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SC 새벽큐티설교 사사기 3:1-7 >


[3:1-7]

(3:1) 여호와께서 가나안의 모든 전쟁들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3:2)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 두신 이방 민족들은

(3:3) 블레셋의 다섯 군주들과 모든 가나안 족속과 시돈 족속과 바알 헤르몬 산에서부터 하맛 입구까지 레바논 산에 거주하는 히위 족속이라

(3:4) 남겨 두신 이 이방 민족들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의 조상들에게 이르신 명령들을 순종하는지 알고자 하셨더라

(3:5)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3:6) 그들의 딸들을 맞아 아내로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고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

(3:7)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 3:1-11> 잊어버렸더라



오늘 사사기 3장은 사시기서를 이해하는 키워드를 제공하는 본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을 이방나라의 고통과 압제속에 내버려 두셨는지? 도대체 이러한 상황속에서 그들에게 무엇을 원하셨는지? 어떻게 해서 그러한 일들이 반복되고 있는지?을 알수 있는 그 이유와 원인을 알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병주고 약주는 분이 아닌 하나님이 사사시대 사람들에 진정으로 원하셨던 것이 무엇인지?을 발견할수 있는 본문입니다.


사사기의 이야기는 가나안땅으로 들어간 출애굽 2세대들이 죽고난 이후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가나안 정복과 정착에 지대한 공헌을 하며 영적 리더쉽을 발휘했던 소위 여호수아와 갈렙의 세대가 죽고 난 이후에 일어나는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2:10)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 알지 못했다 >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그당시 사사시대의 사람들의 영적인 상황을 아주 잘 말해주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쓰인 히브리어단어가 우리가 잘아는 < 야다 >라는 표현입니다. 바로 <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경험적으로 그리고 전인격적으로 알지 못했습니다. >


여기에 쓰인 < 알지 못했다 >는 표현이 오늘 본문에 7절에 이렇게 표현되었습니다.

(3:7)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여기서 쓰인 < 잊어버리다 >는 표현은 < 알지 못했다 >는 표현의 업그레드된 표현인다. 조금더 심한 표현입니다. 히브리어 < 샤카흐 >라는 표현은 < 잊어버리고 모른척하고 무시하고 그마음이 시들어 버렸다, to forget / to wither >는 뜻입니다.


(31:12) 내가 잊어버린 바 됨이 죽은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함 같고

깨진 그릇과 같으니이다

(102:4) 내가 음식 먹기도 잊었으므로 내 마음이 풀 같이 시들고 말라 버렸사오며

여호수아가 110세에 죽고 난 후에 일어나는 세대들... 일명 <하나님이 행하신 일과 하나님을 잊어버린 망각의 시대 >입니다. 그리고 < 그마음이 시들어 버린 세대 >입니다.

 

바로 사사기는 이러하는 하나님을 잊어버린 망각의 시대에서 그 마음이 시들어 버린 여호수아 이후 세대에 대한 하나님의 강한 심판의 메시지인 동시에 그들의 변덕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열심을 볼수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흔히 사사기속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구원하는 12사사의 이야기나 재미있는 영웅담같은 에피소드들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묵상해야할 주제는 바로 < 하나님을 잊어버린 시대와 세대속에서 자기 백성을 기억하시는 하나님 > 그리고 < 변덕스러운 사람들을 여전히 변함없이 사랑하는 하나님 >을 묵상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러한 것을 보여주시 위해서 < 약점이 있는 자들, 비겁한 자들, 비루한 자들과 같은 이들을 부르셔서 그 놀라운 하나님의 자기 사랑을 보여주시는 도구로 사용하고 계십니다.

 

이 사사시대의 특징을 사사기의 저자는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음으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17:6; 18:1; 19:1; 21:25)라는 말씀으로 요약하였습니다. 


여기에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라는 말씀의 히브리어 원문은 < 사람마다 자기 눈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 >는 뜻으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나 다른 사람들의 안전과 행복문제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기 눈이 보기에(자기 관점에서) 옳다고 생각하면 그대로 행하는 시대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그 언약에 명시된 대로 언약을 배반하고 지키지 않으면 그대로 두시지 않지요? 그 때 징계의 수단으로 주변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나라들을 들어서 치셨습니다.

 

그 고통이 커서 고통스러우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찾고, 그러면 하나님이 사사를 세워서 구원해 주시는 일이 반복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가 사사기 안에 다섯 번(옷니엘, 에훗, 드보라와 바락, 기드온, 입다)이나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구조를 마이클 윌콕은 4R로 표현하였습니다.

그것은 반역(Rebellion), 보응(Retribution), 회개(Repent), 구원(Rescue)의 사이클입니다. 이것이 바로 < 망각의 시대 / 시들어 버린 세대 > 경험하는 전형적인 패턴인것이죠

 

그렇게 된것에는 분명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 가나안의 족속들을 그대 남겨둔 것 때문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 가나안에 들어간 후 그곳에 있는 족속들과 어떤 한 형태로든 사귀지 말라고 그들을 제하여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23:12-13]

(23:12) 너희가 만일 돌아서서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이 민족들을 가까이 하여 더불어 혼인하며 서로 왕래하면

(23:13) 확실히 알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의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의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마침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결국 오늘 본문에 그 남겨두었던 가나안 족속들이 그들의 시험꺼리가 됩니다.

(3:1) 여호와께서 가나안의 모든 전쟁들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3:4) 남겨 두신 이 이방 민족들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들의 조상들에게 이르신 명령들을 순종하는지 알고자 하셨더라

 

여호수아 다음 세대들은 그들의 마음에서 하나님을 잊어버렸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잊어벼렸습니다. 그들이 가나안땅에 들어오는 동안 어떤 전쟁을 치루고 왔는지 <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해서 어떻게 싸우셨는지 > 알지 못했습니다. 사사시대의 사람들의 문제는 하나님을 몰랐전 자들이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주도하신 가나안 전쟁도 몰랐습니다.

