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가복음 12:28-34>
  • 사랑의 이중계명 
  • 08/07/2014

  • 설교문의 그림은 갈무리함  


 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마가복음 12:28 - 34> 

제목 : <마가복음 12:28 - 34> 사랑의 이중계명  




[ 마가복음 12장 28절-34절 ]

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저희의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대답 잘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2.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제목 : 사랑의 이중계명 

오늘 말씀은 마가복음 11장과 12장에서 이어지고 있는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몇가지 논쟁중에 하나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에 의구심을 품고 있던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이 예수님과 논쟁을 함으로 예수님이 틀렸다것을 나타내고자 하는 숨은 의도가 있는 논쟁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서 어떤 모순을 찾고자하는 숨은 동기가 있는 논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가시돋힌 질문 공세를 하고 예수님에게서 그릇된 답변을 찾기 위해 논쟁을 벌립니다. 




어제는 그 당시의 친로마의 성향을 띄고 있는 현실주의자들인 사두개인들과의 < 부활에 관한 논쟁 >에 대해서 예수님의 지혜로운 답변과 의표를 찌르는 듯한 대답을 들어습니다. 


오늘 말씀은 율법과 계명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 한 서기관 >의 대화를 토해서 < 큰 계명 논쟁 >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두개인들과 예수님 사이에 논쟁을 듣고 있던 서기관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서기관은 예수님께 첫째 계명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의 답변의 내용은 어떻습니까? 


마치 신명기에 모세가 < 쉐마 이스라엘 >이라고 말하고 신명기를 전하듯이 예수님도 < 쉐마 이스라엘, 이스라엘 들으라 >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 첫째는 유일하신 여호와를 마음, 목숨, 뜻, 힘을 다해서 사랑하는 것이다. 둘째 계명은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라고 하는 오랜 율법에서 강조되어 왔던 것을 한번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 >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강조는 각각의 계명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서 유기적으로 서로의 원인이 되고 서로의 결과가 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이러한 예수님의 계명에 대한 강조점을 지혜롭게 알아 들은 서기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 34.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


소위 <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 >이라고 하는 < 사랑의 이중계명 >이 <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고 연결되고 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한번더 연결시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2가지 포인트가 있다면 


1/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고 말하는 < 사랑의 이중율법, 이중계명 > 어떻게 서로의 원인과 결과가 되고 연결되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2/ 이러한 사랑의 이중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멀지 않음을 느끼는 것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율법에 충실한 유대인들은 자주 이런 질문을 하곤 했습니다. 

< 율법중에서 큰 것, 작은 것, 가벼운 것, 무거운 것이 무엇입니까?>


그래서 그러한 율법의 크기와 경중을 따지면서 율법 613개의 계명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서기관들과 유대인들은 율법의 중요성을 따지기는 잘했지만 < 율법의 본연의 의도나 정신과 원리들 >을 놓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을 때 그속에서 담겨있는 하나님의 의도와 원리들을 놓친채 그냥 형식적으로 율법의 순위를 매겨서 그것을 형식적으로 지키려고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맛있는 찐빵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앙금/앙꼬는 확인해보지 않은채 찐빵의 크기만 보고 < 우와 이 찐빵은 정말 맛있는 찐빵이야 >라고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과 같은것입니다. 실제로 찐빵의 본연의 맡은 찐빵속에 있는 팥앙꼬에 달려 있습니다



율법이나 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당시 서기관들과 유대인들은 율법의 크기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계명속에 담겨 있는 본연의 핵심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보고 겉만 그럴싸한 < 회칠한 무덥 같다고 > 하셨습니다. 바로 형식주의 외식주의 였던 것입니다. 


