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문제와 하나님의 정의


- 선한청지기교회 김명구 목사 요약정리-


□ 저자: 톰 라이트

영국 성공회의 주교로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맥길 대학교에서 신학학을 가르침. 웨스트민스턴의 참사회원 신학자로 활동함.

연구 프로젝트 : 기독교의 기원과 하나님의 물음

저서: 톰 라이트와 함께하는 기독교 여행, 신약성서와 하나님의 백성,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 하나님의 아들의 부활, Jesus 코드, 예수 나를 따르라 등

 

 

    악의 문제를 특정짓는 구체적인 결과들

 

악이 우리를 정면으로 공격하지 않을 때 악을 무시한다.  

가난한 나라가 장기적 채무에 시달리는 것이 세계의 양심을 괴롭히는 중대한 문제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그 문제를 별로 심각하게 바라보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세상은 대체로 잘 굴러가고, 그런대로 잘 나가는 경제를 흔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악이 우리를 정면으로 공격해 오면 우리는 깜짝 놀란다.

살기 좋고 안전한 곳이라 생각되는 곳에서 아이들이 잘 알고 믿었을 사람에게 살해 당했을 때 심각한 충격을 받는다.   충격을 받는 이유는 이 세상이 기본적으로 괜찮은 곳이라 생각하며 많은 이익을 내고, 많은 것을 알게 해 준다고 믿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또한 해변을 덮쳐오는 해일을 보면서 충격을 받을 뿐 아니라 크게 당황하고 만다.  과거 돌림병으로 많은 사람이 죽은 이야기도 우리의 생각 속에서 완전히 추방되었다.  이런 일들은 고통을 생각나게 하는 것들에 이미 감각이 무뎌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악이 우리를 정면으로 공격하지 않으면 악을 무시하고, 악의 공격을 받으면 충격을 받고 당황한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악에 대해 미숙하고 위험한 방식으로 반응한다.  

다른 행위의 영역에 고르고 사려깊게 배분되어야 할 도덕적 분노가 한가지 죄악에 집중된다.  9/11 사건에 대해 미국에서 일아난 반응도 그 한가지 예이다.  9/11은 총을 소유한 모든 사람을 감옥에 보내야 한다거나, 모든 사람이 총을 지님으로써 착한 사람이 나쁜 사람의 술수에 걸려들기 전에 그들을 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 역시 사태의 깊이를 읽지 못한 잘못된 사고의 결과이다의회의 입법이나 철학적 논쟁을 통해 악을 제거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성능 폭약 역시 악을 제거할 수 없다.

 

악에 대한 2가지 반응

하나는, 남을 탓하는 문화를 만들어 악을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항상 다른 사람의 잘못이고, 사회의 잘못이고, 정부의 잘못이며, 자신은 무고한 희생자라고 여기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악을 자신에게 투사하여 모든 일에 대해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다른 모든 사람을 탓하는 문화와 자신을 탓하는 문화는 둘 다 악의 문제에 대해 미숙하고 부적절한 반응이며 이것이 현재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악의 문제이다.

 

 

    하나님은 무엇을 하실 수 있는가?

악은 단순히 철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인 문제이다.  서구민주주의 자체를 지구적인 악의 문제에 대한 자동적인 해결책으로 간주해서는 안되며, 초인간적인 악의 권세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선과 악의 경계선이 '우리' '그들' 사이를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개인과 모든 사회를 관통한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서구철학의 전통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악에 대해 무엇을 말씀하실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기대하고 요구하도록 부추긴다.  우리는 악이 정말 무엇인지, 왜 악이 처음부터 존재하고 있었는지, 왜 악이 지속되는 것이 허용되는지, 그리고 얼마 동안이나 지속될 것인지 등을 알고 싶어 한다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말하지 않는 것 처럼 느껴진다.  대신 구약성경은 하나님이 악에 대해 무엇을 말씀하신는지 보다, 악에 대해 무엇을 행하실 수 있고, 행하고 계시며, 또 장차 행하려고 하시는지를 말해준다.  

구약성경은 족장들의 이야기로부터 출애굽, 모세, 다윗, 이스라엘의 바벨론 유수의 과정에서 반역한 인류와 이스라엘을 포함한 모든 인간 개개인이 자신이 죄악되고 우상숭배적이며 마음이 완고하다는 것을 보여준다아직도 불평불만이 가득하고 반항적인 백성인 것을 보여준다.

 

    악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하나님

'예수님이 왜 죽으셨는가?' 라는 질문을, '하나님의 목적 속에서 예수님이 왜 죽으셔야만 했는가? 라는 더 심층적인 문제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사건과 동기에 대한 역사적 분석으로 부터 하나님이 악에 대해 행하기로 결단하신 일에 대한 신학적 설명으로 옮겨가게 된다.