 

오늘 본문에만 나오는 표현이 있습니다. < 가나안 전쟁 >이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여기에만 유일하게 등장합니다. 만일 여호수아 이후 세대들이 가나안 정복 전쟁에 대해 알았더라면 하나님을 이렇게 쉽게 배반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 세대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게 된 것에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해서 어떻게 싸우셨는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전세대의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전쟁을 겪어 보지 못한 사람들을 시험하기 위해 가나안 사람들 중 일부를 남겨두셨습니다.

 

우리가 여호수아서를 일으면서 우리가 놓지 말아야 할 관점은 < 여호와가 우리를 위해서 싸우신다 >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사사기서를 통해서 다시금 보여주고 싶은 메시지는 <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해서 싸우셨다 그것을 다시 보여줄테니 기억하라 >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이 이방나라와 전쟁을 치르는 것은 한사람 히어로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도구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막대기들입니다. 모든 전쟁의 시작과 마무리는 친히 하나님이 하십니다. 모든 전쟁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음을 망각의 세대, 시들해진 사람들에게 다시금 보여기 원하셨습니다.

 

이제 가나안 정복전쟁에서 남겨진 가나안의 4 무리가 있었습니다.

블레셋의 다섯 통치자들. 가나안 사람모두, 시돈 사람들, 히위사람들 >

 

사사기 1장에서 남겨둔 가나안 족속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소 사사기 1장에 나오는 가나안 족속들과 차이가 있습니다.


4종류의 가나안족속들은 일종의 상징성을 갖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4라는 숫자는 <동서남북 /세계와 세상>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총체성.포괄성>을 상징합니다.


게다가 블레셋 사람들은 남서쪽, 시돈사람들은 북서쪽, 히위사람들은 북동쪽, 그리고 가나안 사람들은 남동쪽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 인가? 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사람들 사이에서 포위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하나님은 가나안에 정착해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그 마음이 시들해져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 시험하기 원하십니다. >

 

오늘 3장 초반에 우리가 또하나 주목해야 할 표현은 < 시험하려 하시매, 시험 하사 >라는 표현입니다. 바로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사사기서를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을 알려줍니다. <반역-보응-회개-구원>이라는 이 패턴 반복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보기 원하셨든지? 왜 이방나라를 들어 이스랑레의 심판의 도구로 쓰시는지를 알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 시험하매 >라는 말은 앞에서 < 안다 >는 말과 관련이 됩니다.

보통 학교에서 시험을 칠 때 선생님의 시험의 목적은 학생이 그 답을 아는지 모른지를 판가름하고 학생들이 얼마정도 아는지를 살펴보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3:2)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 두신 이방 민족들은

 

하나님은 이 사사기에 등장하는 많은 고통과 고난을 통해서 그들이 <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싸우시는 전쟁이 있음을 아는지 모르지를 보기 원하셨습니다. >

그리고 그들이 잊어버렸던 마음을 돌이키고 하나님을 다시금 기억해 내기를 바라셨습니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에게 충격요법으로 기억이 돌아오게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 시험 하시매 >라는 표현하고 < 가르쳐 알게 하려하사 >라고 말씀하고 있는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묵상하게 할까요?


1/ 우리안에 하나님을 잊어버린 영적인 기억상실증에 걸리지 않았는지 돌아 보아야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세대 뿐 아니라 우리 다음 세대 계속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세대가 일어나도록 해야합니다.

 

2/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가 어느 정도 하나님을 알고 있는지 시험하십니다. 우리의 삶의 고난과 고통속에서 우리는 더 하나님을 기억해내고 그분이 행하신 일들을 고백할수 있어야합니다. 우리가 당하는 많은 고난의 원인과 이유를 찾기 전에 우리는 그속에서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러면 분명 우리의 고난과 어려움을 이유를 분명히 할게 될것입니다.

 

3/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알게 하시고자 하는 것이 있음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자신을 가르쳐 알게하십니다.


[86:11-12]

(86:11)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86:12)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오리니

GSC 새벽큐티설교 <여호수아 22:1-9>



[22:1-9]

(22:1) 그 때에 여호수아가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를 불러서

(22:2)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너희가 다 지키며 또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일에 너희가 내 말을 순종하여

(22:3) 오늘까지 날이 오래도록 너희가 너희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그 책임을 지키도다

(22:4) 이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대로 너희 형제에게 안식을 주셨으니 그런즉 이제 너희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요단 저쪽에서 너희에게 준 소유지로 가서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되

(22:5) 오직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명령과 율법을 반드시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의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니라 하고

(22:6)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축복하여 보내매 그들이 자기 장막으로 갔더라

(22:7) 므낫세 반 지파에게는 모세가 바산에서 기업을 주었고 그 남은 반 지파에게는 여호수아가 요단 이쪽 서쪽에서 그들의 형제들과 함께 기업을 준지라 여호수아가 그들을 그들의 장막으로 돌려보낼 때에 그들에게 축복하고

(22:8)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많은 재산과 심히 많은 가축과 은과 금과 구리와 쇠와 심히 많은 의복을 가지고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서 너희의 원수들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의 형제와 나눌지니라 하매

(22:9)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 실로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떠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받은 땅 곧 그들의 소유지 길르앗으로 가니라


< 22:1-9> 명령하신대로




이제 여호수아 22~24장까지는 가나안땅을 정복하고 나누는 일을 마무리하는 일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과 같은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진행된 모든 전쟁은 자신들이 주도한 전쟁이 아니었으면 오직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전쟁있었다는 것을 다시금 인정하는 고백들이 담겨있습니다. 특히 이 싸움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싸운신 싸움이며 우리는 오직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주신 명령을 지키고 행했을 뿐이라는 것을 고백할 뿐이라는 것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이 여호수아서를 기록하고 우리에게 묵상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이면 기록 목적일것입니다. < 여호와와 함께 싸우는 것, 여호와의 전쟁을 어떻게 치루는지를 배우는 것 >입니다.