요즘 한국에 조금 안좋은 유행어가 있습니다. < 관피아, 철피아, >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치 마피아서처럼 어떤 자기 조직을 보호하기 위해서 관행. 은폐, 왜곡, 거짓을 행하는 조직사회를 비꼬는 말이죠. 최근에 군대도 역시 < 군피아 >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새인들 사두개인 서기관들이 마치 < 바피아, 사피아, 서피아 >들이 이었습니다. 자신의 기득권과 관행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의 등장과 가르침이 못마땅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것이 오늘의 본문의 논쟁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이러한 공격적인 질문과 논쟁속에서 자신의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하고 계십니다. 


앞에서 우리가 오늘 말씀에서 주목해야할 첫째번째는 

1/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고 말하는 < 사랑의 이중율법, 이중계명 > 어떻게 서로의 원인과 결과가 되고 연결되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에 신명기 6장 4절-5절을 인용하시면서 < 하나님 사랑 >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시면서 < 이웃 사랑 >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가지 사랑의 계명이 바로 최고의 율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이웃사랑의 동기가 됩니다.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척도이며 표현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수 있어야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할수 있는 힘과 능력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할수 있어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사랑의 이중계명은 서로가 영향를 주고 받습니다. 

서로에게 원인이 되고 서로에게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여기서 < 마음/목숨/뜻/힘을 다한다 >는 의미는 < 자신의 전존재와 정체성의 모든 것을 을 다하여 > 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의 존재를 쏟아 붇는 일입니다. 




놀랍게도.. 이러한 사랑의 이중계명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눈으로 이 사랑의 이중계명이 실현되어 짐을 보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예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바로 이 사랑의 < 이중계명 > 실현되고 구현되는 현장입니다. 



처음의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이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는 완성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출발이 우리를 향한 사람으로 완성된것이죠. 거꾸로 말하면 우리를 사랑하심을 보여주심으로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증명하셨습니다. 


바로 이점에 오늘 사랑의 이중계명의 강조점입니다. 


2/ 이러한 사랑의 이중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멀지 않음을 느끼는 것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서기관이 지혜로운 대답을 합니다. 


32.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서기관을 지혜가 있었습니다. < 마음/지혜/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제물의 예배보다 더 나은 예배 >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로 사랑하는 행위를 바로 예배하는 행위로 연결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사랑의 이중계명을 <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이미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는 것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클라이 막스는 < 네가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라고 말하는 예수님의 칭찬에서 볼수 있습니다. 




과연 이 사랑의 이중계명과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연결되어 질수 있을까? 

어떻게 연관이 될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에 의해서 증명되며 마침내 그 정체를 드러냅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의 원리에 의해서 운영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의 이중계명을 요청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이 완성되고 실현되고 있는 것을 경험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것을 지켜보고 아는 자가 경험하는 나라가 아니라 

사랑의 이중계명을 실천할 용기가 있는 사람에게 가까이 와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실체가 드러나는 현장이 바로 예수님의 치유의 현장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실 때 등장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 저들을 불쌍히 여기서 저들을 민망히 여기서 >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치유가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거나 자신의 실력을 쇼업 하는 것이 아니라 < 사랑의 동기 >바로 <치유의 역사>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치유의 사건을 보면서 

하나님 나라가 이렇게 임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 치유와 회복 >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중심에는 바로 < 사랑의 이중계명 :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 >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 치유와 회복 > 일어납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바로 이 것이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입니다. 


우리가 이 사랑의 이중계명을 실천하기 시작할 때 그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랄싸한 예배 분위기와 임재의 어울리는 데코레이션을 해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소소한 일상에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 >을 다해서 사랑하기 시작할 때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우리의 사소한 관계에서 서로를 진심으로 네 몸과 같이 사랑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납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디 먼곳 외딴곳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머무는 곳이 있습니다. 

사랑이 드러나면 사랑이 보여지면 하나님 나라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랑할 마음이 생기는 순간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기에 가장 좋은 타이밍입니다.


오늘 우리안에 하나님 사랑할 마음이 생겨나고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 나라가 멀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안에 이웃을 사랑할 마음이 생겨났습니까?