악은 강력한 실제이다.  개인들의 죄의 총합을 넘어서는 것이며, 이원론적 관점으로는 적절하게 이해될 수 없다구약성경은 전체가 다양한 각도에서 하나님이 악에 대해 무엇을 행하시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복음서는 교만이 극에 달한 세상의 정치적 권세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스라엘 자체의 부패에 대해 이야기한다인간의 수준을 초월하는 더 깊고 어두운 힘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선과 악을 나누는 선이 예수님과 그의 친구들을 한편으로, 나머지를 다른 편으로 갈라 놓으며 지나가지 않는다.  그 선은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한 가운데로 지나가고 있다.  선과 악을 가르는 선이 나와 우리 각 사람 모두를 지나간다는 인식과 예수님의 죽음이 '나를 위한 '것이며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나를 대신하는 것이라는 복음의 선포가 교차한다.

하나님이 은혜의 사역을 완성하시면서, 죄인 조차도 죄 없게 되는 때가 올 것이다.  이 미래의 사실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 '들리고' '영화롭게' 되심으로써 현재 우리가 누릴 수 있게 된 용서와 성령 안에서의 새로운 삶을 이미 맛보고 있다.  그리고 성찬식과 십자가가 성례전적으로 확고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성찬식은 용서를 구체화하는 표현이고, 성령 안에서의 새로운 삶을 가능하게 한다.

 

    악이 없어진 세상

악이 완전히 제거된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기 어려운 이유는 바로 악에 대한 우리 생각 자체가 매우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존재론적 이원론의 관점에서 보면, 악이 없는 세상이란 몸을 벗어난 영혼들이 무시간, 무공간의 구름 위에 앉아서 비물질적인 하프를 켜는 곳이다.

 악이 사라진 세계, 미래 세계를 상상하는 것이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천국에 대한 잘못된 인상을 지녀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중적인 이미지의 '천국'이 아니라, 이사야서와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상한다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을 한편에,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다른 한편에 두고 살아야 한다십자가는 성취를 믿으며, 부활은 어떻게 상상할지를 배우며, 기도와 거룩함과 더 넓은 세상 속에서의 행동을 통해 그 둘을 하나로 결합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부활의 약속이 실현된 모습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모두 죽음, 질병, 소멸 같은 것들의 지배를 벗어나게 되리 것이므로, 그들이 받은 새로운 부활의 몸도 그런 것을 경험할 수 없을 것이며, 그들의 도덕적, 사색적, 인지적, 감정적 자아 또한 새롭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갱신 속에서 그들은 완전히, 최종적으로, 자신들에게 행해진 모든 악을 용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지신들도 다시는 악에 의해 영향을 받거나 오염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약속이 실현된 모습이다


악에서 구하옵소서가 어떻게 성취될 것인가?

이 질문에 들어가기 위해 '용서의 본질'을 묵상해야 한다먼저 우리는 악에 대해 이름을 붙이고 직면해야 한다.  악을 비켜갈 수 있는 길은 다른 길은 없다.  악이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라는 가장을 해서도 안된다.  악에 이름을 붙이고 직면할 때, 즉 악과 악을 행한 자의 정체가 규명되었을 때 두번째 조치가 가능하다.  그것은 바로 '포용'이다.  

포용은 나에게 깊은 상처를 입힌 사람을 껴안는 것이다.  물론 그런 후에도 악을 행한 자가 자신의 행위를 그런 빛 가운데서 보기를 거절한다면 이러한 포용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악에 이름을 붙였다면, 그들이 반응을 보이려 하지 않더라도 그들을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다.

누군가를 용서할 때, 그들을 우리의 분노와 그에 따른 결과들로부터 풀어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우리에게 행한 것의 무게와, 우리가 그들을 용서하지 않고 우리의 분노와 괴로움에 집착함으로써 경험하게 된 감정적인 불구 상태로 부터 우리 자신을 해방한다.  그러므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용서이든, 우리가 서로 용서하는 것이든 아니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용서하는 것 까지도 악으로 부터 구원받는 것이다.