이제 여호수아서 마지막에 접어 들면서 여호수아서는 놀랍게도 처음 여호수아 1-5장과 대칭을 이루는 여호수아 22-24장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처음 여호수아 1-5장은 지도자로서의 여호수아가 등장하고 그를 세우고 가나안에서의 언약적 삶을 출발하는 것을 준비시키십니다.

이제 마지막 여호수아 22-24장은 이제 그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일이 마무리되면서 정복한 가나안에서의 삶을 어떻게 살것인가?을 말씀해주시고 있습니다.

 

항상 우리의 신앙생활의 고민은 < 주님과 함께 어떻게 우리의 삶을 시작할것인가>< 주님과 함께 어떻게 우리의 삶을 마무리할것인가 >에 대한 고민인 있어야합니다. 시작과 마무리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항상 우리는 첫 모습과 뒷 모습이 어떻게 될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항상 우리는 첫 등장과 마지막 퇴장이 어떻게 될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여호수아 1장에서 여호수아의 등장이라면 여호수아 22장부터는 여호수아의 퇴장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22장은 12지파의 가나안땅의 분배와 도피성을 만드는일, 레위지파의 성읍을 분배하는 것을 끝낸 여호수아는 요단강 동편에 거하는 르우벤, , 므낫세 반 지파를 그들의 땅으로 돌려 보내면서 가나안 족속들을 진멸하기 위해 앞장서서 싸운 그들의 수고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221장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 그때 >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22:1) 그 때에 여호수아가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를 불러서

 

<그때>는 바로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거업을 얻게 된 때를 말합니다.

(32:29)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이 만일 각각 무장하고 너희와 함께 요단을 건너가서 여호와 앞에서 싸워서 그 땅이 너희 앞에 항복하기에 이르면 길르앗 땅을 그들의 소유로 줄 것이니라

 

이 때에야 비로소 두지파 반은 그들의 땅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두지파 반이 그동안 그러한 전쟁을 치루었던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계속 반복되는 2개 단어속에서 그 이유를 찾습니다. < 명령과 순종 >이라는 두 단어를 주목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너희가 다 지켰다 그리고 끝까지 순종했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이들 두 지파 반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편안히 거주하도록 가나안 족속을 물리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이 명령은 모세가 죽은 후에도 모세의 명령에 순종하여 끝까지 그들의 형제를 도왔습니다.

[32:20-22]

(32:20)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만일 이 일을 행하여 무장하고 여호와 앞에서 가서 싸우되

(32:21) 너희가 다 무장하고 여호와 앞에서 요단을 건너가서 여호와께서 그의 원수를 자기 앞에서 쫓아내시고

(32:22) 그 땅이 여호와 앞에 복종하게 하시기까지 싸우면 여호와 앞에서나 이스라엘 앞에서나 무죄하여 돌아오겠고 이 땅은 여호와 앞에서 너희의 소유가 되리라마는

 

바로 여호수아는 이 두지파 반을 자신의 땅으로 돌려보내면서 평가하기를 그들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주신 명령을 지키시고 순종한 사람들이라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들의 수고과 이들의 행동을 기념하기 위해서 오늘 읽은 본문은 아니지만 10-11절에 요단 강가에서 <볼만한 큰 단>을 쌓습니다.

 

이러한 <보기에 큰 단>을 쌓았다는 소식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우상을 섬기는 것은 아닌가? 자기를 위해 단을 쌓은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위를 했다는 오해를 불러 일으킵니다. 이 두지파반이 큰 단을 쌓았다는 말을 듣고 이들을 오해해서 싸우기위해서 다른 지파사람들이 실로에 모이게 됩니다.

 

이것에 대해서 나중에 두지파 반은 변호하게 됩니다. 결국 그 오해가 풀리게 됩니다.

(22:29) 우리가 번제나 소제나 다른 제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성막 앞에 있는 제단 외에 제단을 쌓음으로 여호와를 거역하고 오늘 여호와를 따르는 데에서 돌아서려는 것은 결단코 아니라 하리라

(22:34)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 그 제단을 엣이라 불렀으니 우리 사이에 이 제단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라 함이었더라

 

재미있는 해프닝으로 끝나는 에피소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해프닝속에서 주목할수 있는 것은 초기 이스라엘백성들의 중심에 있었던 < 하나님에 대한 열심 >입니다. 이 열심은 <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열심이었고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에 대한 열심 >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두지판 반을 자신들의 수고을 마치고 돌려 보내면서 이렇게 축복하고 있습니다. < 여호수아 222-5>을 요약해보면


< 너희가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은 다 지켰고. 순종했고 그래서 형제를 떠나지 않았고 그 책임을 지켰다. >라고 인정해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탁합니다.

 

(22:5) 오직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명령과 율법을 반드시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의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니라 하고

 

오늘 이 여호수아의 인정과 당부속에는 < 신명기 > 전체의 요약이 담겨있습니다. 일종의 신명기적 당부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신앙에서 놓치 말야야 할 것 몇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1/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에 신실하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의 약속을 통해서 자신의 신실함을 보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령만하고 순종만 요구하시는 일방적인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깊은 관계속에서 자신의 약속을 보여주시고 그것을 이루시기 위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싸우시고 그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모여주십니다.

 

2/ 하나님께 우리의 신실함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절대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명령하고 요구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꺼이 그 명령에 순종하고 지키는 반응을 요구하십니다. 서로에 대한 신실함을 요구하는 행위가 믿음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신실함과 우리가 그 구원의 신실함을 의심하지 않고 신뢰하는 신실함의 서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과 우리는 계속 그 신실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관계해야합니다.