바로 하나님 나라가 이미 당신안에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와 사랑의 이중계명의 관계입니다.  




  • 07/01/2014 새벽묵상설교 
  • 마가복음 1:1-15
  • 예비된 목음의 시작 


 @ 설교본문중 그림은 인터넷 갈무리함 


제목 :  예비된 복음의 시작 <마가복음 1:1-15>


[1:1-15]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1: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1: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1:4)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1: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1:6)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1:7)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1: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1:9)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1:10)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11)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1:12)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13)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1: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지난주까지 <말라기>서를 묵상하고 이제 7월부터 새로운 본문인 신약에 <마가복음>을 묵상하게 됩니다. 특히 복음서를 묵상할때면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한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 복음 >입니다.

 

우리가 흔히 < 마태복음 / 마가복음 / 누가복음 / 요한복음 >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는 이 4복음서의 원래의 이름은 < 마태가 전한 복음, 마태에 의해서 전해진 복음 >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오늘 묵상본문인 <마가복음>역시 < 마가가 전한복음, 마가에 의해서 전해진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음을 주시면서 하나의 내용의 4개의 앵글을 갖고 있는 통일되고 다양한 복음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각각의 복음서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주목하고 강조하고 전하고 있는지가 다르게 나타납니다. < 마태복음은 왕으로 오신 예수, 마가복음은 고난의 종으로 오신 예수, 누가복음은 인자이신 예수, 요한복음은 말씀(로고스)이신 예수 >에 대한 복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부터 우리가 살펴 보게될 <마가복음>은 이러한 복음서중에서도 <오리지날 복음>이라고 할 만큼 복음서 중에서 복음에 대해서 가장 중요하고 액기스같은 것들을 간결하고 핵심적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기록연대를 보아도 4복음서보다 가장 먼저 기록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은 이 < 마가복음 >< 무엇보다 우선된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사복음서중에서 가장 짧습니다. 마태복음의 5/8정도의 분량입니다. 그래서 흔히 초신자나 성경을 처음 대한 이들에게 권하는 복음서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이 마가복음의 또하나의 별명이 < 선교의 복음 >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나라에 초기 전달되어진 복음서도 바로 <마가복음>이었습니다. 일명 쪽복음이였죠.  



그리고 마가복음의 < 고난의 복음 >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마가복음 초기의 예수님의 탄생과 사역들을 간략 간략하게 생략한채 본론의 핵심을 달려가기 위해서 마치 숨가쁘게 달려가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서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단어중 하나가 < , 즉시 >이라는 말이 41번 나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비유에 대해서 5번나오고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 사건은 15번 나옵니다

의도적으로 마가복음서는 예수님의 행적중심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행적중에서 그가 말하고 싶은 한가지 주제가 있었습니다.


마가가 말하고 싶은 본론의 핵심은 바로 < 예수의 고난, 고난받으로 오신 예수님, 십자가에 죽으러 오신 예수님 그리고 죽임당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을 보여주기 위해서 < 거두 절미 >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서에 분량중에 가장 많은 부분이 바로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대목에 사용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것을 알수 있습니다.

 

오늘 마가복음의 1장의 서막을 열면서 

마가복음 11절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이 짧은 한 구절속에서 <마가가 전한 복음>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마가가 전하고 싶었던 복음의 주제는 2가지입니다.

첫째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아는 것에서 시작된다.

둘째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시작하셨다.


오늘 본문을 유심히 살펴보면 <복음>과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는 4개의 단어가 있음을 주목해볼 수 있습니다.

 

바로 < 시작 / 준비 / 전파 / 믿음 >이라는 단어입니다.

복음의 시작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복음의 준비는 구약의 이사야를 비롯한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되어서 오늘 성취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복음의 전파는 마지막 죄사함을 받게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한 선지자인 세례요한으로부터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성령의 

세례을 받으라고 전하는 예수님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복음의 믿음은 바로 이러한 에수그리스도의 초청을 받아 들이는

 우리의 반응입니다.