 

    현재 삶에서의 용서

악의 문제에 대한 긍정적인 대답은,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새로운 세계, 즉 구속받고 새로움을 입은 사람들이 다스리며 하나님의 지혜와 치유의 질서를 실현하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발견된다.  현 세계에서 존속하는 악의 존재와 권세는 그 새로운 세계를 위협할 수도 없고 거부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용서의 힘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의 악이 낳은 결과들을 피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가 가져오는 기쁨에 동참해야만 실현되는 일은 아니다.  물론 신약성경 전체는 우리가 현재의 삶에서 내리는 선택이,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와 관련된 선택들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실재적이고 영원한 결과를 낳는다고 반복해서 경고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잔치가 우리 없이 진행되는 것을 막을 자격이 없다.  우리는 탕자 이야기의 큰 형처럼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을 권리가 있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이유를 물으실 권리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참석하든 참석하지 않든 살진 송아지는 잔치상에 차려질 것이다.  하나님이 제시하는 대로 잔치 초대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악으로 부터 구원이라는 잔치를 즐기게 된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진정한 용서를 베풀 때, 그들이 그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적대감을 품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더는 그들이 행한 악에 의해 제약을 받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죄를 범한 피조물들을 향해 진정한 용서를 베푸실 때, 그들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더는 그들이 행한 악에 의해 제약을 받지 않으신다.


그리스도인이 현재 이루어야 하는 과업

그것은 종말론을 앞당겨 실현하는 것이다이것은 현재의 삶을 변화시킬 자원을 하나님의 미래로 부터 빌려오는 것이며, 현재 우리를 얽어맨 악의 사슬을 어떻게 느슨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배움으로써, 궁극적으로 누리게 될 악으로부터의 구원을 지금 미리 맛보는 것이다.  

악은 단순히 철학자들의 수수께끼가 아니라, 우리의 거리를 활보하며 사람들의 삶과 가정과 재산을 상해하는 실제이다. 그 문제에 대해 해결잭을 구하는 것은 '왜 악이 처음부터 존재했는가?'라는 질문에 지적으로 만족스러운 대답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 원하시는 치유와, 회복하는 정의가 힘을 발하게 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우리는 궁극적인 실재를 현재의 물질적 시공간 안에서 그리고 인간의 삶과 사회의 혼런스러운 실재들 안에서 앞당겨 실현해야 한다.


우리가 반드시 붙잡아야 하는 통찰

용서가 관용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용서는 결코 관용이 아니다.  용서는 포용성과도 같지 않다.  용서는 개인적인 혹은 도덕적인 무관심과도 다르다.  용서는 우리가 악을 이중으로 진지하게 다루는 것이다.  

용서는 단호한 태도로 악에 이름을 붙이고 악을 치욕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 과정 없이는 용서할 일 자체가 없다.  그 다음으로 용서는, 똑같이 단호한 태도로 악이 처리된 후에 죄를 범한 사람과 적절한 관계를 재개할 수 있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행하는 것이다.  

용서는 우리가 이후에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악으로 하여금 결정하도록 허락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이다.  용서는 그 일어난 사실을 직시하고, 그 일이 우리 사이를 가로막지 못하도록 치워 버리려는 도덕적 의지를 가지고 의식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다.  즉 용서는 벌어진 일이 악하며 단순히 개의치 않을 일로 치부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용서는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를 현재의 삶에서 실현하라는 명령

서로 용서하라는 명령은 우리가 미래에 받기로 약속된 것, 즉 모두가 잘되고 무든 일이 잘되는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를 현재의 삶에서 실현하라는 명령이다.  이미 시작된 종말론적인 삶, 곧 미래의 빛에 비추어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삶을 새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모든 기독교 종말론이 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럼, 우리가 악으로부터의 구원을 맛보려고 미래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살려면 우리는 어려운 문제들에 봉착하게 된다.  

이런 문제들이 진짜 문제들이며, 철학적인 문제들은 단순히 이런 진짜 문제들을 회피할 수 있도록도와주는 연막일 뿐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 용서의 의미를 배우면 배울수록 모두가 잘되고 모든 일이 잘될 것이라는 심오한 신학적 진리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될 것이며 그 실재를 우리의 고통받는 세상 한 가운데서 미리 실현하는 과업을 더 잘 수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후기

악은 우리의 삶과 친숙하다악은 세상에 당연히 존재한다그러나 나는 악하지 않고 악의 영향을 피해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그런데 악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악을 피해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악을 악으로 느끼지 못하기도 하고, 악으로 느끼면서도 악을 행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 속에서 책을 읽기 전의 기대한 것 중 하나는 세상은 악하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세상의 악들을 어떻게 하실 것인가?  하나님의 정의의 칼을 어떻게 드실 것인가?” 하는 것들이었다.  행동의 악 뿐만 아니라 생각과 마음의 악을 어떻게 하실 것인가? 에 대한 기대로 출발했다.

