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SC 새벽큐티설교 <출애굽기 22:20-31>

제목: <출22:20-31> 거룩은 일상입니다. 찬양 : 찬송가 9


(22:20)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희생을 드리는 자는 멸할지니라

(22:21)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

(22:22)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22:23)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을지라

(22:24)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

(22:25) 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나의 백성 중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이거든

너는 그에게 채주 같이 하지 말며 변리를 받지 말 것이며

(22:26)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 보내라

(22:27) 그 몸을 가릴 것이 이뿐이라 이는 그 살의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한 자임이니라

(22:28) 너는 재판장을 욕하지 말며 백성의 유사를 저주하지 말지니라

(22:29) 너는 너의 추수한 것과 너의 짜낸 즙을 드리기에 더디게 말지며

너의 처음 난 아들들을 내게 줄지며

(22:30) 너의 소와 양도 그 일례로 하되 칠일 동안 어미와 함께 있게 하다가

팔일만에 내게 줄지니라

(22:31) 너희는 내게 거룩한 사람이 될지니

들에서 짐승에게 찢긴 것의 고기를 먹지 말고 개에게 던질지니라

====================================================

 

제목: 거룩이 일상이다.

오늘 생명의 삶의 제목이 인상적입니다. < 거룩함이 일상이어야 합니다 >

우리는 출애굽기 22장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이 엄격하게 규정하고 있는 율법적인 규례들이 나옵니다. < 너희는 반드시 이렇게 하라 >라고 분명한 레귤레이션(regulation)과 팔러시(policy)를 주고 있습니다.


특히 < 절도에 대한 것, 손해와 배상에 관한 것, 그리고 간음에 대한 것 >에 대한 분명한 규정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 31절에 이렇게 하나님께서 엄격하게 우리에게 규정을 정해주시는 이유에 대해서 짧은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는데 그것은 (22:31) 너희는 내게 거룩한 사람이 될지니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을 예배하기 합당한 거룩한 삶과 거룩한 삶으로 이어지길 원하십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체질인 동시에 우리의 체질이어야 합니다.

몸이 좋지 않은 분들이 좋을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 체질 개선 >을 시도합니다. 그래서 음식 조절하고 음식을 가려서 먹으므로 소위 < 팔 체질 >에 해당되는 음식들을 먹고 그렇게 자신의 < 체질을 개선 > 하죠. ~


저도 저의 체질을 알고 싶어서 한의사 선생님께 물었던 저를 보고 < 목양 체질 >이라고 하더라구요. <목양체질은 채소보다는 육류가 좋고.. 찬 음식보다는 따뜻한 음식이 좋고 냉찜질보다는 따뜻한 목욕이 좋은 체질입니다. >.

실제로 제가 나도 모르게 그렇게 체질에 맞고 살고 있더라구요. 삼겹살을 먹을 때 왠만해서 쌈이나 야채를 먹지 않고 있고 가능하면 따뜻한 목욕하는 것을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참 < 체질 >대로 살고 있구나 싶었습니다.

육신의 체질도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주지만 우리의 영적인 체질을 어떠해야 할까요?


우리가 우리의 일상에서 계속 개선을 시도해야하는 영적 체질이 있다면 그것은 < 거룩 체질 >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가장 중요한 체질이면 성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닮아가고 그분을 경외하면 할수록 우리는 거룩한 것과 친해주고 거룩함에 익숙해져 있어야합니다


특히 성경에 나오는 레위기의 제사법이나 율법의 규례들의 이면의 정신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닮아가도록 우리의 삶에 엄격히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같은 율법의 규례들이 나오는 본문을 보면서 반드시 놓치지 말고 묵상해야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규례를 주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그리고 어떤 의도에서 이렇게 디테일하게 우리에게 금지명령을 내리시고 엄격히 말씀하고 계신가 ? ”를 생각해보야합니다.

 

흔히 큐티가 어려워지고 힘들어질 때는 오늘같은 재미없고 어려운 본문을 만났을 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큐티에서 놓치기 쉬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중심적 큐티 묵상>이 아니라 <자기 중심적 큐티묵상>을 하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같은 이런 본문을 대할 때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하나님에 대해서 깊고 풍성하게 묵상을 해야 합니다.

 

오늘 출애굽기 22장은 십계명의 실천편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도둑질에 대한 규례, 손해와 배상의 규례는 십계명 8계명의 실천편이고

간음 및 수간에 관한 금지 규례는 십계명 7계명의 실천편이고

무당금지. 우상숭배 금지의 규례는 

십계명 1.2계명의 실천편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일종의 아펜텍스와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규례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이 공의와 정직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들의 육적, 영적 순결을 요구하고 계시면 약한자를 돌보시고 배려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너희가 만약 거룩하게 살길 원하고 너희가 만약 거룩한 사람이라면 .....

너희는 하나님의 거룩함에 어울리는 삶의 내용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너의 삶이 자신 뿐아니라 다른사람에게 너희의 거룩이 보여져야한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몇가지 규례를 보면

 

처녀를 범한자의 형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처녀는 그녀의 아버지의 소유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래서 처녀를 강간하는 것은 그녀의 아버지의 소유권을 침해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처녀를 강간한자는 그녀의 아버지에게 일정한 결혼 지참금 오늘 본문에 보면 <빙폐>라고 되어 있는데 .. 약 은 50세겔을 지불하고서 그 처녀와 결혼해야마 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약 처녀의 아버지가 결혼을 반대할 경우에는 할수 없이 돈만 주어야합니다. 일종의 배상이죠.

 

무당을 급합니다. 하나님을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을 금하고 있는 것이죠.

짐승과 행음하는 것을 금합니다. 이것을 < 수간 >이라고 말하죠..

이러한 무당이나 수간의 배경에는 애굽적인 종교적인 습관과 관련이 있습니다. 당시 애굽에서는 사람과 짐승과의 교합이 종교 의식중의 하나로 행해졌습니다.

하나님에 어울리지 않는..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에 전혀 어울리지 않은 삶의 옛 습관들... 애굽적인 체질 개선을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 이방 나그네, 과부와 고아 >들에 대해서 잘 대우해줄 것을 말씀하십니다. 사회적 경제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규정은 < 엄격함과 사랑 >이라는 두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 사회 정의 SOCIAL JUSTICE >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 >들에 대해서 공동체적인 관심을 기울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 최근에 등장하는 신학용어중에 교회의 공공성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안에서 교회의 공동체성은 갖고 있는데 교회의 공공성이 없다는 말을 합니다.

 

신국원 교수(총신대) < 그리스도인이 기독교적 시민교양과 샬롬의 비전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도 다른 세계관이나 종교적 확신을 가진 이들에 대해 공평하고도 예의 바른 자세를 지녀야 한다. >


성석환 교수(장신대) < 교회가 사회문화적 책임에 있어 공공적 역할을 해야 함에 동의하며 교회 안에만 머물고 있는 능력과 자산들을 사회가 원하는 용어로 바꾸어 원래의 복음적 가치를 알려주는 것이 교회가 감당해야 하는 공적 역할 >있다고 강조했다.



작년에 2010년 베스트 셀러 책중에 하버드 대학 마이클 샌델 교수 < 정의 >라는 책이 열풍을 일으켰습니다.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를 통해 우리 사회에 정의 열풍을 일으킨 마이클 샌델 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소크라테스식 대화라는 독특한 강의법으로 강의를 합니다. 




그의 정의론강의는 하버드대 역사에서 가장 많은 학생이 수강한 과목 가운데 하나인데 지난 20년간 하버드 학생들 가운데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를 수강한 학생 수는 14천명에 이를 정도입니다.

이미 오늘 출애굽기에 정의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공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정의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움과 공정함이 내 삶에 거룩함으로 드러나고 따뜻한 배려로 실행되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거룩함에 충실하게 내 삶이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거룩함과 사회정의가 서로가 다른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나의 거룩함으로 나아가면 자연스럽게 내 삶과 사회가 거룩하게 되는데 관심을 갖게 됩니다.


바로 사회정의로 이어지는 것이죠... 세상밖의 교회로 나아가고 일상의 교회로 나아가는 일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고 우리가 거룩한 사람임을 나타내는 길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와 교회 비난받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이원론적인 사고방식과 예배적 거룩함이 내 삶의 거룩함으로 이어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교회안에서 거룩함이 세상에서 거룩함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물어야합니다. <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당신은 누구입니까? > . < 당신은 예배의 거룩함만큼 다른 세상사람이 당신의 거룩함을 느끼고 있습니까? >


우리의 관심은 어떻게 거룩한 백성이 되느냐?(BECOME) 이 아니라

우리의 관심은 이 거룩한 백성이 된 지위를 어떻게 일상생활속에서 계속 유지할수 있느냐?(TO BE)의 문제입니다


어쪄면 이것은 < 행함과 믿음 >과 관련이죠..

 

(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오늘 본문에 보면... 세상 사람이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행동을 벗어난 삶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돈을 꾸워준 채주가 변리를 받고 전당을 잡는 것은 상식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에 < 자비함 >있어야한다고 강조합니다.


약자와 가난한자를 향한 배려와 관심이 바로 거룩의 실천입니다. 


그것이 곧 사회 정의로 이어집니다. 너무 교회중심에 머물다보니 교회는 거룩해지는데 세상은 악해지고 ... 교회나 그리스도인을 생각하면 종졸하고 옹색하고 궁색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교회는 헌금을 모으는 일에 익숙하지만 그 헌금을 세상에 흘려보내는 일에는 주저하고... 익숙해 있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 중에 참 인상적인 구절이 나옵니다.


(22:22)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22:23)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을지라

 

어제 송목사님이 새벽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 미움없이 견책하고 견책하며 사랑하라 >

 

지난번 이지선 자매님 간증을 들으면서 많은 생각과 묵상을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도 시편 40편의 말씀을 좋아합니다.


[40:1-3]

(40:1)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40:2)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40:3)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하나님은 연약한자들... 힘들 이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연약한자들.. 힘든 이들에게 하나님처럼 다가가야 합니.

제가 병원에 있을 때 많은 성도들의 병문안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위로가 되는 말을 해주고 가는 사람이 있고... 정말 위로가 안 되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위로의 한마디 말은 문자가 왔습니다.


동생아 미안하다 형이 힘이 못되어 줘서...내 동생 힘내라 ~~ ” 전라도 ...

자네는 걱정하지 말게 ... 요즘 좋은 약 많이 나온께 ... 꼭 좋아질 거이네

 

다른 사람에게 위로하고 격려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항상 우리는 자신의 삶이 부정적이 사람에게 긍정적인 위로의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세상을 위로하고 세상을 격려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몇년 동안 < 정의 >라는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또하나의 주제가 히트를 쳤습니다. 바로 < 위로 >입니다.


우리는 < 정의와 위로 >를 함께 행해야하는 거룩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3가지를 명심해야 합니다.

1/ 거룩한 하나님은 지금 나의 삶의 내용을 들여다보고 계신다.

2/ 거룩한 하나님은 나의 삶의 내용이 거룩함과 어울리기 원하신다.

3/ 거룩한 하나님은 나의 삶의 거룩함이

다른 사람의 정의와 위로에 사용되길 원하신다.

 

< 묵상하는 질문 >------------------

1) 너는 얼마나 하나님이 나의 삶을 들여다고 계심을 느끼고 살고 있니?

 

2) 너는 약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무엇을 나누어주면 살고 있니 ?

 

3) 너는 너의 영적인 거룩함으로 나아는 노력만큼이나 너의 주변의 사람들에게 너의 거룩함을 보며 살고 있니?

 

GSC 새벽큐티설교 <출애굽기 7:14-25> 

제목: 여호와의 각본있는 드라마. 10가지 재앙 / 찬양 : 찬송가 55


[7:14-25]

(7: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 백성 보내기를 거절하는도다

(7:15) 아침에 너는 바로에게로 가라 보라 그가 물 있는 곳으로 나오리니 너는 나일 강 가에 서서 그를 맞으며 그 뱀 되었던 지팡이를 손에 잡고

(7:16) 그에게 이르기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왕에게 보내어 이르시되 내 백성을 보내라 그러면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섬길 것이니라 하였으나 이제까지 네가 듣지 아니하도다

(7:17)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니 네가 이로 말미암아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볼지어다 내가 내 손의 지팡이로 나일 강을 치면 그것이 피로 변하고

(7:18) 나일 강의 고기가 죽고 그 물에서는 악취가 나리니 애굽 사람들이 그 강 물 마시기를 싫어하리라 하라

(7:1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에게 명령하기를 네 지팡이를 잡고 네 팔을 애굽의 물들과 강들과 운하와 못과 모든 호수 위에 내밀라 하라 그것들이 피가 되리니 애굽 온 땅과 나무 그릇과 돌 그릇 안에 모두 피가 있으리라

(7:20)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행하여 바로와 그의 신하의 목전에서 지팡이를 들어 나일 강을 치니 그 물이 다 피로 변하고

(7:21) 나일 강의 고기가 죽고 그 물에서는 악취가 나니 애굽 사람들이 나일 강 물을 마시지 못하며 애굽 온 땅에는 피가 있으나

(7:22) 애굽 요술사들도 자기들의 요술로 그와 같이 행하므로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7:23) 바로가 돌이켜 궁으로 들어가고 그 일에 관심을 가지지도 아니하였고

(7:24) 애굽 사람들은 나일 강 물을 마실 수 없으므로 나일 강 가를 두루 파서 마실 물을 구하였더라

(7:25) 여호와께서 나일 강을 치신 후 이레가 지나니라

====================================================

제목: <출7:14-15> 여호와의 각본있는 드라마. 10가지 재앙

 

이제 본격적으로 < 신라고 불리우는 이집트의 파라오와 하나님이 불러주신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대결 >이 시작됩니다. 그 결정적인 대결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10가지 재앙입니다.