 

이러한 <복음의 시작/ 복음의 준비/ 복음의 전파/ 복음의 믿음>위해서 처음 등장하고 있는 복음의 메신저, 복음의 전달자인 3사람을 주목해볼수 있습니다.


바로 < 마가와 세례요한 그리고 예수님 >입니다.

 

1/ 오늘 마가복음의 시작에서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고 첫 대목을 기록하고 있는 <마가요한>입니다.


오늘 마가복음을 기록하고 있는 < 마가요한 >은 누구입니까?


바로 바나바의 사촌 그 <마가 요한>, 제자들에게 집회장소를 제공했던 그 <마가요한>, 사도행전 전도여행에 그 <마가 요한>입니다.

바울의 일차전도여행에 그 전도여행을 견디지 못해 자기 집으로 돌아간 그 마가요한, 그 일 이후부터는 베드로의 곁에서 베드로의 통역자로 베드로의 비서와 같이 있었던 그 마가 요한. 바울이 마지막에 보고 싶어서 데리고 오라고 했던 그 마가요한이 맞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심지어 주께서 잡히시던 밤에 한 청년이 따라오다가 벌거벗은 채 도망쳤다고 기록하고 있는 그 청년이 바로 <마가요한>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마가요한>이 오늘 <복음의 시작>을 알리고 있습니다.


 <겁쟁이 같고 신실하지 못한 사람>은 그 부족한 마가요한의 입을 통해서 <복음서>의 첫 번째 계시가 쓰여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마가복음> 11절을 묵상하면서 놓치지 말아야할 중요한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은 복음을 감당할만한 자격이나 능력이나 커리어가 있는 사람만이 전할수 있는 복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실패하고 능력 없고 어딘가 부족하지만 다시금 회복되고 예수의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이 전할수 있는 그리고 <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는 분명한 증언 >을 할수 있는 사람이면 됩니다.

 

많은 학자들은 <가요한>이 처음 복음의 시작을 알리면서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고 말한 것은 그가 <베드로의 비서로써 통역자로써> 베드로의 고백을 그대로 옮겼거나아니면 그도 역시 베드로의 설교를 통역하면서 베드로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들은 아마도 마가요한은 <베드로의 복음을 대신 적어주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오늘 <마가복음>에서 <마가가 전한복음>은 과거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과거시제>로 쓰여있지 않고 < 현제시제 >로 쓰여있습니다. 특히 < 과거의 사건을 현재 시재로 표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목격자로써 눈으로 보고 그것을 현재의 일로 증언하고 있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복음은 무결점의 사람에게 어울리는 말씀이 아니라 실패하고 좌절하고 연약한 우리도 증언할수 있는 하나님의 계시라는 사실입니다
.

 

2/ 복음의 시작에서 신약과 구약의 복음의 다리를 잇고 있는 <세례자 요한>을 주목해서 봅니다. 우리가 흔히 세례요한은 < 세례자 요한 또는 세례를 주는자 요한 >이라고 해야 할것입니다.

공교롭게 <요한>이란 이름이 또 등장합니다. <마가요한/세례자요한>




세례자 요한의 등장은 구약의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가는 말라기 31절과 이사야 403절을 인용하면서 이 예언들이 세례요한을 통해서 어떻게 성취되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3: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40:3)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여기서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은 < 복음의 시작 >은 갑자기 등장한 < 예수 >를 통해서 시작된 생뚱맞은 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갑작스러운 사건이나 예기치 못한 해프닝이 아닙니다