오늘 본문에 여호수아가 두지파 반에게 부탁하는 당부속에는 <관계적 용어> 쓰여있습니다. < 사랑하고.. 행하고.. 지키며,, 친근히 고.. 마음과 성품을 다하고 섬기라 >

 

여기서 < 친근히 하고 >라는 표현이 재미 있습니다. 이 단어는 < 다바크 >인데 < 달라붙다. 굳게 결합되어 있다, 함께 머물러 있다 > 의미가 있습니다.

 

어제 서점에서 우연히 읽은 책 <이해할수 없는 하나님 사랑하기> 속에서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 믿음을 갖는 것은 사랑에 빠지는 것과 같다. 처음엔 미심쩍은 수용은 이해로 바뀌고 이해는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진정한 수용으로 바뀐다. 우리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지만 그 다음 순간 그 관계를 부여잡고 힘겹게 씨름한다. 우리는 꼼짝없이 빠져들지만 그 다음 순간 두려워 도망치고 싶어 한다. 우리의 믿음은 의심으로 신뢰는 혼란으로 친밀감은 버림받았다는 느낌으로 바뀐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게 쉬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셨을 뿐 아니라 무모하게도 우리와 사랑에 빠지셨다. 우리의 창조자는 태초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피조물을 쫓아 다니셨고, 우리 대신 죽기까지 하셨다. 그분은 우리를 신부라 부르시 자신을 신랑아라고 부르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깊은 친밀함을 원하신다.


이것이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해야할 이유이다. >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우리는 이 세상속에서 여호와 함께 그 가나안의 정복전쟁을 치루는 것과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전쟁을 치루고 있는 것이죠. 이러한 삶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신실함을 부여잡고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신실함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이며 그것인 신앙입니다. 또한 그분과 더 가까이 대하는 것입니다.

내일 본문이기는 하지만.. 여호수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가까이 하기를 오늘까지 행한 것 같이 하라 >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를 사랑하기고 친근히 대하는 그것이 우리가 오늘 경험해야할 우리의 삶의 내용이며 신앙의 내용입니다

GSC 새벽큐티설교 <여호수아 7:1-12>



[7:1-12]

(7:1)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7:2) 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사람을 벧엘 동쪽 벧아웬 곁에 있는 아이로 보내며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올라가서 그 땅을 정탐하라 하매 그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를 정탐하고

(7:3)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하지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이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 하므로

(7:4) 백성 중 삼천 명쯤 그리로 올라갔다가 아이 사람 앞에서 도망하니

(7:5) 아이 사람이 그들을 삼십육 명쯤 쳐죽이고 성문 앞에서부터 스바림까지 쫓아가 내려가는 비탈에서 쳤으므로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된지라

(7:6)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7:7)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쪽을 만족하게 여겨 거주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이다

(7:8) 주여 이스라엘이 그의 원수들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7:9) 가나안 사람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7:10)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7:11)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

(7:12)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의 원수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그들도 온전히 바친 것이 됨이라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 7:1-12> 아간의 함정

 

우리는 여호수아서를 통해서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의 주리라 약속한 가나안땅을 어떻게 정복하며 어떻게 나누는지를 보게 됩니다


여호수아서는 <전쟁과 정복의 기록>이 담겨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전쟁의 기록속에서 놓치지 말아야할 중요한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전쟁을 누구 주도하고 있으면 이 전쟁의 주인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출애굽한 1세대 이스라엘백성들이 40년광야시대를 지나오면서 철저하게 그들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인도과 도움을 받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출애굽 2세대들을 중심으로하는 요단강넘어 약속의 땅 시대를 들어서면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훈련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것은 < 자신의 힘과 노력이 치우는 자신의 전쟁이 아닌 전적으로 여호와의 힘과 능력으로 치루는 여호와의 전쟁 >을 경험케하는 것이 었습니다.

 

바로 그 대표적인 전쟁이 < 여리고 전쟁 >이있고 < 아이성 전쟁 > 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소위 전쟁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너무나도 전쟁같지 않은 전쟁을 치룬 여호수아 6장에 < 여리고 전쟁 >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이 전쟁은 그동안 경험했고 알아왔던 상상이상의 전쟁이었으면 어떤 칼과 창이나 전쟁무기나 전략이 사용되지 않는 한번도 해본적도 경험해보지 않은 전쟁을 치르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냥 전쟁이라고 보다는 < 여리고 기적 >이라고 할 큼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7장 이후에 < 아이성 전쟁 >을 치루어야 했습니다. 이 아이성은 여리고에 비하면 너무나도 쉬운 전쟁같았습니다. 능히 자신들의 힘만으로 거든히 이길수 있는 전쟁같았습니다. 오늘 본문 3절에 < 아이성을 정탐한 이들의 보고 >를 보면 그러한 중심을 옅볼수 있습니다.

 

(7:3) 여호수아에게로 돌아와 그에게 이르되 백성을 다 올라가게 하지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이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 하므로

 

여기서 <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 >라는 히브리어 원뜻은 < 귀찮게 / 피곤하게 하지 말자 . 너무 누워서 떡먹기같고 가소롭다 >는 의미입니다. 얼마큼 아이성을 쉽게 생각했는지 알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이 여리고성 전쟁의 대승과 아이성 전쟁의 패배에서 < 아간의 범죄 >가 있습니다. 그 결과 < 아골골짜기의 대 참극 >이 일어나죠.

 

오늘 본문의 내용은 우리가 너무도 잘아는 내용입니다. 여리고성 전쟁과 아이성의 패배 사이에 있는 < 아간의 범죄 >, 이것은 인간의 탐욕과 거짓된 마음이 어떠한 결과를 만들어내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을 순종치 않은 이들의 결과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샘플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고 연구하다가 재미있는 것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아이성 아간 아골골짜기>3이름들에는 묘한 연결고리가 있다는 것을 알수 있었습니다. 3이름의 뜻입니다.