 

작년에 개봉된 영화중에 성경을 내용을 소재로한 < 엑소더스 >를 보면 이집트의 람세스와 모세의 관계와 심리를 묘사하면서 특히 아주 사실적이고 스팩타클하게 묘사하고 있는 장면이 < 열가지 재앙의 장면 >입니다



이 영화가 다소 헐리우드 영화적인 요소를 가미하다 보니 성경적인 왜곡의 위험성은 있었지만 대체로 모세의 고뇌, 람세스의 고통 그리고 이스라엘의 10가지 재앙, 출애굽장면, 홍해사건등을 잘 묘사했습니다. 완벽하게 성경의 내용을 그대로 재현했다고는 볼수 없지만 일정부분 우리가 감이 오지 않는 10가지 재앙이나 홍해사건과 같은 장면은 아주 컴퓨터 그래픽으로 묘사될수 있는 그런 놀라운 장면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애굽의 노예로 도저히 상상할수 없고 상상해본적도 없는 하겠다고 모세가 람세스에게 나아갑니다. 그래서 이일을 위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아론을 준비시키십니다. 모세를 부르시고 아론을 동역자로 붙여주십니다. 여러 번에 걸친 모세의 주저함에도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자신을 누구인지 보여주시면서.. 용기와 동기부여를 해주시면서 까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모세가 여러 가지 핑계를 되면서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자신이 아무일도 할수 없음을 말할 때마다 마치 이렇게 말씀하는 것 같았습니다.


모세야 ~ 내가 따로 생각해놓은 것이 있으니.. 염려말고 내가 하자는대로 하자 ! 내가 다 책임질테니까. 나만 믿고 따라와. 알았지 라고 하는 확신을 주고 계십니다.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이 구원의 일을 맡기시는데에는 하나님의 주도면밀한 계획과 각본이 있었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짜여진 각본대로 10가지 재앙이 진행되고 있음을 볼수 있습니다.

 



흔히 어떤 놀라운 일들이나 사건이 예기치않게 펼쳐지는 것을 각본없는 드라마 라고 합니다. 성경에 일어나는 많은 일들은 처음 대할때는 마치 각본없는 드라마 처럼 놀랍고 신기한 일들과 가득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유심히 보면 성경은 철하게 각본있는 드라마 입니다

하나님의 주도면밀하신 계획과 의도속에 진행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여호와, 곧 야훼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시간과 공간의 제한된 관점에서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려 합니다. 우리는 시간의 시작도 끝도 모르면서 제한적인 이성과 사고를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이해하려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이해되지 않은 성경의 많은 이야기들이 불합리하고 불공평하고 모순된 이야기처럼 들려집니다. 마치 각본없이 갑자기 그렇게 만들어진 이야기처럼 꾸며낸 소설처럼 보여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경속에 많은 이야기들은 하나님의 각본 있는 드라마입니다. 


성경이라는 제한된 인간의 글자로 다 담기에는 너무 방대하고 놀라운 드라마이기에 우리가 볼 때 모순투성이로 보일뿐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이 10가지 재앙을 마치 각본없는 드라마처럼 이해했습니다. 하나님이 바로와의 한판대결이 마치 흥미진진한 1라운드부터 10라운드까지의 권투경기처럼 아주 극적인 대결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릴 때 성경을 읽으면서 마치 모순처럼 느끼는 성경구절을 발견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말씀이었습니다. 여기서 마음이 강퍅케 되었다는 말은 마음이 굳어지고 완강하게 거부했다, 고집을 피웠다. ”는 의미입니다.

처음에는 바로가 자신의 마음을 강퍅하게 했다고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했다고 강조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 7장 전 반분에도 이러한 말씀이 등장합니다.

(7:3)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내 표징과 내 이적을 애굽 땅에서 많이 행할 것이나

(7:13)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7: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의 마음이 완강하여 백성 보내기를 거절하는도다

 

이러한 표현은 출애굽기 초반에 14번이나 등장합니다.

<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내보내지 아니하였으니..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니 ...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들 보내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

 

이것은 <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도록 만드셨다기 보다는.. 바로의 완악한 마음 그대로 내버려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


마음은 < 감정의 자리 / 지식과 지혜의 자리 / 도덕과 양심의 자리/ 자신의 존재을 대표합니다. > 바로 그러 마음이 완악해 있었습니다.

 

(14:8) 여호와께서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의 뒤를 따르니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나갔음이라

 

바로의 완악한 마음과 모세의 완전한 믿음 대결을 펼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의 완악한 마음안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없습니다. 자신이 신라는 불리우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철적하게 자신안에 있는 완악한 마음을 다루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신을 벗고 서서 그분의 임재를 경험하고 지팡기 하나로 나아갑니다.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심을 입고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면면서 나아갑니다. 바로는 마음의 완악한대로 나아가지만 모세는 여호와의 명령대로 행합니다.

 

하나님앞에 서있는 모세과 하나님이 되려는 바로 그리고 하나님을 부리려는 마술사의 대결입이 펼쳐집니다. 이제 개봉박두..

 


10가지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이루어가시는데... 구지 10가지 재앙이 필요했을까?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만 강퍅하게 하지 않았더라면 구지 그렇게 어렵고 복잡하게 일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리고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해놓고 왜 그 강퍅해지 마음을 깨뜨리기 위해서 10가지 재앙을 사용하셔야만했나? 이거 북치고 장고 치시네... 짜고 치는 고스돕같네... 라고 생각하고 마치 성경의 이야기가 모순된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모든 상황와 이야기속에는 하나님의 의도된 계획이 담겨있습니다.

이미 모세를 부르실때부터 여호와는 모세를 부르신것도 자기 백성의 신음하는 소리를 듣으시고 이집트왕 파라오에서 구원하실 계획을 설명하십니다. 그때 오로지 한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것은 내백성과 애굽왕 바로로 하여금 내가 여호와 인지 알게 하리라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7:17)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니 네가 이로 말미암아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볼지어다 내가 내 손의 지팡이로 나일 강을 치면 그것이 피로 변하고

 

모세가 당신을 누구라고 할까요 할때에 자신을 < 여호와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분명히 말하고 이 열가지 재정을 진행하면서 하나님의 짜여진 의도와 각본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은 < 하나님의 하나님됨을 보여주고 자신이 여호와되심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

 

이스라엘이 지배를 받고 있던 애굽시대에는 바로왕이 신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바로는 신이라고 불리우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이집트에 피라미드와 미라를 보면 사람들이 파라오를 어떻게 신으로 추앙했는지를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애굽에는 수많은 신들이 존재했고 그 신들이 자신들에게 풍요와 안식과 번영 그리고 행복을 준다고 믿었습니다. 나일강에 나일강의 신이 있었는데 크눔(Khnum, 나일의 수호신), 하피(Hapi, 나일의 악령이며 다산의 신), 오시리스(Osiris, 지하세계의 신) 라는 신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땅과 식물과 동물을 지배하는 신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러한 문화적인 배경과 종교적인 배경속에서 10가지 재앙이 하나님의 각본있는 드라마처럼 그리고 잘 짜여진 의도와 목적을 따라 실행되었습니다.

10가지재앙 ( ---------)

 

하나님께서 열 가지 재앙들을 애굽에 보낸 이유는 5가지로 보는데 다음과 같다.

1. 구원의 도구 :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3:8,19-20, 6:1,5)

 

2. 여호와의 계시의 도구 :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여호와의 능력을 알게 하기 위해서 (6:7, 10:2) 이 땅(earth)은 애굽 신들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에게 속하였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9:16,29, 11:7, 24:1)

 

3. 가나안을 향하는 광야생활의 확신과 믿음의 도구 :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겠느냐고 물은 바로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5:2, 7:5, 8:22, 9:14)

 

4. 애굽의 신들을 벌하기 위한 도구 :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시기 위해서 (12:12, 33:4)


(12:12)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실제로 열가지 재앙을 실행할 때.. 바로의 편에서 함께 등장한 사람들은 바로 애굽의 신들을 섬기는 술객들과 박수들이었습니다. 소위 마법사 주술사들이었습니다.

 

또한 모세와 아론이 행했던 몇가지 재앙들을 그들도 흉내내고 있었다는 것을 보아도 그 당시 애굽종교의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애굽의 술객들도 그들의 술법으로 피와 개구리의 재앙을 흉내 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술객들이 이 두 가지 재앙을 흉내 내는 것은 허용하셨지만 되돌리는 것은 허락치 않으셨습니다.

 

처음에는 애굽의 술객들도 대단한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러나 점점 그들의 능력은 무력해집니다. 10가지 재앙을 진행하는 과정을 보면 그 바로와 함께한 관원, 술객들 박수들이 반응이 점점 바뀌고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도 이제 여호와라는 존재를 알기 시작했다는 뜻이죠... 결국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는 것을 동의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과 애굽의 신들과의 맞짱. 대결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애굽의 열재항인 애굽에서 섬기는 신들과 관련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 재앙은 피재앙은 애굽인들이 생명의 근원으로 경배하고 있던 나일(Nile) 강 자체를 향하여 내려졌다. 이 재앙은 크눔(Khnum, 나일의 수호신), 하피(Hapi, 나일의 악령이며 다산의 신), 오시리스(Osiris, 지하세계의 신, 피로 변한 나일 강물은 그의 피로 여겨졌다) 등을 포함한 많은 강의 신들에게 내려진 것이다.

 

나일강이 변질되는 것은 생명의 근원. 풍요의 근원이 손상을 입는 것입니다. 이집트 문명을 나일문명이라도 말하는 것처럼 그당시 강은 풍요와 행복, 문명의 상징적인 곳입니다. 바로 그 첫재앙은 나일강을 못쓰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나일강이 피로 물들었다는 것은 그들에게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자신의 생명줄이 끊어 졌다는 것이고.. 이제 우리는 끝장났다고 .. 살길이 없어졌다고 하는 결정적인 타격이었습니다.

 

어떤 학자는 그냥 초자연적인 기적이 아니라 자연적인 현상으로 나일강이 범람해서 그 땅속에있는 흙이 붉게 보여서 피처럼 보였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 나일강 범람의 결과로 개구리가 생기고 이와 파리가 생기고 피부명과 같은 탄저병이 생겨서 많은 죽었다 라고 하는 자연적인 현상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론은 이 열가지 재앙을 다 설명해내지 못합니다.

 

애굽에는 땅과 만물에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신들이 존재합니다. 그런 신들은 모두다 그들에게 행복과 안녕을 주는 신으로 여겨왔습니다.

바로 이 10가지 재앙이 그러한 신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은 각본있는 드라마를 실행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삶은 온통 모순 투성이처럼 보입니다. 내가 바라보는 삶은 살면 살수록 순리라기보다는 모순같이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속에 번민하고 고민하고 두려워합니다.

 

우리의 삶에도 이러한 모순된 삶속에 숨겨두신 하나님의 각본있는 드라마가 있을 기억해야합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여호와인 것을 알게하심입니다. 그분을 경외하고 그분을 생각하게 하는 도구입니다.

 

여호와. 야훼는 < 스스로 계신자 >입니다.

< 나는 나다 >입니다. I am WHO I AM입니다.

나는 미래의 나다 < I will be who will be >

과거의 내가 미래의 내가 될 것이다. < I will be what I WAS >

그는 언제나 그분 자신이시다.< He is what he is >

여호와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여전히 우리에게 계시하십니다.

< 나는 나다 >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 너 나모르니? 너가 나인줄 알게 보여줄게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 삶에는 각본있는 드라마가 있음을 생각해야합니다.

그것은 나도 모르게 만들어 놓은 신들을과 하나님과의 대결을 만들것입니다.

내 마음의 열가지 재앙을 행하시기 전에 우리는 고백해야합니다.

< 당신은 나의 여호와 이십니다. 당신의 나의 야훼이십니다. >

 

그 외 다른 재앙과 관련된 애굽의 신들


두 번째 재앙인 무수한 수의 개구리(frog) 재앙은 풍요로운 곡식(나일의 물로부터 유래된)과 다산의 상징인 애굽의 여신 헤퀫(Heqet)을 공격했다.

 

세 번째 재앙인 땅의 티끌이 이(lice, or gnats or mosquitoes)로 변한 재앙은 땅의 모든 신(예로 Akhor)들에 임하였다.

 

네 번째 재앙인 파리(flies) 재앙은 케프리(Khepri) 라고 하는 그들이 좋아했던 쇠똥구리(scarab, dung beetle) 신에게도 임했다.

 

다섯 번째 재앙인 생축(livestock, 이것들은 식량, 우유, 의복 및 운송을 제공한다)들의 악질 재앙은, 신성한 황소신 아피스(Apis), 암소 모양의 어머니 여신으로 다산의 상징인 하토르(Hathor), 다산의 상징인 황소신 므네비스(Mnevis), 암소 임에도 머리에 뿔을 가지고 있는 신들의 여왕 이시스(Isis) 등을 직접적으로 공격하였다.