바로 구약의 선지자들로부터 <예언되고> 오늘 세례자 요한를 통해서 <예비>되었던 바로 < 준비된 시작 >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의 시작인 비로 준비된 시작이라는 것은 <예언과 예비>를 통해서 이루어진것입니다. 바로 수많은 선지자들의 예치는 소리들이 있었고 그 소리가 세례의 요한 의 광야의 외치는 소리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이 예언을 통해서 주의 길이 예비되어졌고 세례 요한가 죄사함의 회개의 운동이 바로 예수님의 등장을 알리는 일종의 < 예고편 >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볼 것은 <복음의 시작>은 바로 <죄사함의 회개>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례요한 시대에 회개의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다른말로 복음의 전달될 마음밭이 준비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죄에 대해서 민감해지고 죄를 자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복음을 받아들이 준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 바로 주의 길을 예비하는 방법은 한가지 이 세상 속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죄에대해서 민감해하고 

죄를 자각하기 시작하는 무브먼트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

우리의 죄에 대한 민감한 반응은 복음을 쉽게 받아들이게 합니다. 그리고 회개하게하고 다시금 거듭 태어남의 증거인 <세례>받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묵상해 보아야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주의 길, 복음의 길을 예비할만한 

죄에 대한 민감함과 회개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우리는 교회는 얼마나 주의 길을 예비하는데 

합당한 죄사함과 회개의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

 

3/ 복음의 시작에서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전하고 믿음으로 초청하고 있는 < 예수 그리스도 >를 만납니다.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일은 < 하나님 나라 >를 경험하는 일이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믿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전하신 복음 바로 < 천국 복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원리과 통치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원리과 통치입니다.


이것은 <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때 >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인식은 < 하나님 나라 >에 대한 인식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임재와 회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임했고 아직 임하지 않은 나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매일 같이 회개하고 매일같이 

복음을 다시 복음을 받아들이기 원합니다.


최근에 한국에 < 다시 복음앞에. RETURN TO THE GOSPEL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오늘 이 시대는 < 하나님의 나라 >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변질되었기 때문이고 복음의 세속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서 필요한 것은 < 다시 복음앞에, 예수 다시보기 >를 해야합니다. 교회가 복음으로 세상을 압도하지 못하고 세상이 교회를 압도하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알려야합니다. 죄의 심각성을 알려합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외쳐야합니다.


오늘 우리는 점점 더 복음을 외면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점점 더 복음이 변질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점점 더 복음을 들어도 변화하고 있지 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어떤 복음을 붙잡아야 할지?

무엇이 복음의 본질인지? 심각하게 생각해야합니다.


오늘 본문에 놀랍게도 14절에

(1: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요한이 잡힌후 바로 이어서 예수님이 요한이 전한 복음을 다시금 전달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자신이 복음을 가져왔음을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초래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잡힌후 예수님이 전하셨다면...

예수님이 잡히고 그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성취하시고 완성하신 그후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우리도 역시 <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여기 왔으니 회개하고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으라 >고 외쳐야 되지 않을까

 


사무엘하 3:28-39 

배제의 시대 포용의 은혜  


 2014 GSC 새벽 큐티 설교 <사무엘하 3:28-39 >

제목 : 배제의 시대 포용의 은혜 



[삼하 3:28-39]

(삼하 3:28) 그 후에 다윗이 듣고 이르되 넬의 아들 아브넬의 피에 대하여 나와 내 나라는 여호와 앞에 영원히 무죄하니

(삼하 3:29) 그 죄가 요압의 머리와 그의 아버지의 온 집으로 돌아갈지어다 또 요압의 집에서 백탁병자나 나병 환자나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나 칼에 죽는 자나 양식이 떨어진 자가 끊어지지 아니할지로다 하니라

(삼하 3:30) 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가 아브넬을 죽인 것은 그가 기브온 전쟁에서 자기 동생 아사헬을 죽인 까닭이었더라

(삼하 3:31) 다윗이 요압과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아브넬 앞에서 애도하라 하니라 다윗 왕이 상여를 따라가

