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가복음 9:1-13>
  •  저희가 이해하지 못했던 영광스러운 고난
  • 07/24/2014 새벽묵상 설교 


@ 설교문중에 그림은 인터넷 갈무리함 


제목 : <마가복음 9: 1 - 13> 저희가 이해하지 못했던 영광스러운 고난



[마가복음 9:1-13]

1.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3.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만큼 심히 희어졌더라

4.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나타나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거늘

5.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6.이는 저희가 심히 무서워하므로 저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함이더라

7.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8.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 뿐이었더라

9.저희가 산에서 내려 올 때에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10.저희가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11.이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2.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13.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임의로 대우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제목 : 저희가 이해하지 못했던 영광스러운 고난

 

오늘 말씀 마가 복음 9장은 우리 잘 아는 < 변화산에 예수님의 제자 3인방 >과 함께 올라가서 거기서 주님이 받으실 고난과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여전히 제자들은 그 놀라운 관경을 목격하면서도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흔히 오늘 본문을 <변화산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먼저 주목해야할 사실은 이 변화산 사건이 언제 어디서 있었느냐 ?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마가복음 91절에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자들도 있느니라 >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조금더 정확히 번역하면 < 여기 서 있는 자들 중의 몇사람은 죽기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음을 또는 임하여 있음을 볼자들도 있느니라 >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강조하게 위해서 쓰여진 시제는 < 목적격의 완료 능동 분사 3인칭 단수>가 쓰여졌습니다. 


실제로 오늘 마가복음 91절은 변화산 사건이전에 주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앞절에 마가복음 827절에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있었던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함께 연결해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 주는 그리스도 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하는 이 놀라운 복음 선언, 복음적 고백에 대해서 예수님도 자신이 숨겨두었던 고백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 여기 있는 자들중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했음을 느끼는 자들.. 아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 이것은 예수님의 선지자적 선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의미 >와 제자들이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의미 >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을 본다 >는 개념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공생애의 사역을 통해서 병자들을 치유하고 죄인들에게 죄사함을 주는 것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하나님 나라의 실현과 도래를 의미합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가장 결정적인 방식은 바로 < 예수님의 고난 받으심과 죽음 그리고 부활 >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생각하는 <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의미 >는 다분히 정치적인 것이었습니다. 로마의 지배에서 해방을 의미하며 그들의 해방자로써의 메시아의 역할을 기대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이 이땅에오심으로 이미 실현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왕적 통치가 이미 예수님을 통해서 실현되고 있으며 사탄의 왕국을 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하나님 나라의 완벽한 다스림이 시작되었고 승리가 선언되는 그런 놀라운 사건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나라가 겨자씨처럼 볼품없이 눈에 금방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 계속 자라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식해야합니다.

 

참 재미 있는 것은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제자들은 모습속에서 오늘 그들처럼 예수님을 따르고 믿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많이 봅니다. 솔직히 제자들의 모습들은 황당하기 보다는 어쩌면 우리의 신앙과 너무도 닮아 있어서 정겹기도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보여주신 놀라운 기적이 보았음에도 여전히 믿음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대해서 정확히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보여주신 놀라운 일들에 대해서 자기식으로 믿고 이해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들은대로 살지 못하고 자기가 아는대로 살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놀라운 신앙고백은 있었지만 그 고백에 어울리는 삶의 결단은 없었습니다.

 

믿음의 과정은 바른 고백과 정확한 이해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과정은 바른 고백과 정확한 이해위에 믿음의 행동이 있어야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럴싸한 고백은 있었지만 예수님의 복음,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에 대한 이해력이 떨어졌습니다. 그러니 어떠한 믿음의 행동도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변화산에 사건에서 제자들이 한일은 그 관경속에서 여전히 < 두려워하고... 초막셋을 짓겠다... 진짜 엘리야는 언제 오느냐 ?>라고 하는 그런 황당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자기들을 변화산으로 데려가셔서 그 놀라운 관경을 보여주셨는지? 그 변화산에서 예수님은 어떤 분인지?를 눈으로 목격하게 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고 그 변화산 사건이후에 내일 본문이지만 < 악령에 들린 소년을 고치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는 제자들의 믿음의 행동 >이 이어집니다.


믿음은 놀라운 고백만큼이나 정확한 이해와 그때 따르는 행동이 중요합니다.

 

최근에 나오는 책중에 참으로 인상적인 책이 있습니다.

카일 아이드먼 < 제자는 행동한다. aha 법칙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카일 아이들먼 미국 켄터키 주 루이빌에 있는 사우스이스트 크리스천교회의 교육목사이며 [팬인가, 제자인가], [거짓 신들의 전쟁]의 저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입니다.

깨달으라, 정직하라, 행동하라!!

더 이상 믿는다고 말만 하지 말라
진짜 제자에게는 반드시 변화된 삶이 나타난다

이제 그만 읽어라이제 그만 구경하라
이제 그만 말하라이제 그만 놀아라!
행동할 때가 되었다!