 

여섯 번째 독종의 재앙은 하이크(Hike)나 토쓰(Thoth, Imhotep) 등과 같은 마술과 치료의 신들의 무기력함을 보여준다. 술객들을 독종으로부터, 즉 여호와의 능력으로부터 막아줄 수 없었다.

 

일곱 번째 재앙인 우박 재앙과, 여덟 번째 재앙인 메뚜기(바람에 불려온) 재앙은 곡물들을 파괴하였고, 날씨를 주관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여러 하늘 신들, 예를 들면 공기의 신인 슈(Shu), 습기의 신인 테프눗(Tefnut), 하늘의 신인 누트(Nut) 등과 같은 신들을 공격하였다. 곡물들의 손실은 초목, 농사, 수확의 신들, 예를 들어 겝(Geb), (Seth) 등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아홉 번째 재앙인 흑암의 재앙은 애굽 최고의 신인 태양신 라(Ra), 또는 아몬-(Amon-Ra, 철자를 Re로 쓰기도 함)를 공격하였는데, 그 신들은 땅에 빛과 따뜻함을 가져다 주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또한 호러스(Horus), 세커(Seker), 케프리(Khepri), 무트(Mut), 누트(Nut) 등과 같은 다른 하늘 신들도 무기력함이 드러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장자가 죽는 열 번째 재앙은 바로(Pharaoh)의 신성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애굽인들은 바로를 생명을 주는 오시리스(Osiris) 신과 태양신의 화신(incarnation)으로 믿고 있었다. 바로의 임무는 신들의 은총을 유지하고, 질서의 여신 마아트(Ma'at)의 법을 집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아들의 죽음도 막지 못하는 무능한 자였음이 드러났다. 그의 아들은 신성한 통치자의 자리를 계승할 자였고, 애굽 땅의 어떤 아들과도 다른 아들이었다. 따라서 여호와만이 홀로 죽음과 삶을 주관하시는 절대적인 분이시라는 것이다.

 

< 묵상하는 질문 >------------------

1) 나는 내 삶이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생각하는가?

각본 있는 드라마라고 생각하는가?

2) 나는 내 삶에 하나님을 깨닫고 그분을 여호와로 인정하면 살고 있는가?

 

3) 나는 내 삶속에 만들어 놓은 나의 우상들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가?

 

[  경상도버전 사랑한다 말할까? ]


1.좋아한다 하까예,사랑한다 하까예 언지예 어데예 아이라예 지는여자아인교


2. 만나자고 하데예 결혼하자 하데예 언지예 어데예 우짜까예 니맘대로 하이소


3. 결혼하고 나디만 마음도 변하데예 싫어지면 그만이지 바람은 왜 피아예 내는 우째 하라꼬


4. 헤어지자 하까예 갈라서자 하까예 언지예 어데예 우짜까예 다 내팔자 아닌교 



@ 심수봉의 사랑한다 말할까? 곡에 

    맞추어 불러 보시면 참미있심더.


* 또다른 버젼 *


"사랑한다 카까예~ 좋아한다 

카까예 엄마야 우짜꼬 우짜까예 지는 여자 아임니꺼?~~


 사랑한다 카데예~~ 뽀뽀하자 카데예~ 

엄마야 우짜꼬 우찌해예~마음데로 해뿌이소~~


 사랑한다 그케놓고 엉가이 살다보이 

변하데예 살기시르마 안살마 그뿌니제 페기는 와이리페예



 헤어지자 케뿌까예 찌져지자 케뿌까예? 은지예 아임니더 우찌케예 다 팔자소관 아임니꺼~~~~~~~






옛날 로마에 소크니스라는 그리이스 태생의 아름다운 처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영예의 화관을 만들어서 팔고 있었습니다.


 소크니스는  어찌나 솜씨가 좋은지 시인이나 화가들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많은 주문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되자 마음씨 나쁜 동업자가 그녀를 질투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이 고약한 동업자는 소크니스를 죽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태양신 아폴로는 그녀가 그의 신단을 아름답게 장식해 준 뜻을 가상히 여겨 그녀를 작은 꽃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것이 카네이션이었고, [시인의 패랭이꽃]이라는 별명도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어버이날에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게 된 관습은 그 유래를 미국에 두고 있습니다. 


미국 웨브스터 마을에 자비스라는 부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부인은 동네의 아이들을 자기의 친자식처럼 보살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렇듯 자애로운 부인이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부인이 사망한 지 한 해가 지나자 아이들은 부인의 고마운 은혜를 위로하기 위해 추도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때 부인의 딸인 안나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영전에 흰 카네이션을 바쳤고, 이 어린이들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자 뜻 있는 사람들이 해마다 그날을 기념해 주게 되었습니다.


 이 아이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그 후 온 세계에 퍼졌고, 마침내는 어머니날이 만들어져 모두들 카네이션을 어머니에게 바치게 된 것입니다.






화내기 전에 생각해야 할 10가지 


1. '..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버린다.


화가 났을 때'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 사람이 나에게 최소한 이렇게 했어야만 해' 같은 

비합리적인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한다.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이란 없고 '..해야만 하는 사람'도 없다.

'내가 삼촌 뻘인데' '내가 그 동안 부장님께 어떻게 했는데' 라는 

생각도 자신의 기준일 뿐이다.


2. 극단적인 표현을 삼간다.


"저 사람과는 끝이야!" "열 받아 미치겠어" 대신

"기분이 좋지 않다"고 말하자. 

표현에 따라 기분도 바뀐다. 


3. '나 같으면 절대..'라는 가정은 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해 그 사람이 '나 같이' 행동해야 한다는 근거는 없다. 

그 사람 입장에선 또 다른 사정이 있을 수 있다.


4. 가끔은 성악설을 믿는 것도 도움이 된다.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하다. 

사람들이 가끔 부당해 보이는 게 당연하다고 받아들이자. 

'난 이런 거 못 참아'라고 생각해 봤자 스트레스만 커진다. 


5. 사람과 행동을 구별한다.

특정 행동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행위자 자체를

'용서할 수 없는 나쁜 사람'으로 규정함으로써 

자신의 분노(또는 욕설과 폭력행사)를 정당화하려는 경향을 주의한다.


6. 오늘 낼 화를 내일로 미룬다.

흥분상태에서는 실수를 하기 쉽다. 

당장 화 내고 싶어도 일단 미뤄 둔다. 

차분한 상태로 대응하는 게 언제나 더 이롭다. 


7. 화를 내는 게 어떤 효용이 있는지 생각한다.

대부분의 경우 분노의 표출은 인간관계와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화내봤자 얻는 게 없다고 생각되면 즉각 단념한다.


8. 제3자에게 화풀이하지 않는다.

화가 났을 때는 괜히 타인에게 화풀이함으로써 갈등을 2배로 키우기 쉽다. 

'난 화가 났으니까 이래도 된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외톨이가 된다. 


9. 좋았던 기억을 떠올린다.


어떤 사람에게 화가 났을 때 

그 사람과 즐거웠던 추억을 떠올리고 그 기억에 몰두함으로써 

나쁜 기억을 몰아내려고 노력한다.


10. 남의 일처럼 생각한다.


내가 주인공인 드라마를 보는 기분으로 

한 발 떨어져 생각하면 

비극적인 상황도 낭만적이거나 코믹하게 느껴진다





'버럭버럭' 화 잘내는 이유 있다 


[메디컬투데이/헬스메디] 화낼 이유가 아닌데도 화를 잘 내는 사람. 개인의 성격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사소한 일에도 유난히 화를 잘 내는 사람이 있다.



적당한 화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스트레스를 푸는데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벌컥벌컥 화를 내는 사람은 어느새 상대방을 난감하게 만들기도 하며, 피곤하게 하기도 한다. 



화를 내는 이유는 여러 가지. 그 원인으로 상황마다의 환경적인 요인이 가장 많겠지만 특별한 생물학적인 이유가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미국 국립정신건강연구소(NIMH)의 신경정신과전문의 앤드리어스 마이어-린덴버그 박사에 따르면 사람과 동물의 충동적 공격성과 연관이 있는 모노아민 옥시다제A라는 변이유전자를 가진 사람이 분노와 두려움을 관장하는 뇌 부위가 보통사람보다 작아 화를 더욱 잘 내게된다. 



이 때문에 뇌 부위의 활동성은 더 강한 반면 충동적 반응을 억제하는 능력은 약하므로 사소한 자극에도 쉽게 화를 낸다는 것. 



이에 국립서울병원 정신과 강시현 전문의는 “모노아민 옥시다제A 유전자는 뇌신경세포사이에 신호를 전달하는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과 ‘노에피네프린’ 분해효소를 만든다”며 “이 유전자가 변이되면 이러한 효소가 적게 생성돼 세로토닌이 증가하면서 뇌 발달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설명한다.



이어 강 전문의는 “충동이나 불안 화를 조절하는 기능은 뇌의 편도라는 부분에서 관장한다”며 “과거에 경험에 의해 이 편도에서 화의 수위를 조절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즉, 편도 부위는 주위 자극이 받아들여졌다면 이에 화를 낼 것인지 아닌지를 해석하는데 모노아민 옥시다제A 유전자 변이로 신경전달물질이 변해 작아지면 활성도가 증가해서 사소한 자극에도 화가 난다는 것. 이 때문에 충동성 기분불안장애 등이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강 전문의는 “이러한 생물학적 원인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며 다양한 환경적인 요인에 따라서도 화를 잘 내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한편,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잘 나타난다는 화는 한의학적으로 오장육부와 연결된 12개의 경락에서 기인한다. 



대구한의대부속 대구한방병원 한방신경정신과 정대규 교수는 "내부적으로 필요이상의 자극을 받으면 교감신경이 흥분되는데, 이때 외부 자극이 들어오면 합당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화를 내게 된다"며 "이는 울체되거나 긴장된 상태가 오래돼있어서 나타나는 결과이다"고 설명한다.



한의학적으로 경락은 기운을 좌우하는 통로, 우리의 몸에는 12개의 주요 경락이 있고 보조경락 8개가 존재한다. 



이 12개의 경락은 오장육부와 연결돼 있는데 경략의 통로가 좁아지거나 막히면 화를 잘내게 된다. 결국 경락의 통로 자체가 긴장을 잘하는 사람이다. 



정대규 교수는 "화를 잘낸다는 것은 전체적으로 관찰했을 때 12경락에 문제가 있는 것이며 이는 세부적으로 간장과 관계돼 간장질환이 있는 사람은 화를 좀 잘 내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정 교수에 따르면 한의학에서는 정신적 요인과 질병의 관계를 중요시 하는데 감정상의 표현을 '희노우사비공경'의 칠정이라 한다. 즉 칠정은 내장기관에 영향을 주어 질병을 발생시키는데 이에 화는 간과 연관된다는 것. 



이로써 한의학에서는 화를 잘내는 사람은 간 기능을 회복시켜주면 화를 다스릴 수 있으며, 무엇보다 몸 전체의 기능을 원활히 해 여유로운 생활이 중요하다고 본다. 



정대규 교수는 "일반적으로 외부자극에 의해 감정의 변화가 다르게 나타나기 마련이지만 외부 자극이 동일하다고 해도 그 자극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 다른 감정의 변화를 나타낼 수 있으며, 감정의 변화가 같다고 해도 정도에 따라 특징적 현상들이 나타난다"고 강조한다.




분노의 개념


분노란 신체적 불만, 좌절 혹은 자존심 상실 등과 같은 분노 유발 사건으로 인하여, 분노 표적에 관한 사고 혹은 신념 등과 같은 인지즉 측면과, 혈압 상승 및 심장 박동수의 증가 등 생리학적인 변화를 수반하고, 행동적 혹은 언어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미미한 짜증으로부터 극단적인 격노까지의 비교적 강한 강도를 지니는 불쾌한 내적 경험이다. 


분노의 영향


분노는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임에도 불구하고 분노가 어떻게 경험되고 표현되는가에 따라 개인의 신체 건강, 정신건강, 문제해결 그리고 인간관계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분노 경험시에 신체, 생리적 변화가 생긴다(동공 확대, 산소 소모 증대, 혈압 상승, 심장 박동수 증가, 심장의 산출 증대, 근육 수축력 증대, 특이한 흉부 흥분, 머리에 땀, 입 건조, 눈 작열, 이마 주름살, 입술 열림, 얼굴 상기), 나아가 이것은 소화불량, 과긴장, 고혈압, 심장 질환, 종양, 관절염, 천식, 암의 발생과 관련될 수 있다. 또 일반적으로 분노를 경험할 때, 불안, 거부감, 상대에 대한 죄의식, 당혹감 등 분노경험시의 불쾌한 정서를 경험할 수 있다. 분노를 경험하지 않고 억제하면 우울이나 무능력감을 더 느낄 수 있다. 적절한 정서는 문제해결을 위한 노력을 하도록 동기를 부여하지만 심한 정서 경험은 정상적인 문제 해결을 방해한다. 감정에 사로잡혀 있어서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것을 방해한다. 또 자신이 감정에 북받쳐 하는 행동과 말이 상대를 자극하게된다. 따라서 상대도 문제 해결보다는 그의 태도에 불쾌감을 느껴서 자신의 행동을 바꾸거나 대안을 모색해 보려 하지 않는다. 분노로 인하여 어떤 사람은 대처된 행동(언어적 보복, 비꼬기, 빈정거림, 일시적 폭발)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공격적인 분노 표현을 한다. 분노를 강하게 경험하는 순간에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결과를 생기게 하는 힘이 약화되어 자신의 행동 통제력이 약화되고 다른 문제를 유발할 가능성이 많다. 순간적인 감정 폭발은 상대나 사물에 대한 손상을 입힐 수 있다,. 그리하여 인간관계를 해치거나 분노가 악순화된다. 분노를 적절히 해소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남게 되면 적개심으로 남게 되어 정상적 발달과업을 저해하거나 투사, 위축, 꿈, 환상 등 정신건강을 해칠 수 있다. 