(삼하 3:32) 아브넬을 헤브론에 장사하고 아브넬의 무덤에서 왕이 소리를 높여 울고 백성도 다 우니라

(삼하 3:33) 왕이 아브넬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이르되 아브넬의 죽음이 어찌하여 미련한 자의 죽음 같은고

(삼하 3:34) 네 손이 결박되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차꼬에 채이지 아니하였거늘 불의한 자식의 앞에 엎드러짐 같이 네가 엎드러졌도다 하매 온 백성이 다시 그를 슬퍼하여 우니라

(삼하 3:35) 석양에 뭇 백성이 나아와 다윗에게 음식을 권하니 다윗이 맹세하여 이르되 만일 내가 해 지기 전에 떡이나 다른 모든 것을 맛보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하매

(삼하 3:36) 온 백성이 보고 기뻐하며 왕이 무슨 일을 하든지 무리가 다 기뻐하므로

(삼하 3:37) 이 날에야 온 백성과 온 이스라엘이 넬의 아들 아브넬을 죽인 것이 왕이 한 것이 아닌 줄을 아니라

(삼하 3:38) 왕이 그의 신복에게 이르되 오늘 이스라엘의 지도자요 큰 인물이 죽은 것을 알지 못하느냐

(삼하 3:39) 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 대로 갚으실지로다 하니라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의 말씀은 자신의 수하 요압의 손에 죽은 아브넬의 장사하고 그를 애도하는 장면입니다. 

 사울의 정권에서 다윗의 정권으로 이양이 되고 있는 이러한 정권이양기의 시점에서 원한 맺힌 피의 복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울의 충실한 신하였던 아브넬을 죽이는 것은 어쩌면 다윗에서 당연한 결과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자신에게 그토록 모진 고통을 주는데 앞장섰던 아브넬을 애도하면 그를 죽은 요압을 칭찬해주기는커녕 요압에게 저주를 퍼붓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대목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이해가 되십니까?


우리가 흔히 아는 역사의 이야기나 대하드라마 속에서 한 정권이 바뀔 때는 < 보복과 피의 숙청, 폭력과 반목 >이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야만 세워지는 정권이 더 든든히 설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특히 서로에게 맺힌 원한과 상처가 많을 때는 더더욱 서로에게 처참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가 흔히 아는 역사 드라마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다윗은 아브넬의 화해의 손을 피의 복수로 갚지 않고 그와 화해하는 방법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심지어 고맙게도 아브넬을 처리해준 요압에게 상을 내리기는커녕 그를 저주합니다. 


(삼하 3:29) 그 죄가 요압의 머리와 그의 아버지의 온 집으로 돌아갈지어다 또 요압의 집에서 백탁병자나 나병 환자나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나 칼에 죽는 자나 양식이 떨어진 자가 끊어지지 아니할지로다 하니라


마치 삼족을 멸하는 것 같은 저주를 퍼붓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다윗이 삼족으로 멸해야하는 사람은 요압이 아니라 아브넬 입니다. 


요압이 다윗 대신에 골칫덩어리가 될지도 모를 사울의 사람 아브넬을 죽여준 것은 < 고마운 일 >입니다. 그리고 요압이 자신의 동생 아사헬의 죽음에 복수를하는 것은 요압에게선 < 당연한 일 >입니다. 다윗은 이 < 고맙고 당연한 일 >을 뒤집어 놓고 있습니다. 


도리어 요압을 책망하고 요압과 요압의 집을 축복하지 않고 저주하고 있습니다. 


왜? 다윗은 이러한 상식밖의 행동을 보여주고 있을까요? 


그 이유를 오늘 본문에 30절에서 한번 찾아 볼수 있습니다. 


(삼하 3:30) 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가 아브넬을 죽인 것은

            그가 기브온 전쟁에서 자기 동생 아사헬을 죽인 까닭이었더라


 다윗은 스스로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사울의 시대는 끝이 나고 다윗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자신의 시대를 열어주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무엘하 3장 1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지요..