 

<아이>라는 히브리어 뜻은 < 폐허, 페허 무더기 >라는 뜻입니다.

<아간>라는 히브리어 뜻은 <괴롭히는자, 근심과 투통거리>라는 뜻입니다.

<아골>이라는 히브리어 뜻은 < 근심, 괴로움, 소란 >이라는 뜻입니다.

마치 워드플레이를 하듯이 이 3단어는 묘한 연결고리를 갖습니다.

 



모잘 것 없는 폐허같은 <아이성>을 정복하려 했지만 괴롭히는자의 <아간>으로 인해 결국 근심과 괴로움의 <아골>을 경험하게 되는 것... 바로 이것인 하나님이 없는 인생들의 한 모습을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이아침에 < 아이-아간-아골 >사이에 머물수 있는 우리의 삶에서 빠지기 쉬운 <아간의 함정>에 대해서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1 아간의 함정 > 이 전쟁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이 잊어버리는 함정입니다.

 

철저하게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복전쟁은 여호와하나님이 주도하십니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백성이 해야할 반응은 전적인 의존이며 전적인 순종뿐이었습니다. 출애굽의 시대를 끝내고 이제 요단을 건너 가나안의 시대를 여신분은 여호와 하나님이 이십니다. <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신분도. 내가 지시할 땅에 들어가도록 길을 여신분도, 내가 지시할 땅을 나누어주신분도 > 여호와 하나님이 이십니다.

 

가나안땅의 첫성인 여리고성을 승리하고 그 승리에 도취된 이스라엘 백성중에서 < 아간 >은 출애굽 2세대의 젊은 지도자였습니다. 아간은 이스라엘 민족의 12지파 중에서 가장 중심에 있는 유대지파에 속한 명문 세라 족속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아간은 여호수아 대장군 당시 유대 지파를 진두에서 지휘하고 있었던 정치적 지도자로서 장로라는 직분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유다 지파 백성들을 하나님 말씀대로 이끌어 가야 할 책임 있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여리성 전쟁이후에 여호와의 전쟁에 대한 감사보다는 자신이 이 전쟁을 치룬것에 대한 일종의 보상심리가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리고성 전쟁 도중 자신의 마음에 든 물건 몇 개를 훔쳐 사유화했습니다.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 200세겔과 50세겔 나가는 금덩이 하나를 몰래 훔쳐 자신만이 알고 있는 비밀 장소에 감춘 것입니다.

 

그는 이 전쟁의 주인이 자신인것처럼 착각하는 함정에 빠졌습니다.


2 아간의 함정 > 이 전쟁의 목적은 땅의 정복보다 땅의 거룩에 있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문장을 찾는다면 < 온전히 바치 물건 >이라는 말입니다. 이 것은 1절에 211, 12절에 2, 13절에 215절에 계속해서 쓰여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8번이나 마치 의도적으로 강조하면서 쓰여지고 있습니다.

 

바로 < 온전히 바친 물건 > 이라는 단어 < 헤렘 >의 뜻은 < 하나님께 완전히 바쳐진 것, 인간이 건드리면 저주받는 것, 멸망받는 것 >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 제사의 용어 >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을 <헤렘 /온전히 바친 물건 >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관점 하나. 이 가나안 정복전쟁은 세상적인 전쟁과는 다른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그것은 < 이 전쟁은 하나님께 드리는 일종의 제사 >입니다. 그래서 모든 주도권이 전쟁을 치루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머무시고 거주할땅을 새롭게 하시고 성결케하십니다.

 

(7:12)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의 원수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그들도 온전히 바친 것이 됨이라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7:13) 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거룩하게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일을 위하여 스스로 거룩하게 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아 너희 가운데에 온전히 바친 물건이 있나니 너희가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가운데에서 제하기까지는 네 원수들 앞에 능히 맞서지

 

이러한 <헤렘/여호와께 온전히 바쳐진것>이기 때문에 그 물건을 마음대로 다루지 말하고 말씀하십니다.

(6:18) 너희는 온전히 바치고 그 바친 것 중에서 어떤 것이든지 취하여 너희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바치는 것이 되게 하여 고통을 당하게 되지 아니하도록 오직 너희는 그 바친 물건에 손대지 말라

 

그리고 < 헤렘의 규정 > 때문에 안타깝게도 범죄하고 타락한 가나안 족속을 철저하게 쫓아 내시고 멸하십니다.

가나안 민족을 하나님께 헤렘으로 드린다는 것은 그들을 진멸한다는 의미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해했다고 보입니다. 즉 가나안 사람들을 온전히 진멸해야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져야할 '헤렘'이었기 때문이라는 '헤렘 율법'을 따른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가나안 백성에 대한 진멸 부분은 너무 잔인해보여서 믿지 않는 이들이 늘 비판적으로 질문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23:33) 그들이 네 땅에 머무르지 못할 것은 그들이 너를 내게 범죄하게 할까 두려움이라 네가 그 신들을 섬기면 그것이 너의 올무가 되리라

(18:25)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으로 말미암아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주민을 토하여 내느니라

(9:5)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바로 아간은 이 < 헤렘 >을 어긴것이었습니다. 아간의 마음의 숨은 동기속에는 < 하나님께 온전치 바쳐것>에 대한 관심보다는 < 내가 마땅이 받아야 할 것 >에 대한 함정에 빠진것입니다.

 

3 아간의 함정 > 하나님의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생각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범죄한 인간이 빠지기 쉬운 아담과 하와의 함정이면서 오늘 우리의 함정이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우리의 모든 중심과 생각과 행동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너무도 자주 잊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과 방법으로 살려하지 않고 자기 목적과 방법으로 살아갈려고 합니다. 결국 그 노력은 아이성의 패배와 같은 어이없고 어처구니 없는 패배를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이상황에 대한 여호수아의 재미있는 표현이 나옵니다.

