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SC 새벽 큐티 설교 <사도행전 20:25-38> ==


제목 :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312장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If Thou but stuffer God to guide Thee]



Georg Neumark 작사(1621-1681)


이 찬송가를 작사 작곡한 <게오르크 노이마르크>는 중부 독일 랑엔살차(Langensalza)에서 태어났습니다. 노이마르크는 많은 역경과 고통을 믿음으로 인내하여 승리한 사람으로, 그 대부분의 찬송시를 고난의 시기에 썼습니다.


이 찬송가는 그가 스무살이 되던 1641년에 지은 것입니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노이마르크는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쾨닉스베르크로 떠났습니다. 일련의 상인들의 틈에 끼던 중, 강도를 만나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기도서 한권과 옷 속에 넣고 꿰매버린 동전 몇 개뿐>이었습니다. 대학에 진학하려던 그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고, 직장을 구하려고 애썼으나 30년 전쟁의 당시로서는 허사였습니다. 그는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걸식으로 연명하였습니다. 추운 12월이 되서 그는 키일(Kiel)이라는 도시에 도착했습니다.


그 곳에서 목사로 일하고 있던 옛 친구를 만나게 되었고 그 친구의 주선으로 스테판 헤닝 판사의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방황과 걸식>이 끝난 기쁨은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그의 길을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 그는 당장 붓을 들어 이 곡을 작사 작곡하였다고 합니다.


노이마르크는 1643년 쾨닉스베르크로 가서 그가 원했던 법학을 공부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총 34편의 찬송시를 지었는데 그 중에서 이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Wer nur den lieben Gott laesst walten 독일찬송가 298)이 가장 유명합니다. 바하는 이 곡조로 그의 칸타타 93번을 작곡하였고 멘델스존도 칸타타 8사도 바울에 이 곡을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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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8]

(20:25)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20:26)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20:27)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20: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20:29)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20:30)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20: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20:32)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20:3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20:34)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20:35)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20:36)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20:37)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20:38)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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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한국의 기독교 신앙에서 있어서 가장 독보적인 신앙의 전통은 < 순교적인 신앙 >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일제의 지배와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민족의 격동기와 함께 한국의 기독교 신앙은 발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입니다. 이러한 때마도 신사참배와 같은 강력한 신앙의 도전앞에 맞서서 믿음을 지키고 진리를 파수하는 믿음의 거장들을 보게 됩니다. 흔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주기철 목사님과 같은 분이죠.


1940년 주기철 목사님이 옥에 투옥되기 전에 그해 여름에 남긴 마지막 설교의 내용은 아직도 우리에게 많은 도전을 줍니다.





설교의 마지막에 이런 내용으로 설교를 하십니다.

주님을 위하여오는 고난을 내가 피하였다가 다음에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옥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누리고

고난 의 잔 은 어찌하고 왔느냐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 하랴!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 를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다음 주님이 너는 내가준 유일한 유산 인 고난의 십자가 를 어찌 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 하랴 ! ”


주님이 우리에게 사명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사명으로 죽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모두다 주님 앞에서 설 때 우리에게 물으실겁니다.

고난의 잔을 어찌하고 왔느냐 ?” “ 너는 나를 위해 어떤 고난을 감수했느냐 ? ”

우리의 믿음의 신앙중에 우리에게 강한 도전이 되는 몇가지 신앙 있습니다.


여주동행 : 주님과 날마다 동행하는 삶 ” 

지사충성 : 죽기까지 충성하는 삶

일사각오 : 한번 죽을 각오를 하면 사는 삶

 

주기철 목사님은 옥고를 치르고 돌아가시기 까지 시간이 날때마다 설교시간마다 

< 일사 각오 >의 삶을 강조하셨습니다.


신사참배문제로 투옥직전에 그의 설교 주제는 <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가자 >였습니다. < 예수 따라 일사각오, 남을 위해 일사각오, 부활의 진리위해 일사각오 >였습니다.


생사여탈의 대권을 잡은 임금앞에서 그 죄를 책망하는 세례요한도 일사각오였고 나단이나 낙스, 루터 역시 일사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일사각오 연후에 예언하는 것이요. 그런 일사각오로 예언자의 권위가 서는 것입니다. 여러분 몰라서 말 못하십니까? 왜 벙어리 개가 되었습니까? 오늘의 목사도 일사각오를 갖은 연후에 할말을 하고 목사의 권위, 예언자의 권위가 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개 순사앞에서 쩔쩔 매고서야... 부활의 복음이 우리들에게 이르기까지 피로써 전하여 왔습니다. 로마제국의 잔혹한 박해 아래 50만 성도가 피를 흘렸습니다. 로마 교황의 핍박아래 100만 성도가 피를 뿌렸습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은 피로써 쓰여졌고 피로써 전하여 졌습니다. 피로써 전하여진 부활의 복음을 우리가 또한 피로써 지키고 전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자고 다짐하였던 도마의 일사각오 다짐은 오늘 우리에게도 요정되어집니다. ”

 

이러한 일사각오의 원조는 오늘 본문 사도행전 20장에 사도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의 장로와 감독들.. 교회 리더십들에게 해준 마지막 고별설교. 마지막 당부와 권면에서 더 분명하게 볼수 있습니다. 아마도 주기철목사님과 같은 믿음의 선배들은 바로 사도바울을 이 아름다운 일사각오의 본을 따라서 살았던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고 있는 본문의 분위기는 아주 비범하면서 아주 슬픈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이제 여러분의 얼굴을 다시못할 것 같습니다. 라고 하는 바울의 말속에는 사도바울의 비장함과 아쉬움이 담겨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주기철 목사님의 고백처럼 자신이 지금 죽으러가는 자리로 고난의 잔을 마시러 자신이 자기 발로 나아가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 걸음의 그의 인간적인 결심이나 결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성령의 매인바되고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 하는 삶에서 나온 것입니다. 어떤 인간적인 생각이나 어떤 인간적인 주저함도 없이 그를 강력하게 붙들고 이끌고 계시는 성령님의 강권하심과 이끄심이 그로 하여금 주를 위해 죽기를 각오하는 삶으로 그를 이끌고 있습니다. 