(삼하 3:1)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


분명한 사실은 사울의 세력과 다윗의 세력간의 피의 전쟁이 오랫동안 있었습니다. 그 결과 대세가 기울고 있었습니다. 이제 사울의 세력은 점점 약해지고 다윗의 세력은 점점 강해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다윗은 계속 그런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 언제까지 이 피의 시대가 계속될것인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면 하나님의 계획인가 ? >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했던 다윗은 이러한 고민을 계속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래서 그가 원했던 새 시대의 모습은 더 이상의 반목이나 원수맺음이 아니라 < 화해와 포용 >의 시대를 원했을 것입니다.

< 배제의 시대에 포용의 은혜 >를 선택했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 화해와 포용의 첫 번째 시대를 여는 것이 바로 사무엘하 1장에 등장하는 < 사울와 요나단을 추모하고 애도하면 마치 헌정시 >에서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인 다윗의 시대에 자신이 기대하는 화해와 포용의 시대의 요청이었습니다.  


그리고 화해와 포용의 시대를 요청하는 두 번째 요청이 바로 < 사울의 신하 아브넬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를 위해 치루는 장례 >였습니다. 


바로 이것인 다윗의 중심이라는 것을 옅볼 수 있는 것은 당연히 행할 수 있는 요압의 복수조차도 다윗은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피의 복수를 멈추지 않고 있는 요압과 그의 집을 저주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더 이상의 인간의 < 원한맺음과 원수 갚음 >과 같은 인간적인 방식과 시대를 거부해야할 때가 왔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이 통치하는 시대는 그런 방식으로 운영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 화해, 용서, 용납, 포용 >과 같은 방식으로 .... 

세상이 이해할수 없는 방식으로 그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 

그 하나님의 나라의 다스림이 실행되어야하는 것을 알았기에 다윗은 자신의 원한을 자신의 원수를 피의 복수로 마무리 짓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다윗의 중심을 알수 있은 것은 아브넬를 장례하는 행렬에 자신 뿐아니라 아브넬을 죽였던 요압까지도 그 행렬에 따라가 그를 위해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아브넬 앞에서 애도하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삼하 3:31-32]

(삼하 3:31) 다윗이 요압과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아브넬 앞에서 애도하라 하니라 다윗 왕이 상여를 따라가

(삼하 3:32) 아브넬을 헤브론에 장사하고 아브넬의 무덤에서 왕이 소리를 높여 울고 백성도 다 우니라


여러분.. 이 장면을 상상해보십시오.. 이 장례식 장면을 그려보십시오..


그토록 자신을 죽이려 사울과 함께 칼과 창을 들고 달려온 사울의 총사령관 아브넬이었습니다. 다윗에게서 아브넬은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처음 다윗이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죽였을 때에 처음 다윗의 손을 잡고 사울왕에게 인도하는 이가 아브넬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두 사람의 필연과 악연이 시작되었습니다. 


다윗의 앞날에 가장 위험한 인물이 될뻔 했던 아브넬을 위해 < 추모의 노래 >를 짓고 있습니다. 이 노래는 그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고 있습니다. 


[삼하 3:33-34]

(삼하 3:33) 왕이 아브넬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이르되 아브넬의 죽음이 어찌하여 미련한 자의 죽음 같은고

(삼하 3:34) 네 손이 결박되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차꼬에 채이지 아니하였거늘 불의한 자식의 앞에 엎드러짐 같이 네가 엎드러졌도다 하매 온 백성이 다시 그를 슬퍼하여 우니라


그리고 다윗이 음식도 거른채 아브넬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다윗의 슬픔과 애도를 보고 아브넬을 죽인 것이 다윗이 아닌 것을 알게 됩니다. 