(7:5) 아이 사람이 그들을 삼십육 명쯤 쳐죽이고 성문 앞에서부터 스바림까지 쫓아가 내려가는 비탈에서 쳤으므로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된지라

 

이 표현은 어디서 많이 본 표현입니다.

(2: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이는 가나안 백성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려워할 때 쓰였던 똑같은 표현입니다. 분위기가 완전히 역전된 상황을 잘 그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상황과 감정은 한순간에 이렇게 역전될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뒤집기 한편의 명수>입니다. 우리는 명심해야합니다.

 

어제의 승리가 오늘의 승리를 보장해주시지 않습니다. 어제의 잘됨이 오늘의 잘됨을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의 삶의 주인되신 우리의 삶의 이유된 하나님만이 우리의 삶을 보장해주십니다.

 

우리의 사소한 마음도 우리의 사소한 행동도 하나님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아간의 실패한 것은 바로 그 마음을 잊어 버린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가족과 자신의 가문이 아간 한사람의 탐심과 불순한 동기로 인해서 <아골골짜기>의 처참한 죽음의 결과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7:26) 그 위에 돌 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의 맹렬한 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

 

그러나 성경은 다시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러한 < 아간의 이름을 딴 아골골짜기 같은 인생 >라고 다시금 회복의 기회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2:15)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190718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700명이 모임 사람들 가운데서 길선주 장로가 고백했던 그 고백을 기억합니다. < 나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실수 없었습니다. 1년 전에 내 친구 중 한 사람이 임종시에 나를 자기 집으로 불러 말하기를 길장로,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지만 내 집 살림을 돌보아 주시오. 내 아내는 무능하니까 말입니다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내가 잘 돌보아 드릴테니 염려 말라고 나는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그 미망인의 재산을 관리하던 중 미화 100불 상당의 금액을 나는 사취했던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 해 온 것입니다. 내일 아침에 그 돈 전액을 그 미망인에게로 돌려드리겠습니다. > 이 회개의 고백이 부흥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매일 같이 아간의 함정에 빠지기 쉬운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고백해야 합니다. < 주는 저는 아간같은 자입니다. >

 

 

 

 

 

 GSC 새벽큐티설교 <레위기 25:1-12>



[25:1-12]

(25:1)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5: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25:3) 너는 육 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 년 동안 그 포도원을 가꾸어 그 소출을 거둘 것이나

(25:4) 일곱째 해에는 그 땅이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가꾸지 말며

(25:5) 네가 거둔 후에 자라난 것을 거두지 말고 가꾸지 아니한 포도나무가 맺은 열매를 거두지 말라 이는 땅의 안식년임이니라

(25:6) 안식년의 소출은 너희가 먹을 것이니 너와 네 남종과 네 여종과 네 품꾼과 너와 함께 거류하는 자들과

(25:7) 네 가축과 네 땅에 있는 들짐승들이 다 그 소출로 먹을 것을 삼을지니라

(25:8)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

(25:9)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는 뿔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뿔나팔을 크게 불지며

(25:10)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25:11) 그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가꾸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25:12) 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너희는 밭의 소출을 먹으리라

 

< 레 25:1-12> 안식과 희년 




위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 종되었고 자유도 없었고 자신이 소유한 땅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던... 애굽의 삶에서 자기백성으로 그리고 제사장나라로 부르시고 그들을 구출하시면서... 하나님이 지시한 가나한 땅으로 나아가는 과정중에서 그들을 구별시키고 성결케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의도.. 하나님의 특별한 디테일이 담겨있는 말씀입니다. >


레위기가 기록하고 있는 내용중에 가장 중심된 내용이 있다면 


< 첫째는 제사입니다. 5제사(번제,소제,화목제,속건제.속죄제)..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갈수 있을까? 우리가 하나님을 어떤 마음으로 어떤 삶의 태도로 그리고 무엇으로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수 있을까? 라고하는 도전앞에 서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수 있는 유일한 자격조건은 바로 < 거룩 >입니다. >


< 둘째는 절기입니다. 7절기(유월절,무교절,초실절,오순절,나팔절,속죄일,초막절)/ * 유무초밥이 속초까지 ? 오나


절기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수 있을까? 우리가 어떻게하면 하나님을 잊지않고 기억하며 살고 있을까? 라고 하는 < 기억, 기념, 기대 >를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의도가 담겨 있는 또 하나의 거룩한 삶을 위한 디테일입니다.


우리가 레위기를 읽으면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하시고 이제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시려는 중요한 상황에서 이 레위기를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 그들이 400년동안 길들어있던 애굽의 삶, 애굽적인 습성에 물빼기 작업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가나안에 들어가면 가나안의 종교와 풍습에 영향받지 않을 만한 강력한 장치기 필요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면서 철저하게 하나님만 예배하고 ..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삶... 오직 하나님만 생각하기를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특별한 애정입니다.>

 

그래서 레위기는 어떠면 .. 우리가 애굽과 가나땅 사이에서 나도 모르게 익숙해져 있고 나도 모르게 영향받게된 많은 애매한 외부적인 환경속에서 < 애매한 것을 정해는 하나님의 디테일 >이 담겨있습니다.

 

구약의 제사와 절기는 모두다 그 정신은 하나입니다. 제사는 <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입니다. 절기는 < 너는 나를 기억하라 >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는 절기의 가장 클라이막스와 같은 < 안식년 > < 희년 >의 규례가 나옵니다. 이 안식년과 희년은 지금 떠돌이 광야생활에 적용되어지는 것이 아니 가나안땅에 들어갔을때의 지켜야하는 규례들입니다.


