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5 GSC새벽 큐티설교 <3:17-21> ==


제목 : 나를 본 받으라 ( 3:17-21 )





[3:17-21]

(3: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3: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3:19)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3: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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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나를 본 받으라 ( 3:17-21 )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나를 본 받으라 고 말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의미는 잘 연단되고 만들어지 틀을 수요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서서 < > 이라고 말하는 말은 <튀포스>인데 <튑토>라는 단어에서 나온말입니다. 튑토라는 말은 < 무언가를 때리고 쳐서 만들어진 틀 / 흔적 / 자취 / 모형 >을 말합니다.

< >은 사도바울의 말씀대로 살려고하는 온전한 경건, 복음대로 살아내려는 삶의 내용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자주 사도바울은 이 < 본받는 것 >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뿐이 아니고 고전 11:1절 에서도 똑 같은 말을 했습니다.

(고전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살후 3:9)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살전 1:9)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살전 1: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살전 1: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살전 1: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사랑하는 여러분. 누군가에게 < 나를 본 받으라 / 나 만큼 해 / 나처럼 해 >라고 말하기는 것이 쉬운 일까요? 어려운 일일까요?


성도들의 본이 되어야하는 목자인 저 자신부터 이러한 권면과 요청은 쉽지 않습니다.

< 집사님 저를 보시고 아시고.. 제가 어떻게 살고 있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제발 저처럼만 해보세요. 저를 본받아 보세요 > 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제 딸 엘림이도 자주 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 아빠 목사님이잖아 목사님 왜그래 이런 말을 들으때면 마음이 찔립니다.

 

우리의 풍습으로 보면 이 같은 말은 좀 교만한 말 같이도 들리고 좀 지나친 과신 같기도 한 느낌이 드는 그런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풍습으로는 나를 본 받으라는 식의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말을 하게 된 사도바울의 심정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사도바울이 자신을 본받으라고 했을까요?

어떤 의도에서 자신을 본받으라고 했을까요?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은

< 바울 자신이 얼마라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자신을 쳐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며 몸부림 치고 있는가? 그리고 그리스도를 본 받으려고 할 때 세상의 헛된것들에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죽고 있는가?

바울 자신이 얼마나 복음을 위해서 살기로 결단하고 그 복음을 살아내고 있는가 ? >

 

나를 변화시키지 못한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 복음으로 내가 변화된 것이 없다면 나는 다시 복음을 들어야한다. < 나를 향한 복음이 먼저이다. 나의 변화가 먼저이다. >

 

# 목회 그 위험한 부르심


자기를 향한 복음이 없다. 세상은 향한 복음은 외치지만 매일 같이 자신을 향한 복음을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복음이 외침에 불과 하고 복음이 아무 변화도 일으키지 못한다.

 

이것에서 바울의 < 나를 본받으라 >라고 말하는 이러한 자신감? 용기 ?가 나오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이 말씀을 옥중에서 밖에 있는 성도들에게 들려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옥중에 앉아 있는 바울은 지금 밖에 있는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걱정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는 사회적으로 굉장한 무질서가 있었고 신앙적으로는 이단들이 침투해 들어오고 있는 때 였습니다. 또한 세속적인 풍조가 교회까지 파고 들어 오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생활의 기본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옥중에 앉아 있는 바울은 밖에 있는 성도들이 걱정이 됩니다.

 

미셔널 처치 세미나 < 나침판의 정북 방향을 행하기 위해서 계속 떨림을 갖고 있다 > 교회가 본질적 교회에 대한 떨림. 복음에 대한 떨림, 선교적 교회에 대한 떨림이 있어야한다. 성도는 선교적 삶과 여정에 대한 떨림을 갖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바울은 두고 오는 성도들이 미덥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밖에 있는 성도들이 흔들림이 없이 신앙생활을 하게 하기 위하여 무엇인가 지침을 내려 줄 필요를 느낀 것입니다. 이같은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로서 어떤 권위 있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을 제시 해 줄 필요를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하게 된 말이 나를 본 받으라 는 말입니다. 뿐만아니라 17절에서 나와 함께 행하는 자들을 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나와 함께 행하는 자는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서서 < 보라 >는 의미는 < 주시하고 주목하고 보라 >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세상이 혼탁한데도 불구하고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혼신을 다해서 십자가의 삶을 살고 있으니 그들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8절에서 말하기를 내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노니 너희는 십자가의 원수가 되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너희만은 그렇게 살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삶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19절에서 세 가지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배로 하나님을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번영신학. 기복신앙. 자기중심

탐욕의 복음의 교회를 망치고 있습니다.

저희의 신은 배요”(19) 이 말의 뜻은 지금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 살아가고 있는 목적이 배를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즉 배를 위해서 온 신경을 다 쏟고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본질을 놓치는 것입니다. 선교가 어느 순간 교회의 부수적 사역이 되어버린..

 

사람들이 즐기며 살아가기 위해서 예수도 다음이고, 하나님도 다음이고, 오직 관심은 먹고 즐기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염려하고 있는 그 당시의 세상풍조 입니다.

어느 시대나 이 배가 문제 입니다. 배를 채우는 문제, 이 세상에서 가장 기본급의 문제가 이 배의 문제입니다. 지금도 하루에 순전히 배를 채우지 못해서 죽어가고 있는 인구가 1만명씩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굶어서 얻은 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인구가 10만명씩이나 된다고 합니다. 배고파 보지 않은 사람은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가를 모릅니다. 배가 고프게 되면 나머지 문제는 모두 다음 입니다.