어쩌면 다윗이 아브넬의 죽음을 이렇게 다루어야 했던 분명한 의도 있을 알수 있습니다. 바로 자기의 백성들에게 더 이상의 피의 복수와 원수갚음은 없어야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 이상 사울의 세력과 다윗의 세력이 서로 반목하는 그런 일이 없어야한다는 것 그리고 이제는 서로 화해하고 용납하는 시대가 와야하는 무언의 메시지가 바로 아브넬의 장례식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다윗의 의도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적인 권력투쟁으로 피의 복수를 진행할 자신을 따르는 신복들에게 일종의 간접적인 경고 메시지를 보내는 것입니다. 


(삼하 3:39) 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 대로 갚으실지로다 하니라


대단한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추측해볼수 있는 대목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윗의 이러한 화해와 용납의 태도에서 무엇을 묵상하고 

무엇을 배울수 있는가?를 질문해보아야 합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갈등과 대립를 경험합니다. 

항상 보이지 않는 피의 복수과 원수맺음을 경험하고 살아갑니다. 




크리스채니티투데(Christianity Today)에서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책중 100권중 하나로 선정된 책중에 미로 슬라브 볼프(Miroslav Vof) < 배재와 포용 Exclusion and Embrace>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볼프라는 사람은 동유럽 크로아티아 출신의 신학자입니다. 동유럽의 냉전시대의 격변기를 겪으면서 동유럽안에서 일어난 전쟁과 폭력, 갈등과 반목을 지켜보면서 이러한 시대에 < 나는 십자가에 달린 메시야를 따르는 사람으로 적합한 반응은 무엇인가? 십자가의 메시와 이 폭력적인 세상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를 고민하는 내용입니다. 


이 볼프는 그 폭력의 한 가운데서 고민하고 묵상하면 사유하면서 이 글을 썼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향에서 사람들이 강제수용소에 수감되고 여성들이 강간당하고 교회가 불타고 도시가 파괴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유고연방의 설립과 해체가 반복된느 과정에서 과거 오스만 제국하에 공존했던 다른 종교적 정체성을 가진 민족들 사사의 갈등과 상호 파괴가 ‘ 인종 청소 ’의 양상으로까지 전개되던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이 책의 서두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 나는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아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나에게 적합한 반응을 생각해 내야만 했다. 어떻게 내가 나의 헌신, 욕망, 저항, 분노, 불확실성으로부터 시선을 회피할 수 있겠는가? 최대한 엄격하게 그것들을 곰곰이 따져 보아야 했다. 십자가의 메시지와 폭력의 세상 사이에 있는 긴장이 나에게는, 십자가에 달리신 이를 따르고자 하는 바람과 다른 이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지켜보거나 나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내버려두고 싶지 않은 마음 사이의 갈등으로 다가왔다. 이 책은 지적 투쟁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영적 여정에 관한 기록이기도 하다. ”


이 책의 마지막 대목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 하나님의 정의를 확신하고 하나님의 임재로 마음을 굳게하며 복수의 충동에 사로잡히기를 거부함으로써 폭력의 순환을 끊어야 한다. 원수를 사랑하려고 노력하면 결국 십자가에 달린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부인할수 없다. 하지만 보복하지 않는 값비싼 행동들은 오순절의 평화라는 연약한 열매가 잘 알수 있는 씨앗이된다. ”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오늘의 이 시대를 바라봅니다. 

포용보다는 배제가 더 쉬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쉽게 배제하고 어렵게 포용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다윗의 모습은 이 시대에 우리가 무엇을 할수 있는지? 

이 시대에 무엇을 해야하는지? 말해줍니다. 


더 이상의 세상의 갈등과 반목의 방식을 끊고 

하나님의 나라의 방식인 화해와 용납 그리고 포용으로 나아가도록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 여호와는 악행한자에게 그 악한대로 갚으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우리가 갚아주려하지 말고 우리가 복수하려 하지 말고 

우리가 베풀 수 있는 최고의 선으로 ....

선으로 악을 이기는 상상할수 없는 방식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수 있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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