분노로 야기되는 문제 


나에게 분노가 문제되는가? 다음을 검토해보자.


- 자주 화가 난다고 말하게 되는가? 

- 분노로 인하여 신체적인 영향을 받고 있는가?-소화불량, 혈압상승, 과긴장 

- 분노와 관련하여 불쾌감, 거부감, 죄책감, 당확감, 우울, 불안, 무능력감 등을 느끼는가? 

- 분노 때문에 생각을 집중하는 데 방해가 되는가? 

- 화를 내어서 해결되기보다는 더 인간관계가 악화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가? 

- 화났을 때 고함, 욕설, 비꼬기, 빈정거림 등을 방법을 사용하는가? 

- 분노를 표현하기 힘들어 종종 답답한가? 

- 오래 전에 화난 일이 아직도 남아서 생활을 방해하는가? 

- 화난 일과 관련하여 잠을 못 자거나 꿈을 꾸는 경우가 있는가? 


분노 대처 기술


화가 나면 즉시 3번 심호흡을 하라. 

화가 난 모습을 멈추고 지켜보라. 

이 일에 깔려있는 자신의 기대, 신념, 생각을 찾고, 검토하라. 

화난 일을 하나 생각해 보자. 어떤 일이 좌절되었는가? 바라는 일은 무엇인가? 지금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1) 바라는 일에 기초한 신념은 무엇인가? 


<대표적인 비합리적 신념> 

-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반드시 사랑 받고 인정받아야 한다. 

- 나는 아주 유능하고, 훌륭하고, 성공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 나에게 해를 끼치거나 부당한 사람이 있다면, 그를 비난하고 경멸하거나 나쁜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 

-내가 실패하거나 부당하게 대우받았거나 거절당한다면 그 일을 두렵고, 비참하고, 낭패스럽고, 파멸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 나의 과거는 중요한 것으로 남아 있고, 그 중 어떤 것은 지금도 나의 감정을 계속 지배하여야 하고, 나는 그것에 대해 계속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 인생에서 사람들이나 일들은 반드시 좋은 결과를 보여야 하며, 그렇지 못 할때 는 인생을 낭패스럽고, 괴로운 것으로 보아야 한다. 

- 다른 사람들은 반드시 내가 원하는 바를 알아주고, 채워주어야 하다. 

- 다른 사람들은 내가 가진 생각과 일치하여야 하고, 반드시 그대로 행동하여야 한다. 


2) 이 신념의 근거는 타당성이 있는가? - 성경, 법률


3) 일반사람들에게 있어서 당신이 바라는 것과 같은 결과가 일어날 확률은 어느 정도인가? 

  바라는 결과가 일어나지 않을 확률은 어느 정도인가?


4) 이 생각을 가짐으로써 이득이 많은가? 손실이 많은가? 


상대방에게 말하지 전에 10부터 거꾸로 숫자를 세어라. 그래도 안되면 100부터 다시 세어라 

감정의 높이가 최고에 다다랐을 때 흔히 공격적인 형태의 표현을 하기 쉽고, 이것이 상대방을 자극하여 또한 문제해결을 더욱 어렵게 하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일단 감정이 최고조에 다다랐을 때에는 자신을 균형을 일시적 찾아야 할 필요가 있다. 


가능하면 상대방이 되어 생각해 보라. 

타인이 분노감정을 가지게 되었다면 그 사람 나름으로 충분한 이유가 있다. 따라서 상대방 속으로 들어가서 그 사람이 되어보자. 상대방은 어떤 사건으로 인하여 어떤 생각때문에 분노를 가지게 되었는지 느껴보자, 그리고 상대의 분노에 내가 한 역할이 무엇인지 생각하자. 


화가 나면 자신의 분노가 무엇을 나타내고 싶어하는 것인가를 생각하라. 

분노는 자신의 가치, 욕구, 혹은 신념이 무시, 좌절 혹은 침해당할 때 생긴다. 따라서분노를 경험하는 것은 자존심, 원하는 욕구, 기본적인 신념들을 보호하고, 지키고, 고소하고 싶다는 표현이다. 즉 화를 내는 것은 나의 가치를 지키고 싶다, 나의 욕구를 알아달라, 나의 신념이 중요하니까 무시하지 말라는 표현이다. 


화를 내는 대신에 나는 ** 때문에 화가 났으며, **를 원한다고 말하라. 


<부정적 피드백의 일반원칙> 

- 소리를 낮춘다. 

- 상대편에서의 긍정적인 면을 먼저 인정한다. 

- 개선 가능한 행동만을 부정적 피드백의 대상으로 하여야 한다. 

- 그 행동이 나타났을 때 즉시 하는 것이 좋다. 

- 초점을 그 문제에만 두며 다른 문제로 소급하거나 확대하지 않는다. 

- 객관적이고 구체적으로 하여야 한다. 

- 여러 사람이 있는 데서가 아닌 개인적으로 한다. 

- 자신이 받는 영향과 느낌을 함께 이야기한다. 

- 대안과 대안을 행함으로서 올 수 있는 잇점을 이야기 한다. 

- 피드백 후의 상대방의 느낌과 생각을 듣는다. 


인간의 가치는 불완전한 타인의 평가에 의하여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 나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가 있다는 것을 믿어라. 


나에게도 욕구가 있듯이 타인들도 욕구를 채우려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라는 것을 인정하라. 


나에게도 생각이 있듯이 상대방에게도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으며, 상대방이 나의 기대대로 꼭 해줄 수 없음을 인정하라. 


가능하면 기대수준을 조금 낮추어 보라. 


너무 자주 분노를 경험하면 분노일기를 써라. 


지금도 어떤 사람에 대하여 화가 나 있다면 그에게 보내는 편지를 적어라. 보내지 않아도 좋다. 


가능하면 화내는 일을 그만두고, '긍정적 감정일기'를 날마다 적어라. 

- 보람있었거나 유익했던 일은? 

- 고맙거나 감사했던 일은? 

- 우서웠거나 통쾌했던 일은? 

- 기분 좋았거나 상쾌했던 일은? 

- 재미있거나 즐거웠던 일은? 

- 기뻤거나 다행스런 일은? 

- 반가웠던 일은? 


용서하라 날려버리고 벗어나라. 

상대방의 행동에 화가 났다면 인간이란 본래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라는 것을 상기한다. 구름에 달가듯 잡고 있는 것을 놓아 버리고 나의 사슬로부터 벗어나 자유가 되자.


* 공격적 분노성향


공격적 분노성향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은 대개 직접적이지만 우격다짐으로 화를 표현하기 쉽다. 1차적 분노성향이 공격적인 사람은 설령 상대가 상처를 입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게 옳다고 생각한다. 또 상황과 무관하게 공격적으로 반응하기 쉽다. 그리고 상대가 자신을 밀고 들어오지 못하게 용납하지 않는 것이 철칙이다.


* 수동적(혹은 회피형) 분노성향


수동적 혹은 회피적 분노성향은 공격적 성향과는 반대되는 지점에 있다. 보통 이런 성향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은 화를 느끼지 않으려고 애쓴다. 화난 감정을 너무 오랫동안 차단해온 탓에 더 이상은 화가 나도 모르거나 화를 낼 권리가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화가 날까봐 염려하는 이유는 보복이나 자제력 상실, 혹은 소외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런 분노성향을 가진 사람은 대부분 상대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지나치게 염려하고, 남들이 자기를 화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런 사람은 화가 나는 것을 피하려고 할 뿐 아니라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갈등을 만들려 한다. 반대 의견을 밝히거나 자기 입장을 세우는 대신 동의하는 척하거나, 입을 다물거나, 아니면 실제로는 반대하는 것들을 그냥 받아들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전랙들은 오래가지 못한다. 자기 변호를 하지 않다가는 결국 자기 자신한테 화가 난다. 자신이 껍데기처럼 느껴지고, 솔직하지 못한 대해 경멸감을 갖는다.


한편으론, 통제 당한다는 느낌때문애 상대에게 점점 더 화가 나기 시작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표현하지 못한 화는 쌓이고, 자존감은 허물어지며, 마침내는 폭발해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는 말을 하게 된다. 


* 수동 공격적 분노성향


수동 공격적이라는 말은 틀립없이 전에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말은 권위와 책임, 그리고 의무에 대한 간접적인 저항과 관련된 방어기제를 가르키는 심리학 용어다. 어떤 요구를 당하거나 일반적인 불만을 들었을 때 나오는  불평이나 짜증도 이와 관련되 증상이다. 


 수동 공격저 성행을 가진 사람은 수동적으로 보이지마 ㄴ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표면적인 수동성 뒤에 공격성이 숨어있어 다른  사람의 화를 불러일으킬 때가 많다.


* 투영 공격적 분노성향


투영공격적 분노성향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화를 회피하거나, 부인하거나, 억누르려 한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는 일차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화를 남에게 투영한다. 


투영 공격적 성향을 자진 사람은 자신을 막 대하는 사람에 대한 불평과 가족과 친구에게 꽤 자주 늘어놓는다. 




화의 심리학② - 당신의 1차 분노성향은? 


화의 심리학 (Honour Your Anger)


 설문1. 슈퍼마켓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어떤 사람이 당신앞에 끼어든다. 

           어떻게 하겠는가?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① 그를 한쪽으로 밀어내면서 한걸음 뒤로 물러선다.

  ② 계산원에개 소리를 지른다. " 이 사람한테 줄 맨뒤로 가라고 좀 해주시겠소?"

  ③ 말을 꺼내면 무슨 짓을 할까봐 무서워서 아무내색도 하지 않는다.

  ④ 그가 보지 않을 때 컨베이너 벨트 위에 놓인 그의 물건을 하나 집어서 계산원 

      근처의 선반위에 숨긴다.

  ⑤ 사람들이 화가 나서 야단을 부릴 때까지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 고자질을 하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⑥ 그 사람에게 직접 얘기한다. " 제가 먼저 왔습니다 제 뒤로 가주세요."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①번을 고른사람은 그 상황을 공격적으로 처리하는 방법을 택했다. 상대를 한쪽으로 밀어


  내는 것은 명백한 공격행위이자 불필요한 짓이다. ⑥번을 택하더라고 똑같은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는데 말이다.


 ②번을 고른 사람도 공격적인 성향을 택했다. 끼어든 사람에게 뒤로 가라고 분명한 태도로


  얘기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모욕을 주거나 소동을 일으키지 않아도 될 것이다.


 ③번을 고른 사람은 수동적인 방법을 택했다.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지키지 않으면 상대에


  게 문시를 당할 테고, 그러면 아무 말도 못한 자신에게 기분이 나빠지거나 화가 날 것이다.


 ④번을 고른 사람은 수동 공격적 방법을 택했다. 공개적이고 단호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히


  지 않고 끼어든 사람에게 수동적이고 악의적으로 앙갚음을 했다. 충돌은 피했지만 겁장이 


  같은 수법을 택했다.


 ⑤번을 고른 사람은 투영 공격적 방법을 택했다. 주의 사람등에게 불평을 늘어놓아 그들이 


  대신 화를 내게 함으로써 끼어든 사람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했지만 그로 인한 소동은 자


  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불쾌하게 할 것이다.


 ⑥번을 고른 사람은 가장 적극적인 방법을 택했다. 물론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만 상대에게 


  모욕이나 부끄러움을 않기지 않으면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충돌을 피했다.



 설문2. 남편이 당신의 배려를 고맙게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힘껏 친절을 베풀어도 


          당연하게 여길 뿐 아니라 좀처럼 보답하는 법도없다. 당신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같은 


          기분이 든다. 어떻게 할 것인가?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① 말을 꺼내면 괸히 말다툼만 날 것을 알기 때문에 가만히 있는다.

  ② 남편에게 아내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배은망덕한 멍청이라고 얘기한다.

  ③ 남편에 대한 친절ㅇ르 전부 거둬들인다.


  ④ 두 사람은 모두 아는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남편에 대한 불평을 한다.

  ⑤ 자신의 기분을 털어놓으면서 남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완전히 달라질까봐 두렵다고


      얘기한다.

  ⑥ 다른 일을 놓고 말다툼을 벌여 상대가 심한 말을 하거나 심지어는 육체적인 공격을 


     가하는 데까지 나아가도록 밀어붙인다. 그러고 나서 상대의 상처 주는 말이나 행동을


     이유삼아 다시는 친절을 베풀지 않는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①번을 고른사람은 수동적 분노성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사람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갈등과 충돌의 피하고 싶어한다.