많은 이들의 삶에서 아하’ (AHA, 각성 Awakening, 정직 Honesty, 행동 Action의 첫 글자를 조합해서 저자가 만든 단어)가 일어나지 않는 까닭이 바로 그것 때문이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깨닫게 되는 놀라운 사실은

제자는 더 이상 믿는다고 알고 있다고 고백만 하지 말고 그 믿고 고백한데로 살아내는 사람입니다. 제자는 변화산에서 머물러 있는 것으로 도취되어서 그곳에 머물기를 좋아하는 것에 멈추지 말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그 일에 이루는 것이 중요한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에 소위 < 변화산 변형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왜? 예수님께서 이 소위 3인방 베드로 <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을 데리고 산에가셔서 예수님이 어떻게 변화되시는지? 예수님이 누구와 함께 있는지?를 보여주셔야 했을까?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 마가 복음 92절 에 <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고백이 있었던 엿새후에.. 그리고 가이샤랴 빌립보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산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갑니다. 아마다 그때가 초막절이 가까운 때였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라고 급하게 뭔가 그날의 감흥을 말하면서 < 초막 셋을 짓겠다 >고 하는 말을 보면서 아마도 < 초막절 전 >이 였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생각합니다.


그러한 정황을 고려할 때 왜? 예수님은 제자들의 데리고 가셨으면 왜? 예수님은 자신의 변형된 모습을 보여주셨으며 왜? 성경의 많은 인물중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했을까?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바로 그것은 예수님은 그곳에서 제자들에게 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 자신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영광 >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오늘 이 변화산 사건은 마치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로 올라운 < 시내산 > 사건과 아주 비슷합니다. 출애굽기 24장을 보면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엿새후에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시내산에 오를 때 3사람을 데리고 갑니다. < 아론 나답 아비후 >를 데리고 갑니다. 오늘 본문에도 3명의 제자들 대리고 갑니다. 그리고 임재의 구름이 등장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학자들은 < 모세 모형론 >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모세에게 시내산에 십계명을 주시고 그 영광된 하나님의 임재의 현장을 보여주고 모세의 얼굴이 빛이 나는 경험을 하게 해주십니다.

 

오늘 이 변화산 사건은 구속사적 성경해석으로 이해해 볼 때 < 신약의 시내산 사건 >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모세의 출애굽 사건에 중심에 시내산이 있었듣이 신약의 예수님의 구원사건과 연결고리 연할 하고 있는 것이 바로 변화산 사건입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 두 사람의 등장이 주는 의미는 구약의 대표자, 한사람은 구원의 대표자, 한사람은 선지자의 대표자 역할을 한 두사람이 예수님과 어울려 있는 모습을 통해서 구약의 메시야 예언이 이제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고 있으면 동시에 과거의 모세의 역할, 엘리야의 역할을 예수님이 동시에 감당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과 사건을 눈으로 보았던 제자들의 반응은 당황스러움과 두려움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은 뭔가 이 느낌을 말해야 하기에 < 초막셋을 짓겠다는 어이없는 발언 >을 합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대한 고백중의 하나가 아니라 <그의 오해에서 비롯된 발언>입니다. 베드로는 대단한 고백도 잘 하지만 대단한 실언도 잘합니다. 나머지 두 제자는 여전히 심히 두려워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소리가 들립니다. <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희 말을 들어라 >는 소리가 들입니다. 이장면은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과 비슷합니다.


그때 아주 인상적인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8절에 <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 뿐이었더라 >

저는 < 오직 예수와 자기들 뿐이었다라 >는 대목이 인상적입니다.

결국에는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 오직 예수와 우리 자신들 >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인 오직 예수와 그 믿음대로 제자의 삶을 살기로 결단하는 우리 자신들...

 

예수님의 보여주신 변화산의 모습을 잠깐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변화산의 장면의 도취될 즈음에 그리고 제자들이 여전히 예수님의 메시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10절 저희가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11절 이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제자들은 < 부활이 무엇인지 ? 엘리야가 누구였는지 ? >모르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엘리야의 역할을 했다는 말라기의 예언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의 가장 큰 의문은 < ? 메시야가 고난받고 죽어야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숨은 욕심은 < 고난없이 영광 >을 취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 고난없이 영광 >을 취하고 싶은 마음은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 고난없이 영광 >을 누리는 것은 우리안에 < 쉽게 무너질 믿음 >만 만들어 냅니다.

 

여실히 제자들의 모습에서 < 고난없이 영광 >을 구하는 모습을 봅니다.

아무런 능력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는 믿음이 참믿음이 아니라 거짓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 저들이 알지못했던 영광스러운 고난 >에 대해서 말씀해고 계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오래했다고 교회 오래 다녔다고 복음의 말씀을 많이 들었다고 다 알고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도 많은 부분에서 우리는 제자들처럼 모르고 있거나 오해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놀라운 고백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있다면 우리가 바르게 이해하고 바르게 믿는 것입니다. 오늘 변화산의 사건은 베드로의 가이사랴 빌립보의 고백이후의 사건입니다. 그 이후에 변화산이 주는 의미는 우리가 어떤 영광스러운 고난에 참여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제자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변화산의 어떤 신기한 해프닝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주님의 고난과 부활에 참여할 때 주어질 영광스러움이 무엇인지?을 알려주고 말씀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말씀을 핵심주제이며 목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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