 

로마제국에서 가장 큰 문제가 이 문제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매일 같이 먹는 일로 소일했습니다. 매일 같이 연회를 베풀고 먹고 마시는 일로 즐기고 살았습니다. 나중에는 이 일이 더 심해져서 싫토록 먹고 약을 먹고 토해 내고 또 싫 토록 먹고 마시고 약을 먹고는 토해 냅니다. 그래서 하수구에 흐르는 물이 파란색으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나라가 온전하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역사가는 로마의 멸망은 저 하수구의 파색깔에서 비롯되었다고 까지 말했습니다. 물론 사람은 먹고 배가 불러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삶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는 말입니다. 그것이 생활의 전부가 되면 그것이 곧 신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배의 신앙 입니다. 하나님 보다 배를 더 중시하고, 신앙 보다 먹는 문제에 더 우선하고, 예수 보다 세상을 더 좋아하면 그것은 모두 배를 신으로 삼고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배의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눈물로서 당부한 첫번째 당부 입니다.

 

두번째는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여지기 말라는 당부입니다.

위대한 교회가 위험한 교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세상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오래입니다.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다”(19)

어거스틴은 그의 참회록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젊었을 때는 죄를 짓는 일이 장쾌한 일로 인식되었었다. 그래서 큰 죄를 지을수록 남자 답게 인식되었었고 자랑스러웠다. 그래서 동료들은 그것을 부러워 하기 까지 했었다. 그런데 새 사람이 되고 보니 그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었는지 모른다고 술회 했습니다.

 

교회와 성도는 세상이 부러워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에 부끄러운 공동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을 가만히 살펴 보십시요. 오늘은 마땅히 부끄러워 해야 할 것들이 자랑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아무런 변화가 없는 성장은 자랑일까요? 부끄러움 일까요?

사도 바울은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여기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마땅히 부끄러워 해야 할 것들이 영광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여기지 말라는 말을 할 그 당시에 가장 큰 이단이 있었습니다. 것이 에피큐리안이즘이라고 하는 정신적 쾌락주의입니다. 영지주의입니다.

 

이 사람들은 영만 깨끗하면 되지 육신은 마구 둥굴려도 죄가 않된다고 우기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습게 살았습니다.

 

디오게네스 같은 사람은 통 속에서 쪼구리고 살았습니다. 사람이 마음만 평안하면 됐지 생활은 어떻게 해도 괜찮다고 하며 무질서 하게 살았습니다. 그들은 개 같이 사는 것을 영광으로 알고 개 같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이것을 부끄러운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질서도 없고, 정돈되지 않은 삶은 무질서한 삶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질서 있는 삶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것이 영광인 줄 알고 살았습니다. 그것이 또 진리인양 성도들이 자꾸만 유혹되어 따라 갑니다. 그래서 경고하게 된 것 입니다. “너희는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삼지 말라이것이 눈물로서 당부한 두번째 부탁입니다.

 

세번째 당부는 땅의 일만 생각하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저희는 땅의 일만 생각하는 자라”(19)

 

신앙생활은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 보는 생활입니다. 뜻을 하나님의 나라에 두고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내 육신은 비록 이 땅에서 살고 있지만 내 정신과 마음과 뜻은 하늘에 두고 살아가는 생활, 이것을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몸은 하나님 앞에 나와 있는데 정신과 마음이 모두 이 세상에 깊이 빠져 있기 때문에 문제 입니다.

우리의 정신이나 뜻, 그리고 관심이 이 땅 위에만 집중되어 있으면 영적인 생활은 소멸되고 맙니다. 뜻을 잃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관심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완전히 땅의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속물이 되는 것입니다.

 





@ 어떤 어린아이 하나가 길을 가다가 동전 하나를 줏었습니다. 이 아이는 그때부터 동전 줏는 재미로 땅만 쳐다 보고 살았습니다. 덕분에 땅에 떨어진 물건들을 많이 줏었다고 합니다. 일평생 줏어 모은 것이 단추 29,519, 머리핀 54,172, 동전 수천개를 줏었습니다. 그런 것을 줍느라고 그는 일생 동안 하늘의 푸르름을 보지 못했습니다. 저 아름다운 태양도 보지를 못했습니다.

 




더구나 세상의 자연과 꽃들의 아름다움 조차 보지를 못하고 오직 땅만을 쳐다 보고 살아 온 것입니다. 이것을 넝마주이 인생이라고 합니다. 넝마주이 인생에게는 꿈이 없습니다. 저 하늘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있다면 오직 땅에 널려 있는 쓰레기 뿐입니다. 그래서 땅에만 관심을 갖고 살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3:7-11]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3: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관심을 두고 사십니까.

여러분을 지금 움직이고 있는 제일의 관심이 무엇 입니까.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다 뜻을 두고 살아가십니까. 사도바울은 지금 옥중에 앉아서 밖에 있는 성도들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눈물로서 서너가지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1) 배로 신을 삼지 말라.

2) 부끄러운 것을 영광인줄로 착각하지 말라.

3) 땅의 일에만 너무 골몰하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멧시지 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깊은 깨달음과 하나님의 새로운 격려가 여러분에게 있으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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