 ②번이나 ③번을 고른 사람은 공격적 분노성향을 가지고 있다. 어느 쪽이든 가학적이고


    벌을 주는 행동이다.


 ④번을 고른 사람은 수동 공격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 가족과 친구에게 배우자에 대한 


    험담을 하는 것은 자신의 화를 다루는 은밀한 방법이다.


  ⑤번을 고른 사람은 적극적인 방법을 택했다. 위협하거나 벌을 주는 대신 자신의 감정과


     염려를 솔직하게 전달함으로써 긍정적인 의사소통의 문을 열었다.


 ⑥번을 고른 사람은 투영 공격적 분노성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사람은 신의 화를 인정하는


   대신 배우자한테서 화를 이끌어내고 그것릉 이용해 배우자에 대한 벌을 정당화한다.


 



화의 심리학 (Honour Your Anger)

 - 비벌리 엔젤


1차 분노성향이 같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똑같은 행동을 보이지는 않는다. 예컨데 공격적 분노성향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는 분명 많은 유사점들이 있지만-그러니까, 화를 참기보다는 행동으로 옮기고 또 상당이 공격적인 태도로 화를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차이점들도 있다. 다른 병적인 분노성향들-수동적,수동공격적,그리고 투영 공격적 성향-도 마찬가지다. 


 


나는 사람들의 특징있는 행위에 따라 이들 성향을 유형별로 나누었다. 예를 들어 1차 분노 성향이 공격적인 사람은 분출형, 격노형, 비난형, 통제형, 학대형 가운데 하나이기 쉽상이다. 


1차 분노 성향이 수동적인 사람은 부인영, 회피형, 대체형, 자책형 중의 하나이기 쉽다. 


1차 분노 성향이 수동 공격적인 사람은 몰래화내기형, 탈출 전문가형, 삐침형, 가장형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투영 공격적 성향을 가진 사람은 복화술사형, 무고한 피해자형, 자석형 중의 하나일 가능성이 크다.


<<===== 공격적 분노성향의 유형들 ====>>


공격적 분노성향을 가진 사람은 다음 설문을 통해 자신이 어떤 유형에 가까운지 알게 될 것이다.


 설문1. 당신의 2차 분노성행은 무엇인가?.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 갑자기 화를 터뜨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가? YES  NO


  2. 화가 나서 했던 말이나 행동을 나중에 후회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가? YES  NO


  3. 화가 나는 이유를 도저히 알수 없는 경우가 종종 있는가? YES  NO


  4. 뚜렸한 이유없이 배우자나 아이들에게 났던 화가 역시 알수 없이 그냥 사그러지는 경우가 종종 


     있는가?     YES  NO


  5. 화를 터뜨렸지만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 사람들이 무서웠다는 얘기를 해줄때 듣고서 놀란 적이 


     있는가? YES  NO


  6. 화를 통제하지 못한 적이 있는가? YES  NO


  7. 자신의 하가 자동 반응처럼 보이는가? YES  NO


  8. 비판에 대해 극히 예민한가? YES  NO


  9. 자신에 대한 생각이 아주 나빠 남들도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 믿는가? YES  NO


  10. 사람들이 놀리거나 아니면 잘못이나 단점을 지적할 때 극도로 화가나는(격노하는) 경향이 있는가?


       YES  NO


  11. 일단 화가 나면 플기가 어려운가? YES  NO


  12.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스스로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개 만들어야 한다고 믿는가? YES  NO


  13. 이따금 발동이 걸리면 상대를 몇시간이고 계속 꾸짖는가? YES  NO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7번 질문에 대부분 그렇다, 라고 대합한 사람은 분출형이다


  8~13번 질문에 대부분 그렇다, 라고 대합한 사람은 격노형이다


 

분출형


분출형 분노유형의 특징은 최소한의 예고도 없는 갑작스러운 폭발인다. 분출형은 보통 쉽게 화를 낸다거나 성미가 급하다는 평을 듣는다. 화를 내는 것도 빠르지만 화가 가라앉는 것도 그만큼 빠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화가 나면 느낌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화가 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갑자기 뜨거운 느낌이 들거나 내부에 압력이 고조되는 것을 깨닫기도 한다. 그런데 분출형은 이러한 징후들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무시한다. 


어떤 분출형은 자기 안에 스트레스와 좌절감이 얼마나 쌓였는지도 알지 못한다. 이런 사람은 여러 가지 일로 스트레스나 좌절감을 극도로 쌓아가다가 어떤 말이나 사건을 통해 결국 폭발한다. 흔히 부모들이나 스트레스가 많고 바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들은 화의 징후를 무시하듯이 스트레스의 징후도 무시한다. 또 시간을 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긴장을 푸는 법을 배우는 대신 자신을 계속적으로 몰아붙인다.


좌절감을 잘 처리하지 못하는 분출형도 있다. 이런 사람은 식료품 가게에서 너무 오랫동안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때나 도로에 차량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서 있을때, 혹은 원하는 것을 제때 얻지 못할 때 폭발한다.


분출형은 화가 쌓이고 있다고 경고하는 욱체적 감정적 징후들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뿐 아니라 화 자체가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다고 알려주는 전령임을 알지 못한다. 이들은 폭발하고 나서 조용히 앉아 문제를 논의하지 않는다. 그 대신 화를 해결책으로 본다. 이들은 일단 폭발하고 나면 기분이 나아진다. 말하자면 지금까지 쌓여온 긴장이 풀어진 셈이다. 따라서 더 이상 문제를 논의하거나 화가 난 원인을 캐낼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화가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사실 화는 더 많은 문제를 낳는다. 특히 분출형에게는 더 그렇다. 이들은 자신의 좌절감이나 화의 원인을 결코 깨닫지 못할 뿐 아니라 보통은 분출로 인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그들과 멀어진다.  비록 그 순간에는 기분이 나아질지 몰라도 자신의 저지른 행동의 결과를 수습해야 할 때가 되면 결국 기분이 더 나빠지는 것이 보통이다.


 

화의 심리학 (Honour Your Anger)


 































일생동안 만나는 세가지 사랑      


사람이 살면서 일생동안 느끼는 사랑은

세가지로 종합해 볼수있다.

우선, 멀리 여행을 떠나는 당신을 배웅해주는 

세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라.


첫번째 사람은 

아침부터 당신에게 달려와 울며불며 가지 말라하고, 

손을 붙들고 보고싶을 거라며 몹시 안타가워 한다.

그러나 막상 떠나려고하자 문앞가지만 배웅하고는 

곧장 자신이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보기위해 TV를 켠다.


두번째 사람은 

당신을 위해 아침을 준비하고, 짐을 들어준다.

공항까지 배웅하며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건네고는 

발걸음을 돌려 직장으로 간다.


세번째 사람은 

그저 묵묵히 먼 발치에서 당신의 뒷 모습을 바라본다.

당신은 그가 그자리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지만 

그는 항상 당신을 그리워하고 걱정한다.


여행에서 돌아온 당신은 

첫번째 사람에게 멋진 선물을 사다주고,

그와 함께 밥을 먹고, 놀이공원에 간다.

당신은 그와 함께 있는것만으로도 행복하다.


그리고 두번째 사람을 만나면 포응을 하고, 

그의 손에 있는 짐을 나눠들고

그가 회사에서 실적을 올린 일을 축하해주며, 

그가 옆에 있어주는 사실을 크나큰 행운으로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세번째 사람을 만나면 

조용히 미소만 지을뿐 마땅히 할말을 찾지 못한다.


이번에는 당신이 그들을 차례로 잃었을때 상황이다.


첫번째 사람을 잃으면 당신은 

한동안 인생의 낙을 잃은듯 침울해 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어디선가 비추는 한줄기 빛을 발견하고

새로운 여정을 시작한다.


두번째 사람을 잃으면 당신은 

든든한 어깨를 잃은듯 낙담하지만

이 또한 얼마 지나지않아 극복한다.


세번째 사람을 잃으면 

처음에는 무감각하다가 

어느날 문득 그를 잃은 날부터 

당신의 영혼이 방황하기 시작햇으며, 

가슴속에서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공백이 

생겼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첫번째 사람이 준것은 언어이고, 

두번째 사람이 준것은 시간이고

세번째 사람이 준것은 생명이다.


첫번째 사람은 자녀, 풋사랑이다. 

두번째 사람은 친구, 중년의 사랑이다.

세번째 사람은 부모, 반려자, 영원의 사랑이다.


이 세가지 사랑중에 

무엇이 더 아름답고 소중한 것인지는 따질수 없다.

세가지 모두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글 중에서-                  



GSC 새벽 큐티 설교 <창세기 37:25-36>


제목 : < 창 37: 25-36 >구덩이에서 끌어올리심

                            


[37:25-36]

(37:25) 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다가 눈을 들어 본즉 한 무리의 이스마엘 사람들이 길르앗에서 오는데 그 낙타들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가는지라

(37:26)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37:27)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니라 하매 그의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

(37:28) 그 때에 미디안 사람 상인들이 지나가고 있는지라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이십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인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37:29) 르우벤이 돌아와 구덩이에 이르러 본즉 거기 요셉이 없는지라 옷을 찢고

(37:30) 아우들에게로 되돌아와서 이르되 아이가 없도다 나는 어디로 갈까

(37:31) 그들이 요셉의 옷을 가져다가 숫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37:32) 그의 채색옷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였으니 아버지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 하매

(37:33) 아버지가 그것을 알아보고 이르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도다 요셉이 분명히 찢겼도다 하고

(37:34)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37:35)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37:36) 그 미디안 사람들은 그를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더라

====================================================

제목 : 구덩이에 던져진 삶 그리고 찢겨진 채색옷

부제 ; 세월호에 남겨진 삶 그리고 남겨진 유품  

========================================


먼저 오늘 본문에 자식의 유품인 <찢겨진 채색옷>을 손에 든 사랑하는 자식 잃은 야곱의 오열과 애통함을 봅니다. 


(창 37:34)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창 37:35)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이 야곱의 애통함은 < 세월호 1주기 / 2014년 4월 16일 >를 맞고 있는 세월호 유족들, 실종자 가족들, 그리고 생존자 가족들의 애통과 고통을 묵상하게 합니다. 


진도 팽목항에서 바다에 떠있는 세월호 침몰 사고현장의 부표를 바라보면 다시 오열하는 부모들의 모습. 유족들, 가족들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떠난 빈방과 아이들의 유품들속에서 얼마나 사랑하고 사랑받는 아이들이 였는지를 알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잊고 지냈고 기억하겠다고 말했지만 이제야 다시 기억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미안해 해야 할 떄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오늘 본문에 사랑하는 자식 요셉을 읽고 형들의 손에 전달 받은 찢겨진 채색옷을 손에 든 야곱의 오열, 야곱의 애통함, 야곱의 고통을 통해서 4월 16일 그날의 애통함을 기억해보고 기도하길 원합니다. 


어제 세월호 1주기를 맞아 세월호가 침물한 그자리에 희생자 가족들이 그 자리에 다시 갔습니다. TV 통해 그들이 그 바다를 보며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면 가슴을 찢듯이 우는 모습을 봅니다. 얼마나 마음이 안타 깝던지요 


아직 차가운 바다에 단원고 학생 4명(조은화/허다윤/남현철/박영민) 인솔 교자 2명(양승진/고창석) 여행객3명 (권재근, 아들 혁규/이영숙) 이렇게 9명이 여전히 남겨저 있습니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여전한 문제와 상황이 현재 진행형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 하나님의 뜻 > 이라는 말로 말하기에는 우리가 자초하고 만들어낸 죄악과 부조리가 너무나도 큽니다. 그래서 쉽게 이러한 인간 스스로가 자초한 인재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이 자식을 읽은 야곱의 모습이 자식을 잃은 세월호 가족들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또한 요셉이 구덩이 던져지고 채색옷이 찢기고 억울한 고통을 당하고 팔리는 것은 < 하나님의 뜻 >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도 그릇된 동기와 욕망으로 동생 요셉을 대우한 형들의 죄악이 너무나도 큽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셉의 고백처럼 < 이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시는 >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지만 우리는 완악한 인간의 욕심과 욕망이 빚어낸 죄악조차도 < 하나님의 뜻 >이라는 이름으로 덮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오늘 요셉의 삶의 스토리를 봅니다. 그리고 그속에서 겪어 왔던 요셉의 고통과 그리고 야곱의 고통을 봅니다. 오늘 본문은 이 두 모습이 잘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4인물. 아브라함-이삭-야곱-요셉의 마지막 믿음의 사람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습니다. 


특히 요셉의 생애 대한 이야기는 창세기에 이어지는 족장들이 이야기들과 많은 부분에서 다른 차이들을 보이고 있습니다


창세기 저자가 족장들의 이야기를 하는 내용도 흔히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는 아브라함은 창12-2513장을 할애하고 있지만 요셉은 그것보다 1장이 더 많은 14, 37-50장에 걸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창세기 기자는 많은 부분을 할애하면서 한 사람의 전 생애를 다루듯이.. 마치 전기나 소설을 읽듯이 다루고 있을까?


그것은 창세기가 주어진 처음 1차 독자가 누구인가?를 생각해보면 알수 있습니다. 창세기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쓰여졌습니다.