[25:1-2]

(25:1)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5: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레위기 25장의 대부분은 희년에 관한 것이지만 우선 안식년의 주요 특징부터 시작합니다. 백성들은 육년동안 자기 밭에 씨를 뿌리고 포도나무를 경작하며 곡식을 거둘수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칠년이 되는 해에 밭에 씨를 뿌리거나 포도나무를 경작하거나 그땅에서 저절로 자란 것들을 수확할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해는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안식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백성들과 동물들은 칠년이 되는 해에는 땅에서 스스로 난 것을 먹을수 있었습니다.


안식년 규정에서 가장 큰 핵심은 < 땅의 휴식, 빚을 탕감 받는 것, 그리고 땅이 없어 힘들에 대한 배려 >였습니다. 바로 이 안식년은 <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의 해 >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 십일조, 안식일, 안식년, 희년 > 4가지는 하나의 공통 분모가 있습니다. 그것은 < 하나님의 주권 사상 >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고 지금 우리가 누리고 갖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것이며 우리에게 잠시 맡겨진 것 이다 >라는 사실입니다.


엘렌 로스 < 하나님의 백성은 공유하고 있는 땅의 풍성함이 땅을 창조하신 주권자로부터 온것이라는 믿음과 자신의 삶이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한다 >


마틴루터 < 안식은 영적인 쉼을 말할 뿐아니라 우리가 하나님만이 우리안에서 일하게 하시며 우리의 모든 능력을 다해 우리 자신의 일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


영성신학자 마르던 <안식> < 안식의 의미를 그침, , 받아들임, 향연 등 4가지로 요약한다. >


1) 그침(욕망으로부터 생긴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가는 마음.성공지향)이다.

2) (육체적·정서적으로 지치고 상한 몸과 마음을 회복)

3) 받아들임 (자기의 뜻과 야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요구와 뜻을 받아들이는 것)

4) 향연( 즐거움이며 축제다. ‘축제가 있는 안식’ )

 

찬송가 70<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으니 이 예물을 주께 마치이 나이다 >





하나님은 안식년과 희년의 규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그들의 넉넉함이 주권자이신 창조주로부터 왔음을 인정하기를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백성들 스스로 그 < 안식년과 희년 >을 시행함으로 그 하나님의 풍성함을 서로 나누도록 하셨습니다. 마치 일주일의 하루가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일주일의 전부가 주님의 것인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 시간을 정기적으로 할애하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땅을 보살피며,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풍성함에 동참할수 있게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안식년은 그들에게 그 땅은 자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며 그들은 모든 백성들이 그분의 풍성함을 함께 나눌수 있게 해야 한다는 책임을 갖고 있음을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흔히 안식하면 < >을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이해입니다. 안식은 < 하나님의 주인됨을 선포하고 그것이 실행되는 시간, 자리, 공간 > 그것이 안식입니다. 참된 안식은 < 거룩, 주권, 은혜 >라는 3박자가 들어맞는 일입니다.


우리가 참다운 안식에 들어가면 < 하나님의 주권이 선포되고 나의 권리가 포기 되어 지는 것입니다. >


바로 그 안식년이 7번이 반복되었을 때 < 희년 >이 선포됩니다.


안식일에 대한 발전적 개념이 안식년이며 안식년에 대한 발전적 개념이 희년입이다. 이 희년은 < 면제의 해. 자유의 해 >입니다. 땅은 7년째 되는 안식년에는 경작을 쉬게하여 땅의 지력을 회복케 하였을 뿐아니라 안식년에 자연적으로 얻어지는 과일의 열매나 수확물은 고아나 과부 가나한 나그네에게 돌렸고 공중의 새나 들짐승에게 주었습니다. 또한 가난하거나 빚을 갚을 능력이 없어서 종으로 팔렸을지라도 7년째 되는 해인 안식년이 되면 종으로 팔렸던 자들이 해방되어 자유인으로 돌아갑니다.


이러한 안식년의 주기가 7번째가 되는 다음해를 < 희년 >이라고 합니다.

희년이 되면 제사장은 전국에 < 요벨 >나팔을 불어서 전국거민에게 자유을 선포합니다. 희년에는 팔렸던 종들도 자유인으로 돌아오거나 매각되었던 토지나 가옥이 본래 소유주에게 무조건 돌아갑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사회정의며 사회보장 제도입니다. 안식년과 희년을 이해면서 하나님은 땅을 그냥 소유의 개념이 아닌 쉼 필요한 인격적인 개념으로 말씀하십니다.


참다운 자유는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하나님안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이 애굽에서 구출된 사건은 그들에게는 자유가 선포되는 희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종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기억재생 방식, 리마인더 reminder입니다. 그것이 바로 절기 인것입니다.

 

<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정이 있었나 ?>

하나님의 풍성하심과 공급하심 속에서 나는 무엇을 나누고 있는가

나는 나의 나눔을 통해서 누군가의 안식이 되고 있는가?

나는 아직도 나의 쉼에 집중하는가? 나의 안식을 구하고 있는가?

나는 나의 주변의 있는 사람들의 안식,자유,은혜에 관심이 있는가




GSC 새벽큐티설교 <민수기 35:10-15>




[35:10-15]

(35:10)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35:11) 너희를 위하여 성읍을 도피성으로 정하여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리로 피하게 하라

(35:12) 이는 너희가 복수할 자에게서 도피하는 성을 삼아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

(35:13) 너희가 줄 성읍 중에 여섯을 도피성이 되게 하되

(35:14) 세 성읍은 요단 이쪽에 두고 세 성읍은 가나안 땅에 두어 도피성이 되게 하라

(35:15) 이 여섯 성읍은 이스라엘 자손과 타국인과 이스라엘 중에 거류하는 자의 도피성이 되리니 부지중에 살인한 모든 자가 그리로 도피할 수 있으리라

 

[35:29-34]