이제 내가 무엇을 두려워 하리고. 이제 내가 무엇을 무서워하리오.. 오직 예수. 오직 복음. 오직 사명을 따라 그 걸음을 성령의 매인바 되어서 그 길을 가고자 합니다. ”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죽음과 고난을 감지하고 그 자리로 스스로 걸어 들어갈 각오 바로 일사각오의 모습으로 오늘 이 권면과 당부를 하고 있습니다.

(20:27)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사도바울은 하나님과 사람에 복음의 증언자로써 복음의 전달자로써 < 꺼리길 것이 없는 사람 >이었습니다. 그는 최선을 다해서 당당하게 주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은 소명을 따라 행동합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은 생명을 그 사명을 위해 사용합니다.


[21:12-13]

(21:12)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21:13)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운 사람은 바로 < 죽기를 각오한 사람 >입니다.

죽기 살기로 잠깐 사는 사람이 있고.

죽기 살길로 영원히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부류의 사람입니까?


사도 바울의 신앙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으니 그의 말과 행동이 < 거리낌이 없습니다. >. 일사각오의 신앙의 가장 큰 도전은 < 거리낌없이 사는 삶 >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눈치보지 않고 세상에 비굴하게 무릎꿇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사거나 맞추지 않으려 하는 오직 복음의 합당한 것이 전부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저는 사도바울을 마지막 당부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에게 묻습니다. < 너는 얼마나 거리낌없이 전하고 얼마나 거리낌없이 살고 얼마나 거리낌없이 생활하고 있는가? > ... 여전히 부족한 삶을 돌아봅니다.


사도바울이 자신이 에베소 교회를 3년동안 목회를 할 때 어떤 마음으로 교우들을 섬겼는지가 나옵니다.

(20: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역과 목회를 어떤 마음을 그 일을 감당했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20:19-21]

(20:19)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20:20)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20: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사명의 동기는 겸손과 눈물이었습니다. 사명의 과정은 시험과 고난이었습니다.

사명의 결과는 거리낌없이 전한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증언이었습니다.

어제는 바울이 자신의 삶을 겸손과 눈물 로 참았다고 말하고 있고

오늘은 바울이 자신의 사역을 눈물과 훈계 로 섬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역할수 있는 원동력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20:32)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 주와 그 은혜의 말씀 >이 그로 하여금 <겸손과 눈물>로 참게 만들었고, <눈물과 훈계>로 섬기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교회의 리더십들에게 너희가 삼가라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고 사랑하는 교우들이 주와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능히 든든히 서있길 원한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주와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사도바울은 <눈물>이 있는 사역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부탁하면서 두 번이 < 눈물 >이 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교회 리더십인 < 감독과 장로들 >에게 부탁하고 당부합니다.


< 교회를 다시리고 치리할려고마 하지 말고 그들을 마치 양떼를 돌보듯이 보살시고 돌보아야 한다. 특별히 주와 은혜의 말씀으로 그들을 세우고 일으키고 어떤 악한 거짓교훈이 들어오지 않도록 그들이 깨어서 지켜야합니다. >라고 합니다.

 

바울은 감독들에게 자기 대신 교회와 교우들을 잘 부탁하는 당부를 하고 있습니다


감독이라고 해서 성도들을 감시하고 감독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감독자들은 < 돌보자는 자>들입니다. 권세를 부리거나 다스리는 자가 아닙니다


돌보는 자들입니다. 성도들의 연약함을 돌보고 성도들의 약함을 든든히 주와 은혜의 말씀으로 세어야가야 합니다.


바울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이라면 < 교회의 리더십은 돌보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마르지 않는 눈물을 가진 사람이어야합니다. >는 것입니다


군림하거나 다스리는 자가 아니라. 연약함을 돌아보고 입에나 나오는 말이 은혜의 말씀이어야 하고 행하는 행동이 복음과 진리의 말씀에 합당해야합니다. 그들의 눈에는 마르지 않는 눈물이 있어야합니다.


(20:35)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우리는 < 나에게 어떤 본이 될만한 것이 있는가 > 물어야 합니다.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주는 일이 복이라는 것을 고백을 하는 넉넉한 믿음의 소유가자 바로 교회 리더십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사도바울이 아주 인상적인 내용을 삽입합니다.

(20:3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20:34)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이것은 일종의 사도바울을 받았던 오해들이 있음을 알수 있는 대목입니다.


어떨 때는 오해만 하지 않아도 80% 이해한 것입니다.

오해만 하지 않아도 이해해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도바울의 마지막 당부가 있은후에.. 눈물의 송별이 진행됩니다.


(20:37)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20:38)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사도행전 20장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에게 계속 되내이고 있습니다. “ 너는 지금 어떤 각오로 살고 있니 ? 너는 거리낌없는 사역과 삶을 살고 있니? 라고 묻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이 비범하고 독보적인 고백은 복음의 일꾼으로 자처하는 우리에게 강한 도전이 됩니다. 우리의 삶의 지표와 방향을 지시해주는 것 같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처음 불렀던 찬송가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찬양의 마지막 가사처럼

(3) 주 찬양하고 기도하며 네 본분 힘써 다하라

주 약속하신 모든 은혜 네게서 이뤄지리라

참되고 의지하는 자 주께서 기억하시리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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