이 주장한 대로 우리의 일터가 교회이고, 교회가 우리의 일터이다. 소명과 직업은 하나다. 


맥스 루카도는 프랭크 로바크라는 선교의 일기를 인용한다.


“1930년 1월 26일. 매 순간 하나님을 느끼고 있다. 의지의 행동이다. 지금 타자기를 두드리고 있는 이 손가락도 하나님이 인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걷는 걸음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흘러나오기 바란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삶을 원하신다. 우리의 생각, 우리의 의지, 우리의 삶, 우리의 친구, 우리의 일터, 우리의 모든 것을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와 분리되어 협력하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의 전부를 원하시는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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