(35:29) 이는 너희의 대대로 거주하는 곳에서 판결하는 규례라

(35:30) 사람을 죽인 모든 자 곧 살인한 자는 증인들의 말을 따라서 죽일 것이나 한 증인의 증거만 따라서 죽이지 말 것이요

(35:31) 고의로 살인죄를 범한 살인자는 생명의 속전을 받지 말고 반드시 죽일 것이며

(35:32) 또 도피성에 피한 자는 대제사장이 죽기 전에는 속전을 받고 그의 땅으로 돌아가 거주하게 하지 말 것이니라

(35:33)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피는 땅을 더럽히나니 피 흘림을 받은 땅은 그 피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함을 받을 수 없느니라

(35:34)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 곧 내가 거주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 여호와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있음이니라

 


 

< 35:10-15> 거룩을 유지하도록

 

 민수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하나님은 가나안땅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서 어떻게 가나안땅의 경계을 설정하고 그리고 그땅을 분배하며 살것인지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을 점령을 시작하기 전에 사전 준비작업으로 가나안땅의 경계를 정해 주셨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말씀을 주셨을때는 아직 모든 것이 완료되지 않은 미완료된 상태였습니다. 아직 가나안땅을 정복하지 않았고 이제 가나안땅을 바라보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 일을 행하실 것을 그리고 너희들이 그렇게 할것임을 <완료형>으로 말씀하습니다. 그 사실은 가나안이 점령된 것을 전제로 그 땅의 경계를 설정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에서 발견할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을수 있는 것은 우리의 현실은 아직 < 미완료의 상태 >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은 < 완료된 상태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의 눈으로 바로는 우리의 현실이며 우리의 약속입니다.


이러한 아직 미완료된 가나안정복의 상황에서 완료된것처럼 말씀하시고 약속하시는 하나님과 이미 이룬것처럼 자신에게 기업으로 줄 땅을 바라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이 만날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 35장은 레위지파와 레위인들이 어떻게 다른 지파들 속에서 머물러 살아야하는지


그리고 그들이 거주하는 성중에서 도피성을 두어서 고의적으로 살인하지 않은 이들을 다시금 회복의 기회를 얻을수 있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와 긍휼을 볼수 있습니다.


민수기 35장의 본문의 핵심은 < 레위인들이 기업을 분배 받은 지파들 중에 머물러 살도록하신 것><피의 복수와 죽음을 피할수 있는 도피성을 허락하시는>것을 살펴볼수 있습니다.

 

레위인은 가나안 땅이나 요단 동편, 어디에서도 기업을 받지 못했습니다





요단 동편은 르우벤지파, 갓지파, 므낫세 지파가 기업을 받았습니다. 가나안땅 곧 요단 서편은 나머지 아홉지파와 반지파가 기업을 받았습니다. 이때 기업을 나눌 지파들이 대표자를 선택했는데 레위인은 기업을 나눌 대표자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레인들은 다른 지파들처럼 기업을 분배받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 하나님이 기업 >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거처할 최소한의 거처가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각 지파들이 레위인들이 거주할수 있는 지역을 할당해 주도록 했습니다


레위인들이 할당 받은 48개의 성에 흩어져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자손이 기업으로 받은 땅에서 거주할 성읍을 얻었습니다. 성읍을 둘러싼 들도 함게 받았습니다. 성을 중심으로 사방 2년 규빗을 측량하여 레위인들에게 주었습니다.

 

? 하나님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제사하는 일에 수종드는 이들이 레위인들에게 기업을 주지 않으셨을까요?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들로써 세상의 방식과 성별되고 구별된 방식으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기업이 < 하나님 >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방법이 었습니다.

레위인의 기업은 < 여호와 하나님 이시다 >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레위인들은 백성과 여호와 하나님을 잇는 브릿지/대리자 역할을 하기에 의도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지파들 가운데 살도록 하신것입니다. 그래서 그 역할과 책임을 잘 할수 있도록 하신것입니다.

 

백성들 사이에서 백성들 가운데서 머물러 살면서 < 오직 하나님을 자기의 기업으로 삼으며,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구별되게 살고, 백성들 사이에서 백성들을 중보하고 예배를 돕는 일을 하는 것 > 바로 레위인들에 주어진 사명이요 책임이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레위인들이 할당받은 48개의 성읍중에서 또 구별하여서 < 요단 동편에 3>< 요단 서편인 가나안땅에 3>성읍을 <도피성>으로 지정하였습니다. 이것을 일종의 < 특별법 >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부지중에 살인한 사람들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하나님의 배레에서 나온정책이었습니다. 이것은 장차 우리의 영원한 도피성되신 < 예수 그리스도 >의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 도피성 제도는 생명을 중요시 여기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해줍니다


또 죄인을 긍휼히 여기는 하나님의 본심을 보게하는 부분입니다.


? 하나님이 도피성을 세우시는지? 그 목적을 본문에서 찾을수 있습니다.

 

(35:34)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 곧 내가 거주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 여호와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있음이니라


가나안 땅은 거룩한 땅입니다. 그 이유는 이 땅에 이스라엘백성이 살기 때문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이 그땅 가운데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땅, 가나안 땅이 난폭한 피의 복수과 증오가 넘치고 있다는 그 땅의 거룩함이 훼손되는 것이 됩니다. 사람이 무고한 사람의 피를 흘려 죽게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땅을 더럽히는 불신앙적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가나안이 약속의 땅으로 거룩하게 보존되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48개의 이스라엘 지파들의 흩어진 성읍중에서 가장 중심된 곳에 가장 도망치기 좋은 곳에 < 6개의 도피성 >을 허락하신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2가지를 허락하십니다.

첫째는 우리중에 레위인들이 함께 하도록 허락하십니다.

둘째는 우리중에 피할수 있는 도피성을 하락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의 원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정의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정의는 죄인들을 벌주시고 멸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정의는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죄인들을 다시금 회복의 기회를 주시는데 있습니다.

피의 보복의 시대에 < 여호와의 보호 >을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