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 GSC새벽 큐티설교 <딤후 1:3-10> ==


제목 : 부끄러워하지 말라( 3:17-21 )



[딤후 1:3-10]

(딤후 1:3)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딤후 1:4)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딤후 1:5)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딤후 1:6)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딤후 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딤후 1:8)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딤후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딤후 1: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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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부끄러워 하지 말라(딤후 1:3-10)

 

사도바울을 디모데후서의 서신을 통해서 에베소에서 자신의 후임으로 목회를 하고 있는 아들 같은 디모데에게 목회적 권면과 당부 그리고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디모데후서 115절에 의하면

(딤후 1:15)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는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느니라

네로 황제의 박해시기에 많은 변절자들. 복음과 믿음을 저버리는 이들이 교회안에 생겨 났습니다. 쉽게 말해서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사도 바울을 부끄러워하고 복음에 이탈자들이 생겨났습니다. 바로 그 대표적인 이름이 < 부겔로와 허모게네 >입니다.

 

디모데후서 말씀을 보면서 유독 제 마음에 다가왔던 문구 하나는 

<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 >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디모데 후서 1장에만도 3번이나 등장합니다.

(딤후 1:8)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딤후 1:12)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딤후 1:16) 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이 전한 복음이나 복음을 전한 바울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여기서 쓰여지 <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 에파이스퀴노마이 >는 말은 < 부끄러움 당하다 >는 부정적인 의미을 갖고 있는 동시에 < 부끄러워하지 말고 고백하라 >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냥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은 소극적인 자세를 넘어서 조금 더 적극적인 자세를 포함합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복음을 자랑하며 고백하는 일에 당당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디모데후서 1장에 사도바울의 당부와 권면 사도바울의 분명한 고백과 확신이 뭍어납니다. 사도바울의 디모데의 가슴에 다시금 부어주고 싶었던 강한 확신은 바로 < 복음 >이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는 4번에 걸친 복음에 대한 부탁이 등장합니다.

1장에 < 복음을 지키라 > 2장에 <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으라 >

3장에 <복음안에 계속 거하라 > 4장에 < 복음을 전파하라 >

 

사도바울이 아들같은 디모데를 생각하면 늘 기도와 눈물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기도가운데 항상 디모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디모데를 생각하면 감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늘 기도와 감사는 눈물을 드러났습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를 기억합니다.

오늘 본문 3-5절은 새번역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나는 밤낮으로 기도를 할 때에 끊임없이 그대를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나는 조상들을 본받아 깨끗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나는 그대의 눈물을 기억하면서, 그대를 보기를 원합니다. 그대를 만나봄으로 나는 기쁨이 충만해지고 싶습니다. 나는 그대 속에 있는 거짓 없는 믿음을 기억합니다.“

 

구절에서 사도바울은 < 생각 : 모나오마이>이라는 단어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3-5절에 <생각하다>는 동사를 각구절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정확한 표현은 <생각나게 하는 것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바로 기억하고 회상해보는 것입니다. 자신의 아들 디모데를 생각하고 기억해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의 기억속에 있는 디모데안에 중요한 3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청결한 양심입니다. 둘째는 사랑의 눈물이니다.

셋째는 거짓없는 믿음입니다.


이것은 디모데전서에서 사도바울이 언급했습니다.

(딤전 1:5)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청결한 양심은 이기적이지 않은 마음의 중심을 의미합니다. 양심은 아우런 편견도 없는 공평한 판단력이 아니라 뜻과 행위에 있어서의 <자아인식>입니다. 특별히 <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자유롭게 된 양심 >을 말합니다

.

사랑의 눈물은 사도바울은 디모데와 마지막 작별할 때 흘렸던 눈물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거짓없는 믿음은 <위선적이지 않은 믿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위선적이지 않은 디모데의 부모의 신앙을 잘 전수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누군가의 기억속에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되지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아야합니다.

나는 정말 청결한 양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기억되고 있는지?

나는 정말 사랑의 눈물을 흘릴수 있느 사람이라고 기억되고 있는지?

나는 정말 위선적이지 않는 거짓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는지?

 

저는 종종 제가 사역했던 교회들의 교우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생각해보곤 합니다. 지나온 사역의 현장들을 돌아볼때면 그들은 나를 누구라고 기억하고 있었을까?

 

제가 지난주 달라스에서 한국에서 제가 가르쳤던 제자를 5년만에 만났습니다. 지금 그 친구와 하루를 보내는 특별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들의 학교친구를 함께 만났는데 그 친구들이 저를 알고 있었습니다. 제자 저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했다는 겁니다. < 아 그분이 그분이야 !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

 

문뜩 궁금했습니다. 제자에게 물었죠 < 너 친구들에게 나에게 대해서 뭐라고 말했니? > 라고 물었습니다. 그대 제 제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 제 평생의 맨토라고 내가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고.. >

제 이런 사람입니다. ㅎㅎ

누군가에게 어떻게 이 기억되느냐?는 우리의 삶의 내용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를 생각할 때 < 양심/ 눈물 / 믿음 >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신의 기억속에 있는 디모데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6-7절을 새번역을 읽으면 이런 이유로 나는 그대를 일깨워서, 그대가, 나의 안수로 말미암아, 그대 속에 간직하고 있는 하나님의 은사에 다시 불을 붙이게 하려고 합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

 

다시 바울은 디모데의 가슴을 뜨겁게 하고자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강한 어조를 도전하고 있습니다.

(딤후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바슬레이 슐링크 < 예수님과 멀어지게 된 45가지 이유 >

우리 안에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 두 가지가 공존한다. 하나는 온 세상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즉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십자가를 거부하는 것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10:38).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2:3)

 


<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는 말씀이 < 복음과 함께 복을 받으라 >가 되면서 기독교 신앙은 변질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 고난을 받으라 >는 도전은 < 나와 함께 고난에 동참하라 >는 초청과 같은 것입니다. 바울의 복음을 향한 초청은 바로 고난의 자리로 한걸음더 나아가는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사는 것

복음을 위해서 살아내는 것

그것은 고난을 경험하는 일입니다.

 

(딤후 2:11)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복음을 위해서 살겠다고 작정하는 일은 주와 함께 죽으러 가는 것을 작정하는 일입니다. 동시에 복음을 위해서 살아내는 것은 주와 함께 살아나는 입니다.

 

주님을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땅에서 청결한 양심과 사랑의 눈물 그리고 거짓없는 믿음을 기억할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복음 때문에 복음을 위해서 당한 고난을 기억할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 가장 즐겁게 우리와 함께할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을 위한 우리의 당부이며 요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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