정답을 기대하며 책을 읽었는데, 책은 정답 대신 여러가지 중 한가지의 해답을 주었다그것은 하나님의 정의를 나와 우리를 통해 나타내시고자 하신다는 것이다악의 경계선이 나와 그들 사이로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관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악은 궁극적으로 세상과 함께 한다삶 속에 그대로 둔체 살아간다그리고 그것이 계속 되면 하나님의 정의를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나님의 정의를 나타내시는 것은, 경험하게 하시는 것은 을 구별하고, “의 제약을 받지 않는 삶을 통해서이다그것이 이미 존재하는 악에 대해 하나님의 정의를 나타내는 방법이다

악을 구별하고 악의 제약을 받지 않는 삶을 용서와 포용이라는 단어로 설명한다.   현재의 삶에서 용서와 포용을 통해 악이 존재하지만 악의 제약을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고, 악이 없는 천국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우리의 과제를 던진다.  “악이 왜 존재하는가?”가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 용서와 포용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정의를 경험할 때 실제적인 어려움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의 과제라는 것이다우리의 과제는 삶 속의 실제적인 문제들이다이 문제를 어떻게…,





[ 악의 문제와 하나님의 정의 ] 이슈 & 고민 -신용환목사-


1장/ 악에 대한 2가지 반응 

-하나님을 탓하고 .. 자신을 탓하는 문화이다. 악을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는 것이다. 악에 대한 자세들을 어떻게 다른가? 

- 악은 현실적인 문제이며 악이 오늘의 현실을 관통하고 있다. 


2장/ 하나님은 무엇을 할수 있는가?

- 악은 철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인 문제이다. 

- 현실적인 삶에서 악을 구별하고 악을 처리하는 것이다. 


3장/ 악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하나님

- 내가 있어야할 자리에 예수님이 대신하시는 것의 삶 

- 용서와 성령안에서 새로운 삶을 이미 맛봄 

- 성찬식으로 용서를 구체화하는 표현하고, 성령안에서의 새로운 삶을 가능하게 한다. 


4강/ 악이 없는 세상 

- 천국에 대한 잘못된 인상 / 새하늘과 새땅 

- 악이 세상안에서 여전히 지배하고 있는것 … 

- 포용은 나에게 깊은 상처를 입힌 사람을 껴안는 것이다. 

   용서하는 마음은 우리의 분노와 괴로움에 집착함으로써 경험하게 된 

   감정적인 불구상태로 부터 우리 자신을 해방한다. 


5강/ 현재 삶에서의 용서 

- 새하늘과 새땅 

-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가 가져오는 기쁨에 동참해야만 실현되는 일은 아니다.

- 잔치는 진행할것이다. 잔치초대를 받아들이는 문제는 내게 있다. 

- 하나님은 악에 제약을 받지 않으십니다 

- 그리스도인이 현재 이루어야하는 과업 : 악으로부터의 구원을 미리맛보는것. 종말론 


@ 우리가 반드시 붙잡아야하는 통찰


* 우리의 종말의 삶 경험하는 삶은 바로 용서와 포용이다. 

용서는 관용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용서는 단호한 태도로 악에 이름을 붙이고 치욕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용서는 우리가 이후에 어떤 사람이 될것인가를 악으로 하여금 결정하도록 허락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이다. 용서는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를 현재의 삶에서 실현하라는 명령이다. - 악의 문제와 하나님의 정의(톰라이트)-



<질문과 고민>==============================


The Devil's Advocate (1997)


* 선악과의 문제.. 뱀은 어디어 왔는가?

* 하나님 나라의 이해 ; 회개의 요청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 

   회개를 악의 동기와 이유를 처리하는 삶의 태도 

* 신앙의 출발 죄와 악을 아는 것이고 

  신앙의 성장은 죄와 악을 처리하는 것이다. 

* 구조적인 악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다룰것인가?

* 이미 우리에게 있는 하나님의 나라 아직 우리에게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긴장의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이룰것인가?

* 천국에 대해서 … 천국 한 모퉁이를 맛보는 삶 


   “ 천국은  죄와 악을 한꺼번에 처리하는 하수종말 처리장이 아니다. 

     우리안에서 있는 분리수거를 잘하는 일에서부터 천국을 경험해야한다. “


* 악에 대한 처리와 태도 그리고 선택을 어떻게 할것인가? 

하나님은 세상의 악들을 어떻게 하실 것인가? 

하나님의 정의의 칼을 어떻게 드실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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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방에 똥을 싸고 똥냄새가 나는데. 

우리는 똥 치울 생각은 하지 않고 

똥을 누가 쌌나 ?만 고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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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실체를 고민할때… 흔히 존재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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