다시말해서 430년동안 노예라는 삶의 습관과 정체성에 젖어 있는 이들을 위해..

< 너희는 누구인가 > < 너희는 어디서 왔는가?> 그리고 < 너희는 누구의 것인가 > < 너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를 설명해주고자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400여년동안 노예생활이라는 속박과 굴레 속에서 어떠한 희망도 미래도 비젼도 없이 있는 이들. 패배감과 상실감 그리고 낮은 자존감에 있는 이들에게 이들을 가슴을 뜨겁게할 중요한 메시지가 .. 중요한 동기부여가... 중요한 도전이 필요했던것입니다.


모세를 따라서 어떻게 떠밀리다 싶이 자의만 타의만으로 자신이 숙명과 같은 익숙하고 길들여진 노예의 삶에서 ... 이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는 하나님 백성의 삶으로 전환이 이루어지는 시점에 이 창세기는 그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 점에서 요셉의 이야기는 어떤 영웅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 성공신화에 대한 이야기, 형통한 신앙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원치않게 구덩이에 던져질수 있다고 자신의 채색옷이 찟어질수 있다고 말하는 고난과 하나님의 주도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내고 있는 사람이 바로 요셉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흔히 <타이폴로지>라고 말하는 모형론의 관점에서 요셉은 신약의 예수님의 그림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부인과 배신으로 억울하게 은 30에 가룟유다에 의해서 팔리게 되는 예수님의 그림자.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옷이 찢기고 고난받음으로 주님의 나라가 오게하는 도구가 되는 그 예수님의 그림자. 모든 이들의 대속적인 삶을 살고 그의 수고와 고난 겪음을 통해서 다른 이들의 유익을 가져오는 그런 예수님의 그림자의 모습이 바로 요셉에게 담겨 있는 것입니다.




바로 요셉의 삶과 예수님의 삶은 아주 자연스럽게 오버랩 되어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요셉의 성공적인 삶의 결론에만 주목합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고 가족들앞에 성공적인 모습으로 서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래서 흔히 많은 이들은 꿈을 꾸고 비젼을 가진 요셉처럼 살면 여러분도 형통하고 성공할수 있습니다 라고 설교하고 묵상합니다. 어떤 분이 설교한 설교의 제목을 보니 꿈으로 사는 비젼 인생 라는 설교제목을 보았습니다. 아주 매력적인 설교 제목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해보아야합니다.

요셉이 꿈을 꾸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고난을 받고 최후에는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자신의 꿈을 요셉에게 보여주고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요셉을 도구로 사용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

요셉의 생애의 주도권이 요셉에게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에게 있습니까?


요셉의 생애에 주도권이 요셉에 있다면 < 요셉은 꿈을 꾸었고 그 꿈 때문에 구덩이에 던져지고 색동옷이 찢어지고 노예로 팔리는 고난도 견디어서 마침내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 >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요셉의 생애의 주도권이 하나님에게 있다면 < 하나님은 요셉에게 자신의 꿈을 보여주고 우리로 하여금 구덩이에 던져지고 색동옷이 찢어지고 노예로 팔리는 고난의 경험을 통하여서 마침내 하나님의 꿈을 이루는 도구가 되었다 >는 말이 됩니다.

 

아마 ! 430년에 노예생활을 마치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조금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 이런 질문을 던졌을 것입니다. < 하나님이 너무 하신다 왜? 우리는 이러한 노예생활을 통해서 고난 가운데 지나오게 하셨는가? 꼭 그렇게 하셔야만 했는가? >라는 의문을 가졌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요셉을 미워하고 요셉을 시기 질투하고 요셉을 죽이기로 모이한 이들이 누구 입니까? 바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상들입니다. 요셉의 고난의 원인은 하나님에게 있지 않습니다. 형제들의 잘못된 동기와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요셉의 형들의 악한 동기를 하나님은 구덩이에 던져진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 올려서 하나님의 선한 동기로 바꾸어 놓으시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요셉의 신실한 믿음을 시험하시고 그 믿음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꿈과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요셉의 입장에선 색동옷이 찢겨지는 고통을 경험했고 구덩이 전져지고 팔리는 고난을 경험했죠.


< 색동옷이 찢겨야 하나님께서 입혀주시는 옷을 입을 수 있다 . 색동옷-노예의 옷-죄수의 옷, 색동옷을 입었 을때는 꿈꾸는 자가 였지만 죄수복을 입고 부터는 꿈을 해석하는 자가 되었다. >


옷의 변천사를 들으셨을 것입니다. 특히 색동옷이라고 말하는 채색옷은 자신의 신분이 어떤 존재인가?를 말해줍니다. 유대인들에게서 의복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줍니다


약에서 선지자들이나 지혜자들은 특별한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요셉이 다른 형제들보다 탁월한 지혜자였을 것이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꿈을 꾸는 자>는 의미는 유대적인 배경에서 원어적인 의미는 <계시를 수납하는자, 계시를 나타내는자 곧 지혜자 >라는 의미를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 요셉의 등장하는 이 창세기의 문학장르를 욥기와 같은 지혜문학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리고 요셉의 채색옷은 아버지의 편애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다른 형제들과 다른 독특한 신분을 가졌음을 암시해줍니다.


그러한 지혜자. 계시의 전달자. 탁월한 신분과 아버지의 사랑의 징표인 요셉의 채색옷은 찢겨졌고 그는 구덩이에 던져졌습니다. 이것은 요셉에게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것입니다.


고난의 상황에 일어날 때 우리는 도전히 이해할수 없을 만큼 강한 충격과 고통을 줍니다. 17세의 어린 요셉이 이러한 고통에 던져지는 것은 예상밖의 일이요 상상밖의 일입니다. 고난의 그때의 상황보다 시간이 흘러야 이해되어지고 해석되어질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 요셉은 알았습니다. 자신이 던져진 그 구덩이에서 그리고 그 구덩이에서 끌어올리신 분이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지난 세월 자신의 삶을 자신이 주도적으로 만들어간 것처럼 생각했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창세기 마지막장 50장에 보면 요셉의 아버지 야곱이죽자 형들이 자신들의 잘못으로 인해 요셉이 자신을 죽일까봐 걱정할때에....자신에게 일어난 고난을 하나님이 어떻게 바꾸셨는지? 고백하고 있습니다.


(50: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요셉처럼 구덩이에 던져졌다고 느낀 적은 없으십니다.

그때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그 곳에서 머물며.. 무엇을 바라 보십니까?

구덩이에 던져졌을 때 그기고 그곳에서 머물고.

그리고 그곳에서 끌어올려져서 또다른 상황을 내삶이 내밀리때..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기대해야 할까요?

 

요셉의 이야기는 그가 비전의 사람으로 그 비전을 이루었다고 해석하는 것은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손에 맡겨진 삶.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는 사람의 모습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이 창세기에 마지막 대목에서 구덩이에 던져진 요셉의 모습을 통해서 아마도 430년 애굽 노예의 구덩이에 던져지고 팔려간 이스라엘 모습을 투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속에서 이루실 하나님의 일들을 기대하는 마음을 알게 하고 그것을 하나님이 어떻게 바꾸어가고 계신지를 보여주길 원하셨을 것입니다. 또한 그 원인이 하나님 자신에게 있지않고 이스라엘 백성의 열조들로부터 자초한 일이라는 것을 알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것은 어떻게 인도하시고 바꾸셨는지?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자신에게 주어진 꿈을 부지런히 자신이 주도적으로 이루어가는 자기주도적인 성공신화을 만들어가는 지극히 세속적인 사람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자신은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수 없지만 고난의 구덩이에서 끌어 올려주시는 하나님을 믿기에 그분의 방식으로 그분의 때에 자신의 꿈이 아니 하나님의 주도적인 방식과 꿈으로 자신을 사용하실 것을 기대하고 고백하는 믿음의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고난은 이해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난은 해석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담대하게 기도해야합니다

< 고난의 구덩이속에서 나의 꿈이 아닌 하나님의 꿈을 이루소서. 내게 하나님의 꿈만 이루어진다면 나는 어디에 던져져도 괜찮습니다. 나를 하나님이 이끄시고 건지시고 인도하소서. >


(69:14) 나를 수렁에서 건지사 빠지지 말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와 깊은 물에서 건지소서

[40:1-2]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오래된 가스펠 찬양 중에 이런 찬양입니다.

< 내 인생 여정 끝나고 ... 예수 인도하셨네 >

1) 내 인생 여정끝내어 강건너 언덕이를때 하늘문 향해 말하리

예수인도하셨네 매일 발걸음마다 예수인도하시네

나의 무거운 죄짐을 모두 벗고하는말 예수인도하셧네

2) 이 가시밭길 인생을 허덕이면서 갈때에 시험과 환난많으나

예수 인도하셨네 매일 발걸음마다 예수인도하시네

나의 무거운죄 짐을 모두 벗고하는말 예수인도하셨네

3) 내 밟은 발걸음마다 주예수 보살피시사 승리의 개가부르며

주를 찬송하라라 매일 발걸음마다 예수인도하시네

나의 무거운죄 짐을 모두 벗고 하는말 예수인도하셨네


[ 기도와 도전 ]

사랑하는 여러분. 매일 매일 살아가는 동안..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난을 어떤 관점을 바라볼것인가? 생각하며 살아야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을 반드시 선으로 바꾸실 그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보며.. 그분의 이끄심속에서 그분의 주도적인 삶에 우리의 삶을 드리고 우리는 단지 그분의 도구임을 고백하면서 그렇게 매일 매일을 살아야가야 합니다.

삶의 주도권과 주재권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하면 그렇게 매일 매일을 < 예수 인도하셨네 >라고 고백하면서 살아야 할것입니다.

 

====================================================

예수 내 영혼의 사랑 - 예수전도단 화요모임 / Darlene Zschech by 쥬빌리

예수 내 영혼의 사랑 예수 나는 포기할 수 없네

수렁에서 나를 건지시고 반석에 세우심을 이제 아네

사랑해 의지해 나의 모든 것 다 없어진 다해도

내 구주 절친한 친구 주를 경배해 세상 끝날까지

사랑해 의지해 나의 모든 것 다 없어진다해도

내 구주 절친한 친구 주를 경배해 세상 끝날까지

====================================================

 

2015 GSC새벽 큐티 설교 


제목 : <18:17-23>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18:17-33]

(18:1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18:18)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18: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18:20)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18:21)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18:22)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18:23)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18:24)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18:25)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18:2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

(18:27)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18:28) 오십 의인 중에 오 명이 부족하다면 그 오 명이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온 성읍을 멸하시리이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사십오 명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18:29) 아브라함이 또 아뢰어 이르되 거기서 사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사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18:30)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주여 노하지 마시옵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면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18:31)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내가 감히 내 주께 아뢰나이다 거기서 이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이십 명으로 말미암아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18:32)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18:3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제목 : <18:20-33>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오늘 함께 묵상하는 본문의 내용은 흔히 < 아브라함의 신앙과 믿음을 옅볼수 있는 있는 < 소돔과 고모라 땅을 위한 중보기도 >의 내용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마치 거래()를 하는 것과 같은 아브라함과 여호와 하나님과의 대화의 내용을 볼수 있습니다.


흔히들 오늘의 이본문의 내용을 아브라함의 신앙과 중보 기도를 배우고 묵상하는 본문으로 이해하고 묵상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뜨려야할 몇가지 중요한 핵심 메시지와 오해하고 있는 메시지가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를 강조하지만 놓치고 있는 핵심메시지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18장에는 하나님의 사자와 여호와 하나님의 현현, 여호와 하나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2명의 하나님의 사자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이 두 곳을 방문합니다.



첫째는 아브라함의 방문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을 믿고 믿음의 걸음을 걸어온 의로운 아브라함을 방문합니다. 


둘째는 소돔과 고모라땅의 방문입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불의한 삶을 살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러 방문합니다.


(18:1)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아브라함이 거주하고 있었던 곳은 < 마르레 >라는 사람이 거주하는 곳이었습니다

훗날 그곳이 지명이 < 마르레 > 되었습니다

이곳은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정착한 정착지였습니다.


이곳은 조카 롯에게 <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리라 >해서 

그 방향을 결정하고 얻은 땅입니다.

 

(13:18)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아브라함은 마므레로부터 신임을 얻었을 뿐만아니라 아브라함이 마므레에게 듣든한 후원자로 보였기기 때문에 계속 그 땅에 같이 살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이 땅은 훗날 < 헤브론 >이 됩니다. 아브라함의 당시에는 마므레는 정말 볼품없는 상수리 수풀과 나무나 우거지 산지였습니다.


이러한 척박한 땅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삶을 정착하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곳 마므레는 아브라함의 삶이 구체화되기 시작한 곳입니다.


< 강하다 >는 뜻을 가지고 있는 < 마므레 >는 아브라함에게서 아주 의미는 있는 곳이 바로 이곳에 다시금 < 아내 사라가 노년에 아들을 낳을 것이다 >라고 하는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을 받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방문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소돔과 고모라를 위한 특별한 중보기도를 드리는 곳이 됩니다.


훗날 아브라함은 바로 이곳에서 자신의 아내 사라를 장례를 위해 막벨라굴을 산곳도 바로 이 마므레라는 지역입니다.

 

바로 < 헤브론의 마므레 >는 아브라함에게 이민이후에 처음으로 정착하고 처음으로 자신의 삶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그런 곳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언약의 말씀을 따라 이제는 그 누구도 아브라함에게 땅을 내놓으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땅이 한평도 없었고, 그래서 그 땅을 가나안 족속들에게 빌혀서 정착하고 있었을 지라도 땅 소유자 이상으로 견고한 거주자가 되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 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소위 자기 고향을 떠나 이민 떠나 제대로 집한칸 마련한 추억들이 있으실것입니다. 처음 미국와서 살기 시작했던 조그마한 콘도를 기억할것입니다.

처음 아이들을 미국학교에 입학시키던 동네를 기억할것입니다.

처음 나의 비즈니스를 열던 그런 가게를 기억할것입니다.


바로 아브라함에게 < 마므레 >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을데 무엇가 시작해야 했던 그곳,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이제 서서히 무언가가 보이지 시작하는 그런 약속이 보이고 약속이 이루어지는 곳이 었습니다.

 

바로 그런곳에서 다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그에게 찾아오셨고 그를 만나 주십니다.

오늘 우리는 창세기 18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여호와와 여호와 앞에 서있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미쳐 몰랐던 우리가 미쳐 깨닫지 못했던 3가지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찾아오시는 여호와 하나님과 여호와를 환영하는 아브라함

 

마르레에 거주하던 어느날 아브라함은 한낮인 낮이 뜨거운 오정즈음에 장막 어귀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낯선 사람이 셋이 맞은편에서 오는 것을 봅니다. 바로 이들은 아브라함을 찾아오고 계시는 여호와의 사자. 바로 여호와의 현현 이었습니다. 그들을 향해 아브라함은 그들을 알아보고 장막문으로 달려가 영접하고 몸을 땅에 굽혀 경배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18:3)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직접 찾아왔을까요?

그 이유는 2가지 목적이 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첫째는 아브라함이 약속의 자녀인 아들 이삭을 낳을 것이라는 것과 둘째 불의한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할 것이다 것이었습니다.

(18:1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마치 사람과 사람이 대화하고 의논하듯이 어떤 중대한 일을 위해 여호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상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우리 옅볼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친근히 대하고 친밀하게 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동안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과 어떻게 사귀어 왔는지?을 옅볼수 있는 대목이니다.


(41:8)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자신을 숨기지 않으시고 드러내시고 자신의 계획을 말씀하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과 그 하나님을 대하는 아브라함의 태도는 영적인 친밀함의 대표적인 모습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바로 이 모습은 아브라함이 얼마나 < 의로운 사람 >인가?을 보여줍니다.

 

성경에서 <>의 개념은 율법이거나 도덕적인 용어가 아닙니다. <>의 개념은 관계적인 용어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 의롭다 >는 말은 < 정의롭다. 법없이도 살수 있는 삶 >을 말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는 하나님과 친밀하고 깊은 관계를 맺는 일을 의미합니다.

 




소돔과 고모라땅에서 찾았던 <의인> 역시 바로 그런 율법적으로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는 의가 아니라 하나님과 진정한 관계를 맺고 있는 <>를 가진 사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흔희 아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하는 그 의인 역시 <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 >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이 바로 믿음으로 살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친근히 친밀히 사귀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묵상할수 있습니다.

 

오늘 18장에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의인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8: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바른 관계를 맺기에 실패하고 있는 불의한 소돔과 고모라는 멸하시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 의로운 아브라함에 대한 약속 >< 불의한 소돔과 고모라땅에 멸망 >은 서로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의로운 약속의 백성이라도 하나님과 관계 맺는 의로움에 실패하면 버림받을수 있음을 간접적으로 경고하는 이중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오늘 본문 창세기 18장을 묵상하면서 놓치지 말아야 중요한 메시지 있습니다.

 

2/ 기다리시는 여호와와 기도하는 아브라함

오늘 본문에서 소돔과 고모라 땅을 위한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를 살펴보기전에 우리가 정말 놓치지 말아야할 묵상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그것은 22절입니다. 바로 이 22절이 아브라함의 중보기도의 방향을 결정하게 합니다.

(18:22)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여기서 기록된 <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 라는 번역은 오리지날 텍스트인 히브리 맛소라 사본의 성경과는 다른 번역입니다. 원래 성경은 이렇게 쓰여있습니다. <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앞에 여전히 서 있었더니 > 라고 쓰여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라는 말과 < 여호와 께서 아브라함에 여전히 서 있었더니 > 어떤 차이가 있다고 생각되십니다. < 그대로 서있는 > 주어가 다름에 따라서 그 의미는 전혀 달라집니다.

 

원래 성경은 <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앞에 여전히 서있었더니 >라고 쓰여져있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왜 ? 이렇게 바뀌었을까요? 바로 구약의 서기관들이 성경을 필사하면서 이 부분이 올 때 어떻게 <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앞에 서있을수 있는가? >해서 좀더 경건한 언어로 바꿔 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 기도의 주체가 사람이 되어 버린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께 소돔과 고모라를 중보 기도하기 위해서 서있는 모습을 보여집니다. 사실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하나가지를 놓치게 되었습니다.

 

<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앞에 여전히 서있었더니 >라는 말이 주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기도를 기다리셨다 >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기도하기까지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십니다.

반드시 우리의 기도이전에 하나님의 미리아심과 기다림이 있습니.

 

그래서 중보기도의 4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는 기다림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우리가 중보기도하기까지 기다리셨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둘째는 기도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환영하고 인정하듯이 그분과 친밀하 사귀고 그분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나의 요청과 원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기대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손이 일하시도록 기대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기회입니다 기도는 기다림과 기대를 가지고 기회를 붙잡는것입니다. 하나님과 사귀는 기회, 하나님과 마는 기회입니다.


바로 중보기도의 3중주 < 기다림 / 기도 / 기대 /기회>입니다.

 

아브라함의 소돔과 고모라를 의인을 요청하는 중보기도이전에는 <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앞에서 서서 아브라함의 기도를 기다리시는 기다림 > 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중보기도를 하도록 그 앞에 머물러 서 계셨던 것을 알수 있습니다. 창조주이신 그분은 자존심을 다 버리고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소돔 성에 남아 있을 의인을 위한 중보기도를 하기를 바라면서 피조물 앞에 서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중보기도를 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중심은 <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는 하나님을 먼저 묵상하는 일 >입니다. 흔히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중보한것처럼 우리고 의인을 구하는 기도를 합시다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마치 중보기도를 처음으로 시작한 이가 < 아브라함 >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중보기도를 제안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탁월한 영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마치 의인 50/45/40/30/20/10명 까지 마치 거래하듯이 기도해도 여호와 하나님이 하나도 기분나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의 기도의 응답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6번이 이랬더 저랬다 하는 것처럼 보이는 기도를 해도 하나님의 신실하게 응답하시고 아브라함에 기회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오늘 본문에서 놓치지 말아야할 것은 < 아브라함의 중보기도앞에 하나님의 기다림 > 있다는 사실입니다.


< 여호와가 아브라함앞에서 서서 > 기다리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중보기도의 출발입니다. 먼저 여호왁 나의 앞에 서있는 것을 보는 것 그리고 그분이 무엇을 원하시는 지를 아는 것. 그리고 나 자신이 여호와 앞에 서서 그분의 중심과 심정을 바라보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중보기도자의 마음입니다. 바로 그것이 친밀한 사귐의 기도입니다.

 

3/ 들으시는 여호와와 요청하는 아브라함

 

우리는 오늘 불의한 소돔과 고모라를 아브라함을 방문하지 않고 바로 가서 그 땅을 멸할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그땅을 멸하시기를 주저하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먼저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인규를 구원할 그 인물을 낳을 이삭을 낳을 것을 먼저 예고하십니다. 그 다음에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실행하러 떠나십니다. 그 사이에 아브라함의 중보기도가 있고 그사이에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십니다.

비록 아브라함의 간절한 요청과 기도에 불구하고 그의 기도는 실패로 돌아갑니다. 소돔과 고모라 땅은 그곳에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되는 것은 아브라함과 아무 관계도 없는 일어었습니다. 그의 조타 롯의 가족이 그곳에 살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구해주리고 작정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그렇게 매달리면서 기도할 이유하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마치 그 일이 자기 일이거나 한 것처럼 매달리며 기도를 했습니다.

노아는 온 세상을 홍수로 멸절시키겠다고 하는 통보를 받고도 하나님앞에서 아브라함처럼 중보의 기도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방주 만드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그리고 그 방주에 자기의 가족만 올라 탔습니다. 이런면에서 아브라함을 노아와 대조가 됩니다.


노아는 자기가 해야할 일만 하고 그 이상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가 해야할 일상을 했습니다.

 

중보기도는 자기가 해야할 기도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더 많은 부담감으로 더많은 책임감으로 그 이상의 일들과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노아는 자기백성의 심판앞에서 구원을 위해서 방주를 지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소돔과 고모라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모세는 백성들과 하나님 사이에 결렬된 틈 사이에서 기도했습니다.


(106:23)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멸하리라 하셨으나 그가 택하신 모세가 그 어려움 가운데에서 그의 앞에 서서 그의 노를 돌이켜 멸하시지 아니하게 하였도다

 

예수님은 요한복은 17장에 하나님의 자녀들과 아버지가 하나되 하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

 

아브라함의 기도는 타락한 세상과 시대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그 세상에서 신앙이 변질된 롯과 롯의 가족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아브라함의 기도가 의인 10명을 구하는 기도에서 그친 이유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중보기도하면서 10명선에 그친 문화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랍비들의 전승에 의하면 노아가 홍수에서 구원받은 사람이 8명이었습니다. 그래서 8명보다 조금 많은 10명으로 멈추었고 그리고 10명이라는 숫자는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공동체나 잔치나 축체의 최소 숫자였습니다. 모든 모임이든지 10명이 모여야 그 유대인의 공동체로 인정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열처녀 비유고 바로 10명의 숫자가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이미 소돔과 고모라에는 적어도 의인 10명은 살고 있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바로 롯과 그의 아내 그리고 4명의 딸들과 4명의 사위들이었습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그들을 감안해서 10명의 의인을 구하는 기도에서 멈췄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주 전략적으로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이러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듣습니다. 하나님이 들으시고 아브라함이 요청하는 그러한 기도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2가지의 반응과 만남을 봅니다.

아브라함을 찾아오시는 하나님. 하나님을 알아보고 환영하는 아브라함

아브라함앞에서 서서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하나님앞에서 서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아브라함

아브라함을 이야기와 요청을 들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진심을 알고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이들의 문제를 품고 기도하는 아브라함

 

이러한 두 개의 만남이 얼마나 놀라운 사귐과 관계를 이루는지 봅니다.

오늘 우리 자신에게 묻습니다

나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이 내 앞에서 서서 나의 기도를 기다리시는 것을 보는가

나는 얼마나 자주는 나의 문제가 아닌 다른 이들의 문제를 품고 기도하고 있는가





미션퍼스펙티브스의 구약적관점

 


. 하나님의 마음(요한복음 17: 1-5)

 

하나님은 창조하신 사람들에게 너무나 실망하시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십니다. 멸망 받을 가운데 은혜입은 한 가족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실망하셨어도 남겨놓으신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보면 인간의 역사를 계속 이루어 나가시는 하나님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인간의 역사를 계속 이루도록 하셨을까요?

그 이유가 바로 선교역사입니다. 선교 역사는 이런 하나님의 마음이 전달되고 회복되는 과정을 역사적으로 밝혀 놓은 것입니다. 이러한 선교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시는 하나님의 선교를 이해하려면 창조로 거슬려 올라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가지셨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조상은 이 창조주의 마음을 져버렸습니다. 하지만 창조주 하나님은 인류의 조상들이 버린 자신의 뜻을 회복시키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재림 때 까지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자신의 뜻 즉 창조 때 사람을 만드신 그 마음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계속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선교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7: 18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날 밤에 하나님과 기도하셨던 말씀입니다. 17장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표현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는 아들인 예수님이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왜 그의 아들을 이 세상으로 보내셨고 또 그 아들은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신다는 것입니까?


17: 4을 보면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땅으로 보냄을 받은 아들은 아버지가 주신 사명을 다함으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했다는 것입니다. 즉 아버지가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는 어떠한 일을 함으로 자신을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창세전부터 삼위하나님이 하셨던 것입니다. 17:5절에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영화는 영어성경에는 영광이라고 되어있습니다. 17: 22을 보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영광을 그 아들이 우리에게 주셨다고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로 아들과 하나 되게 하여서 아버지에게 영광을 돌려드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하나님이 왜 우리를 창조하셨는지를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창세 전부터 서로를 영화롭게 하신 분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이 영화롭게 하는 일들을 계속 일어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골로새서 1: 26-27을 보면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법이 성경에 여러 가지로 나와있습니다


첫째는 마태복음 5:16에 나타납니다

아버지에게 영광을 돌리려면 착한행실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한행실을 우리의 삶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에베소서 2:10에 잘 나타납니다. 둘째는 시편 50:21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셋째는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세 번째의 것은 선교의 관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즉 선교는 예배하지 않는 민족과 족속과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예배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선교를 주관하신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자신이 창조한 인간이 자신을 예배하지 않는 것을 참으시기 어려워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는 예배하는 찾고계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예배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선교의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창세기를 통해서 그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4장에 타락한 아담 이후 그의 아들들이 제사를 드리는 장면을 발견하게 됩니다. 비록 이것으로 말미암아 인류최초의 살인이 있었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명확히 지시하신 내용이 성경에 나와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제사 드렸다는 것은, 말 안해도 제사를 드려야만 하는 당위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나마 유지되었던 제사가 사라지자 하나님은 만드신 세상을 보시고 한탄하십다. 그리고는 물로 심판하십니다. 그렇지만 창6: 8을 보면 유독 그 시대에 노아만은 은혜를 입고 그 죽음의 대열에 끼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은혜를 주셨습니까? 8: 20-21을 보면 알 수 있다. 노아는 하나님을 예배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창12장으로 가면 하나님은 한 사람을 선택하시어 자신의 나라를 건설하십니다.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힘들이지 않고 그냥 가나안에 있는 사람 중 한 사람이나 아니면 그 근처의 한사람을 선택하셨다면 쉽게 일을 할 수 있을 텐데. 왜 먼 곳에 있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습니까? 아브라함 역시 예배드리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 중심에 예배를 보십니다. 12: 7-8을 보면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든지 예배를 드렸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요4: 23에 진정으로 예배하는 찾으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말하였습니다. 선교는 예배를 통해서 아직도 하나님께 영광드리지 못하는 자들에게 영광돌려 드리게 하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나에게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땅 끝까지 이 일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 때까지 하나님의 선교역사는 이 세상에서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24: 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라 시96:2-3

하나님께 영화를 돌리라 시86:9

예수님을 영광돌리고 빌3:3(자랑-glory)

 

. 아브라함(12:1-3)

 

아브라함은 예배드릴 줄 아는 자라고 전 시간에 이야기했습니다. 예배 드리는 자에게 하나님은 특별히 부탁하신 것이 있습니다. 예배드리는 자들의 무리를 만들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주면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것이 이루어졌음하는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서 오직 하나님을 예배하는 나라가 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예배하는 아버지 밑에 예배하는 자녀가 있기때문이지요. 갈라디아서 3: 29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어서 아브라함이 드렸던 예배를 계속 이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100여년 전에 목숨을 버리면서 이곳에 찾아 온 선교사들이 있었습니다. 죤헤론, 아펜젤러, 언더우드, 레베카, 루빅 켄드릭 등.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통해서 예배가 계속되기를 바라셨던 하나님은 그 외의 민족들은 버리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통한 예배는 지속되고, 그렇지 못한 민족과 방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의 예배를 배우고 익히기를 바라셨습니다.


그것이 창12: 2에 잘 나타납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는 것은 예배하는 민족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이름을 창대케 한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복의 근원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복의 근원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복의 근원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음 도표를 보면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의 근원자

복의 대상

복의 대상

θ

아브라함

모든 족속

복의 근원(θ이함께하심)

복의 근원(아브라함의 자손들)

 

12:3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모든 족속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은 그 분에게 경배 드리는 것입니다. 그 분의 존재는 예배의 대상입니다. 모세에게 성막을 만들어라고 명령하신 이유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가까이 있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레위기 1: - 7:에 제사의 룰을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이 계시면 예배가 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과 같이 아브라함에게 거하시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 되도록 하여서 모든 족속이 복을 받아 하나님이 거하시도록 하여 예배를 받으시려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은 뜬금없이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을 등장시킨 것은 아닙니다. 12:1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여호와갈대아 우르의 신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가야 할 곳인 가나안의 신도 아닙니다. 이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말하면 창12장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장이 아니라 창세기 1장으로 시작된 연속의 말씀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인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이 창4-11장까지 나타난 사람의 세상은 도덕적 타락과 어두움과 분열뿐인 사회요, 나라였습니다. 다시금 노아의 시대로 돌아간 것을 보신 하나님은 인간의 세상에는 희망이 없음을 보시고, 유일한 희망인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다시 사람들을 하나님에게로 부르시는 작업을 하시겠다는 의지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선교의 의지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어떻게 드러났습니까? 첫째는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는 것에서 나타납니다. 사실 아브라함에게는 이삭이라는 한명의 자식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한명을 두고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피를 이은 자손이 소멸되지 않는 이상 뒤를 이른 자녀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7을 보면 애굽에서 모세의 뒤를 따라 나오는 백성들의 모습은 애굽 온땅에 가득한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솔로몬 시대에 왕상3:8을 보면 큰 백성의 수효가 많아서 셀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다고 합니다


오늘날 갈라디아서 3: 7을 보면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찌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오늘 우리가 모두 아브라함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어 예배받으시려합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무조건 구원얻는 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에게 충격의 메시지를 던집니다


세례요한은 마3:9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는 것이고, 예수님은 마8:11-12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쫒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하나님은 혈육으로 난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서 온 나라와 백성을 주께로 오게 기회를 주셨지만, 그들은 이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통해서 이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시고 계십니다.


둘째의 하나님의 의지는 입니다. 


약속의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약속의 땅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으셨습니다. 셋째는 축복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뜻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이것은 하나님이 한 민족을 만드시고, 그들에게 이름을 주시며, 그들이 열방의 빛이 되고, 열방에게 축복이 되게 하기 위해서 그들을 축복하신 내용입니다. 이것은 첫 부분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결론으로 보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12장은 열방에게 복 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선포하는 것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 출애굽하는 히브리민족에게(19:5-6) - 축복의 중개자

 

본문의 배경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한 때가 왔습니다. 이제는 숫자 상으로 한 국가를 이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세에게 이 무리들을 이끌고 조상에게 약속한 땅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가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조상들과의 약속때문이었습니까? 그렇다면 왜 그 약속을 하셨습니까


그것은 출9:13-16(섬김-worship)에 보면 예배하기 위해서 내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에 예배가 잘못된 그들을 처단하시고 바른 예배가 있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출애굽한 백성들이 한 달쯤 광야를 지나다가 시내산에 머물게 됩니다. 이곳에서 하나님의 또 다른 계획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법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법을 주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은 이들에게 자신의 의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확고하게 선포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의 본문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열방에 복 주시려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았다면, 이 축복의 중개자로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제사장직에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입증되는 것은 시편67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보면 확실히 하나님은 전 인류의 선교를 원하고 계신다는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한 히브리민족에게 첫째는 하나님의 소유가 될 것을 원하셨고, 둘째는 제사장 나라가 되기를 원하셨고 셋째는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제사장 나라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대신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열방들에게 전달해야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거룩한 나라로서 두 가지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는 그들의 왕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이며, 다른 하나는 열방과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기들만의 경건한 무리로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해야 할 것은 사라져버립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출19장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베드로전서 2:9을 보면 당시 이방인 신자들을 향해서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라고 불렀습니다. 이렇게 부르면서 계속해서 2:9을 보면 이는 그들을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을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 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우리로 복음을 전하고 선포하는 하나님의 선교사와 증인이 되게 하려함입니다.

 

. 시편 67

 

시편 67편을 통해서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려는 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은 전 세계인들이 드리는 예배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하나님은 모든 민족으로부터 온 당신의 백성을 구속하시고자 하며, 모든 나라 위에 뛰어난 한 나라를 다스리려 하십니다.


67편은 모든 민족을 복 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입증하도록 우리 모두를 부르셨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2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론과 제사장들을 통해 주신 것(6:24-26)을 모든 민족들에게 적용시키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주의 도를 땅위에 주의 구원을 만방중에 알리소서이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복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창12장의 내용과 같은 것입니다.


이 시편은 세 번에 걸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복을 말하는데, 그것은 1, 6, 7절입니다. 그 구조는 창12:2-3을 거의 똑같이 복사해 놓은 것입니다. 우리에게 복을 주소서, 복을 주소서, 복을 주소서... 그리하여 모든 민족이 여호와를 알게하소서.


결론적인 것은 7절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복을 누리어 이방인들도 복을 받아(구속의 복) 누려서 땅의 모든 끝까지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경외는 두려워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도 있지만 또 다른 뜻은 영광돌린다는 것도 있습니다. 결국 시편기자는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나님이 땅의 모든 족속들에게 주님과 구주로 인정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 솔로몬의 성전 봉헌식(왕상8:41-44) - 스바여왕(왕상10:9)

 

하나님은 모세에게 성막을 만들라고 하십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거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12:5) 다윗은 예루살렘에 하나님이 거하시기 원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손에 피가 많아서 성전을 짓지 못합니다


아들 솔로몬이 아버지의 소망을 이룹니다. 성전을 짓고 난 후 성전 봉헌식에서 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것이 왕상 8장의 내용입니다


기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성전이 있어야 되는 두가지 이유가 나타납니다.


첫째는 자기 이름으로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시는 장소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전은 예배자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높이고 하나님이 역사를 이야기 하는 곳이길 바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만남의 장소 관계의 장소 임재의 장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 중에 41-44을 보면 이방인들이 이 성전으로 와서 주를 경외케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솔로몬은 성전에 거하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하나님임을 알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성전을 세우신 하나님의 목적은 예배하러 온 모든 열방을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기도대로 하나님은 응답하셨습니다. 스바의 여왕이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열방이 자신에게 나아오게 하려는 계획이 이루어지는 데 있어서 늦추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스바여왕을 보내신 것입니다. 물론 스바여왕이 온 것은 솔로몬의 지혜를 시험하고자 왔습니다. 시험 후 스바여왕은 솔로몬의 지혜에 대해서 감탄합니다. 그리고는 그 지혜의 근본인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그는 왕상 10:9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찌로다라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입니다.


조나단 루이스는 선교에 두가지 메카니즘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이 맡은 임무를 수행할 때 두 가지 힘이 작용했습니다. 그 중 첫 번째는 흡인력으로 처음에는 성막이, 후에는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이 건물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하는 장소였습니다. 그곳은 거룩한 곳으로 이스라엘의 종교 의식들과 관행들의 중심지였습니다


하지만 성막과 성전이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솔로몬을 통해서 우리는 보았습니다. 두 번째 힘은 적극적인 팽창력입니다. 팽창력은 이스라엘 경계 밖으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보내기 위한 힘입니다. 다른 나라에 하나님이 메시지를 선포하기 위해서 사용된 사람들로. 요셉, 다니엘 에스더, 요나 등등입니다.


이것은 랄프 윈터가 더 세분화 시켜 놓았습니다. 그의 선교의 네가지 메카니즘은 우선은 팽창적인 원심력이 있는 데, 첫째로 자발적으로 가는 것이 있습니다. 둘째는 비자발적으로 가는 것입니다. 원심력 다음은 구심력인데 흡인적 요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자발적으로 오는 것이 있고, 둘째는 비자발적으로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스바여왕의 경우는 자발적으로 온 것입니다. 성전이 세워진 목적을 이룬 것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자기 때가 지나가기도 전에 왕상 11:1-8을 보면 하나님의 성산 바로 앞에 우상을 세웁니다. 그래서 행7장에 스데반은 공회 앞에서 성전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다고 선포해버립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선지자들

 

에스겔 36: 22-23

하박국 2: 14

스바냐 3: 9-10

말라기 1:11

이사야 56: 6-7, 66:18-21

 

. 요나

 

요나는 비자발적으로 간 선지자입니다


요나서는 선교의 성경적 기초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책입니다. 요나서는 하나님이 이방인들에 관해 자기백성에게 내리신 명령을 다루고 있으며 신약에 나오는 선교 명령의 예비 단계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요나서는 전세계적인 하나님의 일을 해하도록 하나님께 택함을 받는 종이 하나님의 선교 명령에 완강이 저항하는 것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도 중요합니다


요나는 여로보암 2세가 집권하던 때의 선지자입니다

BC8세기 경입니다. 요나와 그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 일에 골몰한다고 열방에 대해서 더 이상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억지로 보내십니다. 즉 억지로 열방에 대한 눈을 열게 만드십니다. 그러나 거부합니다. 이것이 요나서입니다.


사실 구약의 요나는 오늘의 나입니다. 하나님은 악한 니느웨를 향해서 굽히지 않으시고 도망가는 요나를 보내십니다. 요나에게 주는 마지막 메시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요나서 4:10-11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요나에게 그대로 전달되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요나의 반응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습니다. 구약의 요나가 신약에 사도바울로 나타납니다. 아시아로 가겠다는 바울을 억지로 돌리시어 마게도냐로 보내십니다. 그리고는 유대인이 하지 않으니 로마를 들어서 세계복음화를 사용하십니다. 가야 할 곳이 아직 있는데 갈 곳을 고르고 있는 자들과 이곳에 할 일이 많다고 거절하는 이들, 또 왠 준비가 그리 많은지 준비하다가 세월다보낸 이들이 있는 이곳의 우리가 혹 요나가 아닌지 생각해 봅시다.


내가 안 가면 누군가는 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로 하여금 3일의 물고기 뱃속 훈련을 시키시든지, 아니면 지금의 유대인처럼 되든지 할 것입니다. 요나가 많으면 모든 니느웨는 멸망받을 것입니다.


. 결론

 

선교는 교회 생활의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교회는 오직 한 분의 주님 그 안에 하나님의 모든 충만이 거하시고 만물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는 한 분만을 모셔야 합니다. (1:19-2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